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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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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루카스 포돌스키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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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르니크 자브제 No. 10 | ||
루카스 포돌스키 Lukas Podolski | ||
<colbgcolor=#25419a> 본명 | 우카시 유제프 포돌스키 Łukasz Józef Podolski | |
출생 | 1985년 6월 4일 ([age(1985-06-04)]세) | |
폴란드 인민공화국 글리비체 | ||
국적 |
[1] | |
신체 | 키 183cm / 체중 80kg[2] | |
포지션 | 공격수[3][4] | |
소속 | <colbgcolor=#25419a> 유스 | FC 07 베르크하임 (1991~1995) 1. FC 쾰른 (1995~2003) |
선수 | 1. FC 쾰른 II (2003) 1. FC 쾰른 (2003~2006) FC 바이에른 뮌헨 (2006~2009) → FC 바이에른 뮌헨 II (2007~2008) 1. FC 쾰른 (2009~2012) 아스날 FC (2012~2015) → 인테르나치오날레 (2015 / 임대) 갈라타사라이 SK (2015~2017) 비셀 고베 (2017~2019) 안탈리아스포르 (2020~2021) 구르니크 자브제 (2021~) | |
국가대표 | 130경기 49골[5] (독일 / 2004~2017) | |
SNS |
1. 개요
폴란드 출신, 독일 국적의 전 축구 선수. 포지션은 공격수이다. 애칭은 폴디(Poldi).[6]클럽에서는 쾰른 시절을 제외하면 별다른 족적이 없었음에도, 국가대표팀만 가면 시종 날아다녀서 '애국자'로 불린다. 특히 2006 월드컵에서 독일을 3위로 올려놓으며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고, 유로 2008에서도 준우승을 이끌면서 토너먼트의 팀에 선정되었다. 이러한 현상으로 인해 한국 한정으로 '국대스키'라는 별명이 있다.[7][8]
2. 유년기
출신 배경이 클로제와 매우 비슷하다. 폴란드 실롱스크의 글리비체(구 독일 오버슐레지엔주 글라이비츠) 에서 태어났다. 실롱스크/슐레지엔은 원래 프로이센 이래 독일의 영토였으나 독일이 제2차 세계 대전에 패망하면서 연합국에 의해 강제로 폴란드 영토가 되었다. 슐레지엔에 살던 독일인들은 독일 본토로 추방되었고, 독일인들이 떠난 빈 땅에는 소련이 동폴란드를 강제 병합하면서 발생한 폴란드 실향민들이 실롱스크로 이주해오게 된다. 실롱스크/슐레지엔에 원래 살던 원주민 독일인들은 추방령에 따라 대부분 서독으로 떠났으나 생계 등의 이유 때문에 추방령에도 불구하고 슐레지엔에 남은 독일인들도 일부 있었는데, 포돌스키, 클로제의 아버지가 모두 그러한 케이스다. 포돌스키의 조부모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슐레지엔에 거주해오던 독일계였으며, 독일 시민권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은 이처럼 전쟁으로 빼앗긴 영토에 계속 거주하는 독일인들은 물론 그들의 후손들에게도 독일 국적을 부여하고 있다.이처럼 포돌스키와 클로제 모두 아버지가 독일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고, 포돌스키, 클로제 본인 역시 독일 국적법의 국외 출생자 규정(German Citizenship Through Descent)에 따라 출생과 동시에 자동으로 독일 국적이 취득되었다. 따라서 포돌스키, 클로제는 폴란드에서 독일로 귀화한 것이 아니고 출생하면서부터 독일과 폴란드 국적을 동시에 보유한 이중국적자다. 게다가 클로제와 포돌스키는 각각 생후 1개월, 2살 때 폴란드를 떠났기 때문에 두 사람 모두 실질적으로 폴란드에서 유년시절의 기억이 없다. 두 사람은 모두 10대 때 폴란드 국적을 포기했다.
포돌스키가 2살 때 그의 가족은 폴란드를 떠나 독일 쾰른 교외 지역으로 이주했다. 포돌스키는 자신의 고향을 쾰른이라 말하며 쾰른에 상당한 애향심을 보이고 있다. 포돌스키는 7살 때 FC 07 Bergheim에 입단해 축구 경력을 시작했고 11살 때 1. FC 쾰른에 입단하였고, 청소년 대표팀에 줄곧 차출되었다.
