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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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제2차 보어 전쟁의 마페킹 포위 때 보어 코만도 |
1. 개요
보어 전쟁만큼이나 영국의 전쟁사상 승자에게나 패자에게나 참혹한 결과만 가져다 준 전쟁도 없다. 영국은 전장에서 일시적으로 겪은 전술적 패배는 극복했지만, 영국 제국주의가 입은 도덕성과 이데올로기적 위상에 대한 타격은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역사상 전례없는 강도로 유럽의 계몽된 지식인 사회 전반에게 비난받은 이 전쟁은 심지어 40년뒤 나치스가 그 끔찍한 시설을 세우고 '강제수용소 (concentration camp/konzentrationslager)'라고 불렀을 때 어떤 역사적 선례에게 뒤틀린 존경심을 표하고 있는지 유럽인들은 똑똑히 알았을만큼 후세의 기억에 영국의 만행을 각인시켰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그 시대 반전 진영이 그랬던거처럼 보어인들 또한 일방적으로 좋게봐줄순 없다. 보어인들은 민족독립이란 고귀한 이상을 위해 싸웠지만, 이 뿐만 아니라 타인종에 대한 배제, 황금에 대한 탐욕, 원주민에 대한 박해란 추악한 면 또한 그대로 유지하며, 오히려 강화되었다...
결국 반백년 세월이 흘러 현대에 와선 이 전쟁은 당사자들 모두에게 처참한 유산만 남겼다. 당시 영국령 케이프 식민지 총독이었던 밀너경은 본인이 원했던 전쟁은 얻었지만 그의 비전과 계획은 모두 실패했고, 보어인들은 독립을 잃었지만 반대급부로 문명과 진보를 얻지는 못하였으며, 야만적인 방법으로 남아프리카의 주인이 된 영국인들은 조만간 다시 쫒겨나거나, 보어인들에게 뜨내기 이방인(uitlander) 취급이나 받게 될 예정이다. 그리고 그 당시 서로 죽일듯이 전쟁하던 프리토리아의 가장 속좁고 인종차별적인 보어인 지주들과 요하네스버그의 가장 탐욕스런 영국계 광산 회사들은 이제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사이좋게 손잡고 남아프리카 땅의 절대 다수인 흑인 원주민들을 핍박하며, 다른 사람도 아닌 얀 스뮈츠가[1] 현 정권에게 '파시스트스런 방법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고 있다'라고 비난하고 있는 판국이다. 이 전쟁을 일으켰던 밀너나 보어인들을 믿고 자치권을 수여한 캠벨배너멘이[2] 무덤에서 이 꼴을 봤으면 도대체 뭐라고 할까?
영국의 역사학자 AJP Taylor, BBC 맨체스터 보어 전쟁 50주년 특집 기고 에세이
결국 반백년 세월이 흘러 현대에 와선 이 전쟁은 당사자들 모두에게 처참한 유산만 남겼다. 당시 영국령 케이프 식민지 총독이었던 밀너경은 본인이 원했던 전쟁은 얻었지만 그의 비전과 계획은 모두 실패했고, 보어인들은 독립을 잃었지만 반대급부로 문명과 진보를 얻지는 못하였으며, 야만적인 방법으로 남아프리카의 주인이 된 영국인들은 조만간 다시 쫒겨나거나, 보어인들에게 뜨내기 이방인(uitlander) 취급이나 받게 될 예정이다. 그리고 그 당시 서로 죽일듯이 전쟁하던 프리토리아의 가장 속좁고 인종차별적인 보어인 지주들과 요하네스버그의 가장 탐욕스런 영국계 광산 회사들은 이제 언제 그랬냐는 듯 서로 사이좋게 손잡고 남아프리카 땅의 절대 다수인 흑인 원주민들을 핍박하며, 다른 사람도 아닌 얀 스뮈츠가[1] 현 정권에게 '파시스트스런 방법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고 있다'라고 비난하고 있는 판국이다. 이 전쟁을 일으켰던 밀너나 보어인들을 믿고 자치권을 수여한 캠벨배너멘이[2] 무덤에서 이 꼴을 봤으면 도대체 뭐라고 할까?
