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구리시
구리시 행정구역 변천사 | ||||||||
양주군 구지면 (楊州郡 南部 九旨面, 1894) | → | 양주군 구리면 (九里面, 1914) | → | 양주군 구리면 | → | (남)양주군 구리읍 (九里邑, 1973) | → | 구리시 (九里市, 1986) |
양주군 망우리면 (楊州郡 南部 忘憂里面, 1894)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東大門區, 1963) | 서울특별시 중랑구 (中浪區, 1988) |
1. 고대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고리국(古離國) 또는 모수국(牟水國)으로 비정된다. 이병도는 진접읍 일대의 고구려대 지명인 골의노현(骨衣奴縣) 중 "골의"가 "고리"와 발음이 유사함과 광개토대왕릉비의 정벌한 백제의 성 목록에 아단성 다음에 위치한 점을 들어 고리국으로, 천관우는 양주지역의 고구려대 지명인 매성현(買省縣) 중 "매성"이 "모수"와 발음이 유사함을 들어 모수국으로 비정하였다.2. 삼국
삼국사기 백제 책계왕(286~297) 1년 기사[1]를 통해 286년에 백제의 영토로, 고구려와의 최전선 국경지역이자 수도의 방위를 위한 마지노선의 기능을 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는 영락(永樂) 6년(396년)에 백잔(百殘)을 공격해 아단성 및 고리성을 수취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고구려의 땅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삼국사기 백제 개로왕(455~475) 21년 기사[2][3]를 보면, 이 이전에 아차성 부근은 이미 백제의 땅이 되었으며 475년에 장수왕에 의해 고구려의 땅이 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고구려는 진접읍 일대의 땅을 한산주(漢山州) 북한산군(北漢山郡) 골의노현(骨衣奴縣)으로 명명하였고, 구리시 일대도 이에 속했다고 추정한다.
그 다음 기록은 삼국사기 열전 온달에서 온달의 전사(戰死)부분[4]이 평원왕의 승하년의 기록임을 고려하면, 590년에 이미 아단성 부근에 신라군이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신라 진흥왕 14년(553)의 한강 하류지역 공격때에 이 지역의 소유권이 이미 신라로 넘어갔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 후에 신라와 고구려가 이 지역에서 자주 충돌하다가, 장한성 부근에서 고구려군을 격퇴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는데, 이 장한성을 아차산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이 때 신라의 영토로 굳어진 시기를 신라의 북한산주(北漢山州)가 세워진 신라 진평왕 26년(604)으로 간주한다.
삼국사기 잡지 중에 신라의 경덕왕이 고구려의 골의노현(骨宜盧縣)을 황양현(荒壤縣)으로 개명하였음이 기록되어있다. 경덕왕이 16년(757)에 군현의 이름을 개명할 때의 일로 추정된다. 아차산의 발굴조사 결과 6세기 후반~9세기 중반의 신라 토기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3. 고려
그 후 삼국사기 궁예전에 처음으로 양주와 견주의 기록[5]이 나오고, 이후 고려사에는 견훤에게 양주를 하사한 기록[6]이 등장한다. 이후 고려의 사료에서 구리 지역에 대한 기록이 따로 등장하지 않는다.4. 조선
그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1530년에 작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드디어 구지(龜旨)와 망우리(忘憂里)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구지의 어원에는 한강과 왕숙천이 맞대고 있는 뾰족한 형상이 곶과 같다고 하여 '곶이'라 불렸는데, 이후 고지→구지로 변하였다는 해석이 존재한다[7]. 한자 표기는 음차이며 원래 전자(龜)를 쓰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조선 후기로 오면서 후자(九)도 널리 쓰이게 된 것. 비슷한 사례로는 안산시의 고잔동(곶 안→고잔)을 들 수 있다.규장각 출판의 호구총수(戶口總數)에서는 18세기 중반 양주목 소속의 34개 면面과 140개 리里를 볼 수 있는데, 이 때 구지면에 일패리창리一牌里倉里, 이·삼·사패리二·三四牌里가 존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 숙종 28년(1701) 1월 11일 기록에서는 희빈 장씨의 묘소를 정하기 위한 계啓에서 인장리仁章里의 존재를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고[8][9], 고종 3년(1866) 9월 4일 기록에서는 동창리(東倉里)와 사노리(四老里)의 존재를[10], 고종 11년(1874) 2월 11일 기록에서 구지면에 세교리(細橋里)의 존재를 볼 수 있고, 고종 13년(1876) 5월 6일 기록에서는 대교리(大橋里)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1871년 간행된 경기읍지의 지도에서 구지면(九旨面)의 표기를 처음 확인할 수 있고, 고종 28년(1891) 5월 8일 승정원일기에서 역시 구지면(九旨面)의 표기가 있었다.
