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7세의 장녀에 대한 내용은 마거릿 튜더 문서 참고하십시오.
<colbgcolor=#ffdab9><colcolor=#000000> 마거릿 공주 Princess Margaret | |
이름 | 마거릿 로즈 (Margaret Rose) |
출생 | 1930년 8월 21일 |
영국 스코틀랜드 앵거스 글래미스 성 | |
사망 | 2002년 2월 9일 (향년 71세) |
영국 잉글랜드 런던 에드워드 7세 병원 | |
배우자 | 제1대 스노든 백작 안토니 암스트롱존스 (1960년 결혼 / 1978년 이혼) |
자녀 | 장남 데이비드[1], 장녀 사라[2] |
아버지 | 조지 6세 |
어머니 |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형제 | 언니 엘리자베스 2세 |
종교 | 성공회 |
서명 | <nopa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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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릴리벳은 나의 자랑이요, 마거릿은 나의 기쁨이다. Lilibet is my pride, Margaret is my joy |
아름다운 외모와 자유분방하고 발랄한 성격, 화려한 스캔들 때문에 당시 영국 사회에서 일종의 아이콘과 같았던 존재였다.
2. 작위
문장 | 모노그램 |
- 요크의 마거릿 공녀 전하 Her Royal Highness Princess Margaret of York (1930년 8월 21일 ~ 1936년 12월 11일)
- 마거릿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Margaret (1936년 12월 11일 ~ 1961년 10월 6일)
- 스노든 백작부인 마거릿 공주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Margaret, Countess of Snowdon (1961년 10월 6일 ~ 2002년 2월 9일)
3. 생애
3.1. 어린 시절
요크 공작 부부는 막내딸의 이름을 '앤'으로 짓고 싶어했는데, 받게 될 '요크의 앤 공녀(Princess Anne of York)'라는 칭호의 어감이 예쁘고 또 언니 엘리자베스의 이름과도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마거릿'이라는 이름을 쓰기를 권유했지만, 보모의 이름과 헷갈릴 것이라고 생각해서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앤이라는 이름을 싫어하던 할아버지 조지 5세가 반대해 이름을 마거릿 로즈라고 짓게 되었다. 그리고 앤이라는 이름은 훗날 조카 앤 공주의 이름으로 쓰이게 된다.
1930년 10월 30일, 버킹엄 궁전의 개인 예배당에서 성공회 유아세례를 받았다. 당시 대부모는 백부 웨일스 공 에드워드와 당고모 스웨덴의 잉리드 공주, 고모 헤어우드 백작부인 메리 공주, 이모 로즈 레벤슨, 외삼촌 데이비드 보우스라이언 등 5명이었다.
유아기에는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 적었다. 때문에 항간에서는 마거릿이 청각장애인이고 말을 하지도 못한다는 헛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1934년에 열린 삼촌 켄트 공작 조지 왕자의 결혼식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러한 헛소문은 사라졌다.
<rowcolor=#000> 1933년 1월 가족 사진 |
<rowcolor=#000> 1935년 5월 6일, 실버 주빌리 당시 버킹엄 궁전 발코니에서[4] |
<rowcolor=#000> 1937년 5월 12일, 조지 6세의 대관식 |
조지 6세는 예쁘고 활달하며 애교많은 막내딸을 매우 아꼈다. 실제로 조지 6세가 마거릿을 너무 오냐오냐 했던지라 시종들은 공주가 응석받이로 자랄까봐 걱정했다. 조지 6세는 생전에 딸들을 가리켜 "릴리벳은 나의 자랑이요, 마거릿은 나의 기쁨이다.(Lilibet is my pride, Margaret is my joy)"라고 말했다.