영국의 역사학자 AJP Taylor, BBC 맨체스터 보어 전쟁 50주년 특집 기고 에세이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북부 지역에서 발생한 전쟁들로 제1차 보어 전쟁(1880년~1881년)과 제2차 보어 전쟁(1899년~1902년)로 나뉜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흑인이었지만, 이 전쟁은 주로 백인이었던 보어인들과 영국계 백인들의 싸움이었다. 영국군은 말할 것도 없이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였고 전 세계에서 현지 원주민들을 상대로 기관총으로 무쌍을 찍고 있었지만 보어인들도 같은 백인이라 맥심 기관총 같은 당대의 첨단 무기로 무장해 싸웠고 근대적 전술, 기마술에 능숙하고 남아프리카의 거친 자연에서 수렵이 일상이던 사람들이라 영국군이 매우 고전했다. 이들 외에 남아프리카에 살던 대부분의 흑인들은 보어인들의 억압에 대응하여[3] 영국을 지지했지만 그들은 전쟁에 개입할 여력이 없었고, 양쪽 다 공식적으로 흑인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군인이나 독자적인 집단으로서는 큰 활약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양쪽 다 대부분의 노동자 및 비전투 요원들은 흑인들이었고, 결국 2차 전쟁 말기에는 영국 측에서 대략 1만명의 흑인들을 무장한 군인으로서 운용한 것을 인정하게 된다. 다만 이는 영국의 초토화 및 강제수용소 정책으로 인해 지역이 막장화되자 먹고 살기 위해 군대에 지원할 수밖에 없는 사정도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내 인종갈등으로 크게 흑인과 백인의 갈등인 흑백갈등, 흑인들의 민족별 갈등인 흑흑갈등, 백인들의 민족별 갈등인 백백갈등이 있는데, 이 셋 중 백백갈등에 해당하는 게 바로 보어 전쟁으로 인한 보어인과 영국계 백인의 갈등이다.
2. 배경
남아프리카 지역은 원래 네덜란드 식민지로, 네덜란드가 나폴레옹 전쟁 와중에 프랑스 점령하에 들어간 틈을 타 1806년에 영국이 합병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또한 법적으로 원래 백인 이주민들, 즉 보어인들과 계속해 갈등이 생겼고 영국이 통치하는 지역들을 떠나 새로운 지역들을 개척하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케이프 식민지 동쪽의 나탈리아를 개척하려 했으니 이곳도 영국에게 합병된 후 북쪽으로 떠나 트란스발 공화국, 그리고 오라녜 자유국을 세우게 된다.영국은 이 두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해주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남아프리카 지역이 여러 식민지, 아프리카 왕국 및 공화국들로 나눠진 것이 차후 불안의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여겨 북쪽의 두 공화국을 합병하려 했다. 이를 더욱 부추긴 것은 북쪽 지역에 다이아몬드 및 금이 발견된 것과 베를린 회담 이후 급속히 진행된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이었다.[4]
3. 제1차 보어 전쟁
제1차 보어 전쟁 | ||
날짜 | ||
1880년 12월 20일 ~ 1881년 3월 23일 | ||
장소 | ||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북부 지역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보어인| ]] 저항군[[틀:깃발| | ]][[틀:깃발| ]][[대영제국| ]]
병력 | 민병대 2000명 | 식민지 주둔군 3000명 |
결과 | ||
보어인들의 승리, 트란스발 공화국의 재독립 |
그 후 1879년 영국은 줄루 왕국을 침공하여 합병하였다. 그러나 독립을 원하는 보어인들과의 마찰은 계속되었고, 결국 1880년에 보어인들은 폴 크뤼거를 사령관으로 하여 전쟁을 선포하여 영국군과 전쟁을 치른다.
그리하여 벌어진 전투가 1881년 2월 27일에 벌어진 마주바 언덕 전투(Battle of Majuba Hill)였다.
이 전투에서 양 측은 비슷한 400여명끼리 맞붙었는데 결과는 영국군의 참패였다. 영국군은 전사자만 해도 92명, 부상자, 포로까지 전군 절반을 넘었던 반면 트란스발군은 달랑 1명이 전사하고 부상자 5명이었다.
이후 양군은 다시 전투를 벌이는데 트란스발군의 총전력은 3천명 수준이었고 영국군은 1천2백명 수준이었다. 영국군은 400명의 전사자를 내고 대패했다. 반면 트란스발군의 피해는 41명 수준이었다. 트란스발군의 지휘관은 피트 주베르(Piet Joubert) 대장이었고 영국군의 지휘관은 조지 콜리(George Pomeroy Colley) 소장이었는데 콜리 소장은 전사했다. 1881년 3월 23일 프리토리아 협정을 맺어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의 독립을 재인정했다.
