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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8 23:49:53

달벌대전

달벌 전투에서 넘어옴
파일:경주 천마총 장니 천마도.png 신라의 대외 전쟁·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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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벌대전
達伐大戰
<colbgcolor=#C00D45,#600823><colcolor=white> 시기 839년 음력 1월 19일 ~ 음력 1월 23일[1]
장소
신라 양주 수창군 대구현(달벌)
원인 신라 정치 권력 다툼.
교전 세력 <rowcolor=#C00D45,white> 청해진군+김우징군
(반란군)
신라 정부군
(진압군)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우징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양[2]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장보고[3]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정연[4]
지휘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민애왕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흔(대흔)[5]
참가자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염장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장변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낙금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장건영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이순행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양순
참가자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이홍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윤린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의훈
파일:신라 상징 초승달(삼국사기 및 대구신문 기반 창작).svg 김민주
병력 청해진군 5,000여명
김양군 기병 3,000여명 이상
100,000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50,000명 이상 전사
결과 서라벌 함락과 민애왕 시해, 이후 신무왕 옹립.
1. 개요2. 배경3. 전개 및 경과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9세기 전반 통일신라시대 중앙 정계에서 밀려난 김우징을 장보고가 지원해 일으킨 쿠데타 중의 대승리.

2. 배경

제42대 흥덕왕이 일찍 죽은 아내 장화부인을 그리워한 탓에 그녀 사후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아 후사없이 승하했고, 이에 차기 왕위를 두고 흥덕왕의 사촌인 김균정과 김균정의 조카인 김제륭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다. 균정의 아들 김우징과 심복 김양[6] 등은 김균정을 왕으로 삼고 적판궁(積板宮)에 먼저 들어갔지만, 김제륭을 지지하는 김명, 김이홍의 습격을 받았다. 김균정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해 김우징과 김양을 살아남으라며 도망치도록 했고, 결국 그는 김제륭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다. 도망치던 김양 역시 배훤백(裴萱伯)의 화살을 맞아 중상을 입었다.

어쨌든 살아남은 김우징은 837년 5월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에 있었던 청해진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다. 장보고는 거사가 성공해 김우징이 왕위에 오르면 자신의 딸을 왕후로 삼을 것 등의 모종의 약속을 받아낸 후, 김우징과 결탁해 서라벌로의 진격을 계획한다. 838년 2월 김양이 참모와 병졸들을 모집해 합류하고 838년 3월에 거사를 일으켰다.

한편 수도의 김제륭은 제43대 희강왕으로 즉위했지만 자신의 즉위를 도운 김명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곧 자살했고, 김명이 제44대 민애왕으로 즉위한 상황이었다.

3. 전개 및 경과

청해진군은 북상해 지금의 광주광역시, 나주시 일대인 무주(武州) 철야현(鐵冶縣)에 도착했다. 민애왕은 대감 김민주(金敏周)에게 군사를 내어 맞아 싸우게 했으나, 김양이 낙금과 이순행을 시켜 기마병 3,000기를 돌격시켜 신라 관군을 거의 모두 죽거나 다치게 했다. 무주를 습격하여 성 밑에 다다르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항복했다.

그들은 계속 진군하여 남원(南原)에 이르러 신라 관군과 마주 싸워 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여기서 동쪽으로 바로 더 진군하지 않고, 김우징은 군사들이 오랫동안 싸우느라 피로하다 하여 다시 청해진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쉬게 하는 한편 말들을 잘 먹였다. 이 해 겨울에 혜성이 서쪽 방향에 나타났는데 광채나는 꼬리가 동쪽을 가리키니 청해진군의 여러 사람들이 축하하며 말했다.
“이는 묵은 것을 없애고 새 것을 펴며,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을 좋은 징조이다.”
1년 후인 839년 정월, 장보고의 청해진 군사와 김양의 군사가 밤낮으로 행군하여 19일에 비로소 달벌(達伐, 대구)에 도착했다. 민애왕은 김양의 반란군이 도달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장군 김흔[7]과 대아찬 윤린(允璘), 김의훈(金嶷勛)[8] 등에게 무려 100,000명이나 되는 대군을 거느리고 청해진군을 막도록 달벌에 파견했다. 신라 관군 100,000명의 병력은 이전 삼국시대나 이후 시대를 통틀어 봐도 손꼽힐 만한 엄청난 규모의 병력이었다. 그러나 급하게 모은 대군은 사기가 낮았고, 태반이 실전 경험이 풍부한 장보고의 사병이던 청해진군은 소수 정예였다. 회전으로 맞붙은 끝에 수천명의 정예 군대로 10배가 넘는 관군의 절반 이상을 전사시키고, 다수를 생포했다. 대장군 김흔은 살아남았으나 전쟁에서 대패했고, 또한 전사하지도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소백산에 들어가 갈옷을 입고 나물밥을 먹으며 중들과 함께 여생을 지냈다고 한다.[9]

서라벌에서 전전긍긍해 하던 민애왕은 달벌(대구)에서 주력군이 전멸한 소식을 듣고 측근들이 모두 허둥지둥 도망가자 본인도 어쩔 줄을 몰라 넘어져가며 달려 월유(月遊)의 집, 혹은 이궁(離宮, 별궁)에 숨었지만 결국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시해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비록 폐위와 함께 비참히 시해당했지만 일단은 한때 왕이었음을 인정해 여러 신하들이 예를 갖추어 대왕의 예로 장사지내고, 시호를 '민애'(閔哀)라 했다. 민애왕 김명과 함께 김균정 살해의 주동자라 할 수 있는 김이홍은 산으로 추격해 죽였지만, 그 외에 김양을 부상입혔던 배훤백 등은 관대하게 살려주었고, 그러자 연루된 여러 사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안심하면서, 정국이 안정되었다.
“개는 저마다 제 주인이 아니면 짖는 법이다.[10] 너는 네 주인을 위하여 나를 쏘았으니 의사(義士)로다. 내가 괘념치 않을 것이니 너는 안심하고 두려워하지 말라!”
이후 김우징이 제45대 신무왕으로 새로 즉위했지만 1년도 못 되어 승하하고 태자가 제46대 문성왕으로 즉위했다. 이후 문성왕은 장보고의 약속 이행 요구를 거절하고 장보고 휘하의 장수 염장을 매수해 장보고를 암살한 후, 청해진을 싸그리 쓸어버렸다.

4. 대중매체에서



[1] 제44대 민애왕 김명이 붙잡혀서 사망한 날이다.[2] 달벌대전때 김우징군을 지휘한 실질적인 총사령관이다.[3] 달벌대전때는 청해진에 계속 머물렀기에 실제 전장에는 없었다.[4] 장보고를 대신해 청해진에서 파병한 5,000명의 병력을 이끌었다.[5] 달벌대전때 신라 조정군을 이끈 실질적인 총사령관이다.[6] 제29대 태종 무열왕 계통으로서 제38대 열조 원성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패배한 김주원의 증손자이다. 당연히 왕위 계승에서는 멀었다.[7] 혹은 대흔(大昕)[8]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성씨가 없이 이름이 '의훈'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에는 '김의훈'(金嶷勳) 혹은 '김억훈'으로 기록되어 있어 의훈의 성이 김씨인 것을 알 수 있다. 지증대사탑비의 기록에 통해서 김흔(대흔)의 경우처럼 산속에 들어가 절에서 생애로 마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9] 참고로 이 사람의 딸이 조신의 꿈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이다.[10] 전한한신의 참모였던 괴철유방에게 붙잡혀 가서 했던 말이 원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