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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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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럼,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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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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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es Album
VANISHING VISION
(1988)
1st Album
BLUE BLOOD
(1989)
2nd Album
Jealousy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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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th Alb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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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I'LL KILL YOU1986년オルガスム
1989년 | ENDLESS RAIN 1990년WEEK END
1991년Silent Jealousy | Standing Sex / Joker | Say Anything 1993년Tears
1994년Rusty Nail 1995년Longing ~跡切れたmelody~ | Longing ~切望の夜~
1996년DAHLIA | Forever Love | CRUCIFY MY LOVE | SCARS 1997년Forever Love(Last Mix)
1998년THE LAST SONG2008년I.V.
2011년Scarlet Love Song -BUDDHA MIX- | Jade 2015년 BORN TO BE FREE
2023년Angel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argin-top: -5px; color: #ff0d13; min-width: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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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일본 치바현 타테야마시
장르 록 음악, 메탈, 발라드
레이블 EMI
소속사 William Morris Endeavor Entertainment
활동 시기 1982년[1] ~ 1997년
(재결성: 2007년 ~ 현재)
멤버
[ 펼치기 · 접기 ]
YOSHIKI(드럼 & 피아노)
Toshl(보컬)
PATA(기타)
HEATH(베이스 기타)(사망)
SUGIZO(기타 & 바이올린)
HIDE(기타)(사망)
TAIJI(베이스 기타)(사망)
공식 사이트 The Official X Japan Website
링크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멤버3. 일대기
3.1. X
3.1.1. 인디 시절3.1.2. 메이저 데뷔
3.2. X JAPAN3.3. 해체 이후3.4. 재결성
3.4.1. 2008~20143.4.2. 2014~20173.4.3. 2017~20233.4.4. 2023년~
4. 음악 특징5. 여담
5.1. 팬이거나 영향을 받은 뮤지션5.2. 한국인들이 좋아한 대표적인 일본 뮤지션5.3. 사건/사고5.4. 대마신오인조(大魔神五人組)
6. 영화
6.1. We are X6.2. Junk story6.3. HURRY GO ROUND
7. 디스코그래피
7.1. 싱글7.2. 앨범
7.2.1. 정규7.2.2. 라이브7.2.3. 컬렉션7.2.4. 리마스터7.2.5. 사운드 트랙
8. 라이브 콘서트 목록
8.1. 개별 문서가 있는 라이브 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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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비주얼계 록밴드.

2. 멤버

멤버 일람
드럼 피아노 보컬 베이스 기타 기타 바이올린
현 멤버[2] YOSHIKI Toshl HEATH PATA SUGIZO
TAIJI HIDE
전 멤버 ATSUSHI[3] TERRY[4] EDDIE
HIKARU[5] TOMO
HALLY[6]
JUN[7]
ZEN[8]
KERRY
SATORU
ISAO[9]
멤버 변동 내역[10]
드럼 피아노 보컬 베이스 기타 기타 바이올린
1982년 YOSHIKI Toshl ATSUSHI TERRY
1984년 YOSHIKI Toshl ATSUSHI TERRY TOMO
1985년 6월 YOSHIKI Toshl ATSUSHI TERRY EDDIE
1985년 10월 YOSHIKI Toshl TAIJI JUN HALLY
1985년 11월 YOSHIKI Toshl TAIJI JUN
1986년 1월 YOSHIKI Toshl HIKARU ZEN
1986년 4월 YOSHIKI Toshl HIKARU JUN
1986년 11월 YOSHIKI Toshl TAIJI KERRY
1986년 12월 YOSHIKI Toshl TAIJI KERRY SATORU
1987년 1월 YOSHIKI Toshl TAIJI ISAO HIDE
1987년 4월 YOSHIKI Toshl TAIJI PATA HIDE
1992년 1월 YOSHIKI Toshl 공석[11] PATA HIDE
1992년 8월 YOSHIKI Toshl HEATH PATA HIDE
1997년 12월 31일 X JAPAN 해체
2007년 10월 YOSHIKI Toshl HEATH PATA 공석[12]
2009년 5월 YOSHIKI Toshl HEATH PATA SUGIZO
2023년 11월 YOSHIKI Toshl 공석[13] PATA SUGIZO

2.1. YOSHIKI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Yoshiki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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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SHIKI
요시키
파일:XJAPAN-YOSHIKI.png
본명 하야시 요시키 ( )[14]
출생 1965년 11월 20일, 일본 치바현 타테야마시 ([age(1965-11-20)]세)
공식 사이트 Yoshiki Official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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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Toshl[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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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shl
토시
파일:XJAPAN TOSHI.png
본명 데야마 토시미츠 (出山 利三)
출생 1965년 10월 10일, 일본 치바현 타테야마시 ([age(1965-10-10)]세)
공식 사이트 Toshl Official WEBSITE 武士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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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P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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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A
파타
파일:XJAPAN-PATA.png
본명 이시즈카 토모아키 (石塚 智昭)
출생 1965년 11월 4일, 일본 치바현 치바시 ([age(1965-11-04)]세)
공식 사이트 PATA Official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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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HEATH

HEATH
히스
파일:external/visualioner.files.wordpress.com/320.jpg
본명 모리에 히로시 (森江 博)
출생 1968년 1월 22일, 일본 효고현 아마가사키시
사망 2023년 10월 29일 (향년 55세)
공식 사이트 HEATH Official Website
본명은 모리에 히로시(森江 博). 1992년 1월 베이스 주자였던 타이지의 밴드 탈퇴 후 약 반년간의 공백을 거친 뒤 새로이 영입된 멤버로 히데의 전 여자친구의 애인이라는 인연이 주효하게 작용해 밴드 X JAPAN에 가입하였다. 전 여친의 현 남친을 밴드에 데려오는 히데의 대인배성은 도대체... 타이지의 후임을 뽑는 베이스 오디션에서도 전혀 긴장하지 않고 덤덤하게 베이스를 연주한 일화는 오래전부터 유명하다.

주로 사용하는 악기는 히데와 같은 페르난데스 회사의 베이스로 워록 프레시전 베이스, 스탠다드 투 프레시젼 베이스를 주력으로 썼으나, 재결합부터는 재즈 베이스를 주로 쓰고 있다.

베이스 라인에 멜로디컬한 부분을 가미하고 화려한 테크니컬 플레이를 선보이는 등 X 내에서 존재감을 강하게 드러냈던 타이지와 달리 베이스의 기본 역할에 충실했던 부분에서 X 가입 당시 타이지와 상당히 많은 비교를 받았다.[16] X JAPAN의 후임 베이스 주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소화해 내는 데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을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고 평할 수 있다.[17] 엄연히 완벽주의로 유명한 요시키가 정식으로 주최한 오디션에서 합격한 베이시스트임을 생각할 때, 실력적인 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하기에 힘들다고 평가된다. 다만 타이지가 편곡 부분에 있어서 높은 참여도를 보이는 등, 자신만의 카리스마를 확실히 어필했던 것에 반해, 자신만의 음악적 어필이 부족하고 세션 베이시스트의 인상이 짙은 히스에겐 아쉽다는 평가가 많은 듯하다. 타이지 탈퇴 전후로 사운드가 크게 달라졌다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지만, 애초에 타이지와 요시키의 음악적 갈등은 작편곡권 쟁탈전 양상이였고 사운드가 달라진 문제는 오히려 타이지 탈퇴 후 주도권을 확실하게 잡은 요시키가 하고 싶은대로 자신의 음악을 강력하게 하게된 이유가 크다.

합을 맞추느라 늘 요시키 쪽을 바라보면서 연주하거나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 당황한 모습이 역력했던 이전의 막내 시절[18]과는 달리 재결성 이후로 제법 관록이 붙은 모습이 되었으며 이전보다 뚜렷하게 들리는 베이스 사운드로 팬들의 많은 호평을 받았다. 요시키, 토시에 비하면 비중이 여전히 적은 편이지만 이전에 파타와 세트로 공기 취급 당하던 시절보다는 나은 듯하다. 2009년에는 히데에 대해서 요시키와 설전이 있었으며 탈퇴 소동이 일어나면서 아이러니하게 밴드 내 존재감이 더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SUGIZO까지 가입하면서 17년만에 막내 탈출했다.

X JAPAN으로서의 활동 외에는 솔로로서의 활동 및 파타, 히데 밴드의 I.N.A와 함께 Dope HEADz라는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한 바가 있다.

23년 11월 8일, 히스의 사망 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향년 55세였으며 최근 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이었는데 10월 말 쯤 사망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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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SUGIZO

SUGIZO
스기조
파일:50072-sugizo-x-japan-photoshoot.jpg
본명 스기하라 유네 (杉原 有音)
출생 1969년 7월 8일, 일본 가나가와현 하타노시 ([age(1969-07-08)]세)
공식 사이트 SUGIZO Official Website
LUNA SEA의 멤버이자, X JAPAN의 재결성 후 히데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기타와 바이올린 포지션으로 합류하였다. 1969년생으로 X JAPAN의 막내가 되었다. 합류 전부터 히데와 요시키와는 각별한 친분이 있던 사이이다.[19]

광장히 꾸미는 걸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사랑하는 관객 여러분, 아름다운 저의 몸동작을 보십시오. 참고로 현재 기타 리프를 요시키가 만들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기타 세션은 스기조가 맡고 있다. 기타 실력은 일본에서 손꼽히는 수준이다.
파일:Sugizo_kkkkkkkkkk.gif

또한 스기조의 집안(도쿄 교향악단)은 오케스트라를 전공하였다. 아버지는 트럼펫, 어머니는 첼로. 덕분에 3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학습하였다.

락에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YMO와 ジャパン(재팬), RCサクセション(RC섹션)를 본 순간 락 뮤지션을 꿈꾸었다고. 고등학교 2학년 전까지만 해도 놀기만 하다가 운좋게 가입한 교내 밴드에서 여러가지 테크닉을 구사하며 헤비메탈 분야까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17~18살 무렵 자신의 밴드 PINOCCHIO에서 작곡을 시작하였다.

본격적으로 밴드 활동을 꿈꾸며 구매한 첫 기타는 어쿠스틱 기타. 이유는 자신도 모른다고. 밴드 활동 과정에서 작곡을 위해 피아노와 키보드까지 익혔다고 한다. 이후 LUNA SEA에 리드기타, 바이올린 포지션으로 가입하였다.

여담으로 개명을 두번이나 하였다. 첫 이름은 杉原 康弘(스기하라 야스히로). 첫 개명 당시는 杉原 悠(스기하라 유).

추가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clearfix]

2.6. HIDE[20]

HIDE
히데
파일:XJAPAN-HIDEPP2_.png
본명 마츠모토 히데토 (松本秀人)
출생 1964년 12월 13일,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
사망 1998년 5월 2일, 일본 도쿄도 (향년 33세)
공식 사이트 hide official web site [hide-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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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TAIJI

TAIJI
타이지
파일:XJAPAN-TAIJIPP_.png
본명 사와다 타이지 (澤田泰司)
출생 1966년 7월 12일, 일본 치바현 이치카와시
사망 2011년 7월 17일, 미국 북마리아나 제도 사이판 섬 (향년 45세)
공식 사이트 http://taiji-tsglaston.com
본명은 사와다 타이지(澤田泰司). 동양 최고의 베이시스트 중 한 명으로 언급되는 인물로, 멤버들 중 연주력에 있어서 가장 좋은 평을 받았었고 히데와 함께 X의 비주얼에도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X 시절 트레이드 마크인 빗자루 머리도 그의 작품이라 한다.[21]

X 시절 명곡이라 불리는 곡들은 거의 TAIJI가 손을 댔다. 요시키의 멜로디 메이킹 감각도 타이지의 편곡 능력이 없었다면 빛을 못 보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매우 지배적이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긴 러닝 타임의 곡들에 엄청난 몰입도를 부여한 것은 타이지의 편곡이다. 요시키의 원곡에 비해 화려하고 정교해진 I'll kill You와 X, オルガスム(오르가즘), 紅(쿠레나이)가 대표적이다.[22]

X JAPAN의 노래는 요시키의 멜로디 작곡 능력과 요시키의 멜로디를 메탈 특유의 강렬한 분위기가 있는 리프로 다듬는 히데의 기타 리프 메이킹 능력, 토시의 특색 있는 보컬 톤, 그리고 이 모든 요소들의 벨런스를 적절히 조절하고 정돈하는 타이지의 편곡 능력이 조화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슬랩, 태핑 등 다양한 테크닉을 사용하면서도 이러한 테크닉들이 따로 놀지 않고 곡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하는 뛰어난 베이스 플레이어이며[23], 원래 클래식 기타리스트로 음악 인생을 시작해서 그런지 클래식 기타 연주에도 실력이 있어서 기타 세션까지 할 정도이다.[24] X 시절 히데와 파타에게 기타를 가르치기도 했을 정도로 기타 실력이 뛰어나다. 그의 실력은 내외로 유명하여 X의 탈퇴 직후 곧바로 일본의 전설적 헤비메탈 밴드 Loudness에 곧바로 가입했을 정도다. 라우드니스의 기타리스트인 타카사키 아키라가 TAIJI를 눈독 들여 놨었다가 탈퇴(사실상 해고) 일주일만에 곧바로 데려와 버렸다. 애용하는 모델은 킬러의 Dagger, Impulse 모델을 사용하다가 시그내처 모델인 Phoenix 베이스를 사용한다. 물론 레코딩시에는 Fender Precision Bass를 애용한다.

요시키의 독재적인 밴드 운영에 가장 반발을 심하게 했던 멤버였다. 가입 초창기에는 트윈 기타를 고집하는 요시키에 반발하여 밴드를 일시 탈퇴하기도 했으며 Endless Rain이 발라드와 락의 절묘한 궁합으로 히트하고 멤버들이 발라드 곡 작곡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자[25] 요시키가 '앞으로 앨범에 들어가는 발라드 곡은 항상 자신만이 작곡한다.'라는 의견에 반기를 들어 <Voiceless Screaming>이라는 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또한 멤버들의 참여를 균등하게 하기 위하여 본래 요시키의 곡으로만 채워질 예정이었던 Blue Blood 앨범에 히데의 곡 <Celebreation>, <Xclamation>을 넣어야 한다고 고집했고 멤버들 중 가장 창작에 비중이 적었던 토시를 위해서 자신이 작곡한 곡은 항상 토시가 작사를 하게 하였다.

결국 요시키와 잦은 마찰을 겪으며 1992년 도쿄 돔 콘서트를 마치고 해고. 공식적인 이유는 음악성 차이였지만 사실은 Yoshiki의 권고로 인한 해고성 탈퇴였다. 요시키가 혼자 다른 멤버의 두 배가 넘는 인세를 차지하는 데 대하여 항의했던 것이 그 직접적인 이유다.[26] 이미 JEALOUSY 앨범 녹음 들어갈 때부터 사실상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의 계약처분을 받았다. '스튜디오 뮤지션'이란 말 그대로 앞으로는 X JAPAN의 정식 멤버가 아닌 세션 뮤지션 취급을 하겠다는 것이다. 인디 시절 부터 함께 밴드를 이끌던 타이지의 입장에서는 뮤지션으로서의 자존심을 철저히 붕괴시키는 계약이었을 것이다. 즉 인세 문제가 나왔을 당시에 이미 요시키는 타이지를 해고 처리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타이지의 문제도 있었다. 알콜 중독 등의 문제가 있었고 X의 연습을 빠지고 LOUDNESS친목질을 하러 놀러간 적이 있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도쿄 돔 공연에서도 요시키가 타이지에게 "너는 하루만 무대에 오르고 다른 날은 다른 세션 멤버를 쓰겠다"고 했다가 히데가 요시키를 설득하고 타이지 또한 "도쿄 돔 공연 만큼은 3일 전부 무대에 설 수 있게 해다오"라고 부탁해서 겨우 무대에 섰다고 한다. 이후 벌인 해고 소송에서 패배, TAIJI는 LOUDNESS를 거쳐 Cloud Nine 등등. 헤메고 헤메이다 D.T.R의 실패로 생활고를 겪다가 이혼까지 당하고 홈리스 생활을 전전하다가 불량 청소년들에게 홈리스 사냥을 당하면서 턱이 마비되고 치아가 4개나 부러지거나, 뺑소니 교통사고를 당하는 등 많은 고생을 겪었다. 천국과 지옥을 모두 경험한 비운의 천재였다.