당시 영국 육군은 레드 코트라는 별명답게 전투복이 빨간색이었고 탄입대나 방서 헬멧, 각종 장구류도 옛날 그대로 눈부신 하얀 색이라 딱 표적처럼 보여서 저격하기 좋았다고 한다. 다만 영국군에서도 위장의 중요성을 깨달은 부대는 커피나 홍차 찌꺼기를 구해서 어떻게든 카키색으로 염색하는 데 혈안이 되기도 했으나, 똥별 중에서는 이걸 갖고 채찍형에 처하기도 했다.
영국에서 만든 영화 마주바 전투에서도 이런게 확 드러난다.
언덕에 배치된 영국군은 척 봐도 잘 드러난 반면...
트란스발 측은 언덕에 숨으면 잘 안 보이던 옷차림이 많았다.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카키색 군복을 입은 게 바로 스코틀랜드 부대인데 전통 옷차림인
물론 영국군도 현지에서 노획한 커피나 홍차 보급품 등으로 장구류를 갈색으로 물들여서 피해를 줄이려고 했으나 지휘관들의 생각이 나폴레옹 전쟁 시절에 머물러 있어 승인받긴커녕 오히려 채찍 안 맞으면 다행이었다. 게다가 크림 전쟁 당시에도 그랬지만 영국군 지휘관들은 매관매직과 빽으로 자리를 얻은 부패한 사람들이 많아서 휘하 병사들을 무수히 죽음으로 몰아넣어도 자리를 지키거나 형식적인 군법회의에서 자술서 한두 장 쓰고 넘기는 일이 태반이라, 자기들 체면 위해 병사들 수십명 더 죽는 정도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4. 제2차 보어 전쟁
제2차 보어 전쟁 | ||
날짜 | ||
1899년 10월 11일 ~ 1902년 5월 31일 | ||
장소 | ||
트란스발 공화국 | ||
교전국 | [[틀:깃발| | ]][[틀:깃발| ]][[대영제국| ]]다국적 의용군 |
병력 | 600,000명 | 67,400명 |
피해규모 | ~99,284명 | ~6,189명 |
결과 | ||
대영제국의 승리 |
제2차 보어 전쟁은 1899년부터 1902년까지 발생했다. 20년 전의 전쟁과 달리 금광 등의 이유로 더 많은 영국인들이 남아프리카로 유입되었고 요하네스버그 등에서는 영국인과 영국이 데려온 인도인 등 외국인들이 보어인들보다 더 많아지기도 했다. 이들은 주류세력인 보어인들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았는데 이를 구실로 세실 로즈 등의 제국주의자들은 보어 정부를 뒤엎을 쿠데타 등을 꾸미기도 했다. 1895년에 일어났던 제임슨 습격 사건(Jameson Raid)이 그 대표적인 예. 하지만 로즈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준비되어 있던 요하네스버그'는 결국 봉기하지 않았고 쿠데타 시도는 무위로 돌아간다. 덕분에 로즈는 케이프 식민지 총독직을 사임하게 되었지만, 남아프리카와 로디지아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독일 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는 이 쿠데타 시도를 두고 크뤼거 대통령의 성공적인 방어를 치하하는 전보를 보냈는데 이가 바로 크뤼거 전보(Krüger Telegram) 사건이다. 전보가 더 타임스에 실리자 영국인들은 즉각적으로 반독감정의 물결을 형성했으며 심지어 빌헬름 2세의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마저 이에 유감을 표하기도 했다.
1899년 9월에 영국은 트란스발 공화국에게 영국인을 트란스발의 자국민과 평등히 대하라는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내나 트란스발은 케이프 등에 주둔한 영국군에게 48시간 내에 퇴각하라는 최후통첩으로 답했다.
