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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1 22:42:01

고구려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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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고구려 고분군
高句麗 古墳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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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colbgcolor=#000> 고구려 고분군
Complex of the Koguryo Tombs
Ensemble des tombes de Koguryo
<colcolor=#fff> 국가·위치 <colbgcolor=#fff,#1f2023>
[[북한|]][[틀:국기|]][[틀:국기|]]
평양시
평안남도 대동군
남포시
황해남도 안악군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091
등재연도 2004년
등재기준 (ⅰ)[1], (ⅱ)[2], (ⅲ)[3], (ⅳ)[4]
파일:Tomb of King Dongmyeong.jpg
<colbgcolor=#000,#10100f> 동명왕릉

1. 개요2. 특징3.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와의 동반등재4. 중국에 위치한 통구 고분군과의 관련성5. 북한에 위치한 다른 고구려 고분들6. 관람7. 목록8. 여담9. 같이보기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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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평양시, 남포시, 대동군, 안악군 일대에 위치한 고구려의 고분군이다. 공식 명칭은 고구려 고분군(Complex of Koguryo Tombs)이며 한국에서는 소재 지역을 붙여서 평양·남포 고구려 고분군 또는 평양·남포·안악 고구려 고분군 정도로 구분하여 부르고 있다.

2004년 7월 1일 중국 쑤저우에서 개최된 제28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5]에서 중국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와 함께 고구려라는 공통된 테마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동시에 등재되었다. 중국 측의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가 국내성 시대의 고구려 초중기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라면 이쪽은 고구려 중후기 고분군 위주이다. 이로써 동명왕릉안악 3호분 등 한국에서도 유명한 북한 소재 고구려 벽화 고분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특징



고구려 고분군에 등재된 무덤들의 대부분이 국사책에서 나오는 고구려 벽화가 그려진 네임드[6]들이다. 사실 고구려 고분이라지만 사실상 고구려 벽화고분만 골라서 등재한 것이며 그럴수 밖에 없는 것이 북한 소재 고구려 고분의 대부분이 벽화 고분이거나 후기 고구려 고분이다.

별모양의 장식이 그려진 벽화라서 성총(星塚), 간성리라는 동네에 연화문이 그려진 무덤이니깐 간성리 연화총(蓮花塚), 수렵도가 그려졌으니 수렵총(狩獵塚), 기둥이 두개라서 쌍영총(雙楹塚) 등의 이름을 붙였다. 네이밍을 떠나서 그만큼 특징적인 벽화들이 그려졌기 때문에 국사책에도 고구려 문화의 대표적 요소로써 기재된 것이다.

고분 구조 자체의 변화야 매우 복잡한 관계로 아직 선명한 해석이 동반된 분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벽화의 주제 변화라는 큰 얼개는 파악된 편이다. 4세기 중엽까지는 묘주의 생전 활동을 묘사한 생활풍속도가 유행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안악 3호분. 묘주의 그림을 크게 그려넣고 묘주를 모시는 주변 인물이나 시종 등을 표현하고, 그들이 활동하던 마굿간이나 부엌 등을 묘사하였다. 묘주의 활동 역시 행렬도라던지 조회를 하는 장면 등을 그려넣기도 하였다. 내세사상에 기반한 가옥의 묘사는 심지어 아예 안악 3호분이나 쌍영총, 연화총처럼 기둥을 표현한 것이 있으며, 천왕지신총[7]이 있다. 이러한 유행은 5세기 전반까지 이어진다.

