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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항구에서의 차 파기(The Destruction of Tea at Boston Harbor)》 나다니엘 커리어(Nathaniel Currier), 1846, 캔버스에 유화[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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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보스턴 차 사건(Boston Tea Party, 보스턴 티 파티)은 조지 시대 영국이 당시 식민지였던 미국에 시행했던 차(茶, 홍차)[2]에 대한 과세 문제로, 1773년 12월 16일 밤 매사추세츠 만 식민지 주민들이 영국 본토로부터의 차 수입을 저지하기 위하여 영국적 선박을 습격, 당시 사치품이었던 차 상자들을 바다에 투척 폐기한 사건이다. 대중적으로는 미국 독립 전쟁의 본격적인 불씨가 된 사건 중 하나로 유명하다.물론, 이 사건뿐만 아니라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 선언을 하게 된 데에는 복잡한 정치적 배경과 과정, 식민지인들의 본토에 대한 반발심 등이 있었다. 과세 문제는 특히 식민지의 주권과 대표성 문제로 이어지는 민감한 사안이었으며, 이것이 차에 대한 과세를 결정한 홍차조례(Tea Act of 1773)에 의해 일거에 폭발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당시의 차가 술처럼 시민들의 삶의 한 부분으로써 떼려야 뗄 수 없는 기호품이었던 것, 식민지의 사상가들이 차를 통해 활동자금을 얻었던 것 등의 이유도 있었다.(→ '배경' 및 '미국 독립 전쟁으로의 발전' 문단 참고)
2. 명칭
물고기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큰 잔으로 차를 만들어 준 것을 생각해 보면 정말 즐겁다.
참가 당시 16세였던 대장장이 조슈아 와이어스
'티 파티(tea party)'를 직역하면 '다회', '다과회'로, 한국어로 번역할 땐 '보스턴 차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는 차를 바닷물에 타 마신다는 미국식 특유의 위트를 없앤 심심한 표현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다만, 티 파티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은 사건이 일어난지 50여 년 후인 1830년대이고, 당대에도 이 사건은 '홍차 파기 사건(Destruction of the Tea)'이라고 불렸다. #참가 당시 16세였던 대장장이 조슈아 와이어스
보스턴 차 사건에 대한 번역 명칭 가운데에는 원어 그대로 티 파티를 사용하기도 하고, 해당 국가의 '다과회'란 표현으로 번안하거나, 혹은 '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곳도 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ボストン茶会事件(보스턴 다회 사건)으로 표기하고 있다. 중국은 '보스턴에서 차를 쏟아버린 사건(波士頓傾茶事件)'이라고 하는데, 외국어여서 이질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파사둔(= 보스턴) 경차 사건'이라는 표현은 당장 한국어와 비교해도 동사 하나가 더 붙은, 한국어로 치면 '보스턴 차 투척 사건' 내지 '보스턴 차 폐기 사건' 정도가 되기 때문에 한국과 큰 차이는 없다.
3. 배경
1755년에 시작된 프렌치-인디언 전쟁은 1763년, 영국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영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전쟁에서 영국 정부가 전비로 많은 돈을 쓰다보니 그와 함께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되었다.[3] 당시 영국 정부의 부채는 세수 총액의 절반이었던 1억 3,000만 파운드에 달하여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부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64년부터 설탕세, 1765년에는 인지세를 내게 했다. 하지만 영국 정부의 과세가 부담이 되었던 미국 식민지인들은 대거 반발했으며, 나중에가면 대규모 폭력 사태를 일으켰고 결국 영국은 1766년 이를 철회한다. 특히 13개 식민지인들은 이때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늘리고자, 식민지 의회가 영국 의회에서 대표성을 갖기를 희망했다.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란 주장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한다. 또한 1770년 2월 22일에는 크리스토퍼 세이더라는 미성년자가 세관 직원에 의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으며, 동년 3월 5일 보스턴 학살 사건이 발생하는 등 민심도 흉흉했다.식민지인의 반발을 무릅쓰고 세금을 부과했음에도 워낙 영국 정부가 진 빚이 많다보니 세수가 부족하자 1773년 봄, 영국 의회에서는 세수 확대 차원에서 홍차조례(Tea Act of 1773)를 제정했는데, 이를 미국 식민지에도 적용하게 된다. 당시 홍차는 청나라→네덜란드-(밀수)→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되어 식민지와 네덜란드의 밀수업자들이 이득을 보는 구조였다. 이는 당시 영국은 자국으로 수입되는 홍차에 대해 관세를 부과한 반면 네덜란드는 부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가 같은 가격에 수입된다면 관세를 물지 않는 쪽이 싸기 때문에 식민지 밀수업자들은 네덜란드에서 홍차를 사는 것을 선호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유럽의 차 무역에서 본국의 세금 징수를 부담하는 와중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공세로 인해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다.