<rowcolor=#000> 19번째 생일 기념사진 | 21번째 생일 기념사진[6] |
<rowcolor=#000> 1952년 2월 15일, 조지 6세의 장례식 |
버킹엄 궁을 나온 후에도 마거릿은 '마거릿 공주의 아침 일상(Princess Margaret's morning routine)'이 공개되어 그녀의 사치스러운 생활이 화제가 되었을 정도로 엘리자베스 2세에게 많은 지원을 받으며 지냈다. 매일매일을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파티를 즐겼다고 알려졌으며, 그야말로 일국의 공주로서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3.2. 연애와 결혼
조지 6세의 시종무관이던 피터 타운센드 영국 공군 대령[8]과 연인 관계를 맺었는데, 피터가 마거릿의 샤프롱[9] 역할을 맡으면서 가까워졌다고 한다. 피터가 엘리자베스 왕태후와 마거릿의 재정을 책임지는 감사관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더욱 사이가 깊어졌고 1953년에 청혼했다. 하지만 그가 16세 연상의 이혼남이라는 이유로 왕실과 성공회의 반대에 부딪혔다.[10] 대중들과 언니는 동정적이였으나, 의회는 "마거릿이 피터와 결혼한다면 왕위 계승권은 물론 공주 작위와 재산도 모조리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피터를 아예 벨기에 주재 무관으로 보내버렸다.[11] 이혼과 재혼 경력을 가진 앤서니 이든이 총리가 되자 마거릿과 피터의 결혼이 성사될 듯했지만[12], 결국 결혼을 포기했다.[13] 1955년 당시 경향신문은 "나는 의무를 택했다"는 제목 아래에 세기의 로맨스가 끝을 맺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당시 이든 총리는 마거릿이 왕족 신분은 유지하되 계승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결혼할 수 있게 할 생각이었다고 한다.<rowcolor=#000> 마거릿 공주와 안토니의 공식 약혼사진 |
<rowcolor=#000> 1974년 가족사진 |
하지만 남편 안토니는 양성애 성향도 있었고 결혼 전부터 연애 관계가 복잡했기 때문에, 마거릿과 안토니는 신혼 초부터 불안정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던 마거릿도 그의 난잡한 사생활을 결코 참고만 있지는 않았고, 결혼한 지 5년도 되지 않아 두 사람의 사이는 완전히 악화되었다. 오죽하면 마거릿이 둘째 아이 사라를 임신하고 있을 때 주치의가 "더이상 화를 내면 뱃속의 아기가 위험하다."고 충고했을 정도였다. 그러다 1966년부터 마거릿도 딸 사라의 대부인 앤서니 바튼과 불륜을 저지르며 맞바람을 피우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둘의 허울뿐인 결혼생활이 완전히 금이 가게 된 것은 마거릿이 1973년에 17살 연하의 조경 디자이너 로디 르웰린과 만나면서부터였다. 1976년 카리브의 무스티크 섬에서 마거릿과 로디가 노는 모습이 포착되어 보도되었다.[19] 보도 이후 마거릿에게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결혼 18년 만인 1978년 이혼을 발표한다. 왕실 인사의 이혼은 헨리 8세 이후 처음이었다.
이후로도 숱한 스캔들을 몰고 다니면서 문제의 인물로 자리잡게 된다. 로빈 더글러스 흄,[20] 믹 재거, 피터 오툴, 데이비드 니븐,[21] 피터 셀러스 등 숱한 남성들과 염문을 뿌렸다. 심지어 갱단 두목 존 빈든과의 염문 의혹이 폭로되기도 했고,[22] 캐리 피셔가 자신의 아버지 에디 피셔와 연인이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1996년에 첫사랑 피터와 재회했는데, 당시 79살이었던 피터는 거동이 불편해진 노인이었지만 마거릿은 그를 보고 자신의 절친이자 시녀였던 글렌코너 남작 부인에게 "하나도 안 변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3.3. 사망
<rowcolor=#000> 마지막 공식석상[23] |
뇌졸중 증세를 겪은 후로는 정상적인 대화도 어려운 상태가 되었으며, 편지를 쓰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말년에는 조카 찰스 3세와 시녀들이 책을 읽어주는 것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결국 71세이던 2002년 2월 9일 오전 6시 30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두 자녀 데이비드와 사라가 임종을 지켰다.# 이에 크게 충격을 받은 엘리자베스 왕대비는[24] 마거릿의 장례식에 모습을 나타낸 것을 마지막으로 몹시 쇠약해져서 같은 해 3월 30일 오후 3시 15분, 작은딸의 뒤를 따라갔다.
