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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22 14:16:33

한복/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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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선사시대3. 삼국시대4. 고려5. 조선
5.1. 조선 전기5.2. 조선 후기
6. 근현대 및 현재7. 제주도

1. 개요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2986b900fc2838ae54f0825ea7b41e03.jpg

시대별 한복 2D 일러스트(영어)

한복이 기록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사례는 고구려 벽화에서다. 기본 구조는 상의, 허리띠, 하의, 모자(또는 두건)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이후 차츰 변화하여 상의가 짧아지고 허리띠는 고름으로 간소화 되었으며 두건은 다른 형태의 모자로 대체하였다. 이후 만주족 복식을 수입하여 만든 마고자와 서양 복식을 수입하여 만든 조끼를 추가하여 지금의 한복 형태가 완성되었다. 여기에 한복을 현대 문화에 맞게 크게 간소화한 생활한복은 고름이 단추로 대체되고 소매가 줄어드는 등 일상 생활에서도 더욱 입기 편하도록 만든 형태이다.
파일:각 시대별 한복.png
여성용 저고리는 짧아지고 치마는 더욱 길어져서 가슴을 덮는 형태가 되었는데, 마치 서양의 볼레로와 드레스를 입은 구조와 비슷하다.

평복은 기존의 고유 형태를, 관복과 공복은 중국식 복식을 받아들인 이분적 복식 제도였으나 상류층도 일상에서는 고유 형태의 한복을 입었다.
한복은 역사적으로 큰 변화보다는 차츰 변화하여 현재의 형태를 가졌다고 보아야 한다. 한복은 기본적으로 상유하고의 형태를 벗어난 적이 없었으며 남성, 여성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바지와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포(겉옷)이나 치마를 입었다.

2. 선사시대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선사시대 및 고조선의 한복

구석기 시대는 가죽을 이용한 옷을 입었을 것이라 추정하며, 신석기 시대는 실이 발명되어 옷감을 짜 입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신석기 시대 대표 유물인 가락바퀴는 실을 짜는데 사용하였다.

고조선한반도 북부와 만주에서 자리 잡은 국가로서 남방계 복식 근간인 한푸와 달리 북방계 복식 근간인 호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옷을 입었다. 학계에서는 초기 한복이 스키타이 복식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거나, 또는 스키타이 복식 그 자체가 전래하여 고대 한민족(예맥족) 문화에 맞게 발전한 것으로 본다.

고대한국복식의 원류에 관한 연구 : 스키타이계 복식문화를 중심으로
스키타이 복식 유형 및 형태에 관한 연구 - 고대 한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 (pdf)

유목민족 복식의 특징을 기반으로 하였기 때문에 남방계식 상의하상(上衣下裳) 치마[1]보다 북방계식 상유하고(上襦下袴) 바지[2] 위주로 발전하였으며 타기와 쏘기를 할 때 효율을 높이기 위해 저고리 섶이 왼쪽 여밈(좌임, 左衽)이다. 남녀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바지와 저고리 위에 긴 포를 입고 허리띠를 매는 형식이다. 여자는 바지를 입은 뒤 치마를 겹쳐 입었다.

고조선과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부여에서는 해(日)=흰(白)이라는 뜻으로 흰 옷을 숭상하였는데, 이러한 전통은 한국 전쟁 이후까지 오랫동안 이어지며 지금도 여전히 대한민국에서는 다른 나라에 비해 무채색 옷을 좀 더 선호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3. 삼국시대

