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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민/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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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성 라이온즈 시절
1.1. 신인 시절1.2. 2008 시즌1.3. 2009 시즌1.4. 2010 시즌1.5. 2011 시즌1.6. 2012 시즌1.7. 2013 시즌1.8. 2014 시즌1.9. 2015 시즌1.10. 1차 FA
2. NC 다이노스 시절3. 국가대표 경력4. 연도별 주요 성적

1. 삼성 라이온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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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인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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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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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은 강민호.[1]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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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신인 시절.

아버지 박찬경, 어머니 양성자의 2남 중 둘째로 형도 대구상고에서 야구를 했다. 경복중학교 시절부터 주목받았으며 경북고-대구상고에 매번 밀렸던 대구고등학교가 야구부장과 감독을 모두 교체하는 강수를 두고 대구지역 중3 유망주들을 싹쓸이한 끝에 대구고 유니폼을 입었다.

고교 정상급 타자로 주목을 받았으며 2003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대붕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에 기여했다. 같은 해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는 한서고와의 2회전 4-4 동점 9회말 1사 1,2루에서 끝내기 중전안타를 쳤다.

2004년 삼성 라이온즈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하게 된다, 당시 포철공고 포수 강민호와 저울질하다가 김한수의 대체재로 뽑았다고 한다.[2] 그만큼 당시 삼성이 박석민에게 기대했던 것은 공격보다 수비였으며 실제로 대수비 요원으로서 1군 생활을 시작하게 되나 기대만큼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프로 첫 홈런은 2004년 5월 20일 대 KIA전[3]에서 고우석을 상대로 기록하였다. 간간히 1군에 올라올 때마다 뜬금타를 터트리면서 타격 면에서도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덕분에 2004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포함되기도 했다.[4] 2005년 4월 29일에는 1군에 복귀하자마자 선발 출장하여 당시 기아의 마무리였던 신용운을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치기도 했다.[5]

2005년 시즌 종료 후 군복무를 위해 상무에 입대했으며 2007 시즌 종료 뒤 삼성 라이온즈에 복귀하였다.

1.2. 2008 시즌

2008년 시즌 초반 선동열 감독이 구상했던 트리오가 각각 부진, 시즌 아웃, 방출로 인해 중심 타선이 무주공산이 되었으나, 그 공백을 최형우, 채태인과 함께 잘 메워냄으로써 본격적인 주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세 명 모두 준수한 활약을 보여 2008년 삼성 타선의 세대교체가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6]

2008년 KIA와의 경기에서 한두데의 위엄을 수립. 15회말 유동훈에게서 사구를 얻어 출루한 후 채태인의 안타성 타구에 맞아 그대로 아웃, 팀도 패배.

팀내에서 최형우와 함께 단 둘만이 전 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0.279, 홈런 14, 타점 64를 기록하였다. 실질적인 첫 1군 풀타임 출장인 걸 감안하면 좋은 성적으로 평가된다. 다만 18개의 실책으로 인해 박기혁과 함께 실책 공동 1위에 올랐다.

7월 4일 대구 홈경기에서 이범석이 9회 2사까지 안타를 한 개도 허용하지 않은 가운데 인생주루를 선보이며 3루쪽 내야안타를 때려서 노히트노런을 저지한 경험이 있다. 당시 3루수는 김주형.[7]

1.3. 2009 시즌

삼성의 새 외국인선수 에르난데스와 쌍콜돼 콤비를 결성했지만 작년에 비해서는 차분해진 모습을 보였다.