1차 보어전쟁에서 승리한 후 당연히 영국이 포기하지 않으리라 생각한 보어측은 금과 보석 판 돈으로 무기 구입에 열을 올렸고, 여기엔 크루프 야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1899년 10월 12일 보어인들은 영국의 케이프 식민지 등을 공격했다. 전쟁 초반 영국군은 속수무책이었으며 특히 12월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영국군의 주요 전략은 전열을 갖춘 보병들의 횡대 전략이었는데 보어인들은 민병대 위주의 기병부대여서 진형을 짜지 않고 영국군에게 접근해서 지형을 이용한 기습을 가했다.[7] 12월 10일 스톰버그(Stormberg) 전투에서 영국군은 오라녜 자유국군과 충돌하여 135명이 전사했고 600명이 포로로 잡혔다. 12월 11일엔 1만4천명의 영국군이 킴벌리 공략을 펼쳤으나 참호를 파고 대기하던 보어군에게 당해 120명의 전사자를 냈다. 12월 15일 콜렌조(Colenso)의 피해는 막대했는데 2만1천명의 영국군이 레이디스미스(Ladysmith)를 탈환하기 위해 투겔라(Tugela) 강을 건너던 중에 포격 등에 노출되어 1127명이 전사했다.
이 일로 영국에선 대규모 애국주의 광풍이 불었고, 보어 전쟁엔 엄청나게 관심이 집중됐다. 말하자면 미국한테 밀리고 독일한테 밀릴지언정, 보어한테만은 그럴 수 없다는 위기감이었다. 브리튼 본토의 요먼까지 징집하는 반 총력전 태세를 갖춘 영국은 1900년이 되자 7만 보어군을 상대로 45만 대군을 동원, 프레데릭 로버츠를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대규모 인해전술을 펼친다. 브리튼에서 온 대규모 증원군이 케이프타운에 상륙, 3로 공세를 펼치며 대영제국이 진지하게 제대로 나섰으니 이제 보어는 끝장...이라는 기세도 잠시, 3곳 모두에서 패배한다.(...)
1900년 1월 영국군은 스피온 콥 전투(Battle of Spion Kop)에서 대패했다.[8] 당시 영국군의 지휘관은 찰스 워렌이었는데, 이 전투에서의 패배로 인해 영국 왕립군사학교 역사상 최악의 인물로 찍히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찰스 워렌은 유명한 잭 더 리퍼 사건 당시 런던 경찰 총책임자였는데 이 때도 엉터리 같은 행동으로 수사에 지대한 어려움을 끼쳤다. 결국 이런 비난 속에 1905년 해임되어 한직이나 돌아다니며 3년 뒤 사임하고 이후 보이스카우트 운동을 벌이고 책[9]이나 쓰다가 삶을 마감했는데 1927년 86세로 죽을 때까지 장수했다.
이 전투는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 산이 아닌가봐"로 정리할 수 있다. 찰스 워렌은 위에 언급한 레이디스미스로 가는 길목의 요충지인 스피온 콥을 확보하도록 했다. 병력이 야간에 안개를 틈타서 산을 올라서 진지를 펴고 보니 정작 스피온 콥이 아니라 다른 곳이었고, 그곳은 보어군의 포병 부대[10]가 사전에 조준하고 있던 곳이었다. 독일제 화포로 무장한 보어군 부대는 영국군에게 포격을 가해서 큰 피해를 입혔는데 이 화포는 신형 무연화약을 사용해서 발사시 연기가 나지 않아 영국군은 화약 연기를 이용해서 좌표를 추적할 수 없었고, 결과는 일방적인 포격전으로 흘러갔다. 금과 다이아몬드 등을 독일산 무기 사는데 탁탁 털어넣은 결과였다.
이 와중에도 워렌은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멍하니 있었다. 이 당시 일화로 종군 기자이자 경기병 연대의 장교로 참전했던 윈스턴 처칠이 "상황이 나쁘게 흘러가는데 뭐라도 하시라"고 말하자 워렌은 쓸데없이 간섭한다며 처칠을 끌어내라고 명령했다. 결국 우군인 스코틀랜드 여단의 우회 공격과 탄약 부족으로 보어군이 슬슬 철수하려 할 즈음에야 워렌은 병력을 철수시킨다. 이 당시 보어군의 피해는 전사자 68명, 부상자 267명인데 반해 영국군은 전사 243명, 부상자 1,250명으로 영국군의 완패였다.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잊지 못한 처칠이 신나게 기사를 써 워렌의 무능이라며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도하여 워렌은 무진장 욕먹고 군직에서 잘려 경찰로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찰스 워렌의 실책은 변명의 여지가 있다. 첫번째, '이 산이 아닌가봐' 식으로 전혀 엉뚱한 고지로 올라갔다고 주장하지만, 영문위키나 "The Boer War: A History" (Denis Judd, Keith Surridge) 책의 설명을 보면 둘다 한결같이 찰스 워렌의 영국군은 야간에 제대로 Spion Kop 을 올라갔고 그곳을 지키는 보어인 민병대를 기습 공격으로 밀어내고 점령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문제는 영국군이 실제로는 Spion Kop 의 일부, 그것도 보어인 민병대의 사격에 노출되는 높이가 낮은 일부만을 점령했지만, Spion Kop 을 완전히 점령했다고 착각했던 것이 실수였다.[11] 그것도 엄청난 실수 아니냐고 비난할지 모르겠지만 Spion Kop 전투가 벌어진 때는 지금으로부터 100 년도 더 넘은 정확하게 1900 년이었다. 오늘날처럼 GPS 나 야간 조명탄 같은 것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고, 당시 시대나 상황을 고려하면 지도가 준비되어 있을 리도 만무했다.[12] 게다가 Spion Kop 점령 자체가 야간에 기습 공격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횃불 등으로 시야를 충분히 밝힐 수 있을거 같았지만 없었다.
