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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02-17 02:20:00

도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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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다이지 | Tōdai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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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건 8세기 전반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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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파 화엄종
본존 노사나불(盧遮那仏)
위치
나라현 나라시 조지초 406-1
(奈良県奈良市雑司町406-1)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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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불전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고대 나라의 역사 기념물
영어 Historic Monuments of Ancient Nara
일본어 古都奈良の文化財
프랑스어 Monuments historiques de l'ancienne Nara
국가·위치 일본 나라현 나라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98년
등재기준 (ii)[1], (iii)[2], (iv)[3], (vi)[4]
지정번호 870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역사3. 건축물
3.1. 대불3.2. 대불전 안의 볼거리3.3. 정창원
4. 그 외

1. 개요

일본 나라현 나라시에 있는 사찰이며, 일본 화엄종의 대본산(大本山)이다.

일본의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사찰이기도 한다.[5] 한국에서는 '동대사'란 이름으로 유명하다.

2. 역사

파일:external/s16.postimg.org/shinbcl_219392_7_566702.jpg
창건 당시를 재현한 모형과 현재의 모습(아래)

도다이지는 733년 와카쿠사산 기슭에 창건되었다는 긴쇼지(金鐘寺, 금종사)가 그 기원이다. 8세기에 있었던 도다이지의 낙성식에 일본 승려들은 물론이고 통일신라, 발해, 의 승려들과 인도, 베트남, 캄보디아의 승려들이 참석할 정도로 국제적인 행사였다.

본래 도다이지는 쇼무 천황구니(國)[6]마다 세운 고쿠분지(國分寺, 국분사)[7]의 수장으로 천황 일족의 보살계를 수계하는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고쿠분지로서 위상을 잃고 기능이 축소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의 영향을 받은 2탑 1금당식의 양식이었으나[8] 후에 2개의 거대한 목탑 등을 잃어버리고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현재는 대불전과 이월당과 삼월당, 그리고 남대문 일대가 도다이지 경내이다. 과거의 모습은 대불전 안에 있는 헤이안 시대의 도다이지 모형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큰 크기로 유명한 대불전은 758년에 준공되었다. 최초로 세워진 대불전과 청동대불은 한국계 도래인[9]들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기사 나라현 공식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대불전 건축에 있어 신라계 도래인 목수가 총감독을 맡았고, 거대한 청동 불상은 백제계 도래인이 디자인했으며, 사자 석상은 중국 남조 유송 출신 석장이 작업했다고 한다. # 한 마디로 위ㆍ진ㆍ남북조, , ,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통일신라, 발해, 인도, 서역의 문화가 조화를 이룬 사찰이다.

대불전은 화재를 두 번 입어 파괴되었다. 첫 번째는 헤이안 시대 말기인 1181년 헤이시 정권이 난토(南都)의 승병들을 추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는데 승병 진압을 띠고 난토로 파견된 다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 1157–1185)가 한밤중에 기습을 앞두고 "불을 밝히라(횃불을 가져오라)"라고 한 것을 부하가 "전부 불태워라."로 잘못 알아듣고 절에 불을 놓은 것이 그만 온 경내로 옮겨붙어 절이 통째로 불타 버렸다고 한다. 하필 불을 놓은 때가 음력 12월 겨울로 한창 건조할 때였으니 활활 타기 좋은 때였다. 화재가 있고 석 달 만에 타이라노 키요모리가 사망했고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패망한 뒤에 시게히라도 겐지군에게 포로로 사로잡혀 난토로 호송, 분노한 승병들에게 처형되었다. 1181년이면 가마쿠라 막부로 바뀌기 4년 전이다.

그 후 대불전은 무로마치 양식으로 재건되었으나, 센고쿠 시대1567년에 두 번째로 불타고 말았다. 해당 방화는 예전에는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서는 미요시 측의 키리시탄에 의한 방화라 말하고 있고 최근의 연구에서는 실화에 의한 불이 도다이지 주위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대불전도 이 화재에 불타버렸다고 추측되고 있어 히사히데의 직접 범행을 증명해주는 증거는 희박하다. 다만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당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도다이지를 불태운 사람으로 악명을 뒤집어썼고, 그가 죽은 날이 대불전을 불태웠던 그 날이었다느니, 그를 죽게 만든 오다 노부나가의 아들 노부타다의 투구가 사슴뿔 모양이라서 도다이지의 수호신 카스가 대명신이 천벌을 내렸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았다.