히데의 죽음으로 많은 것을 깨달아 재활 후 2000년에 자서전 '전설의 밴드 X의 생과 사'를 발매하면서 본격적으로 복귀했다. 2005년에 교통사고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제대로 못 쓰게 되었지만, 이후 자신의 밴드인 D.T.R을 재결성하여 음악활동을 해왔다. 또한 2010년 8월 15일에는 X JAPAN의 요코하마 라이브에서 게스트로 초청되어 "7인의 X"로 X를 연주하였으며, 요시키와 화해를 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던 2011년 7월 14일. 미국 사이판으로 향하던 비행기 내에서 여승무원을 폭행하고 기내 좌석과 창문을 발로 차는 등 난동을 부려 체포되었다가 유치장 안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을 시도, 병원 중환자실에 긴급 후송되었다가 17일에 사망했다. 한때 일본 락계에서도 칭송받던 베이시스트의 허무한 죽음이였다. 여성 매니저와 관련된 음모론 같은 이야기가 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로 불명예스러운 소동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마저도 사실관계와 다르다는 주장이 있어 논란이 되고 있다. 보도 내용과 다르게 자살 시도에 따른 상흔이 없고, 매니저 키타미 테루미가 타이지인 척 하며 유족에게 메시지를 보내거나, 구치소 측에서 검시 결과를 은폐하는 등 부정이 드러나면서 사인에 대한 의혹이 불거지고, 부인 아카츠카 토모미를 비롯한 타이지 유족의 구명활동이 시작되었다. 결국 2016년 12월 29일 일본 외무성 재사이판 영사사무소에서 진상규명에 착수한다는 보도를 발표하였다.

유족 중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친동생이 있는데 정글은 언제나 맑음 뒤 흐림 애니메이션 주제가[27]와 각종 슈퍼전대 시리즈의 엔딩곡을 담당한 Sister MAYO다.

더 자세한 내용은 해당문서 참조.
[clearfix]

3. 일대기

3.1. X

3.1.1. 인디 시절

파일:external/galeon.hispavista.com/XP.jpg

1982년, 고교 2학년 때부터 함께였던 X의 오리지널 멤버인 요시키(드럼), 토시(보컬), TERRY[28](기타) 3명은 고등학교 졸업 후, 록의 세계와 승부하는 마음을 몇 번이고 다짐하며 타테야마를 뒤로하고 도쿄로 상경한다. 1984년 3월 말, 밴드의 리더였던 요시키는 혼자 도쿄 나카노구 에코다에 고급맨션을 얻는다. 어머니는 요시키의 은행계좌에 생활비로 매달 50만 엔 입금을 약속하고 있었다. 투자가로서 나름 성공한 어머니 덕분에 돈 걱정은 없었지만, 요시키는 곧 일자리를 구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없었던 요시키시부야의 싱싱싱(シング・シングシング)[29]이라는 카페 레스토랑에서 시급 500엔의 웨이터로 저녁 5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하게 된다.

우선 활동의 거점이 되는 라이브 하우스를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밴드로 활동을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 도쿄에는 친구도 없고 밴드 활동에 필요한 절차를 물어볼 수 있는 업계 관계자도 없었다. 활동의 실마리는 직접 찾는 방법밖에 없었다. 요시키는 우선 정보지 "피아"를 구입해, 라이브 하우스의 페이지를 열어 닥치는 대로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가게 주인과 직원을 만나고 직접 "여기서 공연하고 싶습니다."라며 부탁하며 다녔다. 요시키를 만난 라이브 하우스 직원들은 "또 아마추어 밴드의 청년이 찾아왔군." 하며 매정한 태도를 취했다. 업소마다 각기 취급하는 장르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록음악을 한다고 말하면 록밴드는 받지 않는다는 곳이 많았다. 그러면 요시키는 메모를 하고 다음 가게로 가서 다시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시키는 한 라이브 하우스의 주인에게 데모 테이프를 가져와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너, 빈손으로 왔어? 그럼 안 되지. 데모 테이프를 가지고 와봐. 듣고 괜찮다면 생각해볼게." 이 말을 들은 요시키는 데모 테이프의 녹음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우선 베이스 멤버가 필요했다. 만일 X가 공연이라도 이미 하고 있었다면 연주나 스타일을 보고 마음에 들어한 사람이 찾아올 가능성이라도 있었겠지만, 공연도 못하는 상황에 그런 멤버가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 음악 잡지의 《밴드 멤버 모집 코너》에 베이스와 기타를 찾고 있는 글을 게재하고 응모자의 오디션을 하기로 했다. 이윽고 잡지에 실린 멤버 모집 광고를 보고 연락해온 기타리스트들과 베이시스트들이 찾아왔고,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신청해온 사람들은 요시키, 토시, TERRY보다 오히려 경험이 더 많아보였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짧은 머리의 X 멤버들은 새 멤버 모집에 응모한 사람들의 허리까지 오는 머리스타일을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디션에 모인 사람들은 X의 제각기 연주랑 겉모습에 대해 비판하며 돌아갔다. 며칠이 지나도 멤버는 좀처럼 정해지지 않았다. 응모자를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결국 스스로 멤버를 찾으러 움직였다. 그 무렵 요시키는 고등학교 시절의 1년 선배인 토쿠오 아츠시를 도쿄에서 재회한다. 요시키가 프로 데뷔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아츠시는 자신도 밴드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요시키는 베이시스트로서 그를 X에 영입하기로 했다.

요시키가 원하던 트윈기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요시키, 토시, 아츠시, TERRY 4명으로 출발하게 된 X는 드디어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요시키는 자신의 곡을 편곡하고 각각 연주자의 파트별 악보를 썼다. 보컬 토시를 위해서는 감정의 억양까지 자세히 기록한 보컬용 악보를 만들기도 했다. 요시키는 꼬박 하룻밤을 새며 계속해서 악보를 썼지만, 그래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았다. 얼마 후 X는 시부야 도겐자카 근처에 있는 라이브 하우스에서 이루어지는 오디션 형식의 라이브에 출연 할 수 있게 되었다.

목적은 오로지 무대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무대가 X 멤버들에게는 기념해야 할 첫 라이브가 틀림없었다. 당일 티켓은 1장에 500엔으로, 밤무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기회였지만, 무대에 올라 연주할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 그저 기뻤다. 하지만 X를 보러온 고객은 고작 20명 정도였다. 상상했던 고조적인 라이브 하우스의 분위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 실내 공간을 열기로 숨이 막힐 정도의 진짜 콘서트를 할 것이라고 멤버들은 다짐했다. 그러한 생각은 그대로 데모 테이프 제작의 열정으로 변했다.

도쿄에 상경한지 약 1년 만에 비로소 데모 테이프가 완성되었다. 1985년 2월, 타카다노바바의 임대 스튜디오를 1시간에 1만 엔으로 빌려서, 요시키 작사/작곡의 "I'LL KILL YOU", "We are X", "Stop Bloody Rain" 3곡을 데모테이프에 녹음했다. 데모 테이프를 만들기까지는 엄청나게 많은 연습을 했다. 덕분에 임대 스튜디오 대여료와 녹음 기자재 대여료는 더없이 늘어만 갔다. 요시키는 아르바이트비도, 월세와 식비를 빼고 남은 돈은 모두 연습과 제작비용에 쏟았다.

데모 테이프가 완성되자, 즉시 다음 행보에 나섰다. 이미 무대에 서고 싶은 라이브 하우스를 파악하고 있던 요시키는 더빙한 데모 테이프 몇 개를 가지고 원하는 라이브 하우스에 가서 배포하기 시작했다. 꼭 들어달라고 부탁하자 대부분의 라이브 하우스는 바로 테이프를 받아 줬다. 라이브 하우스의 직원들 사이에서도, 요시키의 열정은 다들 알고 있었다. 데모 테이프를 배포하고 곧 대망의 라이브가 결정되었다. 장소는 '시부야 다락방'이라는 이름의 라이브 하우스였다. 요시키와 멤버들은 실전을 위한 레파토리 연습을 반복했다. 데모 테이프에 담은 3곡으로 공연의 준비는 치열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요시키는 손님 유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밴드가 정기적으로 무대에 서게 되면 티켓 판매율에도 힘을 기울여야 했다. 라이브 하우스에 출연하는 경우에는 어떤 밴드든지 티켓을 팔아야할 할당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표가 잘 팔리는 밴드는 라이브 하우스의 정식 연주팀 되는 것이 허용됐지만, 만약 표가 팔리지 않으면 부족한 만큼 멤버들이 직접 표를 사서 메꿔야 했다. 그래서 요시키는 타테야마 도내의 고교 동창생들에게 연락을 취하며 라이브를 보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덕분에 라이브 당일, '시부야 다락방'은 초만원이었다. 마이너한 장르인 하드 록과 헤비메탈을 들려주는 라이브 하우스에 일반대학생들이 200명이상 몰려든 것이다. 동창들이 모인 가게 안에는 마치 학급동료의 생일 파티 같은 친근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가게를 완전히 가득히 메운 관객들을 둘러보며 라이브 하우스 직원은 놀랬다. 첫 라이브를 하는 신인 밴드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던 경우가 그동안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X의 손님몰이는 일회성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여러 개의 라이브 하우스에서 "X는 어떤 밴드보다 손님이 많이 들어온다."라는 평판이 돌았다. 가게를 초만원으로 만드는 X의 존재는 하드 록이나 헤비메탈 팬들에게도 알려지게 되고, 친구나 지인이 아닌 일반관객도 티켓을 사서 라이브로 몰려갔다. 더욱이 라이브 하우스와 상관없는 곳에서도 X의 팬이 되는 사람도 많이 나타났다. 술집에서 술 마시면서 의기투합해 라이브를 보러오는 것을 약속하기도 하고, 학생이나 샐러리맨, 요시키와 밤거리에서 싸움한 뒤 화해하며 친해진 밴드들 등이 X의 콘서트에 차례로 구경 오기 시작했다. 1985년의 봄이 되자 매달 5~6개의 라이브가 생기게 되고, '시부야 다락방', 'LA.mama', '록 하우스 EXPLOSION', '요츠야의 FOURVALLEY' 같은 인기의 라이브 하우스가 X의 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라이브 때마다 모이는 손님은 생각 이상으로 늘어갔고, X의 라이브 티켓은 내놓자마자 매진되었다.

요시키는 연주뿐만 아니라 무대 연출을 어떻게 하면 더 X를 어필할 수 있을까를 종일 고민했다. 눈길을 끌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라이브 매출의 모두는 화려한 의상과 과격한 연출을 위해 쓰였다. 연주와 연출, 특별하고 화려한 X를 한층 더 과격하게 보이는 장치는 여러 가지가 등장했다. 등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몇 개의 창 끝처럼 세운 펑크식 헤어 스타일로 고치고, 빨강, 검은색 라인으로 눈이나 코를 높였고, 여성의 드레스 같은 복장들로 무대에 올랐다. X의 멤버가 자유롭게 만들어 내는 비주얼은 하드 록이나 헤비메탈이라는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화려한 비주얼보다 더욱 관심을 모은 것은 그들의 퍼포먼스였다. 요시키는 의자 위에 올라가 무대 바닥에 다이빙하고, 또 연주하는 멤버의 옆에서 폭죽과 로켓 불꽃을 점화했다. 때로는 드럼 스틱을 다발로 묶어 바닥에 던지며 갑자기 일어나 드럼 세트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X의 무대가 끝나면 그 근처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난장판이 되었다. 또한 무대 세트나 조명 기구가 깨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다른 출연 밴드와 라이브 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부킹 매니저는 실시간으로 폭주하고 과격한 X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통제 불능인 X는 연주 중에 관객과 싸우기도 하고, 자신들의 악기나 가게 의자나 테이블까지 던지고 부수기 일쑤였다. 곧 X는 라이브 하우스 측으로 부터 더 이상 공연을 하지 말아달라는 갑작스런 통보를 받게 된다.

X가 경원시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의 거친 뒤풀이 때문이었다. 라이브 후의 술집에서 이루어지는 그들의 뒤풀이에는 항상 100여 명을 넘는 친구와 팬들이 모여 초대형 파티처럼 되었다. 원샷을 반복한 요시키는 가게 안을 파괴하는 소동을 자주 일으켰다. 공연 후 선술집에 가서 퇴근길의 직장인이 요시키의 머리 모양이나 신기한 옷차림에 사소하게 시비라도 걸면 처음에는 차분하게 듣고 있다가 어느 순간 격발할 상태로 싸움이 일어났다. 컵이나 접시를 깨고 벽과 창문을 깨고 탁자와 다다미까지 뒤집어 부수었다. 같이 있던 멤버들이나 친구들은 폭발하는 요시키를 보고 도망가거나 말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요시키의 분노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만취상태의 요시키는 술병을 안은 채 야마노테선의 첫차를 타고 다리를 쭉 뻗고 잠이 들어버리기도 했다.[30] 출퇴근 혼잡 시간에 수 만 명이 타고 내리는 야마노테선 안에서 금발에 화장을 한 차림의 청년이 쓰러져 있어도 말을 걸어 깨우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오후에 눈을 뜬 요시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날 폭발했던 주점의 "출입 금지"통보와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서였다. 만원의 라이브에서 얻은 매출도 그 대부분이 이 파괴 행위의 변상금으로 사라졌다. 주위의 것들을 파괴했던 요시키에 대한 별명은 "도화선이 없는 다이너마이트"이었다. 요시키가 왜 그렇게까지 분노하고 날뛰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X는 폭풍 같은 격렬함으로 빠르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인디레이블의 DADA레코드에서 음반을 내보지 않겠냐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라이브 하우스에서 연주를 시작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서였다. 요시키는 기꺼이 수락했고, 그가 X를 위해서 작곡한 최초의 오리지널 곡 "I'LL KILL YOU"를 녹음하게 되었다. 1985년 6월에 발매된 1000장의 음반은 단 몇 일만에 품절된다.

X는 그대로 상승 기류를 타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불안요소도 있었다. 요시키의 존재가 부각 될수록 멤버 간의 단결력은 약해져만 갔다. 요시키와 그런 요시키를 지지하는 토시는, 라이브 하우스에서 연주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아츠시와 대립구도가 생기게 되었다. X는 균열이 생기고 마침내 아츠시는 X를 떠나고 만다.

이후 X는 파트타임으로 연주를 맡아 주는 베이시스트에 의존해야만 했다. X의 베이시스트는 누가 될 것인가. 계속 생각한 요시키가 말을 걸었던 사람은 바로 타이지였다. DMENTIA라는 밴드의 공연에서 타이지의 퍼포먼스를 바라본 요시키는 그의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마침 활동을 잠시 쉬고 있는 타이지에게 요시키는 전화를 걸어서 밴드 가입을 권유했다.
"타이지, 우리 밴드도 지금 베이스가 없는데 괜찮다면 함께 해줄 수 있어?"

타이지는 X의 라이브를 본 적도 없을 뿐더러 그들의 악평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요시키의 권유를 수락하지 않았다. 요시키는 X의 연주를 녹음한 테이프를 들려주고 X에 가입해달라고 한번 더 부탁했다. 하지만 X의 연주는 타이지가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타이지가 하고 싶은 음악은 주다스 프리스트와 같은 헤비메탈이었다. 타이지는 X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요시키는 그 뒤에도 자주 타이지를 불러내었다. 곧 두 사람은 돌아다니며 술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타이지는 요시키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타이지는 요시키에게 하나의 조건을 내세우며 밴드 가입에 대해 말을 했다. "기타 멤버를 바꿔주면 X에 들어갈게. 난 TERRY랑은 같이 할 생각 없어. 내가 데려오는 기타리스트를 넣어준다면 멤버가 될게." 요시키는 망설였다. 베이시스트 확보는 급선무이며, 타이지의 강렬한 개성에 매료되어 그 조건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타이지는 곧 HALLY라고 불렸던 기타리스트 요시다 요시후미를 데리고 왔다. 힘든 결단이었지만, 요시키는 결성시의 원년 멤버인 TERRY를 내쫒고 기타리스트를 교체하게 된다.

