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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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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대한민국의 가부장제3. 역사적 흐름
3.1. 과거의 가부장제
3.1.1. 고려의 가부장제3.1.2. 조선 전기의 가부장제3.1.3. 조선 후기의 가부장제
3.2. 현대의 가부장제
4. 관련 문서

1. 개요

Patriarchy

한자를 그대로 풀어쓰면 '가정(家) 아비(父) 연장(長)자 제도(制)'이다. '부권제(父權制)'라고도 한다.

가부장이 가족성원에 대해 강력한 책임과 권한을 가지고 가족을 지도·통솔하는 가족형태이다. 농경 및 산업의 시대를 지나 점차 개인주의의 사회로 빠르게 변화해가며, 현대에는 남성만의 통솔력 및 독점적 힘이 약화되어가는 중이다.

2. 대한민국의 가부장제

대한민국은 전통적으로 유교적 가부장제에 대한 의식이 강고하지 않았다. 애초에 남녀가 결혼을 하면 남자가 처가에서 일정기간 살았던 것이 우리 민족의 오랜 혼인 풍습이었는데[1] 가부장적인 분위기가 확고하게 정착된 역사는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사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전통적인 양반층은 여성의 학문 공부를 적극 장려했으며, 부부간엔 서로 존댓말을 썼다고 한다. 즉, 여성 차별은 현대의 일반 대중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덜 일어났다는 것이다. 사실 양반 집안에선 아들 못 낳는다 해도 부인/며느리를 잘 구박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처가에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며, 아들 항렬의 친척을 양자로 들이면 해결될 문제였다. 다만 한민족의 전통 풍습이었던 처가살이 같은 것은 사대부들이 주도하여 풍습을 바꾼 것이 맞다. 여성이 학문 공부를 장려하는 것 또한 한석봉의 어머니 같은 모습을 좋아한 것이지, 진성여왕 같은 여성 지도자는 고려시대의 유학자부터 무척 싫어하였다.

지금 한국인의 인식에 박힌 가부장제는 변질된 유교적 전통의 발현으로, 양요,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 수많은 사회적 혼란을 거치면서 밑바닥까지 추락한 끝에 지금의 형태로 고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찌 됐건 조선말•일제의 영향으로 인해 강력한 가부장 문화가 대한민국에 뿌리내렸고, 1997년 외환 위기 전까지 이 분위기는 지속되었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에는 젊은 남성들은 가부장제를 부정적으로 보고 사회적 부조리로 인식하고 있으며, 실제로 남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됐다. 2000년대 이전에는 평균 노동시간이 매우 긴데다가,[2] 노동착취가 만연하여 야근과 주말 출근 때문에 주말에도 가족들 얼굴을 못보면서 일하는 경우가 많은데다가 직장내 갑질이나 내리갈굼 정도를 넘어서 많은 직장에서 체벌이 공공연하게 벌어졌던 시대인지라 사회초년생들이나 하위직급을 가진 직장인들이 직장생활하기가 편하지 않던 시대였다. 친가 식구들이 남자들에게만 잘해주듯이 여자들에게 못되게 굴기도 했다.

교회에서도 목사들이 성경에 나온 특정구절만 요약해서 설교하는 바람에 교인들이 성차별을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또한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해도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당하는 경우가 위낙에 허다하니 이웃이나 친인척들이 가족들 생각해서라도 직장에 계속 다녀야지 라는 식으로 가스라이팅을 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 만큼 손해는 감수해야되었던것이었다.

