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11 14:29:17

미와 와사부로

미와 경부에서 넘어옴
<colbgcolor=#000,#050505><colcolor=#fff> 미와 와사부로
[ruby(三, ruby=み)][ruby(輪, ruby=わ)][ruby(和, ruby=わ)][ruby(三, ruby=さぶ)][ruby(郞, ruby=ろう)]
파일:201506_9 (三輪和三郞) (2) - 복사본.jpg
경성종로경찰서 사진첩(사진집) (1926). 빨간 동그라미 속이 미와 경부.#.
별명 염라대왕
출생 1884년
일본 제국 아이치현 이나자와시
사망 1968년?[1]
국적
[[일본 제국|]][[틀:국기|]][[틀:국기|]]
직업 경찰
계급 경부
종교 불교
학력 메이린 중학교
아버지 미와 리사에몬(三輪利左衛門)
배우자 미와 유키코(三輪幸子)[2]
자녀 장남 미와 키요시(三輪淸)[3]
차남 미와 이사무(三輪務)[4]
삼남 미와 타쿠(三輪拓)[5]
장녀 미와 케이코(三輪桂子)[6]
사남 미와 료(三輪了)[7]
차녀 미와 하루코(三輪治子)[8]
소속 종로경찰서

1. 개요2. 생애3. 최후에 관한 설4. 경력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일제강점기에 악명을 떨쳤던 일본인 고등경찰관. 일명 삼륜(三輪) 경부.

2. 생애

일본의 메이린(명륜)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 나고야 기병(名古屋 騎兵) 제3연대에 입대, 이어서 동 제17연대로 전속되었다. 1905년 10월, 제13사단 기병 제17연대로 옮기고 한국 수비를 위해 한반도에 건너왔다. 1908년, 고등계 경찰관이 되어 훗날 경기도 경찰부 고등경찰과 조사계 주임으로 근무하였다. 그는 경찰관이 된 이때부터 조선인 사상범들을 체포해 악명을 떨쳤다.

사상범 사찰 업무에 두각을 나타내어 한용운, 이상재, 박헌영, 김구, 김좌진, 윤동주, 안창호, 의친왕 이강[9], 나석주, 신불출, 김원봉, 김상옥, 이봉창, 나철, 안중근, 방정환 등 신분, 성향, 직업, 나이 등에 상관없이 항일성향이 있는 인물이라면 그의 손에 거치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없을 정도로 조선인들에게 악명을 떨쳐 "오니 게이부"(귀신 경부), "염라대왕"이라는 별칭으로 악명이 높았으며 그가 종로통에 나타나면 조선인들은 피해다녔다고 한다.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능력이 탁월했으며 고등경찰 방면에 정통하여 경찰 내에서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해방될 때까지 조선에 머물러 조선어도 유창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실제로 조선어장려시험 갑종 1등에 합격하고, 경찰관 공로 휘장(警察官功勞徽章)을 수상한 경력도 있다. 이런 유창한 조선어를 무기로 그는 1930년대까지 일선 경찰관으로 활동했다.

주로 악평은 달지 않는 조선신사흥신록 평에 의하면, 의외로 평상시 성격이나 성품은 온후하고 독실해 부하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취미는 다도, 꽃꽂이였다.[10] 종교는 불교(선종). 다만 당시 동아일보가 전한 다른 평에 의하면, 1928년 총독부 경무국으로 전보된 이유가 경성 부호나 귀족들과 연줄을 맺게 된 미와가 거만해져서 상관도 무시하고 전횡을 일삼는다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독립운동가들에게도 복합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일단은 냉혹한 일제의 사냥개로 독립운동가나 사상범을 잡기 위해 해외 출장까지 다녀올 정도로 집요하고 용의주도한데다가 잔인하고 질긴 놈이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였지만, 한편으론 독립운동가 이상재의 유머를 전하는 글에 의하면 그를 아버지라 부르는 등 친근감을 과시했고, 또한 한용운조선불교청년회가 주최한 집회에서 연설할 때, 그의 사상적인 연설에 감화를 느낀 것처럼 행동하면서 열렬히 박수를 쳤다고 한다. 강우규 의사가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투척했다가 실패한 후 처형당했을때도, 그의 자식들에게 언론인 야마구치가 보낸 돈을 대신 전달해주면서 "일본 사람 중에도 이와 같이 좋은 사람이 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11] 또한 전우진을 심문하여 김상옥의 거처를 알아내어 김상옥이 죽는 원인을 제공하였음에도 정작 김상옥이 사망한 후 1925년에 김상옥의 무덤에 찾아가 참배하고 헌화했다고 하며 김상옥의 사망 이후 김상옥의 남자다운 기백과 애국심에 존경을 표하며 무릎을 꿇고 울었다고 전해진다.[12]

