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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03:58:17

게티즈버그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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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3. 당대에는 과소평가되었던 연설4. 연설 전문
4.1. 'the people'의 번역어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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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CollageMaker_20200506_155812798.jpg
당시 모습을 촬영한 유일한 사진[1][2]
Gettysburg Address

1863년 11월 19일, 게티즈버그 전투의 격전지였던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에서 열린 국립묘지 봉헌식에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이 한 연설. 272단어에 3분여의 짧은 연설이지만,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로 회자되며 가장 많이 인용된 연설문이 되었다.

2. 상세

이 연설을 완벽하게 이해하기 위해선 약간의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미국의 남북 전쟁 당시 북부에선 "대체 왜 우리가 흑인 때문에 싸워야 하나"하고 반발하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게티즈버그 전투 이전만 하더라도 북부는 시종일관 상당히 압도적인 물량적 우세를 지녔음에도 전황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북부 미국인들은 지지부진해서 이길 기미도 안 보이는 전쟁이라 더더욱 불만이 많았다. 이런 상태에서 링컨은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부가 크게 승리한 것을 계기로 이 여론을 뒤집고 명분을 내세우고자 했고, 그러한 과정에서 나온 게 게티즈버그 연설이다.

앤티텀 전투 이후의 노예 해방 선언과 비교하면, 둘 다 명분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국내외의 여론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같지만 세부적인 성격은 차이가 있다. 노예 해방 선언은 노예제를 지키는 남부를 질타해서 남부에게 명분이 없다는 것을 외국에게 상기시켜 외국의 물자 지원이나 개입을 막기 위한 외교적 목적이 강했다. 게티즈버그 연설은 격전지에 왔으니 죽은 병사들을 추모하는 당연한 내용에다 죽은 병사들이 왜 죽어가면서까지 싸워야 했는지를 연설하며 정당성을 이야기하면서 북부 내 여론을 바꾸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는 이 땅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3]라는 문구가 유명하다. 사실 이 문장을 링컨이 제일 먼저 쓴 건 아니다. 1830년 1월 26일, 미국 3대 명연설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 대니얼 웹스터의 <헤인에게 답한다>라는 상원 연설에서도 나온다. "정부의 기원은 헌법이며, 정부의 성격은 인민을 위해, 인민에 의해 만들어졌고, 인민에게 책임을 지는 인민의 정부라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정치와 법 교과서에서는 시민으로, 위키백과와 네이버 지식백과에서는 국민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 명연설을 기록한 원고는 총 다섯 부가 남아 있다. 보통 수신인들의 이름을 따서 각각 니콜라이, 헤이, 에버렛, 밴크로프트, 블리스 사본이라고 불린다. 미국 의회도서관이 그중 두 부(니콜라이, 헤이)를 보유하고 있고, 에버렛 사본은 링컨의 고향 일리노이스프링필드의 링컨 박물관에, 밴크로프트 사본은 코넬 대학교에 있으며, 표준으로 취급되는 블리스 사본은 백악관의 링컨 침실(Lincoln Bedroom)에 비치되어 있다.
과거에는 오늘날처럼 공적 기록물을 관리하는 체계가 완비되어 있지 않았고, 연설문 원본을 컴퓨터로 인쇄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기록 과정에서 원고마다 조금씩 차이가 생기곤 한다. 현전하는 게티즈버그 필사본들 역시 그런 이유 때문에 문장 부호 등에 아주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러나 내용에는 사실상 차이가 없으며 모두 링컨 본인의 손을 거쳐서 쓰인 필사본들이기에, 게티즈버그 연설의 원문을 파악할 수 없다는 말에는 다소 과장이 섞여 있다.

