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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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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곤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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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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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대(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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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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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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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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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변호영
(1975)
김호곤
(1975~1978)
조영증
(1979~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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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곤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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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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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1973 · 1974 · 1975 · 1976 · 1977 · 1978 ·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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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곤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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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
{{{#!wiki style="margin: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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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순위 선수 및 현 소속 구단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홍명보 은퇴 <colbgcolor=#eeeeef,#191919> 137회 1990.02.04
(vs 노르웨이)
2002.11.20
(vs 브라질)
2 이운재 은퇴 132회 1994.06.11
(vs 온두라스)
2010.08.11
(vs 나이지리아)
3 손흥민 토트넘 홋스퍼 FC 130회 2010.12.30
(vs 시리아)
2024.11.14
(vs 쿠웨이트)
3 차범근 은퇴 130회 1972.05.07
(vs 이라크)
1986.06.10
(vs 이탈리아)
5 이영표 은퇴 127회 1999.06.12
(vs 멕시코)
2011.01.28
(vs 우즈베키스탄)
6 유상철 은퇴 120회 1994.09.11
(vs 우크라이나)
2005.06.03
(vs 우즈베키스탄)
7 김호곤 은퇴 117회 1971.11.14
(vs 베트남)
1979.03.04
(vs 일본)
8 김영권 울산 HD FC 112회 2010.08.11
(vs 나이지리아)
2024.09.05
(vs 팔레스타인)
9 기성용 FC 서울 110회 2008.09.05
(vs 요르단)
2019.01.07
(vs 필리핀)
10 김태영 은퇴 104회 1992.10.21
(vs UAE)
2004.07.19
(vs 요르단)
이동국 은퇴 104회 1998.05.16
(vs 자메이카)
2017.09.05
(vs 우즈베키스탄)
12 조영증 은퇴 102회 1975.03.19
(vs 베트남)
1986.10.05
(vs 사우디아라비아)
황선홍 은퇴 102회 1988.12.06
(vs 일본)
2002.11.20
(vs 브라질)
14 박성화 은퇴 101회 1975.07.29
(vs 말레이시아)
1984.12.10
(vs 카타르)
15 박지성 은퇴 100회 2000.04.05
(vs 라오스)
2011.01.25
(vs 일본)
FIFA 센추리 클럽 명단 기준 (2024.03.14. 기준)
※ FIFA에서 공인한 기록과 대한축구협회에서 집계한 기록은 차이가 있다. 대한축구협회 선수별 A매치 기록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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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인
파일:김호곤.jpg
<colbgcolor=#eeeeee> 이름 김호곤
金鎬坤 | Kim Ho-Gon
출생 1951년 3월 26일 ([age(1951-03-26)]세)
경상남도 통영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신장 172cm
학력 충렬초등학교 (졸업)
통영중학교 (졸업)
동래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이공대학 이학부 (체육학 71 / 학사)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체육교육전공 / 석사)[1]
직업 축구 선수 (센터백(스토퍼)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eeeeee> 선수 상업은행 (1969~1970)
연세대학교[2] (1971~1974)
서울신탁은행 (1975~1982)
감독 대한민국 대표팀 (1980~1983 / 코치)
현대 호랑이 (1983~1987 /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1985~1986 / 코치)
대한민국 U-23 대표팀 (1988 / 코치)
연세대학교 (1992~1999)
부산 아이콘스 (2000~2002)
대한민국 대표팀 (2002 / 임시 감독)
대한민국 U-23 대표팀 (2002~2004)
울산 현대 (2009~2013)
기타 대한축구협회 (2005 / 전무이사)
울산 현대 (2014 / 기술 고문)
대한축구협회 (2014~2017 / 부회장)
대한축구협회 (2017 / 기술위원장)
수원 FC (2019~2022 / 단장)
대한축구협회 사랑나눔재단 (2023~ / 이사장)
국가대표 124경기[3] 5골 (대한민국 / 1971~1979)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
3.1. 부산 아이콘스3.2.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3.3. 울산 현대
3.3.1. 2009년~2010년3.3.2. 2011년3.3.3. 2012년 - 철퇴 축구로 아시아 정상에 오르다3.3.4. 2013년
4. 행정가 경력5. 기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축구 선수 출신 감독, 행정가. 선수 시절 포지션은 센터백.

