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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00:09:05

루카스 포돌스키

포돌스키에서 넘어옴
루카스 포돌스키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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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스 포돌스키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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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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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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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333> 순서 선수 이름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로타어 마테우스 150회 1980.6.14 2000.6.20
2 미로슬라프 클로제 137회 2001.3.24 2014.7.13
3 토마스 뮐러 131회 2010.3.3 2024.7.6
4 루카스 포돌스키 130회 2004.6.6 2017.3.22
5 마누엘 노이어 124회 2009.6.2 2024.7.6
6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121회 2004.6.6 2016.8.31
7 토니 크로스 114회 2010.3.3 2024.7.6
8 필립 람 113회 2004.2.18 2014.7.13
9 위르겐 클린스만 108회 1987.12.12 1998.7.4
10 위르겐 콜러 105회 1986.9.24 1998.7.4
11 페어 메르테사커 104회 2004.10.9 2014.7.13
12 프란츠 베켄바워 103회 1965.9.26 1977.2.23
13 토마스 헤슬러 101회 1988.8.31 2000.6.20
14 울프 키르스텐 100회 1985.5.8 2000.6.20
}}}}}}}}}}}}}}} ||
독일의 前 축구 선수
파일:1000088085.jpg
루카스 포돌스키
Lukas Podolski
<colbgcolor=#eee> 본명 우카시 유제프 포돌스키
Łukasz Józef Podolski
출생 1985년 6월 4일 ([age(1985-06-04)]세)
폴란드 인민공화국 실롱스키에주 글리비체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1]
신체 183cm / 체중 80kg[2]
포지션 공격수[3][4]
소속 <colbgcolor=#eee> 유스 FC 07 베르크하임 (1991~1995)
1. FC 쾰른 (1995~2003)
선수 1. FC 쾰른 II (2003)
1. FC 쾰른 (2003~2006)
FC 바이에른 뮌헨 (2006~2009)
FC 바이에른 뮌헨 II (2007~2008)
1. FC 쾰른 (2009~2012)
아스날 FC (2012~2015)
인테르나치오날레 (2015 / 임대)
갈라타사라이 SK (2015~2017)
비셀 고베 (2017~2019)
안탈리아스포르 (2020~2021)
구르니크 자브제 (2021~2024)
국가대표 130경기 49골[5] (독일 / 2004~2017)
SNS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2. 유년기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3.2. 국가대표 경력
4. 플레이 스타일5. 기록
5.1. 대회 기록5.2. 개인 수상5.3. 수훈5.4. 출전 기록
6. 여담7. 같이 보기

[clearfix]

1. 개요

폴란드 출신, 독일 국적의 축구 선수. 포지션은 공격수이다. 애칭은 폴디(Poldi).[6]

클럽에서는 쾰른 시절을 제외하면 별다른 족적이 없었음에도, 국대만 가면 시종 날아다녀서 '애국자'로 불린다. 특히 2006 월드컵에서 독일을 3위로 올려놓으며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고, 유로 2008에서도 준우승을 이끌면서 토너먼트의 팀에 선정되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한국 한정으로 '국대스키'라는 별명이 있다.[7][8]

2. 유년기

출신 배경이 클로제와 매우 비슷하다. 폴란드 실롱스크의 글리비체(구 독일 오버슐레지엔주 글라이비츠) 에서 태어났다. 실롱스크/슐레지엔은 원래 프로이센 이래 독일의 영토였으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 패망하면서 연합국에 의해 강제로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슐레지엔에 살던 독일인들은 독일 본토로 추방되었고, 독일인들이 떠난 빈 땅에는 소련이 동폴란드를 강제 병합하면서 발생한 폴란드 실향민들이 실롱스크로 이주해오게 된다. 실롱스크/슐레지엔에 원래 살던 원주민 독일인들은 추방령에 따라 대부분 서독으로 떠났으나 생계 등의 이유 때문에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슐레지엔에 남은 독일인들도 일부 있었는데, 포돌스키, 클로제의 아버지가 모두 그러한 케이스다. 포돌스키의 조부모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슐레지엔에 거주해오던 독일계였으며, 독일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은 이처럼 전쟁으로 빼앗긴 영토에 계속 거주하는 독일인들은 물론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독일 국적을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포돌스키와 클로제 모두 아버지가 독일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고, 포돌스키, 클로제 본인 역시 독일 국적법의 국외 출생자 규정(German Citizenship Through Descent)에 따라 출생과 동시에 자동으로 독일 국적이 취득되었다. 따라서 포돌스키, 클로제는 폴란드에서 독일로 귀화한 것이 아니고 출생하면서부터 독일폴란드 국적을 동시에 보유한 이중국적자다. 게다가 클로제와 포돌스키는 각각 생후 1개월, 2살 때 폴란드를 떠났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실질적으로 폴란드에서 유년시절의 기억이 없다. 두 사람은 모두 10대 때 폴란드 국적을 포기했다. (클로제는 18세 때 폴란드 국적을 포기했다고 밝혔으며, 포돌스키 역시 폴란드 축구협회 측에 따르면 20세 때 이미 폴란드 국적이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포돌스키가 2살 때 그의 가족은 폴란드를 떠나 독일 쾰른 교외 지역으로 이주했다. 포돌스키는 자신의 고향을 쾰른이라 말하며 쾰른에 상당한 애향심을 보이고 있다. 포돌스키는 7살 때 FC 07 Bergheim에 입단해 축구 경력을 시작했고 11살 때 1. FC 쾰른에 입단하였고, 청소년 대표팀에 줄곧 차출되었다.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루카스 포돌스키/클럽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2. 국가대표 경력

