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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3:01:36

항우의 18제후왕 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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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우(항적)[1](項羽)
진(秦)나라가 실정하자 진섭(陳涉)이 먼저 일어났다. 이어서 천하의 호걸들이 벌떼처럼 그 뒤를 따라 서로 다투었으니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항우는 한 치의 영토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진나라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서 들판에서 일어나 세력을 잡고 3년 만에 다섯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멸했다. 그는 천하를 나누어 휘하의 장수들을 왕과 후에 봉했으며, 모든 정령은 그로부터 나와 스스로를 패왕이라 칭했으니, 비록 그의 권세가 끝까지 가지는 못했으나 그와 같은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2]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

1. 개요2. 배경3. 제후 분봉4. 고찰5. 문제점6. 결과7. 기타

1. 개요

기원전 206년 음력 2월, 당시 중국의 패권을 장악했던 초(楚)나라항우가 취한 일련의 분봉(分封) 조치.

2. 배경

동아시아사의 정치 형태는 중앙집권지방분권을 왔다갔다하며 발전해 왔으며, 고대 중국은 역사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형태의 정치 집단의 출현을 기록하고 있다. 지방 분권 제도는 봉건제도, 반대로 중앙 집권 제도는 군현제 등을 들 수 있다.

고대 주나라(周)는 기원전 11세기 무렵의 고대 국가로 봉건 국가였다. 왕권이 약하고 지방에 상대적으로 큰 권한이 있었다. 심지어 전대 왕조였던 상나라의 유민들에게 송(宋)을, 하나라 유민들에게 기(杞)를, 신농의 후손에게 초(焦)를, 황제의 후손에게 축을, 의 후손에게 계를, 의 후손을 진(陳)을 분봉해주었다.

주나라는 천자의 혈육을 제후로 삼거나 아니면 혼인 관계를 맺어 봉건 제도를 완성했다. 각 제후는 경쟁적으로 바깥으로 세를 확장해 갔다. 이를 통해 고대 중국은 보다 빠르게 확장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를 거듭하며 제후들과 주 왕실의 혈연 관계는 멀어졌고, 점차 이민족들도 세를 갖추고 국가 형태를 갖추게 되면서 중국을 향한 침입도 늘었다. 이를 막지 못한 주 왕실은 동쪽으로 수도를 옮겨야 했는데 이를 원래의 주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동주라고 부른다. 주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제후들은 이제 서로 세력 확장과 분쟁을 벌였으니 이것이 춘추전국시대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초나라처럼 전혀 다른 문명이, 주 제후국과 상관없이 중국사에 개입한 나라들도 있었다.[3]

그런데 기원전 350년, 진나라의 군주 효공(孝公)의 재위 기간에 법가(法家) 사상가인 재상 상앙(商鞅)이 나라 안의 작은 촌락을 41개의 현으로 정리하면서 군현제도의 기틀을 만들었다.[4] 군현제는 황제가 관리를 파견하는 제도로 국토는 제후가 아닌 황제의 것이다.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始皇帝)는 이사(李斯)의 계책을 수용해 천하를 36개의 군으로 나누고 중앙에서 관리를 파견했다.

하지만, 진나라는 지나친 법가 정책과 잦은 토목공사, 대외원정, 정비되지 않은 수도 지방간 교통 등으로 인해 지방의 힘있는 자들의 반발을 불렀다. 진시황 사후 호해가 폭정을 계속하자 진승·오광의 난을 계기로 조(趙)나라 · 연(燕)나라 · 초(楚)나라 · 위(魏)나라 · 제(齊)나라가 부활했다. 명장 항우는 초나라에서 몸을 일으켜 정국을 주도하게 된다. 항우는 초나라의 장수로 왕은 아니었지만 가는 곳마다 승리해 차기 황제로 누구나 생각했다.

싸움을 거듭한 끝에 결국 진나라 명장 장한(章邯)마저 거록대전에서 항우에게 항복하고, 진나라의 수도 함양은 패공(沛公) 유방에게 떨어져 진나라는 멸망했다. 거록대전의 승리로 거의 모든 중국의 제후들을 복종시킨 항우는 신안대학살 이후 홍문연에서 힘으로 유방을 굴복시키고 진나라의 잔재를 쓸어버렸다.