그래서 이 당시에 남자들이 큰 소리를 낼수 있던 이유 중 하나가 대다수 직장의 환경이 시궁창인 상황에서 그 만큼 고생하며 돈 벌었다는것을 빤히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당시에는 대다수의 기업에서 여자 직원은 결혼적령기가 되면 퇴사시킨다는 불합리한 규정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이 때문이라도 남자들이 울며겨자먹기 식이라도 장시간 노동을 감내해서라도 가족을 부양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기도 했다. 특히 '가장'노릇을 해야 한다면서 남성에게 압력을 주는 일이 사회적으로 만연했었다. 즉, 당시 사람들이 마냥 원해서 가부장제가 확고했던 것은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가부장제 시대라해도 이 당시에도 여자들이 일을 안 한 것은 아니었고, 알바일을 하거나 자영업에 종사하는 식으로 경제활동에 참여할 사람은 참여했었다. 산업화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가부장적 분위기가 심한 시대의 전통에서도 중하류층 이하는 섬집 아기라는 동요에 묘사되듯 장사, 밭일, 무언가를 캐오는 일 같은 것을 여성이 다 하고 상류층이나 이런 일을 안했기 때문에 여성의 경제 활동은 교과서에서는 안 다루는 '공공연한 비밀', '경제 활동이더라도 남편의 밖일과 구분되어야 할 일' 정도로 여겨지며 일은 다 하고 살았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여성해방운동이 본격화되며 가부장제는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의무를 제외하곤 흐려지기 시작한다. 다만 단순히 여성해방운동때문에 가부장제가 쇠퇴했던것은 아니었다. 사실 가부장제가 쇠퇴했던것은 IMF 외환위기로 인해서 사기업들의 직장안정성이 현저히 악화된데다가 그러면서도 대학진학률은 80%까지 오르다보니 양육비와 교육비 증가추세는 꺽이지 않았고, 이 때문에 생활비는 지속적으로 올라가는 바람에 외벌이로만 지출을 감당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에 여성들이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이 높아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마냥 원해서 가부장제가 하루아침에 없어진것은 아니었던것이었다. 다만 일선기업에서는 평생직장 개념은 집어치우면서도 여전히 가부장제 시절의 고용관행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 때문에 출산율이 급속히 하락하는 테크를 밟았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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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관광부의 '2016년 한국인의 의식·가치관 조사 출처
시대가 이렇게 바뀌면서 아버지는 가정 내 권력은 잃어가고 점차 가족에게서 소외되면서 그저 '돈 벌어다주는 기계'로 책임만 강요 당하는 현실에 절망하며 생활비를 내지 않겠다는 갈등이 점차 커지고 있는 양상으로 바뀌면서 문제가 되고 있다. 기사 그것과 별개로 현재 20대 남성 83.4%가 '공평한 가사분담'을 지지한다. 기사 이는 젊은 세대로 갈수록 남성들이 가부장제를 경계한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한국 페미니스트조차 여성이 돈을 못 벌던 시절의 기준을 현대에 적용하여 남성에게 돈을 많이 원한다든가, 궂은 일을 안 하려는 것을 당연히 여기거나 나는 이런 풍조를 못 고치겠다며 스스로 무능하게 여기는 양가적 차별에 기반한 가부장제 관념이 서구보다 강하게 나타난다. #

그러나 아직도 남녀의 가사 노동 시간은 분명히 차이가 나며 이는 2020년 기준 3.4배에 달한다고 한다. # 또한 2022년 기준 여성의 비정규직 비율은 남성에 비해 16% 정도 높다. ## 간단히 통계를 찾아봐도 2024년 현 시점, 여전히 여성은 남성에 비해 가사나 육아 등 집안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으며 이와 병행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나 비정규직, 프리렌서 직업에 더 많이 종사하고 있다. 따라서 '가부장제'의 영향이 모두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려우며 이는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역사적 흐름

3.1. 과거의 가부장제

농업사회에서는 땅을 일굴 노동력 때문에 남성의 힘이 강해졌다고 보통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여성도 상당부분을 농사일, 혹은 남편의 본업에 같이 참여하였다. 이에 더해 남성 또한 가사노동에 자주 참여하는 등 분업의 경계는 상대적으로는 모호했고, 때문에 안정적인 농경 사회의 경우 여성의 입지가 현대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낮지만은 않았다. 반대로 북유럽, 중동, 중앙아시아 등 타 집단 간의 무력 분쟁이나 약탈이 빈번한 지역의 경우 남성의 권력이 강화되는 경향을 보였고, 전술한 농경 사회에서도 귀족층의 경우 남성과 여성의 성역할이 뚜렷하게 나뉘어지고 그만큼 가정 생활 역시 남성이 주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가부장제 하에서 남성은 가정 내의 결정을 주도하는 대신 가족 전체의 안전을 책임지고 보호할 의무를 가졌다.

