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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13:39:22

자유시 참변

흑하사변에서 넘어옴
1. 개요2. 명칭3. 배경
3.1. 러시아 연해주 독립군의 상황
3.1.1. 상해파 부대의 니콜라옙스크 학살
3.2. 간도 무장독립군의 상황
3.2.1. 대한독립군단 결성?
3.3. 코민테른의 한국 진격 계획
4. 전개
4.1. 극동 공화국 현지 군인의 무장해제 요구와 독립군의 선택4.2. 주도권 경쟁
4.2.1. 상해파의 한인 부대 통합 시도4.2.2. 이르쿠츠크파의 한인 부대 통합 시도
4.3. 상해파 사할린부대의 전쟁범죄에 의한 현지인과의 갈등
4.3.1. 논문 저자의 정치적 입장과 신뢰성에 관해
4.4. 극동 공화국의 분노4.5. 사할린부대에 대한 강제 무장해제
5. 이후
5.1. 군사재판과 '11월 결정서'5.2. 번외: 중국군에 의한 한인 유격대 무장해제 사건
6. 오해와 진실
6.1. 960여 명이 희생당했다?6.2. 무장항일운동에 궤멸적인 타격을 주었다?6.3.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가 사살되었다?6.4. 김구가 반공 성향을 가지는 원인이 되었다?6.5. 홍범도가 '독립군 몰살'의 가해자다?
7. 여담8. 출처9. 관련 문서

1. 개요

러시아어: Амурский инцидент
영어: Massacre of Svobodny


1921년 6월 27일 극동 공화국 아무르 주 자유시(러시아어명: 스보보드니)[1] 인근인 수라젭카(Суражевка)에서 사할린 한인 부대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가 지휘한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에게 진압당한 사건.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2]

중국과 일본에서는 자유시 참변이라는 용어를 쓴다. 자유시에서도 벌어졌다고 교과서에 서술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수라젭카에서 발생했다.[3]

아래 서술은 2017년 국방부의 공식연구서 및 공식견해, 2010년 윤상원 박사의 박사학위 논문부터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Тепляков)[4]논문 등에 근거한다.[5]

2. 명칭

2007년엔 주로 자유시 사변이란 용어가 선호됐다.
‘自由市 事變’, '黑河事變’, '黑河事件’, '黑河慘變’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자유시는 러시아 혁명 이전 '알렉세예프스크'로 불리다가 혁명 이후 ‘자유’라는 뜻을 지닌 '스보보드니'로 개칭되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인들은 그 도시를 '자유'시라고 불렀다. 자유시 부근에는 아무르강(흑룡강)의 지류인 제야강이 흐르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흑하사변’이라는 용어가 나온 듯 하다.(金璟載 黑河事變의 眞相(1-3), 독립신문, 1922년 5월 6일 -6월 3일; 윤상원, 自由市 慘變 前後 朝鮮人 武裝部隊 統合運動, 고려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2, 1쪽, 재인용) 그러나 자유시에 약간 떨어진 '블라고베센스크'시가 당시 조선인들에게 黑河시로 불리웠던 점을 감안한다면 흑하사변이라는 용어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참변’이라는 용어는 자유시 부근의 수라젭카에서 일어난 무장충돌로 인해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에 주안점을 두고 붙여진 용어이다. 그러나 단순히 무장충돌만이 아닌 사변을 전후하여 전개된 조선인 무장부대의 동향 전체를 서술하기에 부적절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지금은 대체로 자유시 사변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윤상원,위의 논문,1쪽) 그런데 현재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는 모두 ‘자유시 참변’을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본고에서도 ‘자유시 참변’이라 지칭하겠다.

조한나,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자유시 참변 서술 연구, 학위논문(석사)--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2007. 8, 1쪽
하지만 학계에선 2020년 기준으로 다시 "참변"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자유시 참변으로 한국 학술지 논문을 검색할 시 17건이 나오고 자유시 사변으로 검색할 시 8건이 검색된다.

한편, 이 사건을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 부르기도 한다.[6]

3. 배경

3.1. 러시아 연해주 독립군의 상황

러시아 연해주의 '의병'들은 독립군이 아니며 주로 한인계 러시아인 2세라는 설이 있지만 학계에서는 대체로 연해주의 의병도 독립군이라고 보고 있으며 러시아 귀화인들 중에 적군에 들어간 인물도 있으나 이는 소수라는 것이 현재까지의 견해다.
전쟁에 참가함으로써 러시아사회 내에서 일정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귀화 한인들로서는 소비에트 적군 편에 서는 것을 꺼린 것으로 보인다. 내전에서 소비에트 적군이 승리한다면 사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이는 지금까지 애써 쌓아올린 자신들의 지위가 송두리째 흔들리게 됨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장교 출신들은 대부분 적군 편에 서기보다는 백군 편에 서는 것을 택했다.뒤에 살펴볼 호르바트 백군 내 한인부대에는 장교가 100여 명이었다는 기록도 있다.130)이 기록이 과장되었을 수도 있고, 이들 중 많은 수가 호르바트군에 들어가면서 진급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많은 수의 한인 장교들이 백군편에 섰음을 보여주는 방증자료 로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장교 출신으로 소비에트 적군편에 서서 빨치산 운동을 했던 한창걸,오하묵 등이 오히려 예외적인 경우였다.

이를 통해 시베리아 내전시기 소비에트 적군 편에 서서 백군 및 일본군과 싸웠던 한인 빨치산부대 구성원들의 출신성분을 짐작할 수 있다.그들은 대부분 귀화하지 않은 한인, 즉 여호인이었다. 러시아지역 한인 빨치산부대의 근간은 연해주 지역의 기층민중들인 비귀화 한인들과 간도와 조선으로부터 건너온 청년들이었다. 즉 러시아지역 한인들에게는 러일전쟁으로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여러 차례의 군사 경험이 있었음에도 그 경험들이 시베리아내전 시기 한인 빨치산부대의 활동에 미친 영향은 극히 부분적이었다. 부대에 미친 군사적 영향은 오히려 일본과 중국의 사관학교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연해주로 온 군사지휘관들이나 간도에 설립된 여러 한인 군사교육기관을 통해 군사적 소양을 쌓은 한인 청년들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60~61 #
그리고 연해주의 한인들의 항일부대는 대부분이 독립군이었다. 이는 반공 우익 성향인 권희영 교수의 논문에도 나오는 사실이다.
볼셰비키의 승리에는 파르티잔이라고 호칭되는 자발적인 민중들의 무장부대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 파르티잔의 존재는 백군들에게는 분명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민중들을 선동하는데 보다 능숙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볼셰비키는 민중의 무장부대를 그들 편에 흡수하는데 성공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한인들에 의해 조직된 무장부대도 결국은 볼셰비키들의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에 대한 약속, 그리고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던 한인들에 대한 해방의 메시지가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9, 176~177
한인 무장부대는 만주에서나 노령에서나 일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마다하려 하지 않았다. 물론 일본군과 대규모의 전투를 벌이는 것은 한인무장부대의 목표가 아니었다. 한인무장부대는 우선적으로 무장역량을 강화해나가면서 외교적 상황을 고려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계속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목표였으며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관계에 많은 기대를 가지게 된 이유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한인의 독립운동에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이라는 명분 하에 한 약속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에도 분명한 오해가 존재하고 있었다. 한인들로서는 민족해방운동이란 한국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었다. 그러나 러시아로서는 한인들의 민족해방운동의 지원이란 종종 그보다는 한인사회에 사회주의를 유포시키고 계급투쟁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9, 178~179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당시 치타(Чита)에 수도를 둔 러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7] 극동 공화국에서는 2개의 한인 단체가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었는데 본 문서에서는 편의상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지칭한다.

상해파[8]는 한인사회당[9]에 기반했으며, 자신들의 한인 조직에 조선인 빨치산 부대인 '니항부대'[10]를 합쳐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를 만들었다.[11] 상해파의 영수는 이동휘였으며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의 후원을 받았고 모스크바코민테른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이르쿠츠크파[12]대한국민의회 계열 인사들이 주도했으며 자신들 나름대로 자유대대(고려혁명군)라는 무장단체를 조직했다. 이르쿠츠크파는 '노령(러시아)파'라고도 불렸는데[13] 이후 '코민테른 극동비서부'[14]가 출범하자 후원을 받게 된다. 위에 코민테른은 상해파와 연결되어 있다고 서술해서 헷갈릴 수도 있지만 모스크바의 코민테른 본부에서는 극동 지역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15] 이런 엇박자가 가능했다.

3.1.1. 상해파 부대의 니콜라옙스크 학살

이정식 교수는 1961년 UC버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콜로라도대, 다트머스대를 거쳐 1963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과에 재직하면서 로버트 스칼라피노 UC버클리대 교수와 함께 쓴 ‘한국공산주의운동사’를 1973년 미국에서 출간해 이듬해 미국 정치학회가 주는 최고 저작상인 우드로 윌슨 재단상을 받은 후 세계학계에서 한국 현대사 연구자로 인정받게 되었고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의 권위자로 한국에서는 위암 장지연상(1990년)과 경암상(2012), 인촌상(2018년)을 받은 '한국 공산주의사' 1세대 연구의 권위자다.# 이 교수가 집필해 '2008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학술도서'로 선정된 서적에선 자유시 참변에서 무장해제된 '독립군'의 실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주목했다.
일본에게 있어서 한국독립군은 어느 곳에 있거나 말살되어야 할 존재였지만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을 특별히 증오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 중에는 1920년 4-5월에 니콜라예브스크에서 일본인들을 학살한 부대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니항사건이라고 알려진 이 사건은 너무나 잔인무도한 것...니항이라고 알려진 니콜라예브스크는 흑룡강의 어귀, 즉 흑룡강이 오크츠해(바다)를 만나는 곳에 있는 마을인데 이곳을 점령한 야코부 트리아피친이 이끄는 공산 게릴라들은 반동파 숙청이라는 명목하에 약 6천 명의 주민을 참혹하게 학살하였는데 그중에는 약 700명의 일본거주민들이 있었고 일본영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23세의 트리아피친은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한국독립을 위해 도울 것이라는 약속뿐만 아니라 그런 뜻의 합의서까지 서명하여 수백명의 한국청년들을 동원했었는데 이들은 트리아피친의 명령을 충실히 시행함으로써 학살의 주역이 된 것이었다....[한국인 부대]부대장은 박이라는 교사였는데 그가 한국청년들의 애국심을 선동하여 부대를 확장했다고 한다. 그가 말한 박이라는 교사는 김홍일이 말한 박 일리아일 것이다.
이정식,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pp 314~316.
즉, 자유시 참변에서 공격당한 부대는 수천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니콜라옙스크 학살에서 주역을 맡은 한국인 부대이며 이것이 자유시 참변의 주요 원인이라고 지목한 것이다.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에서 홍범도를 모함하는 진영에선 오직 홍범도를 공격하기 위해 니콜라옙스크 사건의 주역들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16]

3.2. 간도 무장독립군의 상황

한편 당시 간도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은 시베리아 극동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에 이유는 만주 지역에서의 활동이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사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간도의 무장부대들이 군정의회를 통합의 주체로 인정하게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이것을 자유시사변의 직접적 피해자인 許在旭이 코민테른에 보낸보고서 587)와 간도 독립군부대의 지도자들인 홍범도,최진동,허재욱,안무,이청천 등이 자유시사변 이후 발표한 성명서 588)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간도의 무장부대들이 자유시로 이동해 온 것이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았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00~201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17]
1920년대 초 대규모의 항일독립군이 밀산을 거쳐 러시아로 넘어갔다. 가장 큰 이유는 일제의 초토화 공격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는 토벌공세를 높여 경신참변과 같은 만행으로 독립군 근거지를 초토화시켰다. 독립군 입장에서도 일련의 대전투에서 무기, 탄약을 소진하여 현존 무력을 보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4~95 #
그러니까 간도 독립군은 러시아로 이동하기 전에 이미 일본군의 공격과 근거지 초토화 및 보급 문제 등으로 군대 유지가 불가능해서 이미 해산한 상태였는데 러시아로 갈 준비를 위해 재집결한 것이었다. 이미 러시아로 이동하지 않으면 군사유지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해산한 아군사에게 고한다.

