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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0d45,#94153e><colcolor=#f0ad73>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문정공(文貞公) 황정욱 黃廷彧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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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욱 초상 | |
출생 | 1532년 4월 26일 |
경기 영평현 (現 경기도 포천시 영중면 거사리) | |
사망 | 1607년 8월 14일(향년 76세)[1] |
한성부 노량진 교사[2] (現 서울특별시 동작구) | |
묘소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금승리 산7 |
봉호 |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 |
시호 | 문정(文貞) |
본관 | 장수 황씨 |
자 | 경문(景文) |
호 | 지천(芝川) |
부모 | 부친 - 황열(黃悅) 모친 - 양천 허씨 허용(許墉)의 딸 |
형제 | 형 - 황정식(黃廷式, 1529 ~ 1592) |
부인 | 정공부인 순창 조씨 - 조전(趙詮)의 딸 |
자녀 | 슬하 2남 2녀 장남 - 황혁(黃赫, 1551 ~ 1612) 차남 - 황석(黃奭, 1569 ~ 1621) 장녀 - 이욱(李郁)의 처 서녀 - 박유신(朴由新)의 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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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에 대제학, 예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영의정 황희의 후손이며, 황섬(黃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기준(黃起峻)이고, 아버지는 황열(黃悅)이며, 어머니는 양천 허씨로 허용(許墉)의 딸이다.2. 생애
1532년(중종 27) 황열과 앙천 허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558년 대과에 급제하였다. 사관이 되고, 이어 승문원 권지 ∙ 예문관 검열 · 봉교를 거쳐 시강원 설서에 제수되었다. 1561년(명종 16)에 호조좌랑에 승진하였고 곧 이어 예조로 개임되었으며 외직으로 나가 해미현감에 보임되었다가 성균관 직강으로 옮겼다. 1565년 사간원 헌납 겸 지제교 ·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지평을 지냈다. 당시 세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3]에서 명종이 병이 나자, 황정욱은 훌륭한 선비들을 뽑아 가까운 종친을 가르칠 것을 청했다. 그리고 1567년 황정욱이 모셨던 첫 번째 임금인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새로이 즉위하였다.1580년(선조 13) 진주목사를 거쳐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그 뒤 승지로 올라 1584년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4] 해결이라는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왔다. 그 공으로 동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호조판서로 승진하였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이듬해 종계변무를 해결한 공으로 유홍과 윤근수와 함께 광국공신 1등이 되어 장계부원군(長溪府院君)에 책봉되면서 대제학이 되었다. 이어서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91년(선조 24) 봄에는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어느 날 조연할 때 통신사 황윤길의 밀장(비밀히 올린 장계)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서신도 함께 전달하였는데 명을 침범하겠다는 말이 분명하게 있었다. 이에 선조가 여러 신하들에게 그 말을 인용하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물어보니, 대사헌 윤두수가 말하기를,
“전하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대국을 섬겨왔으니, 오늘날의 일을 중국에 주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고, 황정욱이 그 뒤를 이어 말하기를,
“윤두수의 말이 옳습니다. 신도 또한 마땅히 중국에 알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했다.
그 훗날에 임금께서 또 일본에 대한 일을 물으시면서
“조정의 논의는 어떻고 경의 견해는 어떠한가?”고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이는 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린 일이니, 전에 요청한 바에 따라 중국 조정에 상달(上達)하고 군대를 정비하고 계칙하여 날마다 새로운 각오로 변란을 기다려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경의 말이 옳다. 부디 힘쓰도록 하라.” 고 하였다.
국조인물역고
“조정의 논의는 어떻고 경의 견해는 어떠한가?”고 물으니, 공이 대답하기를,
“이는 나라의 존망(存亡)이 달린 일이니, 전에 요청한 바에 따라 중국 조정에 상달(上達)하고 군대를 정비하고 계칙하여 날마다 새로운 각오로 변란을 기다려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임금께서
“경의 말이 옳다. 부디 힘쓰도록 하라.” 고 하였다.
국조인물역고
곧 한성과 지방의 잡색 군병들을 가려 선발하여 등급을 나누고 별도로 기록하여 갑작스러운 사태에 편하게 쓸 수 있게 하였는데, 원균과 이순신같은 사람은 곤수(평안도, 함길도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를 통틀어 이르던 말)의 직임에 적합한 사람인 까닭에 대신과 협의하여 차서(次序)에 관계없이 발탁 기용했다고 한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4월 29일, 선조는 윤두수에게 자신의 어가를 호종할 것을 명하고 또한 한준(韓準)과 이개(李墍)에게는 순화군을 받들게 하여 함경북도로 나가도록 명했다. 하지만 다음날 황정욱이 아들 황혁과 함께 순화군[5]을 모시기를 직접 청하자 황정욱과 황혁 부자를 한준을 대신하게 하여 호소사(號召使)로 삼고 함경북도로 보내 의병을 모집하도록 했다. 하지만 회령에 들어갔다가 국경인의 모반으로 왕자와 함께 포로가 되어 안변의 토굴에 감금되었다.[6] 이때 가토 기요마사로부터 선조에게 보내는 항복 권유문을 쓰도록 강요받았다. 처음에는 이것을 거절하였으나, 그의 손자와 왕자를 죽이겠다는 위협을 받자 아들 황혁이 대신 썼다.
한편, 그는 항복 권유문이 거짓임을 밝히는 또 하나의 글을 썼으나 선조에게 전달되지 못하였다. 이듬해 왜군이 부산으로 철수할 때 석방되었으나 항복 권유문을 기초한 문제는 동서인 간의 분쟁을 초래하였고 , 이후 정권을 장악한 동인의 집요한 공격을 받아 길주에 유배되었다. 1597년 왕의 특명으로 석방되었으나 복관되지 못한 채 죽었다. 1624년 광국공신으로 다시 복권되었다.
3. 여담
황정욱은 문장 · 시 · 서예에서 뛰어났는데 특히 시는 “크고 넓어서 나약한 시들을 모두 씻어 버린 듯하다”, “마음껏 내놓아 종횡하는 듯하다”, “갑자기 우뚝 솟은 듯하다”는 등 시의 풍격이 웅장하고 훌륭한 것으로 평가된다. 호음 정사룡, 소재 노수신과 함께 호 · 소 · 지(湖 · 蘇 · 芝)라 하여 관각문학(館閣文學)의 삼걸로 지칭된다. 송나라 ‘강서시파’의 황정견(黃庭堅)과 진사도(陳師道)의 시를 배워 ‘해동강서시파’의 한 시인으로 문학사에서 평가된다. 저서로 시문집 ≪지천집≫이 있다.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황정욱의 <송심공직충겸부춘천>을 역대 칠언율시 중에서 가장 훌륭한 시 3수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차이백생순인영옥당소도>이란 시 역시 대표적인 작품으로서 여러 시선집에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