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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프랑스의 공영방송인 프랑스 2가 발표한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 명단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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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colbgcolor=#000><colcolor=#fff> FRS 루이 파스퇴르 Louis Pasteur | |
출생 | 1822년 12월 27일 |
프랑스 왕국 부르고뉴프랑슈콩테 주 쥐라주 돌 | |
사망 | 1895년 9월 28일 (향년 72세) |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근교 | |
국적 | 프랑스 ( 부르봉 왕정복고1822~1830 7월 왕정1830~1848 프랑스 제2공화국1848~1852 프랑스 제2제국1852~1870 프랑스 제3공화국1870~1895) |
직업 | 생화학자 |
분야 | 화학, 미생물학, 생화학, 세균학 |
학력 | 파리 고등사범학교 파리 대학교 |
수상 | 럼퍼드 메달 (1856) 왕립학회 외국인 회원 (1869) 코플리 메달 (1874)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크루아 (1881) 알버트 메달 (1882) 국립과학원 외국인 준회원 (1883) 에든버러 대학, 치료학 부분 카메론 상 (1889) 레이우엔훅 메달 (1895) 메지디 훈장 (?) |
배우자 | 마리 로랑 (1849년 결혼) |
자녀 | 5명(아들 1명,딸 4명) |
종교 | 가톨릭 |
서명 | 파일:Louis Pasteur Signature.p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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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출신의 화학자이자 생물학자.2. 생애
아버지는 무두장이였고 어머니는 평범한 주부였다. 작은 시골에서 태어나 평범한 가정에서 살았지만 부모님의 교육열이 대단했다고 한다. 학교 선생의 추천을 받아 파리의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으나 향수병을 버티지 못하고 돌아온다. 이후 22살에 재입학하여 교원 시험에 합격하였고, 그대로 중학교 물리교사가 되려고 했지만 그의 재능을 알아본 교수들의 만류로 대학에 남아 학위 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27살에 화학과 조교수로 임명되었으며, 아내와는 만난 지 4개월만에 결혼했다. 이후 계속해 화학을 연구하여 결정의 모양, 분자구조, 편광 효과가 서로 관련됨을 증명하여 명성을 얻었고 생물만이 광학적 비대칭 화합물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견해를 정립해 분자비대칭연구가 생명의 기원에 관한 열쇠가 된다.그가 릴 대학교 자연과학대학장을 지내고 있을 때 인근의 한 양조업자가 술이 변질되는 문제로 파스퇴르를 찾아오며 생물학자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당시에는 효모가 당을 알코올로 바꾸는 촉매라는 것까지는 알려졌지만, 그 원리는 화학반응으로 잘못 인식되어 있었다. 그래서 화학자인 파스퇴르에게 술이 간혹 시큼하게 변해 버리는 원인을 찾아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파스퇴르는 술통에서 채취한 표본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다가 그 모양이 예사 경우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냈다. 변질된 술통에서 발견된 다른 모양의 것, 그것은 바로 세균이었다. 그리고 그 세균을 편광기로 분석하여 생물이라는 것도 알아냈다.
당시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발생설(미생물이나 구더기 같은 생물들이 자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이론) 이래 그런 미생물 또한 자연발생한다고 생각했으나, 파스퇴르는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을 통해 생물속생설을 입증하였다. 다만 완벽한 입증은 아니었으며, 이후 제자인 틴달과 사위인 샹 베를랑이 각각 간헐살균법과 오토클레이브를 개발함으로써 비로소 보완되었다. 그는 '이 연구로서 자연발생이라는 교리는 결코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또한 이로서 이런 다양한 미생물을 가르키는 균(germ)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파스퇴르는 연구 끝에 저온살균법을 개발했으며, 오늘날 술, 우유 등에 사용되고 있다.[1] 파스퇴르의 이름을 따 '파스퇴르 공법'(pasteurization)이라고 하며, 저온 살균 공법이 아니라 그냥 살균된 것도 '파스퇴르화'(pasteurized)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는 멸균을 의미하는 sterilization이 아닌, 병을 일으키거나, 식품의 변질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로 미생물을 적당히 제거하는 것을 pasteurization이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온 살균된 식품들의 경우 ultra-pasteurized라고 표기된 경우가 많다.
