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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22:39:09

권악징선

신조어
권할 악할 징계할 착할
1. 개요2. 실태
2.1. 현실론2.2. 비판론
3. 권악징선이 대두되는 이유4. 미디어에서의 권악징선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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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악징선(勸惡懲善)은 한자성어인 '권선징악'을 뒤집은 신조어로서, 풀이하면 "악한 것을 권하고, 선한 것을 징벌한다."로 볼 수 있다.

2. 실태

2.1. 현실론

或擇地而蹈之, 時然後出言, 行不由徑, 非公正不發憤, 而遇禍災者, 不可勝數也。余甚惑焉, 儻所謂天道, 是邪非邪?
발을 내 딛을 때는 조심해서 마른 땅만을 고르고, 말할 때는 몇 번이고 생각한 다음에 행하고, 길을 갈 때는 지름길을 택하지 않으며, 공명정대하지 않은 일에는 결코 행하지 않는 사람이 오히려 화를 입는 경우가 말할 수 없이 많이 있다.
나는 이것을 참으로 이해하지 못하겠으니, 이것을 하늘의 도리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사마천, 《사기 - 백이열전》[1]
현실에서 악인이 득세하고 선인이 피해를 보는 일은 결과가 어떻든 간에 매우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오히려 동화 속 권선징악의 이야기야말로 이런 현실에 분노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2] 아무리 선을 베풀더라도 감사나 보상은 커녕 무시당하거나 불이익을 얻는 것은 인간 사회의 부정적인 단면이다. 심한 경우에는 선의로 한 행동에 대해 수혜자가 외려 보상을 요구하기도 한다. 소방관이 화재 진압 중 세간살이를 파손했다며 집주인이 소송을 거는 경우나 심정지 상태의 사람을 심폐소생술로 살려내자 늑골이 골절되었다거나 성추행을 당했다고 소송을 거는 경우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3] 심지어 뺑소니 피해자들은 자신을 구해준 운전자를 뺑소니범으로 몰아붙이는 경우도 적잖게 있다고 한다.[4]

이보다는 덜 심한 경우지만 매우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례로는 잘한 만큼 손해보는 경우. 예를 들어 맡은 업무를 효율적으로[5] 해내는 사람은 앞으로 당연히 그런 성과를 낼 것이 요구되는 경우가 많으며, 향후 남보다 점점 많은 업무를 떠맡게 되는 경우도 많다. 특히 유지보수 관련 직종은 일을 잘 하면 할수록 눈에 뜨이지 않기 때문에 부서 예산이나 인사고과 등에서 부당한 불이익을 받기도 한다.[6]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실정법은 자력구제, 즉 스스로의 힘으로 위기상황을 타파하거나 그런 상황에 처한 이를 돕는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다. 즉 나서지 말고 경찰 부르라는 것. 이런 상황을 목격하고 경찰을 부르면 상황이 모두 끝난 뒤에나 경찰이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니, 이는 "일단 당해라. 범인은 잡아주겠다. 아마도"란 의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용감하게 뛰어들어 인명을 구하는 경우, 신문 등에 '용감한 시민'으로 잠깐 얼굴이 나오지만 실제로는 많은 불이익이 기다리고 있다.

자력구제 과정에서 본인이 입은 손상은 의료보험 적용이 일체 안 되므로 모두 자비로 치료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범인이 입은 손상에 대해 범인이 민사소송, 심하면 형사 고소를 하기도 하며 더 심하면 보복범죄를 가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당신이 구해준 피해자가 이런저런 이유로 당신에게 소송을 거는 일도 있다.