3. 당대에는 과소평가되었던 연설

현대에는 이 연설이 간결하고 명료하며 우수한 구조 때문에 매우 선구적인, 명연설의 대명사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링컨이 살던 당시에는 최대한 말을 어렵고, 길고, 복잡하고, 화려하게 말하는 것이 지적 패션의 하나로 추앙받는 시대였다. 당장 명료하고 직관적이어야 할 신문 보도조차 만연체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존심 있는 19세기의 기자들은 집 한 채가 불타서 내려앉았다고는 절대 쓰지 않고 대신 "큰 화재가 구조물을 전소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구경을 나왔다"처럼 인상적이지 않은 글에 만족하지 않고 "대규모 인파가 군집해서 목격을 했다"라는 식으로 썼을 것이다.
케네스 크밀, <민주적인 웅변(Democratic Eloquence)>
따라서 당대의 명연설, 명문장이랄 것들은 중문에 복문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 온갖 수식어로 범벅되어 질질 끌면서 2시간은 넘기는 것이 기본이었다. 빌 브라이슨의 표현을 빌리자면, 당시는 "여덟 마디를 할 수 있는데 두 마디만 하거나, 일주일에 같은 말을 두 번 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던" 시대였다. 가장 극명한 예로 봉헌식 행사 때 링컨보다 앞선 차례에 연설했던 당시 연설 대표자 에드워드 에버렛의 게티즈버그 연설문을 보자.
베이컨 경은 "명예로운 통치의 수준을 정확하게 정렬"하면서 "국가와 연합의 창시자"를 최고로 쳤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본성, 열정, 개인의 의견, 가족, 혈통, 부족 사이의 경쟁, 기후와 지리적 위치의 영향,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평화와 전쟁의 사건들에 담긴 부조화의 요소들, 그처럼 양립하지 않는 요소들을 바탕으로 잘 정비되고 번영하는 강력한 국가를 성립하려면, 그것도 한 번의 노력이나 한 세대 안에서 그것을 달성하려면 사람으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능력을 필요로 한다고 할 것입니다.
Lord Bacon, in "the true marshalling of the sovereign degrees of honor," assigns the first place to "the Conditores Imperiorum, founders of States and Commonwealths"; and, truly, to build up from the discordant elements of our nature the passions, the interests, and the opinions of the individual man, the rivalries of family, clan, and tribe, the influences of climate and geographical position, the accidents of peace and war accumulated for ages, to build up from these oftentimes warring elements a well-compacted, prosperous, and powerful State, if it were to be accomplished by one effort or in one generation would require a more than mortal skill.
<게티즈버그 연설>, 에드워드 에버렛, 1863.11.19
한 문장[4]에서 등장하는 연이은 종속절, 복잡한 구조, 옆길로 샌 보충 설명, 문학적 암시, 인용, 애매한 역사적 사실, 필요 없는 화려한 수식어들은 당시 연설들이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저 정도면 수능 영어 지문 하나(못해도 반 이상) 정도는 거뜬히 채울 정도다.[5][6]

에버렛은 당대의 명연설가로, 메사추세츠 주지사와 주영 미국 대사, 국무 장관, 미 의회 하원 및 상원 의원 등 다수의 정계 요직을 역임했던 대단한 인물이었다. 남북 전쟁 시기에는 70대의 은퇴한 원로 인사였고, 특별히 자리에 나와 노익장을 과시하며 링컨 연설 바로 전에 나와 저런 문장들이 무려 1,500개나 이어진 연설문을 추위에도 불구하고 장장 두 시간 동안 읽었다. 전문의 단어 수는 약 13,500개, 문자 수는 대략 66,000자다. 한번 전문을 확인해 보자. 더욱 기가 찬 것은, 이 정도 길이의 연설문이 당시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청중들도 대단했다. 두 시간 동안 추위를 견디면서까지 듣고서 박수까지 보냈으니까. 오히려 이 당시 청중은 유명인 연설 한번 듣겠다고 수 시간 동안 걷고 말 타고 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연설이 짧으면 되레 화를 냈다.[7] 그리고 링컨이 네 시간 동안 이어진 행사[8]에 지치고 춥고 배고픈 15,000명의 사람들 앞에 등장했다.