위 클럽 경력을 읽어보자면 빅클럽도 그럭저럭 누비고 다녔으니 아주 못난 커리어는 아니지만, 유망주 시절 큰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하는 정도였고 유수한 스타 플레이어들의 기록에는 한끗 미치질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국가대표 무대에서만큼은 요아힘 뢰브의 전폭적 신뢰 아래 앵간한 월드클라스 선수 뺨치는 화려한 기록들에다 특히 2006년 월드컵부터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커리어의 하이라이트로 거론되곤 한다. 오죽했으면 포돌스키의 국가대표 커리어의 전성기 시절인 2006 독일 월드컵에서 2010 남아공 월드컵 때까지 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국대에서의 포돌스키는 메날두급의 무서운 선수로 180도 돌변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고[9] 게다가 월드컵 우승컵도 장식하는 등 국대 상복까지 화려하니 축구팬들 사이에선 국대에서만 잘하는 선수의 표본으로 회자되는 선수다. 별명은 '국대스키', '애국자'.

독일의 각급 청소년 대표팀을 거쳐 2004년 6월 6일, 헝가리와의 친선 경기에서 국가대표에 첫 데뷔했으며, 유로 2004에도 발탁되었다. 이후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투톱을 맞추면서 자국에서 열린 2006년 월드컵에서 클로제와 함께 맹활약을 펼치며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으며 대회 3골을 기록해 득점 공동 2위를 기록했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상을 바탕으로 대회 전 신인상 후보로 거론되던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웨인 루니 등을 제치고 영플레이어상을 받았다.

유로 2008에서도 소속팀 부진과 대조적으로 3골을 득점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본인이 태어난 조국 폴란드를 상대로 홀로 2골을 넣으며 비수를 꽂았다.이때 포돌스키는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눈물을 참으며 슬퍼하였다. 대회 종료 후 포돌스키는 유로 2008 토너먼트의 팀에 선정되었다.
발락과의 설전

2009년 4월 1일 웨일스와의 월드컵 예선전에서 당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이었던 미하엘 발락의 뺨을 때린 일로 그는 구설수에 올랐다. 본인은 부인했으나, 그가 좀 더 열심히 뛸 것을 요구하는 발락에게 "Lauf selber du arschloch!"("너나 뛰어라 이 씹새야!")라고 외쳤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10] 이후 5,000 유로의 벌금을 부과받았으며 국대에서 제명해야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11]

발락과의 말다툼과 09-10 시즌 18경기 2골로 그야말로 본인 최악의 시즌을 보냈음에도 요아힘 뢰브 감독이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으로 또 다시 차출하자 자국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게 된다.

그러나 포돌스키는 그 비난이 무색하게 월드컵에서 호주전, 잉글랜드전에서 강력한 왼발 슛으로 득점포를 올리는 등 빼어난 활약을 펼치며 뢰브 감독의 기대에 부응해 주었고 세대교체를 진행하는 독일을 3위에 올리는데 한 몫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게 된다.[12]

유로 2012에도 당연히 국가대표로 소집되었다. 조별리그에서는 2차전까지 큰 활약이 없었지만 3차전 덴마크를 상대로 만 27세 13일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고[13] 전반 19분에 선취골까지 넣으며 센추리 클럽 가입 축포를 터뜨렸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면 대회의 전반적인 활약상은 포돌스키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14]