1880년에 발행된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서는 벌리伐里, 토막리(土幕里)의 존재를 볼 수 있다. 승정원일기 순종 4년(1910) 3월 4일 기록에서는 평촌리坪村里가 추가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위의 벌리(벌판 마을, 벌말)를 평촌리의 기원으로 본다.
1908년 1월 29일에 수택리水澤里에서 김규식이 이끄는 13도 연합의병진이 일본군과 전투한 기록에서 수택리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5. 일제강점기
부군면 통폐합 | |||||||||||
1912년 | 사노리 四老里 | 인장리 仁章里 | 동창리 東倉里 | 백교리 白橋里 | 이문리 里門里 | 수택리 水澤里 | 토막리 土幕里 | 평촌리 坪村里 | 아차동 峨嵯洞 | 우미천리 牛尾川里 | |
1914년 | 갈매리 葛梅里 | 인창리 仁倉里 | 교문리 橋門里 | 토평리 土坪里 | 아천리 峨川里 |
1912년 발간된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에는 양주군에 편제된 32개면이 나오는데, 그 중 구지면은 사노리(四老里), 동창리(東倉里), 인장리(仁章里), 백교리(白橋里), 이문리(里門里), 수택리(水澤里), 평촌리(坪村里), 토막리(土幕里), 아차동(峨嵯洞), 우미천리(牛尾川里)의 10개 리로 구성되어있음을 볼 수 있다. 그 후 일제강점기 초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의 대대적인 전국 행정구역 개편으로 구지면(九旨面, 현 구리시)과 옆 망우리면(忘憂里面, 현 서울특별시 중랑구, 단 구한말에 한성부 성저십리로 편입된 면목동은 제외)을 통폐합해 구리면(九里面)이 설치되었다[11][12].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에서는 이 때 지명의 변화를 볼 수 있는데, 인장리(仁章里)와 동창리(東倉里)를 합쳐 인창리(仁倉里)를[13], 토막리(土幕里)와 평촌리(坪村里), 그리고 미음면의 석도리(石島里)를 합쳐 토평리(土坪里)를, 수택리(水澤里)와 평촌리(坪村里)를 합쳐 수택리(水澤里)를, 백교리(白橋里)와 이문리(里門里)를 합쳐 교문리(橋門里)를[14][15], 아차동(峨嵯洞)과 우미천리(牛尾川里)를 합쳐 아천리(峨川里)를, 노원면 장기리(墻基里)를 바꾸어 갈매리(葛梅里)를 만들었으며[16], 묵동리(墨洞里), 중하리(中下里), 상봉리(上鳳里), 신내리(新內里), 망우리(忘憂里)를 구리면으로 편입하였다.
다이쇼 15년(1926년)에 제작된 지도에서 이 당시의 지명과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http://db.history.go.kr/item/imageViewer.do?levelId=jnm_017_0010_0150
6. 현대
그러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의 시역 확장으로 옛 망우리면 일대가 동대문구에 편입되었는데, 이게 지금의 중랑구 일대다.[17] 이후 인구 증가와 도시화로 1973년 구리읍으로 승격되었다. 1980년 양주군이 양주군과 남양주군으로 분리되면서 남양주군 구리읍이 되었으며, 1986년 구리읍이 비로소 구리시로 최종 승격되었다.도농통합 행정구역 개편이 논의되던 1994년 5월, 구리시-미금시-남양주군 3자 통합 또는 '구리시-남양주 북서부'[18], '미금시-남양주 남동부'[19]의 분할 통합안이 제시됐고,# 논의 끝에 분할 통합을 시도했으나 주민 의견 조사 결과 구리시와 통합이 논의된 남양주군 3개 읍면에서 반대 의견이 우세했고,# 결국 이들 지역도 구리시가 아닌 미금시와 통합시키기로 결정해 1995년 1월 1일 미금시-남양주군이 통합해 통합 남양주시가 출범하고 구리시는 도농분리시로 남았다.
