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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16:26:47

간음하다 잡힌 여인

1. 개요2. 상세3. 해설
3.1. 원저자에 대한 가설
4. 논쟁
4.1. 논리적4.2. 신학적
5. 패러디6. 기타

1. 개요

파일:external/www.dogchurch.org/GustaveDoreAdultress.jpg
위의 그림은 프랑스의 삽화가이자, 판화작가 폴 귀스타브 루이 크리스토프 도레(Paul Gustave Louis Christophe Doré, 1832 ~ 1883)의 1865년에 만들어진 "처음으로 돌을 던진 사람"이다.근거
그리고 나서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예수께서는 올리브 산으로 가셨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예수께서 또다시 성전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들 앞에 앉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 때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자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앞에 내세우고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우리의 모세 법에는 이런 죄를 범한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는데 선생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이런 말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고 계셨다. 그들이 하도 대답을 재촉하므로 예수께서는 고개를 드시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계속해서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듣자 (양심의 가책을 받아)[1]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하나 가버리고 마침내 예수 앞에는 그 한가운데 서 있던 여자만이 남아 있었다. 예수께서 고개를 드시고 그 여자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 그 여자가 이렇게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하고 말씀하셨다.
- 요한 복음서 7장 53절~8장 11절(공동번역성서)

기독교의 경전 성경 요한 복음서에 등장하는 이야기.

2. 상세

개역개정(개신교) 성경은 음행하다가 잡힌 여자로 부제가 붙어있고, 가톨릭 성경은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등으로 번역되어 있다. 사실 의미는 같고 어휘의 사용 수준에서 차이가 있는 정도. 시대상의 문제로 개역개정이 좀 더 옛 문체이고 가톨릭 성경이 현대적인 정도의 차이가 있다. 여담으로 이 에피소드를 "예수와 간음한 여인" 혹은 "간음한 여인과 예수"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으나, 오해를 유발할 수 있다. 특히 "예수와 간음한 여인"의 경우 중의적인 표현으로서, '여인'을 행위주(agent)로 가지는 술어 '간음'의 대상자(patient)가 '예수'라고 해석될 수 있다. 즉, 여인과 예수를 대상으로 간음했다는 말로 혼동할 여지가 있다. 구 리그베다 위키 시절에는 그 제목(간음한 여인과 예수)으로 본 문서가 있었으나 성경 상에 선정된 소제목을 따라 문서명이 변경되었다.

이 이야기는 후대에 첨가된 이문으로 간주되는 것이 중론이다. 우선 공관복음서에 등장하지 않고 요한 복음서에만 등장한다. 또한 요한의 초기사본들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초기 판본에는 등장하지 않으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대략 서기 5세기부터로 알려져 있다. 이 일화가 등장하는 '후대' 사본들 중에도 이 일화의 등장위치가 완전히 일치하지조차 않는다. 어떤 사본에는 요한 복음서 맨 끝에 이 이야기가 붙어있으며 심지어는 루카 복음서 가운데 등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이것이 후대의 첨가문이라는 것을 더욱 더 확증시켜 준다고 할 수 있다.

3. 해설


(가톨릭평화방송요한복음 해설 시리즈 중에 나온 영상)

바리사이인[2]과 율법학자[3]들이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예수 앞에 간통을 하다 붙잡힌 여인을 붙들어와, 율법대로라면 돌을 던져 쳐죽임이 마땅한데 어찌하면 좋겠냐고 묻는다.[4]

그러나 '예수께 올가미를 씌워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했으니 이는 고도의 딜레마,[5] 요즘 쓰는 표현으로 가불기였던 셈.
그러자 예수는 말없이 땅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다가 그들이 거듭 묻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라고 일갈한다. 그 한 마디에 군중들은 모두 입을 다문다. 평생 살아오면서 전혀 죄를 짓지 않고 살아온 사람은 극히 드무니 결국 군중들은 입 다물고 서로의 눈치만 살피게 되었고, 그리고 다시 예수가 땅바닥에 글을 쓰고 있자 둘러선 사람들이 하나둘 현장을 뜬다.

모두 자리를 비우자 예수는 여인에게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묻고,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라는 여인의 대답에 여인을 일으키며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고 말하며 끝나는 이야기다.

즉, 사람은 모두 크고 작은 죄가 있으니, 다른 죄인을 비난하고 죄를 물으려 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는 이야기다. 추가로 간음한 여인에게는 앞으로는 간음하지 말 것을 그녀의 양심에 호소한다.