2009 시즌 목표치[8]에 부상으로 아쉬운 성적을 기록이었다. 게다가 2008년 경기 도중 2루를 향해 슬라이딩을 하다 다친 왼손 중지 부상으로 인해 유리몸 기질이 발동하기 시작해서 자주 2군을 들락날락거리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6월부터 살아나면서 박석민이 홈런을 치는 경기는 이긴다는 공식 성립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데뷔 이후 처음으로 한 시즌 20홈런을 넘겼다. 이 해 20홈런 이상을 친 타자들 중 김상현을 제외하면 타석당 홈런 비율이 가장 높은 타자로 잔부상만 조심한다면 내년부턴 40홈런도 노릴 수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만 잔부상이 많고 먹성을 주체 못해[9] 체중관리가 잘 안 되는 등 아쉬운 점도 상당히 많이 지적 받았다. 타고난 파워 덕분에 시즌 개인 최고 홈런기록을 세울 수 있었지만, 부상으로 인한 기복이 컸던 것이 단점으로 지적된다. 아직 가다듬을 곳이 상당히 많은 편이며, 본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앞으로의 성장이 기대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타석당 사사구 비율이 급등하여 리그에서 가장 선구안이 좋은 타자로 발돋움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즌이라고 할 수 있다. 타율 0.285, 24홈런, 62타점, 출루율 .416 장타율 .586 OPS 1.002를 기록하였다.

1.4. 2010 시즌

잔부상으로 시즌 초반 2군에 갔다 오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2008년 이후 다시 규정타석에 들어서면서 데뷔 이후 첫번째로 타율 3할(0.303) 및, 출루율 0.440(2위)을 기록하였다. 한때 출루율 부문 1위를 호시탐탐 노리며 이대호의 7관왕을 위협하기도. 다만 손가락 부상 때문에 작년에 비해 15개로 줄어든 홈런이 약간 아쉬운 편이지만 그래도 3번과 5번을 왔다갔다 하면서 좋은 성적을 유지해 주었다.

유난히 1루 악송구를 많이 범해 채태인의 가랑이를 찢어지게 했으며, 양준혁의 은퇴 선언 및 손가락 부상의 악화로 인해 7월 말부터는 지명타자로서만 출장하여 시즌 끝까지 수비보다는 타석에만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다행히도 그가 지명타자로 출장하면서 생긴 3루수의 공백은 면제로이드로 인해 각성한 조동찬이 잘 메워 주었다.

2010년 8월 13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4회말 2사 상황에서 강봉규가 안타를 기록할 때 2루 주자로 나가 있었는데, 3루를 돌아 홈으로 달려오면서 막판에 포수 신경현의 태그를 피하다가 신경현과 홈 대치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이에 심판은 결국 박석민을 바로 아웃시켜 버린다.관련 포스트

2010년 10월 13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스코어 5:5이던 11회말 2사 만루에서 끝내기 결승 안타를 쳤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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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기 안타 치고 세리머니 박석민은 이 날 대타 지명타자로 출전하여 3타수 1안타 1볼넷 1타점을 기록했다.

박석민은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16타수 3안타 3볼넷 3사구(死球) 2타점 2득점, 타율 .188, 장타율 .250, 출루율 .409를 기록했다.

박석민은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9타수 3안타 1홈런 1볼넷 4사구(死球) 2타점 1득점, 타율 .333, 장타율 .667, 출루율 .571을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박석민은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25타수 6안타 1홈런 4볼넷 7사구(死球) 4타점 3득점, 타율 .240, 장타율 .400, 출루율 .472를 기록했다.

1.5. 2011 시즌

2010 시즌 후 투수 정홍준이 방출당하면서 18번이 비었는데, 때마침 18번을 달고 싶었던 박석민은 이 번호를 차지하였다.

작년에 그토록 말썽을 피웠던 손가락 부상이 호전되면서 다시 주전 3루수로서 나서기 시작하였다.

5월 6일까지 .277의 타율을 기록했다. 타율은 다소 아쉽지만 볼넷을 많이 얻어낸 점은 고무적. 그러나 장타율이 다소 낮고 홈런이 2개 밖에 없으며 실책이 벌써 3개째이다.

개그 본능은 여전했다. 5월 6일 LG 트윈스 전에서 상대 투수 한희의 공에 맞자 배트 들고 한희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문제는 박석민이 해서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는 거. 사실 화가 난 것은 절대 아니었고, 다소 침체된 팀의 분위기를 끌어오려는 작전이었다. 더불어 한희에게 전화로 직접 사과까지 했다. 이 경기에서 벤치 클리어링 직전까지 제구가 안되던 한희는 직후 영점이 잡혔다. 박석민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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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 수비에서도 개그를 선보였는데 멋진 다이빙캐치 후에 공이 글러브에 들어갔는지 모르고 두리번거리다가 1루에 악송구를 하는 바람에 주자를 불러들였다. 이후 5월 17, 18, 19일 넥센과의 3연전에서 3연속 결승타를 때려내며 회복의 기세를 보였다.