승격 전(1985년 12월)의 구리시 모습
구리읍~구리시 승격 초창기 시절에는 읍소재지인 '교문리'가 구리읍→구리시 전체를 가리키는 별칭이기도 했으며, 21세기 들어서 이렇게 부르는 경향은 거의 사라졌지만 여전히 오래 거주한 사람들은 구리시를 '교문리'라 부르기도 한다.[20]
다만 갈매동은 예외인데, 일부는 양주군 노원면(현 서울특별시 노원구) 담터에 속했고 나머지는 양주군 구지면 사노리에 속했다가 1914년 개편으로 합쳐져 양주군 구리면 갈매리가 되었다. 갈매동은 구리시에서 유일하게 서울시 도시계획구역에 속한 적이 있다.
어떻게 보면 '구리'에서 '리'에 해당되는 망우리면 지역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사실상 옛 구지면 지역만이 남은 셈이니 구리시가 아니라 구지시로 개칭해도 될 것 같지만, 그대로 구리(九里)라는 지명을 유지하고 있다.[21]
7. 고구려와의 관계
구리시와 광진구에 속하는 아차산에는 남한에서 몇 안되는 귀중한 고구려 유적인, 고구려 보루 및 산성이 존재하고 있다. 이 곳에서 발굴되는 고구려 유물은 양으로만 따지면 남한에서 가장 많은 수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아단성(阿旦城)이 아차산에 있던 산성으로 추정된다. 단(旦)과 차(且)의 글자의 생김새가 비슷하기 때문. 보루등은 그 일부로 여겨진다.
아차산성의 위치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풍납토성을 바라보고 있으며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도 보일 정도로 시야가 좋기 때문에, 고구려 기준에선 백제나 및 한강 이남지역을 감시, 견제하는 꽤 중요한 국경요새였을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고구려 땅은 아니고 원래는 한강유역을 가장 먼저 차지한 백제의 보루나 산성[22] 등이 있었지만 개로왕 시절 한성이 공격당할 때 아차산 또한 고구려에게 넘어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라 진흥왕 대에 한강유역을 차지하면서 아차산성 또한 신라에게 빼앗긴 듯하다. 고구려의 온달이 신라로부터 다시 빼앗으려 왔지만 실패하여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골고루 차지한 지역이고, 시기적으로도 길지 않지만, 남한의 고구려 유적이 워낙 적기에 고구려 땅처럼 알려졌다. 아차산과 용마산에는 전방위적으로 보루 등 요새가 있는데, 고구려 기준에선 한강 이남[23]을 견제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에 한강을 바라보는 아차산성은 고구려가 지은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유적도 많이 나오는편.
더불어 그동안 남한에선 고구려 관련 연구나 유적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진 적이 없어[24], 거기에 아차산 고구려 유적은 남한에서 발견 조사된 최초의 보루성 및 산성유적이며 규모도 상당해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7.1. 구리시: 고구려 마케팅 사업
구리 광개토태왕광장의 광개토태왕상
12대 박영순시장 재임시기부터, 고구려와 관련한 마케팅사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사실 구리와 고구려 연관짓기는 생각보다 오래되어 90년대에 이미 시립도서관에 광개토대왕릉비 탁본이 액자에 담겨 걸려있었다. 광개토대왕릉비의 6m가 넘는 사이즈 덕분에 눈에는 잘 띄는 편이었다. 이후 드라마 주몽의 성공(흥행)과 동북공정에 대한 국민적 반감이 표출되면서 구리시는 이러한 열기를 등에 업고, 적극적인 고구려 홍보마케팅을 펼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한 콘텐츠로는 고구려 대장간 마을(세트장/박물관), 구리시청 앞 고구려고각, 광개토태왕광장(광개토태왕의 동상과 광개토대왕릉비 모사본이 세워져있다.)등이 있으며, 고구려 역사공원 조성사업은 여러 시장들을 거쳐가면서도 계속 의논될 만큼 지역의 주요 현안으로 남아있다. [25]
고구려 마케팅이 절정에 달했던 박영순시장 시절에는, 아예 슬로건부터 '고구려의 기상 구리시'처럼 고구려를 적극적으로 띄우는 내용이었다. [26][27] 고구려 마케팅에 적극적이던 박영순시장이 떠난지도 오래고, 지금은 고구려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 많이 식었기 때문에 이전처럼 이러한 마케팅에 적극적이지는 않으나, 여전히 고구려역사공원 조성은 주요 현안이고, 고구려 대장간마을은 구리시가 내세우는 주요 관광자원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영화 안시성이 여기서 주로 촬영해서 지금 찾는 관광객도 많다.