지난번 아대병을 해산한 것은 일시의 변법에 지나지 않고 광복사업 성취하지 않는 한 그를 해하려서는 안된다. 이제야 노농정부와 약정하여 군수 충분하고 또 무기탄약은 제한없이 무료로 공급받을 것이다. 이래 와신상담 산야에 전전한 목우즐풍 영일 없이 상하 서로 피를 철하고 맹약한 바를 지켜야 할 것이다.
김좌진홍범도가 1920년 12월에 발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78~79 #

3.2.1. 대한독립군단 결성?

참고로 이때 간도독립군이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했다고 잘못 알려졌으나 이것은 2009년 이후부터 부정된다.

당사자인 독립군 회고록에도 없는 내용이고(윤상원) 일본군도 유언이라며 내부에서 부정했다.(이숙화) 즉 당사자인 독립군과 일본군 양쪽이 다 부정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는 아래와 같이 서술하였다.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부대가 밀산에서 단일한 통합부대인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한 후 이동했다는 주장은 사실관계와 부합되지 않다고 본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6쪽 #

3.3. 코민테른의 한국 진격 계획

1920년 가을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이르쿠츠크파로 분류) 슈먀츠키는 매우 모험적인 계획을 완성했는데 그것은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관으로 임명해 이르쿠츠크에서 4천여명의 한국인 유격대원들을 훈련하고 시베리아에서 만주를 거쳐 한국으로 전승 행군한다는 계획이다.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이르쿠츠크파)의 계획을 극동 공화국은 뒤늦게야 알아채는데 이 작전이 개시되면 현지인의 대량 희생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에 반대하여 분노했다. 크라스노쇼코프 극동 공화국 대통령은 1921년에 6월에 레닌에게 직접 항의까지 하면서 계획의 중지를 호소했다. 결국 극동 공화국의 항의에 의해서 그 계획은 중지되고 말았다.[18] 자세한 건 아래에 후술한다.

4. 전개

4.1. 극동 공화국 현지 군인의 무장해제 요구와 독립군의 선택

간도 독립군들이 시베리아 극동으로 피난을 오자 현지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은 몰려오던 한국독립군을 “정치적 이민자”로 규정하며 '무장해제'하라고 단호하게 요구했다.
하바롭스크 시
1921년 1월 3일

1
남쪽에서부터 중립지대를 거쳐 왔거나 중국 영토로부터 왔거나 제2아무르군 관할지역에 온 모든 한인부대를 즉각 무장해제할 것을 명령한다. 이 경우 무력이라는 가장 단호한 수단도 동원 가능하다. 무장해제는 완벽히 이루어져야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총포류나 도검류를 하나라도 남기지 않는다.

2
한인 무장부대를 무장해제한 후에 구역 책임자들은 한인들이 자유시민의 완전한 권리를 향유하는 정치적 이민자로서 갖는 일반 권리에 의거해 스스로 자신의 거주 장소로 선택한 먼 후방으로 이동시키기 위한 차량이나 마차들을 즉각 요청한다.

3
무장해제를 실행하는 책임자들은 즉각 모든 무기를 목록화 하여 각 사단이나 제2군의 포병보급 부서로 보낸다.

제2군 사령관 쇼리쉐프
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임시 직무대리 뷔로프
원본 확인: 작전관리국장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52~53
원본과 번역본 사진
그러나 일부 한국독립군들은 제2군을 무시하고 무기를 갖고 넘어가려고 했다. 독립군의 위기라서 타국의 영토를 이동하는 처지면서 일부 독립군은 현지 지휘관의 무기 양도 요구를 거부하고 시베리아 극동에 들어가려고 했다.

독립군이 현지 지휘관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시베리아 극동에 접근하자 제2군사령관은 단호하게 차단하며 한국 독립군에 대한 조치를 중국마적(홍후즈)에 대한 조치와 동일하게 취급했다. 중국마적(홍후즈)과 마찬가지로 한국독립군도 절대 현지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반드시 막으라고 명령하며 현지 영토로 이주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이 있을 경우에는 통행 허가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미 지역에 들어온 독립군에게는 무장해제 거부할 거면 여기로 오지 말고 만주로 가라고 요구했다.
하바롭스크 시
1921년 3월 9일

1
한인부대들이 무기 양도를 거부할 경우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그들을 즉각 무장해제하라는 금년 1월 3일자 제2아무르군 각 부대에 대한 명령18호를 반드시 집행할 것을 확인한다. 만약 한인부대들이 무기 양도를 단호히 거부한다면 군사활동을 개시하여 길을 차단하여 그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용인하지 말라. 반대의 경우, 그들에게 우리 군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떠나라고 제안하라.

2
아무르 국경지대에 출현한 무장 홍후즈 부대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무력 동원을 포함한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 한인 부대들에게 대해서도 그 지도부에 동일한 조치를 취하라. 우리 영토로 이주하고 싶다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이 있을 경우, 범죄분자들이 유입되지 않도록 통행 허가에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각 경우에 관해 군사령부에 즉각 알려야 한다.

제2군사령관 파블로프
군정치위원 멜니코프
군참모장 쉬콜린
원본 확인: 작전관리국장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54~55
원본 번역본 사진

이런 실랑이 끝에 결국 김좌진·서일·이범석·나중소 부대는 다시 만주로 되돌아갔다. 되돌아가지 않은 군인들은 자유시로 이동했고 이후 양도했던 무기들을 되돌려받았다.[19]
이만에서 자유시로 이동할때 홍범도, 이청천, 김승빈 등 500여 독립군은 앞서 최진동, 안무 부대가 그랬듯이 절차대로 이동 후(1921. 3월 중순) 무기를 되돌려 받았다. 그러나 북로군정서계 서일, 김좌진, 이범석, 나중소 부대는 무장해제에 반대하여 만주로 되돌아갔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5-96쪽 #

현장의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이 간도 독립군의 이동을 차단하고 있었을 때 이르쿠츠크파 오하묵은 간도 독립군에 대한 구호활동을 펼쳤다. 이르쿠츠크파 오하묵은 '우리 간도 한국인 부대의 러시아 통과를 허용할 것', '간도부대에 신속히 피복, 침대보, 구두 1000세트를 내어줄 것'을 극동 공화국에게 간곡하게 요청하며 간도 한국인 부대에 대한 구호활동을 펼쳤다.
극동 공화국 전군 총사령관 귀하.

보고

1921년 2월 4일자 본인의 보고 제15호에 추가하여 귀하에게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해주실 것을 강력히 요청합니다:
(중략)
4) 연해주 이만 시 반대편 중국 영토에 숙영하고 있는 제2간도빨치산부대는 자신의 대표자를 통해 한인대대로 합류하겠다고 표명하였으며, 편성되는 연대의 충원을 위해 이 부대가 러시아 영토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할 것.
5)(북중국에서) 도착하는 간도빨치산부대들에의 군장품 지급을 위해 제2아무르군 보급본부로부터 신속히 피복, 침대보, 구두 1,000세트를 내어줄 것.

한인대대장 겸 스바보드니 시 수비대장 오가이-오하묵
1921년 2월 22일. 제(판독불가)호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45-146쪽
원본 번역본 사진

4.2. 주도권 경쟁

4.2.1. 상해파의 한인 부대 통합 시도

이렇게 들어온 독립군들에 대한 관리를 맡은 것은 원래 상해파였다. 이유는 상해파가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를 통해 극동 공화국 정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전한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한인 부대들을 통합하기 시작하였고 자유시로 이동해 온 간도 독립군 상당수는 이전 재러 한인독립군과 함께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로 들어갔다.

자유시엔 1921년 1~3월에 도착해 온 연해주 출신 한인 빨치산 부대인 이만군대·다반군대·니항군대·자유대대·독립단 군대 등과 북간도 밀산을 거쳐 온 최진동·안무군대 등의 독립군부대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홍범도·이청천 부대들이 집결한 상황이었는데 이 중 니항부대가 극동 공화국의 지원을 받아 대한의용군 총사령부를 결성하였다. 반면 오하묵이 주도한 자유대대는 니항부대와 대한의용군을 거부했다.[20] 참고로 대한의용군=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다.[21] 이후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마자노프란 마을에 집결하였다.[22]

그런데 당시 독립군 각 부대들은 "자기들의 장교에게 스스로 그 지휘를 원하고 다른 군대의 장교는 일면도 없는 까닭에 지휘를 받는 일을 원하지 않았다."[23] 그러니까 독립군들은 타민족의 영토에 들어와 놓고 자기들의 장교에게만 지휘받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1921년 1월 설치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동양비서부)[24]가 4월부로 러시아의 동방정책 결정권을 극동 공화국으로부터 이양받았다. 이러한 결정권자의 변화로 인해 한인 부대 관련 정책이 일부 바뀌면서 상황은 더욱 혼란에 빠졌다.

4.2.2. 이르쿠츠크파의 한인 부대 통합 시도

1921년 3월 이르쿠츠크파는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고 자신들 산하의 자유대대(고려혁명군)를 중심으로 한인 부대들을 통합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와의 제휴를 통해 시행된 것이었다. 이후 극동비서부가 동방정책 결정권을 가지게 되자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만 믿고 한인 부대들을 통합하고 있었던 상해파와 사할린부대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슈먀츠키는 한인부대를 가능한 한 빨리 극동 공화국으로부터 벗어나서 조선 쪽으로 이동할 계획을 세웠으며 무장부대들을 통합하기 위해 창설된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위원장으로 조지아 출신인 깔란드라쉬빌리를 파견하였다. 깔란드라쉬빌리는 극좌 무정부주의자로서 전략적으로 사고하는 것보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편이었다. ‘극동의 나폴레옹’을 꿈꾸던 그는 슈먀추키와 이르쿠츠크파 빨치산부대장 오하묵, 최고려 등과 함께 한국 국내에서 무장투쟁을 공공연하게 벌이려고 했다.
바실리 V 레베데프(고려대 사학과 석사)의 정세 오판과 사욕이 빚은 비극. ‘자유시 참변’의 진실
이러니 당연히 부대 통합 문제로 둘 간에 갈등이 심해졌고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는 소비에트의 지지를 얻기 위해 1921년 5월에 각각 독자적인 '고려공산당'을 창당했다. 이 둘을 구분하기 위해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에 기반한 고려공산당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통상 지칭하며 대한국민의회에 기반한 고려공산당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라고 통상 지칭한다.[25] 여기까지의 상황을 대강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상해파 이르쿠츠크파
기반 단체 한인사회당 대한국민의회
무장 조직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 자유대대(고려혁명군)
후원 세력 러시아공산당 극동국 한인부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한인 부대 통합 기구 전한군사위원회 고려혁명군정의회
이런 상황을 거치면서 당시 한인 부대들은 자연스럽게 두 편으로 나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전한군사위원회 관할의 사할린부대 병력을 총 1,770명, 고려혁명군정의회 소속의 고려혁명군은 1,972명이라고 서술했다. # 참고로 홍범도 부대는 원래 사할린부대(대한의용군) 소속이었다가 나중에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갔는데 이 때문에 둘 사이의 세력 균형이 무너져서 자유시 참변의 한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26][27]
상황은 타민족 무장 독립부대를 받아들인 극동 공화국 정부와 소비에트러시아 공산당의 지도를 받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간의 주도권 갈등이 거세지면서 사안아 더욱 복잡해졌다. 이때 홍범도와 최진동 그리고 안무 부대가 전체 한인부대의 통합을 위해 이르쿠츠크파에 힘을 실어주자 대한의용군의 상해파가 북간도로 회귀한다고 결정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7쪽#

4.3. 상해파 사할린부대의 전쟁범죄에 의한 현지인과의 갈등

그런데 갈등의 소지는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무장독립군은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려고 했는데 현지 극동 공화국 농민들은 협조할 의사가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 현지 농민들에겐 무장독립군을 위해 식량을 바쳐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할린 부대의 중심인 니항 부대(니콜라옙스크 부대)는 이미 니콜라옙스크 사건이라는 대량학살과 폭력으로 유명했다. 사할린 부대는 현지 농민들의 식량을 강제로 징발했다. 마자노프에서 독립군의 폭동과 약탈이 벌어지기도 했다.

