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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0 23:31:02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

6.25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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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주장 내용3. 이형근의 주장에 대한 반론

1. 개요

초창기 대한민국 국군장성 중 한 명이었던 이형근이 자신의 회고록인 '군번 1번의 외길'을 월간 중앙에 연재하면서 말미에 언급한 것.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5일을 전후해, 한국군에서 발생한 석연치 않은 사건들에 대해서 지적한 내용이다. 이형근은 아래의 예시를 근거로 당시 한국군 내부에 간첩 내지는 북한과 동조하는 세력이 있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이형근이 이를 주장한 이후 군 전문가 및 6.25 전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미스테리에 대해 분석 및 연구를 해왔다. 연구 결과 대부분의 내용은 이형근이 사건 자체를 잘못 인식하였거나 초창기 한국군 및 정부의 능력 부족에서 비롯된 미숙함과 불운이 겹친 것으로 판명되어서 이후에는 전쟁사로서의 교훈, 역사적 진실이라는 학술적 가치 정도만 남아있을 뿐 의혹은 그다지 남아있지 않다.

6.25 전쟁 때 대대장으로 참전했던 정승화도 회고록에서 아래의 석연치 않은 점 중 일부를 지적하고 있다. 다만 이형근과는 달리 '이러이러한 점이 이상한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연구를 해볼 필요가 있다'는 정도의 언급에 가깝다.

2. 주장 내용

  1. 일선 부대의 적정 보고를 군 수뇌부에서 묵살 내지 무시했다는 점
    6.25 발발 직전인 1950년 4월 - 5월까지는 사단장이 지휘한 8사단 뿐만 아니라 다른 사단에서도 적의 대규모 남침 징후가 보인다는 보고가 잇따랐을 것이다. 8사단의 경우 1950년 3월 - 5월 태백산맥으로 침투한 이호재 부대의 잔당과 김무현 유격대를 토벌하던 중 생포한 포로들이 심문결과 이구동성으로 적의 대규모 남침을 거듭 예고했기 때문에 이 정보를 육본에 수차 보고했으나 무반응.
  2. 각급 주요 지휘관의 이른바 6월 10일 인사 이동
    6.25가 발발하기 불과 2주일 전, 중앙 요직을 포함한 전후방 사단장[1]과 연대급의 대대적인 교류와 이동이 단행되었다. 중요한 것은 한꺼번에 많은 인사를 단행한 것이 문제라는 점이다.
  3.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
    6월 13일부터 6월 20일에 걸친 전후방 부대 교대 역시 부적절한 조치였다. 전투를 지휘해야 할 지휘관들이 적정이나 지형은커녕 부하들의 신상 파악조차 할 수 없었다. 2번과 일맥상통한데 부대 교체도 조금씩 해야 하는데 너무 한꺼번에 많은 부대를 동시에 교체하는 바람에 전력 공백을 야기했다.
  4. 북한의 평화 공세에 대하여 남한은 6월 11일부터 6월 23일까지 비상 경계령 발동
