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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녀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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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고분군 구분에 대해서는 통구 고분군 문서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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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ESCO World Heritage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한국어 고대 고구려 왕국 수도와 묘지
중국어 高句丽王城、王陵及贵族墓葬
영어 Capital Cities and Tombs of the Ancient Koguryo Kingdom
프랑스어 Capitales et tombes de l’ancien royaume de Koguryo
국가·위치
[[중국|]][[틀:국기|]][[틀:국기|]]
랴오닝성 환런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135
등재연도 2004년
등재기준 (ⅰ)[1], (ⅱ)[2], (ⅲ)[3], (ⅳ)[4], (ⅴ)[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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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오녀산성

1. 개요2. 역사3. 구조4. 고구려의 초기 도성
4.1. 짝인 평지성은 어디?4.2. 사실은 위나암성?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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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랴오닝성 번시시(本溪市)가 관할하는 환런 만(주)족 자치현(桓仁 滿族 自治縣)에 위치한 고구려 시대의 산성.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고구려 왕조의 첫 번째 수도였던 졸본에 위치하는 산성으로 메사 지형이라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졸본이라는 수도 자체에 피난성으로서 오녀산성이 존재했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의 일상적인 도성이었던 평지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그 후보로는 하고성자토성, 나합성 등이 거론되고 있다. 100년 전, 흑백사진에 담긴 《오녀산성》 모습

현재는 광개토대왕릉비에서 전하는 졸본 서쪽 산 위의 성(忽本西城山上), 《위서》 <열전> 제88 고구려조에서 등장하는 흘승골성(紇升骨城)[6]이 오녀산성이라고 이해된다.

하지만 고려시대만 하더라도 원 명칭이 아니라 오로산성(五老山城), 우라산성(于羅山城)이라고 불렸는데 발해 멸망 이후로 여진족의 영향 속에서 명칭이 점차 변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점차 변형되어 오녀산성(五女山城)이라는 명칭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명칭이 변한것이 여진족의 영향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의 요동성이 위치한 곳인 요동성 요양시순우리말은 오라골인데, 요동성의 고구려 음차어가 바로 오렬홀(오라골)이다.

2. 역사

삼국유사》에 따르면 맨 처음 해모수가 하늘에서 내려와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북부여를 세웠다고 한다. 이후 기원전 37년, 동명성왕고구려를 건국할 때 수도로 삼은 졸본성(卒本城)[7]이 바로 이곳이라고 추정한다. 40여 년 후 제2대 유리명왕 대에 이곳에서 지금의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에 위치한 국내성환도성으로 수도를 옮겼다.

훗날 고려시대에는 오로산성(五老山城) 또는 우라산성(于羅山城)이라 불리게 된다. 안정복이나 정약용 등 조선 시대 실학자들은 이 우라산성의 이름에서 유추해서 우라산성이 고구려 위나암성(尉那巖城)이라고 비정하기도 했다.

공민왕제1차 요동정벌요동성을 공략하기 이전의 선발작업으로 이성계가 병력 1만 5천 명(기병 5천, 보병 1만)을 이끌고 이 성을 공략하여 함락하고는 요동정벌의 중간기지로 활용했다.

그 외에도 세종 시대에 4군 6진을 개척할 당시 "윤관동북 9성 중에서 최북단에 있는 공험진까지 우리의 영토"라고 한 기록이 《세종실록》에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공험진의 위치를 "두만강 북쪽 700리까지"라고 한 기록도 있지만 세종 대에도 공험진 위치에 대하여 논의가 있었을 만큼 위치가 확실하지는 않다.

이렇게 세종 대에 압록강 유역으로는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여진족의 소굴이었던 파저강 일대를 토벌하고, 이어서 평안도 도절제사가 된 이천(李蕆)이 다시 파저강 일대를 토벌하며, 오녀산성 인근까지 진출하여 여진족을 정벌하면서 최윤덕, 이천이 4군을 개척했다. 두만강 유역으로는 김종서, 이징옥, 황보인이 여진족을 정벌하며 6진을 개척했다.

일제강점기(동북윤함시기)에는 만주사변에 항거하여 조직된 의용군이 오녀산성을 거점으로 삼아 활약하기도 하였다.

3. 구조

파일:wnsc.jpg
파일:오녀산성1.jpg
오녀산성의 구조와 성벽

오녀산성은 탁자 모양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으며, 직사각형 모양에 남북 1.5 km, 동서 0.3 km, 전체 약 8 km의 규모에 주변에는 압록강의 지류인 혼강과 동가강이 흐르고, 200 m 높이 절벽 위에 산성이 있어서 그야말로 천혜의 요새라 할 수 있다.