風俗·刑政·衣服, 略與高麗·百濟同.
(신라의) 풍속·형벌과 정치·의복은, 대략 고려·백제와 같다.
수서 동이열전 신라

기본적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는 같은 복식을 입었으며, 여기에 지역별 특색을 추가로 더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삼국시대부터 기존 한복과 더불어 중국식 의복 문화를 새롭게 수입하고, 한반도와 중국대륙의 의복 문화를 일본열도로 수출하기도 하였다.
파일:external/bimage.interpark.com/20111024134812353.jpg
* 당염립본왕회도도 속 삼한 사신들. 왼쪽부터 순서대로 신라, 고구려, 백제다. 그림을 잘 보면 알 수 있듯이 기본적인 구조는 거의 동일하여 같은 계통의 복식임을 알 수 있다.
파일:0XhEoJJ.png
출처: 천손의 시대
* 삼국시대 때 일반적으로 공유하던 복식들. 의복은 저고리, 두루마기, 바지, 치마, 가늘거나 넓은 허리띠(조대, 대대)를 기본으로 하며 관모(조우관(절풍, 조미관), 갓, 책 등)와 신발(짚신, 갖신(가죽신), 나막신 등) 까지 완전한 구성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남녀노소 귀고리를 거의 필수로 착용한다.
파일:external/www.kocis.go.kr/1DS38328.jpg
* 주 LA 한국문화원에서 개최한 한복 패션쇼에 오른 삼국시대 한복. 사진 출처

3.1. 고구려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고구려의 한복

고구려는 기본적으로 통이 넓은 바지[3]와 소매통이 좁은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긴 포를 입는 형태를 띠고 있다. 여성들은 여기에 치마를 더 입었고, 신분에 따라 저고리에 문양을 넣기도 하였으며 남성들은 바지의 종류가 달랐다고 한다.

나중에 중국식 복식을 수입한 뒤로는 소매통이 넓은 옷을 입기도 하고 저고리의 좌임과 우임을 혼용하기도 하였다.

고구려의 바지는 태구고, 대구고, 적황고, 궁고 등이 있으며, 색은 자색, 적색, 적황색, 검은색, 소색, 황갈색, 고동색 등 여러 가지였다.

여성들의 치마는 색동치마와 주름치마가 있었다. 두 종류 모두 중국, 일본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는 것을 알수 있다.

고구려의 국왕은 대수자포에 백라관을 썼다고 한다. 또한 귀족들이 따로 관복으로 입는 포는 중국에서 수입해온 것이기 때문에 소매통이 매우 넓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기다란 저고리를 고정하기 위해서 끈을 허리에 맸는데 이를 대라고 부른다. 고구려의 대의 종류는 피혁대, 포백대, 과대 등이 있었다. 피혁대는 백위대, 백피소대, 소피대 등 가죽으로 된 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고분벽화 기마인물도에서 볼 수 있다. 포백대는 직물로 만든 고구려의 고분벽화에서 가장 흔하게 볼수 있는 대로서 귀족들은 넓은 폭의 띠를 두르고, 서민층은 폭이 좁은 띠를 둘렀으며, 시종자나 마부와 같은 천민들은 사대를 두르고 있었다. 과대는 형대 또는 포대에 금판 장식이 달린 과판을 부착하고, 그 한쪽 끝에는 교구, 다른 한쪽 끝에는 대선금구를 달아 허리에 찬 것이다.
파일:수산리 고분.png파일:external/pds19.egloos.com/a0112685_4d7d888d301fc.jpg
파일:external/www.koreanhistory.org/1158122230.jpg파일:external/dimg.donga.com/6914578.1.jpg
무용총 무용도
파일:고구려 덕흥리 고분 벽화.jpg파일:고구려 덕흥리 고분 벽화 한복 재현.png

3.2. 백제, 가야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백제와 가야의 한복

백제는 특유의 화려하고 귀족적인 미의식이 발달하여 유물 등을 보면 삼국 중 가장 여성스러운 특징이 많이 나타난다.

또한 반비나 배자 등은 남북국시대 때부터 생겼다고는 하지만, 벽화나 유물들을 추측해 보았을 때 이미 겉옷을 입는 복식 문화는 이전부터 등장했음을 할 수 있다.

백제의 갑옷은 일본의 갑옷과 큰 차이가 없는데 이것을 보아 두 국가의 교류 상태를 알 수 있다.