화재 두 번 모두 승병뿐만이 아니라 당시 대불전 안으로 몰려든 승려와 피난민들도 2천여 명에 달하였는데,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면서 모두 목숨을 잃었고 내부에 안치된 대불 또한 녹았다. 현재의 대불전은 1709년에 재건된 3번째 금당이다.

헤이안 시대의 정면 길이인 11칸에서 7칸으로 축소된 것으로, 재정이 부족한 점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이때 대불전 가운데에 가라하후(唐破風)라는 반곡선 지붕을 만들어 헤이안 시대의 직선미를 훼손하였다. 축소되었다고는 하지만 정면 57.01 m, 측면 50.48 m, 높이 48.74 m에 달한다.[10]

참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두 번째 도다이지 대불전을 본떠서 약간 더 큰 호코지(方広寺)[11] 대불전을 건립하였고, 이는 1592년에 이른바 '게이초 후시미 지진(慶長伏見地震)'으로 붕괴되었다. 불상도 가슴이 무너지고 왼손이 떨어지며 온몸에 금이 가는 대해를 입었고, 히데요시가 "나라 지키라고 만들었더니 네 몸도 하나 못 지키느냐?"라고 외치며 불상의 미간에 대고 화살을 쏘았다는 이야기가 있다.[12] 이후 1610년에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재건하였으나, 1662년에 역시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과거의 대불전보다 크기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2000 t에 달하는 기와의 무게 때문에 지붕의 처마가 조금씩 계속 처져가면서 처마의 라인이 울퉁불퉁하게 흐트러졌다. 이를 막고자 1882년에 버팀목을 삽입하는 공사를 하였지만, 그럼에도 무게를 버텨내지 못했다. 대불전 정도의 커다란 목조 건축물에 대한 경험을 가진 목수가 그 시대에는 안 남아 있었음이 실패한 까닭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파일:attachment/uploadfile/Todaiji_in_the_Meiji.jpg
1904년1913년 사이 1차 복구가 끝난 뒤에 촬영된 사진.

버팀목을 받쳐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붕이 전부 휘어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고, 결국 메이지 유신 후 완전히 해체수리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재정적 문제로 인하여 사진과 같이 버팀목을 받쳐놓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다.

현재의 대불전은 1974년–1980년대에 재건되었다. 해체수리를 담당한 건축가들은 유럽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많은 근대식 건축재료와 공법을 사용하였다. 철골 트러스를 이용하여 지붕을 지탱하게 하였으며, 거대한 나무 한 그루로 이루어진 기둥들을 나무 여러 그루를 합쳐 철물로 묶은 기둥으로 교체하여 강도를 높였다. 그리고 기와의 수를 줄여 지붕의 무게를 12 % 줄였다.

이에 몇몇 사람들은 현대에 개조되었기 때문에 현대건축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고딕 성당처럼 지어진 지 수백 년이 넘은 건축물들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리·개축과정을 거면서 해당 시기의 유행 및 기술의 영향을 받은 만큼,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건축물

가람은 일본 최대의 목조 건축물인 대불전(大仏殿, 다이부쓰덴)과 최대의 청동 불상, 그리고 거대한 정문인 남대문(南大門, 난다이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밖에 자체적인 박물관 및 대불전 뒤편과 동서편으로 이월당(二月堂, 니가쓰도), 삼월당(三月堂, 산가쓰도), 계단당 등 여러 가지 부속건물이 있다. 이 건물들도 대부분 국보중요문화재이고, 일부 건물은 특별한 기간이 아니면 공개하지 않고 있다.