2013년 5월 30일 에콰도르와의 A매치전에서 9초만에 골을 넣었다. 당시 A매치 역대기록 2위.[15] 에콰도르 수비수의 실책덕이긴 하지만 1위가 8.3초만에 골이라는걸 생각하면 대단한 기록이다. 더욱이 이날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면서 국대에서는 여전히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은 포돌스키에게 아쉬움이 남는 대회였다. 겨우 조별리그 2경기[16]에 출전해서 득점 없이 54분간 그라운드를 누빈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조별리그 3차전 이후 다리 부상으로 인해 토너먼트에 뛰지 못했고, 독일의 우승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2014 월드컵 이후 국대에서도 점점 예전같은 모습이 줄어들면서 점차 서브 자원으로 밀려났고, 유로 2016을 마지막으로 포돌스키는 독일 국가대표에서 은퇴할 것을 발표했다.

2017년 3월 23일 새벽 4시 45분(한국시간)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친선 경기를 포돌스키의 국가대표 은퇴경기로 잡게 되었고, 이 경기에 선발로 출전, 안드레 쉬얼레의 패스를 받아 멋진 왼발 중거리슛을 성공시키며 본인의 국가대표 13년의 경력에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그 덕분에 10분을 남겨두고 제바스티안 루디와 교체될 때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이 골은 결승골이 되어 독일은 1:0 승리를 거두었다. 은퇴와 함께 포돌스키가 달았던 국가대표 등번호 10번은 메수트 외질에게 넘겨주었다.

네이버 스포츠는 이날 포돌스키의 골 장면 영상 제목을 기어이 자신의 은퇴경기에 골을 넣고 마는 포돌스키로 업로드했다.[17]

포돌스키의 국가대표 통산 기록은 A매치 130경기 49골 31도움을 기록했다.

4. 플레이 스타일

가히 흉기라고 불릴만한 수준의 왼발 능력을 보유했다. 그냥 왼발 각도에 걸리면 무조건 유효 슈팅은 만들어낼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보유하고 있다. 로빈 반 페르시처럼 왼발 슈팅에 있어서는 유럽에서도 한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18] 특히 최고시속 160km/h[19]까지 기록하며 인간의 반응속도를 초월하는 레이저슛은 압권.

강슛 뿐만 아니라 감아차기, 크로스 등 왼발을 활용한 플레이가 전반적으로 뛰어났으며, 골 결정력 또한 굉장히 뛰어났다.실제로 아스날 시절 적은 플레잉 타임과 경기 수를 상쇄하는 결정력으로 리그 내 최고의 피니셔로 꼽히기도 하였으며, 아르센 벵거가 골문 앞에서 믿고 맏길 수 있는 공격수 1명을 꼽으라면 포돌스키를 뽑을 정도였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현역 최고 수준의 페널티킥 성공률을 갖고 있는데, 여태껏 커리어 내내 실축이 2번밖에 없다. 이렇게 '왼발' 그 자체였던 선수로, 오죽하면 포돌스키는 자신의 국가대표 은퇴 경기에서도 왼발 레이저 슛으로 환상적인 중거리 슛 득점을 꽂아넣으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문제는 왼발 킥력에 비해 그 외의 능력들이 상당히 아쉬운 편인 것. 어렸을 적에는 폭발적인 스피드까지 갖고 있었으나 커리어가 진행되는 동안 장기 무릎 부상을 몇번 끊으며 이 장점은 사라졌다. 일단 주 포지션은 투톱 형성시 2선 중앙 공격수 및 우측 윙포워드로, 윙포워드로 출전시 안쪽으로 치고 들어온 후 왼발을 활용한 슛 또는 괜찮은 피지컬로 한번 버텨준 후 패스각을 창출하는 스타일이었다. 문제는 드리블, 개인기 등 공격수에게 필요한 덕목들이 그냥저냥 괜찮은 수준이었다는 것.