참고로, 광개토태왕광장을 조성하여 광개토태왕 동상과 대왕릉비 복제품을 세운 것으로 알 수 있듯이 광진구에서 온달-평강공주를 미는 것처럼 구리시에서는 특히 광개토태왕을 조명한다. 광개토대왕릉비에서 등장하는 '광개토태왕이 공취한 58성' 가운데 한 곳으로 아단성(阿旦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학설이 존재하지만, 아차산성을 아단성으로 비정하는 학설이 다수이기 때문에 광개토태왕과 관련한 상징물을 조성하는 것은 일견 타당해보인다.
여담이지만, 구리시의 동구릉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묻혀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당히 묘하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버스정류장마다 "조선왕조의 숨결이 살아 있는 구리시" 슬로건이 적힌 걸개가 걸려있는 등 나름대로 조선의 역사에도 신경을 쓴 듯 보이나 2006~7년 전국을 고구려 열풍에 빠지게 한 드라마들이 연이어 방영된 이후로는 살짝 뒷전으로 밀려나 버리고 말았다. 구리시가 고구려 마케팅에만 신경쓰느라 조선왕조를 외면하던 사이 동구릉(東九陵)을 비롯한 전국의 조선 왕릉들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아이러니. 근래에는 관련 행사나 축제(동구릉 문화제/어가행렬)가 많고, 관광인프라도 많이 개선되었다. 사실 고구려 마케팅처럼 강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을 뿐이지, 동구릉은 과거부터 구리시의 귀중하고도 자랑스러워 할 만한 소중한 문화재였다.
7.1.1. 비판
박영순 시장의 고구려 마케팅과 관련하여 2000년대 초중반 고구려 붐이 일기 전에 고구려나 광개토태왕 관련 콘텐츠를 선점한 선견지명으로 호의적으로 보는 견해도 상당하다. 그러나, 이와 관련하여 비판을 받기도 한다.지금은 올바르게 정정되었지만, 한때 구리시에서 구리의 명칭에 대해 고구려→고려→구리로 변하여 현재의 구리가 되었다는 주장을 했었던 것은 역사 왜곡 수준이다. 구리라는 명칭은 '구지면'과 '망우리면'이 1914년에 합쳐지면서 처음 생긴 지명이다. 그것도 일제가 만든 지명이다.
박영순 시장 이후에 당선된, 그의 정적이라 할 수 있는 백경현 시장 조차도, 2016년 12월 12일 구리청소년수련관 강당에서 한-몽 고구려.발해 학술대회를 개최했는데 "칭기즈 칸은 고구려·발해 왕족이다"라는 역사 왜곡을 했다. "칭기즈 칸 조상은 고구려.발해 왕족"…12일 학술대회 백 시장이 박 전 시장과 대립하는 관계긴 했어도 그 바로 밑에서 가깝게 공직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듯하다. 대체적으로 '고구려'라는 콘텐츠를 선점했기 때문에 긍정적 평가가 적지않다.
백경현 시장 이후 당선된 안승남 시장도 고구려 마케팅을 진행했다. 고구려 역사공원 조성, 광개토대왕함 유치전시 추진 등 안승남 시장이 추진한 사업들이다.
현재 광개토태왕상, 고구려 유적공원(예정), 고구려 대장간 마을을 2008년에 조성 온달 장군과 아차산 관련 문제로 서울 광진구와 대립하고 있다. 사실 광진구에서 아차산 유적을 외면할때부터 구리시에서는 1994년부터 이미 발굴작업을 해왔고 고구려 역사관 건립도 광진구보다 먼저 기획하고 발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구리시 입장에서는 광진구의 행보가 불편할 수 있다.