자국 동인도 회사가 어려움을 겪자 영국 정부가 제시한 홍차법은 청나라→동인도 회사→영국 및 영국 식민지로 유통망을 형성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영국은 세수를 확보하고, 영국민들과 식민지인들은 거품이 빠진 정가에 홍차를 구매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식민지의 홍차 밀수상인들은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홍차 밀수꾼들은 밀수입을 통해 세금을 내지도 않고 부를 축적하고 있었는데 홍차법 때문에 자신들의 밥줄이 끊어지게 생기자 분노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반면 홍차 조례를 통해 미국 식민지인들은 기존 가격의 절반으로 홍차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즉, 보스턴 차 사건의 실상은 밀수꾼들이 홍차를 더 싸게 파는 것에 불만을 품고 남의 상품을 파괴한 것이다. 정작 교육 현장에서는 '홍차 값이 비싸지면서 불만도가 높아져 일반인들도 합세해서 일으킨 사건'이라는 내용으로 정반대로 가르치는 경우가 많으며, 이렇게 배운 일반인들도 많다보니 실상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는 않다.
사건의 진상과는 별개로 이 사건이 미국 독립 역사의 중요한 사건으로 대우받는 이유는 당시 영국 정부에 불만을 품은 식민지의 지식인들이 홍차 밀수꾼과 함께 행동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북미 대륙의 13개 영국 식민지에서는 각각 별개의 총독들이 파견되었고, 각 식민지들은 독자적인 정부와 의회를 가지고 있었다.[4] 그래서 이들 식민지들은 본국 정부 밑에 있는 서로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였다. 특히 미국은 영국의 다른 식민지들보다 자율성을 좀 더 부여받았다. 그래서 영국 본국에서 내리는 식민지 정책은 각 식민지 총독과 협의를 거쳐 결정되었는데, 정작 설탕세부터 시작한 세수 확대 법안은 모두 영국 의회 독단으로 이루어졌다. 즉, 식민지 정부와 의회의 동의없이 영국 정부가 세금을 직접 부과한다는 것은 식민지 자치를 무시한 월권 행위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4. 전개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새뮤얼 애덤스였다.[5] 그는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이라는 집단을 이끌고 행동에 나섰다. 1773년 12월 16일 저녁 7시. 미국 보스턴 항구에 등장한 100여 명의 자유의 아들들은 아메리카 원주민이었던 모호크족 복장을 하고 있었다.[6] 그들은 손에는 도끼를 들고, 얼굴에는 석탄 가루를 바르고 있었는데 이는 어두운 저녁을 이용해 누가 누군지 알아보는 것을 방지한 것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차가 잔뜩 실린 동인도 회사 소유의 무역선이었다. 100여명이 총 3그룹으로 나뉘어 3척의 배에 올라탔고 이들은 배의 선장과 선원들을 도끼로 협박해 화물칸 열쇠를 빼앗았다. 그리고 화물칸에 쌓인 342개에 달하는 나무 상자들을 박살 낸 다음 그 안에 있던 우이옌(武夷巖)[7] 차들을 모두 바다에 쏟았다. 이렇게 뿌려진 우이옌 차의 총 가치는 9,000파운드로, 현재 한국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6억 원에 달한다.
사건의 여파로 얼마 동안 보스턴 앞바다의 색깔은 희미한 갈색을 띄었다고 하며 며칠 동안 찻잎이 떠올라 해변에 밀려왔다고 한다. 이걸 주워다 끓여 마신 사람도 있었다는데, 당시에는 차가 워낙 비싸서[8] 중산층이나 귀족들조차 한 번 달인 다음 도로 건져 건조시켰다가 찻물이 아예 안 나오고 맹물만 나올 때까지 우려먹는 귀하신 몸이던 시기였으니 이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거였다. 이때 이걸 주워다 끓인 차의 조리법을 아예 상품화한 제품도 있다.