심지어 저것들은 애교인 편이다. 세상에는 교활하고 약삭빠른 자가 더러운 수로 땀 흘려 일한 자들의 공로를 가로채 그들을 일순간에 남 좋으라고 헛수고나 한 호구로 만들어 버릴 뿐만 아니라 심하게는 그들의 인생까지 하루아침에 망쳐버리게 하는 경우가 다반사로 일어난다. 인간관계에서 남을 함부로 돕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남을 함부로 도왔다가 도움받은 사람이 도와준 사람 배신해서, 괜히 남 좋을 일만 한 나만 등신 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 부지기수. 이는 아무리 가족조차도 예외가 아닌지라 이권 앞에선 의리고 뭐고 없이 아무렇지 않게 인륜을 저버리거나 배신해 버리는 모습이 흔하다.

거기다가 남을 잘 등쳐먹는 악인들이 처세술까지 뛰어나면 그야말로 세상 무서울 게 없다. 자신이 가진 뛰어난 안목을 이용해 권력을 쥐거나 아니면 권력자를 빽으로 둬서 온갖 비호를 받으면 권력자의 눈 밖에 나지 않는 한 그들이 무슨 악행을 저지르건 도저히 막을 길이 없다. 약자는 강자에게 항상 억압되고, 강자는 약자를 억압하며, 약자는 자기보다 더한 약자를 상대로 똑같이 억압과 갑질을 행사하는 순환이 곧 자연의 섭리와도 같은 인간 사회는 예나 지금이나 힘의 논리가 절대적이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돈 많고 힘있으면 왠만한 죄는 다 용서된다는 법칙이 통한다. 온갖 부정적인 방법이라도 통해 어떻게든 권력자에게 달라붙거나 권력을 쥔 악인들을 몰아내는 것은 일반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간혹 약자들이 힘을 모아 강자들을 몰아내는 경우는 역사에 손에 꼽힐 극히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경우다. 그렇다고 약자들이 마냥 선량하다고 할 수는 없다. 가난하고 가진 게 적을수록 각종 범죄의 유혹에 빠져들기 쉬워서이기도 하고,[7] 약자들이 강자들처럼 힘이 있었다면 똑같이 부정과 갑질을 행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그러니까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더 훨씬 냉혹하고 잔인하다. 악하고 똑똑한 자들이 약삭빠르게 어부지리를 시전하면서 이득을 취하면서 착하고 멍청한 호구들은 거기에 늘 당하면서 손해만 보는 것이 곧 현실이다. 악하면서도 현명하게 살아야 남들보다 더 배부르고 부유하게 살면서 성공할 확률이 높아지고 타고난 천성이 착할지언정 멍청한 호구가 되지는 말라는 소리다. 또한 정의로운 일을 행한 사람은 결국 불행하고 고달프다. 그래서 선행, 특히 그 중 부조리에 관련된 폭로, 고발을 대부분 실천하지 않는 이유는 자신이 한 선행으로 인해 덤터기를 쓰거나 온갖 불이익을 맞는 불상사만이 되돌아온다는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알기 때문이고 사회에 만연한 어른의 사정과 온갖 부조리를 알고서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게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여기에는 문제 의식조차 전혀 없다. 사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은 본성이 악하다기보단 고도로 지능화되어 있고 사회적인 생물이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탄압하거나 억압하고 노예처럼 부려먹기도 하는 것이며 사실 선과 악이라는 것도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라 구체적이고 명확한 기준이 없어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게 애매하다. 그래서 창작물에서는 이런 인간의 단점만을 부과시켜서 만악의 근원처럼 묘사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리고 현대에도 인류는 주기적으로 흑역사를 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반론을 하기도 어렵다.