독립군들은 식량과 물자 조달을 위해 극동 공화국 농민들에게 약탈과 폭력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극동 지역 농민과의 대립이 극에 치달았다. 극동 공화국 지역의 농민들은 자신들을 약탈해가는 무장 독립군에게 분노하며 현지 간부들에게 호소와 항의를 했고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져서 독립군현지 극동 공화국 농민 사이의 전면적 무장충돌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되었다.

아래 논문은 에펨코리아, 부흥카페 어느 이용자가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인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의 논문을 번역업체에 의뢰해 얻어난 번역물이다.[28]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가 작성한 논문은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의 범죄 행위에 대한 논문으로 연구의 주제가 된 인물은 자유시 참변을 지휘한 당사자이므로 자유시 참변(아무르 학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주제다.
곧이어 칼란다리시빌리는 특히 심했던 국제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20년 가을, 일본의 식민지개척자들과 전투를 벌였던 4 천여명의 한인 유격대원들이 북만주에서 아무르주로 넘어갈 무렵,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혁명군을 훈련하고, 만주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전승 행군을 조직하는 모험적인 계획을 완성했다. 그는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 하에 조선혁명운동의 거점을 이르쿠츠크에 구축하는데 착수했다. 러시아로 건너온 폭동의 한인 상당수는 이르쿠츠크로, 나머지는 상해 혁명파로 방향을 잡았다. 반면, 사할린 유격부대의 다른 경향을 갖는 '상해파' 유격대 지도자들은 아나키스트 트랴피씬이 이끄는 테러군의 핵심 돌격대가 되어, 1919-1920 년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와 사할린주 민간인 학살에 적극 참여했다. 1920년 여름 일본군의 맹공격으로 아무르강 하류를 떠나 블라고베쉔스크 인근에 정착한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무기를 이용해 공급 문제와 사적인 갈등을 해결했다. 1920 년 7 월 말, 인민혁명군 에이헤 총사령관과 그의 정치조력자 비샤린은 병사와 군간부들 중에 '직무상 범죄자나 정치사범이 많은' 한중연대를 정리할 것을 명했다. (44: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185. Op.6. D.24. L.601 ) 하지만 이러한 조치는 효과를 보지 못했다. 소비에트 군대와 정당이 교류한 서신에 따르면, 한인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에이헤 총사령관은 1921년 1월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극동국 한인부 부대원이자 조선공산당 아무르지역위원회 위원장 이반 다닐로비치 박찬은에게 조선 유격대의 군사문제를 해결하고자 2 월 치타 또는 하바롭스크에서 유격대 회의를 소집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위 문제를 해결하는데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모두 구속하고', 부대 사령관들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45: 상동. F.221. Op.1. D.376. L.4 ) 당시 극동국 한인부의 모든 부대원들과 사할린 부대 사령관인 김 인노켄티와 박 일리아는 '당내 활동에서 규율을 준수하지 않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극동사무국 결정에 따라 권한을 박탈당했으며, 김과 박은 국가안보국 아무르지역지부의 조사를 받았다.(박은 '모험가인 트랴피씬'의 열성적 옹호자이자 콜차크의 방첩활동 첩보원이라는 혐의를 받았고, 러시아 군대 준위였던 김은 인민혁명군 복무를 회피한 혐의로 1920 년 이르쿠츠크에서 제 5 군대 특별부에 체포된 후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 (46: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41 )

최관윤을 의장으로 하고, 김관 강동유격대장 등이 참여한 가운데 1921년 3월 11일 치타에서 개최된 조선군사비상회의는 특별사할린유격부대 김 사령관과 박 군사인민위원을 파면하고, '연대 해산'을 위해 그들을 전지임시군사법원에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분리주의를 니콜라옙스크 중대에 도입하고, 일반병사들과 연대 지휘권 논쟁을 야기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니콜라예프파 유격대원들이 행한 니콜라옙스크 한인부대 박 바실리 전 사령관의 사형을 저지하지 않았다’. 부대를 이끌고 자유시(스보보드니시)에서 시골로 이동하면서 김과 박은 ‘사격수들이 평화로운 러시아 농민들에게 약탈과 폭력을 저지르도록 허용했다’. 분노한 농민들은 한인 유격대의 무장해제와 한인들에 대항할 수 있도록 농민들을 무장시켜 줄 것을 요구했다. 또한 김과 박은 ‘니콜라예프파로 구성된 무책임한 테러리스트 단체를 만들어 병사들과 조선독립보병연대 지휘부에 패닉을 야기했다’. (47: 상동. L.51)

무정부 상태는 결국 트랴피씬의 독재 하에 민간인 약탈과 학살을 일삼은 파르티잔의 규율을 무너뜨렸다. 1921 년 4 월 23 일 에이헤가 슈먀츠키에게 보낸 전보를 통해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은 사할린 부대가 식량 부족과 ‘부대장의 부재’로 지역 주민들의 반감을 사 “농민들과 한인들 간에 공개적인 충돌을 야기할 것”이라고 전했다. 부대는 인접 지역 중 한 곳으로 옮겨질 계획이었다. 에이헤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칼란다리시빌리에게 출발을 서두를 것을 요구했다. (48: 상동. L.62 ) 그러나 ‘할아버지’는 한달이 지나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 한편, 1921 년 5 월 8 일 사할린 부대 군간부는 한인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오하묵이 한때 대대사령관으로 ‘인민군을 휩쓸었던’ 사람이라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에게 전했다. 요청서에 서명한 그리고리예프 부대장(전 장교, 무소속), 김 부대장 보조, 박 군사위원(전 니콜라옙스크 부대장), 최 참모총장(제 2 비행대 전 참모총장), 림 제 1 대대장, 아무 제 2 대대장, 헤자욱 제 3 대대장 및 많은 사령관들은 오하묵에 불복할 것을 선언했다. (49: 상동. L.69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A.G. 테플랴코프 =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준박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경제경영대학교 부교수. E-mail: [email protected]

원문: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부흥카페 제공, 펨코 제공

아래는 추가 자료들이다.

총사령관 에이헤는 1921년 4월 23일부터 이미 "농민과 한인들 간의 전면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보고한다.
치타.
1921년 4월 23일 20시
전보
이르쿠츠크.
제5군 혁명군사호의 위원 슈먀츠키 귀하.

치타에서 귀하와 함께 한인사할린빨치산부대에 관해 대화한 적이 있는데, 그 부대는 자신의 활동으로 지역 농민들을 자신의 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농민과 한인들 간의 전면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을 정도로 관계가 악화되었습니다. 이 현상의 주된 원인은 부대의 어려운 식량 사정이며, 그것을 제거하기란 전박적 식량위기 때문에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적합한 부대장의 부재 또한 그 원인입니다. 상황 악화를 피하기 위해 부대는 다른 인접지역으로 이전될 것입니다. 상황의 정리 및 예정대로 신속한 부대 이전을 위해 칼란다리시빌리 동무의 조속한 출발을 요청합니다.

제369호

총사령관 에이헤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77쪽
원본 번역본 사진

현지 농민들이 한국독립군을 거부했다는 건 독립군 본인들의 보고서에도 서술되어 있다.
특별사할린빨치산부대 본부.
1921년 5월 7일
제2군 사령관 및 정치위원 귀하.

(……)현 시점에 부대가 식량문제로 위기상황이 있고 그 때문에 농민들과의 갈등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갈등은 수습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현 시점에서는 비록 3일간이라도 부대를 방치할 수 없습니다. 식량은 스보보드니 식량기지에도 배급지점에도 없습니다. 스바보드니 식량기지에서 수령한 200푸드의 밀가루는 스바보드니 시의 보급창에 쌓여있는데, 운송수단도 없고 농민의 완강한 협조 거부 때문에 각 부대로 배급할 수 없습니다. (……)』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93
펨코 재인용

다음은 당집회 위원들이 총사령관에게 보낸 청원이다.
당집회 위원들의 총사령관에의 청원

1921년 5월 13일
총사령관 귀하

부탁이 있습니다. 즉각 [판독불가] 특별사할린빨치산부대에 3,000명이 있는데 3개월간 주둔하고 있습니다. 면 주민들은 가난하며, 이들이 새로 정주한 병사 3,000명을 부양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향후 그들이 계속 주둔한다면 들판에 뿌릴 종자마저 없어질 것입니다. 부대는 탄압적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체포와 폭력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악화된 관계는 무장충돌의 일보직전에 있습니다. 귀하의 결정을 촉구합니다.

당집회 위원 안친페로프, 데예야토프, 프로야예프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99
원본과 번역본 사진
다음은 정치특사가 보낸 보고서이다.
아무르주 정치특사 야코블레프

블라고베센스크 제01928호
1921년 5월 14일
전보
치타. 총사령관 귀하.

창립회의 아무르 위원들이 마자노보에서 타전합니다. 마자노보 지역에서 숙영하고 있는 한인부대가 주민들에 대해 탄압적 조치를 취하고 있습니다. 농민들에 대해 근거 없는 체포 및 폭력을 자행하고 지역에 전시상태를 선포하였으며, 저녁 10시 이후 통행을 금지하여 그럼으로써 현재 아주 늦게 끝나는 농민들의 작업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귀하의 지시를 어기고 한인부대는 주민들에게서 계속 식량을 조달하고 있습니다. 창립회의 위원들은 부대의 즉각적 퇴거를 요청합니다. 왜냐하면 주민들과 대립이 극단적 한계에 도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관해 알리면서 한인부대의 즉각적 퇴거를 위한 실제적이고 단호한 조치를 취해주실 것을 간절히 청원합니다. 본인에게 타전하시기 바랍니다. 제178호.

아무르주 정치특사 야코블레프.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98)
원본과 번역본 사진

다음은 제2군 사령관 파블로프가 한국독립군과 지역주민 사이의 관계를 보고한 보고서다.
독립사할린빨치산부대가 배치된 곳의 지역주민들은 부대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대 철수를 청원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성격 및 내부적 성격의 문제가 악화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한인부대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요청합니다. 다른 지역으로의 부대 이동이 필요합니다. 게다가 문제가 악화되면 농민과 한인부대 간의 전면적 투쟁으로 번질 수 있습니다. 제 652호

제2군 사령관 파블로프
정치위원 멜니코프
참모장 시코미
암호해독: [판독불가]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66
원본과 번역본 사진

총사령관은 제2군 사령관에게 한국독립군이 일반 주민에게 저지르는 행위에 대해 책임지고 해결하라고 명령했다.
치타. 1921년 5월 14일.
제2군 사령관 귀하.
사본은 제12여단 정치위원에게.

