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2-01 13:06:33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미국의 주요 선거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8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fff> 종류 지난 선거 다음 선거
대통령 선거 2024년
2024년 11월 5일
2028년
2028년 11월 7일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중간선거 2022년
2022년 11월 8일
2026년
2026년 11월 3일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nopad> 상원의원 선거 119대
2024년 11월 5일
120대
2026년 11월 3일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nopad> 하원의원 선거 119대
2024년 11월 5일
120대
2026년 11월 3일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주지사 선거 2024년
2024년 11월 5일
2025년
2025년 11월 3일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nopad> 주무장관 선거 2024년
2024년 11월 5일
2026년
2024년 11월 3일
{{{#!folding [ 역대 선거 펼치기 · 접기 ] }}}}}}}}}

1860년 미국 대통령 선거
1860 United States presidential election
파일:800px-ElectoralCollege1860.svg.png
{{{#!wiki style="margin: -16px -12px; letter-spacing: 0px"<rowcolor=#fff> (59.4%) 180인 링컨}}}
{{{#!wiki style="margin: -7px -12px" 1856년 11월 4일
1856 대선
1860년 11월 6일
1860 대선
1864년 11월 8일
1864 대선
}}} ||
선거 일시 11월 6일 5시 ~ 11월 7일 6시 (UTC)
투표율 81.2%
선거 결과
후보 [[민주당(미국)|
민주당
]]
대통령 스티븐 A. 더글러스
부통령 허셜 V. 존슨
[[공화당(미국)|
공화당
]]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
부통령 해니벌 햄린
[[남부 민주당원|
남부민주당
]]
대통령 존 C. 브레킨리지
부통령 조셉 레인
[[휘그당(미국)|
입헌통일당
]]
대통령 존 벨
부통령 에드워드 에버렛
선거인단
12명 180명
72명 39명
전국 득표
29.5%
1,380,202표
39.8%
1,865,908표
18.1%
848,019표
12.6%
590,901표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파일:lincoln+hamlin.jpg
공화당
{{{#!wiki style="margin: -5px -10px"
}}}

1. 개요2. 후보3. 선거 과정
3.1. 노예제 문제3.2. 각 정당의 경선 및 후보
4. 선거 결과
4.1. 선거 결과 분석
5. 여담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1860년 진행된 선거이다.

1850년대에는 1850년의 타협, 캔자스-네브래스카 법 등 노예제 문제를 둘러싼 극심한 갈등 끝에 양대정당이었던 민주당휘그당 모두 내부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원래부터 민주당에 비해 결속력이 약했던 휘그당은 1852년 선거를 마지막으로 대통령 후보도 내지 못하게 되었고, 민주당 또한 노예제를 극렬히 옹호하는 남부 세력과 국민주권(popular sovereignity) 등 중도적 입장을 보인 북부 세력 사이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북부 출신으로 노예제 폐지를 강경하게 주장하는 휘그당원들을 중심으로 1854년 공화당이 창당되었고, 이들은 남부에서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당 민주당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한편, 민주당은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북부 출신이자 노예제 확대 문제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태도를 보이던 스티븐 A. 더글라스가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자 이에 반발한 노예제 확대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남부 인사들이 탈당하여 남부민주당을 창당하였다. 옛 남부 휘그당원들은 입헌통일당을 창당하여 존 벨을 후보로 내세우고 남부 연방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고자 하였다.

결국 미국 역사상 이례적으로 주요 후보가 무려 4명이었다. 이때문에 선거전 초반부터 미국 최대의 내전인 남북 전쟁의 전초전 성향을 띄었다.

2. 후보

총 4명의 후보가 출마 하였다.

3. 선거 과정

3.1. 노예제 문제

노예제를 둘러싼 미국 내 갈등은 상당히 그 근원이 오래되었는데,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을 비롯한 건국의 아버지들은 시간이 갈수록 노예가 당시 신생 독립국가인 미국 내에서 점차 사라질 것으로 예상해 이 문제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조면기의 발명과 함께 미국 남부에서 목화가 대규모로 재배되기 시작하면서 노예제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노동 집약적 산업이었던 목화 산업의 성장과 함께 노예가 사라지기는커녕 남부의 노예수가 폭증한 것.

