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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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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2세기경 바다 민족의 추정 활동 영역과 침입로
1. 개요2. 역사 및 가설
2.1. 기원전 18~14세기 루카(Lukka)인에 대한 기록2.2. 기원전 13세기 세르덴인의 내습2.3. 기원전 1150년경 람세스 3세의 해적 방어2.4. 기원전 1100년경 오노마스티콘 문서 (20-22왕조) 기록
3. 구성4. 영향과 의의
4.1. 바다 민족을 긍정하는 견해4.2. 회의적인 견해4.3. 절충적인 견해
5. 알려진 인물6. 창작물에서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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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다 민족(Sea Peoples) 또는 바다의 사람들(People of the Sea)은 고대 남유럽근동 일대에서 발생한 '후기 청동기 문명의 붕괴'(Late Bronze Age Collapse) 사태와 관련하여, 남아 있는 몇 가지 문헌 및 고고학적 증거를 토대로 추정하는 민족 또는 민족 집단을 가리키는 통칭이다.

이들은 멀게는 기원전 18세기, 가깝게는 기원전 12세기 사이의 기록에 등장하여 당시 강대국이었던 히타이트를 멸망시키고, 일대 메소포타미아, 그리스, 이집트를 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입힌 뒤 사라졌으며, 이들의 영향으로 많은 문명이 절멸하거나 급격한 정치적 변화를 겪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바다 민족은 고대 유럽 및 중, 근동 지역에 급속히 철기 시대가 도래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가 된다(→ '영향과 의의' 문단 참조).

2. 역사 및 가설

기원전 13세기 말에서 12세기 초엽, 그리스 본토, 키프로스 섬, 아나톨리아 반도, 그리고 가나안 등지의 유적에서는 대규모 파괴의 흔적이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성벽의 붕괴, 화재, 건축물의 파괴 흔적 등이 있다. 지중해 근처에서 비슷한 시기에 대규모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문명 파괴가 바다 민족의 침입으로 인한 결과라는 주장이 나오게 되었다.

2.1. 기원전 18~14세기 루카(Lukka)인에 대한 기록

바다 민족과 관련하여 상고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기록은 후기 청동기 시대 이집트 중왕국 시기의 것이다. 이 시기 이집트를 침범한 해적 무리들은 여러 민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주로 배를 타고 해안에 상륙해 도시를 약탈하는 방식으로 많은 중동 국가들과 이집트에 타격을 입혔다. 이들의 이름은 레바논에 남아 있는 오벨리스크의 기록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고유명사로 루카(Lukka)인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연대 측정에 의하면 이 기록은 기원전 2000년에서 1700년 사이에 쓰인 것으로 나온다.

그 뒤 루카인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기원전 14세기에 이집트의 기록에서 다시 등장한다. 이들은 이집트 제18왕조아멘호테프 3세가 지배하던 시기의 왕의 편지에서 용병으로 등장한다. 또한 루카인들은 이 시기에 이집트를 공격하기도 했다.

2.2. 기원전 13세기 세르덴인의 내습

이들은 100년 뒤인 기원전 13세기 이집트 제19왕조 람세스 2세의 치세때 등장한다. 람세스 2세의 재위 2년차에 이들 바다 민족의 일파인 세르덴인[1]들이 하이집트의 델타 지역을 침공했다가 격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나일강을 통해 배를 타고 침략했으며, 이집트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의 용맹과 항해술은 바다에서 견줄 자가 없었다고 한다. 이들 중 몇몇은 람세스 2세에게 생포당해 군대에 편입되어 최전선인 히타이트 국경에 보내졌다. 그 뒤 이들은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 제국이 충돌한 카데시 전투 때 등장하여 델타 부분에서 직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이는 람세스 2세가 카데시 전투에서의 자신의 활약을 새긴 기록에 등장하는데, 이를 기록한 10개 정도의 석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이에 따르면 람세스 2세에게 군대를 넷으로 나누라고 조언을 한 사람들이 바로 세르덴인들이라고 되어 있다. 이 외에도 람세스 2세의 근위병에 바다 민족이 있었기에 이런 조언이 가능했으리라 여겨진다.

