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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30 07:49:20

히트곡/국내/1980년대

히트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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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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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년

2. 1981년

3. 1982년

작사: 김순곤 / 작곡: 조용필

4. 1983년

작사/작곡: 박성훈

5. 1984년

작사: 하지영 / 작곡: 조용필

6. 1985년

7. 1986년

8. 1987년

9. 1988년

작사/작곡: 이영훈
88년 골든디스크어워즈 본상
88년 MBC 10대 가수 본상
* 이문세는 분명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린 가수는 아니었다. KBS 가요 톱텐 등 인기 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하는 것은 힘겨웠다. 이문세의 지지층은 감성적인 여대생, 여고생들이 대다수였다. 반면 높은 작품성을 지닌 이문세의 노래들은 세월이 지나도 다른 히트곡들에 비해 바래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었고, 세월이 흘러 한국형 발라드의 효시로 그 영향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본래 거대한 히트를 치지 않았고 90년대 댄스지옥을 지나가며 조용히 잊혀지던 이문세의 노래들은, 인터넷의 발달과 더불어 오디션 프로그램의 등장으로 인해 갑자기 젊은 층에게로 재림해 버렸다. 이문세는 3, 4, 5집에 걸쳐 골든디스크 본상을 수상했지만 4집은 3집과 더불어 한국 100대 명반에서 순위권 안에 꼽혔을 뿐만 아니라. 5집의 세 노래들은 수많은 후배 가수들의 리메이크, 경연 프로그램에서 선정 등으로 많은 영향력을 발휘했다.
작사/작곡: 김남균작사/작곡:신해철널 그리며 작사: 박남정 / 작곡: 박남정
사랑의 불시착 작사: 이호섭 / 작곡: 김기표
한 앨범에서 가요톱텐 골든컵 2개 수상
* 이 시기 ㄱㄴ춤은 초등학생들도 장기자랑에서 모조리 따라할 정도로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이 때 박남정의 백댄서 중에는 이주노와 양현석도 있었다. 훗날 전설이 될 문나이트 출신들이었으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10. 1989년