천수국만다라수장에서 발견된 백제의 여성 복식을 보면 층층이 단을 이루는 치마가 발견되었다. 이러한 치마는 다른 어느 국가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백제의 특징으로 보인다.

백제와 신라의 신발 중에서는 일본의 게다와 같은 ㅠ자형 나막신이 있다.

백제의 여성들이 고구려의 여성들처럼 연지곤지를 발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백제의 화장품 제조 기술은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가야는 백제, 신라의 복식 문화와 유사성을 띤다. 두 국가보다 소박하지만, 섬세한 면이 강하다.

3.3. 신라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신라와 발해의 한복

신라는 지리적인 위치상 백제와 고구려보다 비교적 해외 교류가 늦었기에 좀 더 토착적인 문화가 오래 발전하였다.

다른 두 국가보다 화려했으며 금세공이 발달하였다. 김춘추의 복식 개혁으로 당나라식 의복을 대거 수입하였고, 귀족들 사이에서 당나라풍이 유행해 당나라식 한푸처럼 저고리를 치마 안쪽으로 집어넣어 가슴까지 끌어올리고 기다란 숄같은 표를 두르는 복식을 입기도 했다.[5] 동시에 기존 형태의 한복도 여전히 공존했으며 반비나 배자가 본격적으로 유행하였다.

한국이 남북국시대이자 중국이 당나라이던 시기는 한중일이 모두 비슷한 형태의 의복 문화를 보인다. 그런데도 동시에 한국은 중국과 일본보다 확연하게 북방계 의복 문화의 특징이 꾸준히 나타난다.

파일:s66BBDX.jpg

3.4. 발해

네이버 블로거가 그린 발해 복식

고구려의 복식과 큰 차이가 없었다고 하며, 별개로 당나라의 복식도 수입하였기 때문에 당나라와 유사점을 띄는 복식도 별도로 존재했다.