남대문과 대불전의 건축 양식은 '대불양식(다이부쓰요)'이다. 각 시대마다 형태와 구조가 조금씩 다르며, 일본에서는 상당히 드물게 시도된 양식이다. 기본적으로 복잡한 구조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양식으로 건물을 세우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대량식 구조지만, 엄청나게 큰 건물을 지탱하고자 수많은 보와 포로 겹겹이 연결하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했다. 심지어 후대에 건립된 대불전은 일반적인 동양 전통건축물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보를 대각선으로 설치하는 방법까지 적용하였다.[13][14] 대불양식은 8세기에 지어진 도다이지가 불타 사라지고 다시 지은 12–13세기에 나타난 양식으로, 처음의 양식과는 다소 다르다.[15]

대불전은 1709년 화재로 인하여 재건한 뒤 약 200년 동안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었다[16].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기술의 발전으로 스페인의 메트로폴 파라솔(Metropol Parasol)#, 미국의 틸라묵 항공 박물관(Tillamook Air Museum)#, 노르웨이의 미에스토르네(Mjøstårnet) 빌딩# 등 과거의 건축기술로는 못 따라잡을 만큼 거대한 건축이 이루어져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되었다. 다만 아직 법당으로서는 대불전이 세계 최대 목조 건축물이다.[17] 대불전과 크기를 견줘볼 만한 건물로는 교토 히가시혼간지에 있는 고에이도가 있다.

남대문은 현재 남아 있는 도다이지의 건물 중 유일하게 남송 양식을 그대로 따르는 건축물로 다른 일본 건축물들과는 다른 느낌이 있다.[18] 남대문에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만든 금강역사 입상이 두 좌 있다.

이월당은 대불의 개안공양이 이루어진 752년에 창건된 건물로 십일면관음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다. 이곳에 모신 불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비불이다.

삼월당은 법화당(法華堂, 홋케도)이라고도 불리며, 원래 도다이지의 전신가람인 긴쇼지의 견색당(羂索院)이었다. 본존으로 모시는 불공견색관음을 비롯해 범천, 제석천 등 16개에 달하는 불상을 모시고 있다. 일부는 도다이지박물관이 개소하면서 옮겨졌다가 2014년에 보수공사가 완료되자 다시 삼월당으로 옮겨졌다.

도다이지를 잘 모르는 방문자들은 대불전만 보고 떠나지만, 이월당과 삼월당도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므로 한 번 방문하는 것이 좋다. 특히 이월당은 전망대이기도 해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도다이지와 나라시내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3.1. 대불

파일:external/www.todaiji.or.jp/ominugui.jpg

대불전 안에는 높이 14.98 m에 무게 452 t인 청동 비로자나불이 있다. 청동대불 역시 여러 번 화재 등으로 부분이 녹거나 파괴되어 다시 제작되었지만, 상당한 크기이기 때문에 일부분은 남아 이어져 왔다.

처음 제작된 대불은 청동으로 만든 후 도금한 금동불이었는데, 이 당시 도금 방법은 수은에 금을 섞어 아말감을 만든 다음 도포하고 거기에 열을 가해 수은만 증발시키고 금만 남기는 방법이었다. 대불의 크기가 어마어마한 만큼 엄청난 양의 수은이 사용되었는데, 작업 중 수은 증기가 대불전 안을 가득 매웠고 문 밖 나라시 전체에 퍼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작업 인부들은 물론 나라시 시민들의 상당수가 수은 중독으로 인해 고통받았다.

현재의 대불은 1691년에 완성된 것으로[19] 불상의 하부에 처음에 만든 부분이 남아 있다고 한다. 특히 불상이 앉은 연꽃 대좌에는 창건 당시 법화경의 내용을 새긴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다. 손바닥은 성인 16명이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다고 한다. 그리고 대불의 좌우로는 허공장보살과 여의륜관음을, 대불 뒷편으로는 광목천왕상과 다문천왕상을 모셨다.

