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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9:10:42

부흥 카페

부흥카페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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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종류 네이버 카페
매니저 버섯모듬
개설일 2004년 9월 18일
회원 수 83,425명
(2024년 11월 14일 기준)
랭킹 열매 3단계
주소 파일:네이버 카페 아이콘.svg

1. 개요2. 명칭3. 운영사
3.1. 약력3.2. 부흥길드(2000 - 2004)3.3. 역사카페로의 전환(2005 - 2006)3.4. 11.25 사태(2007)3.5. 그 이후 쇠퇴기 (2008 - 2010)
3.5.1. 정치파벌화3.5.2. 타 커뮤니티와의 충돌
3.6. 개혁과 부흥(2011 - 2019)3.7. 2019년 임시체제 돌입과 9.20 급진 개혁3.8. 매니저 vs 스탭 갈등 사건
4. 부흥 학회와 학술 발표회5. 성향6. 문제점
6.1. 정치질6.2. 스노비즘 문제
6.2.1. 네임드 회원 간 친목관계6.2.2. 카페 내 글의 오류와 문제
7. 타 커뮤니티와의 관계8. 기타9.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 인터넷역사 관련 커뮤니티 중 하나로, 한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역사 동호회 중 하나. 역사에 관련된 내용을 주로 다루며, 그 외에도 학술이나 문화 또는 시사 관련 이슈도 많은 회원들이 다루고 있다.[1] 네이버에서 역사를 주제로 하는 카페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2004년 9월 18일 디시인사이드 역사 갤러리에서 활동하던 '강희대제'[2][3]가 설립하였다. 본래는 천년의 신화임진록2 확장팩 조선의 반격의 부흥 길드에서 시작했는데, 몇 차례의 과정을 거쳐 역사 카페로 전환되었고, 현재 정식 명칭은 "【부흥】 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이다.

2. 명칭

이름이 기독교에서 즐겨 사용하는 말인 '부흥'이라, 종교적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다는 논의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워낙 오래되었고 이름으로 아직 큰 문제가 없어서 바뀔 일이 없어 보인다. 이름의 유래가 어째서 부흥인지는 최초 카페매니저도 모르고, 게임길드 시절 초대 길드장도 기억하지 못해서 밝혀진 것이 없다. 삼국시대 관련 게임길드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고구려/백제 부흥운동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라고 짐작될 뿐이다.

부흥 카페는 처음 설립될 때에는 천년의 신화를 플레이하는 사람들끼리 모이는 게임 관련 카페로 “부흥 길드”로 불렸다. 이어서 불멸의 이순신 안티 카페, 드라마 칭기즈 칸 팬 카페 등을 타이틀로 내세우기도 하다가, 결국 2005년 12월부터는 '전쟁사'를 주로 다루는 카페가 되었다.

이어서 2007년 9월 11일에는 “【부흥】전쟁의 역사 - 네이버 역사 전문 까페”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래도 이 당시까지 회원들은 주로 역사주제 중에서도 전쟁사 분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밀덕까지는 아니지만, 이는 전쟁사를 위한 별도의 게시판이 있고 무기 사진이나 그림 등을 올릴 수 있게 되어 있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초창기 회원들이 대부분 10~20대(특히 고등학생부터 군필 이상까지)의 남자이니 그럴 만도 하다.

2007년 9월 전체적인 의견을 수렴하여 카페 이름에서 “전쟁사”라는 부분을 떼어냈으며, 메뉴 중에서도 전쟁사 부분을 축소시켰고 전쟁사 주제 편중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들어 역사 전반을 다루는 카페로 바뀌었다. 2008년 8월에는 “【부흥】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로 바꾸었다. 2007년 2월 5일에 이미 대표 카페로 선정된 바 있다. 이후 같은 이름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3. 운영사

3.1. 약력

역대 카페 매니저의 목록 및 주요 사건을 정리한 것이다. 괄호 안의 일수는 Wolfram Alpha로 계산한 재임 시작일부터 종료일까지의 기간이다.

3.2. 부흥길드(2000 - 2004)

태고의 시대 부흥의 시작
때는 2000년 초반 RTS게임(실시간전략) 중흥기로 길드활동이 유행이라 게임유저들의 길드 형성과 가입 등이 많았던 시기였는데 부흥도 2001년 1월 게임 천년의 신화라는 게임길드로 탄생하였었다.부흥 초대길드장 근황인삿말 부흥카페 초기 게시글을 보면 길드전이나 길드 개최 게임대회에 대한 게시글들이 대부분인 것이 이 때문이다. 나중에는 게임유통사인 H.Q.Team에서 임진록2와 확장판인 조선의 반격의 개별 베틀넷을 통합하면서 천년의 신화 게임 길드에서 HQ팀이 유통하는 모든 RTS게임을 통괄하는 길드로 나아가게된다.

당시 게임을 플레이하는 연령대가 대부분 미성년자거나 저연령 청년층이었기 때문에(80년대 후반 - 90년대 초반 생년), 길드 회원 역시 공부나 생업종사 등의 사유로 회원이탈이 잦았다. 마찬가지 이유로 길드장 교체도 잦았는데, 처음 길드장 교체 때는 정상적인 합의 하 승계가 이루어졌으나, 3대 째에는 30대 중반 성인 직장인이 나이를 이용해 그럴만한 권한이 없음에도 게임회사와 전화연락을 해서 길드장 직위를 임의로 받아 횡포를 부리는 등, 게임 길드시절에서도 집단운영에 정치적인 알력과 불협화음이 존재했었다. 초대 카페장인 강희대제는 2대 길드장 재임기인 2001년 9월에 부흥길드에 가입하였다.[4] 이후 길드장이 3대에서 4대로 승계되고 길드장이나 주요간부들의 잠적으로 4대 재임시절 길드가 망했다는 루머가 있어서 길드원 대량 탈퇴가 있었는데 강희대제는 탈퇴하지않고 소속을 유지했다는 공로로 전임 길드장의 지시로 부길드장에 임명된다.

2002-2003년간 국산RTS가 RTS장르의 열풍으로 인해서 게임전문방송에도 중계가 되고 우승상금도 500만 원에 달하는 대회가 종종 열리고 프로게이머도 개입하는 등의 인기를 얻으며 잘나가는 듯 했으나, 2003년 말부터 MMORPG장르의 약진과 다른 장르 게임들의 등장, HQ팀 개발 RTS의 인기 감소, 유통사가 HQ팀에서 삼성 조이온으로 바뀌면서 투자와 관심이 저조해지는 등의 영향력으로 게임이용자들이 급격하게 감소하게되고, 게임길드로서의 부흥의 활동인원도 급격하게 줄어들게 된다.

이에 따라 2003년 연말 당시 4대 길드장이었던 Sophiste는 대학진학으로, 부길장이었던 강희대제는 게임 리니지를 하느라고 잠적한 상황이었다. 공백기에는 투마사라는 유저가 권한대행으로 길드장 행세를 하고 있었는데, 원래는 평회원이고 길드내에서는 별권한이나 권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길드장이나 부길드장등의 주 간부 회원들이 활동을 접은데에 비해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었고, 뭣보다 독립도메인으로 열었다가 요금미납으로 폐쇄된 길드홈페이지 대신에 네이버 카페로 길드 홈페이지를 이전한 것이 컸었다.

최초 길드가 성립되던 2001년 당시 게임유통사인 HQ팀에서 게임길드의 정식 승급조건이 회원수 6명 이상에 자체 운영 길드 홈페이지 및 웹사이트를 갖추는 것이어서 최초 부흥길드의 홈페이지는 지금과 같은 네이버 카페가 아니라 자체 도메인이 있는 독립 홈페이지였었다. 그러나 2003년 말부터 게임자체의 인기가 사그라들고, 길드 간부들도 생업이나 학업등의 이유로 활동을 그만두면서 홈페이지 도메인 서버 유지비용의 지불도 문제여서 나중에는 독립 도메인 홈페이지는 사라지게 된다.

그러다 2004년 올림픽 개최전에 길드장인 sophiste와 부길드장인 강희대제가 차례로 복귀하고, 자신들의 허가없이 권한대행을 한 회원 투마사에 반발하여 직위를 강등하고, 투마사가 운영하는 네이버 카페에 반대하여 강희대제가 이시민의 건의를 받아들여 네이버에 부흥 길드 카페를 만들어서 정통성확립을 시도하는데, 그것이 네이버 부흥카페의 시작이다.