결정적으로 Spion Kop 점령을 인솔한 사람은 찰스 워렌이 아니었다. 찰스 워렌은 사단장(중장)이었는데 사단장이 직접 고지 점령을 인솔했겠는가? Spion Kop 점령은 찰스 워렌 휘하의 Edward Woodgate 소장이 이끄는 부대가 맡았다. [13] 이런 사실 관계를 싹 빼고 무능한 찰스 워렌이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병력을 이끌고 올라갔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명백한 악의적인 왜곡이며, 허무맹랑한 카더라 얘기들이 나무위키에 버젓히 사실인양 적혀있을 수 있으므로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둘째, 윈스턴 처칠이 보다 못해 한 마디 하자 찰스 워렌이 처칠을 끌어낸 일은 욕먹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윈스턴 처칠은 애초에 민간 특파원으로 남아프리카에 왔고, 1900 년에야 현지에서 장교로 입대하기는 했지만 당연히 높은 계급이 아닌 중위 계급이었다. 전투 경험도 거의 없는 기껏 연락 장교 역할을 하고 있던 새파란 중위 따위가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사단장(중장)에게 이러쿵 저러쿵 한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 아닌가? 찰스 워렌이 무능하니 어쩌니 해도, 만약 그 일화가 사실이라면, 이걸 찰스 워렌을 비난하기 위한 근거로 쓴다는 것은 잘못이다.
셋째, 물론 찰스 워렌이 무능력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다. 애초에 실제 전쟁에서 지휘 경험이 거의 전무한 찰스 워렌에게 중책을 맡긴 것부터가 영국의 실수. 또한 찰스 워렌은 Spion Kop 의 영국군을 과감하게 철수시킨 것도 아니고 적극적으로 양동작전을 펴면서 Spion Kop 을 완전히 점령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단지 소극적으로 지원 병력을 Spion Kop 으로 축차투입하기만 했고, 그 결과 불리한 상황에서 교전을 지속했던 영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14] 하지만 찰스 워렌이 Spion Kop 전투 몇 개월 후 본국으로 소환당한 것이 단지 무능이라고 하기에는 2 차 보어 전쟁 초반 영국군의 삽질은 한두개가 아니었다. Magersfontein 전투에서는 Lord Methuen 은 정찰이 제대로 되지 못했음에도 당연히 보어인 민병대는 Magersfontein 언덕 정상에 있겠거니 하면서 공격을 밀어붙였고, 새벽 공격을 위해 야간에 밀집 대형으로 이동하던 영국군은 언덕 초입에 매복한 보어인 민병대의 포화에 노출되면서 시작부터 공격 부대 지휘관 Andrew Gilbert Wauchope 소장이 전사하는 개망신과 참패를 겪었다. 찰스 워렌의 무능이 Methuen 의 무능보다 더 나빴나? 글쎄. 하지만 Methuen 은 안짤렸다. 이것만 보더라도 찰스 워렌이 짤린 것은 단순한 무능 때문이 아니라, 실전 경험이 부족한 찰스 워렌의 백그라운드 약점, 상관인 Redvers Buller 와의 불화, 처칠이 언론을 통해 일으킨 비난 여론에 대한 희생양으로 던져주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점[15]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프레데릭 로버츠가 짤리고, 대신 영국군 총사령관이 된 사람이 로버츠의 참모장 허버트 키치너였다. 키치너는 반격하는 과정에서 영국군들은 보어인 게릴라가 발붙일 곳을 없애기 위해 집결캠프[16]를 세워 12만명의 보어인을 강제 수용했는데[17], 강제수용소에서 27,927명의 보어인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했고 이 중 22,074명은 16세 이하였다. 당시 남아프리카의 흑인들도 14,154명이 기아로 사망했는데 보어인들에게는 영국을 편든다는 이유로, 영국군에게는 보어인들을 편든다는 이유로 동네북, 혹은 고래싸움의 새우등 신세로 죽어나갔다. 사진 촬영 후 바로 사망한 보어인 소녀. 보기에 따라 끔찍하니 클릭시 주의할 것. 영국 본국에서조차 같은 기독교인 백인을 이렇게 죽이냐며 반발이 많았다.