항우는 초 회왕을 의제(義帝)로 높이고 군현제로 정비되었던 통일 진나라의 영토를 주나라 때처럼 제후들에게 분봉했는데, 이 과정에서 항우 자신도 서초(西楚)라는 제후국을 스스로 분봉받았다. 이제 중국은 지방 분권 정치 형태로 돌아갔다.

3. 제후 분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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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초(後楚)의 제후국 목록[5]
국명 국왕 수도 지역
서초(西楚) 항우 팽성 강소성, 안휘성 북부, 절강성 북부, 하남성 동남부
(漢) 유방 남정 → 약양 촉군, 파군, 한중군 (사천성, 중경, 섬서성 남부)
옹(雍) 장한 폐구 북지군, 농서군, 내사 서부(우부풍) (섬서성 중부, 감숙성 동부)
새(塞) 사마흔 약양 내사 동부(경조윤, 좌풍익) (섬서성 북동부)
적(翟) 동예 고노 상군 (섬서성 북부)
형산(衡山) 오예 주성 형산군 (호북성 동부, 강서성)
(韓) 한성 양책 영천군 (하남성 서남부)
대(代) 조헐 대군, 태원군 (산서성 북부, 하북성 서남부)
하남(河南) 신양 낙양 삼천군 (하남성 서북부)
항산(恒山) 장이 양국 하북성 중부
은(殷) 사마앙 조가 하내군 (하남성 북부, 하북성 남부)
서위(西魏) 위표 평양 하동군, 상당군 (산서성 남부)
구강(九江) 영포 구강군, 여강군 (안휘성 중부 및 남부, 강서성)
임강(臨江) 공오 강릉 남군, 검중군, 장사군 (호북성 서부, 호남성 북부)
(燕) 장도 계성 상곡군, 어양군, 광양군 (하북성 북부, 북경, 천진)
요동(遼東) 한광 우북평군, 요서군, 요동군 (하북성 동부, 요녕성 남부)
(齊) 전도전영 임치 임치군, 낭야군 (산동성 서부 및 중부)
교동(膠東) 전시 즉묵 교동군 (산동성 동부)
제북(濟北) 전안 박양 제북군 (산동성 북부)

(秦) 영역

(趙) 영역

(魏) 영역

(韓) 영역

(齊) 영역

(楚) 영역

(燕) 영역

그 밖에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는 남피(南皮) 주변의 3개 현을 봉읍으로 받았고, 오예의 부장 매현(梅鋗)은 10만 호의 제후가 되었다.

4. 고찰

항우의 제후왕 분봉은 어느 정도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한 정책이다. 당시 기준에서 진나라의 군현제는 심각하게 붕괴되어 '실패한 정책'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혹독한 진나라의 정책이라는 점이 선입견으로 작용해서 좋게 보이기도 힘든 마당에 진나라가 망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진을 멸망시킨 신생 초나라는 진의 군현제를 유지할 의지가 없었거니와, 실행할 수 있는 능력조차도 없었다. 이미 신생 초나라 외에 각지에 여러 세력이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항우가 진나라의 숨통을 끊어놔 중국 최고 패권자가 됨으로써 그가 결정권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전란으로 인해 중원 각지에 신생 육국을 비롯한 군벌들이 이미 자리잡았기 때문에 항우가 아무리 군신패왕으로서 이름을 떨친다고 한들 이제 막 일어선 초나라의 국력으로 타국을 모두 제압해 병탄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런 판국에 초나라가 군현제를 실행하면 중원을 통째로 차지한다는 뜻이니 18로 제후왕 분봉 이상의 갈등을 불러왔을 것이다.