5월 19일 넥센전 결승타를 치고 나서 사진이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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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기자도 깐다.

6월 8일 롯데를 상대로 투런 홈런을 쳤다. 치고 나서 손목 보호대를 던져 준 뒤 인형을 상대로 부유수유를 시전했다.
http://mlbpark.donga.com/bbs/view.php?bbs=mpark_bbs_kbo&idx=835027&cpage=1

6월 22일 자신의 생일에 5타수 5안타 6타점 4득점 2홈런(투런 쓰리런)이라는 흠좀무한 성적을 거두며 팀의 5:19 승리를 견인했다. 두 홈런이 1, 2회에 터트려 승기를 확 기울여놓고 시작했다는 점에서 박석민의 역할이 매우 컸고 덕분에 경기 MVP에 선정되었다. 인터뷰에서 비가 와서 우천중단이 됐을 때는 긴장했다고 말하기도 했다.[11]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16타수 5안타 3볼넷 1사구(死球) 2타점 1득점, 타율 .313, 장타율 .438, 출루율 .450을 기록하였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하였다.

1.6. 2012 시즌

2011 시즌 후 왼쪽 중지 두번째 수술을 했다. 수술을 하더라도 상태가 호전될지 미지수였으나 상당히 호전되었다. 본인 말로는 이제 중지손가락을 구부릴 수 있을 정도[12]라고 한다. 손가락이 나으며 타격감도 상당히 좋아졌다.

최형우가 시즌 초반 극도의 부진에 빠진 상황에서 4월 한 달동안 0.344의 타율과 5개의 홈런을 날리며 이승엽과 함께 삼성의 중심타선을 지탱했다. 1번 배영섭과 4번 최형우가 슬럼프에 빠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류중일 감독은 9번 김상수를 1번으로, 5번에서 좋은 타격감을 유지하던 박석민을 2번으로 전진배치한다. 박석민은 2번 타순에서도 맹타를 휘둘렀지만 박한이가 부상에서 회복될 때까지의 임시직이라고 한다. 박석민 본인도 5번을 선호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최형우의 슬럼프가 길어지자 최형우가 5번으로 내려가고 박석민이 4번을 치게 되었다. 결국 최형우가 2군으로 내려가고 나서는 이승엽이 4번으로 가고 박석민은 3번을 치게 되었다. 최형우가 1군으로 복귀한 이후는 최형우를 이승엽 뒤에 세우지 않겠다는 류중일 감독의 뜻에 따라 박석민 - 이승엽 - 강봉규 - 최형우 또는 최형우 - 이승엽 - 박석민의 타순을 따라 3번 또는 5번 타자로 나서다가 최종적으로는 4번으로 고정되면서 삼성의 중심 타선은 3번 이승엽 - 4번 박석민 - 5번 최형우가 되었다.

5월 25일 팀(삼성 라이온즈) 통산 3600번째의 홈런을 기록했다.

6월 7일 KIA 타이거즈전에서 2사 주자 2루 상황에서 이범호의 평범한 3루측 땅볼을 잡았는데, 원래 이 상황에선 2루 주자가 진루할 필요가 없으므로 태그아웃을 시켜야 하지만 포스 아웃 상황으로 착각해 3루 베이스만 밟고 공수교대를 위해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본헤드 플레이를 범했다. 기록은 3루수 실책이었다. 투수 탈보트와 동료들이 급하게 소리를 질러 2루 주자가 3루로 가는 선에서 그쳤지만 공수교대가 될 상황을 2사 1, 3루라는 위기로 끌어오고 말았다. 다음 타자 최희섭이 플라이아웃 되어 망정이지... 팬들 반응은 '역시 개그맨' vs '채태인이랑 다를게 뭐냐'로 나뉘는 중.

6월 뜨거운 타격감을 자랑하며 삼성의 1위 등극에 크게 기여하여 각종 월간 MVP를 휩쓸고 최정과 나란히 3루수 KBO 골든글러브 유력후보로 부상하였다.

