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남학(南學)은 1862년 연담(蓮潭) 이운규(李雲圭)[1]가 창시한 종교이다. 또한 이 남학에서 비롯된 신종교들을 묶어 남학이라고 하기도 한다.이운규의 제자로는 최제우, 김항(金恒), 김치인(金致寅), 이용래(李用來)[2], 이복래(李復來)[3] 등이 있다. 그러나 최제우가 이운규의 제자라는 주장은 남학에서만 나타난다. 또한 김치인도 이운규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운규의 아들인 이용래와 이복래, 또는 김항[4]에게서 간접적으로 가르침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또한 남학은 김항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일부계와 김치인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광화계로 나뉘는데, 이는 각각 김항의 아호인 일부(一夫)와 김치인의 아호인 광화(光華)에서 따온 것이다.
이운규의 사망 이후 제자들에 의해 대종교(大宗敎)[5], 영가무도교, 오방불교 등의 교파가 생겨났다. 하지만 복잡하고 형이상학적인 교리로 인해 많은 신자를 끌어들이지 못했고, 일제강점기 남학에 대한 탄압으로 교세가 크게 위축되었다. 하지만 남학은 동학만큼이나 역사가 깊은 민족종교일 뿐만 아니라 증산교 등 다른 신종교의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친 종교였다. 또한 남학의 고유한 수행 방법인 '영가무도'(詠歌舞蹈)는 다른 신종교나[6] 국악, 전통 무용에서 이어지고 있다.
2. 명칭
남학의 창시자라고 하는 이운규는 스스로 교명을 내세운 적이 없다. 남학은 창시 시기와 교리가 동학과 비슷하면서도 달랐기 때문에 후대에 이러한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때문에 이운규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종교들을 가리키는 명칭은 다양하다.남학이라는 명칭이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은 동학 농민 운동 때에 김치인이 일으킨 남학 운동에서였다. 때문에 남학이 일부계까지 포괄하는 명칭으로 보기는 어렵고, 광화계의 별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 있다. 반대로 남학이 광화계와 일부계를 포괄하는 명칭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 이유는 『조선도교사』에서 남학이 ‘동학과 같은 시기에 호서 지역에서 처음 창도되었고 이운규가 1세 교주, 김항이 2세 교주'라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기록을 근거로 김항이 남학의 교주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오학질망설(五學迭亡說)이라는 예언을 근거로 이운규가 남학을 창시했다고 주장하는데 오학질망설의 내용은 '서학이 동학에 망하고 동학이 북학[7]에 망하고 북학이 남학에 망하고 남학이 중학(中學)[8]에게 망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계(一夫系)[9]라고도 한다. 일부계는 김항의 호인 일부에서 딴 것이다. 일부계는 김항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한 종교만을 칭하기도 하지만 광화계까지 포괄하는 명칭으로도 쓰인다. 광화계의 경전 중 하나인 『광화집』에서 김항을 김치인의 스승으로 표현했으며, 몇몇 광화계 종교에서도 김항을 신격화한 화무상제(化无上帝)를 모시기 때문에 일부계가 광화계를 포괄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연담계(蓮潭系), 정역계(正易系) 등의 명칭도 나타나는데 연담계는 일부계와 광화계가 모두 이운규의 가르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이운규의 호인 연담에서 딴 것이다. 정역계는 김항이 저술한 정역에서 딴 것으로 일부계와 광화계에서 모두 정역을 중요한 경전으로 삼기 때문이다.
3. 역사
이운규의 출생은 불분명하다. 1790년, 혹은 1804년, 1809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며, 고향은 천안[10], 혹은 파주로 추정된다. 이운규는 과거를 치르기 위해 이서구(李書九)라는 문인에게 유학을 배웠고, 또 청림도사(靑林道士)라는 도인에게 도(道)를 받았다고 한다.[11] 또한 이운규는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의 서적도 두루 섭렵했는데 이를 통해 이운규가 유불도의 진리를 모두 탐구하는 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운규가 낙향하여 살던 띠울마을 |
이운규의 가르침은 혼란스럽던 조선 후기 고통받던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또한 오음주를 외우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퍼지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이운규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 수만 명에 이르렀고, 1862년 비로소 남학이 창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최제우와 김치인, 김항이 이운규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861년 어느날 이운규는 최제우와 김치인, 김항을 불러 가르침을 내렸다고 한다. 최제우에게는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至氣今至願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주문을 외우면서 도교의 전통을 계승하라 했고, 김치인에게는 “남문(南門) 열고 바라 치니 계명산천(鷄鳴山川) 밝아온다.”[14]라는 주문을 주면서 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라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최제우는 이미 1860년 동학을 창도하여 경주에서 포덕하고 있었고, 김치인도 1855년생으로 당시 불과 7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리고 김항에게는 쇠하여 가는 공자의 도를 이어 천시를 받을 것이니, 서전(書傳)[15]을 많이 읽으면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한 “관담(觀淡)은 막여수(莫如水)요, 호덕(好德)은 의행인(宜行仁)을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하니 권군심차진(勸君尋此眞)하소.”[16]라는 시를 주고 유교의 전통을 계승하라고 했다. 이후 이운규는 띠울마을을 떠나 용담에 은거하다가 고향인 목천으로 갔다고 하는데,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는다.