4.1. 전국적 확산
1773-1774년의 겨울 동안 보스턴 차 사건을 본뜬 소규모의 차 사건들이 뉴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뉴저지의 그리니치에선 마을 광장에서 차를 불태웠고 필라델피아에선 차를 실은 선박들을 위협하여 돌려보냈다. 메릴랜드의 체스터타운도 보스턴의 예를 따랐고 뉴욕에서도 선장이 배 바닥에 숨겨두었던 차 상자가 발견되자 같은 결과로 이어졌다. 볼티모어 인근의 아나폴리스에선 차를 실은 배들이 불태워지기까지 하였고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선 시위대의 분노를 실감한 선장들이 자발적으로 차 상자를 바다에 던지기도 했다. 이로 인한 영국 동인도 회사의 경제적 손실은 어마어마했다.4.2. 후폭풍
영국은 당연히 이 사건에 크나큰 충격을 받았고, 정작 미국 내에서조차 반응은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심지어 당시 미국 식민지의 주요 인사인 조지 워싱턴, 벤저민 프랭클린도 "이건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미치고 정신나간 짓거리다!"라며 대차게 깠다. 특히 벤저민 프랭클린[9]은 이 사건으로 영국 측이 입은 손실을 메꿔주자고 했고, 실제로 11억 원가량의 성금을 모으는데 성공하여 당시 영국 수상 노스 경에게 가져갔으나, 오히려 거절당했다.이 사건으로 단단히 분기탱천한 영국은 식민지를 크게 단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수정했으며, 실제로 13개 식민지의 자치 문제에 대해 이전까지는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던 의원들도 모두 식민지인의 권리를 규제하는 법안에 대거 찬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1774년, 영국은 함대를 파견해 보스턴 항을 폐쇄하고 매사추세츠 자치 정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그리고 기존의 자치권을 인정해주는 통치 방식에서 영국 정부에 의한 직접 통치로 식민 지배의 방향을 바꾸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
이는 식민지인들의 집단적인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다.
4.3. 미국 독립 전쟁으로의 발전
차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인 1775년, 렉싱턴-콩코드 전투를 시작으로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했다. 물론, 처음에는 이 사건 하나 때문에 독립 선언을 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미국 식민지 주민들과 지식인들은 독립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과거처럼 식민지의 자치권을 보장해 주고, 영국 정부의 간섭을 과거처럼 최소화해 달라는 것이었다.실제로, 미국 독립 전쟁을 일으킨 '건국의 아버지'들도 처음에는 완전한 새 나라의 건국이 아닌, "국왕 폐하의 눈을 가리는 본국 의회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대표 없이는 과세도 없다' 라는 표현에 대해 영국 본토에서 아메리카 식민지에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도 영국에 대표를 보낼 것을 요구 했지만 식민지인들은 자기 자신들이 주체가 되는 식민지만의 의회를 원한 것이었으므로 거부했다.[10]
즉, 최초 식민지 주민들의 생각은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이 아닌 더 나은 대우, 나아가 자신들만의 의회를 꾸리고, 조세권도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당시의 영국의 정체성은 현재와 동일한 '연합 왕국'으로 영국 내에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등의 구성원들이 의회도 독자적으로 구성하고 어느 정도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13개 식민지 주민들의 입장은 "우리들을 식민지인으로 차별하지 말고, 이를테면 '북아메리카 왕국' 같은 것을 만들어서 연합 왕국의 일원으로서 제대로 대우해 달라" 라는 정도에 더 가까웠다.
본격적으로 독립의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때는 전쟁 중에 발간된 토머스 페인의 《상식(Common sense)》이 발간된 이후로 이때부터 군주제 자체의 모순과 저항권, 그리고 천부인권에 대한 고찰이 심화되었다. 결국 사건 자체는 프랑스 혁명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처럼 정치적인 목적으로 인한 후대의 필요에 의해, 어느 정도 독립 전쟁과의 상징적인 관련성이 접목되며 윤색된 것이기도 하다.
5. 기타
- 보스턴 차 사건의 영향으로 미국인들은 영국인들이 마시는 홍차를 대신하여 커피를 마시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홍차보다 커피를 선호하는 국가가 되었다는 식의 애국심을 강조하는 듯한 속설이 한국은 물론 미국에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커피값이 차값보다 싸서 커피를 더 많이 마시게 되었다. 과거에 차는 중국에서 수입해와서 영국으로 싣어 오고, 다시 미국으로 보냈다. 반면 커피는 지척에 있는 쿠바와 브라질에서 대량 재배되고 있어 운송비가 저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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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당시 야사로 자물쇠 이야기가 있다. 자유의 아들들이 배를 습격했을 당시 자물쇠를 부쉈는데, 사건이 끝난 후에 이들이 수리공을 불러다가 자물쇠를 고치도록 했다. 자신들은 영국 정부에게 항의하기 위해 차를 버린 것이지 개인의 재산을 망가뜨릴 의도는 없었다나?