이후 천하를 통일한 한漢에서도 중앙의 경제력과 통제력이 크게 성장한 한무제 시대에 가서야 봉건제의 잔재를 털어낼 수 있었다. 이것 또한 유방이 한신과 팽월 같은 지방 세력을 숙청하고 반란을 진압했기 때문에(그리고 뒤이어 여후도 공신 세력을 숙청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11] 또한 장량의 젓가락 설교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에 영웅들을 따른 부하들은 모두들 '왕' 혹은 '제후' 정도는 바라면서 공적을 세웠던 것이다. 중앙의 경제적 능력이 미약한 당시로서는 그런 부하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별 수 없이 땅을 떼어주고 나라로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다.[12]

따라서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여건을 고려하면 봉건제로의 회귀는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항우에게 다른 대안을 제시할 능력과 실행할 의지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심지어 이후 등장한 유방마저 군현제를 완전히 쓸 수가 없어 적당히 혼합한 형태인 군국제를 써야 했을 정도였다. 즉 봉건제 회귀는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한 조치였다.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 것은 항우를 따라온 제후 연합군의 장수들이 본국과 대립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각 나라들이 원군을 주고 장수를 보낸 목적은 진나라의 예봉을 어느 정도 꺾어놓고 자기 나라의 위세를 크게 떨쳐 자립할 수 있게 되는 정도면 충분했다. 그러나 원군을 이끌고 온 장수들은 항우와 같이 싸우면서 진나라를 아예 멸망시켜버렸고, 그 포상으로 '분봉'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제나라로 가면 문제가 더 심각했는데, 여기서는 아예 조나라를 구원할 생각이 없었음에도[13] 장군 전도가 제멋대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병했던 것이다.

이런 당시 상황을 바라보면 결국 분봉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의 관심과 기대가 모두 한 가지로 쏠려 있었으니, 그들이 바라는 보답을 해주는 것 또한 우두머리의 역할임에는 분명했다. 그러나 문제는, 분봉 과정에서 사람들의 어그로를 잔뜩 끌어버렸다는 것이다. 결국 혼란의 씨앗만 잉태한 셈이었다.

요약하자면 제후왕 분봉이라는 방식 자체는 문제가 없었으나, 그 것을 시행하는 항우의 일처리가 엉망진창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5. 문제점

천하의 질서를 다시 잡기 위해서 항우가 분봉을 고려해야 할 대상은 다음과 같았다.

또한 재건에 성공한 육국과 멸망한 진나라의 사정도 복잡했다.

항우는 이들을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식으로 항우가 아닌 그 누구라도 분봉에 애먹을 정도로 상황이 복잡해진 건, 진승의 난을 시점으로 각지에서 여러 인물들이 반란을 일으켜 중구난방으로 난립했기 때문이었다.[22] 특히 아무런 지위도 없던 진승이 대뜸 왕이 되니 너도나도 왕이 되겠다고 나서는 통에 진승의 부하였던 무신이 진승의 명을 받아 조나라 지역을 평정한 후 조나라 왕을 칭하는가 하면, 또 그 부하인 한광이 무신의 명을 받아 연나라 지역을 평정한 뒤 연나라 왕이라 칭하는 등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유방은 항우로 인해 반역하지 않는 신하가 바보 소리 듣게 되었다 말했지만, 이미 적당히 세력있으면 반역하는 시대가 열린 셈이었다.

항우가 내린 결론은 사실 어느 정도는 자기 세력을 끌어들이고자 하는 이기적인 목적이 있었고, 또한 어느 정도는 타협적인 것이었다. 진나라 멸망에 가장 큰 공훈을 한 건 자신이고 항우 자신이 분봉의 결정권이 있다는 것은 당시 전 중국에서 넘버 원은 항우고, 항우의 힘이 전 중국에서 가장 세다고는 하나 나머지 군벌들을 압도할 수준은 아닌 만큼 어느 정도는 대우해줘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항우 자신의 부하들을 어느 정도 챙겨주면서, 동시에 과거 정통 육국의 후예에 대해서는 제거하지는 않았지만 본거지에서 쫓아내고 한지로 몰아내며 영토를 깎아내리는 조치를 취했다. 정통성이 없고 자신에게 공적도 세우지 않은 군소 군벌들은 그냥 무시했다.

