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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6a38><colcolor=#fff> | |||
출생 | 1932년 9월 26일 ([age(1932-09-26)]세) | ||
인도 제국 펀자브 주 가흐 (現 파키스탄 펀자브 주 가흐) | |||
재임기간 | 제13대 총리 | ||
2004년 5월 22일 ~ 2014년 5월 26일 | |||
서명 | |||
링크 | |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046a38><colcolor=#fff> 학력 | 펀자브 대학교 (경제학 / B.A.) (1948-1952년) 펀자브 대학교 (경제학 / M.A.) (1952-1954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존스 칼리지 (박사과정) 옥스퍼드 대학교 너필드 칼리지 (경제학 / Ph.D.) | |
종교 | 시크교 | ||
신체 | 175cm | ||
소속 정당 | [[인도 국민 회의| 인도 국민 회의 ]] | ||
약력 | 인도 연방상원의원 (아삼 주) 인도중앙은행 총재 인도 재무부장관 인도 기획위원회 부위원장 인도 연방상원의장 (1998년 - 2004년 5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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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도의 정치인. 제13대 인도 총리를 지냈다. 힌두교가 초강세인 인도에서 현재까지 유일한 시크교 총리이며, 자와할랄 네루에 이어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총리이기도 하다.여러모로 당시 인도 정국을 진정시키고 10년 동안 인도 경제를 성장시킨 인물이지만, 임명 당시부터 국민회의의 당수 소냐 간디가 사실상 양보해준 입장이라 활동기엔 소냐 간디의 허수아비 아니냐는 안티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전
만모한 싱은 1932년 9월 26일 펀자브 주 가흐 지방에서[1] 시크교 집안인 아버지 구르묵 싱과 어머니 아므릿 카우르[2]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만 어릴 적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 성장기는 거의 조부모의 손에 자라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후 인도 제국이 독립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갈라질 때 가흐 지방이 파키스탄에 속하게 되자 가족들과 함께 1947년 인도 암리차르 지방으로 넘어왔다.만모한 싱은 펀자브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1952년에는 석사 학위를, 1954년에는 박사 학위를 연달아 따냈다. 1957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또 경제학 학위를 따냈고, 이후 인도로 돌아와 펀자브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1960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경제학 쪽으로는 인도 끝판왕 수준의 커리어를 쌓았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에서 둘 다 경제학 학위를 받은 셈.[3]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수료한 후 국제 연합의 무역개발회의에서 1966년부터 1969년까지 약 4년 동안 일했고, 1969년부터 1971년까지는 수도 델리 대학교에서 국제무역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다 그를 눈 여겨본 당시 철도부장관 라릿 나라얀 미쉬라가 1971년에 그를 대외무역부 경제자문위원으로 삼으면서 정계 쪽에 처음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2.2. 정계 입문 후
중앙 정치권에 들어온 만모한 싱은 탁월한 경제 감각을 발휘하며 70년대와 80년대에 인도 중앙은행 총재, 수석경제보좌관, 기획위원회 위원장 등 경제와 관련된 요직이란 요직은 모조리 거치면서 승승장구했다. 이후 1987년부터 1990년까지는 사우스 커미션[4]의 사무총장을 역임했고, 1990년에는 찬드라 셰카르 총리의 경제보좌관으로 뽑혔다. 1991년 인도가 경제위기를 맞자 당시 총리였던 P. V. 나라심하 라오가 만모한 싱을 재무부 장관으로 임명했고, 만모한 싱은 인도 경제 자유화를 선포하며 성공적으로 경제위기를 넘겨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실제 그가 재무부장관 직에 부임했을 당시 인도 경제는 상당히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인도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의 8.5%에 가까웠고 경상수지 적자는 전체 GDP의 3.5%에 달하면서 경제 지표들이 수직하락하고 있었던 것. 어쩔 수 없이 인도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에 손을 벌려야 했지만 국제통화기금은 구제기금을 지원하는 대신 인도 정부가 그때까지 시행하던 정부 통제 정책을 완화해야한다는 조건을 걸었다.
이에 만모한 싱은 인도 제국 시절부터 내려와 1947년부터 시행된 기업 허가제 등 각종 규제 정책을 철폐하는데 앞장선다. 참고로 이 기업 허가제는 80개 이상의 정부 조직 허가를 받지 않으면 그 어떠한 사업체도 함부로 서비스나 상품을 생산하지 못하게 만드는 제도였다. 때문에 90년대까지 인도 경제 자유화에 큰 악영향을 주고 있었고, 허가를 받기 위한 경제 기업인들과 정치인들 사이에선 정경유착이 만연했다. 만모한 싱은 1991년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런 악법들을 대거 뜯어고쳐야한다고 주장했고, 여당내 반대 기류에도 만모한 싱은 끝끝내 나라심하 라오 총리의 허락을 받아내는 데 성공한다. 이와 더불어 외국인 직접투자 규제 완화 등 인도는 1991년부터 본격적인 개방 경제 체제로 접어들게 된다.