특별사할린부대 한인 빨치산들이 일반 주민들에 자행하는 난동과 강압에 대한 불평등이 또다시 본인에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빨치산들은 생존을 위한 정상적 조건 보장이라는 뜻에서 주민들이 그들에게 나타내는 무관심한 태도 때문에 그런 행위를 한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귀하에게 직접 이 일에 대한 감독 책임을 부과합니다. 동시에 혁명 질서의 유지와 감독을 위해 부대에 대리인을 파견하십시오. 귀하의 조치들로 인해 본인이 부대에 대한 불평을 듣는 일로부터 벗어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총사령관 A. 라핀』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195
원본과 번역본 사진
위의 설명된 논문과 증거들은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나는 게 없다시피하다. 자체 식량이나 둔전 없이 이곳으로 온 독립군이 현지 간부들과 농민들과 비우호적인 상태로 현지에 계속 주둔한다면 당연히 굶주림에 의한 약탈과 이에 따른 갈등이 쌓일 수밖에 없다.

위의 논문들과 증거들을 부정한 가설을 말이 되게 제시하기도 불가능하다. 현지 간부들과 농민들이 비협조하는데 독립군이 약탈을 안 하면 러시아 극동에서 어떻게 식량을 조달하는가? 일본군이 점령한 간도에서 러시아까지 식량을 운반하는가? 증거가 없어도 독립군의 약탈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데 논문과 증거까지 있으니 부정할 만한 현실적인 가설도 없다.

보급이 안 되는 군인들이 벌이는 짓은 어디나 다르지 않은데 아예 타국에서 타국민과 있으면, 특히 약탈이 아니라면 식량 조달을 설명할 수 없다. 십자군 전쟁부터 신념은 있는데 보급은 없는 민병대가 어찌되는지 보여준다.

청산리 전투 참가자도 거의 유사하게 증언했다.
자유시참변에 원인
독립군들은 청산리전쟁 이후 만주에는 접촉할 곳이 없다. 왜들은 만주를 자유로 출몰하는 판이지라 동포들을 무분별 학살, 온갖 만행을 하는 판이라 어찌할 수 없이 러시아 땅으로 들어온 것이다. 동영현에 집결한 독립군을 통합하여 독립군 총사령부를 설정하고 홍범도 씨를 총사령관으로, 이청천 씨를 부사령관으로 선출하여 독립군을 통솔하였다.(중략)각 단체의 수령들은 배척을 당하고 군인들은 자유시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박일리야는 홍범도, 이청천도 배제하려고 한다. 홍범도 씨와 이청천 씨는 책임상 자유시까지 따라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감시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홍범도, 이청천은 탈출하여 오하묵 부대가 있는 자유시로 갔다.(중략)박일리야는 합하는 날이 되면 온 세력을 넘겨주게 된다. 그럼으로 합하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으나 1천여 명 군대에 군수물자를 보급받지 못하니 농촌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농민의 원성이 자자할 뿐만 아니라 농촌도 양식이 다 떨어진 형편이다.
"청산리대첩 참가자 이우석 친필 수기", 48-51면(51-54), 독립기념관 (자료번호 1-014724-000) #

상황이 이처럼 악화되자 극동 공화국에서는 칼란다리쉬빌리[29]를 파견해서 부대해산을 명령했다.
위임장1

극동 공화국 전군 총사령관.
1921년 5월 27일.
제574호. 극동군

위임장

이것의 제시인은 극동 공화국 전영토에서 혁명적 한인무장세력의 실제 사령관인 네스토르 알렉산드로비치 칼란다리쉬빌리이다.
그에게 위임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 현존 빨치산 및 기타 한인부대들, 군사조직과 단체를 해산하고 새로운 부대를 만든다;
2) 군사적 목적으로 한인 혁명무장세력들을 독자적으로 이용한다;
3) 그에게 예속된 부대 간부들을 교체, 파면, 해직, 임명한다;
4) 부대 간부들에게 훈령, 지시, 명령을 내리고 위임을 한다.

본인이 도장을 찍고 확인서명함으로써 진본임을 보증한다.

극동 공화국 전군 총사령관 A. 라핀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2014, 207.
원본과 번역본 사진

도착한 칼란다리쉬빌리는 1921년 5월 자유대대 및 현지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 부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사할린부대가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다음 날, 슈먀츠키는 새로 임명된 라핀 인민혁명군 총사령관과 회담을 진행하면서 조선혁명군들의 성공적인 단합을 위해서는 “가장 야비한 적들을 쓸어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총사령관은 이에 동의하며, “숙청은 진행될 것이다. 다만, 무단으로 소집된 군사협의회의 영향을 받은 부대에서 발생한 일부 불미스러운 일들은 해독제로서 어느 정도는 허용하고, 그러한 영향이 당신에게서 오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칼란다리시빌리를 조속히 파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고 대답했다. (50:상동. L.70 ) 그리고 5월 10일 슈먀츠키는 라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칼란다리시빌리와 한인부대 혁명위원회의 임무는 “범죄적 민중선동을 일삼는 박 I와 한인부대의 다른 모험가들을 어떻게 징계할 지, 또는 (모두) 쓸데없으니 (그들을) 풀어주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슈먀츠키는 ‘할아버지’가 감당해야 할 일이며, 라핀은 조만간 특별사할린부대 유격대원들에 대한 주민들의 새로운 불만들을 처리해야 할 것이라며 확신에 차 말했다. (51: 상동. L.71, 76 )

칼란다리시빌리는 조선군사혁명협의회 의장과 한인부대 총사령관 직에 임명되어(하묵은 부총사령관이 되었다) 5 월 19 일 자신의 참모들과 함께 이르쿠츠크를 떠났다. 슈먀츠키는 그에게 광범위한 임무를 부여했다: “칼란다리시빌리의 임무는 중국 마적떼('홍후즈')를 동원하여 조속히 완충지대에서 벗어나 한국으로 진군하는 것이다. 이들 조직의 관리는 중국공산당의 조력을 받게 될 오홀라에게 맡겨졌다. 홍후즈 마적떼의 임무는 한인부대들을 위해 완충지대를 벗어나 경계를 벗어날 때 최소한 그 후방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간섭주의 작전은 운게른 부대와의 전투 맥락에서 계획되었다: 당시 슈먀츠키는 운게른과의 전투를 위해 500 여명의 병사로 구성된 쉐틴킨의 부대를 몽골로 보냈다. (52: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86 )

라핀 총사령관은 1921년 5월 21일 크라스노쇼코프 극동 공화국 대통령에게 자유시 아래 위치한 크라스노야로보와 마자노보에 한인유격대원 1500 여명이 주둔해 있고, 그 지휘부는 한국에서 활동하다 일본군에 의해 격파된 후 극동 공화국으로 떠난 일본 및 중국군의 전 한인장교들과 부대장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은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이 임명한 지도자들을 인정하지도, 복종하지도 않으려 한다고 전했다. 4월에서 5월까지 크로스노야로보 부대는 이르쿠츠크에서 온 한인연대로 보강되었다(500 여명이 넘는 병력, 러시아군대 한인 장교로 구성된 군간부들은 '연대 전체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매우 신뢰할만 했다'.) 라핀은 이 연대로 사할린 부대를 보강함으로써 나머지 부대의 '심리적 요새'가 될 것이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총사령관으로부터 강력한 체포권을 부여받은 칼란다리시빌리는 1921년 6월 9일 '한인부대가 (그에게) 전혀 복종하지 않는다'고 자유시에서 전해왔다. (53: 상동. L.88, 95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A.G. 테플랴코프 =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준박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경제경영대학교 부교수. E-mail: [email protected]

원문: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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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농민 약탈 문제가 아니더라도 이미 자유대대로 통합하라고 지침이 내려온 상황인데 사할린부대가 계속 버티는 것은 레닌모스크바 정부와 달리 현지 극동 공화국의 지도부, 관료, 군인, 농민 입장에서는 불편했을 것이다. 본질적으로 독립군은 민간인 무장단체이며 타국에선 위험한 집단인데 타국에서 통제를 무시한다면 해당 지역에서 가만히 두는 게 오히려 이상하고 생각해 보면 무장해제 거부가 황당한 행위다. 남의 에 들어가는데 무장 그대로 하고 지휘는 받기 싫다고 하는 것이니 그 나라 입장에선 분노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

4.3.1. 논문 저자의 정치적 입장과 신뢰성에 관해

위 문단에 인용된 논문의 저자는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테플랴코프 박사다. 테플랴코프 박사는 내전 시절 빨치산과 소비에트와 그 기관의 정치 탄압과 적색 테러 분야로 학계에서 인정받는 전문가이며 «노보시비르스크 지역의 정치적 억압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 편집위원회 위원이다.#

만약 볼셰비키나 소비에트의 테러를 옹호하는 학자가 한국인 유격대의 폭력을 지적하면 정치적 올바름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겠지만 논문의 저자는 옛날부터 일관되게 볼셰비키와 소비에트의 적색 테러와 탄압을 연구함과 동시에 비판했고 역사학계에서 그걸로 인정받는 적색테러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걸로 문제가 될 소지가 없다. 오히려 테플랴코프 박사는 적색테러 세력의 민족주의와 소수민족('아시아인', 소수 부족민, 폴란드계, 독일계, 우크라이나계 등)에 대한 탄압과 학살도 연구하고 실제로 그 결과물이 논문으로 나오기도 하였다.[30]

더욱 중요한 건 박사는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의 역사관을 '선진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국가와 매우 다르다'며 매우 비판한 데다 2018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의 승리를 '독재정부의 승리', '반계몽주의의 승리', '러시아 사회의 퇴화'로 평가하고 볼셰비키와 소련의 적색 테러 옹호자들을 '외국인 혐오자', '퇴화된 시민학자(재야학자)'라고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점이다.
현대의[푸틴의 러시아] 국가의 정부는 역사에 존재하는 모든 시대를 계승하므로, 사회의 안정을 선언하는 슬로건(구호) 아래 어떻게해서든 [러시아]제국, 마찬가지로 또한 소비에트 정권의 과거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그 시대에 대한 시각을 규격화하고 정당화한다. 최근에는 서구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대가 굳어지면서, 역사적 기억을 직접적으로 구속하는 정책을 강화하기 위해 [푸틴의 러시아]국가 정부가 [학자들의 연구를] 방해하고 있다. 사실 러시아의 엘리트는 여전히 서구의 정치, 경제, 그리고 문화를 목표로 본보기로 삼고 있지만, [푸틴의 러시아 정부는] 평소와 같이 기원이 부재하는 가짜 모조품[시뮬라크르의 의역]인 «관습적인 적-반러시아 세력»을 불러 선동하며 [푸틴의 러시아]국가정부 주위에 시민과시민집회를 결집시키고 대결을 부추기면서 프로파간다(선전활동) 성명 활동을 한다. 물론 그런 악의적으로 설계된 허위적인 프로간다라는 문제들은 현대의 다른 세계[의 국가]에서도 일상적 생활에서 적극적으로 실행하고 있다. 그러나 [푸틴의] 러시아 국가정부는 다른 선진적이고 민주주의적인 국가 정부와 다르게, 학자들의 능력에 심각하게 영향을 끼치면서 기록보관소의 문서 열람에 제한하고 그리고 그 자체로 폐지됐던 과거의 견해를 조장한다. 결국 소비에트 시대의 문제를 사회에서 공개적으로 연구하는 활동이 곤란해지며, 러시아인은 이미 모순된 [러시아와 소비에트 시대를] 자기동일시하는 정체성을 왜곡하게 된다.
{{{#!folding [ 러시아어 원문 ]
Современная власть с целью наиболее полноценной, с её точки зрения, легитимации ориентируется на преемственность со всеми историческими эпохами, поэтому под лозунгом общественной стабильности провозглашает положительную оценку как имперского, так и советского прошлого. В последние годы вмешательство государства в политику исторической памяти усиливается, что прямо связано с жестким идеологическим противостоянием Западу. Правда, следует учитывать, что политическая, экономическая и культурная элита России по-прежнему ориентируется на Запад, что делает пропагандистские заявления о противостоянии с «традиционным врагом-русофобом» обычными симулякрами, призванными мобилизовать население и сплотить его вокруг власти. Впрочем, это типично и для остального современного мира, активно запускающего в обиход именно такие ложные пропагандистские конструкции на злобу дня. Однако российская власть, в отличие от властей развитых демократических государств, серьёзно влияет на возможности исследователей, ограничивая доступ к архивным документам и пропагандируя самые архаические воззрения на события прошлого. В результате возможность общественного обсуждения актуальных вопросов советской эпохи затрудняется, что искажает и без того противоречивую самоидентификацию россиян.}}}
최근의 역사편찬에 대한 물결이 흐려지자 너무 솔직하게도 스탈린주의 또는 외국인혐오 신념을 지니고 있는 보균자들은,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사회주의 건설은 위대한 행위였지만 어느 것도 공정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폭언을 당하고 있다고 [러시아인들에게 유포하며 러시아인들을] 낚으려고 시도한다. 그런 행동은 볼셰비키의 테러라는 주제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가장 화가나게 한다.