트윈기타를 목표로 요시키가 지목한 다른 기타리스트는 파타였다. 파타는 BLACK ROSE라는 밴드의 해산 후에 자신이 만든 JUDY라는 밴드에서 활동하다가 이 밴드마저 해체하게 되면서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전에 파타가 리더를 하던 JUDY에서 요시키가 땜빵 드러머를 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는 파타가 고교시절 EastWest의 치바현 대회에서 베스트 드러머상을 수상한 요시키를 기억하고 JUDY로 영입하려 했었다. 그러나 당시 요시키는 거절하였다. 대신 이번에는 반대로 요시키가 파타에게 밴드가입을 권유한 것이다. 파타는 바로 승낙하였다. 당장 비디오테이프 대여점 아르바이트 생활에 싫증이나 빨리 기타를 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85년 여름, 외모도 연주도 과격해지는 요시키가 새로 편곡한 쿠레나이를 무대에 선보이며 음악적으로도 진화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라이브에 모인 관객들은 쿠레나이를 듣고, 더없이 빠른 드럼에 맞춰 머리를 흔들며 고조되는 사운드 속에서 몸을 흔들었다. 쿠레나이는 강한 비트와 속도감과, 헤비메탈과 하드코어 펑크의 막강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슬프고 애절한 멜로디와 극적인 가사로 팬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었다. 이 곡은 그동안의 헤비메탈 곡들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달랐다. 이것이야말로 요시키가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강력한 연주로 팬들은 늘어갔지만, 멤버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타이지는 결국 요시키와 음악적인 차이점을 좁히지 못한 채 X를 떠났다. 타이지는 요시키에게 보컬의 샤우팅과 곡에서 리프를 강조하는 게 헤비메탈의 진수라고 주장했다. 반대로 고정관념을 가지지 않고, 펑크 음악의 장점을 메탈에 도입하던 요시키는 전체적인 리프와 편곡에도 적극 나서고 있었다. 의견차이로 인해 타이지와 기타의 HALLY가 떠나고, 무대에 서지 않게 되자 파타도 다시 아르바이트로 돌아갔다. 타이지의 밴드 가입 조건 때문에 밴드 멤버에서 TERRY를 쫒아낸 것을 깊이 후회했던 요시키는 TERRY를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했다. 요시키는 TERRY에게 다시 한 번 밴드 가입을 권유했다. 그러나 TERRY는 거절하였다.

X 멤버의 오디션은 계속되었고, 요시키 스스로 멤버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멤버 후보는 수십 명도 넘었지만 뽑아도 한번 참여하고 곧 그만두기 일쑤였다. 이유는 다양했다. 헤비메탈과 펑크를 융합시키면서 클래식 음악을 조화시킨 곡은 록이 아니라고 무시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입 멤버가 부담이 됐던 것은 요시키가 강요하는 엄청난 연습량이었다. 즐기는 정도의 라이브에서 볼 수 없을 정도의 꾸준한 연습을 매일 반복하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멤버는 "연습 시간이 너무 많아서 못해먹겠다!"라며 질려하며 나가버리기 일쑤였다.

요시키는 음반을 내기로 마음을 먹는다. X가 갑자기 인디 레코드를 발표하면 주위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보통은 주로 라이브 하우스나 콘서트에서 밴드 음악을 평론가들이 듣고 대형 음반사의 프로듀서와 감독이 스카우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요시키는 누군가가 깔아준 레일을 걸으며 정해진 길을 달리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처음 라이브 하우스에서 공연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처럼 음반을 제작하기 위한 방법도 알 수 없었다. 요시키는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레코드를 만들기 위해서 그 과정을 처음부터 배우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하면 레코드가 만들어질 수 있는 걸까?"라는 발상에서 출발한 요시키의 행동은 단도직입적이었다. 우선 실제로 레코드를 찍어내는 공장으로 찾아갔다.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음반을 내고 싶은데 얼마를 내야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프레스 공장의 직원은 1000개 단위의 프레스 요금의 가격표를 요시키에게 주었다. 자료를 가지고 수십 만 엔을 지불하면 레코드는 만들 수는 있다. 그의 조사는 더 이어졌다. "레코드 재킷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이번에는 인쇄 공장을 찾아갔다. "얼마를 내야 앨범 재킷을 만들 수 있나요?" 인쇄 공장에서도 가격표를 입수한 요시키는 다음에 문자나 일러스트 디자인을 누구한테 의뢰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문자나 일러스트를 디자인하는 것은 사진 가게일까?" 사진 공방에 나간 그는 거기서도 방법과 요금을 물었다. 이제 음반을 만들기 위한 공정과 대범한 예산은 머리에 어느 정도 들어가 있었다. 실무를 완전히 파악한 요시키는 다음에 세일즈를 위한 방법을 생각했다. "어디에 가져다 놓아야 일반 사람들에게 레코드를 팔 수 있을까?" 음악 잡지를 빈틈없이 읽은 요시키는 인디 음반을 취급하는 레코드 가게가 전국에 있음을 알고 모든 레코드가게 목록을 만들었다.

그는 소년 같은 탐구심으로 음반 제작부터 판매까지 루트를 캐고 그것을 곧 행동으로 옮겼다. 음반 제작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요시키는 송금의 대부분을 사용했으나 그래도 충분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음반 제작 때문이라고 들은 엄마는 일단은 요시키의 요구에 응했다. 그러나 아들의 요구액은 달마다 늘어 갔다. 어머니는 걱정하며 그냥 평범하게 살아달라고 아들에게 부탁했다. 그리고는 다음 달 생활비를 줄여서 보냈다. 19세 청년에게는 이미 충분한 액수였지만, 음반 제작 중에 송금의 감액은 큰 타격이었다.

요시키는 매일 출연하는 라이브 하우스와 리허설을 하는 임대 스튜디오를 편도 2시간을 소비하며 다니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걸려서 메지로에 사는 고교 후배 집에 들렀다. 요시키는 그 후 3개월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후배의 아파트에 얹혀살기로 한다. 여섯 평짜리 단칸방에서 공동생활은 아파트에서 느긋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레코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잠자는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날, 요시키는 집에 놀러 온 또 다른 후배에게 검은 받침에 흰색 펜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지금부터 말 그대로 써줘." 요시키는 뇌리에 떠오르던 그 단어의 철자를 하나씩 말했다. 후배는 요시키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E.X.T.A.S.Y. 이거요?“

"엑스터시! 이게 내 레코드 회사의 이름이야.“

요시키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서 아파트의 문에 그 밑받침을 본드로 붙였다.

"그래, 오늘부터 여기는 나의 레코드 회사다."
파일:ExtacyRecord.jpg
주식회사 엑스터시 레코드 로고[31]

인디 레이블은 메지로의 작은 아파트의 일실에서 탄생하게 된다. 그렇게 선언한 날로부터 요시키는 사업가로서의 얼굴도 가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상품의 음반을 내고 그것을 파는 것이다. 사업에 대한 의욕의 피가 몸 안에서 끓고 있었다. 레코딩 등의 제작비와 레코드 매출 관리, 세금 신고 등 회사에 필요한 시스템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사업 의욕에 대한 열정의 피가 끓고 있었다. 녹음 등의 제작비와 레코드의 매출 관리, 세금 신고 등 회사에 필요한 준비는 차질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회사 설립을 위한 책을 닥치는 대로 구입해, 며칠 밤을 새우며 독파한 요시키는 포목 사업을 운영하셨던 어머니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어머니는 포목점을 운영했던 방식을 그대로 활용하여 업무에 관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엑스터시레코드의 설립은 이렇게 완료했다. 요시키가 사장에 취임한 것은 그가 20세를 맞기 직전이던 19세였다.

사장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0명의 직원의 영세 레코드 회사는 요시키에게 특별한 변화를 가져다주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레코드 회사가 라이브 하우스의 관객뿐만 아니라 더 많은 록 팬들에게 X의 음악을 알리기 위한 발판이 될 거라 믿었다.

녹음 준비를 진행하면서, 요시키는 JUN이라는 기타리스트와 HIKARU라는 베이시스트를 찾았다. 테크닉에 대해서도 더할 나위 없는 두 사람은 요시키의 록에 대한 열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1986년 4월, X에게는 2집 싱글 음반인 "オルガスム"(오르가즘)이 발매됐다. 인디 레코드를 취급하고 있는 레코드 가게를 외우고 있었던 요시키는 스스로 전화를 걸어 레코드를 놓아 주도록 부탁했다. 레코드 가게의 대부분은 사운드에 흥미를 가지고 각각 1장 1000엔의 싱글을 10장 정도 주문했다. 메지로에 있던 후배의 아파트를 나오고, 이전 아파트보다 훨씬 낮은 월세의 아파트로 이사한 요시키는 자기 방에 완성된 레코드 2500장을 모두 운반, 구분하고 골판지 상자에 담는 작업을 직접하고 있었다. 종이와 레코드에 깔린 방에서 누워서 잠도 편히 자기 힘들었지만, 음반을 팔기 위해서라면 어떤 성가신 것도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잡지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요시키는 레코드 보도와 재킷 제작의 경우뿐만 아니라 직접 음악 잡지의 편집부에 문의하여 광고를 게재 하는 방법을 파악했다. 관리 업체를 통해 의뢰하거나 직접 잡지사에 의뢰할 수도 있다고 배운 요시키는 실제 필요한 경비가 얼마나 드는지도 알아보았다. 거기서도 요금표를 손에 넣은 요시키는 잡지의 판매 부수에 따라 광고비가 페이지별로 세세하게 나뉘어져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시키가 수십만 엔의 광고비를 마련하여 "オルガスム"(오르가즘) 광고를 음악 잡지에 올리자 반응은 모든 곳에서 터졌다. 인디 레이블에서 음반을 내고 이를 위한 광고비까지 스스로 부담하는 등 전례 없는 행보에 팬들은 물론 라이브 하우스 관계자들은 그런 요시키의 대담성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요시키는 뜻밖의 일에서 인지도를 올리게 된다. 높은 시청률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무대에 출연한 것이다. 광고 및 방송 출연으로 X를 둘러싼 환경은 소리를 내며 변화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요시키를 알게 된 팬이 대거 콘서트에 몰려들어 라이브 하우스에서 관객 동원 수는 증가하고 있었다.[32]

X가 굉음을 내며 빠르게 돌진을 시작한 것을 요시키는 확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라이브로 매출을 모으고, 저렴한 중고 밴을 구입한 요시키는 【오르가즘의 레코드 발매 기념 라이브 투어】를 계획하고 출발시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도쿄 지구, 나고야 지구, 한신 지구를 도는 대규모 순회는 X에게는 지금까지 없는 도전이었다. 본격적인 투어가 성공하면 활동 무대는 비약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투어가 시작할 무렵 다시 멤버 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겨우 만난 멤버 JUN과 HIKARU가 요시키가 만드는 음악은 더 이상 하드 록이 아니며, 티비에 나오는 밴드는 하고 싶지 않다며 요시키에 대한 반발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JUN과 HIKARU는 라이브 공연 도중 웃으면서 관객들에게 "앞으로 X와는 전혀 다른 밴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하드 록을 제대로 하는 밴드를요. 이 밴드는 그게 안 되니까요."라며 대놓고 요시키에게 을 먹이며 탈퇴를 발표했다. 결국 투어가 끝나고 두 사람은 X를 떠났다. 오르가즘은 첫판 2500장을 찍어 완판 되었지만, 레코딩에 참가한 JUN과 HIKARU가 탈퇴하면서 요시키는 앨범을 다시 찍기로 결정했다. X가 다시 드럼과 보컬만 있는 밴드로 되돌아간 후, 요시키는 자신 때문이라며 자책하고 있었다.

1986년 후반이 되어서야 요시키는 X의 기타리스트와 베이시스트를 찾기 시작한다. 1년 전에 음악성의 차이로 X를 떠난 타이지와 다시 만나게 된 요시키는 다시 그를 불러내었다. 당시 타이지는 소속 밴드가 없는 상태였다. 타이지는 말없이 요시키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드디어 베이시스트를 얻은 X는 밴드의 기둥이 되는 기타리스트를 찾아야했다. 요시키는 굉장한 속주로 알려져 있는 ISAO라는 기타리스트를 스카우트했다. 코쿠분지에 살고 있는 ISAO를 찾아가 밴드가입을 권유했다. 그는 흔쾌히 X의 가입을 승낙해 주었다. 요시키는 전례 없는 순조로운 멤버의 결정에 놀라면서 이번이야말로 X의 음악을 형성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며 들떠있었다.

요시키는 트윈 기타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한 명이 더 필요했다. 요시키는 밴드 동료나 아는 사람 중에서 후보가 될 만할 기타리스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실력자는 많았으나 그의 이상을 구현할 만한 사람은 단 한명. 요시키는 SAVER TIGER의 리더인 히데를 생각했다. 요시키는 히데 이상의 기타리스트는 또 만날 수 없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요시키가 히데의 존재를 의식한 것은 라이브 하우스에 출연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될 무렵이었다.

EXPLOSION 라이브 하우스에서 열린 SAVER TIGER의 소노시트[33] 발매 기념 라이브를 보고, 그 실력 또한 엑스와 비슷한 형태의 밴드라고 느끼고 있었다. 마치 블랙 사바스시절의 오지 오스본이 무대에서 박쥐를 물어뜯던 그 장면처럼 히데는 기타를 치는 중간에 날고기를 씹는 퍼포먼스로 관객을 압도하며 절대적 인기와 지명도로 고정 팬들도 꽤 형성하고 있었다.

SAVER TIGER가 어느 밴드보다 빨리 라이브 하우스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메이저 데뷔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주목의 대상이었던 히데 또한 요시키를 강렬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히데는 누구보다 자신에게 요시키가 관심 있어 한다고 밴드 동료로부터 듣고 있었던 것이다.

X가 요코하마의 라이브 하우스에 출연했을 때 히데는 요시키에게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히데는 쇼난 지역과 요코하마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히데가 X의 콘서트에 찾아간다는 사실만으로 라이브 공연장에는 긴장감이 넘쳤다. 기타를 팽개치고, 드럼을 부수고, 무대에서 화약을 폭발시키는 X의 콘서트를 본 히데는 긴장한 표정으로 분장실로 향했다. 히데는 금발과 짙은 화장을 한 멤버들 사이에서 요시키를 찾고 있었다. 급히 화장실에서 뛰쳐나온 요시키는 반대로 히데에게 말을 걸었다.
"보러 와줘서 감사합니다. 제가 요시키입니다."

요시키가 웃으며 히데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욕설을 하고 난폭했던 이미지와는 정반대인 모습이였다. 요시키는 라이브의 뒤풀이에 히데를 초대했다. 히데는 요시키의 권유를 순순히 받았다. 사람들로 가득찬 뒤풀이장에서 히데를 발견한 요시키는 사람들을 헤집고 히데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뒤풀이는 히데가 들었던 소문대로 거칠고 시끄럽고, 상상 이상이었다. 함성과 웃음소리가 뒤섞인 뒤풀이 장소에서 요시키와 그보다 한살 위의 히데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느긋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자신들의 감각이 매끄럽게 서로 포개지는 것을 느꼈다.

이후 요시키와 히데는 라이브 하우스 외에 다른 곳에서도 자주 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런 히데에게 "X의 요시키와는 사귀지 않는 것이 좋아", "X와는 절대 함께 공연을 하지 않는 게 좋아."라고 충고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기까지 관심과 미움을 받고 있는 것에 놀랐던 히데는 오히려 그런 요시키에 대한 관심과 우정이 날로 커져만 갔다.

어느 날 SAVER TIGER가 요코하마의 라이브 하우스인 'Yokohama 7th AVENUE'에 출연하는 것을 들은 요시키는 시내에서 차를 몰고 달려갔다. 라이브를 본 요시키는 히데를 반드시 X의 멤버로 만들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다. 뒤풀이에서 술을 진창 마신 요시키는 SAVER TIGER의 멤버가 나란히 있는 그 자리에서 외쳤다.
"히데! 엑스에 들어와!"

요시키와 함께 뒤풀이에 참석했던 밴드 동료들이 황급히 손을 뻗어 요시키의 입을 틀어막았다. 가장 놀란 사람은 히데 본인이었다. 히데는 요시키의 팔을 잡고 조용히 그를 가게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히데는 요시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얘기했다. SAVER TIGER의 다른 멤버는 구석에 있는 요시키를 째려보고 있었고, 언성을 높이는 멤버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취한 SAVER TIGER의 멤버와 요시키는 서로 다투지도 않고 어깨동무를 하며 왁자지껄 웃으며 동이 틀 때까지 마시고 있었다. 요시키는 히데를 유혹하는 밴드가 많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시키는 확신이 있었다. 히데가 X의 일원이 될 것을. "히데, 나와 너는 미래를 함께하게 될 거야" 요시키의 단호한 말에 히데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사실, 멤버 교체로 괴로워하던 것은 SAVER TIGER도 마찬가지였다. 인기의 절정에 있던 그들 역시 멤버 간에 삐걱거림이 생기게 되었고, 1986년 후반 히데는 결국 영혼을 태우던 자신의 밴드를 해산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히데는 제일 먼저 요시키에게 전화를 걸어 밴드 해산 소식을 전했다. 미용사 면허가 있었기에 요코스카로 돌아가서 미용사가 되겠다고 전했다. 요시키는 히데의 인생을 존중했기 때문에 X에 대한 가입 권유는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2~3일 후 히데가 요시키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히데가 요시키에게 지금 뭐하냐고 묻자, 요시키는 지금 이케부쿠로의 임대 스튜디오에서 연습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히데는 직접 보러가고 싶다고 하고 요시키는 승낙했다. 몇 시간 후에 요시키, 토시, 타이지, 이사오는 히데를 맞이했다. 히데가 스튜디오 바닥에 앉아 허리를 숙이고 4명의 리허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8시부터 시작된 합주가 끝난 시각은 새벽 2시를 넘은 시간이다. 요시키는 히데에게 술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요시키는 히데가 밴드를 해산한 후 마음의 정리가 아직 안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아픔을 생각한 요시키는 위로의 말이나 동정의 말은 하지 않았다. 정신없는 대화 속에서 히데는 요시키에게만 들리도록 아주 작게 속삭였다. "X는 아직 기타를 찾고 있는 거야?" "응." 요시키가 대답하자 갑자기 히데가 소리를 질렀다. "나 돌아갈래!" 요시키는 귀에 들어 온 말의 의미를 이해하면서도 반문하지 않았다. 히데에게 X나 요시키의 악평 등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만든 밴드 SAVER TIGER를 잃은 아픔을 헤아려줄 수 있는 건 오로지 요시키밖에 없다. 히데는 그렇게 생각했다.
"난 오늘부터 X다!"