이런 경제적 공로로 얼마 가지 않아 인도 국민 회의를 이끌게 된다. 정계 입문 전까지만 해도 만모한 싱의 정치적 입지란 것은 기술관료인 테크노크라트 경력 정도에 불과했지만, 인도 국민회의가 1996년 총선에서 패배한 후에는 약 7년 간 야당 당수로 머물렀고, 2004년 총선에서 다시 인도 국민회의가 정권을 잡자 당수 소냐 간디의 예측지 못한 양보로 총리직에 오르게 된다.[5]
2.3. 인도 총리
만모한 싱을 총리로 지명하는 압둘 칼람 대통령[6] |
일단, 1991년 기업 허가제를 폐지했던 만모한 싱답게 총리에 취임한 이후에도 경제 개방 정책을 밀어붙였다. 덕분에 그의 임기 내내 인도는 8~9%의 경제 성장률을 기록했고 특히 2007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권이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얻어내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인 경제 분야 치적에는 2005년 제정한 '고용보장법'이 있다. 고용보장법의 기본 취지는 시골 빈민들의 기초적인 생활을 보장한다는 것으로, 내용은 대강 시골에서 미숙련 육체노동자가 일자리를 구할 때 정부가 의무적으로 최소 100일 간의 일감을 책임지고 그에게 찾아주어야 한다는 것. 이동에 불편이 없도록 구직자가 사는 거주지에서 최대 5km 내에 있는 일자리를 소개시켜줘야하며 만일 일자리를 찾아주지 못할 시 정부에서 실업수당을 지급해야 한다. 워낙에 최악이었던 인도의 미숙련 빈민들을 구제하기 위한 법이다. 평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으로, 세계은행이 2014년 보고서에 '인도 농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라고 평가하기도 할 정도였다. 2005년에는 판매세 대신 부가가치세를 새로 도입했다.
만모한 싱의 출신 정당이 아무래도 좌파 정당인[8] 인도 국민회의이기 때문에 만모한 싱 역시 보건복지에 신경을 많이 썼다. 만모한 싱은 2005년 정부 출범 직후 국가농어촌보건프로젝트(NHRM)를 발족했다. 이 NHRM의 주요 목적은 열악한 인도의 기본 보건 체계를 강화하고 모든 인도인들이 더 나은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임산부에게 기초적인 위로금을 지급하고 의사들을 시골에 대거 배치하는 등 상당히 성과를 거두었다. 만모한 싱 정권 이후 집권한 인도 인민당의 모디 총리 역시 다른 보건 프로젝트들은 모조리 예산 삭감하는 와중에 이 프로젝트만큼은 남겨두어 2018년과 2020년에는 오히려 확대할 정도였다. 이 프로젝트 덕분에 인도의 영아사망률은 2005년 1,000명 당 55.7명에서 2015년 35.3명으로 급감, 임산부 사망률도 10만 명 당 2006년에 250명에서 2013년 170명으로 줄어들었다. 그 외에도 반대 시위에도 불구하고 소외계층에게 인도 공과대학교 등 명문대의 27%를 의무배정하는 등의 정책도 폈다.
다른 여러 법안들도 남겼는데, 2005년 제정한 '정보권 보장법'이 대표적이다. 워낙 낙후된 인도의 공공정보 제공 시스템을 개선하고자 하는 취지로 만들어진 법인데 주 내용은 인도 시민권을 가진 그 어떠한 사람이라도 정부에 개인정보를 문의할 시 정부는 무조건 30일 내로 이에 답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연금이나 기본권에 관련된 내용이면 무조건 48시간 내에 답변해야하도록 법에 규정해놓았다. 하지만 좋은 취지와는 다르게 부작용도 많다. 정치인들이 제 정적의 약점을 잡고자 일부러 정적의 개인정보를 문의해 빼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고, 부정부패가 심각한 인도 공무원 특성상 원래 알려주는 안되는 정보까지도 은근슬쩍 빼가면서 악습이 심각하기 때문. 이로 인해 정보권 보장법을 옹호하던 인사들이 연달아 테러를 당하는 등 많은 반대가 있었다. 개인정보 보호나 사생활 침해 우려 때문이라도 폐지되어야한다는 목소리가 크지만 정보권 보장이 투명한 정보관리에 필수적인 말들도 많아서 아직까지 폐지는 안되고 있다.