오프 더 볼은 공수 양면으로 부족하고, 상기했듯이 기술적으로도 수비수를 제칠 수 있는 타입도 아니었고 능력도 부족했으며 피지컬로 버텨줄 수는 있으나 원톱을 소화를 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종합적으로 보면 톱으로 쓰자니 결격사유가 있고, 윙어로 쓰자니 월드클래스가 되기에는 드리블 능력 등등이 부족한데, 버리자니 훌륭한 결정력 등 확실히 뛰어난 면모들이 있고 한번씩 왼발로 마술같은 모습을 또 보여주니 참으로 계륵이 아닐수가 없었다. 위와 같은 사유로 인해 포돌스키는 클럽에서의 활약은 국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좋지 못한편이다. 그나마 자신을 에이스로 해서 모든걸 맞춰줄 수 있는 중위권 팀에서는 그럭저럭 봐줄만 했으나, 그것을 맞춰줄 수 없는 큰 클럽에서는 부진하거나 경기력이 들쭉날쭉했다. 특히 사정상 본 포지션이 아닌 왼쪽 윙으로 뛰어야 했던 아스날 중반부부터는 아예 재능낭비로 평가받기도 했다. 성격적으로도 수비참여가 적은, 딱히 부지런한 선수도 아니었고 각종 상황에서의 판단능력도 아쉬운 편이었으니 대성할 수 있었던 아쉬운 선수라기보다는 극명한 장단점의 선수로서 단점들을 개선할 수 있는 여지는 애초에 없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다만 국대에서는 달랐다. 그것은 바로 연계에 아주 능한 클로제가 있었기 때문. 포돌스키의 경우처럼 클로제 또한 타겟맨으로서 골문 앞 마무리/ 연계라는 하나의 특출난 강점만 가진 선수였기 때문에 클럽에서는 비교적 밋밋한 편이었는데, 국가대표 경기, 특히 단기전인 국제대회는 무엇이든 하나의 뚜렷한 강점을 지닌 선수들이 강세를 보이는 편이고[20] 덕분에 클로제와 포돌스키는 둘의 강력한 장기를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었다. 강력한 골게터 포돌스키 & 제공권을 포함한 온 몸을 사용한 연계가 뛰어난 클로제 조합은 독일 국대가 한동안 자랑하던 최고의 콤비였었고, 이 환경에서 포돌스키는 각종 개인수상 및 월드컵 메달까지 획득하며 평소 자신을 괴롭히던 극명한 단점들을 잊은 채 자신의 장점을 미련없이 보여줄 수 있었고, 그렇게 '국대스키'의 모습을 세상에 남기게 된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3. 수훈

5.4. 출전 기록

시즌 클럽 소속리그 리그 FA컵 대륙대회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2002-03 1. FC 쾰른 2 레기오날리가 Nord 1 0 - - - -
2003-04 1. FC 쾰른 2 레기오날리가 Nord 1 0 - - - -
2003-04 1. FC 쾰른 분데스리가 19 10 1 0 - -
2004-05 1. FC 쾰른 2. 분데스리가 30 24 2 5 - -
2005-06 1. FC 쾰른 분데스리가 32 12 1 0 - -
2006-07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2 4 3 2 7 1
2007-08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5 5 4 0 12 5
2007-08 FC 바이에른 뮌헨 2 레기오날리가 Süd 2 0 - - - -
2008-09 FC 바이에른 뮌헨 분데스리가 24 6 3 1 4 2
2009-10 1. FC 쾰른 분데스리가 27 2 4 1 - -
2010-11 1. FC 쾰른 분데스리가 32 13 2 1 - -
2011-12 1. FC 쾰른 분데스리가 29 18 2 0 - -
2012-13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33 11 2 1 6 4
2013-14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20 8 4 3 3 1
2014-15 아스날 FC 프리미어 리그 7 0 0 0 5 3
인터 밀란 세리에 A 17 1 1 0 - -
2015-16 갈라타사라이 SK 쉬페르리그 29 12 3 1 8 2
2016-17 갈라타사라이 SK 쉬페르리그 21 7 5 10 1 0
2017 비셀 고베 J리그 15 5 1 0 - -
2018 비셀 고베 J리그 21 5 1 0 - -

6. 여담


파일:케밥스키.jpg

7. 같이 보기

1 레만 · 2 얀센 · 3 프리드리히 · 4 후트 · 5 · 6 노보트니 · 7 슈바인슈타이거 · 8 프링스 · 9 항케
10 뇌빌 · 11 클로제 · 12 · 13 발락 ⓒ · 14 아자모아 · 15 히츨슈페르거 · 16 · 17 메르테사커
18 보로포스키 · 19 슈나이더 · 20 포돌스키 · 21 메첼더 · 22 오동코어 · 23 힐데브란트
파일:독일 국기.svg 위르겐 클린스만

1 레만 · 2 얀센 · 3 프리드리히 · 4 프리츠 · 5 베스터만 · 6 롤페스 · 7 슈바인슈타이거 · 8 프링스 · 9 고메스
10 뇌빌 · 11 클로제 · 12 엔케 · 13 발락 ⓒ · 14 트로호프스키 · 15 히츨슈페르거 · 16 · 17 메르테사커
18 보로포스키 · 19 오동코어 · 20 포돌스키 · 21 메첼더 · 22 쿠라니 · 23 아들러
파일:독일 국기.svg 요아힘 뢰프