- 보스턴에는 이 사건을 기념하는 보스턴 티 파티 박물관이 있다. 정식 명칭은 Boston Tea Party Ships & Museum. 실제 사건이 벌어진 현장으로 추정하는 장소에 건립했으며, 당시 사용했던 선박을 복원해서 전시했다. 안내 직원들도 시대 고증을 거친 당대의 복장을 갖춰 입고 있다. 당시의 물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그 중 하나가 1773년 12월 17일에 존 로빈슨이 전날의 보스턴 차 사건 현장에서 기념품으로 건져올린 차 상자이다. 미국인의 자유와 국가 탄생의 상징이라고 한다. 그리고 차 상자를 바다에 던지는 체험을 직접 할 수 있다.
- 동인도 회사라는 이름의 홍차 브랜드에서 'Boston Tea Party'라는 홍차 블렌드를 내놓기도 했고 250주년 한정판을 내놓기도 했다. 물론 현재의 동인도 회사는 실제 사건이 벌어진 당시의 동인도 회사와는 무관하고, 영국 정부에게 문장과 역사 그리고 회사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만 받은 사실상 별개의 회사이다. 업체 홈페이지의 해당 제품 목록 물론 이걸 모르는 사람에겐 당시 사건의 피해자(?)가 해당 사건을 기리기 위해 직접 차를 발매 한것으로 보이는 아이러니를 느낄수있다.
- 잘못된 정보로 당시 버려진 찻잎은 요즘 우리가 애용하는 건조된 찻잎이 아닌 압축된 찻잎으로 버려진 찻잎들의 가격은 무려 170만 달러라고 하며 나무토막 한 덩어리만 한 압축된 찻잎을 1년 동안 긁어먹었다는 이야기가 인터넷 커뮤니티에 돌고 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 2019년 7월 2일 벌어진 여자 월드컵 준결승에서 미국과 잉글랜드가 맞붙었는데, 1:1 동점 상황서 미국 팀의 주장 알렉스 모건이 역전 결승골을 넣은 뒤 차를 마시는 세리머니를 했다. 본인도 경기 후 트위터에서 차 마신 모션이 맞다고 인증했고, 마침 이틀 뒤가 미국 독립기념일이기도 했다. 당연히 미국에선 이에 대해 통쾌해했고 영국은 분노했다. 영국에 대한 제3국들의 반응은 내로남불 수준이라며 냉랭하다.
- NFL의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 역시 이 사건을 모티브로 팀명을 지은 것이다.
- 2020년에는 미국 독립 기념일을 맞이하며 영국 육군 공식 페이스북에 미국의 독립 기념일을 축하하면서 완벽한 영국식 차를 끓이는 법이 영상으로 올라왔는데, 이때 이 챌린저 2 전차병이 머그컵에 티백을 넣으라면서 하는 말이 항구에는 넣지 말라며(Not in the Harbour) 대놓고 보스턴 차 사건을 디스한다.
이 영상 속 영국군은 처음엔 미국 국가를 BGM으로 넣어놨다가 끝에 슬쩍 Rule Britannia로 BGM을 바꾸거나 영국 왕실과 싸워 이긴 것을 축하하면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및 영국 왕실 굿즈 머그컵을 사용하는 등 소위 킹받는 느낌의 소소한 미국 디스를 잔뜩 하고 있다. #[11]
- 2022년 10월 일론 머스크가 유명인 트위터에 붙는 블루체크를 매월 20달러 가격으로 유료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스티븐 킹이 이에 반발하면서 트위터를 떠나겠다고 트윗하자, 머스크는 한달 8달러는 어떻겠냐며 처량한 소리를 냈다. 스티븐 킹은 뉴잉글랜드 메인 주에 거주하는데, 때마침 보스턴도 뉴잉글랜드에 있는터라 "뉴잉글랜드 사람에게 함부로 돈 내라는 소리를 하는게 아니다.", "트위터 서버가 보스턴 항구에 빠질 수 있다." 식의 드립이 나왔다.
* 2021년 영국에 사는 미국인 유튜버가 물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우유를 부은 후 티백을 넣자, 영국인들이 이렇게 차를 끓이는 게 아니라고 댓글[12]을 달았다. 이에 대해 카렌 피어스[13] 주미영국대사가 대사관 트위터 계정에 차를 올바르게 끓이는 방법에 대한 동영상을 업로드하면서 미영관계에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피어스 대사는 "미영관계는 차로 정의된다.[14]"를 읊은 후 영국 육군 - 영국 해군 - 영국 공군 순서대로 차 끓이는 방법을 보여주었다.[15]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어쌔신 크리드 3에서 이 사건이 등장하며 플레이어가 직접 바다에 차를 던져버릴 수도 있다. 데이터베이스에서도 원주민으로 분장한 사람들이 던졌다고 나오며, 작중에서도 대륙군과 '자유의 아들들'이 차를 집어던지고 원주민이라고는 주인공인 라둔하게둔뿐이다. 영국이 차에 세금을 매기자 템플 기사단이 이를 역이용해 밀수업으로 돈을 벌고 있었는데 이를 엿먹이기 위해 기획한 사건으로 등장한다. 미션 제목은 'The Tea Party'이며, 한글판에서는 다과회로 번역되었다.