이 일화 외에도 예수는 "남의 눈의 티를 보기 전에 자신의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느냐"고 말하였으며, 주인에게 1만 달란트[7]에 해당하는 빚을 탕감받은 종이 100데나리온[8] 빌려준 동료를 용서하지 않자, 주인이 크게 분노해 1만 달란트 빚진 종을 가두는 비유를 얘기하는 등 위와 같은 교훈을 상당히 강조했다.

3.1. 원저자에 대한 가설

이 내용에는 수많은 의문점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다음과 같다.
후대의 오해 때문에 이 여인이 마리아 막달레나로 여겨지기도 한다. 몇몇 신부들까지도 종종 미사 중에 이렇게 이야기를 할 정도로 흔히 오해하는 부분. 마리아 막달레나가 막달라 출신에 돈이 좀 많은 과부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는 있지만 간음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화제작 종교 영화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도 이런 오류를 범하는데, 마리아 막달레나가 회상하는 장면 중 간음 재판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땅에 글자를 쓰자 바리사이인들이 돌을 바닥에 던진다. 그리고 재판을 받던 여성이 바로 마리아 막달레나.

4. 논쟁

4.1. 논리적

현대에 들어서 이 구절이 피장파장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비판이 있으나, 기독교적(종교적)으로 볼 때 바리사이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예수를 곤경에 빠트리기 위한 것이었음을 감안하면, 예수가 현명하게 대처했음은 분명하다. 논리학적으로 봐도 Yes와 No 어느 대답을 해도 공격당하도록 바리사이가 만들어낸 딜레마 함정을, 예수는 가부가 아닌 제 3의 대답으로 딜레마의 빈틈을 찌름으로써(이른바 '뿔 사이로 피하기') 훌륭하게 논파해낸 셈이다.[14][15]

비록 후세에 첨가된 구절일지 모르나 현대적 입장에서 봤을 때도 도덕적 주장을 감명있게 전달하는 문장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이 구절이 고대에 쓰였으며 당연히 고대의 관점에서 봐야 그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당시의 재판은 기본적으로 대단히 자의적이고,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인 요소가 많았다. 과학기술이 발전한 현대에도 100% 죄인임을 단정하기 어려운 상황은 자주 나타나는데, 고대의 재판에서 난감한 상황이 많이 발생하였고 억울한 희생자도 많을 수 밖에 없었음은 당연히 짐작할 수 있다. 현대에서도 간음이나 간통의 형벌로서 투석형이 이루어지는 지역의 상황(ex. 현대 인도의 악습 사티)을 보면, 고대에는 얼마나 가혹했을지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재판관의 자질이나 수준도, 법률적인 개념 자체도 부족한 게 많았다. 마냥 감정에 호소하고 있다고만 볼 수도 없는 것이, 현대에서도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고 해도 그 죄를 판결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국가가 인정한 정당한 권한을 얻은 법관 밖에 없으며, 당시 예수에게 몰려온 대중들은 현대적인 관점에서 미루어봐도 죄를 확정하고 형을 집행할 만한 자격을 지닌 자라고 볼 수 없다. 일반 대중에게 죄를 심판할 자격이 있냐는 지적은 이후 시대에서 이루어진 인민재판마녀사냥과 같은 상황에 대입해봐도 의외로 날카로운 핵심을 찌르는 부분이다.

또한 투석형이냐 용서냐 하는 극단적인 선택지가 나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에는 죄에 대한 형벌도 엄청나게 가혹하고 잔인했다. 당연히 높으신 분들은 죄를 피해가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덤으로 따라왔다. 제대로 된 재판이라기보다는 마을 사람들이 몰려가서 벌이는 린치에 가까운 것이 투석형의 현실이다.

또한 군중들이 물러간 다음 예수 역시 여인을 단죄하지 않겠다고 천명하는 것 역시 주목할 부분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대 사회에서 여성의 간음을 중죄로 여겨 처벌하였음을 고려하면 예수는 이를 통해 시대를 벗어난 인간존중을 보이고 있다. 이는 예수가 간음이 다시 짓지 말아야할 죄임은 인정하지만 투석형 같은 극형에 처하는 것은 부당하다 여긴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이는 예수의 의붓 아버지라고도 할 수 있는 목수 나자렛의 요셉의 가치관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16]

이런 고대의 막장스러운 상황에 비추어보자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는 감정적인 호소는 오만한 권력자들, 편견에 빠진 단죄자, 공개처형의 잔인한 쾌감에 물들어 있던 대중들에게는 제시하기에 상당한 도덕적인 함의가 있는 문구였음은 분명하다. 역사적으로 많은 기독교 활동가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죄인을 자신과 타자화하지 않고, 인간은 언제나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인권을 개선하는 사회 활동에 참여하였다.