게임회원들의 이탈과 인기저조 그리고 MMORPG인 거상의 약진등으로 게임길드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게임종목을 임진록2+조선의반격에서 거상으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카페장인 강희대제의 참여저조 및 거부로 무산되었다.

3.3. 역사카페로의 전환(2005 - 2006)

부흥실록 2권 순수의 시절
부흥실록 3권 투멘타이 나비효과

부흥은 이전까지 단순히 게임길드였으나, 총대를 매고 단체내 영향력이 늘어난 강희대제는 부흥을 몰락해가는 게임커뮤니티로 묵혀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초대매니저는 2005년 5월부터 디씨인사이드 역사갤러리, 네이버 밀리터리, 군사무기 카페, 다음 토탈워 카페등에 진출하는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활동이 점차 두드러지는 동시에 학술카페로서의 홍보활동을 시작한다. 이런 영향인지 2004년 말부터 부흥카페도 이름을 바꾸고 전쟁사 전문카페를 표방하게 된다. 그와중에 카페장 강희대제가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을 비방하면서 공식홈페이지에 쳐들어간다거나, 안티카페에서 활약하면서 활동을 넓히고, 카페를 드라마 안티 카페나, 팬카페등으로 바꾸는 등 잦은 변경과 시행착오등이 있었고, 카페 게시물을 카페지기인 강희대제 거의 혼자서 올리는 등의 침체기 등이 있었다. 네이버 지식인등지에서 활동하는 투멘타이에 대한 반투멘타이 활동에도 참여하였는데, 세계왕실 이야기 카페 회원들과 이시기에 교류를 하게되어 카페에 섭외 및 초대하게되었다.

카페 매니저 강희대제가 2005년 연말과 2006년 연초에 활동이 많았고, 그 활동에 힘입어 2006년 초부터 카페 가입인원과 활동도 점차로 증가하게 된다. 그러면서 게임 길드 출신 외 회원의 수가 늘어나게되고, 게임길드로서의 성격은 점점 희석되었다. 공교롭게도 강희대제 개인신상상으로 2006년 즈음에 고3이 되어 활동량이 줄어들던 시기에 카페가 활성화되기 시작했고, 2006년 9월경 네이버 카페 메인화면인 카페스토리에 부흥카페 홍보로고가 박히면서, 카페회원이 그달에 2배로 늘면서 대형카페로서의 정체성이 이때부터 정착하게 된다.

3.4. 11.25 사태(2007)

2006년 말 급격히 인원이 팽창한 부흥 카페는 각종 분쟁과 부침(浮沈)을 겪었다. 특히 2007년 벌어진 잦은 '정변'의 와중에는 일종의 임시 체제가 들어서기도 했는데, 이 시기에는 레오폴트, 달의 시, 베오울프, jagsjj 등이 차례로 매니저를 맡았다. 이 2007~2008년의 기간에는 운영을 놓고 벌어진 권력다툼과 일부 기득권을 가진 회원의 배타성이 두드러졌고, 이것은 부흥 카페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악화된 원인이 되었다. 대표적인 분쟁으로 초대 매니저 강희대제와, 그와 친밀한 관계이던 히엔, 베오울프(곰늑대), 송태조조광윤 등의 쿠데타 시도가 실패하여 오히려 축출된 속칭 "11.25 사태"를 들 수 있다.

부흥은 네이버 카페 메인에 광고가 된 이후 인원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2006년 연말을 기점으로 급격하게 성장세를 보이고 있었으나, 정작 초대 매니저 강희대제는 2007년이 되자 대학교 입학으로 활동이 뜸해졌고, 그 공백기에 초창기 정보교류와 멤버교류를 주로하였던 세계의 왕실이야기카페 정회원들의 역할과 활약이 많아졌다. 이들은 활동량이나 질면에서 카페 운영에 대한 영향력이 가장 컸고, 일부 회원은 특히 레오폴트는 타회원들에 대하여 배타적인 활동도 두드러졌다. 특정회원과 이들과의 분쟁이 짙어지는 몇차례의 소동이 있었는데, 이때즈음 존재감이나 활동량이 급격히 줄어든 강희대제는 사실상 영향력을 상실하여 동년 9월에 자진 하야하게된다.

그러나 2007년 2달뒤인 11월 베오울프와 강희대제, 히엔은 세계의 왕실이야기 카페[5] 출신(이하 '왕실카페 파벌' 또는 '왕실파') 운영진을 몰아내기 위해 앨런비 같은 다른 운영자들과 공모하였으나, 권력을 잡자 자기들 셋을 제외한 나머지 다른 운영자들까지 모조리 강퇴시키는 배신을 저질렀다. 하지만 강퇴된 사람들이 세컨닉으로 들어와 항의하자 개중에 몇몇에 대한 복위 논의 중에 자기들끼리 의견이 갈리어 공중분해되기 시작했다. 가령 히엔은 애초에 행적에 문제가 많았던 것은 물론이고 앨런비와 크게 갈등을 빚었으나 레오폴트에게 우호적인데다 왕실파벌 전체와 행동을 여러번 같이한 바 있고 강희대제는 이런자와 친분을 이유로 중용한건 물론이거니와 레오폴트나 왕실카페 회원들과의 관계가 적대인지 우호적인지 애매모호했으며, 최종결정권자가 된 베오울프는 전자의 요청으로 총대를 매고 개입하였지만 피아의식이 불분명한 이들을 중재하면서 관계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여 당황했다. 송태조조광윤은 후발주자로서 "총대를 자신이 매겠으니 모든 일을 내가 꾸미고 지시했다고 말하라"(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에도)고 까지 하며 적극적인 참여 및 실행의지를 내보였으나, 윗선 3명의 우유부단함과 지지부단함으로 실제로 성명외에 아무 행동도 취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일반 회원들이 이상황을 보고 오히려 크게 거부감을 느끼자 실권을 잡았던 베오울프가 집권을 포기하고 레오폴트에게 이양하며 사태는 마무리된다.링크1, 링크2

이때 반항이 생각 이상으로 커서, 부흥이 어쩌다 이리 추잡한 꼴이 되었냐는 한탄 여론이 넘쳐났고 최고 원로이자 중도파 회원이었던 학생(닉네임이 학생이다)이 대노하여 앨런비와 아케치를 비롯한 당사자 중 몇몇에게 한마디씩 했을 정도였다. 이런 와중에도 초대 매니저 강희대제의 지인이자 원로급에 속했던 이시민은 철저한 중립 행보와 규정 준수로 파벌 싸움으로 운영진과 유명회원 몇몇이 갈려나가던 와중에도 전혀 언급되지 않아 여러 가지로 강희대제와 많이 대비되는 행보를 보였다. 이 이시민 회원은 지금까지도 잘 활동하고 있다.

3.5. 그 이후 쇠퇴기 (2008 - 2010)

3.5.1. 정치파벌화

이후 계열의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배타적인 권력형 운영진을 구성하였다. 왕실카페 파벌의 주축들이 채팅방에서 당시 부흥 내 주요 인사들에게 공개적으로 부흥에 대한 충성 선언을 하는 것을 요구하자 다들 받아들였을 정도로 이들의 입김이 거셌다. 사회주의 국가의 자아 비판 같은 행동이었으나, 정작 이러한 일을 진행한 왕실카페는 당시 기준 공산주의는 물론 좌익 계통에 대해 백안시했다.[6]극과 극은 통한다 이런 일련의 행위들로 인해 처음에는 나름 왕실파에 우호적이었던 중도파 전체가 반-왕실파로 기울게 된다.