| 김항의 초상 |
김항은 이운규에게서 받은 가르침이 중국의 고대 유교에 입각하여 새로운 역리를 연구하고 영가무도는 이를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의 교문에 들어오는 교도들은 대부분이 양반계층의 유학자였다. 김항의 주요 제자들도 대부분이 충청도에서 이름있는 유학자들이었다.
1898년 김항이 사망하자 제자 하상역이 2세 교주가 되면서 대종교(大宗敎)[18]라는 교명을 내걸고 포교할 때 교리에 대한 새로운 견해를 주장하여 이에 대한 시비논쟁이 분분하였다.
김항의 남학에 대한 신앙 태도는 정역 이론과 오음주 주송수련이 후천개벽을 맞는 깨달음을 얻고 마음을 수련하는 공자의 유행(儒行)[19]이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상역, 김영곤 등은 김항을 상제로서 신격화하고 신앙대상으로 추앙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홍현, 김정현 등은 김항의 사상이 순수하게 유교적 측면에서 연구하고 실천하는 것을 하상역 등이 가르침을 타락시킨다 하여 논박함으로써 교리에 대한 분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상역, 김영곤 등의 신비적 교리에 반대하는 김홍현, 김정현, 권종하 등의 소위 족척계 제자들은 김항의 가르침을 공자의 유학을 새로운 면에서 공부하는 것으로 보고, 남학에서 『정역』을 공부하는 것은 『주역』의 원리에서 후천시대의 새로운 원리를 공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오음주는 공자가 주장한 육예(六藝)의 내용에서 시를 읊고, 노래를 하고, 춤추는 것과 부패한 유교 윤리를 부흥시켜 유교의 도덕이 잘 발휘되는 후천의 지상낙원을 건설하자는 것이 남학의 요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는 것을 중심으로 한 교인들로 뭉친 교파가 분립하게 되었고, 이 교파는 김항의 척손들을 중심으로 하는 학회가 되었는데 나중에는 단순한 학회가 아니라 신앙성이 들어 있고 정기적으로 향례까지 지내는 종교적 성격을 갖추게 되었다. 최초로 모임이 시작된 것은 1964년이었다.
이 때 정역학회가 발족되어『정역』원본을 발간하는 등 정역사상을 연구하기 위한 사업들을 전개하였고, 이후에도 일부선생기념사업회, 정역사상연구회 등이 설립되어 김항과 정역에 대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한편, 김영곤은 일부상제에 의해 후천 선계의 개벽에 참여할 수 있다며 단체를 만들어 계룡산 등지에서 포교하다가 그가 죽자 임도봉(林道峯)이 계승했다.
이 교파는 중앙대종교(中央大宗敎)라는 교명으로 이필례(李必禮)에 의해 널리 퍼졌고, 이필례는 교명을 천일교(天一敎)로 바꾸고,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크게 제사를 지내며 무속에 가까운 종교활동을 벌였다. 그러다가 이필례가 사망하자 종교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었고, 현재는 과거의 신자들과 자손들이 교주의 묘를 참배하는 정도이다.
힌편, 신도였던 이희룡이 영가무도 수행을 주로 하는 교단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희룡이 죽자, 그 제자 송철화(宋喆和)가 계룡산 국사봉(國師峰)에 수도 장소를 설치하고 『정역』연구에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설치된 제단에는 일부상제, 화무상제, 황극모(黃極母),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 미륵불 등을 모시고 이를 신앙대상으로 하여 기도를 한다. 여기서 화무상제와 미륵불은 김항의 화현이라고 본다. 국사봉은 김항이 마지막 포교의 근거지로 삼았던 유적지가 되어,『정역』을 공부하고 오음주송에 의한 영가무도와 더불어 기타 주축기도 수련을 행하는 일부계 교인들이 현재까지 모이고 있다.