안창호를 심문한 후 그의 인격에 감화된 듯한 모습을 보인 적도 있고, 방정환에 대해서도 흉측하지만 절대 미워할 수 없는 놈이며 내지인이었다면 든든히 한자리 잡았을 거라며 그의 재능을 아까워했다고 한다. 악질 형사로만 알려진 미와를 생각해본다면 꽤나 괴리감이 있는 셈이었다.[13] 그러나 이러한 일화를 종합해보면 독립운동가들을 냉혹하게 탄압하면서도 몇몇 독립운동 명망가들에겐 격식을 갖추고 머리를 숙이면서 인간적인 친분을 맺으려고 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이것은 수사 대상에게 그만큼 밀착하기 위한 기만술에 능한 인물로 볼 수 있다.[14][15]

1923년에 김상옥종로경찰서 투척 사건을 일으키면서 특별수사대가 설치되자 그 대장에 임명되었다. 김상옥이 은신처인 매부 고봉근의 집에 숨은 것을 탐지하여 경찰서장에게 그 사실을 알렸으며, 1926년에 허무당 선언의 주동자를 체포하였다. 1927년에는 고문을 가하다가 피의자들에게 고소를 당하였지만 불기소처분으로 끝났다.[16] 이외에도 미와 경부가 종로경찰서 고등계에서 어떤 일을 하였는지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 검색하여 자료를 찾아보면 된다. 미와 경부를 제외하고 요시노(길야)경부보 또한 악질로 악명이 높았다.

최종 계급은 경시였으며, 승진 후 원산경찰서장과 함북 고등과장을 지내다 1939년 퇴임하고, 이후 광복 전까지 종로쪽에서 자리를 잡고 이런저런 활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마지막 공식자료는 1944년까지 등장하는데, 총독부 어용신문이었던 매일신보 1944년 3월 27일자에 의하면 종로총궐기위원회(鍾路總蹶起委員會) 특별위원으로 참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3. 최후에 관한 설

말년 미와의 자료가 거의 없어서 그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여러 말들이 떠돌고 있는데, 대중들에게 어느정도 알려진 설로는 해방 후 은둔 생활을 하던 중 일본으로 돌아가 1968년 쯤에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 해방 후 그가 일본으로 돌아갔으며 1968년이나 그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 일본에서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미와 와사부로의 공식적인 행적을 국사편찬위원회에 문의하여 확인한 결과, 미와 와사부로의 공식 자료는 1944년까지 자료가 있으며, 그 이후 자료는 현재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자료가 없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답변(아카이브 링크)

헌데 <그와 나 사이를 걷다-망우리 사잇길에서 읽는 인문학>(김영식, 2015, 호메로스) 45~47쪽 내용에 따르면, 미와는 1968년 정초에 연하장을 당시 동경에 거주하던 김을한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 책에 따르면 저자는 도쿄외국어대학 도서관 자료실에서 이 연하장의 존재를 발견했는데, 도쿄 거주 지인에게 부탁해 내용을 확인해본 결과, 미와는 해방 후 일본으로 귀국해 고향인 아이치현에 머물고 있었으며, 기력이 쇠해 4남이 도쿄 미쓰이 본사에 근무 중이지만 아들 보러 도쿄에 갈 수 있을지 확답도 못하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춘원 이광수의 부인이었던 산부인과 의사 허영숙이나 예구 김객진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17]

참고로 김을한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일보 기자로 종로서 담당을 한 바가 있었다. 이후 연하장 등의 자료가 아마도 없는 것으로 보아 1968년에서 멀지 않은 시기 미와가 사망한 것 아니냐는 설에 무게가 실린다. 그리고 만약 이 글을 사실로 볼 경우, 미와는 해방 후 본국으로 돌아가서 칩거하며 지내다가 80세를 훌쩍 넘기고 죽었으니 그 시절 평균 수명까지 생각해보면 매우 장수한 축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18]

해방 후 스스로 자살했거나 김두한이 살해했다는 설도 존재한다. 김두한의 회고록에 의하면 뒷산에 생매장했다고 주장하는데, 학계에서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는 설이니 걸러듣는 것이 좋다. 또한 패망 이후 GHQ가 일반 경찰 조직은 그대로 살려 치안에 투입했던 반면에 고등경찰 소속이었던 자들은 재임용[19]하지 않고 전부 해고시켜서 실업자로 만들었고, 오만하고 폭압적으로 일본 국민[20]을 대했던 업보[21]로 대부분 숨어 살았던 것을 감안하면 미와도 은둔해서 소식이 끊기는 건 필연이다.