이후 5세기 전반~중반 경부터는 생활풍속도에 나무와 구름 등의 도교적 요소들이 추가되기 시작하며, 그 화풍도 고구려 특유의 방식으로 자리잡기 시작한다. 생활풍속도 자체의 제재도 진짜 일상생활인 수렵하는 장면이라던지 씨름하는 장면, 춤추는 장면 등이 표현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무덤이 무용총각저총으로써 생활풍속도만 유명하지만 길게 늘어진 구름이나 산수의 표현, 비현실적인 나무의 표현 등의 도교와 관련된 패턴들이 스멀스멀 나타난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사신도들이 생활풍속도 속에 같이 나타나며 불교적 영향인 연화문이 약간씩 그려지거나 무덤의 천장에 대빵만한 크기로 표현된다. 잘 알려진 수렵총이 바로 생활풍속도+사신도+묘주도[8]이 모두 나타나는 벽화를 채용한 무덤으로써 생활풍속도 위주의 그림에서 점차 사신도로 변하는 양상을 잘 보여준다.

이후 5세기 후반, 6세기 초반의 어느 시점부터 생활풍속도나 묘주도 등은 사라지고, 사신도를 비롯한 약간의 도교적 요소에 연화문이 크고 자주 표현되기 시작한다. 이 시점부터는 벽화를 사신도와 연화문 만으로 구성하는 유행이 고구려가 멸망하는 시점까지 쭉 이어지며 점차 간략화되지만 사신도의 각 사신들의 표현력이나 그려진 크기들은 늘어나고 커진다. 가장 유명한 것이 강서대묘의 사신도 벽화.

이처럼 세계유산인 고구려 고분군이 갖는 고구려 벽화미술 상에서의 의의라면 이러한 벽화의 변천, 고구려의 묘제 변천 등을 설명하는 주요한 고분 자료라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3.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와의 동반등재

고구려 관련 유적의 세계유산 등재는 2001년 북한이 가장 먼저 추진하였다. 하지만 2003년에 개최된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반려되었고 중국측과의 공동등재를 권유하였다. 국내에서는 북한 현지 유적 현황조사에 참여한 중국 측 학자가 반대결정을 낸 것에 대해서 절차상 문제가 있음이 지적되기도 하였다. 또한 중국측에서 공동등재를 권유하였으나 북한은 이를 거절하고 한국측의 협조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2003년 중국이 요령성 집안시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중심으로 등재를 추진했는데 당시에 동북공정의 스탠스였기 때문에 한국 입장에서는 가만히 볼 수 없었고, 북한이 이 쯤에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자 한국에서는 이를 민간차원의 지원 및 외교적으로 보조하였다고 알려져 있다.[9] 국내에서는 정부의 방관을 지적하기도 하는 여론도 일부 있었으나 문화재청에서는 사실이 아니라는 입장을 내놓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중국, 북한이 자국 내 고구려 고분·유적으로 각기 세계유산등재를 추진하게 되었다.

세계유산 미보유국의 우선권 규정으로 북한의 세계 유산등재는 낙관시되었으며, 2004년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세계유산이 동시에 등재되게 되었다. 사실상 같은 맥락의 고구려 유적이지만 소속국 표기나 명칭, 대상 등에서 양국간 차이가 있으며, 하나의 제목으로된 북중 공동등재가 아닌만큼 중국의 일부로서의 고구려로서 마냥 강조될 수 없게 되었다.

중국이 세계유산 등재신청서 등에서 고구려를 "지방정권"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현재 중국이 대만을 국가로 규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때문에 고구려를 '국가'라고 지칭하지 않는 경향은 '예속성'을 강조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북한의 등재신청서에는 고구려를 국가로 번듯이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박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참고로 중국학계에서는 고구려 유적 세계유산등재를 주요한 연구성과의 기점으로 본다. 다만 특이한 것은 중국에서 세계유산등재 이전에는 논문이나 안내서 등에 고구려 영문명을 중국어 병음 표기인 'Gaogouli'라고 하던 것이 등재 이후부터는 조선어 발음인 'Goguryo'로 표기한다.

4. 중국에 위치한 통구 고분군과의 관련성

다소 뜬금없는 것은 무용총각저총은 분명히 중국의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음에도 북한의 세계유산인 "고구려 고분군"의 관련 자료에서 빠짐없이 등장한다. 고구려 벽화의 변천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주요한 자료로써 관련성이 있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만 다른 벽화분은 거론하지 않고 무용총과 각저총만 꼭 챙기는 것은 의문점이다.