    그 이유는 6월 10일 이른바 <조국통일투사 체포사건>에 대하여 평양 방송이 맹렬한 비난과 무력 행사 위협을 해왔기 때문으로 해석. 그러나 공교롭게도 6월 23일 김일성이 남침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하도록 결정된 날 자정에 비상 경계령을 해제한 점이다. 좀 더 부연 설명하자면 북한 측은 남북 협상을 위해 특사 3명을 파견할 것이니 남측에서 메시지를 받으라 했다. 남한 측은 이들을 그날 38선 남방 1km 지점에서 맞아 메시지를 인수했다. 그러나 이들은 유엔 감시 위원단에게도 수교할 문서가 있다면서 서울로 들어가겠다고 떼를 썼다. 경찰이 이들을 체포했는데 북측은 즉각 석방하지 않으면 강력한 무력 행사하겠다고 협박했다. 이렇게 남북이 티격태격거리고 있는데도 육본은 6월 24일 자정부터 비상 경계 태세를 해제한 것이다.
  5. 이런 위기 상황에서 육본은 비상 경계령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 1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다
    정말 황당한 것은 육본 정보 분석과에서 북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보고를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에게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6. 육군 장교 클럽 댄스 파티가 6월 24일 밤에 열렸다
    육군 장교 클럽 낙성 파티를 연다고 전후방 고급 장교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참석 장교들은 6월 25일 새벽까지 술과 댄스를 즐겼으며, 일부 미 고문관과 한국 장교들은 2차를 가기도 했다고 한다.
  7. 적의 남침 이후 병력을 서울 북방에 축차투입해 불필요한 희생 강요
    아무리 급한 상황이라지만 군사적 기초 상식을 깬 명령이다. 시간을 벌려는 목적으로 보이나 이는 적의 경험치만 높여줄 뿐 적에게 피해를 입힌다든가 시간을 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8. 적의 공세로 한국군이 퇴각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6월 25일 ~ 27일 중앙방송은 한국군이 반격, 북진 중이라고 허위 방송을 함으로써 군부는 물론 국민들까지 상황 판단을 그르치게 했다. 서울 북방에서 접전 중이던 한국군이 상황 판단을 제대로 했다면 육본은 그들을 재빨리 전장에서 이탈케 해 다음 작전에 대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9. 한강교 조기 폭파
    전술의 원칙상 폭파나 차단은 퇴각군의 퇴로를 막기위해 추격군이 감행하는 법인데 한강교는 한국군측이, 그것도 한강 이북에 한국군만 믿고 있는 많은 시민, 그리고 수많은 병력과 군수물자를 방치한 채 서둘러 폭파했다. 더구나 대통령, 정부 고관, 육군참모총장이 국민들에게 이 사항을 미처 알리지도 않고 한강 이남으로 도피한 뒤, 한강교를 폭파했다는 것은 전술적으로나 도의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하책이며 반역 행위었다. 고관대작들이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자신들만 슬그머니 빠져나간 뒤 탈출구를 봉쇄해버린 짓이다.
  10.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 집행
    최창식 대령은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에 복종, 한강교를 폭파했을 뿐인데, 이에 책임을 지고 1950년 9월 21일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게다가 그때는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시기였는데, 이런 경황을 틈타 책임 소재도 가리지 않은 채 미리 처형한 것은 정치적 복선이 있었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3. 이형근의 주장에 대한 반론