2009년을 돌아보며 - 부흥실록에 덧붙여

왕실파의 만행으로 인해 카페가 파행 운영되면서 이에 대한 반감들이 누적되고, 점차 파벌과 관련이 적은 운영진이 늘어나면서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한다. 결국 2009년 초에 왕실파 인물 하나가 광범위한 사료 조작과 표절을 이유로 축출된다. 닉네임은 루돌프. 추가로 부흥 내 권력 다툼도 한 원인이었다. 본래 루돌프는 왕실파로서 왕실카페 매니저 레오폴트와 매우 친밀한 관계이자 실질적인 브레인이나 다름없었는데, 레오폴트가 부흥 매니저로 집권한 이후 왕실카페 출신들의 비중이 늘면서 그의 영향력도 자연히 이전보다 커졌다. 그러나 부흥의 유명회원 중 하나였던 jagsjj(쟉스즈)와의 논쟁에서 사료 조작이 들통났고, 추가로 스스로 평소에 시카고 대학교에서 유학 중이라고 주장했으나 아이피 추적 결과 이는 거짓임이 밝혀졌고, 채팅방에서 이를 추궁당하자 자신과 관련된 일들에 대해 해명을 하겠다고 해놓고는 블로그를 폭파하고 네이버를 탈퇴. 한때 원로 중 한 명인 학생이 이 사실을 밝혀냈다고 알려진 적이 있었으나, 학생은 이러한 카페의 알력 다툼에 관여한 사실이 없다.

2009년 8월에는 욕설 사건으로 같은 계열의 인물 하나가 축출된다. 바로 2대 매니저이자 왕실파의 대표 레오폴트였다. 루돌프의 정체 탄로 이후 충격에 빠져 반폐인이 된 채 카페 운영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가 신고에 허망하게 날아가 버렸다. 다른 운영자들과 관계가 원만하던 때나 왕실파가 활발하던 시기에는 규정을 위반해도 가벼운 처벌로 넘어가거나 몇 차례 쫓겨났어도 재가입하였지만, 그의 영구 강퇴는 루돌프 사건으로 인해 왕실파 전체가 위축되어 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이렇게 11·25 사태 이후 권력을 잡았던 핵심 관계자가 축출되고 왕실파 역시 자중지란으로 무너지면서 정치판을 방불케 했던 운영진의 파벌 다툼과 권력 남용은 일단락되었다. 역사 카페 역사가 무슨 얼음과 불의 노래

당시 부흥 카페의 모습은 커뮤니티가 친목질에 빠졌을 때 어떻게 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일부 기득권을 지닌 회원들이 신규 회원을 배타적으로 대했다. 이 당시 사건들은 당시부터 지금까지 부흥을 알고 있던 다른 역사 커뮤니티들이 두고두고 부흥을 놀려먹는 껀수가 돼 버리고 말았다. 특히 부흥 극초기 마광팔과 책사풍후, 나광팔이 부흥에서의 규정 위반 행위로 영구탈퇴 이후 세컨이나 수하들을 잡입시켜 부흥 내에서 선동 행위를 벌이곤 하여 당시 신규 유저들에 대해 기존 유저들이 다소 민감하게 대하는 경향이 생겼는데, 문제는 도를 넘어 사이버상의 언어 폭력과 정치질, 친목질을 아무 관계 없는 신규 유저들에게 가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상당수의 신규 유입 회원들은 순수하게 역사에 관심이 있어서, 혹은 환빠들의 정보를 접했지만 이게 과연 맞는 걸까 하면서 네이버 최대 역사 카페였던 부흥에 왔다가 상기한 일을 겪고 상처만 안고 타 역사 커뮤니티로 가거나, 아니면 반감으로 완전히 환빠가 돼버리는(!)인외마도 루트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생겨났고, 몇몇 부흥 회원들의 부흥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타 역사 커뮤니티에서 잦은 충돌을 일으키는 일도 생겨났다. 그러다 저런 일이 생겨났으니 당연히 부흥에 대한 인식은 그야말로 곤두박질...

또한 파벌 사이에서도 다시 파벌이 생기며 규칙의 적용에서 예외적으로 특혜를 받는 폐해가 나타났다. 해당 파벌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압박을 가해서 스스로 탈퇴하게 만들거나 꼬투리를 잡아 추방시켜 버렸던 것이다. 사실상 이 때문에 해당 파벌이 아닌 사람들은 대부분 쫓겨나거나 해당 파벌 눈치나 봐야 했다. 설령 운영진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해당 파벌이 아니고, 해당 파벌에 협조하지 않았음에도 버틸 수 있었던 사람은 최고 원로급이라고 할 수 있었던 학생과 쟉스즈 둘뿐이었다. 이 두 사람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지식과 뛰어난 글솜씨로 부흥뿐만 아니라 인터넷 역덕후 전체에서 거의 성인으로 대우받는다고 해도 될 수준의 초거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왕실파 내부에서도 두 사람을 존경하는 사람들이 공공연히 있었을 정도니 둘이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후폭풍이 엄청나게 커질 게 뻔해서 건드리지 못했다. 하지만 학생은 카페의 정치적 문제에 아예 관심 자체를 두지 않았고, 쟉스즈는 레오폴트를 일시적으로 쫓아내는 등(왕실파를 등에 업고 바로 복귀했다.) 약간 관심을 가졌지만 그래 봤자 가끔 견제나 하는 수준이었기에 왕실파가 날뛰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애당초 두 사람은 부흥 카페 내부에서의 정치적 분쟁에 관심 자체가 거의 없었고, 휘말리기도 싫어하던 편이었다. 최고 원로급들이나 되어서야 해당 파벌에 협조하지 않고도 살아남는 게 가능했다는 건 당시 부흥의 파벌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잘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이런 문제들이 누적되어 2009년 이후 카페가 쇠퇴하고 이미지가 급격히 나빠지게 되었다. 또한 오랜 정변과 숙청, 세밀한 규칙과 집행과 주변 커뮤니티와의 갈등을 통해 통해 까칠하고 폐쇄적이라는 이미지가 굳어져 왔으며, 회원들 중에서도 이런 부흥의 모습에 질려 카페를 탈퇴하거나 사실상 접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3.5.2. 타 커뮤니티와의 충돌

11.25 사태로 몇몇 회원들이 축출된 후, 예테보리 등 남아있던 부흥 유명회원 중 몇몇이 주축이 되어 부흥을 살려 보기 위해 이전에 축출당한 앨런비, 아케치 등의 인물들에게 재가입 요청을 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케치는 2009년에야 복귀했고, 앨런비는 불발로 끝났다. 이는 당시 매니저였던 예테보리가 앨런비, 아케치 등의 복귀 추진에 소극적이었던 탓이 크다. 당시 부흥의 여론은 구 인사 복권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일각에서는 앨런비 등 역시 파벌을 조성하고 과거 세력과 합종연횡한 인사라며 쫓겨났다는 이유만으로 복권할 이유가 없다는 견해도 적지 않았다. 더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과 부흥 카페의 관계는 상당부분 희미해진 상황이었다.

여기에 당시 사회 분위기가 2000년대 중후반을 지나면서 사람들이 점차 역사에 관심이 멀어질 때라 신규 회원 수 감소까지 겹쳐 과거의 영광의 부활은 더욱 멀어져 버렸다.

이런 오랜 정변을 거쳐 부흥 카페의 활동량은 계속 떨어졌고, 2008~2010년의 일 평균 게시글 수는 2007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2009년 하반기부터 2010년 상반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규칙이 개정되었고, 카페 운영자가 신규로 모집되는 등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정변'은 없었다. 매니저 불신임 논란이 있었던 정도.

하지만 2010년은 동시에 다른 카페들과의 충돌이 잦았다. 부흥이 쇠퇴할 동안 급속도로 성장한 네이버 역개루 카페와 2010년 4월·6월·7월 3차례에 걸친 분쟁이 대표적이다. 이 기간을 이용해 책사풍후를 위시한 환빠들의 지속적, 대대적인 공격이 있기도 했다.[7] 이후 시간이 지나고 여러 카페와 서로 교류·대응하지 않게 되었다.