본래 링컨은 미국 서부의 켄터키 출신으로, 보수적이고 딱딱한 동부식 말투 대신 직설적이고 다채롭고 독립적인 서부적 말투를 대통령 시절까지도 버리지 못했다. 예를 들어 그는 절대로 헬로(Hello)라고 인사하지 않고 하우디(Howdy)라고 인사했으며, out yonder, stay a spell처럼 일상어, 즉 당시 정치권에서는 비속어 수준인 표현들을 대화에 거리낌 없이 집어넣었다. 소위 '세련된' 워싱턴 정치인들은 그런 링컨의 말투를 매우 싫어했고, 오죽하면 링컨의 정적들은 그의 투박한 외모에, 통속적 이야기를 좋아하고 종종 예법을 지키지 못한 사실까지 덤으로 집어넣어 링컨을 '고릴라'라고 비하했다.

당시 목격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망원경이라도 끄집어내는 것처럼 어색한 동작으로 일어나 안경을 고쳐 쓴 뒤 원고에서 거의 눈을 떼지 않고 높은 음성으로 불안하게" 시작된 그의 연설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연설을 분석하면 ⅔는 단음절 단어이며, 짧고 축약되고 직접적인 10개의 문장이 전부였다. 당시 연설하는 사진이 남아있지 않은 이유도, 사진사가 "아이고, 이제 대통령 차례네. 연습 삼아 한번 찍자. 어라 저 양반 벌써 끝났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아있는 사진이 위에 있는 연설 직후의 사진 뿐이다. 증언에 따르면 당시 공식 사진사들은 연설이 끝나고 자리에 앉을 때까지 카메라 점검만 하고 있었다고 한다.[9] 이런 그의 짧은 연설에 대한 당시 반응을 보자.
외국의 지성인들에게 미합중국의 대통령이라고 소개할 사람의 어리석고 밋밋하고 싱거운 연설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미국인들의 뺨이 수치로 물들었다.[10]
시카고 타임즈(Chicago Times)
"나는 실패했습니다. 정말입니다. 내가 그 연설에 대해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입니다."
에이브러헴 링컨 본인, 연설 후 에버렛에게 한 말
재밌게도 에버렛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Permit me also to express my great admiration of the thoughts expressed by you, with such eloquent sensibility & appropriateness, at the consecration of the Cemetery. I should be glad, if I could flatter myself, that I came as near to the central idea of the occasion in two hours, as you did in two minutes.

"각하께서 어제 봉헌식에서 정말 간결하고 적절하게 각하의 생각을 표현하신 것에 대하여 진심으로 찬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어제 장장 2시간에 걸쳐 한 제 연설이, 각하께서 2분간에 정확하게 표현하신 봉헌식의 의미에, 조금이라도 근처에 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겠습니다."
사실 링컨은 헌사만 부탁받았고, 그것도 연설 15일 전에 부탁받았던지라 작성할 시간도 없었다. 사실 이 정도면 나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이날의 주요 연설자는 에버렛이었지 링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11]

물론, 현대에는 모범적 연설의 대표적 사례로 인식된다. 짧고, 주제가 분명하고, 감동적이라는 말조차도 부연인 것 같다. 반면 대표 연사였던 에버렛의 연설을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에버렛이 링컨의 연설에 올린 찬사는 그대로 들어맞은 셈이다.[12]

게리 윌스의 말에 따르면 링컨의 연설은 명료한 단음절을 따라가는 첫 소용돌이가 특징이다. 그의 연설은 특별한 리듬(율동감)이 있으며[13], 짧지만 굵고 인상적이다.