하지만 이는 방향성이 불분명한 결론이었다. 확실하게 명분론에 따라서 옛 춘추전국시대의 봉건제로 복귀하는 것도 아니며, 실리론에 따라서 항우의 부하들이 전국을 지배하겠다고 명백하게 선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모습을 보면 춘추시대의 체제(허수아비 천자+제후들의 난립+제후들 중 제일 힘있는 존재가 패자가 됨)와 비슷하기는 한데 그렇다고 항우가 회맹 같은 것을 연 것도 아니요 명목상으로나마 초의제를 잘 섬기는 척을 한 것도 아니다. 춘추오패들과 항우가 같은 점이라면 힘이 있다는 것 정도였는데,[23] 항우는 스스로 패왕이라 칭했지만 정작 그 유래가 된 '패자'의 자격과는 완벽하게 정반대였다. 패자(覇者)는 기본적으로 존왕양이를 내세우게 되어 있다. 초의제를 시해하여 존왕을 버렸다.

그렇다고 이미 각지에 토착 군벌 세력이 자리잡은 현실을 인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봉건제로 회귀하자면 초의제를 겉으로나마 잘 섬겨야 하는데 항우 성질머리에서는 될턱도 없고 다른 왕들도 겉으로라도 잘 섬길 거라고 기대하기는 힘들고[24] 항우가 제 부하들로만 전국의 지배를 확실히 하자니 앞에서도 보았듯 항우의 군세가 전국을 장악할 정도가 아니니 그것도 불가능했다.

분봉 조치 자체의 영향을 본다면, 분봉 조치는 결과적으로 엉망이었다. 광무 대치 당시 유방의 비난에서도 언급되는 부분이지만 항우가 제후들을 분봉한 기준은 순전히 자신과 친하거나 자기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이었다. 물론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을 더 챙겨주는 게 당연하고, 항우 자신도 어느 정도 세력을 구축할 필요성은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들을 챙겨주는 과정에서 정통성 있는 육국의 제후들은 영토가 반토막나는 등의 피해를 입었고, 실질적인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다. 그렇다고 부하 장수들이 감복해서 항우에게 완전한 충성을 바칠 정도로 통 크게 쏴줬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결국 이는 처음에는 잠재적인 불만을, 나중에는 극심한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다.

물론 당시 상황이 육국 후예, 중소군벌, 자신의 부하 등등 매우매우 구성요소가 다양한 이들을 분봉시켜야 하는 만큼 모두가 만족할 만큼 분봉해 준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으나 하다못해 자기 부하들조차 불만을 가질 정도로 분봉해놨다는 건[25] 항우의 분봉 조치가 대실패임을 보여준다.

결국 이런 문제점이 겹치면서 모든 제후가 항우에게 불만을 품게 된다.

6. 결과

결과적으로 항우의 분봉은 천하의 전란을 단 1년도 막지 못했고, 불만을 품은 각지의 제후들은 항우의 봉왕들이 자신들의 봉지에 채 도착하기도 전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항량 사후부터 사실상 적대관계였던 제나라 전영 계열은 제외. 회왕에게 붙은 배신자들 또한 논외. 한때 의형제였고 공도 세운 유방과 그 라인도 홍문연으로 정적이 되었으니 논외. 이렇게 시작부터 가지치기에 견제만 하다보니, 정작 분봉된 사람들은 대부분 급이 떨어지는 인물들 뿐이었으며,[29] 하나같이 소외된 쪽을 상대로 땅을 지켜낼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당연히 봉토를 받은 자들과 이들과의 분쟁으로 이어졌고, 심지어 이런 사람들이 본래는 군신관계였던 경우가 많아서 하극상이 수시로 벌어지며 명분 등의 가치는 땅에 떨어졌다. 유방은 항우 때문에 반란하지 않는 신하가 오히려 멍청한 놈 소리를 듣는 세상이 되어버렸다고 평했다.