3. 선수 경력
3.1. 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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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3.2. 국가대표 경력
위 클럽 경력을 읽어보자면 빅클럽도 그럭저럭 누비고 다녔으니 아주 못난 커리어는 아니지만, 유망주 시절 큰 기대에는 부응하지 못하는 정도였고 유수한 스타 플레이어들의 기록에는 한끗 미치질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국가대표 무대에서만큼은 요아힘 뢰브의 전폭적 신뢰 아래 앵간한 월드클라스 선수 뺨치는 화려한 기록들에다 특히 2006년 월드컵부터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까지 커리어의 하이라이트로 거론되곤 한다. 오죽했으면 포돌스키의 국가대표 커리어의 전성기 시절인 2006 독일 월드컵에서 2010 남아공 월드컵 때까지 팬들에게 우스갯소리로 국대에서의 포돌스키는 메날두급의 무서운 선수로 180도 돌변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고[9] 게다가 월드컵 우승컵도 장식하는 등 국대 상복까지 화려하니 축구팬들 사이에선 국대에서만 잘하는 선수의 표본으로 회자되는 선수다. 별명은 '국대스키', '애국자'.독일의 각급 청소년 대표팀을 거쳐 2004년 6월 6일, 헝가리와의 친선 경기에서 국가대표에 첫 데뷔했으며, 유로 2004에도 발탁되었다. 이후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투톱을 맞추면서 자국에서 열린 2006년 월드컵에서 클로제와 함께 맹활약을 펼치며 전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으며 대회 3골을 기록해 득점 공동 2위를 기록했다. 월드컵에서의 활약상을 바탕으로 대회 전 신인상 후보로 거론되던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웨인 루니 등을 제치고 영플레이어상을 받았다.
유로 2008에서도 소속팀 부진과 대조적으로 3골을 득점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본인이 태어난 조국 폴란드를 상대로 홀로 2골을 넣으며 비수를 꽂았다.이때 포돌스키는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눈물을 참으며 슬퍼하였다. 대회 종료 후 포돌스키는 유로 2008 토너먼트의 팀에 선정되었다.
발락과의 설전 |
2009년 4월 1일 웨일스와의 월드컵 예선전에서 당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이었던 미하엘 발락의 뺨을 때린 일로 그는 구설수에 올랐다. 본인은 부인했으나, 그가 좀 더 열심히 뛸 것을 요구하는 발락에게 "Lauf selber du arschloch!"("너나 뛰어라 이 씹새야!")라고 외쳤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10] 이후 5,000 유로의 벌금을 부과받았으며 국대에서 제명해야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11]
발락과의 말다툼과 09-10 시즌 18경기 2골로 그야말로 본인 최악의 시즌을 보냈음에도 요아힘 뢰브 감독이 2010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대표팀으로 또 다시 차출하자 자국 언론의 집중 포화를 맞게 된다.
그러나 포돌스키는 그 비난이 무색하게 월드컵에서 호주전, 잉글랜드전에서 강력한 왼발 슛으로 득점포를 올리는 등 빼어난 활약을 펼치며 뢰브 감독의 기대에 부응해 주었고 세대교체를 진행하는 독일을 3위에 올리는데 한 몫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게 된다.[12]
유로 2012에도 당연히 국가대표로 소집되었다. 조별리그에서는 2차전까지 큰 활약이 없었지만 3차전 덴마크를 상대로 만 27세 13일로 센추리 클럽에 가입했고[13] 전반 19분에 선취골까지 넣으며 센추리 클럽 가입 축포를 터뜨렸다. 하지만 이를 제외하면 대회의 전반적인 활약상은 포돌스키의 명성에는 미치지 못했다.[14]
2013년 5월 30일 에콰도르와의 A매치전에서 9초만에 골을 넣었다. 당시 A매치 역대기록 2위.[15] 에콰도르 수비수의 실책덕이긴 하지만 1위가 8.3초만에 골이라는걸 생각하면 대단한 기록이다. 더욱이 이날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면서 국대에서는 여전히 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2014 브라질 월드컵은 포돌스키에게 아쉬움이 남는 대회였다. 겨우 조별리그 2경기[16]에 출전해서 득점 없이 54분간 그라운드를 누빈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조별리그 3차전 이후 다리 부상으로 인해 토너먼트에 뛰지 못했고, 독일의 우승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2014 월드컵 이후 국대에서도 점점 예전같은 모습이 줄어들면서 점차 서브 자원으로 밀려났고, 유로 2016을 마지막으로 포돌스키는 독일 국가대표에서 은퇴할 것을 발표했다.