8월 21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대구 홈경기를 결장할 예정이었다. 그 이유는 나고야에 있는 어느 병원에 주사 맞으러 간다는 이유로[13] 그 날 홍성흔에게 홈런 2개와 5실점을 내준 상태에서 9회말 3-5까지 따라잡은 이후, 류중일 감독은 2아웃 2루에서 박석민을 대타로 내서 그냥은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헛스윙 삼진으로 끝나고 말았다.

2012년 페넌트레이스 기록은 타율 .312 138안타 23홈런 91타점. 이 때 클래식 스탯은 평범해 보이지만 wRC+ 179.9와 sWAR 7.9를 찍는 등 자신의 커리어 하이를 찍었으며, 역대 3루수 단일시즌 WAR 3위의 기록이다.[14] 이 극한의 투고타저 속에서도 비율스탯 3-4-5를 찍은 리그 최상위권 강타자로 거듭났다.

페넌트레이스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SK 와이번스와의 한국시리즈에서도 4번 타자로 출장했지만, 5차전까지 14타수 1안타(타율 0.071)로 지독한 부진을 겪었다. 더군다나 5차전부터는 6번 타순으로 밀려나는 굴욕까지 겪었다. 한국시리즈에서 박석민의 타격이 부진했던 이유는 한국시리즈 대비 훈련을 하다 갈비뼈에 실금이 가는 부상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타격 밸런스가 깨져 타격감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다만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5차전에서 압박 수비로 2루 주자를 3루에서 잡는 활약을 하는 등 수비에서만큼은 정말 제몫을 다했다.

팀이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앞선 11월 1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스코어 1:0으로 앞선 4회초 1사 1루에서 투런 홈런을 날리며 부진에 마침표를 찍고 유종의 미를 거두며 여러모로 2002년의 이승엽과 비견되었다.[15] 이 홈런은 근소하게 앞서던 삼성 분위기를 완전히 가져오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삼성은 여세를 몰아 볼넷 3개+ 적시타 2방 4타점을 묶어 시리즈 세 번째 1이닝 6득점으로 SK를 완전히 도륙내며 스코어 7:0으로 승리했다. 이날 박석민은 4타수 2안타 1홈런 2타점 1득점을 기록했다.

박석민은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1, 2, 3, 4차전은 선발 3루수 겸 4번타자, 5, 6차전은 선발 3루수 겸 6번타자로 출장하여 18타수 3안타 1홈런 3볼넷 1사구(死球) 3타점 2득점, 타율 .167, 장타율 .333, 출루율 .318을 기록했고, 팀은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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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승 확정 뒤에는 역시나 개그 사진을 방출했다.
대놓고 감독한테 샴페인 대포를 발사하고 박석미친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KBO 골든글러브 시상식 격전지인 3루수 부문에서 최정과 2년 연속 선의의 경쟁을 펼쳤지만 결국 수비율과 홈런 등에서 앞서고 20-20을 달성한 최정에게 아쉽게 밀렸다. 아무튼 최정과 함께 리그를 대표하는 차세대 3루수로 인정받을 만큼 성장했다. 이를 위로라도 하듯 페어플레이상을 수상했는데 수상소감에서 '제가 받을 자격이 있나 잘 생각해 보았는데 정말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개드립을 치면서 역시나 개그 본능을 보여주었다.

1.7.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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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에는 부진한 성적을 이어갔으나 후반기의 대활약으로 OPS 0.940을 마크, 리그 3위에 이름을 올렸다.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318 126안타 18홈런 76타점. 하지만 이번에도 최정에게 막혀 골든글러브를 받지 못했다.

1.8.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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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3루수 부문 수상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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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꼬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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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간

시즌 성적은 110경기 356타수 112안타 27홈런 72타점 타출장 .315/.419/.601 OPS 1.020. 최정이 부상으로 인해 규정 타석을 채우지 못한 가운데 리그 3루수 증에서는 독보적인 성적을 올렸다. 이에 힘입어 생애 첫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1.9.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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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골든글러브 3루수 부문 수상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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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루수의 흔한 직무유기.