1 노이어 · 2 얀센 · 3 프리드리히 · 4 아오고 · 5 타스치 · 6 케디라 · 7 슈바인슈타이거 · 8 외질 · 9 키슬링
10 포돌스키 · 11 클로제 · 12 비제 · 13 뮐러 · 14 바트슈투버 · 15 트로호프스키 · 16 ⓒ · 17 메르테사커
18 크로스 · 19 카카우 · 20 보아텡 · 21 마린 · 22 부트 · 23 고메스
파일:독일 국기.svg 요아힘 뢰프

1 노이어 · 2 귄도안 · 3 슈멜처 · 4 회베데스 · 5 후멜스 · 6 케디라 · 7 슈바인슈타이거 · 8 외질 · 9 쉬얼레
10 포돌스키 · 11 클로제 · 12 비제 · 13 뮐러 · 14 바트슈투버 · 15 벤더 · 16 ⓒ · 17 메르테사커
18 크로스 · 19 괴체 · 20 보아텡 · 21 로이스 · 22 칠러 · 23 고메스
파일:독일 국기.svg 요아힘 뢰프

1 노이어 · 2 그로스크로이츠 · 3 긴터 · 4 회베데스 · 5 후멜스 · 6 케디라 · 7 슈바인슈타이거 · 8 외질
9 쉬얼레 · 10 포돌스키 · 11 클로제 · 12 칠러 · 13 뮐러 · 14 드락슬러 · 15 두름 · 16
17 메르테사커 · 18 크로스 · 19 괴체 · 20 보아텡 · 21 무스타피 · 22 바이덴펠러 · 23 크라머
파일:독일 국기.svg 요아힘 뢰프

1 노이어 · 2 무스타피 · 3 헥토어 · 4 회베데스 · 5 후멜스 · 6 케디라 · 7 슈바인슈타이거 · 8 외질 · 9 쉬얼레 · 10 포돌스키
11 드락슬러 · 12 레노 · 13 뮐러 · 14 엠레 잔 · 15 바이글 · 16 · 17 보아텡 · 18 크로스
19 괴체 · 20 사네 · 21 키미히 · 22 테어 슈테겐 · 23 고메스
파일:UEFA EURO GER.png 요아힘 뢰프