2017년 3월 23일 새벽 4시 45분(한국시간)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친선 경기를 포돌스키의 국가대표 은퇴경기로 잡게 되었고, 이 경기에 선발로 출전, 안드레 쉬얼레의 패스를 받아 멋진 왼발 중거리슛을 성공시키며 본인의 국가대표 13년의 경력에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그 덕분에 10분을 남겨두고 제바스티안 루디와 교체될 때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리고 이 골은 결승골이 되어 독일은 1:0 승리를 거두었다. 은퇴와 함께 포돌스키가 달았던 국가대표 등번호 10번은 메수트 외질에게 넘겨주었다.
네이버 스포츠는 이날 포돌스키의 골 장면 영상 제목을 기어이 자신의 은퇴경기에 골을 넣고 마는 포돌스키로 업로드했다.[17]
포돌스키의 국가대표 통산 기록은 A매치 130경기 49골 31도움을 기록했다.
4. 플레이 스타일
가히 흉기라고 불릴만한 수준의 왼발 능력을 보유했었다.[18] 위치를 가리지 않고 일단 슈팅 기회가 나면 바로 강력한 슈팅을 시도하는 선수였다. 뿐만 아니라 감아차기, 크로스 등 왼발을 활용한 모든 플레이가 전반적으로 뛰어났으며, 골 결정력 또한 굉장히 뛰어났다. 게다가 높은 페널티킥 성공률까지 갖춘 선수였다.덕분에 아스날 시절엔, 적은 플레잉 타임과 경기 수를 상쇄하는 결정력으로 리그 내 최고의 피니셔로 꼽히기도 하였으며, 아르센 벵거가 골문 앞에서 믿고 맏길 수 있는 공격수 한 명을 꼽으라면 포돌스키를 꼽을 정도였다.
또한 단순한 포처가 아닌 왼쪽 윙어와 섀도우 스트라이커까지 소화하는 다재다능함도 있었으며, 전성기였던 쾰른 시절엔 공격 진영에서 공격수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걸 해내는 그야말로 팀의 알파이자 오메가였으나, 포돌스키의 커리어 내내 가장 큰 문제점은 자신이 갖고 있는 다재다능한 툴과 재능에 비해, 축구를 하는 방식과 미학이 지나치게 단조롭다는 데 있었다.
본래 전성기 시절의 포돌스키는 강력한 왼발 슛을 무기 삼는 포처로서의 엄청난 재능 뿐 아니라 뛰어난 크로스와 패싱력, 빠른 발과 드리블 돌파 등을 모두 갖춘 팔방미인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전술적으로 늘 다루기가 애매한 선수였는데, 이는 선수 본인의 경기 접근 방식이 지나치게 단순했던 문제도 있었으나, 포돌스키가 성장해가던 시기는 공교롭게도 축구계의 전술 변화가 꽤 급진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2006 독일 월드컵까진 승승장구하던 그였지만, 2008년 펩 과르디올라의 등장 이래로 축구계의 주류 전술이 변화하고 진보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포돌스키 같은 유형의 투톱에서의 포처들은 대체적으로 갑작스러운 몰락을 겪었다.[19] 포돌스키 또한 예외가 아니었고, 이후 국가 대표와 소속 클럽 등지에선 공격수보단 윙어 역할을 수행하는 빈도가 더 크게 늘어났다.
요컨대 가진 재능은 다재다능하고 풍부했으나, 그것들을 살리기 위해 본인 스스로가 유려한 방식으로 플레이하고자 하는 의지는 커리어 내내 전혀 없었으며, 포돌스키는 언제나 직선적이고 단순한 방식으로만 경기를 했다. 자신이 모든 걸 해결해야하는 쾰른 시절에는 우직한 골 사냥만이 아닌 자신의 기술이나 창조성을 보여주는 유려한 모습들도 간헐적으로 보여주었으나, 그는 기본적으로 경기 내내 자신이 어떤 위치와 포지션에 있건, 언제나 자신이 슛할 공간과 타이밍 잡기에만 공을 들이는 그야말로 천성이 포처인 선수였다.
요아힘 뢰브 체제 이후로 독일은 투톱을 버리고 원톱으로 전환했고, 포돌스키의 빠른 발과 침투력, 킥력 등을 살리고자 왼쪽 윙어로 기용했는데, 사실상 수비시엔 왼쪽 윙어를 맡을 뿐, 공격 시엔 박스 안으로 침투하는 변칙적인 측면 포처로 기용되었다. 연계에 능한 스트라이커인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공간 창출의 귀재인 토마스 뮐러, 당대 최고의 어시스터 중 하나였던 메수트 외질 등과 조화를 이루면서 포돌스키의 장점을 현대 축구에 알맞게 융화시킬 수 있었다. 또한 동시에, 그 자랑거리였던 국가 대표팀에서의 활약이 저조해져갔던 시기 역시도 미로슬라프 클로제의 노쇠화와 은퇴가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포돌스키는 종합적으로, 뛰어난 킥력과 스킬을 갖춘 슈터로서의 재능이 매우 뛰어난 전형적인 스나이퍼 유형의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선수들은 매우 희귀하며, 필리포 인자기나 루드 반 니스텔로이처럼 골 냄새를 매우 잘 맞고, 뛰어난 위치 선정과 골에 대한 집념이 대단한 유형의 선수였다기 보단, 자신의 슛 기술을 이용해 슛 욕심을 내며 위치를 가리지 않고 슛을 지속적으로 퍼붓는 유형이었다.