다음 토탈워 카페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나 2008년경 분쟁으로 인해 사실상 관계가 단절됐다. 토탈워 카페의 분쟁의 실질은 레오폴트가 다음 토탈워 카페에서 욕설을 퍼부었던 데 있다. 더욱이 부흥의 11.25 사태 이후 쫓겨난 사람들이 간 곳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었다. 슬프게도 이곳은 현재 부흥을 떠나 정착한 유민들이 부흥에서 했던 행동을 반복하는 바람에 부흥의 암흑기를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

일단 다음 토탈워와의 분쟁은 2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1차는 레오폴트에게 숙청당했던 회원이 토탈워를 방문한 레오폴트를 공격한 게 발단이 된 것이라 쌍방 과실로 여겨져 크게 문제가 안 됐다. 하지만 2차는 레오폴트가 가만히 있던 다음 토탈워 카페에서 갑자기 난동을 부리고 욕설을 하기 시작해 토탈워 회원들의 분노를 샀다. 거기다 다음 토탈워 카페의 운영진들은 자신들 중 한 명이 부흥에서 레오폴트가 규정을 위반했다고 신고했던 사건(해당 신고는 유야무야됐다.)에 대한 보복으로 2차 사건을 일으킨 것이라고 판단해 더더욱 분노, 이런 일이 한 번만 더 생긴다면 끝장을 보겠다는 공식 선언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 2차 욕설 사건으로 안 그래도 회원들이 떠나가며 치명타를 여러 번 맞았던 당시의 부흥은 분노한 토탈워 측 회원들이 대량으로 이탈하면서 마지막 치명타를 맞았다. 당시 운영진 중 한 명이 후일 밝힌 바에 따르면 운영진들은 왕실파든 비왕실파든 이 사건으로 인해 카페의 쇠락과 활력 감소가 가시화되면서 원흉인 레오폴트에게 크게 실망했다고 한다.

3.6. 개혁과 부흥(2011 - 2019)

운영진은 이런 침체된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정치와 종교 주제의 언급을 허용하는 등 개방적 정책을 시도했다. 우선 2010년 10월에 전격적으로 정치 주제 금지가 풀렸고, IF 글이나 정치/종교 논쟁 때문에 다소 강경해졌던 정책도 다시 완화되었다. 또한 2011년 1월 인터파크의 제안으로 3월부터 제휴를 시작했으며 무료 서평 이벤트도 간간히 들어오게 되었다.

2011년 3월 20일, 9대 매니저 예테보리가 부당하게 추방된 회원들에 대한 제재 기록을 삭제·무효화한다는 공지를 올렸다. 이전까지는 추방된 회원들이 직접 복권을 신청해야 했으며, 현재까지도 그 제도는 이어진다. 다만 조직적으로 카페를 공격했던 등 일부 블랙리스트 회원들에 대한 제재는 유지되었다. 그러나 이미 카페나 블로그의 "역덕 1세대"들의 화력이 쇠퇴 분위기라 돌아온 (당시의) 유명회원은 많지 않았으며, 돌아왔어도 활동이 많지 않았다.

부흥 카페는 초기부터 규칙으로 환단고기, 규원사화를 전제로 한 발언 자체를 금지했다. 이 규정은 2009·2010년 적지 않은 규칙 개정에도 변하지 않는 기준이었다. 이 당시 부흥 카페의 운영자들은 굳이 비견하면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처럼 특정 고발에 대한 처벌에 찬반을 밝히고 대표로 선정된 운영자가 결정문을 쓰는 관습을 채택하고 있었다. 심지어 내부 결재 역시 공무원 사회의 공문 수준으로 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러나 이 규정이 2011년 4월 운영자 송군(현 피스키퍼)에 의해 '부흥 헌장'이라는 8개조의 규정으로 간소화되면서, 무조건 환빠라는 이유만으로 처단되지는 않게 되었다. 비록 지나치게 분방한 회원들의 활발한 활동이 문제로 지적되었으나, 큰 틀에서 부흥 카페는 증가세가 되었다.

이후로도 정치글 허용 여부는 오랜 논쟁거리였다. 2012년 당시는 19대 총선18대 대선 전후로, 박정희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논쟁성 발언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논란거리를 우회하려면서도 정견을 피력하려는 우회상장 시도 역시 적지 않았다. 2013년에 정회원 이상을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 허용하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다만 2014년에는 정회원 이상만 이용할 수 있는 특정 게시판에서만 이를 언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우려나 키배가 종종 벌어짐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는 큰 문제 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밖에 무단 전재, 지나친 뻘글, 지역드립 등은 확실히 어그로를 끌고, 심하면 운영진의 철퇴(영구추방)를 맞는 건 변함이 없었다.

2011년 9월 9대 매니저 예테보리가 13개월의 임기를 마쳤고, 10대 매니저로 당시 부매니저였던 솔저가 올랐다. 이후 본좌급 회원들의 유입으로 역사 카페로서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실제로 부흥은 여전히 다른 역사 커뮤니티(이글루스 등)들의 침체 분위기에 비해 활황을 띠었다. 사실 역개루, 왕실카페 등 역사 관련 카페들에 가입한 회원들이 상당수 부흥 카페에도 가입해 있다.

2013년 10월에는 11대 매니저 송군이 취임했다. 송군은 2009년 말 운영자, 2011년 3월 부매니저로 오른 이래 운영 실무의 상당 부분을 도맡은 인물로, 당시 역개루 카페와 리젠율을 비교하면서 활동량을 끌어올리는 데 매진하였다. 부흥 카페에 규칙 기반 운영을 도입하고자 실제 법률가인 모프맨, 한울리카[8]를 사법심사위원으로 위촉하여 부흥 카페 규정에 대한 유권해석을 담당하게 하기도 하였다.[9] 최소 6년간 행정 분야에 대한 송군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으며, 업무량 측면에서 그를 대체할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던 것도 그의 장기 집권에 기여했다.

2016년 2월 부흥 학회가 출범했다. 정기적으로 학술 발표회를 실시하며 관련 정보는 카페에 공지되었다. 다음 문단에 자세한 정보가 있다.

2016년 4월 5일 버섯모듬이 12대 매니저로 부임하였다.

2016년 7월,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으로 인해 촉발된 메갈리아 사태와 관련하여 부흥에서 논쟁이 일어나 수많은 회원들이 논의에 참여하여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논의의 대상이 메갈리아페미니즘은 물론 심지어 진보 정당에 이르기까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회원들이 카페 본연의 주제인 역사보다는 시사 안건을 주제로 활동하는 일이 훨씬 많게 되었다. 특히 대다수 사이트와는 다르게 정치적 올바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있던 카페 분위기 때문인지 혐오사이트인 메갈리아를 직/간접적으로 옹호하는 몇몇 유명회원이 존재했고, 이들이 지속적으로 장문의 새글을 올리거나 댓글에서 메갈리아를 옹호하는 막장짓을 반복하며 분쟁을 계속 일으켰다.

메갈리아를 단순 옹호하는 것도 아니고 한남충은 혐오발언이 아니라거나 메갈리아는 혐오집단이 아니라는 등, 사회에 기여한 점이 있다는 등의 노골적인 옹호 발언이 계속 나왔다. 당시 증거 자료 이러자 운영진은 논쟁이 지나치게 과열되는 것을 막고 카페 본연의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 해당 사건 관련 언급을 일주일간 금지했다. 금지령이 풀리자마자 논쟁이 다시 시작되었고, 3일 뒤에 금지령이 부활했다. 한 달쯤 뒤에 이 금지령은 해제되었으나, 이후에도 미투 운동 등 성대결로 치달을 수 있는 주제들이 자주 언급되면서 운영자가 나서서 중재를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사실 운영진이 취했어야 할 올바른 방법은 혐오집단 메갈리아를 옹호하는 자들을 카페 규정에 따라 제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옹호하는 인원 상당수가 네임드 회원이었던데다가 정치적 올바름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카페 분위기 때문인지 이들을 제재하는 것이 아닌 단순 주제 동결로 그쳤고, 결국 이때의 상처는 시간이 흐른뒤에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메갈리아와 워마드의 실체가 드러날 대로 드러난 2018년 미투 운동 당시에도 활동이 왕성한 네임드들 중에서는 메갈리아를 옹호하거나 강자에 대한 약자의 혐오는 혐오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등 별로 바뀐 것이 없다.

2016년 9월 4일 부흥 명사특집 연재 프로젝트가 발표되었다.

2018년 4월 6일 피스키퍼가 13대 매니저로 재선 부임하였다.

2019년 들어서는 시사토론, 현대국제정세, 사건사고, 지리 같은 비역사적인 주제로만 집중적으로 활동하는 회원들, 단순한 투표글이나 IF놀이 위주의 활동에 대해 자제를 요구하는 분위기도 종종 드러나고 있다. 운영진은 대체로 좀 더 학술 지향적인 카페를 만들고 싶어하는 성향인 듯.