제일 먼저 파촉에 처박혔던 유방은 항우가 초나라로 떠나자마자 뛰쳐나와 관중을 장악해버렸다. 관중의 백성들이 이에 호응하여 진나라의 영역을 쉽게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항우 본인이 진 영토를 다스린 것도 아니었고 진의 구 왕가인 영성 조씨를 내세운 것도 아니었으니 당연히 금방 털릴 수밖에. 항우가 이에 미처 대처하기도 전에 제나라의 전영 또한 동시에 항우에 반기를 들면서 각지에 쑥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항우를 편들어 제나라의 왕 자리를 인정받은 전도와 전안은 사실 항우 편에 선 이유부터가 전담 일족을 반대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었고, 전영과 원래부터 사이가 나쁜 항우는 이들을 후원하여 전영을 견제하려는 게 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담 일족의 힘은 항우가 예상한 것을 넘는 것이었다. 전영은 먼저 제나라 왕으로 부임하기 직전인 전도를 두들겨서 초나라로 쫓아버리고,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겁을 먹어 달아난 전시까지 쫓아서 살해한 뒤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되었다. 더 나아가 서쪽으로 진군해 제북왕 전안까지 살해해버린 뒤, 항우에 대해 불만이 누구보다 많은 팽월을 회유하여 양나라 땅에서 헬게이트를 열도록 사주했는데, 초한대전 당시 팽월이 항우를 엄청나게 괴롭혔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대재앙이었다.[30]

또한 장이는 왕이 되었는데 자신은 왕이 되지 못해 불만이 큰 진여도 전영의 지원을 받아 장이를 날려버렸고, 장이는 이 때문에 유방에게 합류하며 항우가 세운 천하는 개판 5분 전의 상황이 되었다. 항우는 전영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 출진하여 전영을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지나친 학살로 제나라 전역에서 발이 묶이게 된다. 덤으로 애매한 입장이었던 형산왕 오예도 항우에게 다짜고짜 땅을 빼앗기는 바람에 북월 측도 마찬가지로 항우의 적이 되었다. 그리고 이 틈을 노리지 않고 한신 등을 앞세워서 동진해온 유방은 초나라의 핵심지역인 팽성까지 장악해버렸다.

항우가 꽂아넣은 사람들은 유방의 진격에 싸우려는 시늉도 하지 않고 항복하기 바빴으며, 항타와 용저 등이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지만 이들만으로는 언발에 오줌누기 수준이었다. 그전까지 각종 악행의 행동대장이던 영포도 당장 유방에게 붙지만 않았을 뿐 마치 항우가 알아서 망하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팽성이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요지부동이었다. 유방을 견제하기 위해 파촉에 처박아 놓고 유방을 감시하기 위해 삼진을 설치했지만, 정작 유방이 동진할 당시 삼진은 놀라우리만큼 유방의 진격을 막는 데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물론 항우는 이후 팽성대전에서 한나라 군대를 대파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미 기반을 확실하게 굳혀놓은[31] 한군은 한두 번의 패배로 괴멸되지 않았다. 관중도 관중이지만 오창 등의 곡창지대가 끝내 유방에게 넘어가버렸기 때문.

초한대전 중 역이기의 제안을 논파한 장량으로 인해 봉건제와 군현제도 사이에서 길을 찾은 유방은, 대전 이후 군·국제도 하에서 위협적인 이성왕들을 숙청하여 개국 초기의 위협을 분쇄하고 군현제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남은 동성왕들의 위협은 한경제 시절 오초7국의 난에서 분쇄되었고, 한무제는 주보언(主父偃)의 제안을 바탕으로 추은의 영(推恩-令)을 내려 제후들의 세력에 결정적인 최후의 타격을 날렸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로 인해 전한(前漢)은 마침내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구축할 수 있게 되었고, 문경지치로 얻은 경제적 능력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여 서방의 로마 제국과 맞먹는 대제국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군현제도는 이후 2000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중국을 지탱하는 거대한 하나의 축으로 남게 되었다.

7. 기타

원나라 시대에 편찬된 삼국지평화, 원대 잡극(雜劇) 호뢰관삼전여포(虎牢關三戰呂布), 그리고 명나라 초기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에서 반동탁 연합군 인사들을 18로 제후로 칭하는데 위의 18제후왕에서 모티브를 따온걸로 추정된다.