전형적으로 박스 안에서만 영향력을 발휘하는 순수한 포처들과 다르게, 상대 수비수와 박스 안에서 너저분한 경합을 이겨내려는 의지보단, 조금이라도 공간와 시간적 여유가 있는 박스 외곽에서 슛을 시도하는 스나이퍼형 포처였다. 이러한 선수들은 포지션이나 역할론에 구애받지 않으며, 자신이 슛을 할 수 있는 위치를 찾아 돌아다니는 습성이 있다. 때문에 이러한 선수들이 으레 그러하듯, 선수 본인의 스탯과는 상관없이, 실질적으로 경기에 끼치는 영향력은 매우 협소한 편이었으나, 보는 이로 하여금 골 하나만큼은 시원시원한 골들을 많이 넣었다는 점이 포돌스키의 커리어 내내 가장 큰 매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FC 바이에른 뮌헨 (2006~2009)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 FIFA 월드컵: 2014
5.2. 개인 수상
- 독일 이달의 축구 선수: 2003년 12월, 2004년 4월, 2005년 1월, 2006년 4월
- 독일 이달의 골: 2004년 1월·5월·10월, 2005년 1월·3월·6월·9월, 2006년 4월, 2008년 7월, 2011년 2월, 2016년 7월, 2017년 3월, 2022년 11월
- 2. 분데스리가 득점왕: 2004-05
- FIFA 월드컵 베스트 영플레이어: 2006
- UEFA 유로 실버슈: 2008#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2008
- 키커 올해의 팀: 2010-11
- 독일 올해의 골: 2017, 2022
- 엑스트라클라사 도움왕: 2022-23
5.3. 수훈
- 은월계수잎 훈장[20]: 2006, 2010, 2014
5.4. 출전 기록
시즌 | 클럽 | 소속리그 | 리그 | FA컵 | 대륙대회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2002-03 | 1. FC 쾰른 2 | 레기오날리가 Nord | 1 | 0 | - | - | - | - |
2003-04 | 1. FC 쾰른 2 | 레기오날리가 Nord | 1 | 0 | - | - | - | - |
2003-04 | 1. FC 쾰른 | 분데스리가 | 19 | 10 | 1 | 0 | - | - |
2004-05 | 1. FC 쾰른 | 2. 분데스리가 | 30 | 24 | 2 | 5 | - | - |
2005-06 | 1. FC 쾰른 | 분데스리가 | 32 | 12 | 1 | 0 | - | - |
2006-07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 22 | 4 | 3 | 2 | 7 | 1 |
2007-08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 25 | 5 | 4 | 0 | 12 | 5 |
2007-08 | FC 바이에른 뮌헨 2 | 레기오날리가 Süd | 2 | 0 | - | - | - | - |
2008-09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 24 | 6 | 3 | 1 | 4 | 2 |
2009-10 | 1. FC 쾰른 | 분데스리가 | 27 | 2 | 4 | 1 | - | - |
2010-11 | 1. FC 쾰른 | 분데스리가 | 32 | 13 | 2 | 1 | - | - |
2011-12 | 1. FC 쾰른 | 분데스리가 | 29 | 18 | 2 | 0 | - | - |
2012-13 | 아스날 FC | 프리미어 리그 | 33 | 11 | 2 | 1 | 6 | 4 |
2013-14 | 아스날 FC | 프리미어 리그 | 20 | 8 | 4 | 3 | 3 | 1 |
2014-15 | 아스날 FC | 프리미어 리그 | 7 | 0 | 0 | 0 | 5 | 3 |
인터 밀란 | 세리에 A | 17 | 1 | 1 | 0 | - | - | |
2015-16 | 갈라타사라이 SK | 쉬페르리그 | 29 | 12 | 3 | 1 | 8 | 2 |
2016-17 | 갈라타사라이 SK | 쉬페르리그 | 21 | 7 | 5 | 10 | 1 | 0 |
2017 | 비셀 고베 | J리그 | 15 | 5 | 1 | 0 | - | - |
2018 | 비셀 고베 | J리그 | 21 | 5 | 1 | 0 | - | - |
6. 여담
- 본인은 독일 국적이고 독일 국가대표임을 항상 인식하고 있으며, 이름도 폴란드어가 아닌 독일어식 이름을 쓰고 있으나[21] 본인 정체성의 뿌리는 폴란드인으로 규정하는 듯 하는 면모를 여러 인터뷰에서 발견할 수 있으며, 실제로도 모국어는 폴란드어이다. 독일과 폴란드와의 국가대표 경기에서 독일 국가를 부르지 않는다.[22] UEFA 유로 2008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포돌스키 혼자 2골을 넣어 독일의 2:0 승리를 이끌었을 때 그는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았으며 골 세레머니도 하지 않았다. 사실 독일 대표로 뽑히기 전, 만약 폴란드 국가대표팀에서 그를 먼저 불러 데뷔시킬 의향이 있다면 동의할 생각이었다고 하나, 당시 폴란드 국가대표팀의 감독이 포돌스키에 대해 별 관심을 주지 않아서 결국 독일 대표 제의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독일 국가대표팀의 득점을 책임지는 애국자라는 별명과는 다소 아이러니한 관계에 있는 위치.