장례식은 2월 15일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에서 치러졌다. 마거릿은 국왕의 차녀였기 때문에 왕실장을 치를 자격이 있었지만,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떠나고 싶다는 그녀의 의사에 따라 개인 자격으로 장례를 치렀다. 따라서 시신 공개나 거리 행렬과 같은 공개 의식은 모두 생략되었으며, 텔레비전 생중계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유언에 따라 왕실 구성원으로는 최초로 화장되어 윈저 성 세인트 조지 예배당 내 조지 6세 기념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이는 지금까지 매장을 해온 왕실에서 처음 있는 일로, 어쩌면 그녀의 반항적인 일생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원래 직계와 그 배우자를 제외한 왕족들은 예배당 밖 정원에 묻히는 것이 관례였는데, 마거릿이 아버지 조지 6세 곁에 안치되는 것을 강력히 원했기 때문에 화장을 했다고 한다.
여동생의 사후 엘리자베스 2세는 마거릿의 절친이자 시녀였으며 마거릿의 정사를 다 꿰고 있었던 글렌코너 남작부인에게 "그 남자가 마거릿을 정말로 행복하게 해줬어.(He made her really happy.)"라며 로디를 마거릿에게 소개해주어 고맙다는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실제로 로디는 피터 다음으로 마거릿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었으며 꽤 뜨겁게 연애했다.
4. 가족 관계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스노든 백작 부인 마거릿 공주 (Princess Margaret, Countess of Snowdon) | <colbgcolor=#fff3e4,#331c00> 조지 6세 (George VI) | <colbgcolor=#ffffe4,#323300> 조지 5세 (George V) | |
에드워드 7세 (Edward VII) | |||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 (Princess Alexandra of Denmark)[25] | |||
테크의 공녀 메리 (Princess Mary of Teck) | |||
테크 공작 프란츠 (Francis, Duke of Teck) | |||
케임브리지의 메리 애들레이드 공녀 (Princess Mary Adelaide of Cambridge)[26] | |||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Elizabeth Bowes-Lyon) | |||
제14대 스트래스모어와 킹혼 백작 클로드 보우스라이언 (Claude Bowes-Lyon, 14th Earl of Strathmore and Kinghorne) | |||
제13대 스트래스모어와 킹호른 백작 클로드 보우스라이언 (Claude Bowes-Lyon, 13th Earl of Strathmore and Kinghorne) | |||
프랜시스 스미스 (Frances Smith) | |||
세실리아 캐번디시벤팅크 (Cecilia Cavendish-Bentinck) | |||
찰스 캐번디시벤팅크 (Charles Cavendish-Bentinck)[27] | |||
루이자 버나비 (Louisa Burnaby) |
4.2. 자녀
자세한 내용은 마거릿 공주/가족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자녀 | 이름 | 출생 | 배우자 / 자녀 |
1남 | 제2대 스노든 백작 데이비드 암스트롱존스 (David Armstrong-Jones, 2nd Earl of Snowdon) | 1961년 11월 3일 ([age(1961-11-03)]세) | 슬하 1남 1녀 |
1녀 | 레이디 사라 차토 (Lady Sarah Chatto) | 1964년 5월 1일 ([age(1964-05-01)]세) | 다니엘 차토 슬하 2남 |
5. 창작물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시리즈 《더 크라운》에서 묘사된 그녀의 화려한 사생활로 대중의 재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자세한 건 마거릿 로즈(더 크라운) 참조. 시즌1~2까지 바네사 커비가, 시즌 3~4는 헬레나 본햄 카터가[29], 그리고 시즌 5~6에서는 레슬리 맨빌이 배역을 맡았다. 마거릿의 시녀였던 앤 글렌코너 남작부인은 이 드라마의 자문을 맡기도 했는데, 외모는 시즌 3~4의 헬레나 본햄 카터의 마거릿이 실제와 가까웠지만 실제 성격은 시즌 1~2에서 바네사 커비가 연기한 마거릿과 비슷했다고 평가했다.2015년 영국에서 제작한 영화 《로열 나이트 아웃》에서는 10대 시절의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거릿 공주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1945년 5월 유럽 전승기념일 당시 두 공주는 허락을 받아서 궁궐 밖으로 외출을 하는데 이 때 마거릿 공주는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한 병사와 어울리다가 나이트 클럽, 술집 등에 가보게 되고 이를 엘리자베스가 뒤쫒아 찾는 모험을 다룬 코미디 영화이다. 이 이야기는 사실을 각색한 내용으로, 실제로 두 공주는 전승기념일 때 길거리로 외출한 적이 있었다. 물론 영화에 등장하는 일들은 없었고, 수행원들과 함께 통금 시간까지 무사히 귀가했다.