3.7. 2019년 임시체제 돌입과 9.20 급진 개혁

카페가 분란을 조장하는 정치글과 무의미한 게시물에 침식되어 가고 있으니,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류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BeNihil이라는 유저가 정치사 규정을 개정하자고 건의하였고 운영진의 마음에 들었는지 단번에 스텝, 더 나아가 부매니저의 직책을 얻었다.

이 부매니저의 목표는 카페의 비정치화, 역사 전문화였다. 이에 따라 9월 20일 전례가 없는 특단 조치가 단행되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활동회원 이상[10]을 제외하고 1945년 8월 15일 이후의 모든 정치와 시사 언급 금지[11][12]
2. 활동회원 이상의 등급을 가진 회원을 전부 정회원으로 평준화
3. 활동회원 등업 기준을 높이고 학술부 인증을 필수로 추가
4. 운영진이 참가하는 학술부를 신설해 양질의 글을 인증함.
5. 신고 게시글 요건의 간소화

아예 정치/시사 언급을 전면 금지했다고 볼 수 있다. 정회원에서 활동회원으로 승급하려면 역사 전공자가 아닌 이상 힘들다고 볼 만큼 상당히 까다로운 심사과정을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1945년 이후라도 가벼운 드립으로써는(ex. 심영, 스탈린) 현대를 언급할 수 있는 듯하다. 유저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이나, 규제 폭탄이나 특정 계급의 공고화라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3.8. 매니저 vs 스탭 갈등 사건

매니저 피스키퍼는 10월 6일 글을 올려# 직무 불성실을 인정하며 사임 의사를 밝혔는데, 현행 임시체제가 후임 매니저를 선정하는 데 부적절하다고 말하며 후임 매니저 선정에 대한 카페 차원의 공론화를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스탭 코긁과 부매니저 BeNihil은 12일 글을 올려, 현 매니저가 독선적이며 무능하다고 밝히고 매니저 즉각 사임을 촉구하였다. # 이미 현재 매니저가 밝힌 사임 의사대로 후임 선정 절차를 진행할 예정인데 매니저가 독단적으로 운영진 불신임 의사를 밝혔다는 것이다. 또한, 개혁 과정에서 매니저가 태만적인 자세를 보였다고 증언했다.
그러자 매니저는 글을 올려 개혁을 무효화하겠다는 말은 아니라며, 종전의 합의대로 후임 매니저를 선정하자고 설득하는 글을 올렸다.# 이는 운영진과 매니저의 대립 및 불신이 표면으로 등장한 중대 사건이라 볼 수 있다.

4. 부흥 학회와 학술 발표회

부흥 카페에서는 2000년대 후반부터 회원 간 친목 도모 목적의 정모만이 단발적 이벤트로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매우 간헐적인 행사에 가까웠으며 이마저도 카페의 운영이 개인적 친목 차원에서 기계적인 행정 시스템으로 변화하면서 2011년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열리지 않았다. 이후 회원 간의 비공식적 친목 도모는 유명회원이었던 골리앗을 필두로 '고기당'이라는 이름 하에 월간 모임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구성원들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장기적으로 지속되지 못했으며, 카페 내에서는 파벌을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던 것이 2015년 8월 즈음 카페 내 채팅방에서 다시금 정모를 개최해야 하지 않겠냐는 이야기가 돌았다. 마침 남아도는 카페 마일리지의 활용 방안을 모색하던 매니저 피스키퍼는 이를 듣고 이왕이면 유익한 모임을 해야 한다며 부흥 카페 차원의 세미나를 추진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마침 역사 밸리 세미나가 부흥 카페에 공식적으로 홍보되었으며 이는 일정한 자극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천산용 회원의 총괄 하에 물의 백작 회원이 모집을 맡아서 세미나가 구체화되었다. 게다가 동사원형애꿎은 역덕들에게 모에선을 씌운 역사 밸리 세미나 후기 만화가 기름을 부으면서 세미나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대거 늘었다. 결국 모집일로부터 불과 12일 후에 개최된 세미나는 당시 확보된 모임 공간이 부족할 정도의 흥행을 거두었다.

그 결과 뒤풀이 자리에서부터 2차 세미나에 대한 건의가 나오기 시작해 운영진이 구체화에 들어간 가운데, 1차에서 실무를 맡았으나 정작 개인적 사유로 자신은 참여하지 못했던 물의 백작 회원의 기획으로 1.5차 세미나가 추진되었다. 이어서 천산용 스탭의 총괄 하에 2차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이러한 세 차례의 세미나로 말미암아 기존까지 단발성 이벤트에 가깝게 개최되었던 부흥 세미나는 카페의 공식적인 시스템으로 체계화, 정례화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현연 스탭이 회칙을 비롯하여 발표회의 개최와 운영, 시기 등 학회의 갖가지 체계를 마련하였다. 그 결과 아마추어 학술 모임으로써 틀이 잡히게 된 부흥 학회는 비로소 2016년 2월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이후 부흥 학회는 명칭을 부흥역사문화학회로 고쳤으며 참여 독려를 위해 지방에서 학회를 개최하거나 발행물을 판매[13]하는 식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카페의 지원을 최소화하고 발표자에게 일정한 보상을 하기 위해 지역별 장소 대여 프로그램과 판매 수익의 분배 등의 제도를 도입하며 개선점을 모색하고 있다.

2017년부터 주제에 따른 발표를 지향하고 있으며, 발표회 외에도 학술답사회를 개최하고 있다. 2019년 말부터 이름을 사파역사문화학회로 개명하였고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5. 성향

전체적인 정치 성향은 극단적인 것을 배격하는 것이다. 특정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위한 역사학도 배격한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면 제재를 받는다. 특히 한국 현대사/정치, 현대사회 문제 쪽으로 그런 경향이 강하다. 2015년 여름, 여러 사건으로 인하여 운영진은 "역사 카페 본연의 자세"라는 캐치프레이즈 하에 현대 사회의 민감한 이슈와 정치사안 등에 대한 발언을 제재하고 역사 연재물을 시작하는 등 주로 해방 전후 이전의 역사에 집중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선 찬반이 갈리는 편이나 현재는 그럭저럭 잠잠해진 편.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중심으로 조금씩 줄타기는 나타난다.

대체로 민족주의, 반일주의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성향이 주를 이룬다. 이런 환경이기에 오늘의 유머, 일베저장소 같은 데서 친일파, 좌빨로 오해받을 주제도 어느 정도 이야기가 가능하다. 이런 환경이기에 일베저장소 같은 데서 빨갱이, 좌빨이라고 욕 먹고 오늘의 유머에선 친일파라고 욕먹기 때문에 여러 커뮤니티와의 관계가 험악했다. 다만 몇몇 극단적 사이트 출신의 입김으로 인해 사이트 출신으로 차별하는 것은 금기시되고 있다. 규칙상으로도 일베와 오유를 벌레라고 욕해도 차단당하고, 실제로 차단된 사례가 있다. 쉽게 말해 '일베충이세요?'와 같은 발언이 허용되지 않는다.

일본에 대한 시선이 그렇게 우호적인 것은 아니지만, 일방적인 국까에 대해서는 혐오하는 성향이 강하다.

전반적으로 현대의 국제 정치에 있어서는 범서방권에 친화적인 성향이 강한 편이다. 특히 현대의 중국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선이 강한 반면 일반적인 한국인들에게 아오안에 가까운 중화민국에 대해서 유독 호의적인 반응이 많다.[16] 다만 현대 중국정부에 비판적인 것이지 착짱죽짱같은 혐오표현에는 부정적이며 또한 근대 이전의 중국에 대해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특히 부흥내부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조선이 영향을 많이 받은 송나라명나라는 카페에서 매우 호의적인 글이 많다. 국까에 대해 혐오하는 성향이라 대중들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달리 조선은 좋은 평가를 받지만 그것에 비해 이상하게 역시 우리 역사인 고려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거나 많이 깎아내려지는 편인데 이는 각종 커뮤니티에서 조선을 까는 용도로 고려의 장점을 내세우는 글들이 많은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슬람권에 대한 시선도 썩 좋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중동/이슬람이 다수인 지방들의 역사에 있어서도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카페이며, 예멘 난민 사태를 기점으로 올라오는 회원들의 논쟁을 보면 낙인찍기, 극단주의에 대한 금기 때문에 오히려 타 대형 커뮤니티들에 비해 반중동/반이슬람 감정은 꽤나 온건한 편. 그 외에 밀덕들도 제법 많은 공간치고는 러시아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편이다.