1975년 대한축구협회 최우수 선수이자 KFA 올해의 팀에 8회 연속으로 선정된 경력이 있다. 1998년 20세기 아시아-오세아니아 베스트11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2. 선수 경력

1970년대 대표팀 붙박이 선수로 A매치 117경기에 출장해 센추리 클럽에 가입 조건을 갖췄다. 그 풍부한 경력만큼 재미있는 일화도 많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 게임 축구[4]에서 선수로 뛰었는데, 이때 높으신 분의 지시에 따라 대표팀이 승부조작을 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한창 북한과 체제경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북한에 대한 적대감과 경쟁의식이 대단했다. 그런데 북한 축구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돌풍을 일으킨 전례가 있는 강팀이었다.[5] 결국 '뭐든 북한에 지는 꼴은 못본다'는 높으신 분의 뜻에 따라 남북대결을 피하기 위해 쿠웨이트에 일부러 패했다. 하지만 이 패배가 화근이 되어 대표팀은 당시 8강 조별 리그에서 조 최하위로 탈락(7등)했다.[6] 여담으로 북한축구의 약진에 자극받은 대한민국은 대표팀 제도를 개편해 화랑, 충무 팀을 만든다. 요즘 식으로 말한다면 화랑이 1군,충무가 2군인데, 이때 화랑팀 멤버가 허정무 조광래 박성화 등 2000년대 대한민국 축구의 중진들이다.[7] 그밖에 조영증, 이영무 등 축구협회에서 활약한 이들도 이 시기 대표팀에 뽑혔다.

1978년 방콕 아시안 게임 축구 결승전에서 마침내 남북대결이 벌어졌다. 더구나 분단 이후 남북 대표팀의 첫 A매치였다. 이때 김호곤은 대표팀 주장을 맡았다. 양팀은 팽팽한 대치 끝에 0-0 무승부를 기록했는데, 연장 승부차기 규칙을 적용하지 않은 대회였기 때문에 공동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시상식에서 사고가 터졌다. 양보를 받아 시상대에 먼저 오른 북한 주장 김종민이 자리를 내주지 않자, 김호곤이 억지로 비집고 올라섰다. 그러자 북한 골키퍼 김광일이 뒤에서 확 밀어버려 김호곤이 시상대에서 떨어졌다. 자칫 승부차기 대신 현피가 벌어질 판국이었는데, 김호곤은 침착하게 '보는 눈도 많은데 웃으며 포즈를 취하자'고 김종민과 어깨동무를 했다.

파일:external/image.pressian.com/60080313172249%5B1%5D.jpg

1970년대 선수인데 1990년대까지 출장 기록이 묻혀 있었다. 즉 축구협회에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PC 통신에서 활동하던 축덕들이 국회도서관에서 옛 신문을 뒤지고 해외까지 나가 자료를 수집해 발굴해냈다. 여담으로 이렇게 축덕들이 자료를 발굴해서 FIFA에서 정식으로 인증한 사람이 바로 차범근이다.

3. 지도자 경력

1980년부터 코치를 하다가[8] 1992년부터 정병탁 감독이 떠난 모교인 연세대학교 감독을 시작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햇수는 오래지만, 도중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과 대한축구협회 간부로 지냈기 때문에, 감독을 맡은 프로 구단은 부산 아이콘스 (現 부산 아이파크)와 울산 현대 호랑이 딱 둘뿐이다. 그리고 올림픽 대표팀 감독으로 재임하던 시절 히딩크와의 계약 만료가 되어 공석이 된 대표팀의 임시 감독을 맡아 2002년 11월 20일에 있었던 브라질과의 평가전을 한 차례 지휘한 적이 있다.[9]

2012년 울산이 ACL에서 우승하면서 아시아 최고의 위치에 올라갔지만 K리그에서는 우승 경험이 없다.(리그컵 우승 경험은 한 번 있다.) 2011년에는 6위로 플레이오프에 턱걸이한 후, 철퇴 축구로 챔피언결정전까지 파죽지세로 진격하였으나 당시 최강의 전력이었던 전북 현대에게 밀려서 준우승을 기록하였고, 2013 시즌에는 시즌 내내 압도적인 전력으로 1위를 달렸으나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포항 스틸러스에게 발목을 잡혀 준우승에 머물렀다.

3.1. 부산 아이콘스

2000년 2월 24일 대우그룹에서 현대산업개발로 인수된 부산 아이콘스의 총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초대 감독으로 내정되어 있던 김태수 감독이 구단과의 마찰을 빚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김태수 감독은 사의를 표명했고, 결국 3월 6일 감독에서 사퇴하였다. 이후 팀의 감독으로 취임 2002 시즌까지 팀을 맡았다. 2000년 첫 시즌은 6위에 FA컵 4강 진출, 2001 시즌은 리그 4위까지 올라갔으나 2002 시즌은 9위까지 떨어졌다.