2.3. 기원전 1150년경 람세스 3세의 해적 방어

람세스 3세 폐하 8년...[2]
외국 나라들이 그들의 섬에서 음모를 꾸몄다. 소동(騷動) 속에서 땅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흩어졌다. 그들의 무력 앞에서 하티, 코데, 갈그미스, 아르자와, 알라시야[3] 등이 일시에 잘려나가 남은 땅이 없었다. 아모르의[4] 한 곳에 진지가 세워졌다. 그들은 그 백성들과 그 땅을 완전히 황폐화시켜, 그곳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만들었다. 그들은 이집트로 오고 있었으며, 그들 앞에는 불길이 준비되었다. 그들 연맹에는 블레셋, 체커, 셰켈레시, 덴옌, 웨셰시[5] 등의 나라들이 참여했다.[6]
《고대 근동 문학 선집》(Ancient Near East Texts) 487-488쪽.[7] James B. Pritchard 편집, 강승일 역
이집트 제20왕조 람세스 3세의 치세 중 기록된 몇 가지 문서에서, 람세스 3세는 바다 민족의 침입에 맞서 전투를 벌여 승리했고, 이를 기념해 더 이상 바다 민족은 없다며 승전을 기록했다. 해당 기록에서는 바다 민족이 해안에 침공했으나 이집트가 강력한 방어를 구축하여 막아내고 모든 무기를 바다에 다시 내던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은 결코 바다 민족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결사적인 투쟁 중에 이루어진 사기 고취용 기록으로 봐야 할 부분이 많다. 실제로 이집트는 이후 제20왕조의 람세스 6세에 이르러 거의 붕괴에 가까운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며, 이집트 본토 바깥에 널리 뻗치던(특히 근동 지방, 가나안) 영향력은 사실상 소멸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이집트의 개별적인 약화가 아니라, 서구 후기 청동기 시대 세계 전체 붕괴의 한 축이라 할 수 있다. 히타이트 제국과 바빌로니아 지방, 그리스가 동 시기에 다 함께 멸망했고, 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에 걸친 긴 암흑기가 찾아왔다.

따라서 해당 기록은 아직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이집트가 연쇄적으로 붕괴하는 국제 무역망의 타격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결사적으로 발버둥치던 기록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후 이집트는 남쪽의 누비아, 서쪽의 리비아, 동북쪽의 가나안 등 여러 지역에 대한 외세의 공격과 반란을 기록하고 있다. 람세스 6세는 누비아 전쟁, 1차/2차 리비아 전쟁, 북부 지역 전쟁 등에서 승리하는 등 나름 성공적으로 국가를 지켜냈지만 경제적으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특히 아시아 방면에 대한 영향력 상실은 심대했다.

2.4. 기원전 1100년경 오노마스티콘 문서 (20-22왕조) 기록

《아메노페의 오노마스티콘》(Onomasticon of Amenope)은 제20왕조의 람세스 9세 시절 이집트 서기관인 아메노페(Amenope, ?~?)가 기록했다고 표기된 일종의 편저작으로, 가나안의 도시 이름들을 나열하며 이집트의 파라오들이 사실상 해당 도시들을 상실하고, 바다 민족들에게 해당 지역을 빼앗겼다는 참담한 기록을 담고 있다.

일반적인 학계에서는 이집트 역시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으므로 후기 청동기 시대 붕괴(BAC)의 대상으로 간주하지만, 재미있게도 이집트 학계에서는 거부한다. 명맥이 이어진 건 엄연한데 왜 아예 대가 끊긴 문명들과 엮어서 붕괴라고 하느냐는 식이다.

