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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21:36:34

효빈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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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등장인물에 대한 내용은 효순궁주(태종 이방원)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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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태종의 후궁
효빈 김씨 | 孝嬪 金氏
파일:효빈김씨묘.jpg
효빈 김씨묘 전경
출생 미상
사망 1454년 4월 2일(음력 2월 26일)
능묘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 산 141
재위기간 조선 효순궁주
1401년 ~ 1454년 4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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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미상
배우자 태종
자녀 슬하 1남
장남 - 경녕군(敬寧君, 1395 ~ 1458)
봉작 효순궁주(孝順宮主) → 효빈(孝嬪)
}}}}}}}}} ||

1. 개요2. 생애
2.1. 실록2.2. 야사의 기록
2.2.1. 반론
2.3. 추측
3. 대중 매체

[clearfix]

1. 개요

조선 태종후궁. 일설에는 본래 신덕왕후 강씨를 모시는 여종였다고 하는데, 태종이 김씨를 가리켜 직접 '민씨(閔氏)의 가비(家婢)로서 본래부터 궁에 들어온 자'라고 말하였으므로 야사에 불과하다.[1]

슬하에 태종의 서장자가 되는 경녕군 이비를 두었다.

2. 생애

2.1. 실록

실록에 의하면 태종이 즉위하기 전부터 그와 부인인 원경왕후를 모시는 여종 출신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2차 왕자의 난이 벌어지던 당시 나갔던 집안의 말이 홀로 돌아온 것을 보고 태종이 패한 것으로 오해한 원경왕후가 자신도 나가서 싸우다 죽겠다며 뛰쳐나가려는 것을 말리던 이 중 하나가 그녀였으며[2], 태종 총서에서는 태종이 즉위 하기 전 송도에서 살았을 때 집에 흰 용이 나타난 걸 보고 이를 집안 사람들에게 알린 것이 그녀였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시간이 지나 태종 15년, 1415년 겨울, 태종 이방원이 처가인 민씨 일가를 처리하던 과정 중에 정실 원경왕후 민씨의 지나친 투기를 비난하며 그녀의 출신과 경녕군의 탄생배경에 대해서 언급하였다. 김씨는 본래 원경왕후의 친정에서 거느리던 노비로 태종의 아이, 즉 훗날의 경녕군을 임신한 지 3개월 후 궁을 나가는데, 이후 원경왕후는 궁 밖으로 있던 그녀를 학대하였다고 한다.

실록에 따르면 한겨울인 음력 12월에 만삭인 김씨가 출산이 임박해지자 이를 들은 원경왕후가 (태종의 생각으론) 마치 얼어죽기를 바라듯 자신이 그 소식을 알려준 계집종을 시켜 문 바깥에 방치하였는데, 김씨의 오빠인 화상이란 이가 이를 보고 불쌍히 여겨 만든 천막에서 그녀가 출산을 하자, 다시 계집종들을 시켜 화상이 마련해준 침구들을 빼앗고 숭교리[3]의 벌개라 하는 궁노의 집 앞 토담집으로 그녀를 옮겼다. 그러나 한상좌란 이가 동정심에 마의를 가져다 줘서 김씨는 7일을 버틸 수 있었고, 그제서야 원경왕후가 김씨의 아비와 화상으로 하여금 소에 실어 교하[4]의 집으로 보낸 것이 그 이야기의 끝이다.[5]

사실상 효빈은 살아 생전에 빈(嬪)은 커녕, 다른 후궁들처럼 옹주, 궁주 등의 품계를 받은 기록이 전혀 없다. 조선왕조실록에 '효순궁주'를 찾아볼 수 없으며 그저 '경녕군의 생모 김씨'라고만 나타나 있고 이후 단종 2년에 사망하여 궁에서 쌀과 관 등을 보내어 부조를 한 것이 기록의 전부이다. 숙종때 발행한 선원록에서도 '궁인 김씨'라고만 쓰였다. 다만 영조기 승정원 일기에 효순궁주의 묘산을 적간하기 위해 보내는 낭청에게 말을 지급해야한다는 기록이 있고 고종기의 승정원 일기에서는 효순궁주라 불리던 그녀를 효빈으로 올렸다는 기록이 더 있다. 이를 보아 세종의 후궁이자 화의군의 생모인 영빈 강씨같은 케이스일 수 있다.

2.2. 야사의 기록

실록과는 달리 야사에 의하면, 사실은 원경왕후가 아니라 양어머니인 신덕왕후 강씨의 친정에서 부리던 여종이었다고 한다. 강씨가 입궁하면서 김씨도 같이 입궁해 궁녀가 되었는데, 미모가 뛰어나서 신덕왕후가 태조의 앞에 내놓기를 꺼렸다고 한다. 다만 태종이 왕자 시절에 김씨와 하룻밤을 보내는 데 성공한 것은 사실. 다만 원경왕후는 시어머니인 신덕왕후를 싫어해서인지 김씨에게 잘했다(?)고 한다.

즉 태종은 아내를 음해하기 위해 김씨의 출신에서부터 얼어 죽이려 했다는 사실 등을 모두 지어낼 가능성이 높다. 이 때가 민무구, 민무질 4형제 등 외척 세력을 한참 때려잡던 때다 보니, 적절한 구실이 필요했던 것. 다만 김씨를 해하려 했던 책임을 원경왕후보다는 민씨 형제에게 전가했는데, 원경왕후가 했다고 해버리면 폐비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고 세자인 양녕대군의 입지도 위험해지기 때문이다.[6]

2.2.1. 반론

그런데 진실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으니, 실록에 따르면 즉위 초부터 태종이 다른 여인에게 승은을 내린것을 알고 원경왕후가 그 여인을 데려다 꾸중했다는 이유로 태종이 중궁전의 궁인들을 전부 교체했다는 기록도 있고, 그녀의 질투심을 못 견디고 태종이 침실을 옮겼다는 기록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원경왕후는 때때로 태종이 총애한 궁녀들을 심하게 벌주고 꾸짖기도 하였다.