6. 여담
화난 표정과 웃는 얼굴 사이에 중간이 없다.
20세기의 저명한 사진작가 세실 비턴.[30]
20세기의 저명한 사진작가 세실 비턴.[30]
- 대영제국 공주의 신분이라 금지옥엽으로 성장하였고 여왕의 유일한 동생이라는 타이틀도 생기면서 자존심이 강하고 충동적이며 오만했다. 마거릿의 고약한 성격은 여장부라고 불리던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마저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할 정도. 어머니의 친구인 귀족 부인이 어머니에게 무례함을 감추지 않는 마거릿을 보고는 "공주님이 어머니께 너무 버릇없이 구시는 거 아닌가요?"라고 말하자 엘리자베스는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이미 익숙합니다."라고 웃어넘겼다. 켄싱턴 궁전에서 지내던 시기에도 마거릿의 고약함은 여전하였는데 어머니와 말다툼을 하다 감정이 격해지면 궁전의 모든 창문을 열어서 어머니가 일일이 닫도록 만들었다.
<rowcolor=#000> 1939년 | 1980년 |
- 언니인 엘리자베스 2세에게는 얌전한 여동생이었다. 마거릿은 언니와 마찰을 빚은 적이 거의 없었고 여왕으로 즉위한 언니를 공주 시절처럼 매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하였다. 마거릿은 언니가 머무르는 버킹엄 궁전에 거의 매일 전화를 걸 정도로 언니에 대한 유대감이 강하였다. 1950년대에는 전화가 흔하지 않은 시절이고 왕궁은 워낙 넓어서 직통으로 연결되는 방식이 아니라 여러 직원들이 방마다 설치된 전화기에 일일이 연락하였다. 엘리자베스 2세도 여동생이 원하는 건 최대한 들어주려고 노력하면서 자매는 평생을 친밀하게 지냈다.
- 1955년에 매우 사치스러운 아침 일상이 공개되어 화제가 되었다. 오전 9시에는 침대에서 시녀가 차려준 아침 식사를 먹었으며, 대략 2시간 동안 라디오를 듣거나 신문을 읽은 뒤 미친듯이 담배를 폈다. 그리고 오전 11시에 시녀가 미리 받아둔 물에서 1시간 동안 반신욕을 한 뒤 정오쯤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31] 오후 12시 30분이 되어서야 보드카를 마시기 위해 1층으로 내려왔으며, 1시에는 어머니와 함께 와인 한 병을 비우며 신선한 치즈와 과일을 곁들인 점심 식사를 했다. 그리고 저녁 때는 파티에 참석하거나 클럽에 가서 밤을 샌 뒤에 새벽에 돌아오는 것이 일상이었다.
- 결혼 직전까지만 해도 동화 속에 나올법한 말 그대로 매우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으나, 불행한 결혼생활과 10대부터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사는 등, 언니 엘리자베스 2세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파란만장한 생활을 해 30대 후반부터는 노화가 심해졌다.
- 발레에 관심이 많았으며 로열 발레단과 로열 발레학교의 오랜 후원자이기도 했다. 같은 궁전에 살았던 다이애나 스펜서와도 발레에 대한 관심사가 비슷해서[32]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33] 현재는 장녀 사라 차토가 마거릿의 뒤를 이어 계속 발레 후원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로열 발레학교 부회장직을 맡고 있다.