기독교적(종교적)으로 보자면 율법은 죄를 경고하고 죄를 멀리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인데,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다 지킨다고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인식시키면서 죄를 심판하는 권리는 오직 하느님께만 있음을 말하는 구절이다.[17]

예수가 직접적으로 투석형을 막은 이 일화 때문에 기독교에서 '간통죄에 대한 투석형'은 금기시되는 율법이 되었다. 다른 잡다한 구약 율법을 부활하자는 주장이나 실천하는 종파가 많은데, 이것만은 부활을 주장하는 사람도 실행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다.[18]

4.2. 신학적

옛날부터 요한 복음서 원본에 없던 이야기가 후대에 추가됐다는 주장이 존재했다.

성서비평학 관점에서 현재까지 발견된 거의 대부분 초기 성경 사본에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가 들어 있지 않다는 점, 전체 요한 복음서와 문체가 약간 다르고 이질적인 단어와 문구가 많다는 점, 사본에 따라 간음한 여인 이야기가 들어간 곳이 다르다는 점[19]이 이야기 된다. 현재 신학계에서는 요한 복음서의 원저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추가한 내용으로 보는 시각이 주류이다. 교계 또한 학계의 연구 입장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한국 개신교에서 가장 널리 쓰는 개역한글판 성경에서도 '어떤 사본에는 이 부분이 없음'이라는 문구를 적어 놓았다. 공동번역성서는 이 부분에 소괄호가 쳐져 있다. 가톨릭 성경은 '초기의 신뢰성 높은 사본에는 해당 부분이 없음'이라는 주석을 첨하고 있다.

초대 교회 시절 예수에 대해 구전되던 이야기가 어느 시기에 사본에 삽입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간음하다 잡힌 여인 에피소드는 사도 요한 또는 요한으로 알려진 요한 복음서 집필자가 쓴 것은 아니다. 고대의 오래된 성경 사본들을 발굴하고 이를 비교-대조하는 연구가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통해서 성경의 더욱 더 정확한 내용에 접근하고 오류 혹은 첨가의 여부와 그 발생시기 등을 대략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대의 여러 판본들에 존재하지 않는 부분은 원본에도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이 합리적이다. 원본에 멀쩡히 존재하던 것이 고대의 사본들에서 딱 그 부분만 약속이라도 한 듯이 공통되게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한편 이 간음한 여인 일화가 후대에 첨가된 내용이 아니며 오히려 요한 복음서 원본에 적혀있을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이 구절이 문체는 약간 다를지 몰라도 예수가 간음한 여자를 정죄하지 않고 놓아준 일화 속 모습이 8장에서 예수가 가르친 '진리가 죄인을 놓아준다는 사상(32절)'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도 요한의 제자 파피아스(Papias)가 이와 비슷한 일화를 언급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기도 한다. 교회사를 조사 및 정리한 에우세비우스(Eusebius)는 "파피아스가 히브리 복음에 있는 주님 앞에 고소 당한 많은 죄 있는 여자에게 관한 이야기도 해석하였다"라고 기술하였는데 파피아스가 해설했다는 예수 앞에 선 죄많은 여인의 일화는 간음한 여인의 일화를 의미하며 이를 통해 사도 요한의 사상을 계승한 교인들은 이 일화를 알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일화가 요한 복음서에 적혀있을거라 생각하는게 큰 무리는 아니라 보며 설령 요한 복음서에 없을지라도 초대 교회에서 중요히 다뤄온 사실에 근거한 일화라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한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사본에서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는 빼버렸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여자들이 그 이야기를 근거하고 정조 없는 행동의 구실을 삼을까 두려워한 까닭이었다"[20]라는 말을 통해 몇몇 사본들에게서 이 일화가 생략된 근거를 찾는다. 이 일화가 여러 범죄들, 특히 성적 방종을 정당화할 근거로 사용될까 두려워 생략했다는 것이다. 성경 주석으로 유명한 윌리엄 핸드릭스 박사가 위의 근거들을 제시하며 이 일화가 사도의 요한의 사상과 충돌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의 생각에 부합하는 사실일 가능성이 큰 일화라고 주장하며 전통주의적인 성격 해석을 고수하는 학자와 성직자들 또한 위의 근거들을 통해 간음한 여인 일화는 요한 복음서의 원본에 속해있을거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현대 신학의 중론은 이 일화는 후대에 가필되었다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이 일화가 예수의 근본정신과 어긋나지 않고 오히려 직관적으로 잘 전달하고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있다. 또한 종파를 막론하고 설교자들이 애용하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그야말로 예수의 정신을 관통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는 에피소드이기 때문에, 3~4세기 경에 후첨된 일화임에도 불구하고 전달 과정에서 본문으로 편입되었고, 심지어 현대에도 학문적으로는 실증성이 떨어짐에도 불구하고 본문이라고 주장되는 것이기도 하다.