맥주의 발효 과정에서 효모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입증했고, 양조의 화학적 과정을 밝혀낸 논문을 발표하며 프랑스 맥주 양조 기술이 잠시나마 독일을 앞서게 되는 성과를 낳았다. 다만 정작 파스퇴르 자신은 맥주를 별로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2]
그런데 이 발견 이후 난데없이 뇌출혈로 쓰러져, 죽을 때까지 몸의 왼쪽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좌반신 불구가 된다. 하지만 그에 좌절하지 않고 연구 활동을 계속한다. 이 때 독일의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탄저균 배양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원인균을 배양했다면 그 병을 이길 수 있는 약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당시에는 세균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몰랐던 사람들이 천지였다.
1880년에는 닭 콜레라에 대해 연구하던 중 조수가 실험체인 닭에게 콜레라균을 주입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휴가를 다녀온 후에야 콜레라균을 접종했다. 그런데 닭들은 시름시름 앓는 듯 하더니 곧 건강해졌고, 이를 알게 된 파스퇴르는 여러 단계의 실험을 통해 휴가철 동안 방치된 콜레라균이 약해진 채로 접종되어 닭들이 내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1881년 5월 5일 공개적으로 양들에게 탄저균 백신의 접종이 실시되었고 크게 성공하였다. 다만 아직 실험 단계여서 그런지 백신의 평균적인 품질이 보장되지 않아서, 오염되거나 순도가 떨어지는 백신이 접종되어 되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도 있어 논란이 되었다.[3] [4]
1885년에는 광견병 관련 연구로 또 다시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드높였다. 조제프 메스테르(Joseph Meister, 1876~1940)라는 9살 소년이 광견병에 걸린 개에게 물려서 어머니가 파스퇴르를 찾아왔는데, 당시 그는 광견병 백신을 연구하여 동물실험에 성공한 단계였으나 아직 사람에게는 시험하지 못한 상태였다. 광견병은 의학이 발달한 현재도 즉각 백신을 투여받지 않고 증상이 발현된다면 치사율이 100%인 극히 위험한 병인데, 당연히 당시에는 그냥 죽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 소년에게 백신을 접종했다. 그리고 조제프는 운 좋게도 광견병을 이겨내고 면역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64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를 토대로 광견병 백신 또한 절찬리에 생산되었고, 그것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1888년 11월 14일에는 파리에 자신의 이름을 딴 파스퇴르 연구소를 세웠다.
1895년 만 72세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은 파스퇴르 연구소 지하에 있다고 한다. 석관묘로 조성되어 있으며 석관 안에 파스퇴르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사진
3. 업적
생물학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를 뽑을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알프레드 노벨이 노벨상을 제정했을 때 가장 먼저 상을 받아야 할 사람으로 파스퇴르를 지목했을 정도였다.[5][6] 프랑스 국민들이 존경하는 과학자다. '자연발생설'을 부정하고 '생물속생설'을 확립함으로써 생물학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구축했으며, 파스퇴르를 통해서 비로소 생물학이 엄밀한 의미의 현대적인 과학으로 거듭났다고 할 수 있다.[7] 동시기를 살며 경쟁심을 가졌던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와 함께 세균학의 아버지, 또 백신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4. 기타
- 분자의 구조에 빛의 편광현상을 관찰,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거울상의 입체구조(광학 이성질체)가 있음을 주장하고, 실험적으로 입증했다. 이걸 조사하기 위해서 그는 타르타르산의 결정체를 직접 확대하여 눈으로 보면서 하나하나 구분했다. 이 발견도 당연히 노벨상감이라 파스퇴르가 살아있을 때 노벨상이 있었다면 노벨화학상도 탔을 것이다.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프로이센에서 받았던 훈장을 돌려보내면서 "과학에는 조국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이러한 일화는 잘못 알려진 것으로 파스퇴르가 한 말은 디스쿠르 쉬르 랑오귀라시옹 드 랑스티튜 파스퇴르에 존재하는 말이다. 파스퇴르가 한 정확한 말은 "Science knows no country, because knowledge belongs to humanity, and is the torch which illuminates the world."으로, "과학은 조국을 모른다. 왜냐하면 지식은 인류의 것이고, 세상을 비추는 횃불이기 때문이다"이다.