2002 시즌 종료 후 지휘봉을 놓고 2004 아테네 올림픽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3.2.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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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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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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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김삼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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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허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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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박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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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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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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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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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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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대

미정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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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2004 아테네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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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울산 현대

3.3.1. 2009년~2010년

2009년에 김정남 감독이 물러나자 울산의 후임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런데 언론에 부임 소식이 뜨자마자 정몽준의 연줄로 울산 현대 감독이 되었다고 온갖 욕을 다 먹었다. 게다가 2008 시즌 리그 4위를 기록한 팀이 2009 시즌에 8위로 떨어지면서 폄칭 호로곤이 완전히 정착되었다.

2009 시즌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리그 일정이 빠듯해 호주 뉴캐슬 제츠 원정에서 2군 선수를 대량으로 차출했다. 축구 칼럼니스트 존 듀어든은 챔스를 포기했냐며 강도 높게 비난했고, 그해 K리그 팀들 중 유일하게 16강 진출에 실패하면서 더더욱 까였다. 김호곤은 가뜩이나 탈락해서 기분이 나쁜데 듀어든마저 자신을 비판하자 집에 전화까지 걸어서 항의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축구 사이트들은 김호곤의 뻘짓이라고 더 비난했다. 실은 듀어든 말고도 축구 기자들이나 언론도 비슷한 기사를 썼음에도 만만한(?) 듀어든에게 까분다면서 ACL 포기로 K리그의 망신이 아니냐는 기자의 비아냥적인 글도 올라왔을 정도로 두들겨 맞았다.

2010 시즌에는 프랜차이즈 스타급[10]현영민을 내주고 김치곤을 데려오면서 양팀의 주장을 맞바꿨다고 온갖 욕을 다 먹었다. 현영민이 울산에서 은퇴할 때까지 뛰고싶어 했기에 더더욱. 하지만 서울제주가 월등한 승점차로 선두 다툼을 벌이고 신태용이 이끄는 성남이 약진하는 가운데, 조광래가 이끄는 경남이 약한 전력을 갖고도 분전하는 바람에 가장 늦게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지은 울산은 완벽히 묻혔다. 심지어 스쿼드가 좋으니까 순위가 높을 뿐 다시 내려올 거라며 무시하는 사람조차 있었다.

3.3.2. 2011년

2011년도 리그 중에는 강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중위권에서 머물렀지만, 7월 마지막 리그컵인 러시앤 캐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부임 이후 처음으로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체면치레를 했다. 물론 다른 강팀들은 리그컵 대회에 열의를 보이지 않고 2군 선수들을 보내는 등 비교적 무난하게 우승컵을 거머쥐긴 했다. 무엇보다 김호곤 감독은 리그컵을 없앤다는 방침에 반대도 해왔고, 인터뷰에서 리그컵을 우습게 대하면 안 된다고 다른 감독들과 정반대 의견을 보였다. 결국 정예 멤버를 총동원하며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그렇다고 쉽게 우승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여타 중하위권 팀들이 리그 대신 리그컵에 매진했기 때문에 상당히 고전했기 때문. 결승에서도 부산 아이파크와 격전을 벌이며 어렵사리 우승을 거뒀기에 우습게 볼 일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2011년에는 리그 6위의 성적으로 6강 플레이오프에 참가했는데, 이때부터 그 유명한 철퇴 축구가 시작됐다. 일반적인 예상을 뒤집고 6강 플레이오프에서 3위 FC 서울을 3:1로 완파하며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더니, 역시 예상을 뒤집고 4위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만나 연장 승부 끝에 1:1을 기록한 후 승부차기 끝에 3:1로 물리쳤다. 이런 승전보에 K리그 팬들은 농담삼아 김호곤 명장론을 내세우며 조광래 감독 대신 대표팀에 보내라며 부왘을 울리고 있다. 철저한 수비+세트피스에서의 한 방으로 승부를 보는 김호곤 감독의 울산을 보며 철퇴 축구라고 부르기도 한다. 국내축구 갤러리, 사커라인 등에서는 철퇴왕 김호곤, 호거슨이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이 생겨났다.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11128155618674.jpg

급기야는 이런 짤도 만들어지고 뉴스까지 탔다.

결국 포항 스틸러스와의 동해안 더비, 설기현 더비에서 수비수의 벽을 앞세우며 단단하게 막아내며 승리를 거두고 챔피언 결정전에 올랐으나 닥공의 전북 현대 모터스에게 1, 2차전 모두 1:2로 패배하며 준우승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김호곤 감독의 축구가 수비적이고 지루하다는 편견이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3자의 시각일 뿐이지 팀을 응원하는 이에겐 결국 승리가 중요하다. 닥공으로 따내든 우주방어로 따내든 승점 3점은 똑같다. 주제 무리뉴첼시 FC 역시 똑같은 비난을 들었지만 트로피를 들어올렸던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2011년 울산은 득점은 적었지만 중위권 성적을 내면서도 파울 수나 경고 수에서 강원 FC와 함께 최하위를 다퉜다.