김항의 제자 이상룡(李象龍)이 자기 나름의 교리를 주장하면서 포교한 교단이 형성되어 청양군, 공주, 이천 등지에 그 여세가 남아 있고, 이 밖에도 일부계의 교파에서 동학과 증산교(甑山敎)와 야합된 몇 개의 교파도 형성되었다.
그러나 근래에는 모두 형세가 미약하여 유야무야한 상태이며, 송철화에 의해 시작된 영가무도교는 송철화가 사망한 이후 교세가 위축되었고, 최근에는 그의 부인이 약 30여 명의 신자들과 함께 국사봉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가끔씩 서울 등지에서 『정역』을 공부하거나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김항의 최후 유적지인 이곳 국사봉을 참배차 방문하기도 한다.
한편, 김치인은 전라북도의 완주와 진안 일대에서 포교할 때 전라북도의 신도들을 주로 하여 교단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운규의 아들 이용래, 이용신 형제를 스승으로 하고 자신이 교주가 되어 오방불교 또는 광화교라는 명칭으로 운장산 밑 대불리(大佛里)에 본부를 두고 포교하였다.
이 오방불교에서는 후천의 개벽이 곧 미륵불 강림에 의한 개벽이라고 하나, 그 교리 면에서는 『정역』의 사상을 믿고 오음주송 수련을 행하면서 도를 닦는 것이 유교적 경향이 강하며 신도들도 대부분 유자들이기 때문에 처사교(處士敎)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김치인은 이운규가 제시한 후천개벽이라는 역리적 운도변역(易理的 運度變易)을 이 교의 종지로 삼았지만 이 운도개벽은 김항과 같이 유교적인 입장에서『주역』의 운도가 바뀌는 『정역』의 원리보다는 불교적인 미륵불의 강림으로 인한 용화세계의 운도로 믿었다.
그리고 이 용화세계는 지상선계라고 하여 자신의 오방불교의 교법은 곧 유불선이 합일된 무극대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유교의 인의 도덕과 불교의 자비 선행과 도교의 주송 수련을 병행할 것을 주장하면서, 오음주 등 몇 가지 주문에 의한 기도수련을 병행하였다.
이 때 주송 수련에서 일어나는 영가무도의 신비와 치병, 그리고 용화세계에 참여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수많은 교인들이 모여들어 일부계 교단보다도 형세가 큰 교단이 형성되었다. 이 때 교명을 오방불교라고 하는 한편, 자신의 교단을 동학에 대응되는 남학이라고도 하였다.
1894년 동학군의 봉기가 일어나는 것을 본 남학에서는 동학과 마찬가지로 후천개벽이 목적이며, 척양척왜(斥洋斥倭),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를 주장함은 민족종교의 당연한 임무라고 하여 이에 남학에서도 동학과 같은 거의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면서 이른바 남학 운동을 결행하였다.
이 때 교단 본부인 대불리와 주천에 본영을 두고 5만여 명에 달하는 남학군이 조직되었으나, 출동 직전에 관군의 습격으로 간부들과 많은 교인들이 붙잡혀 김치인을 비롯한 8명의 간부들이 전주와 나주에서 사형을 당하고, 남학운동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김치인이 죽자 그 제자들 사이에 교통전수를 둘러싼 분규가 생겼는데, 수제자 김용배(金庸培)가 정통을 이어 금강불교(金剛佛敎)라는 교명으로 포교하고, 김항배(金恒培), 권순채(權珣采)는 광화교 또는 광화불교라는 교명으로 포교하였다. 뒤에 금강불교의 교명이 칠성불교로 바뀌어 운장산 주위를 근거로 하고 용담, 진산, 금산, 장수 등지에 포교가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에 일본 경찰의 동학과 남학에 대한 탄압으로 이 교단은 물론이고 일부계의 교인들까지도 다수가 붙잡히는 바람에 교세가 완전히 위축되었다.
광복과 더불어 광화교, 광화연합회, 금강불교, 칠성교 등 기타 광화계에서 분파된 몇 개의 교단이 전라북도에서 포교되고 있으나, 지금은 교세가 위축 또는 소멸되어 드러나지 않고 있다.