프랑스어 원문은 La science ne connaît pas de pays (혹은n'a pas de patrie) parce que la connaissance appartient à l'humanité, et elle est la torche qui illumine le monde인데, 한국어로 해석하면 "과학은 국가를 따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식은 인류의 것이며 모든 세계를 (공평하게) 비추기 때문이다"라는 뜻이다. 다만 발언은 사실이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 프로이센의 훈장을 돌려보냈다는 일화는 인터넷 상에 잘못 퍼진 것으로, 파스퇴르는 애시당초 프로이센에서 훈장을 받은 적이 없으며, 다만 본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을 따름인데, 1870년 전쟁에서 그가 돌려보낸 것은 훈장이 아니라 이 명예 박사 학위였다.[8] 하지만 또한 이 명예 박사 학위를 돌려보내면서 해당 발언을 한 것도 아니었다.
해당 발언의 정확한 출처는[9] 파스퇴르가 국제회의 congrès international에서 한 발언으로, 앞뒤 맥락을 포함한 발언은 다음과 같다.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하오. 첫째 생각은 과학엔 조국따위 없단 것이오. 두 번째 생각은 과학은 조국의 "의인화"라는 것이오(의역: 조국 그 자체라는 것이오). 이 생각는 첫째 생각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 첫째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소이다. 과학엔 조국이 없는 이유는 바로 지식은 인류 전체의 재산이며, 온 세상 전체를 밝히는 횃불이기 때문이오. 과학은 국가 그 자체가 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 국민들 중에서 이것이 생각과 지성의 작업 때문에 가장 먼저 진보할 것이기 때문이외다. 우리들 과학자들은 각자 스스로의 조국을 위해 (국제 협회에서의 발언이므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조국이 앞서게 하기 위해 한 판 붙어봅시다.
Je me sens pénétré de deux impressions profondes : la première c’est que la science n’a pas de patrie, la seconde, qui paraît exclure la première, mais qui n’en est pourtant qu’une conséquence directe, c’est que la science doit être la plus haute personnification de la patrie. La science n’a pas de patrie, parce que le savoir est le patrimoine de l’humanité, le flambeau qui éclaire le monde. La science doit être la plus haute personnification de la patrie parce que de tous les peuples, celui-là sera toujours le premier qui marchera le premier par les travaux de la pensée et de l’intelligence. Luttons donc dans le champ pacifique de la science pour la prééminence de nos patries respectives.
즉, 훈장을 돌려보낸 일화는 잘못 퍼진 것이지만, 해당 발언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파스퇴르는 1888년 11월 14일 파스퇴르 학교 개관일에 자신이 작성한 원고를 아들로 하여금 읽게 했는데 거기서 한 연설의 일부이다. 그는 해당 연설에서 "이런 노력 끝에 나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기쁨을 느꼈으며, 이것은 내 조국의 영광에 도움이 될 수 있기에 더욱 기쁘다. 과학에는 조국 없지만 과학자는 조국이 있으며, 과학자는 자기 연구가 세상을 바꿀 영향력을 바로 이 조국에 행사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는데[10](원문: Mais quand, après tant d'efforts, on est enfin arrivé à la certitude, on éprouve une des plus grandes joies que puisse res- sentir l'âme humaine, et la pensée que l'on contribuera à l'hon- neur de son pays rend cette joie plus profonde encore. Si la science n'a pas de patrie, l'homme de science doit en avoir une, et c'est à elle qu'il doit reporter l'influence que ses travaux peuvent avoir dans le monde. 강조된 부분이 해당발언의 원문이다.) 원문의 동사 devoir 동사(doit en avoir une)는 의무나 필요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가 있음이 (말할 필요도 없이) 당연하다, 있기 마련이다 라는 뜻으로, 필요하다는 오역에 가깝다.
- 누에에게 발생하는 미립자병과 연화병의 퇴치법을 발견하여 프랑스의 양잠업계를 도왔다. 이 과정에서 파브르를 만나기도 했는데, 정작 파브르는 파스퇴르를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고 한다. 누에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파스퇴르가 누에의 병을 고치는데 도전한다는 열의는 높이 샀으나, 파스퇴르의 태도가 워낙 거만했기 때문. 파스퇴르는 유럽 전역에서 이름을 날리던 당대 최고의 잘 나가는 과학자 중 한명이어서 '내 발표를 이해 못하는 것은 당신이 멍청하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코앞에서 서슴치 않고 했다고 한다. 또한, 파스퇴르는 파브르에게도 와인 저장고를 보여 달라고 했는데, 파브르는 자신은 가난해서 따로 저장고가 없다고 하자 경멸하는 눈초리로 쳐다보았다고 한다.
