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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09:07:49

해상봉쇄

해상 봉쇄에서 넘어옴
<colcolor=#FFF><colbgcolor=#2743d2> 해군 전략
해군의 목표 제해권
해군력의 운용 현존 함대 | 통상 파괴 | 함대결전 | 기지 타격
상세 사례 진입차단·지역거부 | 점감 요격 | 해상 봉쇄

海上封鎖 / Naval blockade

1. 정의2. 역사
2.1. 근대2.2. 현대
3. 현대에 해상 봉쇄가 가능한 경우4. 창작물에서의 묘사

1. 정의

해상봉쇄해군력을 동원하여 적선 또는 상선의 통행을 차단하는 군사행위를 이른다. 타국의 해상 무역을 방해하거나 보급로를 끊거나 군함의 이동을 제한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대규모의 경제제재 카드이자 군사작전이며, 전시 또는 준전시 상황에서 실시된다. 먼 바다가 아니라 항만 연안에서 봉쇄할 경우에는 해안봉쇄 또는 연안봉쇄라 칭한다.

영어로는 'naval blockade'라 하며, 한국어의 경우 봉쇄라는 단어의 2. 번 의미에 '해군력으로 해상 교통을 차단하는 행위'라는 뜻이 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참조)

2. 역사

파일:noryang_battle_map.jpg
1598년 12월 15일, 순천왜성 고니시 유키나가수군의 퇴로를 봉쇄하는 이순신의 함대.

2.1. 근대

독일 제국에 대한 영국의 해상봉쇄

1. 프랑스 혁명 전쟁 초기였던 1793년 2월에 프랑스 제1공화국영국선전포고를 하면서[1] 영국 해군의 막강한 해군력으로 프랑스 연안 도시 곳곳을 해상 봉쇄하면서 1802년 아미앵 조약으로 일시평화가 될때까지 1차 봉쇄전을 펼쳤고 1803년 조약 파기로 다시 개전하여 최종적으로 나폴레옹이 몰락한 1815년 6월까지 2차 봉쇄전을 펼쳤다.

2. 미국남북 전쟁에서 연방은 남부에 대한 전쟁 전략으로 아나콘다 계획을 실행했는데 이것은 남부연합의 모든 해안선을 해상봉쇄하고 미시시피 강제해권을 장악하여 남부연합을 양분하려는 의도였다.

3. 1차 대전 시기 영국 해군성은 스캐퍼 플로를 비롯한 브리튼 섬 동부 해안 곳곳의 해군기지에 당시 세계 최대, 최강의 함대였던 대함대를 배치했고, 독일 제국은 대양함대로 대표되는 세계 2위의 해군력을 지니고도 전쟁 기간 대부분을 현존함대 전략을 펼치며 지내야 했다. 이로 인해 독일의 해상 무역은 완전히 봉쇄되었고, 독일 내의 식량 자원이 고갈됨에 따라 영국 해군의 해상 봉쇄는 ‘순무의 겨울’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파일:무제한 잠수함 작전.png
무제한 잠수함 작전 당시 U보트로 인한 선박 격침 지역.
4.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섬나라로서 석탄을 제외한 모든 물자를 수입해야 하는 영국의 해상통상로를 절단해 항복을 받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육군국인 독일의 해상전력은 영국 해군을 능가할 수 없었으며, 제해권을 장악하기보다는 고속전함순양함으로 해상을 휘젓거나 U보트수송선을 걸리는 족족 파괴하여 통상로를 파괴하고자 하였다.

2.2. 현대

3. 현대에 해상 봉쇄가 가능한 경우

대만은 유사시에 중국 해군에 의한 해상 봉쇄 가능성을 잠재적 위협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데, 대만의 경우 하나의 중국 원칙 때문에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와 단교한 상태라 위험이 더 커지게 된 것이다. 때문에 대만은 중국 쪽 해안선에 촘촘하게 레이더를 깔아 놓고, 미국의 개입이 있을 때까지 효과적으로 상륙을 저지하는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있다.

4. 창작물에서의 묘사

반면 세계 최강급의 해상전력이 몇 번이고 정면승부를 겨룬 태평양 전쟁에서는 일본이 잠수함에 의한 보급선 절단을 전혀 신경쓰지 않아서 그다지 묘사가 없다. 오히려 미해군에 의해 일본의 각지가 봉쇄되어, 고속 구축함을 이용해 소량의 물자를 수송하는 이른바 '쥐수송'이 시행되었을 정도. 일본이 이러한 단점을 극복했다는 설정의 가공전기에서는 종종 미해군의 보급선을 절단하려 들거나, 아예 인도양에 연합함대 주력을 배치해 영국의 해상통상을 절단하여 독일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거나 한다. 반대로 미해군이 더 적극적으로 해상봉쇄를 했다는 설정의 가공전기도 있는데, 전략폭격도 필요없이 일본 전체가 기아선으로 굴러떨어져 항복했기 때문에 역으로 인명손실도 산업시설 파괴도 없이 국력이 잔류하여 전후 세계에서 높은 가치를 얻게 되었다는 단편이다.


[1] 영국은 대 프랑스동맹의 핵심국이었으나 아마도 거의 유일하게 프랑스에게 먼저 선전포고를 하진 않은 국가였다. 이것은 혁명 전 체결된 프랑스 왕국과의 무역조약을 통해 저관세로 자국 공산품을 프랑스에 반입할 수 있게 되면서 상업적인 이익을 누렸던 실리적인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혁명 속에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왕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면서 혁명전쟁이 개전될 때와 곧이어 루이 16세가 폐위되고 반년후 처형될 때도 영국은 중립을 지켰었다.왕의 처형은 영국도 해본 적이 있는지라[2] 우크라이나는 삼면이 육지기 때문에 흑해 차단은 물론 안 하는 것보다는 유효했지만 결국 육로로 외부 지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부수적 효과만 있었다. 유조선이 항구로 들어올 수 없어 연료 부족 문제가 심하다고 한다.#[3] 사실 군사쪽보다는 경제적인 수출-수입 문제가 더 심각하다.실질적으로 내륙국이 되어버린거나 마찬가지라. 그나마 접경지인 도나우강이나 루마니아 연안등을 어느정도 이용할수 있기에 해상봉쇄가 완전하지는 않다[4] 정식 정부 승인을 받지못해 반군이지, 사실 수도를 포함한 주요 지역을 실질적으로 점령중이며, 정규군에 준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다[5] 홍해봉쇄 이후 수에즈 물동량을 절반으로 감소시켰고, 이걸 풀기 위한 미국-유럽의 군사력을 이용한 봉쇄해재 작전도 사실상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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