1900년 9월에 이르러 영국은 트란스발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보어인들은 게릴라전으로 맞서게 된다. 영국군은 이에 맞서 초토화 작전으로 나간다.
1902년 5월에 보어는 항복하고 두 공화국은 소멸하여 남아프리카의 영국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영국은 승리하긴 하였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강제수용소와 초토화 작전으로 국제적으로도 비난을 당했다. 영국은 이 전쟁으로 국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많이 상실했고 아시아에서 러시아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제국을 동맹국으로 삼아 영일동맹을 맺었다. 남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전쟁이 당시 한반도의 정세에도 영향을 미친 셈이었다.
트란스발 공화국의 폴 크뤼거 대통령은 1900년 유럽으로 떠나 보어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으나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자 트란스발로 돌아오지 않고 망명했다. 1904년 78세의 나이로 스위스에서 사망한 후 그의 시체는 남아프리카로 돌아와 프라토리아에 묻혔다.
영국은 1910년에 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땅을 자치령으로 지정하고 남아프리카 연방을 출범시켰다.
5. 여담
- 셜록 홈즈의 작가로 유명한 아서 코난 도일의 경우 본인은 육군 군의관으로, 남동생인 이디스 도일은 포병 장교로 2차전쟁에 참여했다. 이 전쟁은 외국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았지만 코난 도일은 애국심을 호소하는 글을 기고하며 전쟁을 정당화했는데, 본인부터가 참전용사인데다 동생까지 장교로 있었으니 영국군을 욕하기엔 입장상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코난 도일은 1902년 6월 26일 기사작위(Knight Bachelor) 대상자로 지명됐는데(1902 Coronation Honours), 코난 도일 본인은 보어 전쟁에 대한 정당화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중수필인 <남아프리카의 전쟁: 원인과 행위(The War in South Africa: Its Cause and Conduct)> 집필이 서훈에 주효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만 당시 관보에는 서임된 이유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해당 연도에 전쟁을 옹호하는 글을 썼던 것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셜록 홈즈 시리즈 저자로서의 공헌도 종합적으로 고려된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 보이스카우트를 창설한 로버트 베이든 파월 경[18]이 이 전쟁의 참가자였다. 그는 마페킹 공방전에서 영국군을 숫적, 질적으로 압도하는 보어군의 217일간의 포위를 버티고 승리로 이끈 것으로 명성을 얻었는데, 이때 남아공 원주민 소년들의 활약상을 보고 영감을 얻어 보이스카우트 운동을 창시하게 된다. 사실 이 승리에는 바랄롱 부족 300여명을 협력자로 끌어들여 무장시킨 것도 크게 기여했다. 이때 포위중인 보어군 사령관은 "당신이 마페킹 마을을 잃는 한이 있어도 흑인들을 무장해제시켜라. 그래야 당신이 백인의 전쟁에서 백인으로써의 역할을 하는 것 아니냐"라는 헛소리를 했고, 당연히 파월 경은 이 말을 씹었다.[19]
- 마하트마 간디가 의무병으로 복무했다.
- 윈스턴 처칠도 종군기자로 제2차 보어 전쟁에 참전해 보어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여 쓴 책으로 유명세를 얻었고 이듬해에 하원의원으로 정계에까지 진출하게 된다. 처칠의 전기 영화인 젊은 날의 처칠에서도 나름 심도있게 그리고 있다. 영화 내용은 당연히 처칠 찬가(...).
- 나치 독일 시대에 나온 크뤼거 아저씨(Ohm Krüger/Uncle Krüger)라는 선전 영화가 보어 전쟁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있다. 보어 전쟁 후 망명한 크뤼거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보어 전쟁을 회상하는 형식인데, 영국은 망해가는 제국주의 국가에 인종말살정책, 절멸 강제 수용소를 운영하는 천하의 개쌍놈 국가로 묘사하고 있다.