-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어느 날 제자가 그렇게 배운 게 많으신데 그리 신앙심이 깊을 수 있냐고 묻자 파스퇴르는 자신은 오히려 많이 배워서 마치 농부처럼 믿음이 깊고, 만약 아는 게 더 많았다면 농부의 아내만큼 믿음이 깊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 훌륭한 과학적 업적과 달리 개인적으로는 만나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 정도로 그 누구 앞에서도 거만함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죽을 때까지 모난 성격을 가지고 살았으면서도, 세균과 위생에 집착하고, 평생 우울증으로 고생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 거만한 성격과 연관이 있는지 몰라도, 사후 70년간 비공개였던 연구 노트가 기증 후 공개된 뒤에 나온 연구에 의하면 파스퇴르는 연구 윤리에 위배되는 행동을 자주 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작게는 동료 과학자에 대한 비판부터, 크게는 조작 및 표절이 있었던 것이다. 생애 문단에 언급하였듯이 효모의 발효에 대해서는 Antoine Béchamp가 먼저였으나, 이를 그대로 다시 재발표하였고, 탄저균 백신에 대한 개발 능력이 없었음에도 개발을 먼저 발표한 Jean Joseph Henri Toussaint의 논문을 비판하였다. 심지어 이 기술을 그대로 시연회에서 사용하였다. 또한 광견병 약화 기술을 처음 개발한 Pierre-Victor Galtier, 토끼 척수를 건조하여 균을 불활성화시키는 기술을 개발한 Émile Roux에 대한 언급을 충분히 하지 않았다. 이 백신에 대해서도 안정성 입증을 하지 않았음에도 '개에 물렸다' 라는 아이들 여러명에 대해 무작정 접종을 하였다는 것이 알려졌다.
- 딸아이 5명 가운데 3명, 맏딸 잔느는 9살, 둘째딸 세실은 13살, 막내딸 카밀은 2살에 요절했다. 이 셋은 파스퇴르가 제일 활동이 활발할때 병에 걸렸고, 위독했을 때는 이미 멀리 출장을 가 있어서 딸의 임종도 지키지 못했다. 그래도, 아들인 장 바티스트(1851~1908)나 마리 루이제(1858~1934), 이 2명은 무사하게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지만 장 바티스트는 결혼했으나 자식이 없어 직계는 단절되었다. 대신, 마리 루이제는 1남 2녀를 낳았다. 손자인 루이스 파스퇴르 발레 라도트(Louis Pasteur Vallery-Radot,1886~1970)가 의사 및 파스퇴르 전기 작가로 활동했다. 하지만 손자, 손녀들도 자식들이 없어서 파스퇴르 핏줄은 끊어졌다.
- 파스퇴르로 인해 인류 최초로 광견병 접종을 맞고 살아난 메스테르는 이후 평생 파스퇴르 연구소 관리인으로 일했다. 메스테르는 1940년 자살했다고 전해지는데 이게 파스퇴르의 석관을 깨내 시신을 훼손하려는 나치 독일에 항거하다가 자살했다고 잘못 알려졌다. 심지어 이게 90년대 초반 어린이 과학서적이라고 나온 것에도 이렇게 서술되었다. 실제로는 나치 독일의 프랑스 침공으로 인해 가족들과의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고 가족을 모두 잃었다고 절망해 자살했는데, 안타깝게도 죽은 줄 알았던 조제프의 가족은 그 뒤 살아 돌아왔다고 한다.
- 그는 <생명은 모든 단계에서 죽음을 지휘한다>라고 말했다. 그의 딸 3명이 모두 장티푸스로 죽었기 때문에 감염병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발효처럼 감염과 염증도 미생물[11]에 의한거라는 직관을 가졌으나 의사가 아니라서 임상적 연구를 할 수 없어 아쉬워했다. 그러다 영국의 의사 조지프 리스터[12]가 파스퇴르의 연구를 참조하여 석탄산을 이용한 외과수술 전후에의 소독법을 확립하였다.