민족주의 성향을 배제하는 성향이 강한 편이다. 이것은 부흥 초기의 환빠와의 논쟁과 국뽕을 혐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종합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박유하, 이영훈 등의 학설에 대한 견해나, 조선총독부 청사 해체에 대한 견해 등이 일반 대중들의 인식과는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지나쳐서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옹호하는 경향을 보이는 회원들도 일부 존재한 적 있다. 요지는 언론 보도로 알려진 드러난 몇몇 자극적인 문장만 가지고 책 내용을 판단하지 말고 읽어 본 다음 판단하라는 것. 그러나 박유하 개인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책의 내용을 옹호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비판 역시 카페 내에서 적지 않게 나왔다.[17]

그 외에도 이영훈 같은 학자의 식민지 근대화론을 무조건 비판할 게 아니라 '식민지 시혜론'으로 나가지 않는 이상 진지하게 접근할 것을 주장하는 회원들도 많다. 다만 아베 담화에 대한 발언이 나오자 실망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영훈의 근대에 대한 해석이 갈리는 것과 달리, 한국 현대사 부분은 비판하는 게 주류다. 특히 자기 영역을 벗어나 이승만과도하게 옹호하는 점이 비판의 이유다.

환빠 같은 경우에는 웃고 넘기는 경우가 다수이지만, 계속해서 댓글이나 글로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면 제재를 받는다.[18] 애초에 2015년 들어서는 엔간한 환Q들은 죄다 끝장이 났고 환빠도 점점 세가 줄어가기에, 환빠 개그는 있어도 진짜 환빠가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동북아역사재단 논란이 될 때 유사역사학자들을 비판하다 식민사관 소리를 들었다. 2015 개정 교육과정 당시 역사 교과용도서 국정화에 찬성하는 세력들을 비판하니 좌파, 진보집단이란 소리를 들었다. 고대사 관련 유사역사학자들, 그러니까 이덕일 류는 식민사관 및 강단사학 추종 사이트로 몰고 근현대사 관련 유사역사학자들은 좌파 소굴이라 몬다. 그냥 여기저기서 다 까인다. 좌좀은 수꼴이라 까고, 수꼴은 좌좀이라 까고... 그렇긴 한데 전체적으로 다른 오래된 인터넷 커뮤니티처럼 보수적인 편이다.

동해-일본해 표기문제에 관해서는 압도적으로 동해가 한국의 땡깡이고 국제적으로 일본해라는 명칭이 옳으며 이에 대해 반발하는 것은 극단적인 한국의 반일감정으로 인해 생긴 국민의 수준 문제이며 일본해라는 명칭은 영토문제와 무관하다는 입장이라는 의견이 강하다.

또한 국내 커뮤니티 중에서는 반종교적인 성향이 그나마 옅은 커뮤니티이기도 하다. 종교적 근본주의에는 부정적이지만, "종교는 인류의 해악" 투의 극단적 반종교 역사관의 글은 적을 뿐더러 '제대로 알아보기나 하고 까냐, 감정에만 휩쓸린 모습이 수준낮다' 같은 반응이 나오는 편이고, 종교사(史)에 관한 정보들도 적지 않게 올라온다. 이는 20세기 이후 사학계에서의 중세 유럽에 대한 재인식과, 교회의 역할에 대한 재평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대체로 해당 시대나 국가에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생각이나 정서, 가치관 등 정신적인 부분보다는 경제적인 부분에 관심이 더 모아져 있고 때로는 더 나아가 그것만을 절대적인 가치로 두는 듯한 댓글도 종종 볼 수 있다.

그 외에 미시사에 대한 정보도 상대적으로 다른 커뮤니티보다 더 잘 접할 수 있기는 하지만 확실히 카페의 주 관심사는 정치사와 경제사에 모아져 있는 편.

간혹 논쟁이 붙을 시 서로 역사관이 다른 상대방을 분탕종자, 어그로 종자, 편파적인 인간으로 몰아가는 무개념 회원들도 있으나, 이런 회원들 대부분은 다른 회원들에게 지적받고 비판받는다.

2016년경부터 여성사와 성평등 등 젠더 이슈로 카페가 지나치게 과열되어 일반적인 역사글이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했고 결국 일시적으로 언급 자체가 금지되기도 했다. 당시 메갈리아, 넥슨 성우 사건, 성평등, 미러링에 관한 글과 이로부터 직간접적으로 파생되어 분란 발생의 소지가 있는 모든 글의 작성이 금지대상이었고, 매우 포괄적으로 적용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비하의 함의가 있든지 혹은 젠더 문제로 판단될 경우 제재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과거 정치 관련 글 작성 금지와 동일하게, 게시판이 비역사 주제로 뒤덮이는 것에 대한 우려의 측면이 컸다. 그러나 이 금지는 이후 해제되었으며, 2017년 기준 현대사 게시판이 아닌 곳에 현대사나 정치를 언급하면 정지를 먹는다는 규칙 외에는 더이상 페미니즘 이슈는 해당사항이 없다. 하지만 규칙상으로만 금지가 해제됐을 뿐 여전히 관련 글이 올라오면 해당 주제에 관심이 큰 일부 회원들에 의해 백여 개의 댓글이 기본으로 달리는 수준이며 대부분 빠르게 동결된다. 2018년 대한민국의 미투 운동에서 상황이 재현되어 또다시 카페를 뒤엎다가 다시 일시적 언급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2018년 기준으로 사실 정치 이슈로 분쟁이랄 것은 별로 없고 오히려 페미니즘 관련해 분쟁이 훨씬 자주 발생하고 있는데, 일부 회원층이 상당히 강경한 페미니즘, 메갈리아 성향을 가지고 있어 논쟁이 터질 때마다 종교 이슈 이상으로 서로 결론이 나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하는 과열된 키배가 벌어진다.

도종환 문체부 장관의 유사역사학 논란을 두고 학계의 의견을 반영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으며 이로 인해 이덕일 등 유사역사학자들의 입방아에 오른 것이 다시금 화제가 되었다. "역사 카페에서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는 사람들은....다 식민사학계"

정치글의 경우 활동회원들에 한해서 허용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문제가 뭐냐면 허가된 사람들만 정치글을 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허용할 거면 전부 허용하든가 금지할거면 전부 금지하는 것도 아니고 허용된 사람만 올릴 수 있게 해준다면 특정 성향의 글만 올라올 가능성이 높다. 가끔씩 올라오는 정치글들을 보면 오래전에 죽은 권력에 대한 비판이나 올라오지 살아있는 진보 진영 권력에 대한 비판은 거의 올라오지 않는다. 이럴거면 아예 전면적으로 금지하는게 나을지도 모르는데 이러한 선택적 허용은 특정 언론의 목소리만 반영하는 권력과 언론의 유착과 비슷하게 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최근에는 행정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한국 현대사 및 정치글의 열람 제한 등급을 올리자는 의견이나 아예 해당 게시판을 없애자는 의견도 보이는 편이다.