6강 플레이오프 결과에서 보이듯 원래 이런 컬러를 가진 팀은 어느 한 경기를 콕 찝어서 반드시 잡겠다고 작심하고 덤비면 무척 상대하기 까다롭다. 서울과 수원 모두 전력이 밀렸던 게 아니라 반드시 단판 시합에서 승부를 내야 하는 조건 하에 울산의 견고한 수비를 뚫지 못해 초초해하며 자기 페이스를 잃고는 카운터를 얻어맞는 패턴으로 당했다. 반면 장기전인 리그에서는 예상 밖의 난관에 부딪히기 쉬운데, 자력으로 양민학살을 못하기 때문이다.[11]

3.3.3. 2012년 - 철퇴 축구로 아시아 정상에 오르다

김승용, 이에나가 아키히로, 이근호라는 대박 영입을 이루어내면서 K리그 최강의 스쿼드를 갖추자 전방의 김신욱의 압박만으로도 웬만한 팀은 답이 없는데 공간을 찢어주는 이근호의 움직임이 조합되니 철퇴축구는 더할 나위 없이 막강해졌고, 팬들은 호곤신 이라고 찬양하는 중이다. 본래 김호곤이 영입한 선수들은 대부분 대박을 쳤는데, 대표적인 예시는 2010년 에스티벤 영입, 2011년 곽태휘 영입이다. 그리고 이 선수들을 제대로 활용하는 김호곤의 용병술 또한 빛나고 있다. 사실 에스티벤이 원래 포지션이 왼쪽 풀백이었던 것, 김신욱의 공격수 전업이 성공적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대단한 일이다.

2012 시즌 성적 역시 아직 3라운드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리그에서는 3연승,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2:1로 승리하면서 무지막지한 철퇴축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FC 도쿄와의 원정 경기에서 2:2 무승부를 거둔 후 4라운드에서 대구에게 일격을 당하며 1:0으로 패배하며 슬슬 체력에 한계가 오는 거 아니랴는 의견도 나왔다. 아닌 게 아니라 김호곤 감독 스타일상 베스트 11만 주야장천 돌리기 때문에 지난 시즌과 달리 플레이오프 없아 장기전으로 44라운드나 되는 리그, 더군다나 AFC 챔피언스 리그를 병행하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견뎌낼 수 있겠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5월 6일 11라운드 전남전에서 1:0으로 이기며 승점 3점을 획득, 울산을 1위로 올려놓았다.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와 리그를 통틀어 16경기 중 패배라곤 대구전의 1패 뿐. 그러나 이후 강력한 우승 경쟁상대인 수원과 전북을 만나 잇달아 패배하며 5월 최종 순위는 5위로 떨어졌다.

결국 8월 30라운드가 끝나고, 4위 성적을 기록하며 상위 스플릿에 남았다. 3위 수원과 승점(53) 득실(12)은 같았으나 다득점에서 밀렸다. 한편 5위 포항은 승점 50점으로 바짝 추격중이라 역시나 대혼전을 예고하였다.

9월 수원을 승점 1점 차이로 제치고 리그 3위로 올라섰다.

10월에는 상위 스플릿 판세가 크게 둘로 나뉘었다. 리그 우승은 사실상 서울과 전북 두 팀의 경쟁으로 좁혀졌다. 한편 4위 포항이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리그 순위와 무관하게 2013년 AFC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을 획득하면서, 3위 수원과 5위 울산은 마지막 한장 남은 진출권을 놓고 다툼을 펼치게 되었다. 한편 AFC 챔피언스 리그 4강전에서 승리하며 리그 순위와 무관하게 AFC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은 총력전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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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전이 열리는 울산의 홈 경기장인 울산문수축구경기장에서 알 아흘리 SFC를 3:0으로 격파하고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차지하게 되었다. 특히 울산은 ACL 우승때까지 단 한번도 지지 않고 무패우승의 기록을 세워서 더 값진 우승이었다.

2011년부터 축구팬들은 울산과 김호곤 감독에게 후한 점수를 줬는데, 축구 뿐만 아니라 어느 구기 종목이든 결국 성적을 내는 팀은 수비가 강한 팀임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또한 예전까지 우주방어로만 유명하던 울산이 2011년을 기점으로 철퇴라는 찬사를 들을만큼 한방 공격력을 갖추면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은 시간문제일 따름이었고, 그 시점은 예상외로 빨리, 그리고 적절하게 찾아왔다.