그 말을 들은 요시키는 참고 있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기타리스트 중 최고라고 확신한 남자가 드디어 X의 멤버로 오게 된 것이다.

1986년 연말, X는 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기타 이사오가 오토바이 사고를 일으켜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밴드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X는 꼭 트윈 기타로 갔으면 좋겠다는 히데의 생각에 요시키도 같은 생각이었다. 1987년 1월 2일 요시키는 한 기타리스트에게 전화를 했다. 자주 X에 헬퍼로 참여해주고 있던 파타였다. "Stab Me In The Back"라이브와 "No Connexion"의 레코딩을 끝낸 후 다시 아르바이트하러 돌아온 파타였지만 그도 아직 본격적인 밴드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요시키가 파타에게 재가입을 권유하자 파타는 망설임 없이 수락하였다.

요시키는 마침내 5명이 갖춰진 것에 감격했다. 매일 만나 연습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멤버들과 연습 없는 날도 다음날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임대 스튜디오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어설 때마다 요시키는 "나에게는 또 하나의 가족이 생겼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했다.

이후 X는 Extasy Records를 통해 VANISHING VISION을 발매하고 이 앨범은 오리콘 차트에까지 오르게 된다.

3.1.2. 메이저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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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NY CBS의 오디션 영상

1989년 4월 'BLUE BLOOD'라는 앨범으로 SONY RECORD를 통해 메이져 데뷔. 연말에는 최우수 신인상 등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그 해를 장식한다.[34] 'ENDLESS RAIN', 紅 등 X JAPAN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곡들이 많다.

1991년 7월, 두번째 앨범 'Jealousy' 발매. 이 앨범부터는 메탈리카블랙 앨범을 녹음했던 LA의 레코드실[35]에서 녹음함으로써 음질이 대폭 상승했다. BLUE BLOOD에 요시키의 색채가 진했다면 Jealousy는 멤버 개개인의 색깔이 잘 혼합된 느낌. 당초에는 30분에 달하는 대곡 'ART OF LIFE'라는 곡과 함께 2장의 CD로 발매하려 했으나 요시키와 토시의 건강 문제, 음반사의 실적 평가 등의 여러 문제가 겹쳐서 1장만으로 발매했다. 사실 라이브 앨범이나 컴플레이션 앨범 등이 아닌 정규 앨범을 2CD로 낸다는 것은 음반시장이 호황이던 90년대에도 대단히 큰 모험이었으며 라디오헤드, 건즈 앤 로지스, 메탈리카 같은 밴드들도 레이블의 반대로 무산된 경험이 있을 정도다. 결국 요시키도 아직 미완성이라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음반사 측 사람들에게 강제로 비행기에 태워진 일화가 있다.[36][37]

1992년 1월 5, 6, 7일, 역사적인 도쿄 돔 3 Days 콘서트. 지금이야 사정이 다르지만 당시에는 롤링 스톤즈마이클 잭슨 같은 외국의 거물들에게나 어울리는 장소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38] 그도 그럴 것이 도쿄 돔의 수용인원은 4~5만 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데뷔하기 전에 "우리는 도쿄 돔에서 공연을 할 거다!"라고 TV에 나와서 떠들었다가 또라이 취급을 받았던 X는 1992년 도쿄돔 3일 연속 공연이라는 위업을 달성해 낸다. 사실 지금도 도쿄 돔에서 3일 연속 공연을 하는 아티스트는 거물급 메이저 수준의 가수만 가능한 수준이다.

3.2. X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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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세계 데뷔를 준비하며 이름을 X에서 X JAPAN으로 개명. 미국에 이미 동명의 밴드가 있기 때문이었다. 최초에는 X from JAPAN이었으나 이 이름은 얼마 후 바로 흑역사에 묻히고 X JAPAN이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베이시스트로 HEATH를 영입.

92년 이후부터 전체적인 활동이 줄어들며 Toshl의 MADE IN HEAVEN을 시작으로, 93년에는 HIDE가 솔로 데뷔를 하면서 멤버들의 솔로 활동이 개시되었다. X JAPAN의 싱글이 하나 하나 발매되기는 하였으나 활동은 많이 미비하였다.

1993년 8월, 29분짜리 한 곡이 실린 앨범 ART OF LIFE 발매.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한 Yoshiki의 반생이 담겨있는 곡. 곡 구상을 위해 2주간 어둠 속에 자기 감금을 시도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나온 곡이며 가사는 모두 영어. 가사에 일본어가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X JAPAN의 앨범 중 이 앨범이 가장 먼저 정발되었다. '자살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같은 내용으로 18세 미만 금지로 판매되고 있다.[39]

1993년부터 매년 12월 30일, 31일 도쿄 돔 2일 공연. 과거에는 도쿄 돔 공연 부분에서 X JAPAN은 일본 최다의 기록을 갖고 있었지만 현재는 도쿄 돔 연말 공연 자리가 넘어간 KinKi Kids에 의해 깨진지 오래.

1995년을 전후로 YOSHIKI와 Toshl가 머리를 자르면서 탈 비주얼을 시도했다. 이 시기부터 상징이었던 '노발'[40]을 풀고 화장이 옅어지면서 음악적으로도 당시 유행하던 인더스트리얼로의 변화를 시도했다.

1996년, 3번째 메이져 앨범 DAHLIA 발매. 전작 Jealousy로부터 5년이나 걸린 풀 앨범이었으나, 이미 곡들이 대부분 싱글 컷 되어 먼저 릴리스 되었기 때문에 꼭 BEST ALBUM 같은 인상도 든다. 앨범 전체에 YOSHIKI표 발라드의 비중이 커졌다. 초창기에 X가 가지고 있던 헤비메탈의 요소가 많이 사라지고 사실상 아레나 록 밴드로서 오케스트라가 동원된 발라드 곡이 많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는 취향이 갈리기도 하였다. YOSHIKI는 개인적으로 힘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발라드가 많이 나온 것이라고 인터뷰에서 이야기 한 적이 있다. 1996년 DAHLIA Tour를 돌던 YOSHIKI가 스테이지 위에서 쓰러진 후 이후의 모든 스케줄이 취소, 연말의 도쿄 돔 콘서트에서야 부활하게 되었다. 팬들도 멤버들도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왠지 주욱 조용하다가 1997년 9월 해산 선언. 보컬인 ToshI가 음악성의 차이를 이유로 탈퇴를 원했기 때문.[41] ToshI가 탈퇴를 표명한 것은 1997년 4월이었으며, 그 동안 1993~96년 도쿄돔 콘서트의 라이브 앨범 작업을 하던 Yoshiki는 X JAPAN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보컬은 ToshI밖에 없다는 생각에 9월 22일 기자회견에서 해체를 선언한다. 이 기자회견에 ToshI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X JAPAN의 멤버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Yoshiki가 연락을 하지 않았기 때문.

1997년 12월 31일, '최후의 밤'이라고 명명된 마지막 콘서트가 개최되었고, 콘서트 종료 후 NHK 홍백가합전에서 가진 FOREVER LOVE 무대를 끝으로 해산하게 된다.

3.3. 해체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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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버였던 hide가 1998년 1월부터 솔로활동을 하다 5월 2일 오전 8시 51분에 사고로 사망했다. 히데의 장례식에는 엄청난 인파가 집중되었다. 당시의 집계로는 미소라 히바리를 뛰어넘는 역대 가장 많은 인파였다. 히데를 따라 자살한 사람도 생기면서 요시키가 따라서 자살하는 행동은 자제할 것을 공식적으로 당부했다. 미국의 TIME지에 히데의 부고가 실리기도 했다.

토시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힐링음악으로 활동했으며 또 다른 멤버였던 히스와 파타는 Dope Headz라는 밴드를 결성했었다. 리더였던 요시키는 2002년도에 코무로 테츠야가 리더인 globe에 가입하기도 했다. 2007년에는 당시 Malice Mizer을 탈퇴 후 개인활동으로 미국에서 인기를 끌던 GACKT와 1999년 LUNA SEA해체 이후의 스기조, 기타리스트 MIYAVI와 함께 S.K.I.N이라는 그룹을 결성했는데 멤버 라인업이 굉장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토시가 복귀하여 S.K.I.N의 라이브 공연은 1번밖에 진행되지 않았다.[42]

3.4. 재결성

3.4.1. 2008~2014

해체한지 10년만인 2008년 X JAPAN이 재결성됐고 영화 SAW Ⅳ의 엔딩테마 I.V를 발표한다. 2008년 3월에는 부활공연으로 도쿄 돔에서 3일간 공연을 했다. 같은해 요시키가 월드 투어를 결정했으며 동남아권으로 프로모션을 다녀갔었고 한국에도 같은 해인 2008년도에 한국공연을 위해 방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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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결성의 계기는 바로 돈이 필요했던 토시가 요시키를 찾아가 부탁했기 때문.[43] 그러나 이는 사이비 교주인 마사야의 계략인 것으로 드러났다.[44] 하지만 요시키는 이를 알고 있었고, 오랜만에 재회한 토시를 반갑게 맞이하고 함께 어린시절 추억을 이야기하며 배려해주면서 토시의 사이비 종교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토시 문단에서 상술한대로 요시키의 도움으로 2010년경 전처와 이혼하고 HOH를 심판하면서 사이비 종교에서 완전히 탈출하게 된다.

그러다가 한국 공연이 취소되었다. 그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HEATH의 탈퇴 소동 때문이지만, 사실은 히스와 그 당시 X JAPAN의 매니지먼트였던 X JAPAN 제작 운영 관리 위원회와의 갈등으로 인해서이다. 한국 공연이 취소되어 한국의 내한 공연 기획사 아이예스컴은 8억 원 가량의 손해를 입었지만, 도쿄돔 공연과 타이페이 공연은 SUGIZO까지 가입한 상태로 버젓이 진행된다.

2009년 5월 1일. HIDE의 11주기를 앞두고 히스와의 갈등이 해결되었음과 SUGIZO(LUNA SEA)가 정식으로 가입함을 알렸다.

2009년 5월 2일과 3일 도쿄돔에서 콘서트를 진행했는데 5월 3일 공연에는 투어가 취소된 한국과 프랑스 팬들을 초청하였고 공연 중간에 멤버들이 직접 한국과 프랑스 팬들을 무대 위로 불러내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2010년 파칭코화의 마수를 피하지 못했다. 범인은 산쿄. 공식 홈페이지.

2010년 8월 닛산 스타디움 라이브에 전 멤버였던 타이지까지 스테이지에 등장하면서 사상 최초 7인의 X JAPAN이라는 내용으로 분위기가 고조되어 가는 가운데 Headwax[45]로 부터 HIDE의 초상권 사용으로 20억 엔을 요구해서 서로간에 소송을 하네마네 이전투구 중. 정말 고인이 보면 하늘에서 통곡을 할 일이다. 아울러 아직 향후 계획이 다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LUNA SEA 역시 REBOOT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재개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HIDE의 초상권 문제와 SUGIZO의 거취에 따라서 팬들의 염원이던 활동 재개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최근에 EMI의 북미 법인과 3년 계약에 성공했다. 북미 한정으로 3월 15일 싱글 JADE 발매 예정. 본 계약은 미국 법인과의 계약이고 일본 쪽 담당인 EMI 뮤직저팬과는 계약이 되어있지 않은 상태이다. 아직 일본 국내의 레이블과도 계약이 없는 상태라서 발매 여부조차 불투명하다. 그나마 일본 도호쿠 대지진의 여파로 무기한 중단되었다.그러나 워낙 발매 연기와 취소가 반복되던 밴드라 팬들도 안티도 다들 그러려니 한다. 아니 자연재해가 아니었더라도 연기되지 않았다면 더 이상했을 거라는 분위기랄까? 참고로 JADE 싱글의 편곡자로 David Campbell을 영입했는데 그는 X 시절의 명곡인 "Say Anything"의 현악 편곡에도 참여했으며 이승환의 "천일동안", "어떻게 사랑이 그래요" 등의 편곡을 담당한 바로 그 거물급 프로듀서다.

결국 2011년 6월 29일자로 유럽-동남아-남미 아이튠즈에서 JADE가 디지털 싱글로 발매되었다.

또한 "X~七人のX~高書筫完整版(직역 : X~7인의X~옛 고서의 완전한 재판)"에서 타이지가 스페셜 게스트로 등장하며 히데가 홀로그램으로 띄어진 상태로 공연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이 공연이 음악인 타이지의 마지막 공연이 되고 만다.

2011년 7월 17일 타이지가 죽음에 의문점을 남긴채 사이판에서 사망했다.

2011년 10월 28일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에서 내한공연을 했다.

요시키가 골든글로브의 OST를 작곡하면서 미국에서 최우수 해외 밴드상을 받기도 했다. 참고

요시키가 페이스북에 꾸준히 곡을 레코딩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데, Born To Be Free와 JADE의 뮤직비디오 촬영을 한지 2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다. 2012년 10월 9일에는 요시키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Art of Life 2를 작곡할 생각이 있다고 밝혔다. 2014년 "HERO"로 컴백 예정. 8월 17일 신주쿠에서 뮤비 촬영 겸 공연을 했다.

세계적인 밴드 미스터 빅의 에릭 마틴이 Forever Love를 커버해서 불렀다. 링크

신곡은 그 나이대의 밴드들이 다들 그렇듯이 창작력 면에서 한계가 있고, 하다못해 옛날 곡이라도 잘 부르면 좋으려만 재결성 후의 X JAPAN은 곡 사이의 인터벌이 너무 길어졌다.

2013년에 요시키가 뮤직 스테이션에 출연해서 Forever Love의 뮤직 스테이션 버전을 연주했는데, 오오시마 유코가 감동을 받고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이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 꽤나 난리였다. 링크

3.4.2. 2014~2017

2014년 6월 17일 워너 뮤직을 통해 The World ~X JAPAN 첫 전세계 베스트 앨범~을 발매하였으나 이미 그 이전에 발매된 베스트 앨범 FAN'S SELECTION이 8만 장 정도로 그치는 부진한 판매량을 보였는 바[46] 이 앨범 역시도 그 점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2014년 10월 11일,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콘서트를 했다.

이 콘서트 때문에 9월 30일-10월 1일에 이루어졌던 일본 콘서트에서 보컬 토시가 목을 아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여기서도 비슷했다. 그냥 힘들어서 그런 듯.

기사에는 열정적으로 19곡을 연주했다고 했지만, 사실상 별로 한 곡은 없고 중간중간 피아노 솔로, 바이올린 솔로 등을 한 곡으로 취급해서 그렇다. 실제로는 14곡 수준. 공연 시간은 역시 거의 약 4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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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1월 말, 요시키가 인터뷰로 앨범이 80% 완성되었다고 하였다. 이 때 하는 말이 "4월 완성 예정이지만 아무도 저를 믿어주지 않을 것 같네요"이다. 자기도 욕을 먹는 걸 알고 있는 듯 하다.

2015년 2월 25일 밤 요시키가 본인의 인스타그램에 Master Album Sequences 2.24.15라고 적힌 CD 사진을 올렸다. 과연 신보가 그의 말대로 4월에 완성될까? 참고로 12개의 트랙이 나와있으며 1번 트랙은 The Last Song 2번 트랙은 Jade 3번트랙은 Beneath the skin 4번 트랙은 Hero로 예상되는데, 이럴 경우 신곡과 예전 곡이 섞인 또 하나의 베스트가 아닐까 예상된다. 링크

그리고 4월에 내온다던 앨범은 한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러나 팬들의 반응은 무덤덤하다.