- 선수 생활 초기에는 폴란드계여서 독일어가 서툴러 조롱을 많이 당했고, 이 때문에 당시 몇몇 언론이 자신을 놀림거리로 삼아서 언론에 호의적이지 않다. 이 중 일부 언론과는 지금까지도 일절 인터뷰를 하지 않을 정도다.
- 쾰른 시민들의 애정이 상당하다. 폴디를 '쾰른의 아들'로 불러대며 그를 매우 좋아하여 어떠한 부진을 겪어도 쉽게 욕하지 않고, 심지어 가난한 시민구단인 FC 쾰른이 이적료가 없어 포돌스키를 되사오지 못하자 자발적으로 그의 사진을 구매하는 등 나름대로 돈을 모아 이적료를 마련한 일은 유명하다. 쾰른 복귀 후 부진에 허덕일 때도 포돌스키를 욕하지 않고 대신 '우리 폴디한테서 신경꺼라 언론 XXX들아'라는 투의 플랜카드를 경기장에 걸었다.
- 폴디 본인도 쾰른을 제2의 고향으로 인식할 정도로 애정이 엄청나다. 1. FC 쾰른으로 돌아와 활동하던 당시에는 무려 자비로 의상을 준비해 해마다 열리는 로젠몬탁 페스티발에 참가해 거리 곳곳에 과자를 뿌렸었고, 아스날에서 뛸 당시에도 부상 중이거나 라인업에서 제외될 때면, 독일로 날아가 쾰른의 홈 경기를 관전하기도 하였다. 폴디의 아내와 자식들도 여전히 쾰른에서 생활 중이다. 쾰른이 빅매치를 이기거나 하면 광속으로 인스타그램에 포스팅을 한다.
- 한때 바이에른 뮌헨에서 FC 쾰른으로 돌아올 때 F1 레이서 미하엘 슈마허가 포돌스키를 위해 성금을 일부 지원한 바가 있어서 2014 브라질 월드컵 포르투갈과의 경기 전날에 6개월 전 스키장의 사고로 아직도 슈마허가 혼수상태에 빠지자 "포르투갈전을 슈마허를 위해 뛰겠다"고 말한 바 있지만, 당일날 기적적으로 슈마허가 혼수상태에서 회복하면서 훈훈한 광경이 목격되었다.
- 상술한대로 쾰른에서의 인기가 엄청나, 쾰른에서 뛰지 않는 지금도 쾰른 지역의 한 맥주업체의 광고 모델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다양한 상품의 광고를 맡았는데, 그가 맡는 광고는 미묘한 싼티와 더불어 내용이 어딘지 모르게 아스트랄하다.과자 Prinzenrolle 광고 개중에서도 병맛으로 유명한 데오도란트 광고 은행 광고
- 바이에른 뮌헨에서 다른 팀으로 이적한 이후 인터뷰에서 "뮌헨에 별 감정은 없다"고 얘기했지만, 아스날 시절 바이에른 뮌헨을 만났을때 왕성한 경기력을 보여줬고 골까지 넣었다.