3.3.4. 2013년

시즌이 시작되기 전 이근호, 이호, 이재성국군체육부대에 입단했고, 에스티벤과는 계약이 끝났고, 곽태휘고슬기는 해외로 이적했다. 이 정도면 전력 누수 정도가 아니라 아예 뿌리가 뽑혀나간 수준이다. 그나마 해외 진출설이 나돌았던 김신욱이 잔류한 것이 다행이었다. 결국 주전 절반 정도가 새 얼굴로 바뀐 만큼 아무래도 이번 시즌에는 좋은 성적을 내기는 힘들고 팀 전력을 끌어올리는데 초점을 맞추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돌아온 것은 2000년대 초반에 압도적인 전력으로 리그를 지배했던 깡패 축구의 재림이었다. 팀 컬러 자체는 크게 변함이 없었지만, 볼을 전개하는 속도는 더 빨라졌고 공격진의 파괴력은 더 강력해졌다. 2012년이 철퇴 축구의 완성이란 표현이 무안해질 정도로 확연히 업그레이드한 모습을 보였다.

2012년과 마찬가지로 김호곤 감독은 부족한 팀 전력을 영입을 통해 훌륭히 메꿔냈는데, 부산 시절 한페르시라 불리며 기대를 받았으나 성남 일화 천마 이적 후 한요윤으로 불리며 역적 취급을 받은 한상운을 영입하고, 일본 대표팀 경력이 있으나 상대적으로 활약은 미미했던 마스다 치카시(増田誓志)를 영입한다. 팬들로서는 ACL을 제패한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뒷목을 움켜잡을 뜬금없는 영입 소식이었으나, 한상운은 6개월 만에 성남 시절 부진을 털어내고 포텐을 터뜨렸고 이근호의 공백을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하피냐(11골)와 한상운(8골)이 맹활약을 하면서 김신욱이 동반 상승했다. 또한 마스다는 일본 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엄청난 활동량과 강력한 압박, 몸싸움으로 울산의 허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오죽했으면 에스티벤과 계약을 연장하지 않은 것이 신의 한 수였다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였다. 또한 최용수 감독과 달리 김용태, 최보경 등 서브 선수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하고, 혹서기에 주전 선수들의 출장 시간을 조절하면서 40라운드 장기 레이스에 대비했다. 여기에 유스 출신 골키퍼 김승규가 대표팀 골키퍼 후보인 김영광을 벤치로 밀어내면서 주전을 꿰차는 등 영입뿐만 아니라 내부 육성조차 본격적인 궤도에 올라 김호곤 감독의 어깨를 가볍게 만들었다. 이처럼 주전 선수들이 대거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짜임새 있는 팀 운영을 선보였다.

이 덕분에 울산은 시즌 초부터 꾸준히 좋은 경기력을 보이며 선두권을 지켰고, 스플릿으로 분리된 이후 포항 스틸러스를 제치고 1위에 등극했다. 상위 스플릿에 속한 팀들 가운데 인천 유나이티드 FC부산 아이파크는 전력 차이가 심했고, 나머지 우승 경쟁팀인 FC 서울, 수원 삼성 블루윙즈, 전북 현대 모터스, 포항은 각자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었다. 서울은 ACL과 리그를 병행하는 가운데 이미 9월부터 주전 선수들의 체력 고갈 현상이 두드러졌고, 수원은 아예 성적을 포기하고 리빌딩에 들어간 상태였다. 전북은 최강희 감독이 대표팀으로 떠난 동안 팀이 망가져서 수습이 곤란한 지경에, 포항은 재정난으로 선수층이 두텁지 못해 아슬아슬한 유스 출신 돌려막기로 꾸려가는 처지였다. 그리고 38라운드 시점에서는 2위 포항과 승점 5점 차이가 나면서 우승 9부 능선을 넘은 듯 보였다.

그런데 39라운드 부산전에서 1:2로 치명적인 역전패를 당하면서 최종전을 앞두고 2위 포항과 승점 차가 2점으로 줄어들었다. 설상가상으로 주전 공격수 김신욱과 하피냐가 모두 경고를 받아 사실상 우승 결정전인 최종전인 포항과의 홈 경기에 경고 누적으로 결장하게 되었다.