[1] 폴란드에서 독일귀화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귀화가 아니라 독일 국적자인 아버지에 의해 자동으로 독일 국적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원래 이중국적자였다. 게다가 포돌스키는 유년기 시절 폴란드 국적을 포기했다. 나중에 폴란드 축구협회가 포돌스키를 U-21 대표팀에 발탁하려고 봤더니 폴란드 시민권이 없어서 소집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도 포돌스키 본인 자체가 2살 때부터 성장한 독일 쾰른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며 상당한 애향심을 보이고 있다.[2] 공식 홈페이지[3] 윙어, 세컨드 스트라이커[4] 최전방 스트라이커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기는 하나 원톱에서는 부진한 경우가 많아서(다만 팀에서 투톱 전술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최전방을 뛰게 되어도 그나마 원톱 때 보다는 괜찮은 편이었다.) 최전방 자리는 뛴다고 하면 팀에서 투톱 전술을 사용할 때나 혹은 원톱 전술을 쓰는 팀일 경우에는 팀내에서 쓸 수 있는 공격수가 도저히 아예 없는 상황에서만 기용된다.[5]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장 4위, 득점 3위.[6] 전 소속팀 FC 쾰른에서의 독보적인 활약으로 폴디 왕자님(Prinz Poldi)이라는 별명도 있다.[7] 해외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국대에서만 대활약하는 유형으로 칠레의 에두아르도 바르가스와 함께 거의 무조건 언급되는 선수다.[8] 다만 포돌스키는 국가대표로 뛰었던 2017년 때까지의 클럽 경력을 보면 바이에른 뮌헨 시절과 인테르 밀란 임대 시절을 제외하면 쾰른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아스날 시절도 아스날 9번의 저주를 어느 정도 깼었다고 평가받기도 할 정도로 꽤 준수하였고 전성기가 지난 갈라타사라이 시절에도 2년 동안 56경기 20골을 득점하는 등 클럽에서도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중간은 해줬던데 비해, 바르가스는 클럽에서는 중간도 못가고 거의 바닥의 폼을 보여주는데 국대만 가면 날아다니기 때문에 바르가스쪽이 더욱 특이한 케이스라고 평가받는다. 바르가스가 국대 뿐만 아니라 클럽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준 때는 한창 유망주로 평가받던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에서의 2011 시즌과 티그레스에서의 17-18, 18-19 시즌 뿐이다.[9] 포돌스키가 있던 전차군단은 내내 아르헨티나와 포르투갈을 꺾을 만큼 메날두에게 상성까지 우위였던 팀이었다.[10] 독일어에서 Arschloch라는 욕은 영어의 Asshole과 사전적인 의미는 같지만 어감은 영어 쪽보다도 훨씬 강하고 모욕적인 단어이다. 우리나라의 오히려 '씨X놈' 정도 되는 욕이다.[11] 우리나라에서 이 사건으로 팬을 꽤 잃었다. 특히 발락의 팬들이나 당시 발락이 몸 담고 있던 첼시의 팬들은 거의 다 등을 돌렸다. 그러나 엄격한 위계질서가 강한 우리나라에선 유독 '주장에게 대든 괘씸한' 포돌스키로서의 이미지만 부각된 데 비해, 당시 독일에서는 통독세대의 비중이 큰 현 독일 대표팀에서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고압적으로 선수들을 다루는 발락의 태도 또한 같이 비판받았다. 이는 동독 출신으로 공산주의 사회의 경직된 문화를 보고 배운 발락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12] 그러자 월드컵이 끝나고 비난의 화살은 쾰른으로 향했다. '이렇게 멀쩡한 선수를 어떻게 쓰길래 클럽에서의 성적이 안 좋냐' 등이다.[13] 이는 당시 유럽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1986년 3월 30일 생인 세르히오 라모스가 2013년 3월 26세 357일의 나이로 2014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예선 4차전 핀란드와의 경기에서 100번째 경기를 달성함으로써 얼마 뒤에 깨어졌다. 전 세계를 기준으로 최연소 센추리 클럽은 차범근의 24세 139일.[14] 8강전에서는 팀이 공격진 로테이션을 가동하며 결장했고, 준결승 이탈리아전에서는 선발로 나왔으나 부진하면서 하프타임에 교체되는 등 아주리 징크스에 일조하였다.[15] A매치 역사상 가장 빠른 골은 2024년 3월 23일 오스트리아의 크리스토프 바움가르트너가 슬로바키아전에서 기록한 6초다. 같은 날 열린 프랑스와 독일의 경기에서 독일의 플로리안 비르츠가 7초 만에 득점을 기록해 둘 다 포돌스키의 기록을 경신했다.[16] 조별리그 1차전, 3차전 출장[17] 현재는 삭제되었다.[18] 파워만 따지면, 반 페르시보다 우위다.[19] 체감이 잘 안간다면 야구에서 투수 구속 최고점을 대개 160km/h 대까지 기록하는 편이며, 투수가 160km로 던진 공이 포수의 글러브까지 가는 시간은 0.35초이다.[20] 장신 타겟맨이지만 소속팀에선 별볼일없었던 피터 크라우치나 강력한 피지컬과 반대되는 부족한 기본기의 조지 알티도어, 기술적으로는 대단하나 역시 나머지가 부족했던 파올로 게레로가 그 예시이다.[21] 독일 내 스포츠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들에게 수여하는 훈장.[22] 일각에서는 Lukas라는 이름이 폴란드어 이름이고 이게 포돌스키의 폴란드 혈통을 드러낸다고 이해하기도 하는데, Lukas는 독일어식 이름이고 폴란드어식 이름으로는 Łukasz(우카시)로 쓰인다. 아마 미로슬라프 클로제라는 유사사례와 혼동된다.[23] 사실 독일국가주의에 대해 대단히 경계하는 분위기가 만연해서, 독일 혈통 출신인 선수들도 이런 때에 국가를 부르지 않는 경우는 꽤 많다. 따라서 특별히 민족 정체성 때문이라고 볼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24] 결혼식은 폴란드 카미오나(Kamionna)에서 가톨릭 혼인성사로 진행하였다.[25] Waldemar Podolski[26] Krystyna Podolska[27] 갈라타사라이 시절 케밥에 맛을 들였다.[28] 근작에서는 그래도 적응력을 10 초중반까지는 올려줬다. 다만 일관성은 여전히 형편없고, 중요 경기 활약은 최고급. 반면 프로 의식이 비례해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