4. 경력

5. 대중매체에서


[1] 자세한 내용은 아래 최후에 관한 설 문단 참조.[2] 1888년 11월생. 長崎縣, 이이토오 켄스케(飯東顯助)의 누나. 고녀 졸업. 취미는 다도, 꽃꽂이[3] 1910년생. 東京商大 재학[4] 1911년생. 善隣商業 졸업. 殖銀 근무[5] 1913년생. 京商 졸업. 京電 사원[6] 1918년생. 京城第一高女 재학[7] 1921년생. 京城中學 재학[8] 1923년생[9] 이강을 요시찰 감시대상으로 감시한 인물이 미와 와사부로였으며, 이강은 망명 당시 미와 경부를 따돌려 망명시도를 했지만 목적지를 앞두고 일경에 발각되었다.[10]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三輪和三郞 문서.[11] 1921년 2월 27일 동아일보 휴지통. 당시 폭탄을 던진 자리엔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 경성지국장 야마구치도 있었는데, 그는 이때 부상을 입고 일본에서 치료 중이었지만, 이후 강우규가 처형당하고 그의 자식들이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자 돈 10원을 전달해달라고 종로경찰서에 보낸 것이었다.[12] http://www.ilyoweekly.co.kr/news/articleView.html?idxno=7693[13] 다만, 야인시대에서도 저런 모습을 보였었다. 한용운이 오자 굽신굽신 거리며 반갑게 맞이했으며 한용운에게 뺨을 맞고 화를 냈지만 내쫓는 선에서 그쳤다.[14] 원래 이런 방식은 반체제 인사에 대한 감찰 업무를 보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수법이었다. 군사정권 때도 중앙정보부나 경검의 요원들이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선물을 보내고, 식사 대접을 하며 인간적인 교분을 쌓으려는 접근이 생각보다 흔했었다. 실제로 김구도 백범일지에서 차라리 고문을 받으면 반항심에 악으로라도 버티는데 이렇게 마음을 흔드는 방식으로 다가오면 오히려 버티기 힘들다며 회고한 적이 있었다. 반대로 자신이 감시하거나 고문하는 대상에게 인간적으로 감화되어 따르는 경우도 있다. 독립운동가였다가 훗날 친일파로 변절한 최린도 친일파 경찰로 일하던 신철이라는 사람을 설득시켜 이 사람은 3.1 운동에 대한 허위 정보를 퍼뜨려 일본 경찰들을 엉뚱한 곳에 배치하게 만들었고 3.1 운동 이후에 구속되자 유치장에서 숨겨둔 청산가리(시안화칼륨)를 먹고 자결해버렸다.[15] 사실 큰 뜻을 품은 지사들을 보면 적이라 해도 일단 존중해주던 유교적/메이지 시대의 풍습이 당시 일본 사회에 아직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에 조선인 장교들이 권총을 반출해 독립운동가에 넘기고, 독립군이 될 것이 뻔한 탈영병들을 돌봐주었던 등의 "군기 문란" 행위를 저지르는 것을 알고도 덮어주는 일본인 상급자들이 간간이 있으리라는 시각처럼, 정말로 독립운동가들의 뜻에 감명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16]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2935147[17] 이 외에도 본문을 보면 미와의 경력과 가족관계, 여러 독립운동가나 김두한과의 일화 등도 나와있다.[18] 참고로 1960년대 말 기준으로 한국 평균수명은 60세, 일본 평균수명은 70세 정도였다.[19] GHQ 철수 후 일부는 공안조사청 직원으로 재임용됐다.[20] 한국 드라마 때문에 일본인은 우대하고 조선인만 가혹하게 대했던 것 같지만 이 시기 일본 경관들은 하나같이 인권 따윈 개나 준 시절이다. 특히 고등경찰은 더욱 가혹했다.[21] 그 중에는 직접 찾아가서 보복폭행을 가했던 사례도 적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