- 미국 만화 심슨 가족에서는 몽고메리 번즈의 조상이 해양생태계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지 않고 차를 바다에 버렸다는 언급이 있다.
- 미국 드라마 슬리피 할로우에선 헤센 용병들이 가져온 헬게이트를 여는 열쇠를 털기 위해 일으킨 양동작전이라고 한다.
- 투믹스 웹툰 마키시의 이웃들에서 등장하는 홍차의 정령과 녹차의 정령이 뮤지션 듀오를 결성하면서 붙인 듀오명이 보스턴 엑시던트이다.
- 메사추세츠가 배경인 폴아웃 4에 나오는 자유기념관에서도 해당 사건을 구현한 인형들의 모습이 존재한다.
- 모바일 게임 블루 아카이브의 등장인물 키리후지 나기사의 인연 스토리에서 이 사건을 패러디한 내용이 잠시 언급된다. 트리니티 종합학원의 동아리 중 하나인 다도부에서 다과로 제공된 오이 샌드위치에 항의하면서 차 상자를 수영장에 던져버렸다고⋯.[16]
[1] 약 70년 후에 그려진 기록화이므로, 상상화이다.[2] 영어에서 'tea'는 별도의 수식이 없으면 홍차를 가리킨다.[3] 그리고 식민지인 입장에선 프랑스나 원주민 등 경쟁자를 싹 쓸어버리면서, 이제 본국에게 개겨도 OK라는 안보 환경을 얻었다.[4] 그래서 당시 북미에는 '미국인(American)'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식민지인들은 스스로를 '버지니아 사람(Virginian)', '필라델피아 사람(Philadelphian)' 등으로 여겼다. 사실 State라는 단어에는 주(province)라는 뜻도 있지만 국가(nation)라는 뜻도 있다. 즉 각각의 주가 하나의 국가로 여겨진 것이다.[5] 미국의 2대 대통령 존 애덤스의 6촌 형으로 미국에서는 존 애덤스와 함께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애국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보스턴 라거의 이름이 바로 그에게서 따온 것이다.[6] 사건의 실행자들은 원주민으로 분장했지만, 퍼포먼스 의도 이상은 없다고 보인다. 애초에 백인이 옷만 바꿔 입는다고 그걸 인디언으로 착각할 리가 아메리카 원주민이 이 일을 저질렀다고 책임을 회피하는 여론은 드물었다. 미국과 영국의 반응도 비슷했다.[7] 중국 푸젠 지역에서 생산되는 차의 한 종류, 존 애덤스의 일기에 차 종류가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8] 당시는 인도 아대륙에서 차 플랜테이션이 시작되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북미나 유럽에 유통되는 홍차는 모두 청나라에서 수입된 것이었다.[9] 당시 벤저민 프랭클린은 식민지 의회의 대표 자격으로 영국 의회에 출석하기도 했다.[10] 이를 두고 영연방을 유지하면서 조세를 포함한 자치권을 가지는 형태거나, 그것도 아니면 세금 안 내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식민지에 대한 조세 특권 주장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11] 실제 저 영상에서 나오는 것처럼 영국군의 주력 전차인 챌린저 2에 저렇게 물을 끓일 수 있는 간이 포트가 들어가 있다. VBE(Vessel Boiling Electric) 혹은 BV라고 한다.[12] 홍차는 캐나다의 메이플시럽처럼 영국 정부가 관리하는 핵심 품목이다. 과거 냉전 시기에는 전쟁으로 인한 홍차 수급 문제가 영국의 주요 과제였고, 지금도 홍차 가격 인상은 경제에 큰 영향을 끼친다.[13] Dame Karen Pierce[14] Anglo American Relation is defined by tea[15] 미국 독립 전쟁의 원인이 영국 정부의 과도한 차 관세로 인한 보스턴 차 사건인 걸 보면 공교롭다고 볼 수 있다.[16] 해당 사건의 배경이 된 트리니티 종합학원의 모티브 중 하나가 영국인 만큼 나름대로 적절한 비유라 할 수 있다. 다도부 차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