이미 자본 집약적 산업 발달이 고도화되고, 학력도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이었던 북부에서는 유럽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아 1850년까지 단계적으로 노예제를 폐지했다. 아예 미국 전역에서의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남북전쟁 이전까지는 소수 의견에 불과했다. 진짜 문제는 기존 주의 노예제가 아닌, 루이지애나 구입이나 미국-멕시코 전쟁 등으로 미국이 획득하여 연방에 새로 가입할 주들에 노예제를 적용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기본적으로 새로운 주들은 북부 출신 자유민 이민자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해 노예제를 허용하지 않는 경향이 우세했다. 북부인들은 주로 승격할 연방 영토에서 아예 노예제를 금지하거나, 차선책으로 각 주의 주민들의 자치에 맡겨 자연스럽게 노예제가 폐지되는 것을 선호했다. 하지만 이는 노예주와 자유주가 비슷한 수로 유지되어 상원에서 균형을 이루고 있던 남부의 발언권이 자유주의 증가에 따라 점점 감소하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연방 영토에서 노예제를 금지하자는 링컨 등 공화당의 주장은 장기적으로 노예주를 고립시켜 노예제를 완전히 폐지하겠다는 의도가 들어가 있었고, 남부에서는 이러한 계획이 현실화되어 남부의 노예제가 위기를 맞을 수 있음을 크게 우려했다.[2] 안그래도 북부의 빠른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3]에 위축되고 있었던지라 북부의 노예제 확대 반대에 강력하게 반발해 적극적으로 노예제 확대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노예제를 둘러싼 남북의 갈등이 끝없이 커지고 있었다.

정치권에서는 1820년 미주리 타협이나 1850년 헨리 클레이의 타협,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타협 등으로 그때그때 갈등을 봉합하는 방식을 선택하고 있었지만 점차 한계를 보이고 있었는데 거기에 대선 8년전에 있던 톰 아저씨의 오두막 출간(1852), 대선 3년전에 있었던 연방대법원드레드 스콧 대 샌드퍼드(Dred Scott v. Sandford, 1857) 판결은 노예제를 둘러싼 양자간의 대립을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이 양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1858년, 일리노이 연방 상원의원을 둘러싸고 민주당의 거물 정치인 스티븐 A. 더글러스와 공화당의 지역 정치인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의 맞대결이었는데 이 자리에서 링컨은 더글러스식 노예제 타협안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반노주의자들의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주의회에 의한 간선으로 치러진 이 선거에서는 더글러스가 이기긴 했지만 결국 링컨은 이 패배를 자산으로 대선주자급 정치인으로 부상한다.

이전까지 양대축을 이루던 휘그당은 이미 1852년 선거를 마지막으로 대선 후보도 내지 못해 공화당이 구 휘그당 세력을 대부분 물려받았고, 민주당까지 노예제를 둘러싸고 남북으로 갈라진 상태가 되면서, 선거 양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3.2. 각 정당의 경선 및 후보

1860년 대선에서 공화당은 남부에 기반이 전혀 없다시피했고, 북부를 쓸어담아야만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다. 당시 공화당은 대선 후보를 두 번째로 내는 신생 정당이었고, 당내에는 급진적 노예제 폐지론자들과 링컨 등 중도파, 구 민주당 출신들, 이민과 가톨릭에 반대하는 무지당 세력 등 민주당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뭉친 다양한 계파가 존재했다. 급진파 윌리엄 H. 수어드는 유력한 대선후보였지만 강경한 반노예제 발언으로 승리에 반드시 필요한 중북부(Lower North)에서 여론이 좋지 않았고, 이민자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무지당 세력으로부터도 거부되고 있었다. 반면 링컨은 공화당이 반드시 이겨야 할 북부 중서부의 일리노이 출신이었고, 민주당원에게 상원의원 자리를 양보한 경력이 있어 구 민주당 출신과의 관계도 괜찮았다. ‘정직한 에이브’라는 링컨의 평판은 뉴욕 정치판의 부패와 연결되었다고 의심된 수어드에 비해 유리하게 작용했다. 링컨은 통나무집에서 태어나 대선 후보까지 성장한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기도 했다. 링컨은 수어드와 오하이오의 샐먼 P. 체이스, 펜실베이니아의 사이먼 캐머런 등을 제치고 3번째 투표만에 공화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되었다. 대부분의 공화당 지지자들은 링컨의 선출에 열광했다.

물론 링컨은 그만큼 남부의 증오를 강하게 샀고, 남부에서는 링컨이 당선될 경우 연방을 탈퇴할 수 있다고 강력하게 경고했다. 링컨과 공화당원 대부분은 이를 남부의 블러핑으로 취급했다.

한편 남부 민주당원들은 북부 민심을 의식해 노예제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않고 두루뭉술한 태도를 보인 더글러스에 실망하고 그에게서 완전히 돌아섰다. 남부 앨라배마의 몽고메리,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찰스턴에서 진행된 민주당 경선은 더글러스 지지를 위해 도착한 북부 민주당원들에게 적대적이었다. 결국 더글러스는 메릴랜드 볼티모어로 장소를 옮겨서야 겨우 민주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 딥 사우스의 민주당원들은 전당대회를 뛰쳐나와 노예제를 강력하게 옹호해줄 대선 후보로 현직 부통령이었던 존 C. 브레킨리지를 따로 선출했다. 민주당은 남북으로 완전히 분열되었고, 링컨에게 매우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한편, 휘그당 보수파 잔당은 연방의 현상 유지를 플랫폼으로 입헌연합당을 창당하고 존 벨을 대통령 후보로 내세웠다. 공화당에 참여하지 않은 친노예제 남부 무지당 세력은 주로 벨을 지지했다. 이들은 중남부(Upper South) 일부의 선거인단을 획득하고 선거인단 투표에서 과반이 나오지 않았을 때 캐스팅보트가 되는 것을 노렸다. 하지만 이들은 남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 연방영토에서 연방법으로 노예제를 허용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고, 결국 북부에서 거의 모든 지지를 잃어버렸다.