[1] 특히 우유는 신선하게 먹을 수 있도록 기여한 인물이 파스퇴르 말고도 한 명 더 있는데, 그게 누구냐면 바로 미국의 악명높은 마피아였던 알 카포네. 알 카포네가 활동했던 당시 미국의 우유 가공 수준은 너무나 형편없어서 우유병(病)이라는 병이 존재했을 정도였다. 독초를 먹은 젖소에서 짜낸 우유를 먹고 죽는 병(病)이다. 심지어 에이브러햄 링컨의 어머니도 이 병으로 사망했을 정도다. 게다가 유통기한 같은 개념도 당연히 없어서 시중에 상한 우유가 제멋대로 돌아다녔는데도 행동 양식이 마피아나 밀주업자들과 크게 다르지도 않았던 낙농업자들은 의회에 로비를 해서 상한 우유가 건강에 좋다는 얼토당토않는 논리를 내세웠다. 그런데 이후 알 카포네가 금주법 이후 우유 산업에 진출하면서, 기존의 썩어빠진 낙농업자들을 조직력을 동원해 갈아엎고 로비도 겸해서 유통기한을 지키는 법을 통과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우유 산업을 발전시켰다. 물론 알 카포네가 낙농업 사업을 한 것은 돈벌이를 위해서였다. 알 카포네의 주력 사업은 밀주 밀수가 가장 유명하지만, 본인도 말했듯이 술과 달리 우유는 남녀노소 누구나 마실 수 있는데다 가정 단위로 매일 소비하고, 유제품과 여타 가공식품에도 재료로 들어가니 마진이 제법 컸다. 결정적인 이유로 우유 유통망을 이용해 밀주 사업도 동시에 확장시킬 수 있었고, 따라서 돈세탁 또한 더욱 용이해졌기 때문에 우유 산업에도 관려한 것이다. 의도의 불순함과는 별개로 결과적으로는 그 덕분에 사람들은 깨끗한 우유를 마실 수 있게 되었다.[2] 단,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앙투앙 베샹(Antoine Béchamp)이라는 경쟁 과학자가 1857년과 1864년 프랑스 학술원을 통해 균에 의한 발효 현상을 입증했는데, 오히려 파스퇴르는 1872년까지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역사학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3] 또한 이 역시도 장 조셉 앙리 투생(Jean Joseph Henri Toussaint)이 1880년 백신 개발에 성공했음을 과학원에 먼저 발표한 것이 먼저였고, 1998년이 되어서야 프랑스에서 탄저 백신을 개발한 것은 투생이 먼저라고 인정하게 된다.[4] 파스퇴르는 이 당시 자신만의 기술로 백신을 만들 수 있다고 투생을 비판했으나, 막상 공개 실험에서는 투생이 먼저 발표한 기술을 사용했다는 것이 알려졌다.[5] 하지만 노벨상 제정 6년 전(또한 노벨이 죽기 1년 전)에 이미 파스퇴르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노벨이 매우 안타까워했다.[6] 보통 파스퇴르와 더불어 찰스 다윈이 거론되는데, 다윈은 과학적 연구보다는 이론에서 보여 준 통찰력과 논리력으로 높이 평가받는 인물이기 때문에 파스퇴르와는 그 포인트가 다소 다르다.[7] 1895년에 사망했는데, 노벨상 제정 후 초기 10여 년간의 수상 업적들을 파스퇴르와 비교해 보면 파스퇴르 개인의 업적 쪽이 더 화려해 보인다.[8] En 1868, il devient docteur honoris causa de l’université de Bonn qui lui accorde également un diplôme de médecin, diplômes qu’il renverra lors de la guerre franco-prussienne de 1870[9] 출처: Une biographie de savant - La Vie de Pasteur, Revue des Deux Mondes, 4e période, tome 162, 1900 (p. 457-468.[10] 의역하자면 과학자가 어떤 개발을 하면 가장 먼저 그 혜택을 누리는 게 그 과학자의 조국이라는 것이다[11] 당시 의학계는 세균(germ)이라는 용어 자체가 논란이 되어 쓰이지 않는 수준이었다.[12] 조지프 리스터는 소르본에서 성대하게 열린 파스퇴르의 70세 생일파티에 참석하여 자신의 연구가 파스퇴르 덕분이며 그가 모든 의사와 환자들의 존경과 감사를 받는 인물이라는 내용의 헌사를 낭독했고 반신불수 상태의 파스퇴르는 일어나서 그를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