이 점은 링컨의 첫 번째 취임식 연설문의 일부에서도 잘 나타난다. 위의 것은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윌리엄 H. 수어드가 작성한 시대의 걸작인 작품이며, 아래의 것은 링컨이 다듬은 시대를 초월한 작품이다.
우리는 이방인[14]이나 적이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며 어디까지나 같은 국민이고 형제이다.[15] (수어드)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이며, 결코 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16] (링컨)

그런데 그런 링컨조차도 한 문장 당 평균 30단어는 썼다고 한다. 뭐 워싱턴의 어지간한 정치인은 한 문장당 평균 50개에서 60개의 단어를 썼다고 하니까. 아마 쿨리지[17]가 봤으면 쓸데없는 짓한다고 뭐라고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4. 연설 전문

이 연설 전문은 워싱턴 D.C.에 있는 링컨 기념관에서도 볼 수 있다. 바로 링컨의 좌상 좌측에 있는 기념관 건물 내벽에 새겨져 있다. 서로 조금씩 다른 다섯 사본 중 가장 나중에 작성되었고 유일하게 링컨의 친필 서명이 들어간 블리스 사본(Bliss copy)이 실질적으로 표준으로 여겨지며, 링컨 기념관에 새겨진 판본도 이를 따른다.
Four score[18] and seven years ago[19] our fathers brought forth on this continent a new nation, conceived in Liberty, and dedicated to the proposition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Now we are engaged in a great civil war, testing whether that nation, or any nation, so conceived and so dedicated, can long endure. We are met on a great battle-field of that war. We have come to dedicate a portion of that field, as a final resting place for those who here gave their lives that that nation might live. It is altogether fitting and proper that we should do this.

But, in a larger sense, we can not dedicate - we can not consecrate - we can not hallow - this ground. The brave men, living and dead, who struggled here, have consecrated it, far above our poor power to add or detract. The world will little note, nor long remember what we say here, but it can never forget what they did here. It is for us the living, rather, to be dedicated here to the unfinished work which they who fought here have thus far so nobly advanced. It is rather for us to be here dedicated to the great task remaining before us - that from these honored dead we take increased devotion to that cause for which they gave the last full measure of devotion - that we here highly resolve that these dead shall not have died in vain - that this nation, under God, shall have a new birth of freedom - and that government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
*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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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전[20] 우리의 선조들은 이 대륙에 자유의 정신으로 잉태되고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신념을 바쳐 새로운 나라를 세웠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나라가, 아니 이러한 정신과 신념으로 잉태되고 헌신하는 어느 나라이든지, 과연 오래도록 굳건할 수 있는가 하는 시험대인 거대한 내전에 휩싸여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전쟁의 거대한 싸움터인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온 것은 바로 그 싸움터의 일부를 이곳에서 제 삶을 바쳐 그 나라를 살리고자 한 영령들의 마지막 안식처로 봉헌하기 위함입니다.[21] 우리의 이 헌정은 더없이 마땅하고 옳습니다.

그러나 더 큰 의미에서 보자면, 우리는 이 땅을 헌정할 수도, 축성할 수도, 신성화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싸웠던 용맹한 전사자와 생존 용사들이 이미 이곳을 신성한 땅으로 축성하였기에, 보잘것없는 우리의 힘으로 더 보태고 뺄 것 따위가 있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오늘 우리가 여기 모여 하는 말들을 별로 주목하지도 오래 기억하지도 않을 것이나[22], 그분들이 이곳에서 이루어낸 것은 결단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이 자리에서 살아 있는 자들이, 여기서 싸웠던 그 분들이 그토록 고결하게 전진시킨 미완의 과업을 수행하는 데 우리 스스로를 봉헌하여야 합니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그 위대한 사명, 즉 고귀한 순국선열들이 마지막 신명을 다 바쳐 헌신한 그 대의를 위하여 더욱 크게 헌신하여야 하고, 이분들의 죽음을 무위로 돌리지 않으리라 이 자리에서 굳게 결단하여야 하며, 이 나라가 하느님 아래에서 자유의 새로운 탄생을 누려야 할 뿐 아니라, 인민의,[23]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정부가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아야 한다는 그 위대한 사명에 우리 스스로를 바쳐야 합니다.}}}