결국 최종전에서 포항을 상대로 우승을 놓고 건곤일척의 맞대결을 벌였고 90분 동안 0:0으로 팽팽한 경기가 지속되며 K리그 우승을 눈앞에 두는 듯 했으나, 추가시간 5분에 김원일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얻어맞고 0:1로 패하고 말았다. 결국 승점 1점차로 밀려 아쉬운 준우승에 머물렀고 안방에서 숙적 포항이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허탈하게 지켜봐야만 했다. 이날 경기는 비단 동해안 더비뿐만 아니라 K리그 역사에 역대급 경기로 길이 남으리란 찬사가 쏟아졌지만, 라이벌에게 우승을 내주었다는 것은 매우 허탈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K리그 시상이 끝난 후 12월 4일, 우승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돌연 사임을 선언했다. 이미 지난 시즌부터 은퇴하는 것이 아니냐는 루머가 돌긴 했으나, 시즌 전 성적에 대한 우려와 달리 훌륭하게 팀을 이끌면서 2014 시즌 ACL과 리그에 대한 기대치를 높였던 만큼 울산 팬뿐만 아니라 관계자들까지 충격의 나락으로 빠뜨렸다.
노장은 녹슬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닳아 없어지는 것이다.
김호곤 감독이 사임을 선언하며 남긴 말인데, 이 말을 고려해 볼 때 울산을 이끈 지난 5년간 상당한 피로가 누적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울산에서 5시즌간이나 있던 데다가 너무 갑작스럽게 물러났고, 2013 시즌의 울산이 우승을 못할 정도의 팀은 결코 아니었기에 구단 측에서 시즌 종료 후 동해안 더비 라이벌 포항에게 밀려 우승에 실패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묻고 사퇴 압박을 준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연봉도 상당히 높은 축이었을 것이고. 김호곤은 감독 생활이 끝날 나이가 아니었는데도 2024년 현재까지 감독직에 복귀하지 못하는 이유가 낸 성과나 연봉에 비해 생각보다 프런트나 상대팀 지도자들의 평판이 안 좋아서 그랬다는 추론도 충분히 가능하다.

4. 행정가 경력

4.1. 대한축구협회

울산 감독직 사임 이후로는 행정 업무로 나아가 대한축구협회 부회장단에 올라갔다. 이후 2017년 6월 26일 김호곤 부회장을 기술위원장으로 선임하였다.

기술위원장으로서의 초기 행보는 나쁘지 않다. 전임 기술위원장이 추진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나가면서 사견으로 밝혔던 허정무 대세론에 대해 백지론을 들고나와 새 기술위를 통해 백지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전임 기술위원장과 명백한 선을 그으며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7월 4일에는 기술위를 거쳐 신태용을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다만 U-23 감독은 여전히 공석인데 원래 이 자리는 국가대표팀을 맡은 신태용 감독이 물망에 올랐던 만큼 그 대체자를 구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런데 만약 구하지 못해 성적이 잘못되면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원래 U-23 감독으로 가던 신태용의 국가대표팀으로 가는 것에 역할을 한 것이 김호곤 위원장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다. 그리고 7월에 치러진 23세 이하 아시아 선수권 대회 예선은 임시 감독으로 부임한 정정용 감독이 대신 치렀다.

4.1.1. 비판

기술위는 국가대표팀만 관장하는 것이 아닌데 다른 것들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비판이 있다. 게다가 새로 선임한 기술위원에는 프로 감독들도 있어서 기술위를 여는 것 자체도 쉽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현 시점에서 가장 급한 것은 국가대표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 사건의 우선순위를 둬서 먼저 해결했다 볼 수도 있고 프로감독이 있는 것은 최근 불거지는 현장경험적 측면을 기술위에도 대입했다고 볼수도 있다. 또한 젊은 인사로의 인적쇄신 모두를 고려한 인사였다고 볼 수 있다.
4.1.1.1. 2017년 히딩크 감독 선임 논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2017년 히딩크 감독 선임 논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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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4일, 거스 히딩크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한국이 원한다면 어떤 역할과 자리라도 맡겠다"면서 3개월 전, 그러니까 지난 6월 대리인을 통해 한국 감독직을 맡을 의사가 있다는 것을 축구협회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호곤 위원장은 이에 대해 "어떤 공식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히딩크 재단의 노제호는 "히딩크 감독이 국가대표팀 감독직에 관심이 높으니 기술위가 남은 최종예선 두 경기를 맡을 임시 감독을 뽑고 월드컵 본선 감독은 본선 진출 확정 후 지원자 중에서 뽑는 게 어떻겠냐"고 김호곤 위원장에게 제안했으며, 해당 내용이 담긴 문자를 공개했다. 히딩크 재단에 따르면 히딩크 측의 이런 제안에 대해 김호곤 위원장이 "본선에 올라간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반응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김호곤은 히딩크 재단측에서 6월에 보냈다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공개하며 # 카카오톡 메시지를 감독 선임 제안으로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김호곤은 훗날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두고 "미친' 제안"이라고 격한 표현을 썼는데 이러한 표현이 전혀 과하지 않은 근거는 2017년 히딩크 감독 선임 논란 문서에 아주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미 6월에 히딩크측의 제안은 (그걸 제안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일언지하에 거절당했고, 신태용 신임 감독이 선임된 상황에서 이는 전혀 재론될 필요가 없는 무의미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를 뒤늦게 공론화하고 언론플레이를 하며 축구대표팀을 흔드는 노제호측의 추태에 대해 평소 대한축구협회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던, 또한 신태용호에 대해 미덥지 않아하던 축구팬들조차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서서히 히딩크 감독 선임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한준희, 박문성, 서형욱 등의 해설위원들도 히딩크 선임에 반대하고 신태용호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취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축구팬들 한정이었고, 그저 히딩크의 네임밸류에 환장하는 FC 코리아들의 여론은 신태용과 김호곤을 탄핵이라도 할 기세엿다.