- 준수한 얼굴에 개구쟁이, 악동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대내외적으로 사생활, 특히 이성 문제 쪽은 매우 깨끗한 편이다. 2006 독일 월드컵 당시 패리스 힐튼이 그에게 '만나지 않겠느냐'라는 투로 이야기하며 큰 관심을 표한 바 있으나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이후 17세부터 교제하며 몇 년 전부터 동거해오던 폴란드 출신 여성 모니카 푸할스키(Monika Puchalski)와 2011년에 결혼식을 올렸다.[23] 둘 사이에는 1남 2녀가 있다.
- 그와 함께 애국자라 불린 미로슬라프 클로제와 비슷한 면이 많이 있는데, 둘 다 폴란드 출신이며, 아버지 발데마르 포돌스키[24]는 축구 선수이고 어머니 크리스티나 포돌스카[25]는 핸드볼 선수로 활동했던 경력이 있다.
- 쾰른에 대한 애정을 노래한 'Liebe deine Stadt(Love Your City)' 곡을 직접 불러 발표했는데, 이 곡이 독일에서 음원차트 1위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듣기.
- 요식업을 이것저것 하고있는데,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그 시작은 2017년 쾰른에 문을 연 '아이스크림 유나이티드'라는 이름의 아이스크림집이었는데 성과가 쏠쏠했는지 2018년 초, 케밥 레스토랑을 하나 더 열었다.[26] 가게 이름은 'Mangal Döner'이며 개업 첫날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 경찰이 교통정리까지 했다고 한다. 구글 평점이 본점 기준으로 5점 만점에 팬심 거품이 다 빠졌을 2022년 현재에도 4.1점, 분점들도 모두 4점 이상으로, 맛으로도 호평받고 있다. 현재는 아이스크림 유나이티드는 소매점에도 납품 중이며, 망갈 되네르는 독일 전국 30여 지점을 둘 정도로 둘 다 사업적으로 완벽히 성공했다. 2025년에 망갈 되네르는 미국진출도 노리고 있다. 더 선의 보도에 따르면 그의 자산은 2억 700만 유로(약 3271억원) 이상으로 추정되며, 축구 선수로 번 돈보다 훨씬 큰 규모의 자산을 사업으로 축적한 것으로 보인다.
- 사진을 찍을 때 따봉 포즈를 많이 취한다. 위의 사진 2장에 나와있는 쌍따봉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몇몇 팬들은 장난스레 따봉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다만 경기 중 찬스 날려 먹고 따봉을 날리는 쪽은 아니다. 주로 유니폼 들고 사진 찍을 때 많이 날린다.
- 카잔 아레나에서 열렸던 조별리그 F조 한국 vs 독일전을 일본에서 텔레비전로 관람했다. 하지만 독일 축구 역사상 최악의 참사 이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공식 트위터에 "모든 게 끝났다!"라는 글이 올라오자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모티콘을 올렸다. 물론 독일인이라면 누구나 그런 심정이었겠지만, 그 역시도 4년 전의 최고의 영광의 시절이 떠올라 더욱 참담했을 것이다. #
7. 같이 보기
1 레만 · 2 얀센 · 3 프리드리히 · 4 후트 · 5 켈 · 6 노보트니 · 7 슈바인슈타이거 · 8 프링스 · 9 항케 10 뇌빌 · 11 클로제 · 12 칸 · 13 발락 ⓒ · 14 아자모아 · 15 히츨슈페르거 · 16 람 · 17 메르테사커 18 보로포스키 · 19 슈나이더 · 20 포돌스키 · 21 메첼더 · 22 오동코어 · 23 힐데브란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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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레만 · 2 얀센 · 3 프리드리히 · 4 프리츠 · 5 베스터만 · 6 롤페스 · 7 슈바인슈타이거 · 8 프링스 · 9 고메스 10 뇌빌 · 11 클로제 · 12 엔케 · 13 발락 ⓒ · 14 트로호프스키 · 15 히츨슈페르거 · 16 람 · 17 메르테사커 18 보로포스키 · 19 오동코어 · 20 포돌스키 · 21 메첼더 · 22 쿠라니 · 23 아들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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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이어 · 2 얀센 · 3 프리드리히 · 4 아오고 · 5 타스치 · 6 케디라 · 7 슈바인슈타이거 · 8 외질 · 9 키슬링 10 포돌스키 · 11 클로제 · 12 비제 · 13 뮐러 · 14 바트슈투버 · 15 트로호프스키 · 16 람 ⓒ · 17 메르테사커 18 크로스 · 19 카카우 · 20 보아텡 · 21 마린 · 22 부트 · 23 고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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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이어 · 2 귄도안 · 3 슈멜처 · 4 회베데스 · 5 후멜스 · 6 케디라 · 7 슈바인슈타이거 · 8 외질 · 9 쉬얼레 10 포돌스키 · 11 클로제 · 12 비제 · 13 뮐러 · 14 바트슈투버 · 15 벤더 · 16 람 ⓒ · 17 메르테사커 18 크로스 · 19 괴체 · 20 보아텡 · 21 로이스 · 22 칠러 · 23 고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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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이어 · 2 그로스크로이츠 · 3 긴터 · 4 회베데스 · 5 후멜스 · 6 케디라 · 7 슈바인슈타이거 · 8 외질 9 쉬얼레 · 10 포돌스키 · 11 클로제 · 12 칠러 · 13 뮐러 · 14 드락슬러 · 15 두름 · 16 람 ⓒ 17 메르테사커 · 18 크로스 · 19 괴체 · 20 보아텡 · 21 무스타피 · 22 바이덴펠러 · 23 크라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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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이어 ⓒ · 2 무스타피 · 3 헥토어 · 4 회베데스 · 5 후멜스 · 6 케디라 · 7 슈바인슈타이거 · 8 외질 · 9 쉬얼레 · 10 포돌스키 11 드락슬러 · 12 레노 · 13 뮐러 · 14 엠레 잔 · 15 바이글 · 16 타 · 17 보아텡 · 18 크로스 19 괴체 · 20 사네 · 21 키미히 · 22 테어 슈테겐 · 23 고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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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폴란드에서 독일로 귀화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귀화가 아니라 독일 국적자인 아버지에 의해 자동으로 독일 국적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원래 이중국적자였다. 게다가 포돌스키는 유년기 시절 폴란드 국적을 포기했다. 나중에 폴란드 축구협회가 포돌스키를 U-21 대표팀에 발탁하려고 봤더니 폴란드 시민권이 없어서 소집을 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도 포돌스키 본인 자체가 2살 때부터 성장한 독일 쾰른을 자신의 고향으로 여기며 상당한 애향심을 보이고 있다.[2] 공식 홈페이지[3] 윙어, 세컨드 스트라이커[4] 최전방 스트라이커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기는 하나 다만 원톱에서는 부진한 경우가 많아서(다만 팀에서 투톱 전술을 사용하는 경우에는 최전방을 뛰게 되어도 그나마 원톱 때 보다는 괜찮은 편이었다.) 최전방 자리는 뛴다고 하면 팀에서 투톱 전술을 사용할 때나 혹은 원톱 전술을 쓰는 팀일 경우에는 팀내에서 쓸 수 있는 공격수가 도저히 아예 없는 상황에서만 기용된다.[5]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장 4위, 득점 3위.[6] 전 소속팀 FC 쾰른에서의 독보적인 활약으로 폴디 왕자님(Prinz Poldi)이라는 별명도 있다.[7] 해외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국대에서만 대활약하는 유형으로 칠레의 에두아르도 바르가스와 함께 거의 무조건 언급되는 선수다.[8] 다만 포돌스키는 국가대표로 뛰었던 2017년 때까지의 클럽 경력을 보면 바이에른 뮌헨 시절과 인테르 밀란 임대 시절을 제외하면 쾰른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아스날 시절도 아스날 9번의 저주를 어느 정도 깼었다고 평가받기도 할 정도로 꽤 준수하였고 전성기가 지난 갈라타사라이 시절에도 2년 동안 56경기 20골을 득점하는 등 클럽에서도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중간은 해줬던데 비해, 바르가스는 클럽에서는 중간도 못가고 거의 바닥의 폼을 보여주는데 국가대표팀만 가면 날아다니기 때문에 바르가스쪽이 더욱 특이한 케이스라고 평가받는다. 바르가스가 국가대표팀 뿐만 아니라 클럽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준 때는 한창 유망주로 평가받던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에서의 2011 시즌과 티그레스에서의 17-18, 18-19 시즌 뿐이다.[9] 포돌스키가 있던 전차군단은 내내 아르헨티나와 포르투갈을 꺾을 만큼 메날두에게 상성까지 우위였던 팀이었다.[10] 독일어에서 Arschloch라는 욕은 영어의 Asshole과 사전적인 의미는 같지만 어감은 영어 쪽보다도 훨씬 강하고 모욕적인 단어이다. 우리나라의 오히려 '씨X놈' 정도 되는 욕이다.