4. 교리
남학의 이상은 후천세계의 지상낙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는 이운규가 제시한 후천개벽의 역리(易理)를 인식하고 오음의 주송수련을 통해서 가능하다.『정역』은 이운규의 후천개벽의 역리를 김항이 천명한 이 교단의 경전으로서 후천역(後天易)이라고 부른다.선천에서는 1년이 365일에 4분의 1이라는 윤(閏)이 있었지만, 『정역』의 운수는 360일 정각이 되니 윤달이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후천에는 사계절, 낮밤, 추위와 더위의 차이가 없게 되고 인간 사회에도 빈부, 귀천, 수요의 구별이 없게 된다.
이 때에는 사람의 형상도 달라져서 1만 8,000세까지 장수할 수 있고, 사람은 신과 동화되어 조화를 부릴 수 있다. 그리고 지상에는 죄가 없는 지상천국을 이룩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선후천이 교역하는 시기가 되면 삼재팔난(三災八難)이 있게 되며, 인간 행위의 선악에 심판이 따르게 되는데, 이 때를 맞이하여 모든 사람들이 닦아야 될 올바른 도(道)가 곧 남학이 열어 준 무극대도이다.
오음주는 음(吟), 아(哦), 어(唹), 이(咿), 우(吁)의 오음을 외우는 것을 말한다. 이 오음은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의 오성(五聲)과 수(水), 화(火), 목(木), 금(金), 토(土)의 오행(五行) 및 비(脾), 폐(肺), 간(肝), 심(心), 신(腎)의 오장(五臟)과 조화를 일으키는 소리로, 이를 주송하면 자연히 기운과 오장이 수련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음 주송은 이에 음률의 고저, 장단, 청탁이 있어 서로 조화적으로 자연의 이치에 응하기 때문에 이 소리를 부르면 손발이 저절로 움직여 춤을 추게 된다. 이 영가무도가 극치에 달하면 앉은 채로 몸이 3, 4척이 뛰어오르고 여러 가지 신비현상을 불러 일으키며, 질병이 치유된다고 믿는다. 이것을 오음주송에 의하여 자연의 조화에 부응하는 경지라고 한다. 이 계통의 신자들은 영가무도로 병을 고치고 신을 맞이하여 재앙에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화무상제[20](化無上帝)의 뜻에 따라 개벽되는 후천 선계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특히 일부계 남학의 교법이다. 이로 말미암아 이 교단을 한때 영가무도교라고 불렸다. 이 영가무도에는 정(精), 기(氣), 신(神)의 조화작용이 있다고 믿는다. 정의 조화에 의해 관통하는 것은 유교의 진리라 하고, 신의 조화에 의해 깨닫는 것은 불교의 진리라고 하며, 기의 조화에 의해 수련되는 것은 도교의 진리라 정, 기, 신의 조화는 유불선 삼교 합일의 도라고 한다.
남학은 종파인 일부계[21]와 광화계[22]의 대체적인 교리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남학의 교리를 유불선 삼교의 합일로 본 것은 양계가 같으나, 일부계는 유교를 주로 하여 불교, 도교를 융섭하였으며 광화계는 불교를 주로 하여 유교, 도교를 융섭하였다. 그리하여 양계가 모두 독특한 혼합적 교리를 만들었다.
둘째, 후천개벽이라는 선후천 교역운도을 논하고 이에 의한 지상천국 이상세계를 바라는 것은 양계가 같다. 그런데 일부계에서는 후천의 운도가 김항에 의해 밝혀졌다고 생각하여 그를 후천개벽의 지도자로 보았다. 그러나 광화계에서는 후천개벽을 용화세계의 전개로 보았다. 그래서 광화계는 미륵불의 강림을 교주 김치인의 강림으로 믿게 되었다.
셋째, 오음 주송에 의한 영가무도는 양계가 모두 심신을 수련하는 방법으로 삼았다. 이 오음을 외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합하고 신비한 주술적 힘을 발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일부계에서는 오음 이외의 다른 주문을 하는 교파도 있지만 대개는 오음영가를 수련의 기본법으로 한다. 한편, 광화계에서는 오음영가보다 염불, 진언, 칠성주(七星呪) 등 각종 주문과 기도문, 경문 등을 이용한다. 이는 광화계가 오음 주송에 의한 수련보다 주축에 더욱 치중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강학(講學)의 문제로 양계가 모두 유교의 도덕과 불교의 전변심법을 주장한다. 그런데 일부계에서는 유교를 주장하면서 인의(仁義), 도덕(道德)을 논하는 경전보다는 음양, 오행, 역리[23]의 강학에 한층 더 치중한다. 광화계에서는 불도를 논하면서도 해탈, 선정을 논하는 강학보다는 충효 등 유교적인 도덕을 강학하는 데 주력한다. 이로써 보면 불과 유를 일체인 것으로 보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남학과 동학의 교리를 비교해 볼 때, 후천개벽과 주송수련, 그리고 삼교의 융섭을 내세운 것은 양쪽이 다 같은 주장이다.