가장 서두에 소개된 사진에서 보이는 메사 지형인 부분은 내성에 해당하며 돌로 쌓은 성벽이 거의 없고 그 뒤쪽으로 이어지는 완경사면 쪽에 돌로 쌓은 성벽이 따로 있으며 외성구간에 해당한다. 성내부 공간은 외성 내부에는 조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아 알 수 없고, 주거지나 대형건물지 등의 시설들은 모두 내성에 있다. 내성에는 문지와 같은 취약지점에만 주로 석축 성벽을 구축하였다. 천지(天池)라고 불리는 저수지가 있는데 비상시에 성의 식수로 활용할 목적으로 조성한 것이며 이 역시 내성에 있다.

파일:wnsc ctp.jpg
오녀산성에서 출토된 토기류. 오녀산성은 5개의 문화층으로 구분되는데 오녀산성 3기와 4기는 각기 고구려 초기(기원전 1~3세기), 중기(4~5세기)로 구분된다. 위의 사진은 오녀산성 3기에서 출토된 토기로서 아가리와 몸통이 만나는 지점에 원형띠의 손잡이를 두는 것이 특징이며, 이런 토기에서 중기로 갈수록 점차 분화되어 간다. (고구려 중기 이후의 토기는 여기를 참조) 오녀산성 3기 출토 토기는 초기 고구려 토기 중에서도 빠른 것이 비교적 확실한 토기이다. 하지만 정확한 연대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기에는 양적으로 부족한 실정으로 연대의 상한, 하한이 불분명하며 추가적인 자료 증가를 기대해야하는 상황이다.

4. 고구려의 초기 도성

졸본, 흘승골성 등의 비정문제는 단순히 오녀산성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넘어서 고구려의 초기 도성 운용이 어떠했는가, 중심은 어디였는가 등의 문제와 함께 논의되어 왔다. 오녀산성이 광개토왕릉비, 위서 등의 지리 조건에 상당히 부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행정과 정치의 중심지로서의 도성 본연의 성격에 미루어보면 험준하고 협소한 산 정상부에 있기 때문에 쉽게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 본격적으로 오녀산성을 위시한 고구려 초기 도성의 논의가 시작된 무렵부터 이런 연유로 산성만으로 도성을 운용했을리 없고 평시에 사용하는 평지성이 있었을 것이며 평지성+산성의 조합으로 운용되었을 것이라는 관점 제기되었고 국내외 학계 모두 받아들여 졌다.

오녀산성 발조사성과만 놓고보면 오녀산성이 고구려 건국 시점의 주요 유적임은 분명하며, 층위 상으로는 오녀산성 3기가 해당한다. 오녀산성 4기는 4세기 후반 이후의 고구려, 5기는 요금시기이다. 문제는 위의 사진처럼 정연한 석재를 사용한 석성(石城)이 건국 처음부터 있었느냐는 것이 었다. 같은 석조구조물인 적석총은 고구려 건국 및 초기에는 가공도가 상당히 떨어지고 장군총처럼 정연한 석재를 사용하는 것은 4세기 이후의 일이기 때문. 더군다나 오녀산성에서 유물, 유구 출토량이 가장 많은, 즉 가장 활발히 사용했던건 오녀산성 4기(4세기 이후)기 때문에 성벽 또한 이 시점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보면 4~5세기 고구려 성곽으로써는 완전하지만 초기 도성으로써는 성벽마저 없게되는 셈이 된다.

물론 성벽이 없다고 한들 오녀산성 지형 자체가 ㄹㅇ 요새기 때문에 방어력 자체엔 문제가 없다. 다만 성벽도 건국 당시엔 없다고 한다면 몇 기의 주거지와 대형건물지만이 전부기 때문에 중심적 역할을 했던 곳이 맞는가 하는 의심이 들게 한다는 문제가 있고, 심지어 대형건물지는 다소 뜬금없이 존재하는데다 유물들이 출토맥락이 부족하다는 점으로 의문점이 있는 편이기도 하다. 여기에 지형적 협소함까지 더해져 오녀산성이 아닌 평지도성론이 부각되기도 하는 것.

4.1. 짝인 평지성은 어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오늘날의 지린성 지안시에는 평지성인 국내성과 산성 환도산성, 2곳이 있다. 이는 평상시 군주가 거주하며 사용하는 성과 유사시 사용되는 방어용 성이라는 이성체제를 잘 보여준다. 세 번째 수도인 평양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러한 이성체제는 백제, 신라에서도 확인된다. 하지만 고구려의 첫 번째 수도가 위치했던 환인 지역에서는 오녀산성은 인정되지만 평상시 왕이 기거하는 평지성은 논쟁이 있다. 오녀산성 인근에 위치했을 테지만 실체가 불분명한 것이다.

후보로 언급되는 성곽 유적으로는 하고성자토성(下古城子土城)나합성(喇合城)이 주로 거론되고 있다.