[1] "우"는 항우의 자로, 항우의 본명은 항적이다.[2] 실제로 제후를 봉하는 일은 오직 천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전국시대의 군주들도 기껏해야 군에 봉하는 것이 고작이었다.(물론 자기 외의 제후를 봉하는 것이 위험함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후에도 어떤 권력자도 자기가 제후를 봉하지는 못했다. 설령 스스로 제후가 된다 한들 그것 역시도 천자의 이름을 빌린 것으로 그나마 예외적으로 유비 정도가 스스로 왕을 칭하긴 했다. 그나마도 당연히 한나라에서 독립된 제후국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한나라라는 틀 안에 존재하는 제후국이다.[3] 이런 국가로는 초나라 외에 오나라, 월나라 등이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인해서 다른 나라들은 아무리 그래도 왕호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런 나라들은 왕호를 사용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타국에서는 이들을 낮게 보기도 했다.[4] 물론 이런 생각을 상앙 하나만 생각한 것은 아니고 초나라, 진나라 등에서 이미 비슷한 제도를 시행했었다.[5] 명목상이고 실질적으로는 독립세력이며, 후초의황제항우의 허수아비 황제였다. 더구나 항우는 '제후 분봉'이라는 정치적 퍼포먼스를 벌인 후 의황제를 시해했다.[6] 한왕은 한중의 한수(漢水)에서 딴 왕호다.[7] 항우의 부하이며 오현(吳縣)의 현령 출신이라 한다. 유방이 장한을 격파하고 폐구에서 포위한 후 이를 막기 위해 항우가 왕으로 임명했다. 한왕 성은 이쯤 죽었다.[8] 제나라의 마지막 왕 전건(田建)의 손자.[9] 삼국지에 나오는 육안[10] 그러나 위치가 요서 지역의 우북평군에 속하고 연나라 수도 계와 너무나 가깝기 때문에 《요동군과 현도군 연구》에서는 무종현이 요동국의 수도가 아니라고 주장한다.[11] 그럼에도 기껏해야 이성왕을 동성왕으로 대체한 것이 전부일 뿐 한경제 시절 오초7국의 난이 벌어지기 전까지도 한나라 내에 존재하는 여러 동성제후국은 서로 '다른 나라'로 취급되었고 동성제후들의 인사권도 승상 빼면 다 자기가 직접 뽑을 수 있을 정도로 권력이 주어져 있었다.[12] 이는 또다른 의미로 필연적인 것이 당시 항우는 진나라의 숨통을 끊어놓았다고 하나 그것일 뿐 진나라 전역을 점령한 것이 아니었다. 자기가 진나라 전역을 점령했다면 모르겠는데 각지에서 일어난 군웅들이 여기저기서 자리잡고 있으니 이들에게 봉토를 주기 싫으면 일단 이들에게 전쟁을 걸어 뿌리를 뽑기부터 해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13] 재상 전영(田榮)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원군 출정에 계속 반대하고 있었다.[14] 항우 본인부터 반진전쟁 때는 초나라 부활을 명분으로 내세워 거병해놓고 정작 초나라 왕실의 정통 후손이기에 옹립된 회왕 웅심에겐 명목상 천자 직함만 줬을 뿐, 끝까지 바지사장 취급만 하다가 그냥 죽여버리고 자기가 실질적인 초왕이 되어 버렸으니 육국의 부흥이라는 명분은 이미 허울뿐이었던 것이다.[15] 애초 반란을 일으키며 내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도 결국은 육국을 그대로 인정하지만은 않겠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물론 진승은 위구를 위나라 왕이 되는 걸 허락하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었는지 진승의 부하인 무신이 조나라 왕을 칭하고 또 그 부하인 한광이 연나라 왕을 칭하는 등 난장판이었다.[16] 그렇다고 사정이 서로 다 같던건 아니다. 대부분은 실권자 따로 명목상 군주 따로였고 특히 위나라는 그 실권자가 왕이 될 수도 있었다. 본인이 거절했지만. 제나라의 경우 그나마 실권자도 군주도 그래도 같은 전씨였다.