3. 구성

바다 민족이 정확히 어떤 존재인지 규정하기는 어렵다. 누군가는 히타이트와 적대하던 아나톨리아나 주변 국가의 연합 함대라고 이야기하며, 또는 소빙하기로 인해서 식량을 찾기 위해 이주한 난민들이 집단으로 바다를 건너 공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외에 이전부터 이집트를 침공했던 해양 세력인 에크웨시(Eqwesh), 테레시(Teresh), 루카(Luuka), 셰르덴(Sherden), 세켈레시(Shekelesh), 톄케르(Tjeker), 그리고 유일하게 동방(Levant) 지역에 영구히 정착한 부족인 펠레세트(Peleset) 같은 연합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렇지만 전부 납득하기 어려운 점들이 존재한다. 먼저 지금의 기록으로 볼 때, 아나톨리아 반도에는 히타이트, 이집트, 미케네, 키프로스 등의 4개 국가를 모두 상대해서 이길 만큼 강력한 국가는 없었다. 하나의 국가라면 모르지만 그 4개 국가는 지중해 동쪽에서도 가장 강력한 국가들이었다. 또한 아나톨리아 내의 국가와의 전쟁이라면 바다 사람 같은 불분명한 표시가 아니라 특정 아나톨리아의 국가들이 바다를 통해 침입했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나톨리아의 다른 국가들이 연합해서 공격했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무엇보다 이런 국가 간 전쟁은 그 땅을 점유하고, 자신의 영토로 포함시키는데 바다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소빙하기로 인해 먹을 것을 찾아 식량이 남아 있던 지역으로 몰려온 난민들이라는 가설도 이상하다. 왜냐하면 먹을 게 없어서 온 사람들이 전쟁 이후 논과 수로, 집을 다 불태워 없앤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또한 식량을 찾아온 난민일 경우, 어느 정도 군사력과 행정 능력을 갖춘 국가를 파괴할 정도의 군사력을 보유했을지도 의문이 있다.[8]

당시 지중해의 해적들이 연합을 해서 공격했다고 보는 것도 이상한 점이 많다. 해적들은 보통 해안지대를 습격하고 약탈만 해간다. 또한 국가도 아닌 노략질을 하는 사람들이고, 전문 군인도 아닌 불량배들이 당대 최강의 국가들을 그렇게 빠르게 단시간에 없앤다는 것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또한 위 기록대로라면 지중해 해적 연합은 지역도 출신도 전부 다르고, 언어나 문화가 달라 단합력도 떨어질 것이고, 노략질이 목적이라면 내륙까지 진격해서 굳이 다 불질러서 흔적도 없이 몰살시키는 게 무슨 이득이 있을까? 심지어 바다 사람들은 도시가 아니라 피해서 숨어 있는 난민들이 만든 마을까지도 찾아다니면서 파괴했다.

하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타이트나 이집트, 키프로스, 미케네 문명 등이 파괴당한 것이 엄연히 사실이기 때문에 그 가능성 중에서 아나톨리아 연합 혹은 해적 연합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제시하는 견해다.

이들 바다 민족들의 무기와 갑옷 등을 현대에 와서 다시 재현한 모습들을 묘사한 그림들: 링크[14]성경》에서는 바다 민족인 블레셋족이 크레타 섬에서 왔다고 기록했다.

4. 영향과 의의

4.1. 바다 민족을 긍정하는 견해

바다 민족을 평가하는 가설들은 이들의 존재가 미케네 문명히타이트지중해 문명들이 갑작스럽게 쇠락하고, 멸망했던 미스터리를 밝힐 실마리라고 보며, 더 나아가 고대 유럽 문화의 단절과 암흑시대의 시작, 청동기 시대에서 철기 시대로의 빠른 전환 등 많은 역사적인 사건에 바다 민족의 침략이 얽히고 설켜 있다고 주장한다.

철기 시대의 경우, 철기는 청동기보다 더 높은 온도에서 만들어지는데다가 청동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련해야 하므로 더 어렵고 손이 많이가는 기술이다. 당시 청동기는 기술이 충분히 성숙한 반면 철기[15]는 제련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품질면에서는 더 조잡했으며, 녹까지 잘 슬어 보관하기도 어려웠던 실정이었다. 그런 상황에 여러 국가들의 멸망으로 무역이 끊겨 청동기의 재료를 수입할 수 없게 되자[16] 살아남은 사람들은 재료가 충분한 철기를 연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철기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스에는 미케네의 성벽과 황금 장식품이 가득한 무덤 등 찬란한 유적이 남아 있었으나 엄청난 인명 손실과 주요 도시들이 모두 파괴되고, 복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천재지변이 일어난 듯한 모습을 남겨주었다. 스파르타가 위치한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거주민의 90%가 죽거나 달아나 무인 지역이 되었고, 이 무인지대를 북쪽에서 내려온 도리아인이 차지하여 라케다이몬(우리가 흔히 말하는 폴리스 시대의 스파르타)을 세웠을 지경이었다. 바다 민족의 대이동이 끝난 직후, 겨우겨우 살아남은 도시의 생존자들이 폐허 위에 다시 거주지를 건설한 나라인 리디아를 포함해서 레반트 지역 등에 간간이 남아 있었으나, 그마저도 기원전 6세기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에 점령되면서 사라졌다.