FA 자격을 앞둔 상황에서 135경기 448타수 144안타 26홈런 116타점 타출장 .321/.441/.551 OPS 0.992를 기록하며 자신의 가치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출루율은 리그 3위의 성적이며 116타점은 자신의 커리어 하이 기록. 9월 20일 롯데 자이언츠 전에서는 한 경기에 투런, 쓰리런, 만루 홈런으로 9타점을 쓸어담으며 KBO 리그 한 경기 최다 타점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1.10. 1차 FA

시즌 종료 후 생애 첫 FA 자격을 얻었다. 11월 21일 원 소속팀과의 우선협상이 시작된 후 협상 마감인 11월 28일까지 최종 협의를 하지 못하면서 FA 최대어로서 시장에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외부 구단과의 협상 이틀 째인 11월 30일, NC 다이노스와 4년 최대 96억원에 계약을 체결했다.기사 이는 당시 야수 FA 역대 최고액이었다. 세부 내용은 보장 86억, 계약금 56억 연봉 총액 30억이며 10억의 옵션이 포함되어있으며, 특이하게 계약 발표와 함께 연간 2억원 씩 총 8억원을 기부하겠다고도 밝혔다.

2. NC 다이노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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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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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후 첫 시즌에서 3할-30홈런-100타점을 달성하며 기대만큼의 활약을 해주었다. 또한 LG 트윈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도 결승 홈런 두 방을 터뜨리며 팀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행까지 이끌었다. 그러나 한국시리즈에서는 13타수 무안타로 팀의 준우승에 일조했다.

2.2.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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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NC 다이노스의 새 주장을 맡게 되었다. 기사 그러나 부상으로 인한 잦은 이탈과 부진으로 인해 시즌 중 주장 완장을 손시헌에게 넘겨 주었다.

이 시즌은 박석민 본인에게든 팬들에게든 매우 아쉬운 시즌으로 기억될 듯하다. 고질적인 유리몸 본능으로 공격, 수비 양쪽 모두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박석민으로 대체할 자원이었던 모창민이 오히려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며 정반대의 입장에 놓였다.

2.3.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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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시작 전부터 팔 꿈치가 좋지 않다며 수비에도 많이 나서지 못하더니 시즌 중반까지 2할 초중반 대 타율에 허덕이며 전혀 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후반기부터는 슬슬 좋은 타격감을 보여주는 듯 싶었으나 이마저도 옆구리 근육 손상으로 인해 다 보여주지 못하고 시즌을 조기에 마감해야 했다. 시즌 최종 기록은 103경기 318타수 81안타 16홈런 타출장 .255/.360/.456.

2.4. 20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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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기에는 리그에서 손 꼽히는 타격감을 보여주며 나성범이 빠진 3번 자리를 잘 메워주었으나 후반기, 특히 9월에는 월간 타율이 단 0.033에 그치면서 자동 아웃으로 전락했다. 끝내 규정 타석에도, 100안타에도 20홈런에도 약간씩 못 미치는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하면서 계약 마지막 시즌까지 먹튀라는 오명을 벗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 부진은 포스트시즌까지 이어져 4타수 무안타 1삼진에 1사 만루 찬스까지 놓치는 등 팀의 마지막 희망까지 짓밟았다.

시즌 성적은 112경기 360타수 96안타 19홈런 74타점 49득점 65볼넷 69삼진 타출장 .267/.393/.478 wRC+ 139.3 sWAR 3.31. 지난 2년 동안 활약에 비하면 확실히 나았지만 시즌 막판으로 갈수록 극도로 부진했다. 결국 올해도 돈값을 확실하게 하지는 못했다.

2.5. 2차 FA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재취득했다. 결국 우려되었던 잔부상으로 인해 계약 첫 해를 제외하면 전혀 몸값에 어울리는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제 30대 중반에 해당하는 나이와 여전히 건강하지 못한 몸 때문에 4년 전과 달리 타팀이 군침을 흘릴 자원도 아니게 되었다. 다만 타격 자체는 아직 쓸만해서 대부분은 잔류가 유력하다고 바라보고 있다. 11월 24일자 기사에서는 구단과 박석민이 서로 제시한 조건에서 큰 차이는 없다고 한다.