6. 문제점

6.1. 정치질

여태 해당 문서를 보면 알게 되듯 부흥카페 내에선 정치질이 매우 극단적인 형태로까지 비화되곤 한다. 애초에 카페 공지에 혁명, 권력, 내각 따위의 말이 일개 카페에서 나오는 걸 보면 갈 데까지 갔다라고 밖에 볼수 없다. 부흥 카페는 일개 카페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카페와는 달리 운영 세력이 급격히[19] 바뀌곤 했는데 이 과정에서 구 운영진이나 이를 옹호하는 일부 회원들이 영구추방 당하며 그렇게 해서 정권을 받은 운영진은 이러한 사태를 스스로 혁명이라고 자축하는 일도 있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짓거리인 듯하지 않은가?
위에서 설명한 11.25사태 때 전 매니저인 레오폴트와 그를 따르던 친위세력에게 영구추방형이 내려졌다. 물론, 신 운영진은 이런 사태에 대해 스스로 '카페안에 만연한 파벌주의 해체'라는 점을 강조했으나 오히려 이 사태를 통해 레오폴트를 지지하던 세력과 다시 새 매니저가 된 베오울프와 이를 도운 강희대제를 추종하는 세력간 골은 더 깊어갔고 일부 멤버는 카페에서 벌어진 '혁명'에 진저리를 느껴 탈퇴까지도 하였다.[20]

카페 내에선 점잔을 빨면서 외부에선 온갖 찌질이짓을 하는 것도 유명하다. 이에 대해 디시 역갤이나 역블에서 온갖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예시를 들자면 앞서 언급한 레오폴드는 이 일이 있고 나서 사과문을 게시해 영구추방조치가 풀렸다. 하지만 이후 디시 역갤에서 '쿠데타는 실패하고 카페는 안정을 되찾았다. 역사 카페의 feudalism는 끝나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만만한 놈이 아니다.''나의 레어에 오지 말고 니네끼리 놀아라'란 글을 남기었고 이를 단초로 다시 영구 추방 당했다....인줄 알았으나 이후 다시 사면조치를 받고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사실 여태 부흥 네임드 회원들은 영구추방 당해도 잘만 사면 받곤 하는데 일반회원 중에선 그런 이가 단 하나도 없는 걸보면 해당 카페의 강약약강 정신이 얼마나 극단으로 까지 치달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바이기도 하다.

6.2. 스노비즘 문제

카페 활동의 허들을 높이는 부흥카페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 대체로 활동적이며 올드비 유저들 중 독설가가 많으며 독설도 아니고 그냥 '무례함'인 경우가 태반이다. 태도의 문제를 지적받으면 대개 '환빠들에게 너무 시달린 경험이 있어서 (모든) 익명에게 친절해야 할 필요도 모르겠고 의무도 없다'라는 식으로 나오는데, 상대가 환빠인 게 명확한 경우 정도가 아닌 이상 그냥 핑계다. 누군가 학술적으로 어설픈 의견을 꺼낸다면 강하게 때로는 비난이나 조리돌림에 가까운 어조로 비판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리고 단순한 오류 지적으로 충분할 글에 유사전문가들이 현학적인 표현을 동원해 비아냥거리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따라서 자신의 '역사 내공'이 충분히 쌓여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대다수 유저들은 유사전문가들에게 가차없는 공격을 당하는 데 거부감을 느껴 눈팅에 머물고 있으며,대체로 이런 성향에 대한 푸념글이 올라오면 평소에 너무 뭔가 쓰기 무섭다는 여러 뉴비들의 댓글이 달린다. 카페 내부에서도 이런 성향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글이 여러 번 올라왔지만 제도로 해결할 성격의 문제가 아닌지 마땅히 근본적인 해결책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전공자들이 많아서 진입장벽이 높다는 이미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정작 다른 역사 커뮤니티와 마찬가지로 전공자가 그렇게 많지도 않다. 후술할 몇 차례의 정변 이후 대놓고 어그로성으로 활동하는 게 아니면 말이다. 하지만 부흥 카페에서는 어그로의 기준이 조금 남다르다. 학술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내용을 올리거나 질문을 하는데 내용의 수준이 낮거나 성의와 존중을 보이지 않는다거나, 역사와 무관한 글을 지속적으로 올리는 것도 준어그로 급으로 취급받는다. 대놓고 실력이 허접하다고 까이는 일은 별로 없다. 전반적으로 유사전문가들의 스노비즘 성향이 매우 강하며, 역사와 무관한 글에도 이런 성향의 어투로 쓰인 댓글이나 게시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지나치게 초보적인 글이나 명백히 잘못 아는 이야기가 올라오면 다소 신경질적인 반응도 나오고, 때문에 카페 회원 규모에 비해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는 눈팅러의 비중이 높다. 심할 때는 그저 간단한 질문을 올렸다는 이유로 비아냥거리는 어투로 공부나 더 하고 오라는 식의 답변들만 올라올 때도 흔하다. 이 때문에 카페 내부에서도 이러한 점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중이나 카페 스텝이나 전 매니저조차, 매니저의 경우 특정 시점을 기준으로 조금 유해진 편이나 그 이전에는 객관적으로 봐도 문제가 있다 싶을 정도로 비아냥거리고 공격적인 어투가 베여 있었다. 이런 성향의 덧글을 달 정도이니 상당히 일상화된 문제이다. 또 카페의 활동회원들은 대체로 지식이 많고 양질의 글을 주로 쓰는 만큼 자칭 학술 카페로서의 부흥을 지향하여 밈이나 유머, 역사와 관련성이 적은 게시글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거나 비아냥거리는 덧글을 자주 달기도 한다.

따지고보면 학식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보통' 수준의 회원이 대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가 생기고 고착화된 이유는 학술적인 카페 분위기의 특성상 일부 회원들이 카페 취지에 맞으면서 심도있는 역사 포스팅을 많이 올리면서 자연스럽게 '네임드'가 되고 게시판의 지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즉 지식이 권력화되는 면이 있다는 것. 심지어 매니저를 비롯한 스태프들도 자연히 카페 내에서 네임드들로 채워지기 때문에 위와 같은 현상이 쉽게 고쳐지지 않고 있다.

위에서도 키배 관련 언급이 있었듯이, 카페의 전반적인 분위기상 사소한 부분에서도 지적이 들어오고 논쟁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잦다. 건전한 토론으로 그치면 문제가 없겠으나 직접적인 욕설만 없다 뿐이지 비난과 조롱이 난무하는 다툼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타 커뮤니티들과 비교해도 굉장히 많고, 많은 일반 회원들은 이런 날선 분위기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회원 수가 많고 오래된 카페이니만큼 대학원생이나 연구자들도 존재하지만 이들이 네임드가 되면서 일반 회원들에게도 가혹한 잣대를 들이밀며 카페를 폐쇄적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원래 상위 1%의 네임드들이 시작했던 이러한 논문 심사위원단을 방불케 하는 냉소적 어투가, 전문성이 없는 그냥 일반 회원들에게 전염이 되어버렸다는 것인데, 전문성을 요구하는 글이 아닌 단순한 볼거리 관련된 글에도 '냉소적인 컨셉'을 쓰는 일반 회원들이 너무 증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간혹 이 사람 혹시 술 먹고 시비거는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무리하게 기계적인 냉소를 표출하여 신입 회원들의 멘탈을 터뜨리는 컨셉충들이 증가해 점점 소수의 고인물만 열심히 활동하고 대다수는 유령회원과 비슷한 눈팅족으로 전락시켜버려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다.

그리고 이 컨셉충들이 간혹 진짜 전공자들에게 냉소를 표출하고, 날선 분위기를 들이대는 경우도 최근 나타나고 있다.

6.2.1. 네임드 회원 간 친목관계

이미 위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새롭게 유입된 회원이 좀처럼 활동하기 쉬운 카페가 아니다. 이 카페의 문제점 중 하나는, 특정 회원이 게시글을 쓰면, 그 게시글을 가지고만 논하는 게 아니라 이전에 썼던 게시글까지 다 염두에 두고, 다른 회원들이 그 회원에 대한 감정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물론 특정 회원이 논쟁이 과열될 위험이 있는 글을 반복적으로 올리는 경우도 정말 많았고, 계속 분란을 일으키는 목적의 글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특정 회원들의 활동을 주시할 때도 분명히 필요하지만, 이 카페는 유독 회원들끼리 기존에 해왔던 행적 양상을 보고 서로를 평가하는 경향 이 강하다. 이는 카페가 상당히 폐쇄적으로 돌아간다는 비판을 피하기가 어렵다. 게다가 최근에는 부흥 오픈채팅방이나 학회의 비중이 늘어나 오래 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들이 카페 외적으로 활동을 넓히며 이러한 문제는 더욱 심해졌다. 거기에 시간이 지나며 네임드 회원들의 연령대도 높아지면서 점점 소수만의 카페가 되어가는 것도 심각한 문제이다.

차라리 디시인사이드를 비롯 다른 커뮤니티들은 익명으로 여러 글을 쓰기에,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뉴비들이 유입될 수가 있으며, 대형 커뮤니티의 경우 특정 회원의 네임드화를 아예 경계하는 데 이곳은, 이미 여러 회원들끼리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경우도 많다. 아예 대놓고 댓글에서 서로에 대한 일상적인 안부를 묻는 경우도 있을 정도.