또한 국가 간, 도시 간의 무역도 완전히 끊어지고, 길마다 도적떼가 들끓었으므로 자연히 무역 활동도 없어졌으므로 문명을 복구하려는 노력 자체를 힘들게 만들었다. 게다가 무역로를 복구하려면 아직 바다를 지배하는 바다 민족부터 쓸어버려야 했다. 다시 해상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은 그리스에 폴리스가 다수 발전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사실 폴리스라는 도시문명이 발달하는 이유도 무역 루트가 전멸하면서 파편화된 도시들이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와중에 생겨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선문자 B를 포함한 문자 사용도 끊어져서[17] 역사학적 의미 그대로의 진짜 암흑시대가 되었다. 남아 있는 기록이란 게 호메로스의 서사시 정도 외에는 없다. 이것도 당대에 문자로 쓰인 게 아니라 암송을 통해 구전된 것을 후대인 기원전 8세기에 호메로스가 기록한 것이었다. 덕분에 지중해와 인접한 문명이 거의 궤멸 상태에 놓이면서 피해가 가장 적었던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아시리아 세력이 막강해지기 시작했으며, 이로 인해 한때 이집트, 이스라엘, 시리아 등 전 근동이 아시리아의 지배에 놓였고, 다시 독립했으나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인해 다시 식민지가 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암흑기로 부를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는, 히타이트나 이집트 같은 강대국이 멸망하거나 쇠락하면서 고도의 문명을 지탱하던 사회 시스템이 붕괴했고, 그렇기에 문자를 기록하고 해독할 수 있는 엘리트/사제 계층 자체가 고대 세계에서 거의 소멸 수준으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청동기 시절 동안 방대한 양의 자료를 기록하던 문자 유물들이 후기 청동기 시대의 종말과 더불어 뚝 끊겼으며, 철기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제국이 다시 사회 시스템을 회복하기까지 수백년 동안 거의 아무런 문자 유물들이 남지 않은 것을 볼 수 있다. 이 역사를 탐구하기 시작했을 당시 서양인들에게 이러한 역사의 공백기는 서로마 제국 붕괴 이후 중세 초의 혼란기를 연상시켰다.[18]

그리스 신화에서, 과거로 갈수록 문명이 발달했으나 시대가 지날수록 야만적이고 퇴보한다는 관념을 담은 '황금의 시대, 은의 시대, 청동의 시대' 같은 인간의 다섯 시대를 묘사한 것이 문명이 붕괴하고 과거의 기록과 기술이 속절없이 대가 끊기는 종말적인 시대에서 과거의 찬란함을 추상화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4.2. 회의적인 견해

이 시기에 '바다 민족'이라고 불리는 다수의 해적 집단들이 활동했다는 사실 자체는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에 근거할 수 있지만, 이들이 고대 지중해 문화의 단절이나 후기 청동기 시대 붕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가설은 지나치게 실험적이며, 고대 유럽사의 다른 요인을 배제한 극단적인 가설이라는 비판이다. 실제 주류 학계에서는 비판적인 견해가 적극적인 견해보다 더 우세한데, 이들의 영향력을 고증하고 연구하기에는 사료가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호주의 고대 근동사학자인 트레버 브라이스(Trevor Bryce)는 이러한 '정체불명의 해양 민족들에 의한 지중해 청동기 문명의 멸망' 가설을 반대한다. 그는 이를 근동 각지에서 발생한 '민족 이동'이라는 큰 틀의 현상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들의 이동과 약탈은 당시 후기 청동기 세계의 재앙을 가져온 원인이 아니라, 반대로 혼란한 후기 청동기 시대의 상황과 소빙하기로 인한 극심한 가뭄으로 인해 고향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으려던 결과적 현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해양 민족'들이 청동기 시대를 마감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 역시 가뭄과 이미 저물어 가던 청동기 시대의 영향을 받아 '민족 이동'을 하게 된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후학적인 연구에 따르면, 이미 람세스 2세 이전부터 시리아소아시아 지역에서는 가뭄이 시작되고 있었다. 람세스 2세의 치세때는 히타이트 왕이 빈번한 가뭄으로 인해 이집트에 곡물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이때 람세스 2세는 '히타이트와 바빌로니아의 생명은 자신에게 있다'라고 기록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렇게 각지에서 흩어져 나온 해양 민족이라고 여겨지는 집단들은 아나톨리아 반도가 아닌 이탈리아 반도 남부, 시칠리아 섬 서부, 사르디니아 섬, 팔레스타인 등 각기 다른 곳에 정착했다. 이는 기원전 3세기의 "켈트족 대이동", 서기 3세기의 "게르만족 대이동", 서기 8세기의 "바이킹족 대이동"과도 유사한 경우로 볼 수 있다.