4. 선거 결과

투표 결과
파일:800px-ElectoralCollege1860.svg.png
후보자 스티븐 A. 더글러스 존 C. 브레킨리지 존 벨 에이브러햄 링컨
선거인단 수 12명 / 303명 72명 / 303명 39명 / 303명 180명 / 303명
전국 득표 수 1,380,202표 (29.46%) 848,019표 (18.10%) 590,901표 (12.61%) 1,865,908표 (39.82%)
주별 결과
정당 각 주별 확보 선거인단[4] 선거인단
민주당 미주리(9), 뉴저지(3) 12
남부민주당 앨라배마(9), 아칸소(4), 델라웨어(3), 플로리다(3),
조지아(10), 루이지애나(6), 메릴랜드(8), 미시시피(7),
노스캐롤라이나(10), 사우스캐롤라이나(8), 텍사스(4)
72
입헌통일당 켄터키(12), 테네시(12), 버지니아(15) 39
공화당 캘리포니아(4), 코네티컷(6), 일리노이(11), 인디애나(13),
아이오와(4), 메인(8), 매사추세츠(13), 미시건(6)
미네소타(4), 뉴햄프셔(5), 뉴저지(4), 뉴욕(35),
오하이오(23), 오리건(3), 펜실베이니아(27), 로드아일랜드(4),
버몬트(5), 위스콘신(5)
180

4.1. 선거 결과 분석

초유의 4파전으로 펼쳐진 대선에서 북부 자유주에서는 공화당의 링컨과 민주당의 더글러스가, 남부 노예주에서는 남부민주당의 브레킨리지와 입헌통일당의 존 벨이 경쟁한 구도가 되었다. 결국 공화당의 에이브러햄 링컨이 전체 득표율에서는 신승한 수준이었지만[5], 인구가 많은 북부 주의 선거인단을 싹쓸이하면서 과반이 넘는 180명의 선거인단을 확보,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게 된다. 참고로 링컨이 이때 얻은 득표율이 역대 당선자 중 역대 2번째로 낮은 득표율이다.[6] 특히 선거인단 11명이 걸려있는 일리노이에서 3.52%p 차로 더글러스를 꺾고 지난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복수에 성공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반면 민주당의 스티븐 A. 더글러스는 전체득표율에서 2위를 기록했지만 결국 미주리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선거인단을 확보하지 못하는 바람에 4명 중 4등이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낙선을 맛보고 만다. 특히 남부 민주당이 분열해나가면서 나머지 남부주들이 모두 가장 선명한 노예제 유지론자였던 존 C. 브레킨리지를 지지하면서 아쉬움을 남겼다. 물론, 두 후보의 선거인단 수를 합하더라도 링컨을 이길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한편 링컨과 마찬가지로 휘그당 출신인 입헌통일당의 존 벨은 버지니아, 켄터키, 테네시에서 승리했지만 북부 투표자들 중 3%의 표밖에 획득하지 못하는 등 대세에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링컨은 당선 이후 연방의 분열을 막기 위해 노예제 문제를 잠시 뒤로 미루고 강온 양면책을 두루 선언하며 노력했지만, 대선 패배에 크게 좌절한 남부의 반발이 계속되어 링컨 당선인이 대통령에 공식 취임하기 직전인 1860년 12월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연방 탈퇴를 시작으로 남북 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

5. 여담

6. 관련 문서



[1] 또는 남부민주당[2] 1850년대로 오면서 목화 농장은 점차 서부 지역으로 이동했지만 남부에서 노예는 그야말로 큰 재산이 된 상태에다가 이미 그 수준을 넘어서 노예제가 일종의 문화화하여 깊게 스며들어 더이상 이것을 경제적인 문제로 떼놓고 이야기 하기 어려운 수준이 되었다.[3] 미국 하원은 주별 인구비례로 의원 수가 배정되기 때문에 이렇게 되면 갈수록 북부 연방 하원의원 수가 남부 연방 하원의원 수를 압도해나가는 구도가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탓에 철도 설치 등 인프라 투자가 북부 쪽으로 집중되고 있었다.[4] 괄호는 주별 및 구별 배정된 선거인단 수[5] 남부 노예제 9개주에서는 아예 1표도 얻을 수 없었는데, 당시 남부 9개주에선 링컨에 투표하겠다고 서약한 선거인단 후보가 아예 없었기 때문에 투표 자체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6] 역대 최저 득표율 1위는 존 퀸시 애덤스가 1824년에 기록한 30.9%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