5. 패러디

예수가 길을 가고 있을 때, 사람들이 한 여자를 돌로 치고 있었다. 예수는 그 여자의 사정을 들은 뒤, "너희 중 죄를 짓지 않은 자만이 이 여자를 돌로 쳐라."라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돌 던지기를 멈추었고, 예수 혼자 돌을 던지고 있었다.[21]
짧고도 명료한 주제를 가진 이야기라서 많은 패러디가 있다. 대개 핵심적인 대사인 "너희 중 죄를 짓지 않은 자만이 이 여자를 돌로 쳐라."의 경우, 그대로 인용하거나 약간 비틀어서 상대방의 모순을 비판하는 용도로 자주 쓰인다.

6. 기타


[1] 신약성경의 그리스어 원전으로 취급되는 사본들 중에서는 이 괄호 부분이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개역한글판이나 개역개정판은 있는 쪽 사본을 택하였고, 공동번역은 없는 쪽 사본을 택하였다.[2] 히브리어로 פְּרוּשִׁים(perushim). 그리스어로 Φαρισαίοι(Pharisaíoi). 유대교 내의 문자중심적 율법주의 학파였던 하시드인을 계승한 평신도 집단을 일컫는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예수의 행적은 바리사이인 내 개혁파였던 힐렐 학파와 가깝다고 평가받는다.[3] 히브리어로 סוֹפְרִים(soferim) 또는 토라, 테펠린, 메주자를 전사하는 서기관이라는 의미의 סוֹפֵר סְתָ״ם‎(sofér s'tám). 그리스어로 γραμματείς(grammateís). 당시 유대 지방 최고의회였던 산헤드린의 구성원으로 토라와 모세의 율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일반적으로 랍비로 알려져 있다.[4] 당시에는, 또 기독교적 관점으로는 "부부관계 이외의 모든 성관계"를 간통으로 보았으므로 현대 형법상의 간통과는 다른 개념. 즉, 불륜 뿐 아니라 혼전관계 또한 부도덕하게 보았다.[5] 바리사이인들이 예수에게 이런 낚시를 몇 번 더 건 적이 있지만, 낚인 적은 한 번도 없다. 대표적으로 카이사르, 즉 로마 제국세금을 내어야 하는지 물은 적이 있는데, 내야 한다고 대답하면 로마의 앞잡이로 찍힐 것이요, 내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면 불순분자로 고발당할 판이였다.(심지어 이걸 노리고 친로마 세력인 헤롯당 사람들을 대동한 상황에서 이 질문을 던졌다. 원래 서로 견원지간이나 둘 다 예수가 눈엣가시인 상황에서 일단 예수부터 잡고 보기로 합의를 본 것이다.) 그러자 예수는 거기에 은전에 새겨진 초상이 누구의 초상인지 묻자 그들은 카이사르의 초상이라고 했다. 그러자 예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하느님의 것하느님에게'라는 명답으로 바리사이인들을 침묵시킨 바 있었다.[6] 유대인들의 자치기구로 유대율법에 기반해서 재판을 한다.[7]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하며 당시 기준 약 20-40kg의 금에 맞먹는 가치를 가진다. 여담으로 해당 단어는 재능을 의미하는 단어 탤런트(talent)의 어원이기도 하다.[8] 1데나리온은 약 4g 정도의 은화로,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였다.[9] 저항하지 않고 맞고 있었던거나 예수 앞에서 한 말 등으로 볼때 확실히 간음을 하긴 한 모양이다.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올가미에 얽히게 하기 위해 데려왔다는 대목을 보면 적어도 완전히 말이 안되는 행위를 하는건 오히려 자기네들에게 독이다.[10]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집안의 생계를 담당하던 보호자가 죽어서 매춘으로 몰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물며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고 살기에는 허용된 업종이 적고 자본이나 특정한 기술도 없던 그 시대에는 여성들이 가족 부양을 위해 매춘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수 시대에서 한참 뒤 시대가 배경인 장미의 이름에서도 이런 여인이 나오는 판에.[11] 심지어 어디다 새긴 것도 아니고 흙바닥에다 쓴 글씨이니 누가 밟던지 해서 지워졌을테니 고고학적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이를 다룬 다른 기록이나 돌맹이에서 예수의 지문이라도 찾아내지 않는 이상...정말 타임머신이 개발되기 전까진 영영 알 수 없게 된 것.[12] 눅 24:44, 요 5:46~47.