제 얼굴에 침뱉기금광 운영권을 위해 쿠데타를 획책하는 세실 로즈,[20] 중증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는 빅토리아 여왕(!), 그리고 쿨하게 피수용자를 학살하는 수용소장[21]의 연기가 일품인 작품. 이 영화는 2차대전 당시 독일과 독일의 점령지를 비롯해 추축국이었던 이탈리아와 일본에서도 상영되었다. 전후 이 영화는 2차 매체 발간이 금지되었고 지금도 상영회 때 상당히 엄격한 신원조사를 하고 있다.
- 이 전쟁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에서는 한동안 친척뻘 민족이라며 보어인들에 대한 동정적인 여론이 크게 일었으며 이는 2차대전 당시 나치 부역자들이 생기는 원인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나고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이 도를 넘게 되자 네덜란드의 여론은 다시 적대적으로 선회했다.
- 보어 전쟁에서 영국군은 산업혁명 이후 비참해진 영국 하층민들의 생활상 때문에 징병 연령대인 청년들이 신체적 결함이 속출하여[22] 전쟁터에 투입할 인원을 모집하는데 애를 먹어야 했다. 드넓은 초원에서 말타고 총쏘며 살던 보어 민병대를 상대로 영양실조 징집병을 들이미니 피를 본 건 당연지사. 이러한 상황에서는 차후 유럽 경쟁국들과의 전쟁에서 병사들의 질적 차이로 질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이 생겼고 영국 정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층민들에게 충분하게 식료품을 살 수 있도록 돈을 지원해 주거나 아예 급식을 제공하는 방안을 마련했으며, 한쪽에선 보이스카우트가 출범했다. 시각에 따라서는 이 정책을 현대의 국가 주도 복지의 시발점으로 보기도 한다.
- 영국 육군 기병 대위인 로렌스 오츠는 매우 촉망받는 뛰어난 장교였으나 이 전쟁에서 절름발이가 되는 중상을 당한 것이 원인이 되어 퇴역당하지 않는 조건으로 로버트 스콧 해군 대령 휘하에서 탐험대원이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로버트 스콧은 도저히 탐험대를 이끌만한 재목이 안 되는 무능한 인물이었고 오츠 역시 스콧의 무능함에 치를 떨 정도로 둘의 관계는 매우 나빴다.[23] 스콧 탐험대가 온갖 삽질을 한 끝에 간신히 남극점에 도달하고 귀환하던 중 오츠는 전쟁에서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제대로 걷는 것조차 힘든 지경이 되자 자신이 탐험대의 귀환에 방해가 되고 있다고 여긴 그는 눈보라가 치는 날 스스로 텐트에서 나가 죽음을 맞이했다.[24] 그리하여 오츠는 스콧 탐험대 중 유일하게 시신이 발견되지 못했다.
- 한국에도 정발된 '어느 멍청한 소대장의 작전 이야기'가 보어 전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보병 소대장, 중대장이 배울 만한 전술서이다. 다만 출판된지 시간이 지나서 현재 서점에서 절판이라 중고 책방으로 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 사단 작전장교가 간부들 대상으로 스캔본 뿌린 게 함정참고로 이 책을 쓴 저자는 바로 스윈튼 소장으로 영국의 전차 개발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 이때 당시 조선에서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도 언급되어있다. '보어인들의 강한 저항에 감동한 영국이 그들을 모두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더라' 라고 소개해놓으며
죽이진 않았고 대신 강제수용소에 가둬놓았다위정척사파들에게 짐승이라고 배척받는 서양에서도 제 나름대로의 도덕과 의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소개하였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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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2차 보어 전쟁 당시 보어측 장성으로 이후 1, 2차세계대전때 남아프리카 연방군을 이끌었다. 1950년 사망[2] 1905-08년 재임 영국 총리. 보어 전쟁 전후로 남아프리카 식민지 정책과 남아공 자치령 성립에 기반이 되는 법들을 만들었다.[3] 보어인들은 대부분 백인우월주의자들이었고, 영국계 백인들도 물론 백인이라 흑인을 아래로 보는 사상은 있었지만 보어인에 비하면 비교적 덜했다. 그리고 다른 유럽 국가의 식민지를 빼앗음으로써 현지 아프리카인들과 어느 정도 원만하게 지낼 수 있었던 영국과 달리 남아프리카 현지에서 대대로 살던 보어인들은 새로운 땅을 개척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흑인 원주민들과 싸워야 했다. 보어인들도 나중에 폐지하였지만, 처음에 영국 땅을 떠나 새로 개척하려던 것도 노예제의 폐지에 대한 반발심도 컸다.