그들은 [테러, 국가폭력, 학살 등에 등에 대한] 국가의 역사에 존재하는 사실에 침묵을 지켜야한다는 욕구가 있으며 그런 욕구를 숨기지 않는다. 그들을 일부 용어, 예를 들어 «진압[репрессии]» 또는 «복권[реабилитация]»이라는 용어에 속임수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가장 반동적인 입장은 «기관»에서 서기의 일을 하며 여러번 독점적 권리를 가져 조사한 국가보안 및 내무성 출신자들이다.
{{{#!folding [ 러시아어 원문 ]
Новейшая историографическая волна помутнела и в ней пытаются ловить рыбу носители откровенно сталинистских и ксенофобских взглядов, считающие, что строительство социализма было великим делом, которое подвергнуто неоправданному поношению. Тема большевистского террора для таких исследователей является наиболее раздражающей. Они не скрывают, что во имя интересов государства историческая правда должна помалкивать. Им нравится закавычивать такие термины, как, например, «репрессии» или «реабилитация». Наиболее реакционные позиции занимают выходцы из структур госбезопасности и МВД, нередко обладающие монопольным правом на ознакомление с делопроизводством «органов»}}}
최근에 러시아는 시민 사회체제가 원자화[러시아의 국제적인 고립]되고 퇴화하며, 독재국가의 권력과 반계몽주의가 정점에 오르면서 위험한 과정에 있다. [‘독재국가의 권력과 반계몽주의가 정점’은 독재국가의 권력과 반계몽주의의 승리라는 의미도 포함. 원자화는 현대의 대중 사회 속에서 개인이 고립되는 현상을 뜻하지만 여기선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현상을 일컬는다.] 사회에서 학회가 퇴화되는 맥락 속에서 학자들이 축적한 객관적인 소비에트 정권을 거부하고 대신 반동적인 사고방식을 보유한 역사학문 저술이 눈에 뜨이고 있다. [중략]벼락같은 굉음을 내는 물결속에서 추잡한 스탈린주의자들의 사회정치 평론, «체키즘»이란 욕구에 단숨에 흠뻑 빠져들어 극복할 수 없는 위험한 증상을 겪어 퇴화한 시민 학자(재야학자)들.
{{{#!folding [ 러시아어 원문 ]
В последнее время в России налицо тревожные процессы атомизации социума и деградации гражданского общества, торжества автаркии и обскурантизма. В условиях архаизации общественных институтов всё более заметно появление в исторической науке сочинений, которые находятся в русле реакционных представлений, опровергая накопленные исследователями объективные знания о советском прошлом.
[중략]огромным валом вульгарно-сталинистской публицистики, а также опасным симптомом деградации целого ряда гражданских исследователей, испытывающих непреодолимое желание проникнуться духом «чекизма».}}}위의 자료들을 봐도 박사가 러시아인이나 볼셰비키를 옹호하려는 성향이 없으며 그런 성향으로 한국인들을 폄훼한 게 아니며 오히려 푸틴의 독재 세력이 장악한 러시아에서 푸틴 정부의 방해를 비판하는 성향의 학자임을 알 수 있다.

사실 푸틴을 비롯해 러시아의 우익 민족주의좌익 공산주의는 러시아 내전을 '서방 제국주의에 저항한 애국전쟁'으로 규정하고 한인 독립군은 그 증거나 마찬가지이므로 러시아의 폐쇄적인 민족주의, 공산주의, 반서방주의를 비판하는 저자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은 서술이다. 한국의 좌익 성향의 역사학자들과 대척점에 서 있는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4.4. 극동 공화국의 분노

자유시 참변이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유는 극동 공화국의 반응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극동 공화국의 지도자가 모스크바레닌에게 항의한 전보에 의하면 현지 지도부는 이르쿠츠크파의 무모한 한국해방전쟁과 한인 부대의 만행에 진영 구분 없이 모두 분노하면서 항의했음을 알 수 있다. 독립군과 극좌 공산당 부대의 전쟁범죄, 독립군의 세력갈등, 러시아 공산당의 급진파와 독립군에 의한 일본의 도발 정당성이라는 문제 모두가 극동 공화국의 관료와 군인들, 힘없는 농민 자신들에게 위협적이었다.

한국에선 흔히 독립군과 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립만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현지의 관료, 군인, 주민들에겐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러시아 공산당의 급진파와 한인 독립군 모두가 재앙이었고 그들을 지원한 레닌의 모스크바 정부의 입장에 항의했다.
곧이어 칼란다리시빌리는 특히 심했던 국제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1920년 가을, 일본의 식민지개척자들과 전투를 벌였던 4 천여명의 한인 유격대원들이 북만주에서 아무르주로 넘어갈 무렵, 코민테른 극동사무국장 슈먀츠키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혁명군을 훈련하고, 만주를 통해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전승 행군을 조직하는 모험적인 계획을 완성했다. 그는 칼란다리시빌리의 지휘 하에 조선혁명운동의 거점을 이르쿠츠크에 구축하는데 착수했다.(중략)
세계 혁명의 화염을 불식시키기 위해 한국으로 갈 생각을 진지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의 공적은 무정부주의 사할린부대가 해산되는 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극동 공화국 정부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에 호소함으로써 슈먀츠키의 모험을 제지할 수 있었다. 극동 공화국 크라스노쇼코프 대통령은 극동 공화국 인명혁명군 라핀 총사령관의 의견을 듣고 (61: 라핀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한국 조차도 동족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 이 일은 한국으로 향하는 이르쿠츠크의 한인 공산당 사절단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칼란다리시빌리 세력이 한국 국경에 성공적으로 도달할 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1. D.376. L.86,89) ) 일본의 도발을 두려워 하며, 1921년 6월 치체린과 레닌에게 계획된 모험에 항의하는 전보를 보냈다: “…. 한인들에 대한 슈마츠키의 계획, 일본의 도발을 유도하게 될 계획에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특히 그는 한국으로 진군하면서 한인들을 지휘하기 위해 나폴레옹의 모습과 잡음을 일으키며 극동 공화국 전역을 훑고 지나갔던, 나이가 들어 의식이 흐릿한 동방 전역에서 유명한 유격대원인 칼란다리시빌리를 수장에 세웠다. 끔찍한 사실은, 1) 4,000 명이 한인들이 블라고베쉔스크의 일본인들 앞에 집결해 약탈, 강간 등 끔찍한 만행을 자행하고 있으며, 자기 측에서 선출된 지휘부에만 복종하고 있다….. 노인네(칼란다리시빌리)가 2 천노리의 한국 진군을 위해 한인들과 중국 영토로 이동한 것은 좀 부드럽게 말하자면, 시인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으나, 삼국협약의 눈앞에서 완전히 정당화된 일본의 공격을 유발할 수 있다.” 외교인민위원회는 이에 대한 답변으로 이 '모험을 가능한 한 조속히 중단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62: B. D. 소비에트 러시아의 한인들…….. p.73-91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A.G. 테플랴코프 =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준박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경제경영대학교 부교수. E-mail: [email protected]

원문: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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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사할린부대에 대한 강제 무장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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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시 사변 현장 약도. (출처: 1989년 8월 15일 동아일보)

[34]
합당한 권한을 부여 받은 야심에 찬 칼란다리시빌리는 불복종에 대한 대응으로 신뢰할 만한 이르쿠츠크 연대에 의지하여 사할린의용대를 '반혁명주의자들'로 신속하게 처리해버렸다. 블라고베쉔스크 인근 수라줴프카 마을에서 조지아 '권력층'의 지휘 하에 만행되어 블류헤르 인민혁명군 차기 총사령관에 의해 제지된 6월의 '아무르 대학살'로 인해, 트랴피씬 한인유격대의 범죄성을 도외시했던 현대 연구가의 과장된 정보에 따르면, 피살, 익사, 실종된 반란군은 400명 미만, 무장 해제되어 '반혁명군' 표시를 달고 러시아군에 전쟁 포로로 잡혀간 반란군은 900 명에 달했다. (54: 박 B. D. 소비에트 러시아의 한인들(1917-30 년대 말). M., 이르쿠츠크, 상트페테르부르크, 1993. p.73-91 ) 또한 수 백명의 유격대원이 사망했으며, 한인사회는 사할린부대에 가해진 징벌에 분노하고 있다고 레닌에게 전해왔다. (55: 불다코프 V.P. 유토피아, 침략, 세력. 혁명 이후의 사회심리적 동향. 러시아, 1920-1930 년. M., 2012. p.601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A.G. 테플랴코프 =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준박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경제경영대학교 부교수. E-mail: [email protected]

원문: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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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칼란다리쉬빌리는 1921년 6월 28일 사할린부대를 강제 진압해 무장해제시키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동원했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이다.
사망 36명 포로 964명 병자로 불참한자가 19명 박 일리야가 데리고 도망한자 34명 기외 59명 행방불명이었다. 무장해제를 집행한 군대는 사자1명 29연대 사자 1명이었다.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9, 208~209쪽
권희영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로 인한 사망자는 최소 36명이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진압현장에는 사실 간도 독립군 대부분이 없었다는 점이다. 상술된 대로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대다수가 이미 자유대대 쪽으로 합류한 뒤였기 때문이다.
임시군정의회는 계속해서 대한의용군에게 자유시로 와서 통합할 것을 주장했다.그리고 5월 19일 이르쿠츠크를 출발한 합동민족연대의 병력 600여명이 자유시에 도착했다.584) 6월 6일 깔란다리쉬빌리가 까자크 기병 120명을 이끌고 도착하여 정식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성립되었다.고려혁명군정의회의 위원장은 깔란다리쉬빌리였고,두 명의 위원은 최고려와 유동열이었다. 극동비서부에서 전권위원으로 오홀라가 동행했다.그는 슈먀츠끼로부터 극동 공화국 총사령부와의 연락을 담당하도록 위임받았다.585)이제 한인 무장부대 통합의 주도권은 명분에서나 세력에서나 자유대대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간도에서 온 독립군부대들은 군정의회를 중심으로한 통합으로 그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홍범도와 안무,최진동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마자노프를 떠나 자유시로 이동했고, 이청천도 군정의회에 의해 高麗革命軍 교관으로 선임되었다.586) 그리고 나머지 부대들도 자유시로 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즉 간도로부터 이동해온 독립군부대 대부분은 이제 통합의 주체를 고려혁명군정의회로 인정했다. 이는 곧 사할린부대를 중심으로 한 전한군사위원회의 권한을 부인한 것이었다.이로 인해 군정의회는 통합에 있어서 주도권을 확실하게 쥘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동휘 및 한인부와 관계를 맺으며 자유시로 온 간도의 무장부대들이 군정의회를 통합의 주체로 인정하게된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이것을 자유시사변의 직접적 피해자인 許在旭이 코민테른에 보낸보고서 587)와 간도 독립군부대의 지도자들인 홍범도,최진동,허재욱,안무,이청천 등이 자유시사변 이후 발표한 성명서 588)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간도의 무장부대들이 자유시로 이동해 온 것이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았다.589)그러나 이들은 소련과의 관계를 명확히 하고,무엇보다 단일한 조직과 규율로 무장부대를 통합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590) 그리고 그 통합은 “不偏不義한 魯西亞 同志”를 사령관으 로 하는 “高麗革命軍政議會를 組織하야 軍事上에 關한 萬般을 指揮 統一케하”는 것이라고 했다.때문에 자기들은 “軍政議會의 本部와 某軍隊 駐屯地相距가 一百七八十里 되난지라 食料 及 諸般 供給에 對하야 運搬上 不便이莫大함으로 該軍隊를 軍政議會 近接 村落으로 移屯하라”는 군정의회의 명령이 정당함을 양해하고 “軍政議會 接近 村落에 移居”591)했다는 것이다.