8. 관련 문서
[1] 王慮其侵冦, 修阿旦城·虵城備之(왕이 고구려의 침략을 염려하여, 아단성(阿旦城)과 사성(虵城)을 세워 방비하였다).[2]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 戕之(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 내려 절을 한 뒤, 왕의 얼굴을 향해 세번 침을 뱉고, 몇가지 죄를 읊은 뒤, 포박하여 아차성 아래로 보내, 그를 죽이었다).[3] 아차산성의 마당바위 밑에는 급조된 무덤 유구가 있는데, 이를 개로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4] 遂行, 與羅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路而死(마침내 가서, 신라군과 아단성의 아래에서 싸웠는데, 흐르는 화살에 맞은 바 되어, 넘어져 죽었다).[5] 以我太祖爲精騎大監, 伐楊州·見州 (우리 태조를 정기대감(精騎大監)으로, 양주와 견주를 정벌하였다)[6] 及至, 復稱萱爲尙父, 授館南宮. 位百官上, 賜楊州爲食邑. (이에 도착하자, 훤을 상보(尙父)라 하고, 남궁을 객관으로 주었다. 지위를 백관의 위에 두고, 양주를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7] 한국지명총람(1985)에 등장하는 해석인데, 그 근거는 알 수 없다[8] 숙종 26년(1700) 이전에는 장희빈 묘소의 위치가 인장리茵匠里로 표기되었고, 영조대의 기록에도 인장리계茵匠里契라는 표기를 볼 수 있으므로 이것이 옛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9] 순조 11년(1811) 5월 9일 기록에서는 인장리人長里를 볼 수 있는데, 오기된것으로 보인다.[10] 광무(고종) 3년(1899년) 4월 7일 기록에서는 사노리沙老里를 볼 수 있는데, 오기된것으로 보인다.[11] 이처럼 일제가 임의로 만들어 낸 지명으로는 부천, 의왕 등이 있다.[12] 참고로 망우리면은 용마산 넘어 있는 동네였다.[13] 동창은 동구릉 앞에 한양의 동쪽 창고인 동창(東倉)이 위치해 있던 것에 어원을 둔다.[14] 백교리는 현재의 한다리마을인데, 순우릿말로 큰 다리라는 뜻이다. 한다리가 흰다리로, 흰다리가 백교리로 이름이 변화했다.[15] 이문리는 현재의 이문안 마을이다. 이문(里門)은 마을입구의 문을 의미한다.[16] 장기(墻基)는 현재 갈매동에 있는 담터의 한문 표기이다.[17] 면목동 제외. 이쪽은 광진구 전체, 성동구 성수 일대, 송파구 잠실 일대와 같이 양주군 고양주면 → 고양군 뚝도면 소속이었으며, 1949년 서울로 편입되었다.[18] 진접읍, 별내면, 퇴계원면 일대[19] 앞의 3개 읍면을 제외한 남양주군 일대[20] 유사한 사례로 바로 강 건너 있는 하남시가 있다. 이 곳 역시 광주군 동부읍 시절 읍소재지인 '신장(리)'가 동부읍 전체를 가리키는 별칭이기도 했으며, 동부읍의 하남시 승격 이후에도 하남시 전체를 '신장(리)'이라 통칭하는 경향이 있었다.[21] 구리 인창동 구지초등학교라는 학교 이름에 그 흔적이 남아있긴 하다.[22] 개루왕이 세운 북한산성이 이곳일 가능성도 있다.[23] 실질적으로 신라나 백제 기준에선 한강 이남을 견제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아차산성처럼 한강 이남 견제를 위한 모양새는 별로 큰 필요가 없다. 다만 아차산이나 용마산 자체는 한강 이북을 경계하는 데도 중요한 요충지였을 것이다.[24] 지금은 이해할 수 없지만 과거엔 고구려 관련 연구를 하면 빨갱이로 매도되는 시기가 있었다. 아차산이나 일대 고구려 유적들도 풍납토성과 워낙 가까워서 백제 유적인줄 알고 파보니 고구려 유적인 경우가 많다.[25] 여담이지만, 고구려가 인연이 되어 구리시는 광개토부대(제1군단)와 자매결연을 맺어오고 있다.[26] 현재는 아니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인창동에 있는 동구초등학교 밖에 있는 정문 옆 벽(담벼락)쪽에 고구려 무용총과 사슴 잡는 고구려 군사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27] 백경현 시장 취임 이후로는 슬로건부터가 "즐거운 변화, 더 행복한 구리시"라는 꽤나 평범한 문구로 교체되었고, 안승남 시장은 구리. 시민행복특별시라는 민생형 메시지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