[4] 영국은 이 때 이집트 카이로부터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까지 연결하려는 아프리카 남북 종단정책(Cape to Cairo Line)를 실행시키려고 노력했고, 이 때문에 프랑스의 횡단정책과 충돌하여 파쇼다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5] 정확힌 아일랜드계 미국인들[6] 이들도 영국계 보어인들과 마찬가지로 본국인 호주에 대한 반감과 같은 영국계 라는 정체성을 거부하고 보어인들에게 가담했다.[7] 특히 보어인들은 게릴라 저격전술로 영국군을 사냥했다. "저격수 보이지 않는 공포"에 해당 내용이 자세하게 나온다.[8] 리버풀의 서포터즈 이름 '콥'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유는 이 전투에서 리버풀 출신 병사들이 많이 죽었기 때문.[9] 자서전을 썼지만 말이 자서전이지 본인이 벌인 실책을 변명하던 것에 불과하다.[10] 보어군은 특성상 민병대의 비율이 높아서 군복을 제대로 입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이 포병부대는 보어군 부대 중 유일하게 전 장병이 제복을 제대로 갖춘 부대였다.[11] As dawn broke, the British discovered that they held only the smaller and lower part of the hilltop of Spion Kop, while the Boers occupied higher ground on three sides of the British position. 영문위키 원문에서 발췌[12]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전투에서 영국군은 현지 가이드의 인솔 혹은 기껏 정찰병이 스케치한 조잡한 지도에 의존해서 싸워야 했다.[13] 물론 당연히 Edward Woodgate 소장도 Spion Kop 점령을 직접 인솔하지 않았다.[14] 이게 찰스 워렌의 진짜 잘못 중 하나다.[15] 그런데 위에서 잭 리퍼 사건도 찰스 워렌의 무능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후의 공정한 평가를 참고하면 이것도 사실은 찰스 워렌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거의 다 했는데 범인이 안잡혀서 그냥 욕받이 무녀가 된 것에 가깝다.[16] 강제수용소의 시초로 본다.[17] 당연히 원래 보어인들이 살던 집과 농장은 불태웠다[18] 당시에는 중령[19] 한편으로 이 마페킹 공방전 때 일로 파월 경은 나중에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는데, "바랄롱 부족이 굶어죽게 했고 백인들을 위해 식량을 훔쳤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BBC가 이 주장과 오히려 수프를 만들어 원주민들에게 제공했다는 내용의 반박을 동시에 소개하기도 했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바랄롱 부족의 기아의 근본적 원인을 제공한 건 당연히 마페킹을 포위한 보어군에게 있었지 바랄롱인들과 함께 포위당한 영국군에게 있지는 않았다.[20] 이 영화에서 세실 로즈로 나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페르디난트 마리안(Ferdinand Marian)은 나치 선전영화 '유대인 쥐스/(Jud Süß)'에서 인간말종 유대인으로 열연했다.[21] 윈스턴 처칠과 대단히 비슷하게 생긴 배우가 나왔다.[22] 당시 군에 지원한 인원 중 약 3분의 1 가량이 군복무를 할 수 없는 상태라는 판정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심하면 소총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당시 소총이 5kg 언저리로 현대 돌격소총들보다 좀 무겁다는 걸 감안해도 5kg 짜리 물건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라면 일상 생활에도 지장에 생길 수준의 허약체질로 보아야 한다.[23] 오츠는 자기 일기에 영국을 대표하여 나선 탐험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그만뒀을 거라고 적을 정도로 스콧을 무능하다고 깠다.[24] 오츠와 사이가 나빴던 스콧도 이를 진정한 영국 신사다운 행동이었다고 찬사를 남겼다.[25] 위정척사파들은 서양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는 했지만 그들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를 표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만국공법인 국제법을 보고 감탄하여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로 쓰거나 의병을 일으킬 때도 서양 무기의 위력은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조선에서 서양인이 공격당하는 일도 동시대 일본이나 청나라에 비하면 거의 없는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