첫 번째로 하고성자토성이 있다. 하고성자토성은 상고성자고분군 인근에 위치한 성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로 거론된다. 하지만 졸본성(오녀산성)과의 위치가 광개토대왕릉비에 언급된 것과 정반대라는 점 때문에 아니라고 보는 입장도 많은 편. 현재 하고성자토성은 민락이 형성되어 있어 소실된 정도가 심하지만 90년대 초에 한 차례 조사가 이루어졌었다. 토성 벽체 하부에서도 고구려토기가 확인되기도 하였지만 고구려 건국 시점과 관련된 유물이라고 보긴 어렵고,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성 내에서 채집된 유물이 주를 이룬다. 채집유물을 보더라도 청동기시대의 유물과 4세기대 이후의 고구려 토기들이기 때문에 오녀산성에서 확인된 기원 전후한 시점의 고구려 토기와는 형태적으로 차이가 있다.

두번째로는 혼강과 부이강이 합류하는 지점(오녀산성 동쪽으로 약 14km 지점)에 소재하는 나합성이다. 나합성도 방형에 가까운 성곽이며 석축도 일부 사용한 석축성으로 알려져있지만 이 정황 조차도 60~70년대의 지표조사 내용이고 지금은 혼강댐에 의해 수몰되어 확인이 불가능하다.

이 밖에도 환인댐에 의해 수몰된 고력묘자 고분군 인근이 중심지역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고력묘자 고분군의 그나마 조사된 적석총들의 연대도 3세기대이며 몇 기를 제외하면 상세한 정보도 없기 때문에 다소 막연한 감이 있다.

한동안 평지성 탐색에 대한 고민이 이어져왔었다가 최근에는 "평지성 부재론"이 대두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산성+평지성의 조합도 국내성, 평양성에서 보인다는 이유로 졸본도 그러할 것이라고 이어져온 것인데 그러나 이를 논증적으로 검토한 바는 없고, 평양성도 장안성 완공 이전의 평지성이 어딘가에 대해서 확정적이지 않기 때문[8]. 그럼에도 오녀산성의 협소한 공간문제는 상존하기 때문에 최근에 들어서는 성벽이 없는 중심지(도성 격)가 평지에 있었고 산성으로써 오녀산성이 있었다는 견해와, 평지성 따로 없이 그냥 오녀산성을 그대로 도성으로 썼다는 견해들이 국내외 학계에서 제시되고 있다.

4.2. 사실은 위나암성?

한나라 사람들은 우리가 암석 지대에 있어 물이 나오는 샘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포위하여 우리가 곤란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연못의 잉어를 잡아서 수초로 싸고, 또한 약간의 맛 좋은 술을 준비하여 한나라 군사에게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漢人謂我巖石之地 無水泉 是以長圍 以待吾人之困 宜取池中鯉魚 包以水草 兼旨酒若干 致犒漢軍)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1년 7월조 中. 출처는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삼국사기》에 기록된 을두지가 언급한 위나암성의 지형묘사가 오늘날 오녀산성의 모습과 부합해 고구려의 집안으로의 천도는 제10대 산상왕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 서기 209년(산상왕 13년)에 이루어졌으며, 오녀산성은 졸본성이 아니라 국내 위나암성일 것이라는 설이 있다. 이 설에서는 졸본성이 환인댐에 의해 수몰된, 부이강과 혼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나합성으로 비정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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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도성 및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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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rowbgcolor=#000> 별궁 || 전설 ||
두곡 이궁 구제궁 수정성

||<tablewidth=100%>[1] 졸본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곽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음
[2] 졸본의 평지성으로 추정되는 토성
[3] 평양 천도 이전에 존재했던 평양의 평지성 ||
}}}}}}}}} ||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할 것[3]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4]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5] 특히 번복할 수 없는 변화의 영향으로 취약해졌을 때 환경이나 인간의 상호 작용이나 문화를 대변하는 전통적 정주지나 육지·바다의 사용을 예증하는 대표 사례일 것[6] 과거 한국어를 한자로 표현할때는 음을 그대로 차용한 음차식 표현과 뜻을 차용한 훈차식 표현이 병재하고 있었다. 오녀산성이 졸본성이 맞다면, '골'이라는 말은 고대 한국어로 마을이나 촌락, 또는 성읍을 의미하는 단어다보니 졸본이라는 이름은 뜻을 훈차한 표현이고, 흘승골이라는 명칭은 음을 그대로 한자로 옮긴 졸본의 음차식 표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7] 광개토대왕릉비에는 홀본성(忽本城)으로 기록됨.[8] 국내성시기에도 문헌상의 환도성, 국내성과 실물자료로서의 환도산성국내성은 딱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문헌 본연의 부회나 소략한 정보, 발굴조사 자체의 한계 등이 맞물려 국내성시기도 언제 환도성을 쌓았고 국내성을 쌓았고 하는지의 문제가 많다. 평양성도 마찬가지로 안학궁성청암리 토성, 대성산성 등이 장안성 완공 이전에 어떠한 관계고 각 연대 및 초축은 어떠한가 등의 문제가 많다. 즉, "평지성+산성" 조합이란건 천도 당시부터 그랬는지 아닌지 모른다는 것. 때문에 국내와 평양을 근거로 졸본으로 소급적용하는 것이 무리가 있다.[9] 노태돈, <고구려 초기의 천도에 관한 약간의 논의> (한국고대사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