그러던 중 2015년 6월 22일에 XDAY IS COMING이라는 영상을 업로드했는데 신곡이 약간이지만 배경음으로 깔려 있었다. 매우 가까운 시일에 깜짝 소식이 있다고 하는 걸로 보아, 20년만의 앨범이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The Last Song' 같은 기존의 곡들도 포함되긴 하지만, 사실 이 곡은 앨범에 속해 있지 않은 싱글로만 발매된 곡이었고 또한 마지막 곡이라는 뜻의 곡이 앨범의 첫 트랙이 됨으로써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금까지 재결성한 다른 밴드들이 앨범을 내는 것을 보고 고통받던 X의 팬들이 오랜 숙원을 이룰 수 있을지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새로운 앨범의 발매 일자는 기존에 말해 온 2015년 연내가 아닌 2016년 3월 11일로 정해졌다. 이에 팬들은 앨범이 나온다는 기쁨과 함께 또 미뤘다는 데에 분노하였다. 예전 Jade 때도 3월 11일 발매였으나 미뤄졌던 전례가 있어 걱정하는 중이다.

2015년 8월 20일 요시키가 기자회견을 통해 일본 투어 라이브를 발표했는데, 이는 DAHLIA TOUR 이후 약 20년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투어에 관심이 있다면 참고해도 된다.

그리고 2016년 3월 11일 앨범 발매 후 다음 날 영국 웸블리 아레나 라이브와 같이 공개될 X JAPAN의 다큐멘터리 영화의 트레일러가 공개 되었다.

2016년의 앨범에 앞서 2015년 10월 23일 싱글 앨범이 나온다고 덧붙였는데 요시키 본인이 레이블과의 계약으로 인해 곡명을 밝힐 수 없다고 말하면서, 새 앨범에 수록될 것으로 예상되는 곡인 KISS THE SKY, HERO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인줄 알았는데 무관객 라이브 때 KISS THE SKY는 라이브 형태와는 완전히 다르게 앨범에 넣을 것이라고 발언했다.

특히 기자회견을 통해 요시키가 새 앨범 제작에 관해 대답한 바, 레코딩은 한창 진행중이라고

본인이 웸블리 아레나에서의 라이브는 기본적으로 20년만의 새로운 앨범 발매 기념이기 때문에, 스스로 데드라인을 그어놨다는 느낌이라고 한다. 본인도 앨범을 계속 미루던 과거사가 존재하다보니 이번에도 안 나오면 본인은 업계에서 확실히 묻혀버릴 것 같다고 덧붙였다. 특히 많은 인터뷰에서 언급했듯이 X JAPAN이 여러가지 안 좋은 사건으로 인해 공백 기간이 길었지만 그 기간이 무색할만큼 최고의 앨범이 될 것이라 자신했다.

2015년 11월 6일에 첫번째 싱글 Born to be free가 발매된다고 요시키가 SNS를 통해 알렸다.

어째서 1st Single로 표기한지에 대해 논란이 있다. JADE가 디지털 싱글이라 싱글로 치지 않는 듯 하다. 2015년 11월 26일, 2015년 NHK 홍백가합전 출장이 발표되었다. 1997년 이후 18년만의 홍백가합전 출장.

2015년 12월 1일, 일본 투어 요코하마시 공연에서 신곡 Angel의 일부가 공개되었다.

일본 투어 공연을 하는 멤버들의 모습을 보고, 팬들은 이젠 그냥 살아서 라이브를 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토시의 경우 세뇌 시절 다친 허리의 후유증으로 인해 히로시마 라이브에서 아예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요시키는 건초염으로 인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인 만신창이 상태로 라이브에 임하고 있다.

멤버들도 이젠 그저 돈 때문에 한다기보단 비장함이 묻어나오는 상황.[47] 40대를 넘긴 요시키의 멘탈이 많이 성장하기도 해서 예전처럼 욕도 먹지 않는다.

물론 파타가 연습을 제대로 안 해서 자꾸 연주를 틀리거나, 앨범 레코딩이 심각하게 오래 걸리는 건 좀 짜증난다는 반응...

일본에서는 아직도 인기가 건재하다. 무서운 밴드라는 이미지가 있다고. 요즘 TV 출연이 잦은 탓에 젊은 층의 반응이 많다. 대체로 무서울 줄 알았지만 친근함에 놀랐다는 반응. 라이브도 인상적이라는 반응이다.

칸쟈니∞ 팬이 테레아사 드림 페스티벌에 출연한 X JAPAN의 공연을 보고 감동을 받은 나머지, 신을 보았다면서 글을 쓴 것이 요시키의 RT 덕분에 일본 내에서 꽤나 화제가 되었었다. 가창력이나 연주력 등이 뛰어난 가수들은 많지만, X JAPAN 멤버들의 연주는 카리스마 그 자체여서 분위기게 압도당한다고.

우리 나라에서는 90년대에 퍼진 빠들의 엄청난 과장 덕분에 안티가 늘어서 X JAPAN은 90년대에나 유명했지 그 이후부터는 인기 하나도 없는 퇴물 밴드라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요즘 TV 출연이 잦은 엑스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반응을 보면 꼭 그렇지 않다. 무서운 이미지의 밴드라는 이미지는 있어도.

사실 십수년 전 X JAPAN에 관해 국내에 퍼졌던 이야기들 중에는 극성 팬들의 과장섞인 내용들이 많았지만,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X JAPAN이 싫다는 측 역시도 극성 팬들의 그것에 못지않게 과장되고 허황된 비방을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반일 감정으로 인해 밴드 이름부터 재팬이 들어가 있는 밴드라는 이유로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태극기를 태웠다는 루머가 퍼진 것이 대표적. 어디까지나 루머이긴 했지만.

오히려 젊은 층의 팬들이 늘어난 추세이다. 물론 아이돌 가수의 팬층과 같은 열광적인 느낌은 아니지만 확실하게 레전드 대우를 받고 있다. 각종 페스티벌에서 X JAPAN의 공연을 본 젊은 사람들이 X JAPAN의 카리스마에 반해 팬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X JAPAN이 TV 출연이라도 하는 날에는 일본의 트위터가 대부분 X JAPAN 관련 내용일 정도.

현재 일본의 가수들이 X JAPAN의 라이브를 보기 위해 방송 중 관중석에 가서 공연을 보거나 해서 연예인들의 연예인이라고 불리고 있다. 아라시의 멤버들조차 관중석에 나가서 봤다고 고백하고, 다른 밴드의 멤버가 X JAPAN 공연에 난입해서 같이 뛰어 다니거나 하는 일이 벌어졌다.

2015년 크리스마스, 뮤직 스테이션 슈퍼 라이브에 출연해서 Born to be free와 X를 연주하였다. 쟁쟁한 아티스트들을 물리치고 10여 분 동안의 엔딩 무대를 맡았는데, 엄청난 포스로 또 일본 전역에서 화제가 되었다. 특히 아이돌 팬이 많아서 10대~20대의 여성 관객들이 많았는데[48] 헤비메탈을 연주하는 밴드임에도 불구하고 분위기가 좋았다. 처음에는 우물쭈물하던 관객들도 다같이 X 점프를 하며 흥분된 분위기였다. 게다가 무려 첫 곡인 Born to be free 때는 산타 복장을 입고 연주했다.

2015년 12월 31일, NHK 홍백가합전에서는 백팀으로 출전하여 Forever Love와 Born to be free를 연주하였다. 아울러 요시키의 피아노 옆에 타이지의 베이스와 히데의 기타를 함께 놓아 두었다.

그러던 중 2016년 1월 18일, 파타의 건강이 갑작스레 악화되었다는 발표가 났다. 팬들은 파타를 걱정하면서도 또 앨범 발매와 콘서트가 뒤로 밀리는 게 아니냐 하는 불안감에 걱정하고 있다.

결국 새 앨범과 웸블리 공연이 연기되고 말았다. 공연은 2017년 3월 4일로 미뤄졌고 앨범 발매는 잠정 보류. X JAPAN 팬들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뭔가를 하려고 할 때면 사건이 터졌기 때문. 물론 이번 상황은 파타가 중환자실에 입원까지 했기 때문에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반응이다.

2016년 3월 17일에 이르러서야 중환자실에 입원했었던 파타가 비로소 퇴원했음을 알렸다. 요시키의 인터뷰에 따르면 파타는 안정을 취한 후, 8월 경에 또다시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발매 예정이었던 새 앨범에 대해서는 빠르면 가을, 어떻게든 연내에는 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2016년 7월 말에 Jealousy 앨범을 Blu-Spec CD로 리마스터링해서 새롭게 발매한다고 발표했다.

3.4.3. 2017~2023

결국 연내에는 내겠다던 신보는 단지 신곡 <La Venus> 1곡만이 방송을 통해 공개되는 정도로만 그친 채 감감 무소식이 되었고, 2017년 3월에 이전곡들과 또 다시 재탕한 앨범을 냈다. 다만 정규앨범은 아니고 "We are X" OST 앨범이다. 이 앨범은 Without you, La Venus을 어쿠스틱 버젼으로 녹음한 음원이 수록되어 있다. 영국의 'UK Top 40 Rock Albm' 차트1위를 차지(!!) 영국전체 앨범차트에서도 27위를 차지했다. 홍콩,핀란드 아이튠즈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2017년 2월말에는 영국 공연을 앞두고 슈퍼라이브를 제외하고 21년만에 뮤직 스테이션의 레귤러 방송에 출연하여 La Venus를 열창했다. 영국 웸블리 아레나에서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요시키의 공식 SNS를 통하여 2017년 월드투어 WE ARE X의 일본 일정이 발표되었다. 요코하마 아리나에서의 라이브는 4일 연속이라는 살인적인 스케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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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7일에는 1988년 이후로 29년만에 팬사인회를 개최했다. 이어서 4월 1일에는 또다시 앨범 발매에 관한 발표가 있었다. 요시키채널에 등장한 요시키는 피아노 연주를 시전하다가 갑자기 연주를 끊고는 중대선언을 하겠다면서 2017년 6월 30일에 뉴 앨범을 발매한다는 폭탄 발언을 한 것. GLAY의 히사시, LADIES ROOM의 죠지를 비롯한 패널들은 뜬끔없는 폭탄 발언에 아연실색하자 요시키는 '만우절이니까~'. 그러나 곧이어 구체적인 앨범 내용에 대한 소개까지 덧붙이면서, 신곡 13곡 사이에 오프닝 곡으로 'The Last Song' 그리고 엔딩곡은 'Art of Life'로 과거의 X JAPAN이 감싸는 듯한 구성[49]을 했다고 언급. 타이틀명은 셀프 타이틀임을 밝혔다. 그리고 7월에 시작될 월드 투어는 뉴 앨범을 위주로 곡을 구성할 것이라 올해 들어 누누히 밝혀 왔다. 이게 정말 사실이라면 21년만에 신보인 셈.

그러나 5월 말, 요시키의 경추 디스크가 재발해 LA에서 수술을 받았다고 밝혀지면서 새 앨범 발매에는 또다시 적신호가 켜졌다. 그러나 6월에 들어서서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는 보고가 올라와 일단 스케쥴에는 지장이 없는 듯 하다.

그리고 6월이 아무 소식 없이 지나갔다. 오리콘과의 인터뷰에서는 6월 30일 발매는 어렵지만 2017년 내에는 무조건 냅니다 라고 했다고. 수술 때문에 드럼을 칠 수 없는 상태이며, 월드 투어 역시 어쿠스틱 투어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연말부터 2018년초 TV방송에 요시키가 출연하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히데의 기일인 5월 2일까지는 앨범을 발매하고 싶다고 에둘러 말한 바 있다. 하지만 2018년 5월 2일도 역시나 아무 소식 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그런데 며칠 후 X JAPAN 명의가 아닌 요시키 개인 명의로 HYDE가 피처링으로 참여하는 식으로 변경됐다. 실제로 이곡에서 토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으며, 그동안 공개한 곡작업 영상에서도 토시는 보이지 않는다. 근황에 따르면 토시는 아직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관계자에 따르면 '개런티 미지급'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불명확하다.

2018년 12월 31일 홍백가합전 무대에서 X JAPAN이 아닌 YOSHIKI feat HYDE, YOSHIKI feat サラブライトマン으로 출전하였다. 하이도와는 RED SWAN, 사라브라이트만과는 X JAPAN의 오프닝 Miracle을 연주.
또한 요시키는 홍백가합전 69회만에 최초로 홍팀과 백팀에 모두 참여한 유일한 인물이 된다.

2019년 12월 31일 역시 홍백가합전에서 요시키가 KISS와 출전했다. 팀명은 YOSHIKISS로 요시키가 어렸을때부터 존경했던 키스와의 콜라보로 夢のコラボ라는 타이틀을 지었다. 연주한 노래는 KISS의 ROCK AND ROLL ALL NIGHT.

2020년에도 X JAPAN은 라이브 콘서트 계획은 없었다. 멤버들은 모두 솔로활동에 몰두중.
또한 2020의 홍백가합전에서 코로나의 여파로 원격으로 요시키가 특별출연하였다. 또한, QUEEN의 브라이언 메이와 로저테일러, 사라 브라이트만, BABYMETAL, Lisa, SixTONES, milet이 함께 Endless Rain을 연주했다.

2021년도 특별한 활동 없이 넘어가나 했으나, GLAYLUNA SEA가 참가한 EXTAV라는 리듬 게임 프로젝트에 파타와 히스, 스기조가 참가함이 공개되었다. 요시키와 토시도 참가할지에 이목이 집중된다.
2022년 2월 현재 요시키의 참가가 확정되었고 공식적으로 GLAY, LUNA SEA, X JAPAN의 참가로 공개되었다.
게임의 성격상 엑스터시 레코드로 묶인 세 밴드의 악곡을 수록한 리듬게임이 될 듯 하다.

2022년 11월 11일 정오. 요시키, 하이도, 스기조, 미야비. 이 넷이 결성한 밴드 THE LAST ROCKSTARS가 발표되었다.

2023년 5월 16일 요시키가 미국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10월 자신의 클래시컬 월드투어와 7월 X-JAPAN의 신곡 Angel을 릴리즈하는 것을 발표했다.

2023년 7월 28일, 2016년 영화에도 나온 약 8년만에 싱글 <Angel>이 발매되었다.

3.4.4. 2023년~

2023년 11월 7일, 히스가 암으로 급사했다는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기일은 2023년 10월 29일로 향년 55세였다. 발견한 시점에서 이미 말기 암이 온 몸으로 전이 된 수준으로 너무 늦게 발견하여 멤버들에게 투병 사실을 알릴 시간적 여유 조차 없었을 정도라고 한다. 히스의 사망 당시 요시키는 해외에 체류 중이었는데 소식을 듣고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였고, 11월 3일 SNS에 가족의 사정으로 급히 귀국하였다던 요시키의 글과 상복을 입은 게시물이 사실 히스의 사망이었던 것. 비록 원년멤버는 아니지만 히스는 히데와 타이지보다 더 길게 X JAPAN에서 활동하였으며, 추모식도 열었다.