그러나 동학의 선후천 개벽 이론은 주역의 역리에 의한 상원갑(上元甲), 하원갑(下元甲)의 새 운도 교체를 논한 것인 데 비해 남학은 정역이라는 역리를 제시한 것이었다.
남학의 오음주와 동학의 시천주(侍天呪), 강신주(降神呪)는 그 내용에 시천주(侍天主)와 오기수련(五氣修鍊)의 뜻이 서로 다르다.
이 두 교단이 모두 유불선 삼교의 융섭을 주장했지만, 남학에서는 유교와 불교의 양계 종단이 완전히 갈라지면서도 중국의 고대 유교의 연원을 두었고, 동학은 유교를 중심으로 하면서 특히 신유교(新儒敎) 방면에서 취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신앙대상은 인간 자신에 모신 한울님을 신봉하는 것에 비하여, 남학에서는 화무상제와 당래미륵불을 신봉하는 데서 둘의 차이가 나타난다.
[1] 본명은 이수증(李守曾)이고, 운규(雲圭)는 별칭이다. 이운섭(李雲燮)이라고도 한다.[2] 이용래(李龍來)라고도 한다. 호는 부련(夫蓮)이다. 이운규의 장남이다.[3] 이용신(李龍信)이라고도 한다. 호는 일수(一守)이다. 이운규의 차남, 혹은 삼남이다.[4] 김치인의 법설을 모은 『광화집』에서는 김항을 김치인의 스승으로 표현하여 남학의 계보가 이운규에서 김항, 김치인으로 이어진다고 봤다.[5] 나철이 중광한 대종교(大倧敎)와는 다르다.[6] 유교계 신종교인 갱정유도 등.[7] 북학이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동학의 최시형에 반대하던 남접에서 북학이라는 교파를 세웠다고 한다.[8] 중학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9] 또는 일부교계(一夫敎系).[10] 그중에서 현재의 천안시 목천읍 일대.[11] 여기서 이서구와 청림도사가 동일인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그가 한때 속세에서 벗어나 살기도 했고, 예언을 자주 해서 그에 관한 전설이 많기 때문이다.[12]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13] 띠가 많이 있어서 띠울이라고 불렸다고 한다.[14] 여기서 '계명산천'은 닭이 울어 날이 밝아 올 무렵의 자연을 뜻하고, '바라'는 조선 시대에, 통금를 해제하기 위해 종을 33번 치던 일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주문과 거의 일치하는 수운교의 주문이 있다. 수운교에서는 새벽 예불 시간을 알리기 위해 1933년부터 도솔천(수운교의 본부)의 남문인 광덕문을 열고 바라를 쳤다. 이 바라를 칠 때, “남문을 열고 바라를 치니 계명산천이 밝아온다. 남무 아리따리불 제도중생 남무 아미타불”이라는 주문을 외웠다고 한다. 어디에서 먼저 이 주문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치인이 직접 이운규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부터 신빙성이 떨어지는 만큼 수운교의 주문에서 따온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15] 서전은 주자의 제자인 채침(蔡沈)이 사서삼경 중 하나인 상서(尙書)에 주석을 달아 편찬한 책이다. 서경은 유교에서 기장 이상적인 군주로 숭상하는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탕왕, 문왕, 무왕의 도가 담겨 있다고 한다. 또한 강일순이 서전의 서문을 맑이 읽으면 도에 통한다고 했기 때문에 증산계 종교에서도 중시되는 경전이다.[16] 맑음을 보는 데는 물만한 것이 없고, 덕을 좋아하면 인(仁)을 행함이 마땅하다. 달빛이 천심월(天心月)에서 동하니, 그대에게 권하노니 이 진리를 찾아보소.[17]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양촌면 남산리.[18] 나철이 세운 대종교와는 다르다.[19] 유학에 기반을 둔 행위.[20] 일부계(一夫系)에서는 김항을 신격화하여 부르는 말.[21] 이운규의 제자 일부 김항 계열[22] 이운규의 제자 광화 김치인 계열[23] 특히 정역(正易)의 이(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