[13] 이러한 맥락에서 훗날에 예수를 처형할 때에도 유대인들이 스스로 처형하진 못하고 로마 법정에 끌고 가서 반란분자라는 죄를 씌워우고 공권력으로 처형했다.[14] 그러니까 이 일화에서 논리적 오류를 따지는 것이 의미가 없는게, 어차피 목표는 예수였고 여인은 살면 살고 죽이면 죽이고 그냥 예수를 공격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애초에 여인이 어떻게 되든 별 상관이 없던 셈.[15] 애초에 이를 보고 피장파장의 오류를 언급하는 것이 논리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담고 있다. 논리학은 전제명제가 참일 때 반드시 참인 다른 명제를 찾아내는 추론규칙에 대한 학문이고, 피장파장의 오류는 반드시 항상 참이 되진 않는 여러 추론방식 중 하나를 언급할 뿐 그 방식으로 얻은 결론이 반드시 거짓임을 의미하지도, 그 방식의 논변을 사용하는 것이 모든 경우에 부당함을 의미하지도 읺는다. 즉, 논리적으로 맞지 않더라도 참에 다다르는 것은 가능하단 말이다. 또한 맥락이 참으로 답하건 거짓으로 답하건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인데 여기에 오류론을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하다.[16] 가브리엘 천사에 의해 예수에 관한 사실을 전달받기 전까지는 누가 봐도 마리아가 간통한 것으로 의심되고 그렇게 믿은 상황에서도, 사실이 알려지면 마리아가 사형당할 것임을 우려해 조용히 연을 끊고자 하였다.[17] 당시 예수와 대립적 입장이 가지고 있던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율법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사용했으며 율법을 통한 공포로 대중들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했다. 당연히 이들을 궤변과 모순에 당대에도 많은 지식인들과 랍비같은 종교인들도 부패하고 교조적인 종교인들을 비판하였고 예수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율법을 빙자하여 죄인들을 회개시키긴 커녕 잔혹한 처벌로 공포분위기를 유지하려는 그들을 비판하였다.[18] 아주 없는 건 아니고 '루세스 러시두니(Rousas Rushdoony)'라는 미국 목사가 있다.미친놈[19] 7장 36절 뒤에 나오기도 하고, 21장 25절 뒤에 붙기도 하고, 요한복음 가장 뒤에 나오기도 하고, 누가복음에 나오기도 한다.[20] De Adulternis Conjugiis II. 7[21] 이 유머는 종교 유머/기독교 문서에도 존재한다.[22] 정교회에서는 7대 세계 공의회까지 결의된 교리는 반드시 믿어야만 하는 무류한 교리로 보지만, 다른 교리들은 전승에 따라 해석이 천차만별로 갈리기 때문에 성모무염시태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논쟁이 있다. 때문에 성모 마리아의 사후 안식이라고 교리로 가르치는 정교에서도 가톨릭처럼 성모승천을 교리로 가르치는 지역교회도 있고, 대체적으로 성모 마리아수태고지 때에 원죄에서 벗어났다고 교리로 가르치는 정교에서도 가톨릭처럼 성모무염시태를 교리로 가르치는 지역교회도 있다.[23] 전승에 따라 지역교회마다 교리의 해석이 갈리는 것은 가톨릭도 마찬가지이지만, 정교에 비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이루어져 있고, 성모무염시태의 경우 교황무류성에 의거하여 선포된, 신자라면 반드시 믿어야 할 교리에 속하므로 논쟁의 여지가 없다.[24] 혹은 프로테스탄트식 명칭인 '스데반'으로 부르기도 한다.[25] 스테파노는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하고 나서 선교활동을 했고 사도 바울로와 동시대 인물이다.[26] 참고로 고우영 화백은 가톨릭 신자였는데, 이 때문인지 이것 외에도 작품 내에서 성경의 일화를 패러디하는 경우가 많다.[27] 다만 조조는 그 서너 명에게 감동하지 않고 되려 "거짓말 할 주변머리조차 없는 병신들"이라고 속으로 비웃었다.[28] 이때 병사 1명이 그들에게 돌이 아니라 수류탄을 던져서 죽인다. 날아온 수류탄이 폭발하는 순간 한 신하 왈, "억울하다! 이 시대에 수류탄이 어디 있냐!"[29] 1631년 판본.[30] 1716년 판본.[31] 사실 간음 말고도 엄청나게 오탈자가 많아서 성경 오탈자들 중 독보적인 수준이다.[32] 현대 가치로 약 7000만원.[33] 이 여자가 하필 박미진의 딸 초희로, 변절자 사화동의 아내였다.[34] 소위 '사랑의 매' 드립을 비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