이로 보아 간도에서 옮겨온 무장부대들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으로 옮겨간 것은 ‘무장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인정, 그리고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또한 군정의회가 이르쿠츠크로부터 대동하고 온 군대,즉 합동민족연대의 한인부대 600여명과 까자크 기병 600여명으로 구성된 군정의회 군대의 강력한 무장력에 대한 인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간도의 무장부대들은 자유시로 이동해 무장부대 통합에 대한 군정의회의 주도권을 인정했다.또한 마자노프에 있던 사할린부대는 군정의회의 명령에 따라 자유시에서 약 3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 수라세프까로 이동하여 주둔했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00~202
즉 현장의 "무장해제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허재욱의 의군부군대 병사들이었음"으로 사망자 중 간도독립군이 대부분인 것은 맞는데[35] 그 간도독립군인 허재욱의 의군부는 정작 전체 간도독립군 중에서는 소수였다. 홍범도, 안무, 최진동, 이청천(지청천) 등 대부분의 간도독립군은 이미 수라젭카에 없었다.

그나마 사상자 수십명이 생긴 이유도 러시아어를 못 해서 소통을 못 한 것도 중요한 이유였고 진압측도 별로 사상자를 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아래 논문에서도 사상자는 수십명이라고 서술했다. 수백명 단위가 아니다.
아무리 화력의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하지만 한편에서 수십명의 사상자가 나는데 다른 한편에서는 사상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사할린부대측에서 적극적인 무력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앞서 살펴본 김재규의 회고도 동일한 맥락으로 읽힌다. 김재규는 이후 깔란다리쉬빌리로부터 “왜 기관총사격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말없이 숨겨두었던 기관총 열쇠 4개를 내어놓았다고 한다. 그러자 깔란다리쉬빌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들을 포로병으로 인정치 말고 석방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639) 이러한 사실은 다른 기록들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640) 또한 군정의회측 또한 살상을 통해 무장해제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희생자는 거의 자유시수비대 29연대 병력들이 수행한 작전지역에서 발생했다.간도에서 온 독립군들이 러시아어를 이해하지 못했던 점도 피해를 키운 한 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앞서살펴보았듯이 피해자의 대부분은 허재욱의 의군부 부대원들이었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18쪽

상해파 부대는 무장해제됐지만 현지의 관료들과 군인들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사건이 발생했다. 무장해제 계획을 주도했던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가 상해파 부대에게 감동을 받아 무장해제를 반대하고 무기를 돌려주기까지 한 것이다. 이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 부대와 재무장한 한인 유격대는 주둔지의 현지인들을 상대로 폭력과 약탈을 일삼으므로 현지의 군인, 관료, 농민들에게 분노를 일으켰다.
김재규는 이후 깔란다리쉬빌리로부터 “왜 기관총사격을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을 받고 말없이 숨겨두었던 기관총 열쇠 4개를 내어놓았다고 한다. 그러자 깔란다리쉬빌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들을 포로병으로 인정치 말고 석방하라”고 명령했다고 한다.639) 이러한 사실은 다른 기록들에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640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18쪽
칼란다리쉬빌리는 한국인 전투원으로 구성된 부대를 가졌다. 그는 한국 민족의 팔자를 무겁게 이해하고 있었다. 네스토르는 고국 해방에 대한 한국인 전투원들의 소중한 꿈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느끼고 있었다.
Жаргалова, Е. В. (2018). “ИСТОРИЯ ГРАЖДАНСКОЙ ВОЙНЫ В ТОПОНИМИКЕ ГОРОДА УЛАН-УДЭ.”. 《Возможности развития краеведения и туризма Сибирского региона и сопредельных территорий》: 230 네스토르 알렉산드로비치 칼란다리쉬빌리 문서의 번역 재인용.
총사령관 귀하
하바롭스크 1921년.

한인의 폭동, 우리 부대에 의한 그들의 무장해제, 대포가 동원된 12시간의 전투 및 인민군 지휘간부 및 병사의 손실은 칼란다리시빌리 동무에게 아주 답답한 기분을 조성하였습니다. 자신의 행동과 지시들로 우리 지휘부의 조치에 완전한 무정부상태를 주입한 칼란다리시빌리 동무는 폭도들로부터 압수한 무기를 그들에게 돌려줄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의 부대는 방탕, 약탈, 무자비한 폭력 같은 것에 몰두하였습니다. 결국에는 6월 29일 집회를 소집한 칼란다리시빌리는 제4사단장 파데예프 문제를 집회에서 다룰 것이라고 직통전화를 통해 표명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방금 진압된 폭동이 칼란다리시빌리 동무 덕분에 다시 시작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칼란다리시빌리 동무를 1년 이상 알면서 가끔 그와 함께 일한 우리는 그의 할동에 대한 일정한 평가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지시에 복종하지 않는 한인부대를 무장해제하는 것이 우리 부대에겐 이미 두 번째 일입니다. 그들의 재무장은 아무르 주민들이 이미 충분히 겪은 반란과 강도행위를 다시 야기할 것이며, 향후 자기 지역에서 칼란다리시빌리 부대 같은 것의 주둔을 더 이상 인내하지 못할 것입니다. 즉각 칼란다리시빌리를 제2군 사령부에 완전히 복종케 하거나 아니면 그를 군의 관할에서 완전히 제거하여, 그럼으로써 주민과 군이 폭동과 전횡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를 요청합니다.

제2군 사령관
군정치위원
군참모장
이완종, 2014, 『러시아문서 번역집 14』,선인, 36~37
칼란다리시빌리는 여전히 볼셰비키의 관심 대상이었던 한인의용대의 징계 임무를 수행했다. 1921년 1월 중순, 국경을 통과하는 모든 한인 유격대원들을 '일본 정탐꾼들이 침입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러 낼 것'을 요구한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극동국은 1921년 6월 29일 한인부대와 인민혁명군의 무장 충돌 소식을 듣고, 블류헤르 총사령관에게 계속해서 한인부대를 이용할 것을 제안했다. (58: 러시아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F. 17. Op. 13. D. 288. L.6, 100 ) 외교인민위원회도 의견을 같이했다. 1921년 7월 초, 치체린은 중앙위원회 극동국에 한인부대 사건에 관한 세부사항을 전해달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들에게 신중하지 못한 분별없는 행동이 가해진 것은 분명하니, 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하라. 한인들이 극동 공화국에 있는 것은 불편한 일이나, 그들을 해산시킬 필요는 없으며, 그들이 머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는 이르쿠츠크로 보내야 한다.”(59: 상동. F. 372. Op. 1. D. 87. L.153 ) 한편, 한인부대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제멋대로 행동했다: 1921 년 7 월 그들은 아무르주 체르니고프카 마을 주민들에게 식량을 요구하고, 마차를 약탈하고,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총머리를 겨누며 집에서 쫓아 내는 등 만행을 일삼았다. 그로 인해 농민들은 한인을 '제 2 의 사무라이'라고 불렀다. (60: 러시아군사문서보관소. F.221. Op.2. D.44. L.207, 213 )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A.G. 테플랴코프 =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준박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경제경영대학교 부교수. E-mail: [email protected]

원문: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5. 이후

5.1. 군사재판과 '11월 결정서'

수라젭카의 진압으로 대한의용군(사할린대대) 소속 병사 약 864명이 포로로 잡혔다. # 이르쿠츠크파의 주도로 이들에 대한 군사재판이 이루어졌는데 홍범도가 이때 재판위원으로 참여했다고 하며 당시 발표된 상해파 규탄 성명도 홍범도, 최진동, 허재욱, 지청천 등 간도 독립군 지도자 27명의 명의로 되어 있다. 하지만 홍범도, 최진동 등은 이후 1922년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해 이르쿠츠크파를 살인자라고 비난했을 뿐만 아니라 이르쿠츠크파가 자신들의 동의 없이 성명서에 이름을 넣었다고 폭로한 바 있다.[36] 이로 미루어 볼 때 간도 독립군들은 사태 무마를 위해 이르쿠츠크파가 내세운 얼굴마담 정도였던 것으로 보이므로 윤상원 교수의 연구결과에 오류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대결에서는 이르쿠츠크파가 승리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동휘가 1921년 11월 직접 블라디미르 레닌과 면담하여 '11월 결정서'를 도출시키면서 상황은 또다시 반전되었다. '11월 결정서'는 기본적으로 자유시 참변의 원인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모두의 책임이라고 지적하면서도 제1항에서 코민테른 국동비서부(동양비서부)가 이르쿠츠크파를 편파적으로 원조해 충돌을 심화시켰다고 비판했다. 또 양파 동수로 연합 간부를 구성할 것과 상해파 인사 80여 명을 석방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로써 두 고려공산당의 각축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셈이 되었다. 참고로 이후 발표된 '4월 결정서'에서도 모스크바는 상해파에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37]

5.2. 번외: 중국군에 의한 한인 유격대 무장해제 사건

자유시 사변으로부터 1년 5개월 가량 후의 사건으로 중국군에 의한 빨치산 출신 군대 무장해제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김좌진에게 합류하려고 이동 중이던 김규식의 군대가 러시아 농민 4인을 총살한 사건으로 무장해제당하려 하자 목능현으로 도망갔다가 중국군에게 무장해제당한 사건이다. 러시아 농민 4인 살인사건은 일본의 문서와 고려인 회고록으로 교차검증이 가능하다.
연해주 고려혁명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김규식은 무장해제를 거부하고 부대원을 이끌고 중국령으로 넘어갔다.김규식은 연해주해방전쟁이 끝나가던 1922년 11월 15일경 수이푼 재피거우에서 부하 군인이 러시아인 4명을 살해한 사건으로 적군의 반감을 사서 무장해제를 강제당했으나 이를 거부하고 마침내 부하군인을 이끌고 서간도 안도현 방면으로 출발했다(高警 第4142號,武裝解除後二於ケル在露領不逞鮮人團ノ狀況 ,1922.12.28, 在西比利 亞部 14권,36항.이 사건에 대해 김규면은 “김규식은 로씨야농민 네사람을 총살하면서 성명하기를 우리는 붉은 주권을 반대한다.그래서 너희들을 총살한다고 하고 그 즉시로 군대를 다리고 중국땅으로 넘어서 도주하였다”고 적고 있다. 老兵 金規勉 備忘錄 ,앞의 책,180쪽.) 일본의 정보문서에 따르면 김규식은 곧 김좌진과 합류하여 중국 목능현 八站(馬橋河)에 도착했다고 한다.김좌진이 김규식부대에 합류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다.그런데 김규식이 원래 軍政署軍의 장교였던 점으로 미루어 중국에서 김좌진과 연계하여 활동하려 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그러나 이 부대는 이곳에서 중국군대에게 강제로 무장을 해제당한 채 해산되고 만다.