대부분의 범법자들이 교도소로 향하는 건 사실이다. 정치인이나 재벌이라도 너무 일을 크게 벌이면 실형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제대로 파멸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 힘 있고 권력 있는 자들은 교도소에 끌려가도 사회에서의 입지로 호의호식하고 여론이 잠잠해지기 무섭게 보석, 가석방, 특사 등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재벌들과 정치인들 중 실형을 받은 자들 가운데 죗값을 끝까지 다 치르고 나오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아무리 악을 저질러도 돈 있고 빽 있으면 교도소에 끌려갈 확률은 확연히 낮거니와 실제로 끌려가더라도 시간 좀 죽이다가 여론 잠잠해지면 형기를 채우지도 않고 슬그머니 나오는 게 가능하단 것이다. 어느 정도 이상의 권력을 가졌다면 악행을 해서 더 큰 돈과 권력을 얻는 건 안전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어차피 재판에 끌려나가 봐야 여론을 뒤집을 만큼 큰 일이 아닌 이상 솜방망이일 뿐이고 뒤집혔더라도 가라앉기만 하면 아무 일도 없었단 듯이 행세하며 오히려 내부고발자나 피해자가 보상도 못 받고 보복을 당해 죽거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 허나 그렇다고 법으로 안 된다고 피해자가 사적제재를 했다간 힘 있는 가해자와는 달리 일반인이거나 약자일 가능성이 높은 피해자는 오히려 감형도 가석방도 없이 일반 범죄자들과 똑같거나 심하면 가해자 측의 빽으로 더 엄하게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즉, 법도 결과적/실질적으로는 약자보다 강자에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즉 일정 이상 권력이 있고 돈이 있다면 권악징선은 사회 자체가 조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권악징선의 악역들은 편가르기와 인맥과 자기편을 많이 확보하여 자신을 복수하려는 자가 복수에 성공했어도 악역이 아끼고 총애하는 자들이 또 보복범죄를 저지른다. 막장 드라마 같은 경우 자기 밖에 모르는 성격 탓에 몰락하여 감옥에 가지만, 현실의 권악징선류의 악역은 권력자들의 인맥과 약점을 쥐어잡아 솜방망이 처벌이나 자신이 형을 받으면 또다른 암살자를 사주하여 주인공을 암살하는 치밀한 인간이다. 이런 케이스의 역사상 성공한 간신이나 악역들은 어느 정도의 처세술과 정치적 능력과 편가르기를 통해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악인이 늘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주장이 있지만, 반대로 꼭 실패한 악만 있는 것도 아니며, 선인 역시 늘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 수 있다. 실패한 악행은 그 사람의 인생을 끝낼 수도 있지만, 성공한 악행은 정상적으로 얻을 수 없는, 막대한 이득을 가져다준다. 그렇기에 도덕적 판단은 빼놓고 생각할 때 리스크가 적은 사람[8]은 밑져야 본전 심정으로 악행을 통해 삶을 바꿔보는 것을 시도할 법 하다. 이렇듯 대게 사회가 불안정하거나 계급이 고착화된 경우에는 빈민층에 권악징선이 강제 되는 편이라 범죄율이 높게 나오는데, 이런 사회의 지배층은 구조적 문제를 덮기 위해 악행을 개인의 도덕성 문제로 치부하며 엄벌주의로 일관하고 권선징악을 표면상 주창하며 지배수단으로 활용하는 위선적인 모습을 보인다. 특히 종교와 결부되어 선행의 정의를 지배층 입맛대로 재단할 경우는 최악으로, 누굴 위한 권선징악이냐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모순된 사회가 만들어지는 폐단이 있다. 결국 안정되고 평등한 사회일수록 온정주의/교정주의와 권선징악이 득세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엄벌주의와 권악징선이 득세하는 편이다.

물론 이런 이유들에도 불구하고 대놓고 악행을 하라며 권악징선을 긍정하는 것은 정상사회에선 생각하기 어렵고 바람직하다고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선징악을 긍정해야 한다는 담론이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다. '선'이라고 규정된 법과 제도들이 '악'하지 않다는 보장도 없고, 악인들 중에선 이런 법과 제도를 오히려 이용해 악행을 정당화하거나 처벌을 회피하는 등 성공한 악인이 되는 경우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선악개념 자체를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등 주관적 요소가 강한 도덕개념을 개인이나 사회 단위로 강요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도 성찰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는 사람이 아무래도 특별한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자신과 자신의 입장을 중시하는 편이라 다수가 다수를 내심 선으로 봐서 권악징선처럼 보일 뿐, 진실은 권악징악[9]이거나 권악징선이 아닌 경우도 많다. 실제로도 다수에게 편견을 받는 고아들보다 일반적인 부모들을 가진 사람들이 통계나 확률적으로는 더 불행한 인생[10]을 살 수도 있다. 일반인 부모를 선으로 보면 고아보다 범죄자가 될 가능성이 높게 나오는 현실이 권악징선이겠으나, 일반인 부모가 진실로는 딱히 선이 아니라면 딱히 권악징선이 아니다.