구단 신년회가 열린 2020년 1월 8일, 2+1년 최대 34억원에 합의했다. 계약금 2억원과 연봉 7억 등 총 2년간 16억이 보장되며, 3년차 계약 실행을 포함한 총 옵션은 18억원이다.

지난 4년간의 첫 FA가 구단으로서는 전혀 만족스럽지 못했다는 점과 지난해 3년 20억원에 계약을 한 모창민의 사례를 비추어 본다면 예상보다 후하게 쳐준 셈. 다만 총 계약 규모 중 옵션만 18억에 달한다는 사실이 눈에 띄는 점인데, 겉으로는 3년 34억이라는 거액 계약처럼 보이나 보장액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2년 16억 밖에 되지 않으며 나머지 18억은 모두 옵션에 해당한다. 계약 이후 김종문 단장은 "총액이 많아보여도 건강을 증명해야 최대 금액을 받을 수 있다."고 발언했다. 즉, 구단 역시 박석민의 건강함을 이번 계약의 최대 중점 사항으로 둔 것. 팬들은 잘 알다시피 첫 FA 4년 동안 박석민이 수비수로서 100경기 이상 출전한 것은 첫 해 밖에 되지 않으며 이후 3년간 단 175경기를 나서는데 그쳤고, 틈만 나면 당하는 부상이 본인과 팀모두에게 악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강함을 필수적으로 증명해야 할 옵션을 포함시키며 선수에게는 동기 부여를, 팀에게는 위험 부담을 감소시키는 나름 적절한 계약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 박석민은 "옵션을 채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서 받아 들였다."고 밝혔다.

2.6. 2020 시즌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2020 KBO 리그 출루율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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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출루 잘하는 개그맨.jpg

장타력의 감소와 노쇠화로 인한 수비능력 감퇴로 아쉬운 모습도 있었지만, 출루율 1위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팀내 유일한 타이틀 홀더가 되었고 개인적으로도 커리어 사상 첫 타이틀 홀더가 되었다.

2.7. 2021 시즌

파일:14년 연속 10H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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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과 달리 부진한 시즌을 보냈다. 또한 엄청난 사건에 휘말리면서 남은 시즌을 모두 날리고 말았다.

2.8. 202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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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역대급 사고로 본인의 이미지를 추락시킨 상태로 시즌을 시작했지만 처참한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하며 내년 시즌 방출이 유력했으나 일간스포츠의 단독 기사를 통해 2023년에도 동행한다는 것이 밝혀졌다.[16]

2.9. 202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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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 후 주전 3루수로 스타트를 걸다가 서호철, 도태훈 등 어린 유망주 선수들에게 밀려 7월 이후로는 2군에서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결국 10월 30일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마지막 시즌이 되었다.

2.10. 은퇴

10월 28일에 창원에 있는 케이크 전문점에서 박석민 선수의 은퇴를 축하한다는 케이크가 제작되어 인스타그램에 업로드되었다.[17] 이로 인해 사실상 은퇴가 확정된 걸로 보이며, 조만간 공식적으로 웨이버 공시 소식이 들려올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예상대로 다음 날인 10월 29일에 스포츠조선 단독 보도가 나왔고, 30일 구단이 공식적으로 박석민의 은퇴를 발표했다. 정규 시즌 막바지인 10월초에 은퇴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 단독 보도 바로 전날 장원준도 은퇴를 선언하면서 2004년 1차 지명자 중 현역은 김재호 한 명만 남았다.[18]

NC에서 통산 성적은 8시즌 동안 670게임 2525타석/2086타수 563안타 106홈런 403타점 306득점 418BB/471K 5도루 .270/.387/.468 OPS .855 wRC+ 127.9 sWAR 15.82의 성적을 기록하였다. OPS나 우르크 등 비율 스탯은 나름 합격점이나 8시즌 동안 연간 평균 100경기도 출전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부상에 시달렸으며, 이후 빠르게 노쇠화가 찾아왔다. 8년 동안 130.5억이라는 거액을 받은 것을 감안하면 누적 스탯이 아쉬운 편이다.