4. 고려

일러스트레이터 글림자가 그린 고려의 한복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송나라오대십국시대를 통일할 때까지 꾸준히 중국으로부터 복식을 수입했다. 다만 이러한 중국 옷들은 어디까지나 상류층의 옷, 그것도 관복이나 예복 등으로 쓰였으며, 일반적으로는 한국 고유 양식의 복식을 입었다.[6]
삼한(三韓)의 의복 제도는 염색(染色)한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꽃무늬를 넣는 것을 금제(禁制)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사(御史)를 두어 백성의 옷을 살펴 무늬 있는 비단과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을 입고 있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죄주고 물건을 압수하므로 백성이 잘 지키어 감히 어기는 자가 없다.
옛 풍속에, 여자의 옷은 흰 모시저고리에 노랑 치마인데, 위로 왕가의 친척과 귀한 집으로부터 아래로 백성의 처첩에 이르기까지 한 모양이어서 구별이 없다 한다.
얼마 전에 세공(歲貢) 사신이 중국 궁궐에 이르러 조정에서 내리는 십등관복(十等冠服)을 얻어와 드디어 이를 본받아, 지금은 왕부(王府)와 국상(國相)의 집에도 자못 중국풍이 있으니, 다시 세월이 지나가면 다 중국풍이 될 것 같다.
이제 잠깐 그 중국과 다른 것만 골라, 이를 그림으로 그린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0권 / 부인(婦人) 중 부인(婦人)
부인의 화장은 향유(香油) 바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분을 바르되 연지는 칠하지 아니하고, 눈썹은 넓고, 검은 비단으로 된 너울을 쓰는데, 세 폭으로 만들었다.
폭의 길이는 8척이고, 정수리에서부터 내려뜨려 다만 얼굴과 눈만 내놓고 끝이 땅에 끌리게 한다.
흰 모시로 포(袍)를 만들어 입는데 거의 남자의 포와 같으며,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넓은 바지를 만들어 입었는데 안을 생명주로 받치니, 이는 넉넉하게 하여 옷이 몸에 붙지 않게 함이다.
감람(橄欖)빛 넓은 허리띠(革帶)를 띠고, 채색 끈에 금방울[金鐸]을 달고, 비단[錦]으로 만든 향낭(香囊)을 차는데, 이것이 많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
부잣집에서는 큰자리를 깔고서 시비(侍婢)가 곁에 늘어서서 각기 수건(手巾)과 정병(淨甁)을 들고 있는데 비록 더운 날이라도 괴롭게 여기지 않는다.
가을과 겨울의 치마는 간혹 황견(黃絹)을 쓰는데, 어떤 것은 진하고 어떤 것은 엷다.
공경대부(公卿大夫)의 처와 사민(士民)의 처와 유녀(遊女 기생)의 복색에 구별이 없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왕비(王妃)와 부인(夫人)은 홍색을 숭상하여 더욱 그림과 수를 더하되, 관리나 서민의 처는 감히 이를 쓰지 못한다.’고 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20권 / 부인(婦人) 중 귀부(貴婦)귀부(貴婦)
농상을 업으로 하는 백성은, 농민은 빈부의 차이 없이, 상인은 원근의 차이 없이 다 백저포(白紵袍)를 입고, 오건(烏巾)에 네 가닥 띠를 하는데, 다만 베의 곱고 거친 것으로 구별한다.
나라의 관인이나 귀인(貴人)도 물러가 사가(私家)에서 생활할 때면 역시 이를 입는다.
다만 두건(頭巾)의 띠를 두 가닥으로 하는 것으로 구별하고, 간혹 거리를 걸어갈 때에도 아전[吏]이나 백성이 이 두 가닥 띠를 보고는 피한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9권 / 민서(民庶) 중 농상(農商)농상(農商)
고려의 두건(頭巾)은 오직 문라(文羅)를 중히 여겨 두건 하나의 값이 쌀 한 섬[石] 값이 되어 가난한 백성은 이를 장만할 만한 돈은 없고, 또 상투를 드러내고 다니면 죄수(罪囚)와 다름없으므로 이를 부끄럽게 생각하여, 죽관(竹冠)을 만들어 쓰는데, 모나기도 하고 둥글기도 하여 전혀 일정한 제도가 없다.
짧은 갈(褐 거친 옷)을 입고, 아래에는 바지를 걸치지 않는다.
배마다 10여 인이 밤에는 갑판을 울리고 삿대를 두드리며 노래 부르며 서로 화답하여 거위와 따오기의 무리가 우는 것 같이 시끄럽기만 할 뿐 조금도 소리의 곡조나 감정이 없으니 대개 그 풍속이 그러하다.
선화봉사고려도경 제19권 / 민서(民庶) 중 주인(舟人)주인(舟人)

위 기록들은 고려도경에서 복식과 관련된 기록들이다. 이 내용을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다.


원나라와 접한 뒤로는 몽골 복식이 일부 들어왔으며 이 때부터 옷고름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옷고름 문서 참고.[9] 고려는 원나라와 협상하며 '문화와 풍속을 간섭받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냈기 때문에 몽골풍 양식들은 고려에서 필요로 인해 직접 수입한 것이거나 또는 교류로 자연스럽게 전해진 것이 대부분이다.
파일:external/cp.culturecontent.com/name_images_57_m.jpg파일:external/cp.culturecontent.com/name_images_58_m.jpg파일:external/cp.culturecontent.com/name_images_59_m.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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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려는 시각 자료가 대단히 부실한 시대로, 고대도 아닌 중세 왕조임에도 불구하고 옷 실물 유물이나 옷을 그려낸 회화 자료가 매우 부족해서 고증하기가 대단히 힘든 시대 중 하나다.[11] 일반 복식도 알기 힘들지만, 특히 갑옷은 시각 자료가 아예 소멸하다시피했다, 풍부한 고분벽화 덕분에 자료가 꽤 있는 편인 고구려를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상황.[12] 고려는 불화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걸 바탕으로 복식을 고증하기도 하지만, 불교 예술품들은 한중일을 막론하고 중국풍이 대단히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13]

고려 말에는 중국과 고려의 복식이 대단히 유사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고려가 몽골의 영향을 받았고 중국 역시 고려양이 유행하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문화콘텐츠닷컴에서는 고려 복식 카테고리를 따로 만들어 그래픽 재현 자료를 공개하고 있다. 다만 문화콘텐츠닷컴이 문을 닫으면서 현재는 링크가 죽은 상황.