[17] 조의제문에서도 온갖 욕을 먹은 항우와는 달리 항량은 이 일로 정반대로 호평만 했다.[18] 식읍 같은 방법도 있었겠지만 식읍도 어디까지나 중앙정부가 어쨌든 전국의 주인이 될 권위가 있어야 택할 방법이고 전국에 군웅들이 들어찬 상황에서 식읍 같은건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이 점에서는 유럽 중세의 봉건제와 유사한데 봉건제라 하면 군주가 신하들에게 땅을 하사하는 것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상은 오히려 신하가 차지한 땅의 소유를 군주가 특정 조건을 내걸고 인정한 것에 가까웠다. 이 점에서 제후왕들 중 이미 특정 지역에 알박아놓고 분봉 형식으로 소유를 인정받은 경우가 많은 것이 중세 유럽의 봉건제와 닮았다.[19] 즉위하며 스스로의 작위를 낮췄다. 그래서 이세황제라 불리는 호해와는 달리 삼세황제가 아닌 것이다.[20] 비록 웅심의 가계가 불분명하다고는 하나 일단 항연의 친족인 항량이 세운 만큼 권위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21] 그러다 보니 위표는 그래도 나름 큼직한 땅을 받긴 했다. 초의제는 명목상 천자에 가깝긴 했지만 정작 자기 직할 영토를 못 받았고 제나라의 전영, 한나라의 한성, 연나라의 한광, 조나라의 조헐은 다들 항우에게 도움 된게 없어서 한광과 조헐은 영토의 반이 뜯겼고 그나마도 변변찮은 땅만 건사했으며 전영과 한성은 그마저도 없었다. 반면 위표는 땅은 좀 뜯기긴 했지만 그래도 거의 대부분 건사했다.[22] 반대로 유방은 이미 분봉할 당시 천하의 제후들을 어느정도 제압해놨고 가장 강력한 제후 항우마저 죽은지라 제후들이 반항하기가 좀 더 어려웠다.[23] 춘추오패들도 힘이 있기는 했지만 남의 나라를 막 분봉해주고 할 정도의 힘은 아니었다.[24] 가장 큰 문제는 초나라가 은근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는 것이다. 초인목후이관에서 보듯 초나라 사람은 무시당하기도 했다. 비록 진나라 멸망 과정에서 초나라 부활을 외친 진승, 초의제를 옹립한 항량, 장한을 깨부순 항우, 진왕의 항복을 받아낸 유방 등 초나라 출신들이 큰 활약을 해냈지만 그 사고가 한순간에 뒤집히긴 힘들 테니 초나라 황제를 명목상으로라도 자기네 군주로 받들지는 의문이다.[25] 더 심각한 문제는 위에 있는 왕들 항목 중 유일하게 항우의 부하이면서 왕으로 봉해진 사람은 영포 하나뿐인데 그 영포마저도 불만을 가졌다.[26] 현 사천성과 섬서성 남부 일대로 후대 촉한의 영토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촉 땅은 전한과 후한을 거치면서 발전해 삼국지 시기쯤 되면 중원의 주들만큼 내실 있는 알짜배기 주가 되었지만, 유방이 들어간 시절은 아직 개발이 되지 않은 뒤떨어진 변방 지역이었다.[27] 진나라가 파촉을 정벌한 것은 기원전 316년, 즉 항우의 제후왕 분봉에서 겨우 110년 전의 일이다.[28] 이로 인해 원래 좋았던 장이와 진여의 사이는 거록대전 전부터 삐걱대고 있었다지만 크게 나빠졌다. 그렇다고 장이가 만족할 정도로 화끈하게 쏴준 건 또 아니라서 결국 장이는 유방에게 투항해 버렸다.[29] 그리고 애초 항우를 상대로 대립적이라는 것부터가 어느정도 급이 있다는 의미다. 아니면 항우에게 대립적인 다른 군벌 휘하든가[30] 팽월은 항우가 성고, 형양을 치러 가면 뒤를 쳐서 보급을 끊었고 항우가 이를 막기 위해 군사를 되돌리면 재빨리 흩어졌다가 항우가 돌아가면 다시 모여서 같은 짓을 되풀이했다. 나중에는 아예 유방과 손잡고 그의 부하들과 함께 이 짓을 되풀이했다.[31] 유방이 함양에 입성했을 당시 소하는 진나라 왕궁을 뒤져서 천하의 지리와 산물 등에 대해 기록된 장부와 기록 등을 항우가 태워먹기 전에 죄다 빼들렸다고 한다. 사실 이 장부와 기록들이야말로 진나라가 가진 가장 귀한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게 존재한 덕에 소하는 항우와 싸우던 유방에게 효율적이고 지속적으로 보급을 하는 것이 가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