약자를 선으로 봐서 생기는 문제[11]도 있다. 착한 사람이 착한 것이지 약하다고 착한 게 절대 아니다. 대표적으로 범죄 피해자가 착하다고 인식되는 게 그 예시라고 할 수 있는데 범죄는 인품과 상관 없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지, 착한 사람만 당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합법적인 처벌이 가능함에도 불법적인 복수를 하거나 범죄 피해와는 별개로 피해자 본인은 이후에 전혀 무관한 다른 사건의 가해자가 되는 경우도 있어서 어디 까지나 피해자일 뿐, 인성 자체는 가해자들과 그리 다르지 않거나 더 악한 경우도 있다. 누구한테 폭력이나 절도를 당했다고 해서 그 피해자는 다른 사건에서 가해자들이 했던 짓을 안할 거란 보장은 없고 똑같은 악행이나 범죄를 당한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거나 도와준다는 보장도 없으며, 일부 학교폭력 피해자들이 자기가 당한 것은 잘 기억하고 분노하지만, 정작 다른 사람이 학교폭력이나 왕따를 당하는 것을 보고도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가해자를 돕거나 방관하고, 심지어 본인이 직접 가해자가 되기도 하는 등, 자신을 괴롭혔던 가해자와 방관자들과 다를 게 없는 악행을 똑같이 저지르는 것도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본래는 선하거나 평범했다가 불우한 과거로 인해 타락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특별히 타락한 건 아님에도 단순히 개인의 재미나 쾌락 또는 다른 이득을 위해 가해자나 범죄자가 되기도 한다.

약자가 어떤 상황에선 나쁜 쪽으로 매우 유리하다. 여자나 노인, 장애인, 아동처럼 비교적 약해보이는 사람과 남자나 비장애인처럼 강해보이는 사람이 싸우고 있으면 보통 제3자들은 약자의 편을 들고 강자를 가해자로 의심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래서 꽃뱀처럼 일부 교활한 약자들은 '약자=피해자'라는 인식을 악용하여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어서 합의금을 뜯어가기도 하며 촉법소년이나 정신장애인, 발달장애인처럼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악용하는 약자도 많다.

그리고 범죄 피해자나 주변인들의 주장도 100% 사실은 아닐 수도 있는 게 가해자를 최대한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서 더 강하게 처벌하거나 합의금을 많이 받기 위해 아니면 가해자를 욕하고 싶은데 비난할 내용이 부족해서 멋대로 없는 일을 지어내거나 원래 잘못한 것보다 과장 시키는 등 왜곡된 주장을 하는 경우도 일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은 진짜로 당한 것만 이야기하겠지만, 모든 피해자가 사실만 이야기한다는 보장은 없으므로 제대로 된 증거가 있을 때에만 믿어야 되며, 또한 쌍방이 잘못했거나 오히려 피해자 측이 먼저 잘못해서 자기 잘못을 숨기고 상대편만 나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과장 신고를 하기도 한다.