3.2. 대불전 안의 볼거리

대불전의 명물로 구멍이 뚫린 기둥이 있는데, 이 구멍을 통과하면 1년치 액땜을 한다는 소문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시도해본다. 아이나 몸이 작은 여자가 아니면 힘들다는 얘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약간 과체중의 성인 남성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크기이다. 조금 뚱뚱해 보이는 사람도 조금 힘들게나마 빠져나올 수 있다. 다만 보통 체격의 성인이라면 들어가면서 다리가 움직일 여유의 공간이 사라지기 때문에 팔 힘으로만 빠져나와야 한다. 따라서 팔 힘이 보통 이하라면 상대방이 반대편에서 팔을 당겨줘야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다. 들어가고나서 누군가의 도움없이 스스로 나오기에는 체력이 받쳐 주지 않고서는 힘들다. 유튜브에서도 보면 반은 상대방이 반대편에 서서 팔을 당겨줘서 나온다. 참고로 구멍의 크기가 대불의 콧구멍 크기라는 이야기가 있다.

대불전 앞마당에 서 있는 청동 등롱은 도다이지에서 몇 안 남은 나라 시대 창건 당시의 유물로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조각이 아름답고 여러 글씨도 새겨져 있다. 그 밖에 중문, 좌우 회랑, 대불전 좌우의 불상 모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3.3. 정창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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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정창원#s-|]]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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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정창원#|]]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일본 황실의 보물 창고다. 동아시아·동남아 유물들이 많이 발견되었으며, 그 중 특히 한국에서 유명한 유물은 고등학교 한국사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다루는 통일신라민정문서다.

4. 그 외

대불전 입장료는 600엔이며, 남대문 안에 있는 박물관은 600엔, 통합 입장료는 1000엔이다. 이월당에 올라가 볼 수 있으며 따로 입장료는 없다. 삼월당은 2013년까지 공사로 폐쇄되어 있었으나, 2014년 공사가 완료되어 재개방한 뒤로는 입장료 500엔을 받는다. 그 밖에 승려들이 계(戒)를 받던 계단원(戒壇院)도 따로 입장료 500엔을 내야 한다. 안에는 국보로 지정된 사천왕상이 있으나, 건물 자체는 별로 큰 가치가 없으므로 불상에 관심 있는 사람만 들어가 보자.

남대문 밖은 나라 공원으로 꽃사슴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사람을 그리 경계하지도 않아서, 만져도 그리 싫어하지도 않고, 심지어 몇몇 사슴들은 사람들에게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하고 먹을 것을 받아가는 진기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한다. # 이 사슴들에게 줄 수 있는 사슴 센베를 파는 곳도 많다. 열 개 정도를 200엔 내외에 구입할 수 있는데, 똘망똘망한 눈으로 천진난만하게 쳐다보던 사슴들이 전투적으로 달려들어 식겁하는 방문객들이 많다. 심지어 음식이 아닌 것도 주는대로 먹다보니 휴지 등을 잘못먹고 병들어 죽는 사슴들도 많다.[20]

사슴 센베를 팔고 있는 가게 근처에는 얼씬도 않다가 관광객이 센베를 사는 순간 주변에 있던 사슴들이 센베를 노리고 달려든다. 사슴들은 모여드는 속도가 빠르고, 빨리 주지 않으면 화가 난 사슴들이 뒤에서 뿔로 들이받거나 심지어 남성이라면 바지를 깨물고 내려버린다. 그러므로 사슴들에게 센베를 주고 싶다면 바로바로 나눠주는 편이 봉변을 당할 확률이 적다. 여름철에 뿔이 돋은 사슴에게 받히면 상당히 아프다. 그리고 사슴들이 많은 만큼 길 곳곳에 지뢰가 떨어져 있으니 바닥을 잘 보고 걸어다녀야 한다. 수시로 치우고는 있으나 사슴의 수가 많아 어쩔 수가 없다. 당연하지만 이로 인한 악취도 만만치 않다.

근처에 나라역킨테츠나라역이 있는데 거리상 킨테츠나라역 쪽이 더 가깝다. 나라역을 이용한다면 거리도 약 2.7 km로 제법 멀고, 가는 길에 오르막이 조금 있어서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요금은 약 1천 엔 정도. 킨테츠나라역을 이용하면 거리가 약 1.6 km 정도로 도보로 가는 것도 가능하다. 택시로는 기본 요금인 680엔이면 갈 수 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는 일본의 불가사의로 나왔다.