또한 회원들의 부적절한 행동을 제재하는 임무를 맡는 운영진이 지나치게 일반회원들처럼 어떤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 대해서 개인적인 의견이나 선호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 최근에 외국 현대사마저 언급을 금지한 후에는 조금 줄어들었지만, 과거에는 카페 스탭조차도 개인의 주관적인 정치적인 의견, 역사적인 사건에 관한 견해 등을 거침없이 표현했다. 물론, 일반적인 커뮤니티를 생각하면, 운영진도 당연히 일반회원들과 같기에, 자유롭게 활동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볼 수 있겠만, 문제는 역사라는 여러 의견이 나올 수 있는 주제를 다루는 카페에서 다른 회원을 제재할 권한이 있는 회원이 이렇게 자주 개인적인 의견을 보일 필요가 있냐는 것. 예를 들어, 에펨코리아 같은 거대 축구 종합 커뮤니티에서 아예 운영진이 본인은 리버풀 팬이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른 커뮤니티 같은 경우 스탭은 카페업무에 외에 다른 활동은 좀처럼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이 뿐 아니라 회원 신고글에 댓글을 열어 둘어, 분쟁과 무관한 회원들도 댓글을 달게 하는 것도 긍정적인 효과가 큰지에 대해 지적이 있다. 여러 회원들이 댓글을 다는 것도 신고글 목적에 정말 부합하다기 보다는, 일방적인 조리돌림으로 비춰지는 경우도 많기 때문. 그래서 아예 대부분의 카페 같은 경우 신고글의 경우 분쟁당사자나 스텝을 제외하면 다른 회원들은 댓글을 못 달아놓도록 막아버리는 경우도 많다.

6.2.2. 카페 내 글의 오류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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램지어가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재일조선인 역사왜곡 논문을 게재하고 부흥카페에서 이 사건을 한국언론의 왜곡이라 허위선동한 사건에 대한 내용은 존 마크 램지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재일조선인 논문 게재 논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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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카페 내의 문제점은 존 마크 램지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재일조선인 논문 게재 논란에서 드러났는데 학계의 전문가들이 국제적인 학회지에 지적해 국제적으로 학계에서 인정받은 문제를 한국 언론의 허위보도에 의한 낭설이란 허위정보로 선동한 사건이다. 당시 선동의 주체가 카페운영자(카페매니저)였고 회원들도 동조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해당 선동은 비회원에게도 노출된 선동이라 국제적인 학계 사정은 조사하지 않고 카페 네임드인 운영자의 허위선동을 사실이라 퍼트렸다.

네이버 대표 역사카페 '네임드'인 운영자와 역덕들의 선동은 당사자인 이진희 교수도 알게됐다. 대표 역사카페의 운영자와 역덕들의 선동은 존 마크 램지어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재일조선인 논문 게재 논란에 작성되고 당사자인 이진희 교수가 2021년 5월 8일 까지 작성된 문서 기준으로 나무위키 문서가 사실임을 인증했다.역덕들의 관동대지진학살 학계왜곡 심하다고 - 군사 마이너 갤러리, 아카이브

부흥카페 내부의 오류와 정보들의 신뢰성에 타격을 준 사건이다. 나무위키:기본방침/토론 관리 방침 문서처럼 국제적인 학계논문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나무위키 회원들도 조사할 수 있는 내용이고 실제로 '램지어의 관동대학살 논문에 대한 비판이 한국 언론에 의한 낭설'이란 부흥카페의 선동을 최초로 반박한 집단에는 나무위키 기여자들이 있었다.

7. 타 커뮤니티와의 관계

대체로 반나무위키 성향이 강하다. 역사 주제 카페라 나무위키의 역사 관련 문서와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21]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나무위키는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할 사이트라는 댓글이 일반적으로 나오며 판 깔고 나무위키 본격적으로 조리돌리는 글은 카페의 꾸준글 레파토리 중 하나다. 그런 와중에도 나무위키에서 24시간 상주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문서 사유화를 일삼는 것을 숨기지 않는 회원도 있어서 불편한 동거가 진행 중이다.

역사라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 사실은 다른 커뮤니티들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지는 않다. 일반적인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으레 가지고 있는 문제점[22] 역시 가지고 있다.

8. 기타

9. 관련 문서



[1] 그러나 시사토론, 국제정세, 사건사고, 지리 같은 비역사적인 주제로'만' 지나치게 활동하는 회원들에 대한 거부감, 지적도 2019년 들어 종종 드러나고 있다.[2] 이하 네이버에서 주로 사용한 닉네임을 인물의 명칭으로 사용한다.[3] 이 사람은 부흥에서 물러난 이후 송가연 전기톱 살해 협박 사건을 일으켜 벌금 200만 원을 선고받았다. 본인의 사과문 어떤 이들은 많이 안타까워했으며, 어떤 이들은 쌤통이라고 비웃었다. 이후로 해당 유저는 한동안 인터넷에서 자취를 감췄다가 현재는 인터넷에서도 본명으로 활동하고 있다.[4] 게임아이디가 우연하게 부흥강희제였다는 이유로 채용되었다.[5] 한때 동맹이었으나 11.25 사태로 인하여 사실상 관계가 단절되었다. 현재는 완전히 몰락해서 레오폴트 혼자 가끔 글 올리는 카페가 되었다.[6] 왕실파의 수장 레오폴트는 굉장히 공격적인 우파 성향으로 악명 높았다.[7] 그와 나광팔·마광팔은 현재까지도 가입 불가 목록에 올라 있다.[8] 사법시험 공부량.jpg 라는 짤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한울리카가 부흥에서 밝히길 부흥에 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에 대한 정보를 기록으로 남기려고 했을 뿐인데 그곳에 올린 자신의 사진들이 전국적으로 펴졌다고 한다.[9] 활동기간은 2014년 5월부터 2015년 8월까지이다[10] 기존: 정회원 이상[11] 기존: 남한의 역사[12] 정치 시사와 무관하면 금하지않는다. 실제로 '지하드'의 종교적 의미를 다룬 글에 2017년 라마단 광고와 테러 희생자 등의 언급이 있음에도 금지되지 않았다.[13] PDF 파일 혹은 인쇄물 둘 중 하나를 택하여 얻을 수 있다.[14]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열린 첫 모임이다.[15] 이 때부터 대주제를 설정하였다.[16] 다만 회원에 따라서는 중화민국에 꼭 호의적인 사람만 있는것은 아닌것이 중화민국장제스에 대해서도 "마오쩌둥만큼은 아니었을지언정 그도 결국은 독재자였다."라고 악평하는 사람도 있고 한국이 예전에 중화민국보다 가난하던 시절 때 중화민국에서 은근히 한국을 무시했던것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17] 참고로 박유하의 연구에 대해서는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크다. 유시민 같은 100명이 넘는 지식인들이 검찰의 기소는 과하다는 의견을 냈을 정도.# 다만 박유하 문서에 나와있듯 비판론도 만만치 않은 실정. 사실 유시민 등의 의견도 책의 내용보다는 과연 민족감정을 이유로 개인의 연구의 자유를 국가에서 강제로 억압해도 되는 것이냐는 관점에서 제기한 면이 크다.[18] 대부분의 환빠들은 녹음기여서 증거 미제시로 처벌된다.[19] 그러니 카페 내의 정상적인 내규를 통하지 않고[20] 그들이 말하는 혁명이 얼마나 위선적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모든 혁명의 명분은 국민의 구원인데 카페로 치환하자면 그 국민을 위한단 혁명 때문에 더 이상 살지를 못해 해외로 도피하는 격이다.[21] 타 커뮤니티, 유튜브 등. 종종 부흥 카페에 찾아온 신규 유저도 나무위키의 영향을 받은 경우가 보인다.[22] 인터넷 특유의 폐쇄성, 감정적인 표현, 시간 많고 한가한 놈이 무조건 이겨먹는 구조, 목소리 크고 정치질이 탁월해 동원력이 높은 소수가 여론을 장악하는 구조 등[23] 2019년 이후 이러한 문제점은 사파역사문화학회, 오픈톡방 등 카페 외적 교류가 확장되고 그곳에서 소수의 사람들 간의 교류가 늘어남에 따라 더욱 심화되었다 내가 세계사갤에 오게 된 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