이렇듯 강약과 선악은 완전히 별개의 영역임에도 불구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약자에 대한 비판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데, 사회적으로 "약자 = 온정의 대상"이고 이런 약자에 대한 비판을 했다간 차별주의자로 몰려 마녀사냥을 당하기 일쑤이므로 이러한 문제를 다들 쉬쉬하고 있다. 오프라인은 물론,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약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무지성 온정주의가 판을 친다. 나무위키에서도 많이 보이며, 정당한 비판을 하는 유저를 반달이라 매도하면서 악의적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2.2. 비판론

권세를 오래 누리고 싶으면 내 말을 명심하세요. 권좌에 앉아있는 사람은 딱 한 사람만 다스리면 됩니다. 자기 자신.[12]
이인임, 드라마 정도전
옛 사람들이 현실을 몰라서 권선징악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법률, 윤리, 도덕, 사회 규범, 우화를 비롯한 창작물 등등에서 권선징악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선한 자가 피해를 보고 악한 자가 득세하는 현실에 맞서 싸우기 위한 것이다. 즉 현실이 권악징선적이기 때문에 권선징악이 그 안티테제로 강조된 것이다.

현실적으로 선행이 항상 좋은 결과를 보장하지는 않지만, 마찬가지로 악행이 좋은 결과로 나타나는 것도 흔하고 멀쩡한 일이 아니다. 악행은 당장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불이익을 감수하는 제 살 깎아먹기에 가깝기 때문이다. 실제로 다수의 사람들은 악행에 대해 분노하는 데다가, 재제의 강도가 다를지언정 법은 기본적으로 악행을 제재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사회와 시대의 상태에 따라 제재를 피해 남의 살 깎아먹기로 부당이득을 취하거나, 형식적으로 가벼운 징계만을 받고 떵떵거리며 사는 악인이 여전히 존재함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악인과 악행은 지속적으로 사법 기관이 찾아내서 처벌하고 차단해야 할 문제이지 방관하거나 장려할 일이 결코 아니다. 가령 질병이나 쓰레기는 항상 발생하고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치료를 포기하거나 쓰레기를 그냥 방치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또한, 권악징선의 근본적 한계는 '지속가능성의 부재'이다. 대표적인 악행인 약탈이나 도둑질 같은 범죄는 선한 사람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벌어놓은 자원이 통용되는 정상사회에서만 가능하다. 약탈자가 만연함에도 징벌되지 않는 사회라면 생산자들은 씨가 마르고 결국 약탈자만 넘쳐 순서의 차이가 있을 뿐 다같이 망하게 될 것이다. 굳이 노골적인 갈취범죄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악행은 근본적으로 체제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스스로의 기반을 무너트리는 자멸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을 더욱더 확실하게 설명해주는 것이 토마스 홉스의 저서 리바이어던의 사회계약론이다. 제아무리 강한 깡패나 무법자, 혹은 굉장히 교활한 사기꾼들도 결국 개인 혼자만으로는 살아갈수가 없다. 만약 이런 인물들이 아프리카 사바나 같은 야생 상태의 지역 혹은 총탄이 난무하는 전쟁터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다면 이들도 파멸하지만 여러 인물들이 있는 사회에 소속되면 이들도 생존이 가능하다. 즉, 이들도 결국 개인으로서 굉장히 취약하며 기본적으로 사회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존재들이다. 즉, 사회의 보호를 받는 조건에 이들도 노동이나 재산의 납부(세금)의 형태로 사회에 기여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다.

사회에 부정부패가 넘치고 법이 유명무실하다면 필연적으로 그 사회는 유지될 수 없고 몰락하게 되어 있다. 악행으로 부당이득을 취해서 일시적으론 호의호식할 수 있을지언정 내버려두면 사회를 지탱하는 근간인 신뢰를 갉아먹어 공멸을 야기하기에 지속될 수 없다. 즉 권악징선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를 만드는 근시안적인 이기주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파국을 막고자 사람들은 악행을 징벌하고 선행을 권하며 공생하고자 사회를 구성해온 것이다. 이렇듯 사회의 근본 취지에 도전하는 권악징선은 반사회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정당화될 수 없다. 따라서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선 여러 모순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권선징악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단, 여기에는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따른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알 수 없는 극단적 상황에 놓인 인간은 야생상태로 전락했기에 동물적 본능에 충실할 수밖에 없고 선악개념을 적용할 수 없으므로 도덕적 판단이 무의미하다. 선과 악의 상대성은 회의론자들의 주요한 논거지만, 선만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악도 상대적이기에 권악징선이 권선징악에 비해 타당하다고 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결국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는 당대 인류의 총의에 기초한 보편윤리에 따라 국가(집단)별 실정에 맞는 법과 제도로 규정되는 것이다.