5. 조선

5.1. 조선 전기

파일:attachment/징비록(드라마)/고증/eee.jpg파일:attachment/징비록(드라마)/고증/eeee.jpg

5.2. 조선 후기

파일:img_4_1690182568148.webp

병자호란 이후의 복식으로, 심익창의 첫번째 부인인 성산 이씨(1651~1672)의 묘에서 출토된 의복과 여러 장신구를 착용한 모습을 상상하여 그려진 그림이다.

파일:img_5_1690182586220.webp

아래쪽의 모습.

파일:계월향 초상.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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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file2.instiz.net/416b51c08b74f4fc82b1756f959911c5.jpg
16세기 후에는 남자 바지의 형태가 지금의 사폭바지로 달라졌다. 이전에는 여자 속바지와 같은 형태였다. 위의 조선 이전 한복들을 봐도 사폭바지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근현대 및 현재

파일:극단적 저고리3.jpg
파일:구한말 여성 한복.jpg

파일:external/pimage.design.co.kr/1275837733171.jpg
파일:nhanbok.jpg

7. 제주도

파일:제주도 한복.png 파일:제주도 내왓당 무신도.jpg
일제강점기 당시 한 제주도민의 사진 제주도 내왓당 무신도

제주도(탐라국) 지역은 육지와 떨어진 섬이라는 지형적 특색으로 인해 상당히 오랫동안 독자적이고 원시적인 복식문화를 간직하고 있었다. 《후한서》동이열전과 《삼국지》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마한 서해에 있는 큰 섬에 주호국(탐라국의 이명또는 멸칭)이 있는데, 가죽옷을 입은 사람들은 윗도리만 걸치고 아랫도리는 입지 않으며 소와 돼지를 기르며 배를 타고 한(韓)과 교역한다"는 기록이 있으며, 제주 전통 모피·피혁류 복식 연구라는 논문에서는 '제주 중간 산간지역에서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는 1900년대 출생 제주도민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보아 상당히 최근까지도 가죽옷을 입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동이전 등의 기록을 통해 남방계의 영향이 짙었음을 알 수 있다. 4세기 한반도에서 북방계 복식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일본 복식과도 유사성이 있으며, 일각에서는 호복, 한푸의 영향을 받기 이전 한국의 원시 복식의 형태를 제주도 복식을 통해 추론하기도 한다.