결국 2017년 11월 2일부로 축구협회 부회장직 및 기술위원장직에서 사퇴하였다.

후일담으로 최종적으로는 신태용호가 최악의 여건에서도 카잔의 기적을 일궈내는 등 예상외의 성적을 보였으며[12] 축사국이 대표팀 귀국 현장에서 손흥민에게 엿을 던지는 천인공노할 막장짓을 저지름에 따라 여론은 급반전되어, 이제와서 "히딩크를 감독으로 데려왔다면~"하는 소리를 꺼내면 바로 축사국 소리나 듣고 무시당하는 수준에 이르렀다.[13]

4.2. 수원 FC 단장

2019년 수원 FC가 김호곤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을 단장 최종 후보로 낙점했으며, 김호곤을 단장 최종 후보자로 선정하고 이사회에 승인을 요청했으며, 최종 단장으로 내정하였다.# 계약 기간은 3년이다. 연봉이 밝혀지진 않았지만, 그의 명성, 그리고 다른 시민 구단 단장들에 비해 현저히 적은 금액에 계약했다고 한다.

2020 시즌 수원 FC는 예상외로 유력한 승격 후보였던 제주 유나이티드 FC와 우승 경쟁을 하다가 아깝게 2위가 되었다. 순위와 경기력을 고려할 때 플레이오프 승격 경쟁에서 매우 유리한 위치를 잡고 있다. 같은 기간 대전 하나 시티즌의 이사장을 맡으면서 황선홍 감독과 잡음이 많았던 허정무와 달리, 김도균 감독을 적절히 지원하면서 좋은 경기력으로 승격 직전까지 갔기 때문에 명예 회복이 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경남 FC 상대로 비기면서 팀의 두 번째 승격에 공헌했고 명예 회복에 성공하였다.

2021시즌을 앞두고 안병준, 마사 등 주축 선수들이 빠진 가운데 양동현, 김호남, 박지수, 박주호, 정동호, 이영재, 무릴로 등을 폭풍 영입하며 승격팀 답지 않은 네임 밸류와 뎁스를 만들었다. 다만 EPL에서 풀럼 FC가 증명했듯 이러한 영입전술의 특성상 팀 조직력을 갖추는데 시간이 걸리고, 베테랑 선수들의 기량 저하가 겹칠 경우 과거 퀸즈 파크 레인저스처럼 고주급 베테랑들만 가득한 최하위권 구단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김도균 감독에게 적절한 지원과 환경 제공에 앞장서며 파이널A 진출을 거의 확정 지을 정도로 잘 나가면서 이러한 영입 전략도 성공으로 귀결되는 모양새. 여름 이적시장에서는 빅터를 내보내고 라클란 잭슨을 영입했는데, 잭슨이 팀에 빠르게 녹아들고 맹활약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결국 창단 이래 첫 번째 파이널A 진입이라는 대성과를 써내는데 성공했다. 또한 이 기록은 2013년 K리그 승강제 도입 후 K리그2에서 창단한 구단 중 최초로 파이널A 진출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며 수원 FC의 황금기를 연 단장이라고 추대받고 있다.

그런데 2022시즌을 앞둔 2021년 12월 28일, 갑자기 수원월드컵경기장수원 삼성 블루윙즈와 공유해서 사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두 수원팀 팬들에게 뜨거운 비판을 받았다.

그래도 2022시즌 전 이승우라는 초대형 스타를 계약한데 이어 기존 주축들인 라스, 박주호, 김건웅 등을 지켜내며 전력적으로 강한 전력을 구축하는데 기여했다. 비록 팀이 5월까지 부진하며 하위권에 머물러 있었지만 중반기 이승우가 완벽히 부활하며 연속 득점을 기록해 연승행진을 이어갔다. 게다가 국가대표팀 우측 풀백 이용을 영입하며 더욱 강한 전력을 구축하는데 기여했다.