허나 이런 남성의 권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 제도가 정비되고 정부의 통제력이 강해지면서 약해졌다. 한 마을에 모여살며 남성들이 치안을 담당하고 의견을 조율하던 과거와는 달리, 노동자들이 도시로 몰려들며 집단촌이 점차 해체되기 시작했고, 도시로 모여든 주민들은 주변 남성들이 아닌, 국가의 경찰력과 사법력으로 보호받게 되었다. 허나 가부장제가 쉽게 해체되진 않았다. 해가 지면 집에 들어왔던 농본사회와는 달리, 산업화 이후엔 남성이 오랜 시간을 공장에서 일하게 되며 집에 밤 늦게 들어오게 되었다. 결국 여성이 가사노동을 전담하는 식으로 분업화되었고, 이에 따라 혼자 일하는 남성이 오롯이 경제력을 쥐게 되었다.[3] 허나 가사를 도와주는 가전제품들의 발달이나 근력이나 체력을 크게 요하지 않는 서비스직의 발달 등과 여성의 사회, 경제, 정치에 참여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현재로서의 가부장제의 비중은 점차 낮아젔다.

단, 여성이라고 권력에서 완전히 배제된 것은 아니다. 권력은 주로 신분과 재산을 따라갔었다. 높은 신분이거나 재산이 많은 경우 여성도 권력을 가진 경우가 존재한다. 다만 상술했듯이 사회안전망 시스템이 잘 정비되지 않고,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체가 약한 여성이 스스로를 지킬 수단이 별로 없는데다가 모든 활동에 신체력이 많이 필요하던 과거에는, 남성에 비해 권력을 유지하기 더 어려운 상황에 자주 노출되었다. 극단적인 상황으로 맨몸뚱이 빈털터리로 무연고자가 살아가야 할 때(전근대 사회에서 재난이나 전쟁, 불상사로 인하여 발생할 수 있는) 밭을 갈거나 산이나 숲, 강에서 먹을 것을 찾거나 누구 밑에 들어가 일을 해주며 살거나 어떠한 생존 방식을 선택하더라도 단독 생존을 시도하려면 노동력이 높은 남성의 생존가능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결국에 여성이 자신의 생존 확률을 높이려면 상호보호를 보장하는 어떠한 집단에 소속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 효율적인 선택이었다.[4] 이러한 안전 보장 집단은 다양한 형태를 띌 수 있지만 역사적으로 확인된 시기들을 기준으로 보면 남성을 우두머리로 둔 부계/모계 중심의 씨족이 일반적이다.

사회에서는 가부장은 가문 내부에서 아내와 자녀 등 가문의 구성원에 대하여 인신구속권을 가지며, 결혼 등으로 가문을 나갈 때는 미리 가부장의 허가를 받는 경우가 많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가부장의 허가를 받지 않은 무단 결혼은 간통과 같이 취급된다. 노예가 허용되는 사회에서는 구성원을 노예로 파는 것도 용인되었다.[5] 또한 중국에서도 1911년 중화민국이 성립하기 전에는 법률에 의해서 가부장이 자식들을 노비로 팔거나 죽일 수도 있었다.[6] 가부장은 인신구속권에 따라서 구성원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 처벌을 내릴 수 있다. 이러한 처벌은 많은 경우 폭력적이다. 처벌을 내릴 권한은 법률적으로 인정되거나 사회적으로 용인받는다. 아프간의 탈레반들이 바로 이런 폭압적인 가부장제의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폭압적 가부장제는본래 취지와는 다르게 장기적으로 억압된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고 각종 폐단을 축적시킬 가능성이 크다. 가정, 더 나아가 사회를 유지하고 보존하는 것은 구성원 간의 상호신뢰이지(심지어 군대조차도 그렇다) 가장과 같은 소수의 독재적인 판단이 아니기 때문.

과거 여성들이 가부장제로 인해 겪은 대표적 폐단이 남아선호사상이다. 과거 사회에서 여성은 내부 활동이, 남성은 외부 활동이 잦았기에 남성이 대다수의 책임을 부여받게 되었다. 때문에 관직에 오르거나 높은 자리로 진출할 수 있는 것은 대부분 남성이었고 따라서 집안의 대를 잇는 것 역시 자연스럽게 남성의 몫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한민국에서는 심화된 남아선호사상이 80-90년대의 여아 낙태 문제 같은 사회적으로 매우 좋지 못한 사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98년까지만 해도 한국은 부계혈통주의였으며, 2007년까지만 해도 기혼녀는 호주제로 인해 남편 호적에 들어갔다. 심지어 남편이 사망 시 장남이 호주가 되어 어머니가 어린 아들의 호적 아래 들어가는 이상한 사태가 일어나기도 했다.[7]