- 낸시 레이건과도 친분이 두터웠으며, 1980년대부터 사망하기 전까지 자주 편지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말년에는 건강 악화로 인해 편지를 쓰는 것이 어려워져 시녀가 편지를 대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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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생애 | ||
가족 관계 | 가족 관계 아버지 조지 6세 · 어머니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 배우자 안토니 암스트롱존스 · 언니 엘리자베스 2세 · 장남 데이비드 암스트롱존스 · 장녀 사라 차토 |
[1] 계승 서열 25위.[2] 계승 서열 28위.[3] 그나마 언니 엘리자베스 2세는 왕위계승자 신분이 되면서 헌법과 역사 교육을 추가로 받았으나, 마거릿은 왕위계승자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교양 수업 외에는 제대로된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다.[4] 왼쪽부터 할아버지 조지 5세, 마거릿 공주, 고종사촌 조지 래슬스, 고모부 헤어우드 백작 헨리 래슬스, 언니 엘리자베스 공주, 할머니 테크의 메리 왕비[5] 실제로도 엘리자베스가 왕위 계승자 신분이 되면서 두 사람은 평생 완전히 정반대의 삶을 살게 되었다. 엘리자베스는 평생 국왕의 직무를 수행하며 죽기 전까지 의무에 충실한 삶을 살았던 반면, 마거릿은 의무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보다 화려한 삶을 살았다.[6] 사진 속 드레스는 크리스챤 디올에서 특별 제작한 드레스다. 금으로 수놓아진 벨라인에 한쪽 어깨를 드러내는 원 숄더 형태로, 우아함과 화려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마거릿 공주도 가장 좋아했던 드레스 중 하나였다고 한다.[7] 원래는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의 신혼집이었으며, 1950년에 앤 공주가 태어난 집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한 이후에는 엘리자베스 왕대비와 마거릿 공주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왕대비 궁으로 사용되었으며, 2002년에 엘리자베스 왕대비가 사망한 이후에는 찰스 3세에게 상속되었다.[8] 피터는 1978년 전쟁 관련 서적을 집필하기 위한 자료 수집차 부산을 방문한 바 있다. 당시에도 마거릿의 옛 연인으로 보도되었는데, 그만큼 한국에서도 관심이 컸었음을 방증한다.[9] 젊은 여자가 사교장에 나갈 때 보호자가 되어주는 사람.[10] 당시 이혼한 사람의 전 배우자가 살아있을 경우, 절대 재혼할 수 없었다. 이것 때문에 큰아버지 에드워드 8세도 왕위를 포기한 것이다. 다만 에드워드 8세는 이혼을 요구할 당시 이미 영국의 왕위에 오른 일국의 왕이었고, 마거릿은 왕의 동생에 불과하기 때문에 일의 경중이 다르기는 하다.[11] 당시 처칠은 마거릿 공주가 이혼남과 교제한다는 것을 알고 "교통사고 한 번이면 이 분이 우리 여왕님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하며 분노를 금치 못했다고 전해진다.[12] 이와 관련해 실제로 영국 정부의 예산안에 마거릿의 결혼식 관련 예산안을 검토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앤서니 이든과 마거릿의 결혼과 관련하여 주고받은 편지도 존재한다. 당시 편지의 내용을 보면 마거릿이 "결혼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13] 마거릿이 피터와 결혼하면 왕실 일원으로서의 모든 권리와 지원을 박탈하겠다는 의회의 성명이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왕실 일원으로서 모든 권리와 지원을 박탈당하면, 금전적인 지원을 못받게 되고 공무에서도 제외되기 때문이다. 즉, 결혼으로 인해 왕족으로서 누려온 모든 것을 박탈당한다는 것은 마거릿 입장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던 것이다.[14] 결혼 당시 겨우 20살이었다. 외모는 마거릿을 많이 닮았다.[15] 부계는 웨일스 혈통, 모계는 독일계 유대인 혈통이다.