[11] 우리나라에서 이 사건으로 팬을 꽤 잃었다. 특히 발락의 팬들이나 당시 발락이 몸 담고 있던 첼시의 팬들은 거의 다 등을 돌렸다. 그러나 엄격한 위계질서가 강한 우리나라에선 유독 '주장에게 대든 괘씸한' 포돌스키로서의 이미지만 부각된 데 비해, 당시 독일에서는 통독세대의 비중이 큰 현 독일 대표팀에서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고압적으로 선수들을 다루는 발락의 태도 또한 같이 비판받았다. 이는 동독 출신으로 공산주의 사회의 경직된 문화를 보고 배운 발락의 어쩔 수 없는 한계였다.[12] 그러자 월드컵이 끝나고 비난의 화살은 쾰른으로 향했다. '이렇게 멀쩡한 선수를 어떻게 쓰길래 클럽에서의 성적이 안 좋냐' 등이다.[13] 이는 당시 유럽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1986년 3월 30일 생인 세르히오 라모스가 2013년 3월 26세 357일의 나이로 2014년 FIFA 월드컵 유럽 지역예선 4차전 핀란드와의 경기에서 100번째 경기를 달성함으로써 얼마 뒤에 깨어졌다. 전 세계를 기준으로 최연소 센추리 클럽은 차범근의 24세 139일.[14] 8강전에서는 팀이 공격진 로테이션을 가동하며 결장했고, 준결승 이탈리아전에서는 선발로 나왔으나 부진하면서 하프타임에 교체되는 등 아주리 징크스에 일조하였다.[15] A매치 역사상 가장 빠른 골은 2024년 3월 23일 오스트리아의 크리스토프 바움가르트너가 슬로바키아전에서 기록한 6초다. 같은 날 열린 프랑스와 독일의 경기에서 독일의 플로리안 비르츠가 7초 만에 득점을 기록해 둘 다 포돌스키의 기록을 경신했다.[16] 조별리그 1차전, 3차전 출장[17] 현재는 삭제되었다.[18] 동시대의 아드리아누, 로빈 반 페르시 등처럼 왼발 슈팅에 있어서는 유럽에서도 한 손가락 안에 꼽힐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최고시속 160km/h까지 기록하며 인간의 반응 속도를 초월하는 레이저 슛은 압권이었다.[19] 당시까지만 해도 클래식한 축구를 지속하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경 정도만이 마이클 오언, 치차리토 등을 기용하면서도 성공을 거뒀다.[20] 독일 내 스포츠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들에게 수여하는 훈장.[21] 일각에서는 Lukas라는 이름이 폴란드어 이름이고 이게 포돌스키의 폴란드 혈통을 드러낸다고 이해하기도 하는데, Lukas는 독일어식 이름이고 폴란드어식 이름으로는 Łukasz(우카시)로 쓰인다. 아마 미로슬라프 클로제라는 유사사례와 혼동된다.[22] 사실 독일은 국가주의에 대해 대단히 경계하는 분위기가 만연해서, 독일 혈통 출신인 선수들도 이런 때에 국가를 부르지 않는 경우는 꽤 많다. 따라서 특별히 민족 정체성 때문이라고 볼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23] 결혼식은 폴란드 카미오나(Kamionna)에서 가톨릭 혼인성사로 진행하였다.[24] Waldemar Podolski[25] Krystyna Podolska[26] 갈라타사라이 시절 케밥에 맛을 들였다.[27] 근작에서는 그래도 적응력을 10 초중반까지는 올려줬다. 다만 일관성은 여전히 형편없고, 중요 경기 활약은 최고급. 반면 프로 의식이 비례해서 내려갔다.
분류
- 1985년 출생
- 2003년 데뷔
- 글리비체 출신 인물
- 독일의 남자 축구 선수
- 폴란드계 독일인
- 복수국적자
- 공격수
- 윙어
- 세컨드 스트라이커
- FC 바이에른 뮌헨 II/은퇴, 이적
- FC 바이에른 뮌헨/은퇴, 이적
- 1. FC 쾰른 II/은퇴, 이적
- 1. FC 쾰른/은퇴, 이적
- 아스날 FC/은퇴, 이적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은퇴, 이적
- 갈라타사라이 SK/은퇴, 이적
- 비셀 고베/은퇴, 이적
- 안탈리아스포르/은퇴, 이적
- 구르니크 자브제/현역
- 2006 FIFA 월드컵 독일 참가 선수
-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참가 선수
-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참가 선수
- 독일의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4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08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12 참가 선수
- UEFA 유로 2016 참가 선수
- 독일의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참가 선수
- 2005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독일 참가 선수
- FIFA 월드컵 영플레이어상 수상자
- 독일의 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 축구 선수 자녀
- 핸드볼 선수 자녀
- FIFA 월드컵 우승 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