파일:1000013468.gif
은퇴식 막바지 오승환과 포옹하는 박석민
시간이 흘러 NC 다이노스와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가 열리는 2024년 5월 11일 창원 NC 파크에서 은퇴식이 거행되었다. 본인을 프로로 입문시켜주고 전성기를 함께 했던 고향팀 삼성과 거액을 안겨주며 자신의 말년을 따뜻하게 해준 NC의 품에서 맞이하는 은퇴식인 만큼 의미가 있었다.[19]

이날 박석민의 장남이자 현재 북일고등학교에서 투수로 활약하고 있는 박준현이 시구를 하고 박석민은 시타를 했으며 NC 선수단은 전부 박석민의 현역 시절 등번호였던 18번을 달고 뛰었고, 삼성 선수단은 박석민의 삼성 시절 유니폼이 그려져있는 뱃지를 팔쪽에 달고 뛰었다.[20]

그리고는 마치 박석민의 앞날을 기원하듯 그야말로 재미있는 경기가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삼성의 3:2 역전승으로 경기를 마치게 되었다.
삼성팬들은 왕조기운이 묻어서 승리했다고 환호 중이며, 엔씨팬들은 박석민의 등번호로 인해 암흑기운이 묻어서 패배했다며 분노하는 중이다.

3. 국가대표 경력

2010년대 3루수 중 최정 다음 가는 선수였음에도 국가대표와는 거의 인연이 없다.[21] 다만 공격력이 부족해서 뽑히지 못했다기 보다는 수비와 주루까지도 신경써야되는 국가대항전 특성상 이 부분까지 고려한 결과 뽑히지 못한 것도 있으며, 시즌 내내 고질적인 손가락 부상을 달고 있다보니 시즌 후에는 회복에 집중해야 됐었기에 인연이 없었는 부분도 있다.

3.1. 2017 WBC

파일:17WBC 박석민.jpg
파일: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화이트 로고.svg
출전 타수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타율 출루율 장타율 OPS 도루 삼진 볼넷 상세
2 9 3 1 0 0 1 1 0.333 0.400 0.444 0.844 0 3 0 -

본선 1라운드 1차전에서는 팔꿈치 통증으로 결장했지만 2차전 네덜란드전에서는 7번 선발 3루수로 출장했다. 첫 타석에서는 뜬공으로 물러났지만 두 번째 타석에서는 선두 타자로 나서 좌익수 왼쪽 2루타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후속 타자의 침묵으로 홈을 밟는 데는 실패했다. 이후 2타석을 더 나왔으나 유격수 뜬공, 삼진을 기록했다.

3차전 대만전에서는 1타점 적시타를 기록하는 등 나름 분전하는 모습이었으나, 이미 2패로 본선 2라운드 진출이 무산된 가운데 대만 상대로도 연장 가서야 겨우 억지로 끝내기 승을 거두며 1승 2패로 대회를 마감했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rowcolor=#fff> 연도 출장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2004 삼성 23 29 .103 3 1 0 1 3 2 0 3 .188 .241
2005 52 81 .198 16 3 1 0 4 7 1 10 .283 .259
2006 군 복무 (상무 피닉스 야구단)
2007
2008 126 416 .279 116 27
(2위)
1 14 64 65 2 73 .385 .450
2009 97 295 .285 84 17 0 24 62 63 0 71 .416 .586
2010 112 356 .303 108 18 0 15 64 58 3 91 .440
(2위)
.480
2011 128 457 .278 127 24 3 15 86
(4위)
74 3 72 .374 .442
2012 127 443 .312
(4위)
138 19 3 23
(4위)
91
(2위)
79
(5위)
2 99 .433
(2위)
.524
(5위)
2013 117 396 .318 126 24 0 18 76 61 4 75 .425
(4위)
.515
(4위)
2014 110 356 .315 112 21 0 27 72 77 0 66 .419 .601
(5위)
2015 134 448 .321 144 25 0 26 116 90 3 102 .441
(3위)
.551
<rowcolor=#fff> 연도 출장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4사구 출루율 장타율
2016 NC 126 427 .307 131 20 0 32 104 77 2 72 .404 .578
2017 101 319 .245 78 15 0 14 56 43 1 63 .369 .423
2018 103 318 .255 81 14 1 16 55 40 1 54 .360 .456
2019 112 360 .267 96 17 1 19 74 49 1 77 .393 .478
2020 123 356 .306 109 15 0 14 63 58 0 85 .436
(1위)
.466
2021 59[22] 171 .257 44 8 0 10 41 27 0 29 .361 .480
2022 16 47 .149 7 2 0 0 2 3 0 10 .298 .191
2023 30 88 .193 17 1 0 1 8 9 0 17 .321 .239
<rowcolor=#373a3c> KBO 통산
(18시즌)
1697 5363 .287 1537 271 10 269 1041 882 23 1069 .402 .491