4. 음악 특징

음악적인 스타일은 유럽의 파워 메탈 스타일에 가깝다. 물론 사실상 당시 멜로딕 파워 메탈은 제대로 된 명칭도 갖추지 못한 태동기였지만 헬로윈을 연상시키는 멜로딕 스피드 메탈과 일본식 멜로디와 편곡이 가미된 음악이 되었다.[50]

당시 영미권에서 불어온 일종의 '스피드 메탈' 장르의 음악을 일본 특유의 멜로디로 풀어나가는 음악으로 인디즈 시절을 보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파워 메탈과 프로그레시브 메탈 쪽으로 영향을 받기 시작한 듯 보인다. 어떻게 보면 일본 1세대 멜로딕 스피드 메탈 밴드라고 볼 수도 있다.[51][52]

다양한 장르를 시도하고 창조했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29분짜리 대곡 ART OF LIFE를 통한 세계 최초의 심포닉 파워 메탈과 시각적 예술까지 강조한 비주얼 락이 있다. 헤비메탈이란 장르를 일본의 메이저 음악 시장에 올리고, LUNA SEA, GLAY의 신인 밴드들을 발굴하면서 비주얼계라는 일본 록 특유의 성향을 개척했다는 점, DIR EN GREY부터 NIGHTMARE 등 수많은 후배 밴드, 팔로워를 양산해내고 있는 점, 메탈 밴드로서 전무후무한 기록인 밀리언 셀러를 달성[53]하고 1992년에는 일본인 아티스트 최초로 3일 연속 도쿄 돔 콘서트를 성사시킨 일화[54], 한 해를 마무리 짓는다는 의미를 가진 12월 31일 공연을 도쿄 돔에서 1993년 12월 31일부터 1997년 12월 31일 라스트콘서트까지 5년 연속으로 성사시켰다는 점[55] 등을 감안한다면 확실히 일본 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밴드 중 하나라는 점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비주얼 록[56]의 창시자
"PSYCHEDELIC VIOLENCE CRIME OF VISUAL SHOCK" - HIDE
"만일 이들이 영미권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전세계에서 가장 큰 밴드가 됐을 것."
- 진 시몬스, KISS의 멤버
"다른 차원의 록스타"[57]
- 리차드 포터스, 건즈 앤 로지스의 멤버
신화가 된 일본 최고의 록 밴드이자 글램록의 표상. We are X!
애플 뮤직 소개문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 새로운 문화를 열고 이어나가게 되는데 크게 기여를 한 밴드이다. 그 당시 일본 문화에서는 충격 그 자체라고 불리기도 한다.[58] 활동당시엔 평론가들의 평가가 박했던게 사실이긴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일본에서 헤비메탈 음악을 메이저시장에 올려 인기를 유지하게 하여 수많은 후배 밴드들에게 영향을 준것으로 고평가를 받고 있다.[59][60][61][62][63]

기본적인 구성은 트윈 기타로 기타 솔로 부분을 두 기타가 나누어서 연주하며, 보통 파타가 백킹 부분을 히데가 리딩 부분을 연주하였다. 근데 배킹과 리딩이 분명 따로이긴 한데, 딱히 내용상 큰 차이를 가지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DAHLIA 같은 경우에는 배킹과 리드의 구분이 없어 음원만 들어서는 누가 PATA이고 HIDE인지 알 수가 없다. 단, 곡에 따라 차이는 존재한다.

유럽 파워 메탈의 사생아라고 혹평받기도 하지만, 유럽 쪽에서는 일본의 대표밴드로 인식된다. 특히 요시키가 일본 최고의 작곡가로 여겨지는 듯. 유럽의 유명 밴드인 아노렉시아 널보사, 드래곤랜드[64], 소나타 아티카 등이 X JAPAN의 곡을 리메이크했던 게 대표적인 예. 이는 일본 관객을 고려한 서비스임은 분명하지만 결론적으로 같은 카테고리안에 묶는 것이 가능하기에 벌어진 일이다. 일본 커뮤니티에서도 X를 통해 유러피언 파워메탈을 듣기 시작했다는 글은 많이 보인다.

반대로 allmusic.com같은 영미권 평론 사이트에서는 그들의 기타리프나 악곡면에서 자신들만의 것은 별로 없으나 괜찮은 밴드라는 애매한 평가를 내린다.[65]

이들의 음악의 장르는 딱 잘라 말하기 애매하지만 적어도 대부분의 곡들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뚜렷한 스타일은 존재하는 편이다. 최소한 리더 요시키가 작곡한 곡들에서만큼은 스피디한 곡과 발라드곡 모두에서 서정성(혹은 뽕끼라고 부르는 동양적 멜로디)을 기반으로 한 특유의 스타일을 발견해낼 수 있다. 그리고 앨범마다 사운드도 크게 다른 편이다. 인디 1집은 헤비메탈, 메이저 1집은 파워메탈, 2집은 타이틀곡 외에는 LA메탈, 3집은 인더스트리얼 메탈에 가깝다.

다만 요시키가 작곡한 곡들의 대부분은 하나의 정형화된 스타일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에 대해서는 비판도 존재한다. 덧붙이자면 X JAPAN의 노래는 메탈 아카이브에서는 Heavy/Progressive/Power Metal로 구분하고 있다.

일본인들은 공연을 매우 조용히 감상하는 특성이 있는데, X JAPAN의 공연만큼은 매우 열광적이다.[66] 특히나 X의 후렴부분에서는 모든 관중들이 손으로 X표시하면서 점프하는게 압권이다.[67]

현재는 이런 경향이 어느 정도 좋아져서 아치에너미의 일본공연에서는 슬램존을 만들어놓는 관객을 종종 볼 수 있다.

시기 상으로 영미권 메탈이 전성기에 있을 때 일본 내에 등장했고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누렸으나 음악적으로는 자신들만의 특출난 메탈 리프나 사운드를 가지지는 못했다. 특히 메탈의 인기가 완전히 꺾인 90년대 중반에는 메탈이 거의 배제되고 인더스트리얼 사운드의 DAHLIA를 들고 나오기는 했지만 작품 활동은 왕성하지 못했고 발라드로서 인기를 끌었다.

5. 여담

5.1. 팬이거나 영향을 받은 뮤지션

5.2. 한국인들이 좋아한 대표적인 일본 뮤지션

X 재팬[71]이란 단어가 들어가는데다 1990년대엔 태극기를 찢은 밴드라는 가짜뉴스의 피해까지 입었음에도, X 재팬은 그 시절 한국인들에게 강인한 인상을 남겼다. J팝이 리즈 시절을 달리던 90년대에 아무로 나미에와 함께 한국에서 가장 큰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던 밴드가 X JAPAN이었다. 지금도 X JAPAN하면 곡은 몰라도 이름은 아는, 혹은 리메이크 등의 영향으로 대표곡 'ENDLESS RAIN'이나 'Tears'는 들어봤거나 좀 더 깊게 파면 '쿠레나이'도 알아듣는 그 세대 일반인들이 꽤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 상당한 팬덤과 인지도가 있었다.

문화적 교류가 일반인보다 수월한 당시 한국 음악 업계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X의 최고 명곡 중 하나인 'ENDLESS RAIN'은 90년대 당시 인기에 불이 붙으려 하던 국내 락발라드계에 일본식 락발라드 감성이 이런거구나라는 식의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 그래서인지 녹색지대의 준비없는 이별처럼 표절 시비까지 일 정도로 영향을 받은 곡들이 나오기도 했다.[72] 그 외 Say Anything 같은 곡들도 신문에 언급될 정도로 국내에서 제법 인기를 끌었다.[73]

90년대엔 락발라드 붐과 함께 X JAPAN도 인기를 끌면서[74] 당시 국내 팬덤에선 부풀려진 소문들도 꽤나 돌았었는데, 예를 들면 X의 메이저 데뷔 앨범이었던 BLUE BLOOD가 일본에서 네 가구당 한장씩 팔렸다는 얘기나[75] 요시키가 세계 드러머 3위라는 얘기같은게 있었다. 물론 모두 왜곡되거나 날조된 이야기. 이는 당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있기 전 일본 문화에 대한 일종의 신비주의가 불러낸 촌극이었다.[76]

1993년 발매한 "Tears" 라는 곡이 한국 가사로 번안되어 M.C The Max잠시만 안녕으로 리메이크된 바 있다. 다만 X JAPAN 팬덤 사이에서 평가는 별로 좋지 못하다. 특히 가사의 리메이크에 대한 비판이 큰데, 자살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주 내용인 가사를 흔한 사랑노래 가사로 곡의 의도를 완전히 바꾸었기 때문. 그 중에서도 멜로 드라마틱한 유치한 뮤직 비디오는 최악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사실 잠시만 안녕이 리메이크 된 계기는 요시키가 M.C The Max의 보컬 이수를 프로듀싱한 적이 있기 때문인데[77], 다만 잠시만 안녕의 개사 사건으로 인해 부친 문제도 얽혀 요시키와의 사이가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 TraxX노민우도 요시키에게 프로듀싱받으며 Tears를 받았는데, 여긴 엠씨더맥스와는 다르게 한국어로 번역만 하고 키와 템포만 수정하였지만 팬덤 반응은 더 안좋았다. 결정적으로 2절 뒤에 히데의 기타연주 파트가 빠진 것이 한 몫했다.

한국에서 X JAPAN 팬이라고 밝힌 연예인이나 셀럽으론 문화 대통령으로 불린 서태지[78], SM 엔터테인먼트 창립자 이수만[79], 신화김동완[80], 발라드 가수 조성모[81], 방탄소년단RM, 엑소찬열, 슈퍼주니어김희철, 부활김태원, 백두산의 보컬 유현상김종서#, 영화감독 곽재용[82], 배우 배두나, 이병헌이민정 부부, 이동건, 전지현[83], 감스트 등이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샤이니 종현도 중학교 때 X JAPAN과 너바나의 노래를 듣고 작곡가가 되고 싶다고 결심한 걸로 알려졌다. JYJ김재중 또한 2018년 X JAPAN의 팬임을 밝히고 요시키와의 만남을 가졌다. 더 크로스캡틴시하도 2011년 X JAPAN 내한 공연 당시 후기를 남긴 적이 있었다.#

한국 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서도 인기가 많은 일본 밴드들 중 하나였다. 일본 내에서만 보자면 X JAPAN 보다 훨씬 더 롱런하고 대중적 지지도나 앨범 판매량도 더 우수했던 록 밴드들이 제법 있다. 그러나 해외에서의 인기는 X JAPAN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84]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 2000년대에 접어들고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문화교류가 본격화되면서, 많은 일본인들이 X JAPAN이 자국보다 한국에서 평가절상된 걸 알고 신기하다는 식으로 놀라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국과 일본의 문화적 취향 차이를 언급할 때 X JAPAN이 거론될 때가 많았다. 그러나 사실 이는 한국만의 취향이 아니라 전세계 록 팬들의 공통된 정서에 가깝다. 그러니까 한국만 일본 뮤지션들 가운데 유독 X JAPAN을 선호하는 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일본 뮤지션들 가운데 X JAPAN이 인기가 많다는 얘기. 즉 일본인이랑 한국인의 취향만이 서로 다른 게 아니라, 일본인이 좋아하는 록 음악과 대부분의 다른 나라 록 매니아들이나 대중들이 선호하는 록 음악이 차이가 많고, 한국인의 취향도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 사람들의 취향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아무래도 음악 스타일이 유럽풍 클래식에 가깝다 보니 각 나라별로 취향을 크게 타지 않고 어느정도 선호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굳이 X JAPAN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해외 록 팬들이나 대중들은 LOUDNESS, ANTHEM, VOW WOW 같은 메탈 밴드들, 그러니까 일본 내에서 대중적인 인지도나 상업적인 성공이라는 측면에선 B'z나 Mr.Children은커녕 X JAPAN보다 더 못했던 밴드들을 더 선호하고 고평가하지 정작 일본의 국민 밴드들이라고 불리는 B'z나 Mr.Children 등에 대해선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85] 그래서 설령 비즈나 미스터 칠드런 같은 일본의 주류 록밴드들이 적극적으로 해외 진출을 추진했다 한들 일본 본토 취향에 최적화된 이들의 음악으론 해외 무대에서 성공할 공산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일본과 가장 가깝고, 또 문화적 차이가 서구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다면 적은 편에 속하는 한국에서도 비즈나 미스터 칠드런 팬들이 별로 없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하여튼 일본 대중 문화에서 비주류에 가까운 밴드들이 해외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고 정작 일본의 메인스트림 밴드들은 경쟁력이 없다는 아이러니한 현상은 갈라파고스화라는 개념이 말해주는 것처럼 일본 문화의 특수성의 일단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5.3.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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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쿄구에 위치한 도쿄 돔에서 관객 5만 명이 동시에 X의 후렴구에 맞춰 점프를 했더니 진도 3의 지진으로 측정됐던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분쿄구에서는 라이브에서 이 곡을 부르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BORN TO BE FREE>의 싱글 앨범 커버 사진에 대하여 SNS를 통해 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앨범의 커버 사진에 나체의 몸에 목과 팔이 수갑이 채워진 여성의 뒷모습이 실렸기 때문. 여성을 성적으로 학대하고 성품화 하였다는 지적인데, 반대로 여성이 역사상 이용당하고 학대당하고 결박당해왔기 때문에 사진 속의 여성은 자유를 갈구하고 있는 것이며 앨범 재킷은 여성의 자유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반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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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초 요시키 인스타에 문제의 사진이 업로드되었다. 이 사진에서 보컬 토시만 제외되어 있었는데 기사에서는 Toshl와 YOSHIKI의 절연은 물론 X JAPAN의 재 해산이란 이야기까지 여러 불화설이 SNS를 통해 확산되고 있었다. 더불어 신곡의 명의가 X JAPAN으로 되어있음에도 객원 보컬인 hyde를 초청하였기에 이러한 주장이 마냥 스쳐갈 정도는 아니었다. 이는 X JAPAN 해체 당시 HIDE가 제안한 X JAPAN의 재결합 방식(객원 보컬을 초청하며 밴드를 유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요시키는 10여일만에 요시키 채널 독점 인터뷰를 통해 표기 수정[86]을 공지하며 공식적인 사과를 표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토시는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고 오해는 지속되는 상황이다.

2018년 9월 28일~9월 30일, 총 3일 동안 紅に染まった夜(붉게 물든 밤) 공연이 진행되었다. 사건은 3일째 라이브 날 전국적으로 강한 태풍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날 있었던 일본 전국의 행사와 라이브는 모두 중단되었다고. 하지만 X JAPAN은 관객을 모두 돌려보내고 난 뒤 WOWOW와 요시키채널에서 생중계로 라이브를 진행하였다. 유튜브에서 이 공연의 WEEKEND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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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뒤로 이들 명의의 활동이 없어서 간판만 있는게 아니냐는 말도 있다. 그러다가 2022년 11월 11일에 요시키, 하이도, 스기조, 미야비. 이 넷이 결성한 밴드 THE LAST ROCKSTARS 발표.

5.4. 대마신오인조(大魔神五人組)


X 시절에 팬 서비스로서 이벤트성으로 결성한 파트 체인지 밴드. 1988. 12. 31. 엑스타시 서밋, 1989년 8월 28일 오사카 비밀라이브, 1991년 10월 19일 닛신파워스테이션, 1991년 11월 17일 시부야 에그맨 1992년 1월 5일 파멸을 향하여에서 선보였다. 참고

6. 영화

6.1. We are 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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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위 아 엑스 (2016)
We Are X
파일:위 아 엑스 영화 포스터.jpg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스테판 키작
각본
제작 존 배첵, 다이안 벡커, 조너선 맥휴, 조너선 플랫
주연 요시키
음악 요시키
촬영 기간
제작사 파일:영국 국기.svg 패션 픽처스
수입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주)무브먼트픽처스
배급사 파일:미국 국기.svg 드라프토스 픽처스
파일:영국 국기.svg 네셔널 어뮤즈먼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라이크콘텐츠
개봉일 파일:미국 국기.svg 2016년 10월 21일
파일:영국 국기.svg 2017년 3월 2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7년 5월 25일
상영 시간 94분
제작비
월드 박스오피스 추가예정
북미 박스오피스
대한민국 총 관객 수 4,839명 (2018년 2월 25일 기준)
공식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상영등급 15세 관람가

6.2. Junk story

1998년 5월 2일 사망한 멤버 hide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일본에서는 2015년 5월 23일, 국내에서는 2017년 5월 18일에 개봉되었다. hide의 탄생 5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되었으며 사토 후토시(佐藤太)가 감독했다. 생전의 hide를 아는 인물에의 인터뷰나 당시의 영상등을 통해서로 hide의 생애를 되돌아 보면서, 그의 음악 인간성 정신 세계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배우 츠카모토 타카시가 내레이션을 맡았다.

인터뷰 한 인물로는 Yoshiki, I.N.A, 森重樹一, J, 松本裕士, PATA, JOE, Kiyoshi, CHIROLYN, DIE, kyo, Tetsu, 木村世治, YANA, SEX GEORGE, defspiral, CUTT, 小杉茂, DYNAMITE TOMMY, 에릭 루스트포울이 있다.

영화의 테마곡인 Junk story는 생전에 히데가 직접 작곡한 솔로 앨범 곡이다. https://youtu.be/9xptUx0MTpA

6.3. HURRY GO ROUND

히데 사망 20주년을 계기로 제작된 영화. 2018년 5월 26일 발매, DVDblu-ray는 2018년 12월 5일에 발매하였다.
배우인 야모토 유마가 히데의 발자취를 쫓으면서 HURRY GO ROUND의 가사가 적힌 묘비를 보면서 유언과 같은 가사로 인해 사망이 자살인지, 사고인지의 음모론을 파헤치는 과정을 핵심으로 전개된다.