한편 동성애남색을 강하게 반대하는 종교[8]가 영향력이 강한 지역들의 공통점 중의 하나가 가부장제가 매우 심한 지역들이라는 것이다.[9] 그러나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가부장적이면서 동성애가 만연한 고대 로마와 그리스, 중세 일본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10] 사실 가부장적인 문화에서는, 특히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 및 문화권에서는 게이레즈비언 뿐 아니라 남녀간의 결혼을 통한 성행위 이외에는 전부 안 좋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11][12]

3.1.1. 고려의 가부장제

고려도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남성 우월적 사회였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조선 후기처럼 남녀 구분이 엄격하지 않았다. 남성과 여성이 결혼하면 남성이 친정에 가 생활하는 서류부가혼이 성행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은 결혼 후에도 각자의 재산권이 보장되었으며, 이혼 후 여성측에서 남성에게 재산권을 요구한 기록이 있는 동시에 여성이 이혼을 요구하는 것이 가능했다.

제사는 현대처럼 남성만 지내는 것이 아닌 서로 돌아가면서 하는 윤행봉상였으며, 재산은 남녀 차별없이 균등 상속되었다.

3.1.2. 조선 전기의 가부장제

고려의 불교와 대비되게 조선은 유교의 힘이 강해지자 음양 이치에 맞지 않는 남귀여가혼(서류부가혼)을 친영(시댁에서 시집살이하는 것)으로 고치려는 시도를 조정에서 왕실이 모범을 보여야한다고 행하였다. 그러나 정작 사대부들도 잘 실행하지 않았으며 반발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족보에서는 남녀는 차별없이 태어난대로 적혔으며 친손과 외손이 같은 비중으로 실렸다.

그래도 조정의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진 않았는지 친영과 남귀여가혼을 반쯤 섞은 반친영(?)이 16세기 중엽에 성행되었다.

3.1.3. 조선 후기의 가부장제

양란 이후인 17세기 중반부터 우리가 아는 현대의 가부장제 형태가 등장했으며, 장자 우대와 여성 차별이 심해졌다. 혼인은 완전히 친영으로 바뀌었으며, 여성이 주도된 이혼은 보기 힘들어졌을 뿐더러 여성의 재산권이 박탈되었다.

족보에서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며 남성을 우선 적는 선남후녀가 정착되었다.

3.2. 현대의 가부장제

현대 사회는 정부에 의한 치안의 강화, 교통과 통신의 발달, 그리고 누구든지 좋은 직장을 가질 수 있는 지식산업 위주로 개편되면서 여성도 사회생활과 영리 활동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식산업 위주의 개편이라 함은 과거에 비해 남성의 신체적 우월함, 남성만이 관직에 오르는 사회적 시스템이 사라지면서 그 존재의 중요성이 크게 줄어들었단 뜻이다.[13] 그리고 기술의 발달로 가사노동의 난도가 과거에 비해 감소하였다.[14] 현재 대표적인 논란거리는 맞벌이부부의 가사노동이나 육아의 분담 문제로 이건 가정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문제다 보니 정답이 있다고 제대로 확답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아직 현대는 완전히 육체노동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세대적으로도 기성세대들은 여전히 대부분 남성이 가정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이나 청장년층은 서서히 맞벌이로 바뀌어가고 있는 등 여러모로 과도기적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여전히 상주를 남성만 할 수 있거나, 아직도 대부분이 부계성을 따르는 등 가부장제의 흔적은 남아있다. 이런 상황에서 2010년대 표를 얻기 위해 이슈를 이용하는 기성세대 정치인, 성차별/통계임금격차 같이 통계의 함정을 이용하여 호도하는 언론과 시민단체, 나아지기는커녕 악화되어가는 젠더 문제 등이 복합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성별에 상관없이 함께 타파해야할 과거의 잔재'라는 주장을 시작으로 '오직 여성만이 가부장제의 피해자'라거나 '남성들도 가부장제의 피해자라는 주장'도 있다.