[16] 그러나 결혼 직전에 안토니의 숨겨진 사생아 딸이라면서 친자 확인을 요구하는 사람이 나타나 곤욕을 치렀고, 확인 결과 친자로 판명되었다. 그런데도 마거릿이 왜 결혼을 강행했는지 의문이라는 반응이 많았는데, 옛 연인이자 첫사랑이었던 피터가 본인과 닮은 어린 여자하고 재혼한 게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더 크라운 시즌 2에서도 관련 내용이 나오는데, 마거릿은 자신의 약혼발표와 결혼이 피터보다 빨라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진 것이라는 속내를 드러낸다.[17] 마거릿의 웨딩드레스는 심플하면서도 우아한 디자인으로 평이 좋다. 여담으로 前 며느리 아너러블 세레나 스탠호프도 마거릿의 장남인 린리 자작 데이비드와 결혼했을 때 비슷한 디자인의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하지만 마거릿의 웨딩드레스에 한참 못 미치는 건 그렇다 쳐도, 겨우 23살밖에 안 된 신부를 매우 늙어보이게 스타일링해 놔서 별로 평이 좋지 않았다.#[18] 현재는 왕족이 평민과 결혼하는 것이 흔한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왕족은 같은 왕족이나 귀족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영국 왕족과 평민의 결혼식이 열린 것은 이 때가 수 세기 만에 처음이었다.[19] 이 둘의 연애 관계는 8년간 지속되다가 로디가 타티아나 소스킨과 결혼하면서 끝났지만, 마거릿은 로디 부부와 평생 친분을 유지했다.[20] 보수당 소속의 총리였던 알렉 더글러스 흄의 조카. 마거릿과 헤어지자 우울증으로 자살했다.[21] 이 양반은 유부남이면서 그레이스 켈리하고도 평생을 거쳐 불륜관계였다.[22] 이에 대해서 영국 왕실은 "공주가 저질 인간과는 관계가 없었을 것라고 말할 수 있다."고 반박했다.[23] 2001년 12월 숙모 앨리스 왕자비의 100세 생일 축하 행사에서[24] 당시 이미 100세를 넘겼다.[25]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이다.[26] 조지 3세의 손녀이다.[27] 영국의 제15•20대 총리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의 손자이다.[28] 결혼 27년 만인 2020년 2월 18일부로 별거에 들어갔다.[29] 재밌는 것은 헬레나 본햄 카터는 조지 6세의 이야기인 《킹스 스피치》에서 조지 6세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역할을 맡은 적이 있다. 즉, 엄마와 작은딸을 연기하게 되는 배우개그가 성립된다. 하지만 훌륭한 연기력과는 별개로 바네사 커비와는 달리 본햄 카터와 마거릿의 외모 싱크로율은 그렇게 좋지 않아서, 시청자들 사이에서도 올리비아 콜먼이 마거릿을, 본햄 카터가 엘리자베스 2세를 맡았어야 한다는 평이 많다.[30] 런던에서 태어나 1920년대부터 상류층 인사들을 촬영하며 사진작가의 활동을 시작하였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부터 영국 왕실의 행사에 참석하여 사진을 촬영한 것으로 유명하다. 왕족은 물론이고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게리 쿠퍼처럼 세계에서 유명한 연예인도 촬영하였다.[31] 마거릿은 상태가 깨끗하지 않다면 같은 옷을 두 번 이상 입지 않았다고 한다.[32] 다이애나도 학창시절부터 발레를 해왔고 실제로 소질도 꽤 있었지만 키가 계속 커지자 어쩔 수 없이 그만뒀다고 한다.[33] 이외에도 어린 나이에 임신한 다이애나를 안쓰럽게 여겨 그녀의 장남 윌리엄을 돌볼 유모를 직접 골라 추천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1992년 다이애나 스펜서가 왕실 전기작가 앤드루 모튼을 통해 조카의 불륜 사실을 간접적으로 폭로하는 내용의 도서를 출간하자 다이애나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었다고 한다. 마거릿은 타블로이드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에 시달린 경험이 여러 번 있었는데, 다이애나가 타블로이드 언론을 이용해 왕실의 비밀을 폭로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마거릿은 스캔들로 문제를 일으킨 적은 있어도 언니와 왕실을 위협하는 행위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