미국의 고고학자인 Eric H. Cline 교수는 청동기 국가들의 몰락은 어느 한 가지의 드라마틱한 사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청동기 문명의 쇠퇴에 있어서 바다 민족의 이동은 단지 여러 원인들 중 하나일 뿐이며, 근동의 청동기 국가들의 몰락은 전쟁이나 기후 변화, 자연 재해, 전염병 등의 복합적인 원인에 의해 수백년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4.3. 절충적인 견해

오랜 기간 많은 고고학자들의 연구와 발견 등에 따르면 바다 민족이라는 이들이 미케네나 히타이트 등 동지중해 문명에 그리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다수이다. 왜냐하면 '바다 민족' 또는 '해양 민족'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침략은 그 전부터 있었던 일이고, 아무리 이들이 강력하다고 해도 이들만의 힘으로 문명들을 모조리 아작낸 것도 모자라 미케네에 약 400년 동안의 암흑시대를 가져왔다는 것은 약간 지나친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케네 문명은 선무적인 사상과 지나친 호전성이 극에 달해서 휘청거리는 시기였고, 히타이트의 경우에는 카데시 전투 이후 이집트와 신흥 강대국인 아시리아에게 밀려 약화일로를 걷고 있었으며, 크레타의 경우에는 진작에 이빨 빠진 호랑이로 전락했다. 그러니까 히타이트와 크레타, 미케네의 몰락은 원래부터 예정된 것이었으며, 바다 민족은 그 시기를 조금 앞당겼다는 것 외에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다는 것이다.

이민족이야 늘 있는 것이고, 이들이 약탈을 시도하는 거야 늘 발생하는 일이지만, 소빙하기가 닥쳐 수십 년간의 기근으로 도시 체제 자체가 붕괴하고, 수비할 수 있는 군대를 만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문명이 쇠퇴한다면, 불과 얼마 안되는 해적이나 난민에 의해 국가 시스템이 충분히 붕괴할 수 있다. 수십 년간의 기근이 시민도, 군대도 다 증발시켜 버린 후에 이민족이 형체만이라도 남아 있던 도시의 숨통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세계 판도를 본다면 히타이트는 자멸하거나 이집트, 아시리아에게 격퇴될 것이 자명했으며, 미케네의 경우에도 윌루사 정복 이후 힘이 한 풀 꺾여 이렇다 할 정복 활동을 하지 못했다. 바다 민족이 문명을 몰락시키고 암흑기를 가져올 수 있었던 건 시기가 맞았기 때문이지, 이들이 엄청나게 막강하다거나 했던 것은 아니었다. 만약 바다 민족이 히타이트의 최전성기였던 기원전 14세기 수필룰리우마 1세 시대에 쳐들어 왔었다면 바빌로니아까지 발아래 둔 히타이트의 막강한 군대에게 가루가 되어버렸을 것이고, 미케네의 최전성기였던 기원전 15세기경 크레타-미케네 전쟁 당시에 쳐들어왔었다면 압도적인 미케네의 호전성에 패퇴했을 것이다.

따라서 바다 민족은 지중해 문명의 멸망의 시발점이나 원인이 아니라, 복합적인 부담 요소 중 하나이거나 청동기 쇠퇴기의 사회 혼란이 불러온 인구 대이동, 침략민 및 난민, 난민으로 인한 소요로 인한 반란 등으로 인한 결과로서 발생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5. 알려진 인물

6. 창작물에서의 묘사

반론들도 많지만 당대 지중해의 강대국들을 모두 멸망시키고 그 일대를 초토화시켰다는 행적 때문에 후대엔 훈족처럼 '문명의 파괴자'라는 상징성과 속성을 부여받게 되었다.