이로 미뤄볼 때, 또한 태종 실록이 세종 13년에 편찬되었던 것을 통해, 효자였다던 아들인 세종이 왕으로 있던 시기에 만든 실록에 이러한 기록들이 실린 것을 통해 짐작해본다면 원경왕후의 행동이 더 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2.3. 추측

그렇다면 이런 정도의 사건을 왜 13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끄집어 냈냐고 생각이 들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선 나중에서야 알았거나 위에서 말했듯 민씨 가문 제거를 위해서 였을 수도 있지만, 경녕군이 태어난 시기, 실록에 언급된 임오년 중 가장 경녕군과 일치하는 1402년을 통해 추측해보면 사건이 발생했던 때가 태종과 아버지 태조 이성계 간의 대립이 있었던 조사의의 난이 벌어지고 있어 태종이 그 사건에 집중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설령 알게 되었다고 해도 태종으로선 어쩔 수 없었을 것이 조사의의 난만 해도 초유의 사건인데, 왕인 아들과 태상왕인 아버지 간의 군사 대립이 겨우 마무리가 된 상황에서 왕실에 또다른 갈등이 생길 수 있는, 또한 왕실 이미지를 망가뜨릴 수 있는 사건을 들추는 게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고, 좀 상황이 안정된 시기인 몇 년 뒤에야 이를 끄집어 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3. 대중 매체



[1]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12월 15일 무인 1번째기사. #[2] 정종실록 3권, 정종 2년 1월 28일 갑오 3번째기사 "(중략) 이때에 목인해(睦仁海)가 탔던 정안공 집의 말이 화살을 맞고 도망해 와서 스스로 제 집 마구간으로 들어갔다. 부인은 반드시 싸움에 패한 것이라 생각하고, 스스로 싸움터에 가서 공과 함께 죽으려 하여 걸어서 가니, 시녀 김씨(金氏) 등 다섯 사람이 만류하였으나 그만두게 할 수 없었다.(김씨(金氏)는 곧 경녕군(敬寧君)의 어머니이다.) 종 한기(韓奇) 등이 길을 가로 막아서 그만두게 하였다. (후략)"[3] 개경의 한 고을.[4] 현재의 파주시 관할 운정신도시, 교하동 일대[5] 태종 15년 12월 15일 무인 1번째기사,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 12월 17일 경진 1번째기사, 태종 15년 12월 23일 병술 3번째기사를 종합한 이야기이다.[6] 태종의 입장에서는 세자를 비롯해 아들을 넷이나 낳은 왕비를 내칠 필요가 없었다. 내친다면 새로운 외척이 등장해 그 쪽을 또 때려잡아야 하는것도 있지만, 네명의 아들들은 입지가 위태로워 지는건 당연하고 계비가 아들을 낳으면 암묵적으로 제거될 위험도 있기 때문. 한마디로 자식들에게 못할 짓이라는 거다. 사실 조선 왕조 역사상 왕자는 물론이고 왕의 자녀를 출산한 왕비들 중 폐비된 이는 일반 어염집에서도 내쳐질만한 기행들을 지속한 폐비 윤씨 단 한 명 뿐이다, 이것은 세종의 비인 소헌왕후의 친정인 심씨 집안을 숙청하면서도 정작 소헌왕후는 잘못한 게 없다며 폐출을 윤허하지 않은 점에서도 드러난다. 즉, 태종이 폐비 운운하기는 했지만 왕권을 흔들지 말라는 일종에 경고였을 뿐이다.[7] 사가 시절 남편 이방원이 덕실에게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눈치챈 민씨의 명으로 상의를 탈의하고(!) 뺨을 맞는 장면도 있다. 경녕군 출산은 민제 집안이 아니라 정안군저에서 '금녀'라는 상궁 출신 노비의 도움을 받은 것으로 처리되었다.[8] 신빈 신씨의 장자인 함녕군은 1402년생이기 때문에 잠저 시절 갈등요소로 써먹기가 힘들다. 경녕군 역시 실록에는 1402년생으로 기록되었지만 전주이씨대관에는 1395년생으로 나와 어떻게든 욱여넣을 수는 있었다. 참고로 신빈 신씨는 거의 공기 수준의 비중이다.[9] 이 무렵 태종이 처가를 완전히 개박살을 내버린지라 왕후 자리에 집착하던 자신을 되돌아보며 허탈감과 후회를 느껴 심정에 변화가 생기기도 했다.[10] 마지막으로 언급되는 장면은 후궁 김씨와 하룻밤을 보낸 태종이 나인 노씨(하지원 분)가 헛된 야망을 품지 않도록 타이르기 위해 '효빈이나 신빈 등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느냐'라고 묻는 대목. 이에 소빈 노씨는 둘 다 외롭게 지내고 있는 줄 안다고 답한다.[11] 경녕군의 생년을 실록의 1402년생으로 택한 첫 작품이다. 이전 작품들은 전부 사가시절부터 첩실이었던 것으로 나와 경녕군의 출생시기도 양녕 이후로 등장해 효령과 세종에게 이복형으로 등장했다.[12] 예전에 자신을 냉대한 것에 대한 앙심을 품었는지 중전을 향해 도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아무리 큰 패를 가지고 있었다지만 중전은 당시 세자의 생모이며, 내명부의 수장이다. 이 작품의 민씨가 성심은 착했어서 망정이지 용의 눈물의 민씨였으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