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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雲史
1923년 1월 15일 ~ 2009년 8월 11일 (향년 83세)
1. 개요
대한민국의 시인, 영화 시나리오 작가, 방송작가 겸 영화 배우. 종교는 불교.2. 생애
1986년 7월 21일 KBS2 <11시에 만납시다> 인터뷰 영상.
1923년 1월 15일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 읍내리 출생. # 본명은 한간남(韓看南)이다. 본래 종교는 불교였으나 훗날 천주교로 개종했다.
소학교 학비도 대기 어려울 정도의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 구제중학교가 대신 빠른 취직이 가능한 실업학교(5년제)인 청주상업학교에 입학했다. 줄곧 1등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성적이 좋아서 졸업만 하면 은행 취직이 확정적이었으나 4학년에 다니던 1940년에 구제고등학교 그 중에서도 제일로 꼽히던 제1고등학교(現 도쿄대학 교양학부)에 가겠다고 결심한 후,#1 제1고 출신인 청주상업학교장에게 특별 입시지도를 받았다. 1942년 3월 청주상업학교 졸업 후 도쿄로 건너가 제1고 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주오대학 전문부와 조치대학 전문부에 합격하여 후자에 입학했다.#2
1942년 봄 조치대학 전문부에서 수학하면서 조치대 대학예과에 재학 중이던 김수환 추기경과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러나 돈벌이도 없는 상황에서 가난한 형편의 집에서 부쳐주는 생활비만 탕진하고 있던 차에 학교 공부를 접고 어선을 타보고자 했으나 퇴짜를 맞았다.#3 이후 기차역에서 차표를 구걸하는 과정에 알게 된 일본인의 법률사무소에서 사무보조를 하면서 그의 아들인 도쿄부 부립중학교 학생에게 수학 과외교사를 하며 구제고등학교 재수를 준비했다. 입시 시즌에 제1고의 스베리도메로 와세다대학 제1고등학원(대학예과) 입학시험도 응시하여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구두시문에서도 고득점하여 신체검사만 받으면 되는 상황에서 구제고등학교 시험일과 겹쳐버린 신검에 결시했으나 제1고등학교 시험에도 탈락하는 바람에 울며 겨자먹기로, 청주상업학교 동기동창인 윤남한이 재학하고 있던 주오대학 예과에 입학하게 된다.#4
1943년 주오대학 예과에 재학하며 이듬해 재차 제1고등학교 시험을 볼 생각이었으나, 1학기를 마칠 때 즈음 법문계 고등교육기관 재학생에 대한 징병연기가 폐지와 함께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가 실시되어 사실상 지원이 강제되자, 몸을 피해 윤남한이 구한 배편으로 함께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가 탄 배는 사실 조선인 학생들에게 학병 지원을 받기 위해 조선총독부 형사들이 판 함정이었다.#5 조선으로 돌아오는 배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조선학도특별지원병 지원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1943년 9월부터 11월 20일까지 조선총독부에서 모집한 학병으로 편성되어 1944년 1월 20일 입대 후 나고야의 제13방면군 수송연대 자동차중대로 배치받아 해방될 때까지 일본육군에서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이때의 경험이 아로운 3부작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6
해방 후 고향 증평으로 돌아왔고, 모교인 청주상업학교에서 1학년 담임을 맡다가#7 1946년 경성대학 예과에 편입해 천관우 등과 교분을 쌓게 되었다.#8 1948년 예과를 수료하고 신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불어불문학과로 진학했으나, 재학하다가 방송 극작가가 되어 1949년 중퇴하였다.
6·25 때에는 피란을 가지 못한 채 서울에 남았다가 의용군으로 끌려가던 도중 도망쳐 좌익 고위층이 된 동창생 정순택이 만들어준 가짜 ‘고철수집원’ 증명서로 살아남았다. 서울 수복 후에는 공산주의자로 분류되어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풀려났다. 1·4후퇴 때에는 부산에서 미군장교 구락부의 지배인으로 환락적 GI문화의 한복판에 있어 보기도 했다.
6·25를 보내고는 원주 육민관중고등교의 교감으로 학교를 세우는 데 온힘을 쓰다가 한국일보에서 기자생활을 한다. 3년 동안 한국일보사 문화부장으로 일하면서 해외의 신선한 문화소식을 국내에 알리는 젊은 감각의 기사를 써냈다. 그 당시에 대학 2학년이던 이어령에게 전면(全面)을 내주어 당시 문단을 발칵 뒤집어놓은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게 한 배후인물이기도 하다.
1955년 11월 7일 결혼했고,# 한국일보를 사직한 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에서 홍보부장을 맡고 있던 중 전쟁 미망인을 돌보는 '에덴의 집'을 운영하던 김기인 대령을 취재하며 첫 장편소설인 '이 생명 다하도록'을 썼다. 오재경 공보실장의 후원하에 서울중앙방송국(KBS) 방송문화연구실을 맡아 1957년부터 전업작가가 됐다.
인기 방송작가로 발돋움하던 무렵 그는 반공법에 연루되어 구속됐다. 간첩이 돼 한운사를 포섭하려고 찾아온 친구가 담당형사에게 잡혀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바로 6·25 때 자신을 숨겨준 바로 그 동창생 정순택이었다.# 다행히 주변의 적극적인 구명 노력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극작가로 일하면서 '이 생명 다하도록', 아로운 3부작인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년) '현해탄은 말이 없다' '승자와 패자' 등을 썼으며 이 중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김기영 감독이 영화로 연출하기도 했고 후에 TV 드라마로도 나왔다. 빨간 마후라의 시나리오도 한운사가 썼다.
드라마 '남과 북'(1971년) 등 라디오와 TV 드라마 방송대본도 집필했다. 후엔 자전적 에세이 '구름의 역사''를 썼다. 1999년 다큐멘터리 영화 '한국영화의 풍운아 영화감독 신상옥'으로 영화배우로도 데뷔를 하였다.
2002년 한국방송 영상 산업진흥원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등재됐고, 2008년 11월부터 식도암으로 서울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에서 요양 생활을 해오다가 2009년 8월 11일 향년 8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그는 임종 며칠 전 서울대교구 김옥균 바오로 주교에게 세례성사를 받고 뒤늦게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슬하에 아들만 넷을 두었는데, 그 중 막내가 바로 기타리스트 한상원이다.
3. 작품 활동
수많은 그의 작품 중에서 특히 아로운 3부작은 작가 자신의 군경험이 녹아있는 자전적 작품으로 아로운(阿魯雲, 영어로 alone) 자체가 한운사 본인이나 다름 없으며, 일본육군 제13방면군 수송연대 자동차중대 제6내무반에서의 군생활을 다루었다. 참고로 같은 내무반의 동료 지하라(千原) 이등병의 경우 실제 모델이 천응렬로 후에 한운사 작가의 자서전 '구름의 역사'에선 실명으로 등장한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모리 지로(森次郞) 일등병도 실존 인물이며 원래 실제 인물의 이름도 모리.구름의 역사와 인생만유기는 한국방송작가협회 공식 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