또 바다에서 온 문명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정체불명의 집단이라는 점에서 착안하여 인간이 아니라 마치 크툴루 신화딥 원 같은 어인 종족으로 묘사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1] 아나톨리아 반도 혹은 사르데냐 섬이나 시칠리아 섬 등 지중해에서 기원한 민족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기원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으나 이후 이들의 양식으로 만들어진 유물이 사르데냐 섬에서 주로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볼 때, 사르데냐 섬에 최종적으로 정착했다는 것이 정설이다.[2] (발췌자 주석) B.C. 1188년[3] (책 속 주석) 하티는 히타이트 제국, 코데는 실리시아 해안과 시리아 북부, 갈그미스는 유프라테스 강의 도시, 아르자와는 실리시아 해안 또는 근처, 알라시야는 아마도 깃딤 섬일 것이다.[4] (책 속 주석) 아마도 시리아 북부 평원 또는 코일레 시리아[5] (책 속 주석) 블레셋을 제외한 이름들은 이집트 글에 가깝게 옮겨졌다. 체커에 대해서는 <웬아몬 이야기>를 참고하라. 셰켈레시는 시켈로스, 덴옌(설형문자로는 다누나)다나오이일 것이다. 웨셰시는 후대의 어느 민족과도 쉽게 연결시킬 수 없다.[6] (발췌자 주석) 이 문헌 텍스트는 상이집트 테베에 있는 메디네트 하부의 람세스 3세 신전의 것이다.[7] 원서에선 262-263쪽.[8] 하지만 소빙하기로 인해서 이집트와 히타이트 같은 나라들도 국가 체계가 흔들릴 만큼 큰 타격을 받았다면 이미 군사력과 행정력이 무너진 상태이므로 그렇게 군사력이 강하진 않았을 것이고, 난민들의 경우 체계적인 행정 조직이 없고 민족 구성도 달랐기 때문에 서로간의 협업이나 체계적인 관리를 못해서 식량 문제를 해결한 후 서로 싸우고 분열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논과 수로 및 집이 타서 사라졌을 수 있다.[9] 아나톨리아 남부 지방인 리키아(Lycia)의 명칭으로 남아 있다.[10] 멸망한 히타이트 제국의 유민들이다.[11]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민족으로 추정되며, 라틴어를 포함한 현대 로망스어군의 먼 친척뻘 되는 언어를 사용했다고 추정된다.[12]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민족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기원은 불명이다. 그들이 오랫동안 가나안 등 셈어파 화자들과 교류하다가 셈족화했는지 셈계 언어로 써놓은 비문만 남아 있는데, 여기에 나오는 인명과 출토된 공예품 등을 통해 본래 그리스와 관련이 깊은 민족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구약성서》의 <사무엘기>에 뻔질나게 나오는 블레셋인들이 바로 이들로, <아모스서>에선 이들이 캅토르(보통 킬리키아, 키프로스 섬, 크레테 섬 등 지중해 북동부 연안으로 비정된다.)에서 기원했다고 쓰여 있다.[13] 점토 제품을 초벌구이한 테라코타만 봐도 단순 건조 과정만 거친 점토 제품이나 생 점토보다 훨씬 보존성이 좋은 것을 알 수 있다.[14] 위에서 9번째 그림은 《구약성경》의 다윗골리앗이 대결을 벌이는 모습을 묘사한 삽화인데, 블레셋인들은 그리스~아나톨리아 근처에서 기원했으리라 추정된다. 이와 더불어 골리앗이란 이름을 그리스의 칼리아데스, 카리아의 울리얏 등의 인명과 연관짓는 주장도 종종 제기된다.[15] 하투사스(히타이트)의 한정된 고급 철기만이 청동기와 비견할 수 있었다.[16] 청동구리주석 등등 여러 금속을 섞은 합금이다.[17] 이후 그리스 문명이 재건되고 부활하면서 페니키아 문자를 차용해 그 유명한 그리스 문자가 만들어졌다.[18] 다만 오늘날엔 중세 전체는 물론이고 중세 '초'에 대해서도 퇴보하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청동기 문명의 붕괴가 그런 통념적 이미지를 연상시킨다는 의미일 뿐.[19] 애초에 바다 민족으로 인해 교역이 단절되었다고 설명하는데 그럼 그 전에는 교역이 활성화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그 얘기는 교역로에서 진을 치든 어쩌든 강도질하려는 작자도 드글드글하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