작사: 이호섭 / 작곡: 김영광
MBC 10대 가수 가요제 대상, 최고 인기 가요 수상곡
골든디스크어워즈 본상
작사/작곡: 이혜민희망사항 작사: 노영심 / 작곡: 노영심
너에게로 또다시 작사: 박주연 / 작곡: 하광훈
1990년 MBC 10대 가수 가요제 대상 수상곡
1990년 골든 디스크 대상
* 1980년대 방송가 대상은 소위 말하는 기성가요와 기성가수들이 휩쓸었지 결코 신인으로 불리는 가수들이 수상한 적이 없었다. 90년대로 접어들고 나서 반대가 되는 이 현상의 이유는 주로 판매량과 행사를 비롯한 실질적인 인기에 있다. 당시 소위 신인으로 분류되던 가수들이 비록 가요톱텐과 같은 텔레비전 차트나 방송 프로그램이나 라디오 등에서 활약을 하더라도 실질적인 판매량과 밤무대 행사 등 수입과 체감과 직결되는 인기는 기성가요들을 따라잡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청소년 가수인 이선희의 판매량이 50만장이 되지 않았으나, 변진섭의 2집 앨범은 190~198만장이라는, 거의 200만장에 가까울 정도로 엄청난 판매고를 올리며 MBC 대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90년대 가요계 황금기와 더불어 청소년 위주로 재편되는 가요계 판도에 대한 암시였다.너에게로 또다시는 이 앨범의 대표적인 발라드이며, 희망사항은 쉬운 멜로디와 재미 있는 가사로 남녀노소 큰 인기를 거두었다. 판매량으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변진섭은 이문세의 뒤를 잇는 발라드 황제였는데, 희망사항은 당시 청년들의 감성을 멜로디와 가사 양면으로 솔직하면서도 부담없이, 재기발랄하면서도 야 저런 여자가 있다는 게/저런 여자를 좋아한다는 게 말이 되냐는 등의 재미난 논란, 가십, 그리고 80년대의 거대담론 속에 침잠해 있던 시시콜콜함을 놀랍게 표현함을 통해 변진섭의 노래 중에서도 인기로는 정점을 찍었던 곡이다.
작사: 조운파 / 작곡: 임종수
1989년 150만장 이상 판매 추산, 골든 디스크 본상
* 본디 나훈아를 위해 준비된 노래로, 조운파 일행이 맥주집에 처음 들어가서 쭈뼛거리고 있을 때 여급도 쭈뼛거리다 울음을 터트렸다는 일화로부터 탄생한 노래. 알고 보니 여급이 조운파의 어릴 적 소꿉친구였는데 두 사람의 처지가 너무나 극적으로 변모해 알아보고도 다가갈 수 없었던 것.
원래 고향 여자라는 제목의 정통 트로트 곡으로 만들어져 나훈아가 일본에 가서 편곡을 해서 취입을 하겠다고 했으나 8년동안 소식이 없다가 태진아가 작곡가 임종수를 찾아가면서 받아낸 곡으로 이곡은 원래 끝부분이 올라가지 않았으나 태진아가 끝부분을 올려서 끝내자고 해서 그렇게 바뀌었고 기타치는 친구와 함께 그 친구가 부른 <사찌코>라는 일본 노래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본인의 아내 이름을 발음하기 쉬운 <옥경이> 라는 제목으로 바꾸고 끝의 가사를 본인이 <고개숙인 옥경이...>로 바꾸고 정통 트로트에서 도입을 스윙으로 갔다가 후렴을 펑키로 바꾸어서 기타치는 친구와 편곡해서 유명해진 노래.
작사/작곡: 나훈아
작사/작곡: 이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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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풍송의 필명이다.[2] 최고 인기 가요는 이선희의 'J에게'가 받았다.[3] 남자가수상과 여자가수상[4] 조용필을 눌렀다고는 하나 조용필의 히트곡 중에서는 존재감이 미미한 축에 속하는 눈물의 파티를 눌렀을 뿐이다. 국민가요라기엔 조용필의 80년대 초반 히트곡 행진에는 상대가 안 된다. 더더군다나, 해바라기의 사랑으로, 윤수일의 아파트, 김수희의 남행열차, 주현미의 잠깐만, 짝사랑, 신사동 그 사람, 200만장을 팔아제낀 변진섭의 전성기에 비교해도 끗발이 밀린다고 할 수밖에 없다. 서울 올림픽 분위기를 타고 미친 듯이 국뽕을 빨아제낀 환희, 똑같이 미친 듯이 국뽕을 빨아제꼈으며 아시안게임에서도 질리도록 틀어준 아! 대한민국 등 국뽕 전문 동시대 여가수 정수라의 두 노래에 비해서도 밀리는 편이다. 이선희는 현재의 아이돌을 향유하는 계층과 비슷한 계층에서 소비되는, 한정된 가수로서 국민가요라고 부르기엔 부족한데, 단지 그 세대가 2010년대쯤 들어 기성세대가 되고 나서 국민가수라고 지나치게 후광을 불어넣는 정도다.[5] 당시엔 대상이 남자, 여자 2개였다. 여자가수상도 대상에 속한다.[6] 최고 인기 가수상은 조용필이 가져갔다.[7] 중간에 주현미의 '신사동 그 사람'과 조용필의 'Q'에게 1위를 뺏겨 골든컵을 수상하지 못했다. 참고로 최장 1위 기록은 총 4주다.[8] 라디오 스타에서 김태원은 이 곡을 코리안 프로그레시브라 칭하며 매우 진보적인 곡이라고 평가했다. 김흥국: 난 보순데?[9] 1990년의 KBS 파업으로 5주를 날려먹지 않았다면 골든컵도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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