외교 면에서 보자면 P. V. 나라심하 라오 총리 시절부터 이어진 실용주의 노선을 그대로 이어갔다. 미국이나 유럽 뿐만 아니라 파키스탄, 중국 같은 전통적인 경쟁 국가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9] 특히 그가 남긴 최대의 외교적 성과가 있다면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2006년에 맺은 미국-인도 민간 핵 협정. '123 합의'라고도 부르는데 인도의 군사용 핵과 민간용 핵을 구별해 인도의 핵 능력을 한층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10][11] 만성적인 에너지난에 시달리던 인도로서는 핵 확산 방지로 세계 평화에 기여한다는 이미지와 더불어 민간 핵개발이 이전보다 훨씬 자유로워진다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였다. 다만 이 협의를 굴종이라 비판하며 당시 일부 극좌 세력들이 연정에서 탈퇴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업적들 때문에 만모한 싱의 집권 순항기인 1기 시절엔 국내외 일각에서 '네루 이후 가장 위대한 인도 총리'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엄청난 격찬을 받았고, 2009년 4월에서 5월에 걸쳐 치러진 인도 하원선거에서도 국민회의가 안드라프라데시, 라자스탄, 마하라슈트라, 타밀나두, 케랄라 지방을 기반으로 543석 중 322석을 차지, 큰 승리를 거두며 만모한 싱은 1962년 네루 총리 이래 처음으로 임기 5년을 꽉 채우고 총리직을 연임한 기록을 쓸 수 있었다.
하지만 만모한 싱의 2차 임기는 생각보다 순탄하지 않았는데, 그가 연임한 직후인 2009년에 2G 스캔들을 포함한 많은 부정부패 추문들이 터졌기 때문. 2G 스캔들의 골자는 정부가 자격미달 업체에 통신 주파수를 할당했다가 무려 41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의 손실을 입었던 것으로, 뿌리깊은 인도의 정경유착과 부정부패가 터져나왔던 사건이었다. 뿐만 아니라 만모한 싱 총리가 석탄부 장관 직무대행을 대행하던 2004년 시절에 57개에 달하는 탄광 채굴권을 적법 절차 없이 민간업체에 넘겼다는 비리 의혹까지 제기되면서[12] 만모한 싱 총리의 지지율도 급락하게 된다.
누구보다 청렴함을 내세우던 만모한 싱 총리였기에 더더욱 그의 부정부패 의혹에 국민들의 실망이 컸던 것. 게다가 2011년에는 소매 부문에 외국인 직접투자를 허용한다고 발표했다가 2주 만에 철회하는 기행을 벌이면서 경제적으로도 헛발질을 했고, 결국 2차 집권기 마지막 2년 동안 인도 경제 성장률은 이전보다 저조한 성장을 기록한다. 경제 성장을 최대 치적으로 홍보하던 만모한 싱 총리로서는 치명타였던 셈이다. 또한, 2011년 뭄바이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결국 만모한 싱 총리는 2014년 총선에서 총리직 연임 거부 의사를 밝혔고, 2014년 하원 선거에서 싱 정부의 비리를 집중타격하며 만모한 싱과 비난 설전을 벌이던 모디와 인도 인민당 세력이 대승을 거두면서 결국 싱은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2.4. 퇴임 이후
2014년 인도 총리직에서 물러난 이후론 종종 강연을 하거나 책을 쓰면서 비교적 조용히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인도에선 퇴임 이후의 이미지가 총리 재임 시절보다 훨씬 좋다고 한다. 특히 독재자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스트롱맨 리더십을 자랑하고 있는 후임 모디 총리와 많이 대비되고 있는 형국. 이때문에 모디 총리와 인도 인민당 역시 싱에 대한 존중을 표하며 비판을 자제하고 있다.2024년 4월 사실상 명예직으로 유지하고 있던 라자 사바(상원) 의원직도 소냐 간디에게 승계하고 내려놓으면서 정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3. 주요 경력
- 1971년 ~ 1972년 대외무역부 경제자문위원
- 1972년 ~ 1976년 재무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
- 1976년 ~ 1980년 재무부 차관
- 1980년 ~ 1982년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 1982년 ~ 1985년 인도중앙은행 총재
- 1985년 ~ 1987년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 1987년 ~ 1990년 제네바 사우스 커미션 위원장
- 1990년 ~ 1991년 총리 경제보좌관
- 1991년 ~ 1995년 재무부 장관
- 1991년 ~ 2004년 상원의원(무역위 위원장, 재정위원, 행정위원, 운영위원)(아삼 주)
- 2004년 ~ 2014년 인도 제13대 총리
4. 논란
오늘날, 시간의 흐름과 뒤늦은 깨달음이 제공하는 균형과 관점을 바탕으로 인도 총리는 영국과의 인도의 경험이 유익한 결과도 가져왔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법치, 입헌 정부, 자유 언론, 전문 공무원, 현대 대학 및 연구소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모두 인도의 오래된 문명이 지배적인 제국과 만나는 도가니에서 형성되었습니다. 오늘의 이것들은 모두 우리가 여전히 소중히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요소들입니다. 우리의 사법부, 법률 시스템, 관료제, 경찰은 모두 영국-인도 정부에서 파생된 훌륭한 기관이며 우리나라에 매우 큰 봉사를 해왔습니다.