2017년 8월 8일, 도다이지 법화당 쪽에서 한글 낙서가 발견되어 수사에 들어갔다고 한다.도다이지 화당에 낙서 한글 같은 문자 현경 수사

데즈카 오사무불새 시리즈 봉황편의 주무대로 나온다. 도다이지 불상과 절을 만들고자 권력자들과 승려들이 백성들을 수탈하는 등 권력의 수단으로 변질된 불교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어쌔신 크리드: 섀도우스에 등장하나 센고쿠 시대인 1580년대가 배경이라서 파괴된 상태다. 폐허가 되었음에도 많은 불자들이 참배하는 모습과 사슴들이 길에 드러누워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5] 대한민국의 경우 고구려정릉사, 백제미륵사정림사, 신라황룡사 9층 목탑, 통일신라불국사석굴암, 발해의 영광탑이 호국불교를 대표한다. 그리고 중국북위시대에 만든 윈강석굴, 룽먼석굴이 호국불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6] 한자는 '나라 국'이지만 일본 내에서는 행정구역 단위로도 사용했다.[7] 야마토 정권 초기에 불교의 힘을 빌려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국립 사찰이다.[8] 대한민국도 비슷한 통일신라 시기에는 사천왕사불국사 등 2탑식이 유행하였다.[9] 주로 백제계 도래인들이었다. 쇼무 천황의 명령으로 도다이지의 대불을 조영하는데에 요하는 인력과 재력을 시주받는 역할인 권진(勸進)으로 임명된 사람이 백제계 도래인으로 왕인의 후손을 자처하던 교기(行基) 스님이었고, 도다이지의 불상에 입힐 황금을 처음으로 일본 땅에서 찾아내고 조정에 바친 사람이 당시 무츠노카미(陸奥守)를 맡고 있던 쿠다라노고니키시 교후쿠(百濟王慶福)와 그가 거느린 백제계 주금 장인들이었다. 참고로 그 때까지 일본은 황금을 자체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쿠다라노고니키시 교후쿠가 황금을 발견한 것은 일본 최초의 황금 발견이기도 했다.[10] 높이가 46.4 m라는 자료도 있는데, 아마도 메이지 유신 전에 치미(지붕 제일 위의 양 끝에 붙어 있는 큰 기와)가 낮았을 때의 높이로 추정된다. 예전 사진을 보면 지금 대불전의 치미가 금색의 높은 것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11] 도요토미 가문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이른바 '호코지 종명 사건'의 무대가 맞다.[12] 당시 구교들의 일기 및 예수회 선교사의 편지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오는데, 불상을 산산이 부숴 버리라고 했다고 한다.[13] 그러나 유일한 것은 아닌데 중국에서도 볼 수 있는 방법이다. 애초에 도다이지 재건을 발원한 인물이 송나라에 유학한 경험이 있던 조겐(重源)이라는 승려로, 조겐이 중국에서 초청해온 진화경(陳和卿)이라는 장인이 대불전 건립과 대불 복원에 크게 일조했다고 한다.[14] 여담으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무사시보 벤케이의 일화로 유명한 권진장(勧進帳)이 이때 도다이지 중건을 목적으로 시주를 하러 다니는 권진(勧進) 일행으로 위장하여 히라이즈미로 도망가던 때를 배경으로 한다.[15] 이는 대불전 내부에 전시된 헤이안 시대 도다이지 가람과 그 후 두 차례 재건된 대불전 모형에서 확연히 나타난다.[16] 거대한 크기이지만 창건시보다는 축소된 규모이다.[17] 참고로 세계 최대의 석굴 법당은 대한민국 경상남도 의령군의 일붕사 법당이다.[18] 원래 가람 전체가 송나라 양식으로 만들어졌지만, 다른 건축물이 후대에 전쟁과 화재로 전소되고 재건되었기 때문에 남대문만 원래 양식이 남았다.[19] 다만 몸과 손 등의 제작시기가 다르며, 1691년은 머리 부분을 다시 제작하여 나머지 부분과 합친 시기이다.[20] 사실 직접 주지 않는다고 해도 종이류는 눈에 보이면 먹는다. 예를 들면 자전거 바구니에 있는 나라현 관광지도 같은 것도 먹고, 지폐도 보이면 먹으려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