4.1. 'the people'의 번역어에 대해서

원래 한자 문화권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번역은 '인민'이었다[24]. 일본은 물론 해방 직후인 1947년 경향신문에서도 사용된 번역이다.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이라는 표현 자체가 옛날식 한자식 직역 경구에 나온 것이다.[25] 그런데 반공주의, 매카시즘의 여파로 인민이란 단어가 터부시되면서 1960년을 전후로 '국민'으로 대체되기 시작했고[26] 한 세대가량 사실상 절대다수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로 반공 콤플렉스가 사라지면서 다시 인민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렇듯 인민이란 용어를 쓸 것인지 국민이란 용어를 쓸 것인지를 두고 여러 번역이 있었으나, 게티즈버그 연설문의 의의를 고려할 때 여기에서는 국민보다는 인민으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적절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인민 문서 참조. 국민과 인민 간의 주된 차이란, 국민이란 용어가 국가의 존재를 전제하여 그 영향력 하에 있는 사람들을 골라 지칭하는 뉘앙스가 강한 반면 인민은 국가의 유무와 관계없이 결속력 있는 사람들의 집단을 두루 가리킬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사용해서 안 좋게 들린다 느끼는 거지 원래는 제대로 된 단어다.

이때 게티즈버그 연설의 논리적 흐름은 '미국 건국의 숭고한 대의인 자유와 평등 → 그러한 대의를 지키려다 전사한 군인들을 향한 추모 → 건국의 뜻을 재차 강조하며 마무리'이다. 그만큼 이 연설에서는 미국 건국의 대의가 핵심이 되는데, 그 사상적 배경은 존 로크사회계약설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모여서 국가를 이루기 전에 이미 자연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가는 개인의 자연권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에서 세워진다. 즉 처음부터 미국이라는 국가가 있고 국민이 그 뒤에 탄생한 것이 아니라, 인민이 먼저 존재하고 그들이 영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결과 미국이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연설문 말미의 '통치'란 단순히 국가의 구성원들뿐 아니라 모든 사람과 관계있다고 해석하는 쪽이 바람직하며 용어 역시 국민보다는 인민이 더욱 정확하다.

한편 이미 미국이라는 나라가 링컨 이전에 세워졌고 링컨이 전후 남북의 차별 없는 통합을 추진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미합중국이라는 단일한 국가의 정체성에 보다 주목한 것이기에 국민으로 번역되는 것이 맞다는 의견도 있다. 완전히 틀린 말이라고 하기는 어려우나 주류 해석은 아니다. 그리하여 고등학교 법과 정치 교과서에서는 시민으로,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인민으로 번역했다.