4. 관련 문서



[1] 보통 처가에서 3년 정도 살면서 일을 해주고 그 후에 시집으로 와서 살았다. 딸이 출가해서 사라지는 노동력을 보상해준다는 의미다. 하지만 시집에 아들이 많고 처가에는 아들이 없으면 합의하에 처가로 넘어가서 대를 잇는 경우도 있었다. 고구려 시대부터 관련기록이 있다. 즉, 데릴사위 전통의 시작을 아무리 늦게 잡아도 기원전인 셈이다. 고려시대 문벌귀족과 조선 중기까지의 양반도 당연히 그렇게 했다. 여자가 처음부터 남자의 집으로 들어와 사는 문화는 17세기 이후에야 나타난다.[2] 1980년대에는 연간 평균노동시간이 2800시간, 1990년대에는 2600시간은 찍어주었다.[3] 이런 외벌이 현상은 미국의 경우 20세기 중반에 가서야 일반적인 모습이 된다. 일하는 남편, 가정에 충실한 아내라는 스테레오타입은 미국의 50년대 중산층 가족을 대표하는 이미지.[4] 물론 남성 역시 자녀 생산을 통한 노후보장과 인구 증가에 기반한 집단의 생존 확률 증대를 위해서는 여성의 존재가 필수적이다.[5] 로마의 십이표법을 보면 "아버지가 자식을 3번 노예로 팔면 자식은 아버지의 지배권에서 해방된다"는 조항이 있다. 바꿔 말하면 3번씩이나 노예로 팔 수 있다는 거다.[6] 중국의 오래된 속담인 "아버지가 죽으라고 명령하는데, 자식이 이를 거부하면 불효자식이다"도 이를 반영한다.[7] 다만 이러한 행보는 근대 사회에 들어서며 생겨난 폐단들이지, 과거 사회에서부터 쭉 이어져온 현상은 아니었다. 조선 시대의 양반가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평민들은 집안의 대를 이을 이유가 없었고, 더욱이 호적·족보가 없없기 때문에 이같은 폐단은 생기기 어려운 환경이었다.[8]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9] 실제로 성소수자의 권리가 비교적 잘 보장되어 있는 나라들은 성평등 의식 역시 높은 경우가 대부분이다.[10] 그리스 문화권은 게이에게는 관대했으나 레즈비언의 사랑은 가장 열등한 것으로 보았다. 남성우월주의가 극심한 사회로, 남성간의 사랑은 신성시되고 여성성은 극도로 부정되는 성차별에 기반한 동성애 허용에 가까웠다.[11] 사실 고대 그리스의 영향으로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큰편이 아닌 고대 로마(기독교 도입 전)조차도 이런 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부장제의 영향으로 고대 로마에서는 아버지는 자식의 생살여탈권까지 가지고 있었고, 로마 시민은 남자답게 박을지언정(penetrate) 박혀서는(penetrated) 안되는 존재였다. 즉, 고대 로마에서 황제원로원 의원 등 높으신 분들이 동성애자인 경우 전부 다 공 즉 탑 포지션이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트라야누스 황제가 특히 그러했다. 또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경우 20대 초 청년시절에 술라숙청을 피해 비티니아에 망명해 있으면서 비티니아 왕 니코메데스 4세과 관계를 맺으며 바텀 역을 했다는 섹스 스캔들이 퍼진 이유만으로 정계활동 내내 카이사르의 약점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놓고 로마 시민 자신이 바텀임을 주장한 결과가 어땠는지는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최후가 이를 말해준다.[12] 실제로 로마 제국에서든 수메르 신화에서든 '남자로서 삽입 당하는 것'을 그 자체로 사회적 죽음인 것처럼 이야기하며, 수메르 신화에서는 자기가 남자를 강간해 놓고서 "이 남자는 삽입 당했으므로 자유민이 아니다"라고 언플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스 문화권이 스파르타를 제외하면 여성성이라 생각되는 관념을 극히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13] 어디까지나 과거에 비해서다. 여전히 남성의 신체적 우월함이 요구되는 직종은 매우 많다. 물론 현대에는 안정적으로 몸을 덜 쓰며 편하게 머리 굴리면서 하는 고소득 직종이 몸을 혹사시키는 고소득 직종보다 압도적으로 인기가 더 많은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일례로 주변에서 특히 체력 좋다고 소문난 남성조차 힘들고 고된 일보다는 편한 일을 선호하는 일이 더 많다는 걸 생각해보자.[14] 과거에는 가사노동을 전문적으로 해줄 사람이 필요 했지만 현대에 와선 1인 가구로 생활이 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