파일:갈옷.jpg

제주도의 전통 의상 중 하나로 갈옷이 있다. 갈옷은 제주 서민층들이 자주 입었던 노동복이자 일상복으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제주에서 갈옷은 자주 보이는 의상이었으나 60년대부터 화학 섬유로 만든 옷이 대중화 되면서 점차 그 자취를 감췄다. 유물이나 기록은 많이 남아있지 않으나, 감물 염색과 갈옷에 대한 조선시대 후기 문헌 기록 등을 통해 최소 3세기 이상의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90년대부터 제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늘어나게 되었고, 현대화 된 갈옷이나 감물 들이기 등이 유행하면서 갈옷은 제주의 대표적인 상징물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1] 초기 한푸는 남자도 치마를 입었다.[2] 초기부터 후기까지 한복은 여자도 바지를 입었다.[3] 벽화를 보면 통이 넓지 않은 바지 차림도 있다.[4] 백분을 바르고 붉게 화장한다는 뜻으로, 검은 눈썹 화장인 미대(眉黛)(눈썹 화장을 중시해서 십미도(十眉圖)도 있었다.), 이마 가운데에 그림 그리는 화전(花鈿), 이마와 머리카락의 경계 부분을 황색으로 염색하는 액황(額黃), 볼을 붉게 칠하는 홍장(紅粧), 보조개가 있는 것처럼 그리는 면엽(面靨), 볼에 피가 흐르는 것처럼 그리는 사홍(斜紅), 이마, 콧등, 턱을 하얗게 칠하는 삼백(三白) 등이 있었다. 사진 사진2 사진3 중국 시대별 입술 중국 시대별 눈썹 당나라 시대별 눈썹1 당나라 시대별 눈썹2(앞과 이어짐) 당나라 눈썹 화전 화장 순서 홍장 재현[5] 일본에서도 동시기 당나라 한푸와 같은 복식을 보인다.[6] 고려 측에서 중국에게 복식을 보내기도 했는데, 실제로 후진 황제 석중귀가 고려에서 보내온 의복과 갑옷을 언급하는 기록이 있다.#[7] 이는 조선 후기에 속치마를 여러 겹 덧입어서 치마가 항아리처럼 부풀어 보이도록 한 것과 유사하다.[8] 이 설명이 적혀져 있는 고려도경의 '주인舟人' 항목은 뱃사람에 대한 설명이다. 애초에 한자가 배 주에 사람 인 자이다. 다만 미륵하생경변상도 등 고려 후기의 불화를 보면 간혹 바지를 입지 않고 삼각팬티와 유사한 속옷만을 입고 일하는 농민이 묘사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 걸 보면, 뱃사람이 아니더라도 육체노동을 할 때에는 바지를 입지 않는 경우가 꽤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참고자료1참고자료2[9] 정확히는 옷고름 자체는 그 이전 시대에도 있었다는 정황이 여럿 있지만, 이런 사례들은 소수이고 본격적으로 도입되는 것은 원간섭기이다. 이후 옷 안쪽에 옷고름을 작게 달거나, 혹은 아예 달지 않고 허리띠, 단추 등으로 앞섶을 정리하는 경향이 계속 이어졌던 중국, 일본과는 달리 한복은 옷고름이 점점 두드러지는 방향으로 변화한다. 그래서 현재는 한복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옷고름이 꼽힌다.[10] 고려는 왕족의 복식이 고려풍과 몽골풍으로 따로 나뉘어 있었다. 다른 귀족들도 비슷하게 이전 시대들과 마찬가지로 이분적 복식제를 유지하여 크게 자국식과 중국식으로 나누어 분류했다.[11] 사실 서긍의 고려도경에 있었던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면 되려 시각 자료가 가장 많은 시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려도경은 송나라와 금나라가 전쟁을 벌이고 북송이 멸망하는 등 혼란기를 거치면서 그림 파트가 완전히 소실되었고, 현재는 글만 남아 있다.[12] 다만 삼국시대 역시 고구려를 제외하면 복식에 대한 시각 자료가 대단히 부실하며, 그 고구려도 6세기 이후로는 고분벽화의 주제가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종교적인 상징물, 상상의 동물 등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후기 복식에 대한 자료는 없다시피하다. 한반도 역사상 복식 자료가 풍부하게 많이 남은 나라는 조선이 유일하며, 그 조선도 주변국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실정이다.[13] 물론 그럼에도 일단 고려불화는 고려 당대에 그려진 그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고, 아무리 불화라고 해도 주요 인물이 아닌 사람들은 화공이 자기가 사는 나라의 복식을 그대로 그려넣는 경우가 종종 있는 편이기 때문에 참고자료로 많이 쓰인다. 실제로 불화가 없으면 고려시대 복식 재현도의 반 이상은 사라질 정도.[14] 어느 정도 줄어드냐면 병자호란 이후 골반 근처까지 올라갔던 저고리가 그 이후에는 허리 길이까지 올라가고, 영조, 정조 대에 이르러서 가슴 부근만 가리는 정도로 짧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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