[1] 빨간 화살표가 가리키는 사람이 바로 링컨이다.[2] 왜 유일한 사진인지는 하단 참조. 연설 자체가 너무 일찍 끝나서 사진을 찍을 준비를 아무도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게 유일한 사진이 됐다. 심지어 저 유일한 사진도 시험삼아 한 장 찍어봐야지 하는 순간 연설이 끝나서 찍힌 사진이라고.[3] '인민'이란 단어가 흔히 북한을 포함한 동구권(사회주의권)에서 사용하는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people'의 정확한 해석이다. '국민'은 citizen, 즉 한 국가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한 국가의 시민증을 발급받은 사람에 국한된 단어이다. 이를 동구권에선 공민이라 지칭한다.(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증,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증) 학계에서 게티즈버그 연설의 해석은 '인민'이 정확한 해석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당장 대한민국의 헌법상 전신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조선인민공화국의 헌법에도 '국민'이 아닌 '인민'이란 표현이 등장한다.[4] 세미콜론으로 인해서 두 문장으로 번역된 것이지, 사실 영어로는 한 문장이다. 영어에서 세미콜론은 접속사의 일종으로 한국어에서 이런 식으로 문장을 끊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다.[5] '초원의 집' 작가로 유명한 로라 잉걸스 와일더의 초원의 집 연작을 보면 당대 교과서에 실린 명연설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우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당시는 이런 연설들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암송하는 게 공부 방식의 정석으로 칭송받던 시절이다. 저런 문장들을 한 가득 외워야 했다는 뜻이다.[6] 그런데 노구치 유키오의 초학습법을 보면 의외로 이런 연설문 통암기법은 영어 실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당장 노구치 교수 자신이 연설문을 외우면서 공부했다고 적고 있다.[7] 이후 에버렛은 남북 전쟁의 종전을 불과 4개월 앞둔 1865년 1월 타계했다.[8] 게티즈버그 공동묘지 봉헌식은 거의 반나절 동안 이어졌다.[9] 이 시대의 카메라들은 현대의 카메라와는 달리 사진을 찍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기 때문이다.[10] 간결하게 하면, 미국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자리에 맞지 않은) 단순한 연설을 해서 그 자리의 모든 미국인들이 부끄러워했다 정도로 고칠 수 있을 것이다.[11] 에버렛은 연설 3개월 전에 연설을 부탁받았고, 링컨한테 보낸 초청장도 "설마 15일밖에 안 남았는데 받아들이겠어?"하면서 명목상 보낸 초청이었다.[12] 오히려 세간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에버렛 본인은 링컨에게 큰 감명을 받고, 연설 후인 1864년에 군인 복지용 자선 행사에 쓰고자 게티즈버그 연설문 사본을 직접 부탁했을 정도였다. 이것이 연설의 현존하는 다섯 사본 중 하나인 에버렛 사본이다. 당대의 명연사가 불멸의 명연설을 알아본 것이다.[13] 특히 도입부인 Four score and seven years ago에서 강하게 드러난다.[14] 원문 alien. 원래 '이방인'이라는 뜻의 단어인데 현재는 에일리언 등으로 인해 '외계인'이라는 뜻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상황이다. 외계인이라고 해도 틀린 건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보통 지구 밖에서 온 생물체를 자동적으로 연상하니 의미가 크게 달라진다.[15] We are not, we must not be, aliens or enemies, but fellow-countrymen and brethren.[16] We are not enemies, but friends. We must not be enemies.[17] 말 짧게 하는 것으로 유명했던 미국 대통령. 한 문장당 단어 평균 20개. 당장 다음 임기 불출마 선언문이라고 쓴 게 한 문장이 다다. 항목 참조.[18] score에는 점수라는 뜻 이외에도 수 20을 나타낸다.[19] 이 연설 백 년 후에 있었던 마틴 루터 킹의 명연설인 I have a dream이 'Five score years ago(백 년 전)'로 시작한다. 이 게티즈버그 연설의 인유.[20] 직역하면 4의 20배(80)하고도 7년 전. 수사(품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프랑스어의 표현을 따온 것이다.[21] 원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A new nation → that nation, a great civil war → that war, a great battlefield → that field 등으로 지시형용사 that이 일관되게 사용되며 문장을 긴밀하게 연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that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모든 that마다 '바로'라고 칭하였다.[22] 링컨이 자신의 연설에 큰 의의를 두지 않았다는 발언이기도 하다. 위에 적혀있듯, 연설이 실패하였다고 회고하기도 했고 말이다.[23] 이 부분이 뒤로 가는 번역도 있다.[24] 인민은 국가나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한자 문화권과 한국은 인민이란 말을 국민이나 다른 말보다 오래 사용했다.[25] 1950년대에는 백성이란 단어도 사용된 적도 있다.[26] 실제로 제헌 헌법을 제정할 당시 같은 이유로 김상돈, 윤치영 등이 '인민'이란 단어를 반대했다. 이를 두고 제헌헌법을 기초한 유진오는 두고두고 아쉬워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