히데가 안치된 미우라 령원을 시작으로 요코스카의 단골음식점, 히데의 소속사 사무실, 히데의 장례식이 열렸던 츠키지 혼간지, LA의 작업실과 거주지, Pink Spider의 뮤직비디오 촬영장소, 사망 직전 마지막 회식을 했던 장소에서 그와 함께했던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리하는 영상이다.

이 작품에서 HURRY GO ROUND의 유서설을 확인하고자 히데의 당시 매니저이자 동생이었던 히로시의 협조로 방대한 양의 영상과 HURRY GO ROUND의 가사 초안과 그 이후의 가사 메모들을 확보하여 열람할 수 있었으며 HURRY GO ROUND는 히데의 유서가 아닌 사실을 입증한다.

7. 디스코그래피

7.1. 싱글

넘버링 발매일타이틀오리콘 판매량비고수록 앨범
인디 1985.06.15 I'LL KILL YOU - 1,000장[87] - VANISHING VISION
인디 1986.04.10 オルガスム
오르가즘
- 2,500장[88] - BLUE BLOOD
1 1989.09.01
다홍
주간 5위 313,000장 메이저 데뷔 싱글
1989년 일본유선대상 최우수 신인상 수상
제43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제67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제68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1989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74위
1990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67위
2 1989.12.01 ENDLESS RAIN 주간 3위 365,000장 제68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1990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21위
3 1990.04.21 WEEK END 주간 2위 298,000장 1990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32위
4 1991.09.11 Silent Jealousy 주간 3위 284,000장 제42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1991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58위
Jealousy
5 1991.10.25 Standing Sex / Joker 주간 4위 261,000장 1991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87위
6 1991.12.01 Say Anything 주간 3위 590,000장 1992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33위
7 1993.11.10 Tears 주간 2위 837,000장[2Px] 제44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1993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77위
1994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50위
DAHLIA
8 1994.07.10 Rusty Nail 주간 1위[90][91] 752,000장[Px] 제45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1994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28위
9 1995.08.01 Longing 〜跡切れたmelody〜 주간 1위 476,000장[Px] -
10 1995.12.11 Longing 〜切望の夜〜 주간 5위 172,000장
11 1996.02.26 DAHLIA 주간 1위 413,000장[Px] -
12 1996.07.08 Forever Love 주간 1위 510,000장[Px] 제48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제66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1996년도 오리콘 연간 싱글 랭킹 47위
13 1996.08.26 CRUCIFY MY LOVE 주간 5위 290,000장[Gx] -
14 1996.11.18 SCARS 주간 15위 155,000장 -
15 1997.12.18 Forever Love(Last Mix)) 주간 13위 163,000장[Gx] -
16 1998.03.18 THE LAST SONG 주간 8위 92,000장 - X JAPAN
17 2008.01.23 I.V. - - iTunes Store 한정 발매 수록 앨범 미정
18 2011.06.08 Scarlet Love Song -BUDDHA MIX- 1위[98] -
19 2011.06.28 Jade - X JAPAN
20 2015.11.06 BORN TO BE FREE - - 제66회 NHK 홍백가합전 가창곡
21 2023.07.28 Angel - - -

7.2. 앨범

7.2.1. 정규

VANISHING VISION》(인디 앨범) (1988년 4월 14일)
BLUE BLOOD》 (메이저데뷔 앨범) (1989년 4월 21일)
Jealousy》 (1991년 7월 1일)
ART OF LIFE》 (1993년 8월 25일)
DAHLIA》 (1996년 11월 4일)[Px]
X JAPAN》 (예정)

7.2.2. 라이브

《On the Verge of Destruction 1992.1.7 Tokyo Dome Live》 (1995년 1월 1일 발매)
《LIVE LIVE LIVE TOKYO DOME 1993-1996》 (1997년 10월 15일)[Gx]
《Live Live Live Extra》 (1997년 11월 5일)
《LIVE IN HOKKAIDO 1995.12.4 BOOTLEG》 (1998년 1월 21일)[101]
《ART OF LIFE LIVE》 (1998년 3월 18일)
《The Last Live》 (2001년 5월 30일)

7.2.3. 컬렉션

《X SINGLES》 (1993년 11월 21일)
《B.O.X ~Best Of X~》 (1996년 3월 21일)
《BALLAD COLLECTION》 (1997년 12월 19일)[Px]
《Singles ~Atlantic Years~》 (1997년 12월 25일)
《Star Box》 (1999년 1월 30일)
《PERFECT BEST》 (1999년 2월 24일)[Gx]
《X JAPAN BEST ~FAN'S SELECTION~》 (2001년 12월 19일)
《THE WORLD ~X JAPAN 初の全世界ベスト~》(2014년 6월 17일)[G]

7.2.4. 리마스터

《BLUE BLOOD (리마스터링 재판매반)》 (2007년 2월 14일)
《Jealousy (리마스터링 재판매반)》 (2007년 2월 14일)

7.2.5. 사운드 트랙

《We Are X》 (2017년 3월 3일)

8. 라이브 콘서트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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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개별 문서가 있는 라이브 콘서트