특히나 일반 백과사전의 설명을 보더라도 #1,#2 참고사진은 모두 중국에 소재하고 있는 통구 고분군의 사진을 표시해두고 있다. 상술한 유네스코의 인식 "중국 동북지역과 북한 일대를 바탕으로 활약한 고구려"라는 맥락에서 동시 등재되었기 때문도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듯. 반면에 중국 바이두 백과에서는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힘들다.

5. 북한에 위치한 다른 고구려 고분들

여담으로 북한에도 물론 적석총도 의외로 많지는 않은 편이지만 그래도 급이 되는 것이 평북 운산군 용호동 고분군이나 자강도 만포의 문악동 고분군 정도가 좀 사이즈가 있는 적석총들이다. 하지만 세계유산으로 등재할 최소한의 대중적인 급이되는 규모는 아니며, 출토유물이 거의 없고 통구 고분군에 훨씬 더 크고 아름다운 적석총들이 즐비하며, 무엇보다 북한 소재 적석총들이 다 산발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세계유산 등재의 차원에서 현실적으로 필요한 스토리텔링의 측면이 적다. 유적의 질적 문제라기보단 세계유산 등재 자체의 까다로운 기준의 문제일 뿐이다.

물론 자강도 시중군 로남리 일대의 초기 고구려 적석총들의 존재는 스토리텔링이 될만한 유적일 수 있지만 유적 조사도 다소 미비하며 갈수기가 아니고서야는 대부분 물에 잠겨있기에 등재대상으로서는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6. 관람

현재 벽화가 있는 고분의 경우 대부분 내부를 관람하기 어렵다고 전해진다. 고분에 들어간 사람들의 입김으로 인해 벽화가 훼손되어 대부분의 고분들의 내부는 일반에 공개하지 않는다고 한다.[10]

안악 3호분의 경우 조선중앙력사박물관에 실물 모형을 재현해뒀다고 한다.

7.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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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화리 1호분 | 덕화리 2호분 | 덕화리 3호분
강서삼묘 | 덕흥리 벽화분 | 약수리 벽화분 | 수산리 벽화분 | 용강대총 | 쌍영총
안악 1호분 | 안악 2호분 | 안악 3호분
}}}}}}}}}

※ 순서와 영문 명칭은 유네스코 공식 홈페이지를 참고했다.

8. 여담

9. 같이보기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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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2004년 6월 28일~7월 7일[6] 유명한 ◎◎총, ◎◎분 시리즈들의 대부분은 일제강점기 발굴 당시에 정해진 것으로 일본인 특유의 덕후감성을 바탕으로 고분의 특징을 골라서 이름붙인 것들이 많다. 다만 일제강점기에만 그렇게 한 것은 아니고 해방 이후에 고분의 특징을 바탕으로 명칭을 바꾼 것이 더 많다. 매산리 사신총은 나중에 수렵총으로 바뀌었고 안성동대총은 용강대총으로 바뀌었다.[7] 특히 천왕지신총의 묘사방식은 덕화리 고분군 1, 2호에서 보이는 것처럼 벽화로 표현되는 경우도 있다.[8] 묘주도를 그리는 전형적 방식인데.. 묘주의 그림이 그려질 자리에는 불상(佛像)처럼 그려놓고서는 위에 선관(仙寬)이라고 도교와 관련된 내용이 써있다. 벽화 제재의 점진적 변화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포인트.[9] 첫 등재시도 때에도 한국의 협력이 있었다고 한다.[10] 고구려의 벽화 고분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반파국(대가야)의 고아동 벽화 고분, 신라의 순흥 어숙리 벽화 고분 역시 이런 이유로 문이 닫혀져 있는 상태이다.[11] 1~15호[12] 강서대묘, 강서중묘, 강서소묘[13] 중국에 소재한 세계유산으로 2004년 동반 등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