또한 올 시즌을 앞두고 구단이 수원도시공사 여자축구단을 인수하며 국내 프로축구단 최초로 남녀 축구팀을 운영하는 모범적인 구단이 됐고, 김호곤 역시 국내 최초 남녀팀을 동시에 단장으로서 역임하는 축구인이 됐다. 구단이 해당 팀을 인수하며 수원 FC 위민으로 이름을 바꿨고, 김단장은 직접 여름에 지소연의 영입도 성공시키며 남자팀에 이승우, 여자팀에 지소연이라는 최고의 인지도를 가진 두 선수를 보유하는데 기여했다.

결국 수원 FC 남자팀은 안정적인 성적으로 파이널B에서 1위를 기록하며 2년 연속 잔류에 성공했고 여자팀도 전국체전 우승을 거머쥐는 등 경기 내외적으로 성공적인 황금기를 구축하는데 일등 공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러한 엄청난 성과에 김도균 감독은 이미 2022년 9월까지 구단과 재계약을 마쳤지만, 임기 마지막 해인 2022년 가을에도 김호곤 단장의 재계약 소식은 지지부진하다. 그 이유로 축구계에선 2022년 6월 지방선거에 따라 구단주인 수원시장이 바뀌었고, 그의 선거 운동을 도왔던 한 축구인이 수원FC 단장직에 오를 것이라는 소식이 파다하다. 심지어 구단 내부 결재 절차 뿐만 아니라 수원시 체육회가 앞장서 김호곤의 연임을 바라고 있지만, 시즌이 끝나가는 이 시점에도 여전히 감감 무소식이다.

이러한 상황 속 리얼크루를 비롯한 수원FC 팬들은 2022년 10월 12일 성남과의 홈경기에서 김호곤 단장의 재계약을 바라는 걸개를 걸며 김호곤을 지지하고 있지만, 정계와 밀접하게 운영되는 시민구단의 특성상 김호곤의 퇴직은 불보듯 뻔하다. # #

결국 2022년 11월 10일 단장직에서 사퇴하였다.

5. 기타



[1] 석사 학위 논문: 축구 장거리 킥킹(Kicking) 동작의 운동학적 비교분석 : 잔디와 맨땅에서의 킥킹동작 유형 비교(1991)[2] 체육학과(71학번) 출신이다.[3] FIFA 공인 기록 (117경기)[4] 15개팀 본선 진출 대회[5] 대한민국은 1966월드컵 당시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 합동예선에서 북한에 패할까봐 아예 기권을 했다.[6] 당시 대회는 15개팀이 본선에 진출하여 15강 조별리그 다음 8강 조별리그로 각 조 1위만 결승행, 각 조 2위는 동메달전으로 갔다.[7] 참고로 히딩크호에서 코치를 했던 박항서 현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주로 충무팀에 있었다.[8] 김정남 감독 밑에서 국가대표 코치를 맡은 기간도 포함[9] 후임 감독인 움베르투 코엘류를 선임한 것은 2003년 1월이다. 참고로 이 경기가 황선홍, 홍명보의 대표팀 은퇴 경기였다.[10] 프랜차이즈 스타'급'인 이유는 현영민이 울산 출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울산에서 오래 뛰었을 뿐. 김호곤은 서울에 현영민을 내주면서 김치곤은 물론이고, 프랜차이즈 스타로 내세울 울산 출신 미드필더 한태유를 데려오고 싶어했지만 이는 무산되었다.[11] 극단적인 예를 들면 이렇다. 1승(3:0) 2패(0:1 0:1)와 3무(0:0 0:0 0:0)를 거둔 팀은 승점이 3점으로 같지만, 득실차를 따졌을 때 한 번도 안 진 팀(±0)이 두 번 진 팀(+1)보다 순위가 하위로 쳐지는 결과가 나온다.[12] 조편성의 어려움 및 주전 선수들의 잇단 부상이탈로 인해 당시 대표팀은 보나마나 3패, 아주아주 잘하더라도 겨우 1무2패나 할 것으로 예상되던 상황이었다. 근데 김호곤의 랜드마크인 철퇴축구 전술로 클린스만과 슈틸리케의 조국인 독일을 궁예처럼 때려팼다(...)[13] 여담으로월드컵 직후 축사국 회원인 유재호(정치인)김학범호황의조 와일드카드 선발을 두고 "인맥축구는 계속됩니다"라며 전형적인 축알못 FC코리아스러운 저급한 비판을 제기했다가, 아시안게임에서 황의조가 대표팀을 하드캐리하여 금메달을 안겨주는 결말로 이어짐에 따라 축구계에서 축사국의 취급은 한층 더 처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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