X JAPAN TOKYO DOME 2DAYS
THE LAST LIVE〜最後の夜〜


[1] 메이저 데뷔는 1989년.[2] 이미 고인이 된 HIDETAIJI 마저도 X JAPAN 멤버들은 그 상징성을 감안하여 정식 멤버로 인정하고 있다.[3] 멤버들의 고등학교 1년 선배, 활동방향에 대한 견해차이로 인해 탈퇴.[4] YOSHIKI, Toshi와 고등학교 시절부터 함께 해온 멤버였으나 TAIJI가 가입조건으로 TERRY를 내보내는 것을 요구했고, YOSHIKI는 고심끝에 TERRY를 해고했다. 이후 TAIJI가 처음 탈퇴한 후에 YOSHIKI가 찾아가 사과하며 다시 돌아올 것을 부탁했으나 "요시키의 기분은 이해하지만 나에게도 프라이드가 있다."라며 재가입을 거절했다. 2002년 오토바이 사고로 사망.[5] 음악적 견해로 JUN과 함께 탈퇴.[6] TAIJI가 가입조건으로 데리고 온 멤버[7] 음악적 견해로 HIKARU와 함께 투어 도중 무대에서 탈퇴를 발표했다.[8] 현재 스님이 되었다.[9] 인디시절 오토바이 사고로 탈퇴하게 되고 PATA가 정식으로 가입하게 된다.[10] 1987년 밴드 X의 5인 체제가 확립되기 이전에 X를 거쳐갔던 멤버들은 정확한 가입시기 및 탈퇴시기를 알 수가 없어 그 당시에 개최되었던 각 공연별 연주자 기록을 참고로 하여 임의로 표를 작성하였다.[11] 스튜디오 뮤지션으로서의 별도 계약을 거쳐 끝내 YOSHIKI로부터 탈퇴 의사까지 종용받은 TAIJI가 1992년 1월, 도쿄 돔에서의 무대를 끝으로 X를 떠난 이래 해당 파트는 쭉 공석으로 남아 유지되고 있었다.[12] 재결성 이후 1998년 5월 2일 의문사한 HIDE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SUGIZO가 참여했지만 당시 SUGIZO는 X JAPAN의 세션 멤버로 고용되었다.[13] 2023년 11월 8일 HEATH 사망 확인으로 공석[14] 한국어로 '임 가수'[15] 2010년까지는 TOSHI라는 명의를 사용했으나 이후 개명. 참고로 Toshl의 마지막 알파벳은 대문자 I가 아니라 소문자 L이다.[16] X의 악곡에서 베이스가 비교적 쉽다고 기술되어있으나, 실제 X의 악곡에서 베이스 파트는 어려운 편이다. 기본적으로 X의 악곡이 빠른 템포의 메탈이고, 긴 러닝 타임 동안 리듬을 유지하면서 중간 중간 멜로디컬한 베이스 라인을 넣어주어야 하기에 난이도가 상당한 편이다. 물론 X JAPAN 체제로 재편되면서, 베이스 파트의 존재감이 줄어들고 기본적인 리듬 파트라는 베이스 파트 본연의 역할을 보다 충실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난이도가 낮아졌다고 평가할 수 있으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부분이다. Drain 이나 Scars 같은 악곡에선 인트로의 베이스 파트가 돋보인다.[17] 물론 극히 일부 구간에서나 발생하는 문제라고는해도 Silent Jealousy에서의 솔로 파트라든지 X에서의 솔로 파트 연주분들과 같은 경우들은 누가 보아도 문제가 꽤나 심각하다. 그러나 단시간 안에 모든 곡을 익혀냈고 많은 비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코딩했다고 한다.[18] 대표적으로 1994년의 白い夜에서의 紅. YOSHIKI가 폭주하자 HEATH는 당황하여 YOSHIKI만 바라본다.[19] 히데와 요시키는 후배 밴드를 육성하면서 친분을 나눴고, 이후 요시키는 X JAPAN 재결합 직전 각트의 제안으로 스기조, 미야비와 함께 S.K.I.N을 결성해 함께하였다. 스킨은 미국에서 단 한번의 공연을 마치고 X JAPAN 재결합을 계기로 해산하였다. kiss the sky와 beneath the skin이란 곡은 S.K.I.N 시절 스기조가 작곡하였다.[20] 밴드 활동으로는 대문자를 쓰지만, 솔로 활동으로는 hide라는 소문자를 쓴다.[21] 잘못 알려져 있는 사실 중 하나가 X JAPAN의 비주얼은 모두 히데가 담당했다는 것인데 오히려 X 초기 인디 시절에는 히데가 음악적 부분을 담당했고 타이지가 X의 화장이나 의상 같은 비주얼을 담당했다. 이것은 타이지의 자서전에도 나와 있는 사실이다. 공식 팬클럽이라는 Weekend에도 히데의 작품이라고 적어 놓는 오류를 범했다.[22] Vanishing Vision 당시 인터뷰를 보면, 히데가 X에 가입한 후 요시키에게 '紅(쿠레나이) 왜 연주 안 해? 나 이 곡 되게 좋아했는데'라는 식으로 말한 것을 계기로 타이지와 히데가 설득하고, 그들이 멜로디 라인과 드럼 솔로 부분을 제외한 부분을 편곡하기까지 한다. 결국 타이지와 히데의 판단은 적중해서 紅는 그들의 대표곡이 된다. 유튜브에서 쿠레나이 데모 버전을 검색해서 들어보면 이들의 기여도를 알 수 있다.[23] Rose of Pain의 태핑 부분은 굉장하다. 아쉽게도 본인 시그네쳐인 크리미널 베이스를 사용 후에는 프렛 수가 부족하여, 솔로를 듣지 못한다.[24] Jealousy 앨범에 수록된 Voiceless Screaming에서 그의 클래식 기타 실력을 잠시 맛볼 수 있다.[25] 본래 요시키는 Endless Rain를 피아노 독주곡으로 작곡했으나 타이지가 '그럼 다른 멤버들은 네가 피아노 칠 동안 가만히 앉아만 있으라고? 그리고 메탈 밴드가 기타 솔로도 없는 발라드 곡을 연주하냐'라면서 락 발라드 형식으로 편곡하여 앨범에 들어가게 된다.[26] 당시 타이지는 결혼 비용 등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힘든 상태였다고 한다.[27] 애니메이션 전체 시리즈 오프닝, 디럭스에서는 오프닝/엔딩.[28] 본명: 이즈미사와 유우지[29] 가타카나 그대로 발음하면 "싱구싱구싱구"다. 영어 Sing을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30] 야마노테선서울 지하철 2호선처럼 순환선이여서 종점역이 없다. 또한 도쿄 지하철에서 이용객이 제일 많은 노선이다.[31] 나중에 여기서 LADIES ROOM, ZI:KILL, LUNA SEA, TOKYO YANKESS, GLAY 등 수많은 유명 밴드가 인디 데뷔를 하게 된다.[32] 80년대 후반 "밴드붐"이라는 용어가 방송 및 언론에 등장할 정도로 밴드 음악이 유행했던 일본의 당시 사회 분위기상 공중파, 지상파 가리지 않고 밴드는 각종 오락 방송의 섭외 대상 1순위였다. 본격적으로 무명의 아마추어 밴드들을 섭외해 매력 발산의 기회를 마련한 いかすバンド天国, 原宿歩行者天国 등의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러한 시류 속에서도 메탈 밴드들은 정통 음악방송이 아닌 이상 TV 출연을 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금기가 있었는데, X는 이러한 금기 따위 가볍게 무시하는 행보를 보여줬다. 지역 민영방송국을 위주로 오락 프로도 가리지 않는 적극적인 TV 출연을 통해 얼굴을 알린 결과, 인디 때부터 관동에서는 나름대로의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었다.[33] 염화 비닐 등의 얇은 시트에 레코드와 같은 음구(音溝)를 새긴 것. 레코드판과 마찬가지로 픽업으로 재생할 수 있다. 최근에는 사용되지 않는다.[34] 단 1989년에 실질적으로 일본 대중들에게 히트했던 곡은 걸즈 록 밴드 PRINCESS PRINCESSDiamonds였다.[35] 후에 요시키가 사들였다가 다시 매각했다.[36] 당시 CBS SONY는 다음 해 회사의 주식상장을 목표로 하고 있어 91년도 연말까지 최대한 매출액을 올려 상장기준을 맞춰야 했고, 이로 인해 X의 신작 발매 시기 연기를 허용할 만한 여유가 없던 시기였다.[37] ART OF LIFE의 락 부분 편곡은 타이지가 마지막으로 편곡을 담당한 곡이다.[38] 그렇다고 도쿄돔에서 라이브를 개최한 록밴드가 X가 최초라는 말은 아니다. 도쿄돔을 개장했던 해인 1988년에는 BOØWY가 4월 4, 5일에 이틀 연속으로 해체 라이브를 개최했었고, 다음 해인 1989년에는 BUCK-TICK이 라이브를 했었다. 그러나 X는 지금 시점으로 봤을 때는 그 색채가 많이 옅어졌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명백히 헤비메탈 밴드였다. 헤비메탈 밴드로서는 이래적인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도쿄돔에서 라이브를 개최했었던 아티스트들 목록 참고.[39] 'just kill me' 단 한 소절 때문이라고 한다.[40] 초기부터 94년까지 세운 그 빗자루 머리.[41] 사실 사이비 종교단체인 Home Of Heart의 압력에 의해서였다.[42] 맴버들에게 S.K.I.N을 재결할 의향이 있느냐라고 언론에서 맴버 각자에게 물은 적이 있지만 그들은 "요시키의 선택에 달렸다."라고밖에 답하지 않았고. 사실상 요시키는 자기 음악의 전부였던 토시를 되찾았으니 X JAPAN 이외의 다른 그룹을 도맡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리고 2022년 겨울이 오고[43] 과거 토시의 개인사무소 사장과 엑스제팬 매니지먼트사의 사장을 역임했다가 금전적 문제로 해임당했던 타케다라는 사람이 토시에게"요시키가 재결성을 원한다"라는 말을 전했고, 토시는 그 말을 확인하기 위해 요시키에게 10여년만에 연락을 한 것이 재결성의 시작이었다.(정작 요시키는 타케다에게 토시가 재결성을 원한다고 들었다.) 얼마 후 타케다는 또다른 문제를 일으켜 재결성 프로젝트에서 제외되었다.[44] 타케다가 제시한 계약금 3억엔의 이야기를 듣고 토시를 데리고 계약을 하기 위해 타케다를 찾아갔고, 이 일로 토시는 마사야에게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45] HIDE의 회사로, 현재는 그 동생인 히로시가 사장[46] 애초부터 악곡의 수가 턱 없이 적어 베스트 앨범을 가지고는 별다른 재미를 못 보고 있었는 바 이 점에 대해서는 BALLAD COLLECTION 53만 장, PERFECT BEST 25만 장을 제외한 거진 10만 장 이하를 밑도는 부진한 판매량이 증명한다.[47] 2018년에는 태풍으로 인해 전국의 모든 라이브 콘서트가 취소된 적이 있음에도 X JAPAN은 콘서트를 진행하였다. 물론 관객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냈지만 방송을 통한 일명 "무관객 라이브"를 진행하였다.[48] 우리나라 드림 콘서트를 생각해보면 된다. 아이돌 팬클럽 단위로 관람.[49] 기존에 발표한 앨범 미수록곡들까지 다 들어가면 실질적인 신곡은 5곡인 것이 함정.[50] 인디즈 앨범 부클릿에는 스래시 메탈이라고 써있기도...[51] 멜로딕 스피드 메탈의 태동기를 열었다고 평가되는 Helloween의 초기 음악을 들어보면, 스래쉬 메탈을 연상시키는 강한 리프와 빠른 비트 위에 서정적인 멜로디와 기타 솔로가 가미된 형태로, 후발주자 X는 이와 상당히 비슷한 음악적 접근을 보이고 있었다.[52] 실제로 일본에서 웬만큼 인기가 있는 메탈밴드는 거의 이장르에 포진되어있다. 갈네리우스,라이트브링거 등등.. 이는 현재 진행형.[53] X JAPAN의 앨범 판매량에 대해선 이래저래 말이 많은데, 일본레코드협회(약칭 RIAJ) 인증으로 밀리언셀러를 달성한 음반은 메이저 2집 <Jealousy>와 싱글모음집 <X SINGLES>가 있다.# 메이저 1집인 <BLUE BLOOD> 역시 누적 판매량 기준으로 밀리언을 달성했다는 말도 있지만 공식적인 것은 아니다.# 과거 90년대 한국에서 X가 지나치게 과대평가를 받다가 00년대 이후 그 거품이 걷히면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한동안 많은 비판에 직면했는데, 그때 보면 전성기 때도 음반 판매량이 겨우 백만장을 한두 번 정도 넘긴 밴드가 무슨 일본을 대표하는 밴드냐는 식으로 까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사실 그 정도면 메탈 음악을 표방하는 밴드로서 전무후무한 판매량을 기록한 게 맞다. 메탈 팬덤 사이에서 X 보다 음악적으로 더 높게 평가받고, 실제로 음악적 커리어가 대단한 LOUDNESSANTHEM, VOW WOW 등 일본 메탈계를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레전드 메탈 밴드들도 달성 못한 게 밀리언 셀러다. 물론 X를 위에 언급된 순수하게 헤비메탈과 하드락을 추구했던 밴드라고 보기는 어렵고 사실상 헤비메탈 장르도 표방했던 대중밴드다. 멤버의 변화에 따라 심하게 변화된 음악성도 그렇고 발라드를 꽤 많은 메인 싱글로 내세운 점 등등... 게다가 현재는 헤비메탈과 사이키델릭, 인더스트리얼 등의 락의 하부장르와 교집합을 추구하던 히데와 정통헤비메탈과 하드락의 주도권으 쥐었던 타이지가 모두 사망하면서 더 이상 헤비메탈을 추구할 일은 없어보인다.[54] 1992년 1월의 도쿄 돔 3 Days 라이브뿐만 아니라 1991년 2월부터 4월까지 진행되었던 첫 필름 기그 투어에서 동원한 관객 수와 동년 8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되었던 바이올런스 인 젤러시 투어에서 동원한 관객 수까지 전부 다 합산하면 근 1년간 동원한 관중의 수가 거의 3~40만 명에 이른다. 물론 이것 역시도 일본 대중음악계 전체를 놓고 볼 때는 엄청 대단하다 볼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메탈 밴드로서는 독보적인 기록이라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다.[55] 1992년 12월 31일 도쿄 돔 공연은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인 그 팝의 황제였고,1998년 12월 31일부터는 킨키키즈, J-FRIENDS 등 쟈니스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다.[56] 비주얼 계로 불리는 일본 음악 특유의 문화 중 하나로, X JAPAN 말고도 BOØWY, BUCK-TICK, D'ERLANGER, COLOR가 비주얼 록 발생에 기여하였다지만 사실상 히데의 시각적 면모가 기원이다.[57] 원문: "Different level of rockstar."[58] 일부 국내 네티즌들은 X는 거품이고 라우드니스가 일본 현지에서 훨씬 유명하고 대단하다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상술했듯 대중적 인지도는 X가 훨씬 높다. LOUDNESS야 일본 메탈계의 레전드이지만 X가 라우드니스보다 대중적 인지도에서 밀린다고 비판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X는 대중적인 멜로디 구사와 매스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등 매우 이례적인 방식으로 대중에게 메탈을 어필했고, 이런 대중적 행보 때문에 오히려 메탈씬에서는 그 음악성이 평가절하됐던 밴드였다. 누누이 강조했듯 메탈 음악의 인기는 일본 역시 제한적이다. 흡사 아이돌 가수 같은 인기를 누린 전성기 때 X는 메탈 밴드의 테두리에서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게 맞다.[59] 일본 대중음악 역사상 메탈 뮤지션 가운데 X JAPAN보다 음악성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밴드들이 있을진 몰라도, 대중적인 인기가 더 많다고 할 수 있는 밴드는 별로 없다(아주 없는 건 아니다. 당장 BOØWY와 보위 보컬이던 히무로 쿄스케만 해도 솔로시절 공연마다 도쿄돔이 매진되는 흥행성적을 냈고 기타리스트 호테이 토모야스만 해도 후일 킷카와 코지와 결성한 컴플렉스로 엄청나게 팔렸다.[60] 그외 전성기적 GLAY도 국내에 팬이 별로 없어서 알려지지 않았을 뿐 대중적으로 정말 어마어마하게 성공한 밴드다). 밴드들의 화려한 겉모습에 가려서 그렇지 일본 역시 헤비메탈의 인기는 상당히 제한적이기에 성공한 메탈 뮤지션들조차 메탈 팬들의 생각만큼 많은 부와 명성을 누리지 못한다. 인디 밴드들은 물론이거니 어느 정도 메이저에 진입에 성공한 밴드들조차 금전적 수익이 그리 많진 않아 궁핍한 생활을 하는 뮤지션도 많다. 단적인 예로, 일본 헤비메탈의 전설이라는 ANTHEM의 보컬 사카모토 에이조가 비활동기 때는 수많은 알바와 변변찮은 일자리를 전전했다는 건 유명한 얘기고, 또 90년대 일본 하드록&메탈을 논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언급되는 실력파 밴드 SIAM SHADE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연주력에 있어선 X JAPAN보다 더 뛰어났고 음악성에 있어서도 X JAPAN에 전혀 약하지 않다.[61] 또 메탈의 대중화를 지향한다는 X JAPAN과 비교해도 꿇리지 않을 정도로 소프트한 멜로디를 구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엔 상업적으론 그리 큰 성공을 거두지 못 해 고생을 많이 했다(공사장 알바를 뛴 사람은 멤버들과 싸우고 일시적으로 탈퇴한 보컬의 히데키 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비주얼 록을 위시한 메탈이란 장르 내에서는 전무후무한 인기와 부를 누린 X JAPAN은 뒷소문으로 따라다니는 이런저런 이야기는 제외하고서라도 일단 성공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대단하고 후배 밴드들에게 존경받을 자격은 있다는 얘기다. 모든 직업이 다 그렇듯, 뮤지션들 역시 오매불망 바라는 건 음악적 성취도 중요하지만 '사회적인 성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62] 다만 SIAM SHADE가 상업적인 성공을 못 이뤘던 것에는 몇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첫번째는 X JAPAN의 경우 충격적인 비주얼 패션과 초밥집 라이브같은 각종 어그로를 끌어 대중들에게 각인시켰지만 SIAM SHADE는 완전 초창기를 제외하면 비주얼계와는 거리가 아주 많이 있는 밴드에다 앨범을 낼때마다 발라드 싱글넘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던 X와는 다르게 SIAM SHADE는 헤비메탈, 하드록 위주의 성향이라 당대 트렌드와는 조금 다르게 나가는 편이었고, 두번째로 X JAPAN은 헤비메탈에 클래식발라드가 섞여서 우리나라보다도 록발라드가 더 잘나가는 일본의 성향상 Tears, Endless Rain이 대성공해 X JAPAN들이 늘어났던 반면 SIAM SHADE는 발라드 위주의 넘버가 거의 없고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테크니션이었던 다이타의 기타플레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하드락 밴드였다.[63] 세번째로는 보컬의 음색이다. TOSHI는 기본적인 음색이 탁한 편이지만 발라드에 어울릴 정도로 부드럽다는 강점이 있다. 초창기에는 성대를 일부러 긁어 락커 이미지를 선보였고 요시키의 무리한 작법으로 인해 점점 목에 부담이 심해져 스크래치를 줄이고 본래의 탁하면서도 부드러운 음색으로 돌아온 것에 가깝다. 즉 태생부터 메탈형 보컬보다는 록발라드형 보컬에 가까웠기에 대중들이 요시키 스타일의 멜로디와 토시의 음색에 이끌려 X JAPAN을 선호하게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네번째로 90년대의 샴쉐이드 소속사인 아뮤즈가 대중음악에선 확실한 밥줄이 있었지만 록계열에서는 90년대 내내 고전했거나 지원이 미비했다는 점이다. 당시에도 거대 소속사였지만 예나 지금이나 아뮤즈는 소속가수나 배우가 부진해도 초반에는 거의 지원을 해주지 않는 편.[64] 이 경우는 트리뷰트나 리메이크라기보다는 보컬 요나스가 팬 서비스로 한 곡을 불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65] 리뷰란에 네티즌들이 직접 리뷰를 작성할 수 있도록 한 이후에도 어떤 경우에는 리뷰를 통째로 지워버리기도 한다.[66] 대선배답게 공석에서 라이브를 갖게 되면 관객은 물론 같이 공연하러 온 후배 밴드들마저 소리지르게 된다.[67] 라이브 GIG 영상을 보면, 수 만명이 넘게 들어찬 도쿄 돔에서 모든 이들이 뛰고 있는 모습은 장관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68] 한때 3천만 장까지 부풀려져 있던 적이 있었다. 다만 어디 네티즌의 근거없는 부풀리기가 아니라 3천만 장을 팔았다는 발언 자체는 롤링 스톤지나 영화 We are X 등 여러 매체에서 언급된 바가 있으니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정도로만 알아두자.[69] 다만 당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태극기가 아니라 일장기를 찢은 밴드였다고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그만큼 당시 혼재된 루머들이 많았단 소리. 참고로 국내 밴드 노브레인이 2001년 후지 록 페스티발에 출연해 실제로 욱일기를 찢는 퍼포먼스를 한 적이 있었다.[70] 재밌는 건, 오다 카즈마사와 요시키 둘 다 업계 전문가들에게 받는 고평가나 후배 뮤지션들에 미친 영향력에 비해 대중적으론 그렇게 엄청나게 큰 성공을 거뒀다고 보기는 어려운 인물들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 코무로 테츠야 역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일본 음악계의 다른 기라성 같은 뮤지션들을 놔두고 두 사람을 언급했을 수도 있다.[71] 물론 상기했듯 원래 밴드 이름은 X였다.[72] 사실 인터넷도 대중화되지 않았고 표절이란 개념도 희박하던 20세기엔 다수의 한국 작곡가들이 그냥 좋다 싶으면 일본 음악 갖다쓰는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건 90년대 후반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전까진 아예 일본 음악 자체를 리메이크로 정식 구매를 못하다보니 일단 번안곡처럼 받아 쓰되 저작권료는 일본에 주는 편법적인 경우도 있었다.[73] SAY ANYTHING과 ENDLESS RAIN은 일본 가라오케 내에서도 높은 순위를 유지하는 곡들이다.[74] 물론 90년대 초중반엔 일본 문화 수입을 공식적으로 금하고 있었던 사정도 있고 해서, X JAPAN 노래 역시 소수의 팬들에 의해 불법 수입(...) 되고 있던 실정이었다. 때문에 이 당시 인기에 대해선 무슨 차트 순위로 공식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보니, 복사본이 수십만장 팔렸다는둥 추억보정이라는둥 오늘날에도 과소평가와 과대평가가 동시에 있는 편이다. 하여튼 1998년 일본 문화 수입이 공식적으로 열리면서 X JAPAN도 합법적으로 앨범 발매 등을 할 수 있게 된다.[75] 이 소문이 퍼진 첫 시발점은 모 언론사의 오보였다고 하는데, X JAPAN의 누적 판매량을 BLUE BLOOD 한 앨범의 판매량으로 표기하는 오류가 있었다고 한다.[76] 당시 일본 문화를 몰래 즐기던 층들 중엔 중고등학생이 상당수였는데, 아무래도 속주, 고음, 현란한 테크닉 이런걸 더 크게 받아들이기 쉬운 세대들이다 보니 현란한 속주를 선보이던 요시키가 많이 과대평가 받은 측면이 있다. (드럼 실력에서 속주는 한 부분이다.)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의 고음병이 워낙 임팩트가 컸지만 비슷한 시기 속주병도 만만찮았다.[77] 엠씨더맥스의 개명 전 이름인 꼬꼬마 문차일드 당시 요시키한테 편지도 보내는 등 친분을 쌓았다.[78] 자신이 개최한 2002ETPFEST에서 히데를 스크린 영상 공연하게 하였으며, 히스와 파타가 dope HEADz로 참가하였고 서태지가 파타에게 일본어로 X팬이었다며 인사했었다.[79] 힐링캠프 출연 당시 그룹 신화 김동완의 증언에 따르면, 이수만은 한동안 'X JAPAN에 꽂혀서 파퓰러 댄스&팝 가수인 신화에게 X JAPAN 같은 파격적인 비주얼을 강요했다'고 한다.# 문젠 그 결과 인기가 폭락하고 욕만 잔뜩 먹었다고... 사실 댄스 가수를 비주얼 록 가수처럼 치장하는 시도는 이미 H.O.T. 때도 몇번 선보인 바 있었다.[80] 신화 초기에 X JAPAN에 꽂힌 소속사 대표 이수만의 강요로 본의 아니게 X JAPAN의 비주얼을 따라 하다 욕도 많이 먹었지만, 실제로도 X JAPAN을 좋아한다고 한다. 자신의 단독 콘서트 때 <Tears>라든지 <Say Anything> 같은 X JAPAN의 히트곡들을 빠지지 않고 자주 부르는 편이다.#[81] 개인적인 친분도 상당해서 요시키에게 조성모 노래 가운데 가장 흉악한 난이도를 자랑하는 <그대 뿐이어서> 곡을 받아 5집 앨범에 수록#하기도 했고, 일본에서 공연도 종종 함께 했다. 다만 요시키와 조성모의 콜라보레이션은 그리 좋은 평가는 받지 못했다. 나름대로 뛰어난 보컬리스트인 조성모에게 토시 창법을 일방적으로 강요한 통에 죽도 밥도 아니게 되었다는 게 중론이다.[82] X JAPAN 극팬으로 자신이 감독을 맡은 2000년대 영화 <여친소> OST로 X JAPAN의 최대 히트곡인 <Tears>를 그것도 이례적으로 멜로디만이 아닌 일본어 가사 보컬을 그대로 쓸 정도였다. 요시키 역시 이 소식을 듣고 감격해 공개적으로 "예술가로서 그저 행복할 뿐"이라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83] 영화 <여친소>에 캐스팅 되면서 X JAPAN 극팬인 곽재용 감독에게 전염소개받고 꽂혔다는 일화를 언급했다.[84] X JAPAN은 <ART OF LIFE>로 미국 진출을 추진하다 여러 이유로 실패한 뒤로는 딱히 해외 진출을 시도한 적이 없다.[85] 실제 일본의 위상에 비해 이들의 해외 인지도는 처참한 수준이다.[86] X JAPAN feat.HYDE를 YOSHIKI feat.HYDE로 수정하였다. 참고로 이 곡엔 SUGIZO도 참여하였다.[87] 싱글 1,000장을 제작하고 지인 및 친구들을 위주로 직접 팔아 매진시켰다.[88] 최초 제작분 싱글 2,500장이 매진되었기 때문에 싱글 추가 제작을 예정하고 있었지만, 녹음에 참가했던 기타리스트 JUN과 베이시스트 HIKARU가 탈퇴하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2P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더블 플래티넘 (최소 출하량 800,000장 이상) 인증[90] 싱글차트 2주 연속 1위[91] 월간 7위[P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플래티넘 (최소 출하량 400,000장 이상) 인증[P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플래티넘 (최소 출하량 400,000장 이상) 인증[P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플래티넘 (최소 출하량 400,000장 이상) 인증[P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플래티넘 (최소 출하량 400,000장 이상) 인증[G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골드 (최소 출하량 200,000장 이상) 인증[G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골드 (최소 출하량 200,000장 이상) 인증[98] iTunes Store 싱글 차트 기준.[P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플래티넘 (최소 출하량 400,000장 이상) 인증[G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골드 (최소 출하량 200,000장 이상) 인증[101] 부틀렉은 휴대용 녹음기로 공연 음원을 도청하는 불법 행위이지만 요시키는 이를 역이용해서 앨범으로 발매했다.[P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플래티넘 (최소 출하량 400,000장 이상) 인증[Gx] 일본레코드협회 구기준 (~2003.06) 골드 (최소 출하량 200,000장 이상) 인증[G] 일본레코드협회 현기준 골드 (최소 출하량 100,000장 이상) 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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