한편, 역사 속 어떤 인물이나 집단이 당시에는 악행이 아니지만 오늘날엔 악행인 행위를 했다면 당시 시대 상황과 도덕 기준을 고려해서 복합적으로 판단해야지, 억지로 현대로 끌고 와 "이 사례는 악행임에도 당시에 징벌되지 않고 오히려 잘 나갔다! 그러므로 권악징선이 옳다!"는 식의 주장을 펴는 것은 시대적 맥락을 무시한 비약이다.

3. 권악징선이 대두되는 이유

단순한 자조나 풍자를 넘어 권악징선을 인정하거나 심지어 긍정하는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 배경으로는 사법불신, 인간 비판, 도와주고 누명쓰기, 강도 귀족 같은 이유들을 유추해볼 수 있다.
Some men just wanna watch the world burn.
"어떤 사람들은 그저 세상이 불타는 게 보고 싶을 뿐입니다."
알프레드 페니워스브루스 웨인에게
순수하게 을 지지하기도 하는데, 이는 자연에서 격차와 억압은 당연하고 오히려 약한 것이 죄라는 인식, 질서를 부정하고 자기 내키는 대로 악행을 저지르는 충동, 진정한 정의는 악이며 선은 불의를 부른다는 믿음 등 여러 요인에서 기인하며, 적극적으로 악을 추구하는 경우부터 악에 대한 자각조차 없는 경우까지 그 범주도 다양하다.

염세주의를 권악징선과 동일시하는 경우도 있지만 엄연히 다른 개념이다. 염세주의자는 세상과 인간을 본질적으로 비참하다고 보며 윤리관 자체를 무가치하다고 생각하기에 딱히 선을 추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불필요하게 악을 행하지도 않는다.[13] 염세적 태도가 세상에 대하는 절망과 혐오로 이어져 자기파괴적 악행을 야기할 순 있으나 이 경우도 자포자기식 자멸 행위일 뿐, 악을 긍정하고 선은 부정한다는 가치판단에 따른 것은 아니다.#

4. 미디어에서의 권악징선

이 분야의 고전은 마르키 드 사드가 집필한 두 권의 소설인 '쥐스틴, 또는 미덕의 불행'과 '쥘리에트, 혹은 악덕의 번영'이다. 쥐스틴과 쥘리에트는 자매인데, 선한 여동생 쥐스틴은 평생을 불행하게 살다가 벼락을 맞아 죽는다. 반면 타락하고 악한 언니 쥘리에트는 평생을 행복하게 산다.[14]

대다수의 범죄물, 하이스트물은 권악징선의 메시지를 띄는 것처럼 보이나 이는 장르적 특성에 불과하므로 권악징선의 예시로 꼽는 것은 부적절하다. 액션물에서 총기 사용이 빈번하다고 총기 규제 철폐가 메시지가 아닌 것과 같다.

인도를 배경으로 한 영화 화이트 타이거는 '달라이 신분의 사람들은 범죄같은 '악'을 거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인도 신분제의 암울한 현실을 담아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도 뺑소니를 일으킨 여주인공이 아무런 처벌 없이 죄를 뒤집어씌우고 남편과 잠적하는 결말을 보여주며 씁쓸한 결말을 보여주기도 했다.

2023년 개봉된 영화 서울의 봄(영화)도 흔한 미디어들과는 달리, 참군인들이었던 진압군 군인들은 비참한 결말을 맞고 군사 반란에 성공한 신군부 일당이 권력 요직을 장악하여 잘 먹고 잘 살았다는 있는 현실 그대로의 역사적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천만 관객을 동원할만큼 큰 성공을 거두었다.