2005년 7월 8일,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민법 명예학위를 받으면서 연설을 했는데, 자기 딴엔 영국과 친근감을 나타낸답시고 일종의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이해할만한 발언을 해 구설수를 자처하기도 했다. 심지어 이도 모자라 '우리는 영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은 바라지 않았고 자치권을 주장한 정도였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13] 발언을 해 인도에서 독립운동가들을 폄하한 거 아니냐는 논란을 빚기도 했다. 연설문 전문.당시 인도 내각에서도 욕을 엄청 먹을 것을 예상했는지 인도 총리실 사이트에서 해당 연설문을 실으면서도 식근론 발언은 삭제했다고 하며#, 이 기사에 달린 댓글만 봐도 인도인들의 반응은 인도 총리가 인도 자유 투사들을 모욕했다고 싱을 힐난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14] 인도의 역사학자들도 당연히 싱을 비판했다.# 한 영국인 학자는 이 발언을 '영국의 유산에 대한 가장 현명한 평가'라고 거들어줬는데, 물론 이는 대영제국 시절을 긍정하는 부류에서 이때다 싶어 호응해준 정도로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인도는 역설적으로 영국의 식민지배로 오늘날의 통일국가 '인도'라는 개념이 생겼고[15][16] 영국의 식민지배를 단순히 '영국인 왕조'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 무굴 제국, 청나라[17] 같은 이민족 왕조로 여긴다는 것이다.[18][19] 만모한 싱의 발언 역시 한국 지식인의 일제강점기 호평보다는 중국의 한족 지식인이 청나라를 호평한 것에 더 가깝다고 볼 여지도 있다. 실제로 이 글을 보면 인도에서는 한국 기준으로는 유력 정치인의 정치 인생이 완전히 끝장났을 수준의 이 발언이[20][21] 단순히 호불호가 갈리는 수준에 불과(?)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얼마 안 가 이 발언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들었다. 다만 무굴 제국을 영국 식민지 시절과 동일시할 정도로 강한 힌두주의 성향이 있는 모디 총리 집권 후인 2015년엔 해당 발언이 재발굴되며 인도 네티즌들에게 다시 엄청 욕을 먹기도 했다.#
[1] 현재는 파키스탄의 영토이다.[2] 참고로 시크교에서 남성은 싱, 여성은 카우르를 성으로 사용한다.[3] 참고로 이때 그는 옥스퍼드에서 배운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케인즈주의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회고했다.[4]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독립 경제정책 싱크탱크.[5] 당시 인도 국민회의의 당권을 잡고 있던 소냐 간디는 총리직에 오르려 했지만 이탈리아 출신 귀화인이라는게 걸림돌이었고, 비경제 전문가인 소냐 간디가 총리직에 오르면 이전에 추진하던 여러 경제개혁이 좌초될 수 있다는 우려가 투자자들에게 확산되었는지 인도 증시가 2004년 5월 17일 15% 폭락하는 등 혼란에 빠지자 소냐 간디는 총리를 포기하고 경제관료였던 만모한 싱에게 총리직을 양보했다.[6] 인도에서는 명예직인 대통령이 총리를 지명하는 형식으로 총리를 취임시킨다.[7] 인도국민회의의 총재는 고 라지브 간디의 부인이었던 소니아 간디였지만, 그녀는 이탈리아 출신의 귀화 외국인이었기에 총리 자리에 직접 앉지 않고 경제전문가 만모한 싱을 막후에서 지원하는 포지션을 취한다.[8] 초기만 해도 진성 사민주의 정당이었으나, 경제 개방 등을 거치면서 경제적으로 제법 우클릭해 21세기 기준으론 사회자유주의 정도의 스탠스를 보이고 있다.[9] 물론 이는 중국 측의 호응도 있어서, 싱 총리 재임 시기 대부분이 적어도 겉으로나마 대외 온건 노선을 지향했던 후진타오의 집권 시기와 겹친다. 만약 싱과 시진핑이 서로 맞닥뜨렸다면 그조차도 어찌 됐을지 모를 일인 것이다(...). 