즉 일본 정보문서에 따르면 金佐鎭과 金圭植이 이끄는 약 400명의 부대가 1922년 12월 상순 露領 松田關으로부터 서간도로 이동할 목적으로 穆陵縣 八站子 부근을 통과할 때 그 지역 中國 保衛團이 그들을 억류하였다. 며칠 후 하얼빈 방면에서 도착한 중국군 부대에게 다시 무장해제 명령을 받았는데 김좌진 등은 무장해제 면제와 중국령에서의 행동을 묵인해 줄 것 을 의뢰하였다.그러나 중국군대는 보위단에 편입하여 국경경비에 종사하는 경우에만 특별히 채용할 것이며 이에 응하지 않는 자는 무력으로 무장을 해제시킨다고 엄명을 내렸다.그런데 보위단에 입단을 희망하는 사람들이 없어 마침내 무장을 해제하고 무기 전부를 인도했다는 것이다.이때 인도된 무기의 수량은 장총 약 400정,권총 30정,폭탄 약 300개,기관총 3정, 군도 30본,소총탄 약 1만6천발,기관총탄 약 1만발이었다고 한다.

무기 인도 후 김좌진은 부하 전원를 한 곳에 집합시켜 “露支領 어디에서도 무장행위를 허가할 수 없다는 것이 자연의 추세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차제에 해산하고 금후의 행동은 각자의 자유에 맡긴다. 그럼에도 종래의 행동을 돌아보아 고향으로 귀향하기를 바라지 않는 자는 최근 조직된 연해주한족노동회에 입회하여 생활의 안정을 얻는 것이 가하다.또한 장래 기회가 있을 때 결속하여 국사에 분주할 것을 잊지 말아달라”고 고별사를 하였다.해산된 군인 약 400명 중 250명은 연해주노동회 혹은 추풍지방에서 농업 기타에 종사하고 약 50명은 목릉현 八面通 지방에 들어가 농가의 고용이 되고,약 100명은 간도지방의 家鄕으로 귀환하여 생업에 나섰으며,12월 중순 삼삼오오 이산한 김좌진과 김규식 기타 중요한 간부는 연해주노동회에 들어간다고 하며 노령으로 향했다고 한다.934) 연해주 고려혁명군의 총사령관이 무장해제를 거부한 채 부대를 이끌고 중국령으로 달아났다가 중국군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고 뿔뿔이 흩어진 사건은 큰 충격이었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319~320

6. 오해와 진실

6.1. 960여 명이 희생당했다?

이 사건으로 독립군 960명이 전사했다는 출처불명의 썰이 있지만 실제로는 최소 36명이다. 이건 우파 성향의 역사학자 권희영 교수의 논문에서도 인정한 사실이다.[38] 일반적으로 학계에선 사상자[39]를 수십명 단위로 본다.[40]
한편, 극동 공화국 정치안보국 본부는 1921년 7월 16-19 일 이 사변을 보고하면서, 한인의 피해는 현저히 적었다고 전했다: “스보보드넨스키 지역에서 사령관의 무장해제 명령에 따르지 않은 사할린부대와의 충돌이 발생했다. 명령은 부대 내에 반형멱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내려진 것이었다. 충돌로 인해 부대 총 인원 1026명 중 830 명이 항복했고, 나머지 일부는 죽거나, 부상을 입었고, 또 일부는 도주했다.”(56: 6 러시아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 F. 372. Op. 1. D. 114. L.68 ) 극동 공화국 인민혁명군 정보에 따르면, 비상위원회 정보와 마찬가지로 한인 36명이 사망하고, 60명은 제야강에서 익사했으며, 실종자는 60명, 무장해제된 자는 860명에 달했다. (57: 토루쿠노프 A.V. 한국사(새로운 관점). M., 2003. P. 303-304 ) '실종자' 중에는 도망자들이 우세했다(박은 70 명의 병사와 함께 만주로 도주해 그곳에서 홍호자들과 함께 유격대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공식 보고서는 사령관들이 제 5 군 군사재판소에서 조사를 받았던 이미 무장해제된 한인들에 대해 징벌을 가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아무르사변’은 한국해방운동에서 깊고 오래된 분열을 더 악화시켰다.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

DOI: 10.31518/2618-9100-2018-1-4
УДК: 63.3(571.51/.55/.621)94(47)

A.G. 테플랴코프 = 테플랴코프 알렉세이 게오르기예비치 –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지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준박사, 노보시비르스크 국립경제경영대학교 부교수. E-mail: [email protected]

원문: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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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자유시 참변의 피해자인 상해파의 일원이었던 계봉우 역시 이후 자신이 집필한 회고록인 <조선역사>에서 사망자가 36명이었다고 못박았다. 이는 36명이 사망했다는 주장의 신빙성을 더욱 높여 주는 주장이다.
(자유시 사변의)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36(구)의 묻음(무덤)을 보게 되었고 投江(투강)한 人數(인수)에 있어서는 제야강에 물어야 할 터인데, 제야강은 말없이 밤낮에 흐를 뿐이다. 합동민족군대는 의용군 측의 대소 장교 20여인을 포로로 하여 가지고 이르쿠츠크로 회환하였다.
『조선역사』 권3, 133~134쪽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사망자 272명을 포함해 6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냈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이 사전의 참고문헌[41]은 모두 2010년대 이전의 학설에 기반을 둔 것이다. 또 첫 참고문헌에는 자유시 참변에 대한 서술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볼 때 자유시 참변에 대한 실질적 참고문헌은 후자뿐이다. # 메인에 나온 한국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재외동포총서'는 자유시 참변 이후 양측의 주장만 기록되어 있고 사망자 수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이 서적에서도 독립군측의 주장은 사망자 72명이다. #

6.2. 무장항일운동에 궤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이 사건이 '만주연해주 일대에서 벌어지던 무장항일운동에 궤멸적인 타격을 준 사건'라는 썰도 사실이 아니며 자유시 사변 이전부터 간도독립군은 도저히 병력을 운영할 수 없어 이미 해산했다가 러시아로 가기 전에 집합시킨 것이다. 독립운동사 전문가 5인인 김용달·한시준·박환·장세윤·황민호 등이 검수한 국방부의 공식 견해 겸 공식연구서인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도 이 사실이 서술되어 있다.[42]

생각해 보면 서일, 김좌진 등 국경에서 돌아간 부대들은 애초에 자유시에 가지 않았으니 자유시 참변으로 타격을 입을 일이 없고 자유시에 갔던 부대들 역시 상술한 대로 홍범도, 지청천 등 대다수는 참변 이전에 이미 러시아 측에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타격을 입을 일이 없었다.[43] 강제 무장해제를 당한 부대는 주로 허재욱의 의군부인데 이들도 수십 명 수준의 피해만 입었다.

6.3.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가 사살되었다?

자유시 참변에 대해 유념할 점은,당시 사살된 사할린 부대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44] 왜냐하면 임시정부 명의로 설립, 운영된 군대는 그로부터 약 20년 후 창설된 광복군이고 당시에는 광복군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자유대대측에서는 사할린부대와 전한군사위원회가 상해임정을 추종하는 세력이라고 몰아세웠다.이는 자유시사변 이후 군정의회와 자유대대 측으로부터 나온 각종 문서와 회고록에서도 계속해서 주장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비판 역시 타당하지 않다.자유시로 집결한 무장부대들은 상해임정과의 관계 속에서 이동해 온 것이 아니라 이동휘를 위시한 한인사회당과의 관계 속에서 이동했다. 더구나 전한군사위원회가 조직되고 무장부대 통합운동이 실질적으로 전개되고 있을 때에는 이미 이동휘가 국무총리직을 사임한 상태였다.607)하지만 군정의회와 자유대대 측에서는 사할린부대를 상해임정과 연결시키려 했으며 심지어는 위임통치문제로 논란을 일으키고 있던 이승만과 연계시키기까지 했다.예를 들면 최고려는 자서전에서 이동휘가 “이승만의 승낙을 받아 ‘한인공산당’을 제꺽 만들어”냈으며,“이 상해공산당의 사상적 고무자들은 일제와 미제의 이름난 주구들인 장덕수,송진우,김성수,이승만 및 기타”라고 왜곡했다.608)이상 자유대대의 공격은 상해임정이 조선의 독립과 무장부대 통합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채 상해임정이 부르주아지들의 반혁명기관이라는 근거없는 전체 하의 비방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군정의회와 자유대대 측이 일반 군인들에게 발표한 거의 모든 문서에는 상해임정에 대한 성토가 있는데 반해609)코민테른과 소비에트러시아 정부에 보고한 보고문에는 사할린부대와 임시정부의 관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610) 사할린부대와 상해임정의 관계는 군정의회 상층부에서도 부인하고 있었으며,일반 군인들에 대한 선전용으로만 이용되었던 것이다.그러나 무장충돌의 가능성까지 있던 상황에서 상호 비난은 일반 군인들에게 별다른 검증없이 받아들여졌던 것으로 보인다.일반 군인들은 급박한 정세 속에서 이러한 비판들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선별적으로 수용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07-208
사살된 사할린부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대라는 건 당시 떠돈 유언비어였다.

2017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편찬한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에서도 상해 임시정부 봉대 날짜를 1921년 3월까지를 한계로 봤다.[45]

오히려 이들은 사회주의 지향의 군대였다.
사료에 다소 과장이 있을지라도 자유시에 모인 군대의 대부분은 사회주의적 지향을 갖고 민족해방운동과 함께 사회주의혁명을 동시에 추구했던 군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507)그러나 표면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했다고 하더라도 각 부대의 성격은 이질적이었다.당시의 무장부대들은 “하나의 집중권 있는 기관 아래 조직된 의병단체는 아니고 각기 지방에서 개별적으로 조직되어 상호간에 지휘복종의 권리와 의무가 없었”508)던 상태였다.일제에 반대하고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지만,각 부대들의 이질적인 경험은 군사적 통합을 어렵게 했다.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175

김구백범일지에는 자유시 참변에 대한 언급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아래의 도진순 교수(대표적인 김구 전문가)의 답변에 의하면 김구의 반공주의는 자유시 참변과 관계가 전혀 없다.

사할린 부대의 여러 전쟁범죄가 드러난 후에 보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오히려 김구김립 피살 사건으로 비난받는 게 형평성에 문제가 있을 지경이다. 김구는 독립운동가가 된 이후 적대적인 정치인을 대상으로 했을 뿐이지 민간인을 대상으로 폭력을 휘두른 적은 없다.[46] 하지만 이동휘에 우호적인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김구만 비판하면서 이동휘 측의 전쟁범죄에는 침묵한다.#

이런 점에 의하면 권희영 교수가 지적한 좌편향 문제가 틀렸다고 보기 힘들다.

6.4. 김구가 반공 성향을 가지는 원인이 되었다?

김구가 자유시 참변 때문에 반공 성향을 가지게 됐다는 썰이 인터넷에 돌아다니기도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어느 사료에도 그런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김구 전문가인 도진순 교수에게 직접 문의해서 답변을 얻은 바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백범이 자유시 참변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반공적인 입장과 관련은 더더욱 없습니다.
백범이 반공 또는 반좌파가 된 것은 임정 초기 공산당의 모스크바 자금 횡령[47] 등에서부터,
김원봉 측과의 끊임없는 갈등 등이 원인입니다.
자유시 참변과는 관계가 전혀 없습니다.
도진순 #

자유시 사변이 반공의 원인이 됐다는 썰의 출처가 의문시되는 내용이다.