[1] 공교롭게도 지금은 삼성 라이온즈 소속이다.[2] 그런데 이후 찾아온 2004년 신인드래프트 당시 강민호를 뽑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정식을 선택한 것을 생각하면 과연 삼성이 강민호를 지명하기를 원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아리송한 지명 결과를 낳았다. 물론 당시 삼성은 발전 가능성이 농후한 유망주 포수보다 진갑용을 대신할 즉전감 백업 포수를 원했기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3] 삼성은 바로 전날 팀의 10연패를 끊었다.[4] 2020시즌 권오준권혁이 은퇴하면서 삼성 소속으로 2004년 한국시리즈를 경험한 마지막 현역 선수가 되었다.[5] 신용운은 바로 다음 날인 4월 30일에도 심정수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음으로써 이틀 연속 패전투수가 되고 만다. 자세한 사항은 신용운 항목 참조.[6] 이때까지 거의 김인식 감독 수준으로 유망주들을 박대했던 선동열 감독이 직접 키운건 당연히 아니었고 김응용 前 감독이 진작부터 밀어주던 양아들이었다. 박석민은 물론 채태인, 최형우의 기용도 감독 외에 사장과 프런트의 입김이 들어가 있었다.[7] 그리고 9년 후, 김주형은 생애 첫 출전한 한국시리즈에서 또다시 답이 없는 뇌수비로 KIA 팬들의 뒷목을 움켜잡았다. 다행히 양현종의 투혼으로 후속 타자들을 범타로 돌려세워 한국시리즈 역사에 길이 남을 대참사는 면했다.[8] 한 영상인터뷰에서 2009시즌 목표를 0.315 홈런 32개라고 말해 한대화 코치에게 정신병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박한이에 이어 공식 정신병자 2호였다.[9] 스스로 밝히길 배고플 때 못 먹으면 돌아버린다고 한다.[10] 박석민은 내야 땅볼을 친 후 살기 위해 1루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을 했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고 한다.[11] 이날 타 구장 경기는 모두 취소되고 대구에서도 두 번 중단되었다.[12] 수술 전에는 중지손가락을 제대로 구부리질 못했다. 평소에도 손가락에 붓기가 있는데, 경기 후에 붓기가 심해져 중지 두번째 마디가 보통 때의 두 배까지 붓기도 했다.[13] 그러고는 19시경에 대구구장에 도착했다.[14] 1위와 2위는 각각 10이대호 96홍현우.[15] 반면 이 해의 이승엽은 2002년의 마해영+양준혁 포지션.[16] 그나마 연봉은 90% 이상 삭감한다고는 하지만, 당연히 팬들의 반응은 좋지 않다.[17] 원본 게시물은 현재 삭제되었다.[18] 전체 지명자로 범위를 넓히면 강민호정우람, 이용규, 김진성을 더해 5명이 현역 생활을 이어나가게 됐다.[19] 기념영상, 비하인드영상[20] 뱃지를 단 팔의 위치는 선수들마다 선택해서 단 것으로 보인다.[21] 사실 최정도 국대에서는 큰 임팩트를 주지 못했고, 오히려 두 선수보다 리그 활약은 떨어졌던 황재균, 허경민이 국대에 단골로 뽑혀간 편이다.[22] 방역수칙 위반 관련 출장정지 징계 처분에 따른 시즌 조기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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