하여튼 이때까지만 해도 2006년 후진타오, 2013년 리커창 총리 등 최고위급 인사들이 국빈방문하며 해묵은 중국-인도 국경분쟁을 끝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10] 미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가입하지 않은 인도에 이례적으로 핵기술과 핵물질을 제공하고, 인도는 민간 핵시설에 대해 국제원자력기구의 사찰을 받게 되는 것이 골자다.[11] 미국이 이걸 비준해준 이유는 한창 진행되던 북한의 핵개발 때문도 있었다. 중국이 북한의 핵개발을 묵인하자 미국도 중국의 경쟁국인 인도의 핵 능력을 끌어올리는 걸로 맞불을 놓은 것이다.[12] 대략 이 석탄 사고로 정부가 1조 8,500억 루피에 달하는 손해를 입었다는 주장도 있었다.[13] 원문: 자유를 위한 인도 투쟁의 중요한 슬로건이 "자치 정부는 좋은 정부보다 더 소중하다"였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이것이 민주주의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이 슬로건은 우리가 자유를 위한 캠페인이 한창일 때에도 식민 통치 이후 우리는 영국의 올바른 통치 주장을 완전히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치에 대한 자연적 권리를 주장했을 뿐입니다.[14] 다만 싱의 발언을 옹호하는 댓글도 적지 않으며, 심지어 댓글 중에는 '영국인 왕조가 오래 지속되었으면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이자 G7이 되었을 것'이라는 식의 뻘댓글까지 있다.(...)[15] 오늘날의 인도 영토가 확립된 게 바로 영국 식민지 시절이다. 애초에 영국 지배 이전 인도도 여러 민족들이 섞이면서 제대로 된 통합 정체성이랄게 잘 없었기 때문에 더 그렇다. 당장 영국 이전 인도를 지배한 무굴 제국 시기만 하더라도 지배층은 몽골의 후예 드립치던 이슬람주의자들로, 이전 인도의 토착 세력이던 힌두교도들은 피지배층이었다. 심지어 만모한 싱은 이도저도 아닌 시크교도다.[16] 참고로 현 인도 공화국의 면적은 영국 + 유럽연합 전체 면적의 70% 가량에 달할 정도로 넓다. 달리 말하자면 서유럽 + 중부유럽을 전부 합한 것보다도 많이 넓은 셈.[17] 이쪽도 이민족 왕조로써 오늘날의 중국 영토나 다민족 체제를 확립했다고 평가받는다.[18] 참고자료 1, 참고자료 2. 실제로 인도에서 영국 식민지 시절을 가리키는 표현이 'British Raj', 즉 영국인 왕조다. 사실상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크인(본인들은 몽골 제국의 후예를 내세우긴 했다만)이나 기독교를 믿는 영국인이나 당시 힌두교도들에게는 이교도 이민족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는 것. 게다가 원래 식민 통치라는게 본국에서 거리가 멀수록 직접 부딪힐 일도 적으니 반감이 상대적으로 좀 덜한 것도 있다.[19] 이와 비슷한 사례로, 역사의 상당기간 스페인, 청 등 그들 기준 외세의 지배를 받아왔던 대만은 일제강점기 시절 역시 그런 연장선상의 하나로 봐서, 일제강점기가 사실상 첫 외세의 전국토 직접 지배기였던 한국인 수준의 반일 감정보단 정도가 덜하다고 알려져있다. (일각에선 친일 드립도 치지만 이건 좀 오버스런 측면이 있다. 대만에도 반일주의자들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20] 실제로 싱이 연설한 해와 같은 해에 한승조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일본 잡지에 '식민지 지배는 축복'이라는 식의 글을 썼다가 국민들에게 엄청나게 욕을 먹고 명예교수직에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다만 반대로 말하면 유력 정치인, 그것도 국가원수이기 때문에 팬덤층이 있어 살아남았다고 볼 수도 있다.[21] 만약 한국 정부 각료가 일본 대학교에서 식근론 지지 + 독립운동가 비하 연설을 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한 번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