6.5. 홍범도가 '독립군 몰살'의 가해자다?

자유시 참변 논란은 소련 측의 무장해제 요구를 수용하자는 홍범도 장군의 방침을 반대한 사람들의 비난한 결과. 당시 러시아 홍군 측은 우리 독립군에게 ‘남의 나라에서 무기를 들고 다녀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무기를 반납하고 허락을 받으면 돌려주겠다고 했다”면서 “홍범도 장군도 처음엔 거부했지만 이대로 가다간 비극적인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를 따르자는 쪽으로 의견이 바뀌었다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

2023년 8월 28일 국방부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과 관련해 기자단에게 입장문을 보냈는데 여기서 국방부는 "자유시 참변이 독립군이 몰살된 사건이며, 홍범도 장군이 독립군 몰살에 연관됐다는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국방부는 "홍범도 장군께서 항일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신 업적은 부정할 수 없으며, 정부도 이를 인정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국방부가 이를 폄훼하거나 부정할 의도는 전혀 없다"면서도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립군 통합을 지지했다.", "소련공산당의 자유시 참변재판에 재판위원으로 활동했다.", "참변 이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소련 적군 제5군단 소속 조선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됐다.", "이로 인해 자유시 참변과 연관되어 있다는 의혹이 있다." 등의 주장을 내세웠다. 세계일보

그러나 위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런 헛소문이 돈 것은 윤상원 교수의 논문에도 원인이 있다. 박사학위 논문인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에서 윤 교수는 홍범도 명의라고 명시된 발표문을 사실이라고 인용했는데 이는 주미희(2022), 자유시참변 1주년 논쟁에 대한 고찰, 역사연구(43)에서 반론됐다. 하지만 윤상원 교수의 오류를 사실로 오인했다고 해도 국방부의 주장에는 대부분 근거가 없고 심지어 학살, 약탈 등의 전쟁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극좌 소비에트 성향의 사할린 부대에 대해서 침묵하는 모순까지 보였다.

7. 여담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도 김두한에게 박용직이규갑염동진 등을 소개시켜주며 아버지의 죽음의 이유를 설명할 때 언급되었다. 작중에서는 다른 이름인 흑하사변으로 나왔다.

파일:20170609스보보드니%20시%20(3).jpg

2017년 6월 9일 자유시 시장과 아무르 주 부지사와 스보보드니 주민, 홍범도 장군의 손녀가 참가한 가운데 자유시 참변 표지석이 건립되었다. "다시는 우리끼리 싸우는 일이 없기를"이라고 적혀 있다. 스보보드니 외곽의 작은 마을 입구에 있으며 직접 찾아가고 싶다면 51.335925, 128.111842 이 좌표로 가면 된다.

연합뉴스, 러시아어 기사

8. 출처

조한나.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자유시 참변 서술 연구'.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 석사학위논문, 2007.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0.
백기인, 심헌용.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이완종. '러시아문서 번역집:근대한러관계연구 14'. 선인, 2008 - 2015.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9. 관련 문서



[1] 스보보드니(свобо́дный / svobódnyj)는 한국어로 '자유로운'이라는 의미의 형용사이므로 지명의 경우 '자유시'로 번역할 수 있다. 한글로는 러시아어 표기법에 따라 보통 '스보보드니'로 적지만 강세를 반영한 실제 발음은 '/svɐˈbodnɨɪ̯/(스바보드느이)'에 가깝다. 시베리아 아무르 주에 있는 자유시는 1920년 2월 볼셰비키 적군이 백군을 몰아내고 점령한 알렉세옙스크(Алексеевск)란 도시로, 소비에트 정부는 해방구의 상징으로 삼기 위해 자유시로 개칭했다.[2] 흑하는 아무르 강을 지칭하는 말이다. 80년대에 나온 책 중에는 이렇게 서술한 것도 많았다.[3]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11쪽; 조한나,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의 자유시 참변 서술 연구, 학위논문(석사) 성신여자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역사교육전공 2007. 8, 1쪽[4] 테플랴코프 박사는 러시아 내전 시기 볼셰비키빨치산적색 테러에 대한 대표적인 전문가이며 블라디미르 푸틴의 역사관을 매우 강경하게 비판하는 성향이다. 푸틴의 당선 자체를 '독재정부와 반계몽주의 승리, 러시아 사회의 퇴화'라며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5] 아래 러시아 논문에서도 2010년대 이전 한국 학계에서 지적된 독립군 내부 갈등이나 일본과의 외교 문제는 같이 언급되며 2010년 이전 한국 논문과 모순까지는 아니다. 극동 공화국에서 3가지 문제를 섞어 모스크바에게 항의했다. 모스크바와 다르게 현지인들로서는 독립군의 약탈과 폭행, 독립군의 세력갈등, 독립군에 의한 일본의 도발 정당성이라는 문제 모두가 힘없는 농민 자신들에게 위협적이었다.[6] 한국역사연구회, 『시민의 한국사 2 – 근현대편』, 돌베개, 2022, 216쪽.[7] 소련의 정식 수립은 1922년이다. 다만 러시아라는 호칭도 오류가 있다. 당시엔 다른 지역도 국가명+소비에트 공화국으로 표시했는데 이 국가들이 모스크바와 분리된 독립국가는 아니었다.[8]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경력이 있어 상해파라고 부른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민족주의, 독립 추구 성향이 상대적으로 강했다.[9] 한인사회당(1918.5.11) → 공산주의자그룹(1920.봄) → 상해파 고려공산당(1921.5)[10] 독립군 부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링크 다만 니콜라옙스크 사건러시아 내전 당시 야코프 트랴피친의 민간인 학살에 연루되었다는 흑역사가 있다. #[11] 니항부대가 무정부주의자 트랴피친의 휘하에 있었기 때문인지 사할린 부대에도 아카니스트 성향이 있었다는 말이 있다.[12] 전로한인공산당(1919.9.5) → 이르쿠츠크 공산당 고려부(1920.1.22) → 전로고려공산당 중앙총회(1920.7) →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1921.5)[13] 상해파에 비해 민족주의 성향이 약했고 공산주의, 친러 성향이 강했다.[14] 이 극동비서부가 이르쿠츠크에 위치해 있어서 이르쿠츠크파라는 이름이 붙었다.[15] 러시아 극동 지역을 일임하려고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를 만든 것이니 당연하다.[16] 이게 어떤 꼬라지냐면,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쿤밍역 칼부림 테러의 범인들을 체첸/위구르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꼴이다.[17] 해당 서적의 성격은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문서 참고.[18]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번역 재인용[19] 윤상원, 2010, 170~171[20] 백기인·심헌용, 2017, 96~98 펨코 재인용[21] 윤상원, 2010, 178; 윤상원, 2017,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 한국사연구 (178) , 243 쪽; 임경석, 2009,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제42권 초기 사회주의운동』,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72 펨코 재인용[22] 윤상원, 2010, 180; 윤상원, 2017, 245; 임경석, 2009, 173~174 펨코 재인용[23] 윤상원, 2010, 175~176 펨코 재인용[24] 전술되었듯이 이르쿠츠크파를 후원한 기관이다.[25] 이하 계속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서술한다.[26] 윤상원(2017),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 한국사연구 178, 233-263.[27] 애초에 한인 부대 통합 권한이 처음에는 대한의용군에 있었다가 이후 고려혁명군으로 넘어갔으니 그에 맞춰서 소속을 옮기는 게 어찌보면 당연하긴 하다.[28] "허락을 일일이 받을 필요 없이 출처 링크만 건다면 얼마든지 퍼가도" 된다고 의뢰 당사자가 허락했다. 펨코 2020.07.28 18:49 댓글, 부흥카페 2020.07.28. 05:50 댓글 그러나 번역물을 의뢰했던 이용자는 전제를 달았는데 반드시 링크의 출처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번역을 의뢰했던 업체에 대한 번역 표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논문을 퍼갈 시에는 반드시 링크를 출처로 가져가야 한다.[29] 아나키스트 성향이 있었다고 하며 러시아 내전에서 적군 편에서 싸운 지휘관이다.[30] Шовинизм и национализм в органах ВЧК-МГБ-МВД СССР Советские нации и национальная политика в 1920 — 1950-е годы: Материалы VI международной научной конференции. Киев, 10−12 октября 2013 г. М.: РОССПЭН; Фонд «Президентский центр Б.Н. Ельцина», 2014. (История сталинизма. Дебаты). С. 649−657., #[31] 영문명:Alexey Georgievich, Teplyakov. “The temptation of guarding: historians, writers and security officers against criticism of the Bolshevik terror.” Historical Courier[32] 영문명:Alexey Georgievich, Teplyakov. “The temptation of guarding: historians, writers and security officers against criticism of the Bolshevik terror.” Historical Courier[33] 영문명:Alexey Georgievich, Teplyakov. “The temptation of guarding: historians, writers and security officers against criticism of the Bolshevik terror.” Historical Courier[34] 사진 링크가 삭제된 관계로 한 블로거 링크 첨부[35]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16쪽)[36] 주미희(2022), 자유시참변 1주년 논쟁에 대한 고찰, 역사연구(43), 201-243.[37] 하지만 이후의 상황을 보면 결국 이르쿠츠크파가 우세해졌다. 이동휘 문서 참고.[38]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9, 208~209p.[39] 사망자가 아니라, 사망자와 부상자를 모두 포함하는 용어다.[40]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18p.[41]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국외3.1운동』21(김병기·반병률,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2013) (실제로는 2009년 발간된 서적이지만 대백과사전에서 오류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 , 『재외동포총서 러시아: 중앙아시아 한인의 역사 (상)』7 (국사편찬위원회,국사편찬위원회,2008)[42] 백기인·심헌용 집필, 김용달·한시준·박환·장세윤·황민호 감수, 2017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78 - 79p, 94 - 95p[43] 물론 첨변으로 인한 정신적 타격이라면 이야기가 조금 다르기는 하다.[44] 윤상원,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07-208[4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독립군과 광복군 그리고 국군, 서울: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7, 98쪽[46] 치하포 사건은 과오이긴 하지만 독립운동가 이전의 활동이다.[47] 김구 개인의 성향이 형성된 원인을 지목하느라 김구의 입장에 따른 용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국제공산당 자금사건 항목을 참조해 보면 알 수 있듯 이를 '횡령'으로 일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48]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00~202[49] 윤상원, 러시아지역 한인의 항일무장투쟁 연구: 1918-1922, 학위논문(박사)-- 高麗大學校 大學院: 韓國史專攻 2010. 2, 218p.[50] 권희영, 자유시 사변 연구, 한인 사회주의 운동연구, 서울: 국학자료원, 1999, 208~209p.[51] A.G. 테플랴코프, 「네스토르 칼란다리시빌리(Nestor Kalandarishvili)(1876–1922)의 초상화: 형사범이자 모험가, 파르티잔, 붉은군대사령관 」Тепляков Алексей Георгиевич, 2018,「К ПОРТРЕТУ НЕСТОРА КАЛАНДАРИШВИЛИ (1876-1922): УГОЛОВНИК-АВАНТЮРИСТ, ПАРТИЗАН И КРАСНЫЙ КОМАНДИР」, Текст научной статьи по специальности «История и археология», 47~51쪽 (https://cyberleninka.ru/article/n/k-portretu-nestora-kalandarishvili-1876-1922-ugolovnik-avantyurist-partizan-i-krasnyy-komandir ) 번역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