5. 관련 문서


[1] 도척은 천수를 누렸으나 백이와 숙제, 안연 등이 굶어죽은 것에 한탄하며 남긴 말.[2] 각종 매체의 픽션에서 도덕적으로 옳은 행동이자 당연히 행해져야 하는 사상이나 신념들, 그 외에 교훈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다루는 이유 중 하나다. 현실에선 그것들이 그만큼 일어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착하게 살면서 남에게 속아 넘어가서 농락 당하는 삶을 살지는 말아야 한다.[3] 위 모든 사례들은 실제 우리나라에서 종종 발생했고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사례들이다. 시간이 지날 수록 이러한 일이 계속 생기고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급기야는 진짜 위급한 상황인데도 모른 척하는 사례도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4] 아닌 줄 알면서도 자신의 피해를 달리 보상받을 길이 없기에 이리 한다고 한다. 이런 경우 절대 애먼 사람 잡지 말고 자동차보험에 따라 적법한 보상을 받도록 하자. 본인이나 가족(부모, 배우자, 자녀)이 가입한 자동차보험에 무보험자동차상해 항목이 있으면 보상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요즘은 길에 CCTV도 많고 상당히 많은 차량에 블랙박스가 장착되어 있어서 엉뚱한 사람을 뺑소니로 신고했다가는 되려 무고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 불쌍한 피해자에서 인간 말종 가해자로 뒤바뀌는 것은 순식간이다. 게다가 넓게 보면 진짜로 뺑소니 피해자가 되었는데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는 경우도 생기는 악순환에 돌입한다.[5] 적은 비용, 적은 시간을 들여 하는 경우. 이는 이후 열정 페이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6] 예: "그거 고장나는 거 한 번도 못 봤는데, 필요없는 부서 아냐?"[7] 범죄조직은 실제로 가난한 계층이 돈 좀 만지고자 결성된 경우가 많다.[8] 가령 상습 전과자나 노숙자 같이 스스로의 인생이 이미 끝났다고 생각하는 경우.[9] 남들을 짓밟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도 딱히 성인군자가 될 생각이 없거나 호구처럼 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10] https://www.youtube.com/watch?v=Zs48ov7lzFk[11] 삼국지의 유비나 전국시대의 오다 우지하루나 필요 이상으로 약자들을 도왔으나 그 약자들이 그렇게까지 도움이 되지 않아서 결과가 그리 좋지 않았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제대로 은혜를 갚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정신장애가 있는 범죄자의 경우 상류층이 인구 대비로도 나머지 비상류층보다 훨씬 낫다. https://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35&tblId=DT_13501N_A116&vw_cd=MT_ZTITLE&list_id=135_13501_9&seqNo=&lang_mode=ko&language=kor&obj_var_id=&itm_id=&conn_path=MT_ZTITLE[12] 악행을 저질러 이득을 보는 것도 외줄타기를 잘 해야지 그냥 한없이 악하기만 해서는 파멸한다는 경고다. 임견미가 이를 이해하지 못하자, 하륜은 "적당히 해 드시라는 뜻입니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알려줬다. 실제로 권력에 취해 자기절제를 못해 파멸한 권신이 한둘도 아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다.[13] 철학자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는 인간과 세상은 욕망에 구속되어 조건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일 뿐이라며, 인간이 무가치하고 고통의 연속인 삶에서 도피하는 방법으로 윤리학과 미학을 제시했다. 이에 따르면 권선징악은 욕망을 부정하는 도피책이고 권악징선은 욕망에 굴복하는 도피책일 뿐이다.[14] 어느 정도로 타락했냐면, 임산부를 불에 태워죽이거나 마을 사람들을 독으로 몰살시키고 자기 딸을 죽여 그 인육을 먹는 등 말 그대로 악의 화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