1. 군 수뇌부의 적정 보고 묵살
일단 일선 부대의 적정 보고가 묵살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주체는 한국군 수뇌부가 아니라 미국이었다. 육군 본부는 6월 23일에 미국 측에 적의 남침 징후를 보고했지만, 미국은 이를 1950년 상반기 내내 지속된 위기설과 동일하게 취급했다. 한국군 역시 아래 4번, 5번 항목에서 살펴볼 것처럼 수 개월간 지속된 비상 경계령으로 야기된 피로와 부작용을 감당하기 힘든 수준에 직면해 있었다. 수차례 반복된 비상 경계령은 결국 그 해 6월에 한국을 방문한 UN 한국 소위원회가 한국 정부의 불순한 의도를 의심하게 할 지경이었고, 당시 한국군은 UN 소위원회의 승인 없이는 평시에 함부로 탄약 등을 불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당시 한국군 수뇌부가 남침 징후를 보고받고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방안은 거의 없었다. 38선 지역에서의 국지전 자체는 계속해서 벌어졌고, 신성모'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라고 말할 정도로 '북진 통일'[2]을 계속 주장하던 상황이었으니, 미국 등이 의심한 것은 당연했다. 당시에는 미국도 북한의 남침 의도를 분명하게 알지 못했던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2. 각급 주요 지휘관의 이른바 6월 10일 인사 이동 & 3. 전후방 부대의 대대적인 교대
의도는 좋았다. 이미 1950년 3월 ~ 4월에 전쟁 위기설이 나올 정도로 남북한의 군사적 정세는 위험 수위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기존의 빨치산 토벌 및 치안 유지 위주로 임무를 수행했던 한국군의 인사 체계 및 부대 배치를 그대로 방치하면 위험하다는 것은 불보듯 뻔했다. 당시 육군 총참모장인 채병덕을 비롯한 육군 수뇌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될수록 유능한 지휘관을 엄선해서 전방의 야전 부대에 배치하고, 야전 부대들을 최대한 빨리 개편해서 전투력을 끌어올리려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의도는 좋았지만, 본문에서 이형근이 지적했듯이 이 과정에서 재편성을 위한 시간의 지연은 불가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전쟁을 일으켜 버린 것이다.
4. 비상 경계령 해제 & 5. 외출 / 외박 실시
이형근은 이 비상 경계령이 6월 11일부터 내려졌다고 주장하는데, 실제로는 그 이전부터 비상 경계령이 내려져 있었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당시 남북한 정세가 심상치 않았고, 1950년 4월 29일에 최초로 비상 경계령이 떨어졌다. 이후 5월 3일에 해제하였다가 다시 5월 9일 경계령이 떨어졌고, 이후 6월 2일에 해제하였다가 6월 11일 또다시 경계령이 떨어진 것. 이로 인해 당시 한국군은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장기간의 비상 경계령으로 인한 스트레스 및 피로도 증가 등으로 병사들의 전투력이 많이 떨어져 있던 상황이었다. 당장 경계 태세를 유지해 춘천-홍천 전투 때 선전한 것으로 알려진 6사단의 경우에도, 당시 김종오 사단장이 비상 경계 태세를 유지하려고 하자 휘하 참모 및 지휘관들이 애들 목욕하고 이발을 할 시간은 줘야 한다고 건의해 외출, 외박, 휴가 금지만 유지하고 경계 인원은 최소한으로 축소시켰을 정도다. 게다가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하필 이승만 정권의 북진드립에 반복되는 비상경계령 탓에 한국군 통제 권한이 있는 UN 한국소위부터가 이상한 눈초리로 닦달하고 있었으니 정치적인 이유에서도 일단 대규모 휴가라는 퍼포먼스를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는 농번기이자 보릿고개였다. 이는 한국군도 예외가 아니어서 군이 보유하고 있던 군량미도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반대로 건빵은 남아돌았는데, 당시 한국군은 휴가 장병들에게 건빵을 지급했고, 그 휴가가 벌써 몇개월째 중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요즘에도 일부 부대에서는 종종 지휘관이 "밥 축내지 말고 휴가나 가!"라며 농담조로 말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하물며 군량미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에 휴가 금지로 인한 군량미 소모는 결코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경계령을 해제하고 외출 / 외박을 실시해서 병사들을 추스리는 동시에 농번기 일손을 돕게 하고, 군량미를 절약할 필요가 있었다. 당시 남한은 제대로 된 2차, 3차 산업이 없던 가난한 농업국이었다는 것을 잘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남한에겐 정말 불행하게도 북한이 이 시기를 잡아 버린 것이었다.
6. 육군 본부 장교 클럽 댄스 파티
이 댄스 파티에 한국군의 수뇌부 및 야전 지휘관까지(이형근 본인만 빼고?) 대부분 참석해 술에 잔뜩 취한 상태에서 전쟁이 터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축하 연회에는 육군 본부 및 서울에 있던 부대의 일부 참모 장교들이 참석했을 뿐 이형근 외에도 전방의 야전 지휘관들은 연회에 참석하지 않고 부대에 남아 있었다.
7. 적의 남침 이후 병력을 서울 북방에 축차 투입해 불필요한 장병들의 희생 강요
이는 당시 육군 본부의 대혼란과 정치권의 압박이 빚은 참사에 가깝다. 각각 6사단8사단이 간신히 방어를 하고 있던 춘천시 방어선과 강릉시 동해안축선을 제외하면 모든 전선에서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었고, 미숙한 지휘 능력으로 인해 육군 본부는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3] 여기에 기필코 수도 서울을 사수해야 한다는 정치권의 압박은 도를 넘고 있었다.[4] 이 때문에 당시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을 비롯한 육군 지휘부에선 체계적인 서울 방어 계획을 세우지 못한 채 여유 병력이 생기는 대로 서울 북부의 방어선에 축차투입하는 실책을 저지른 것이다.[5]
또한 축차 투입이란 실책에는 오히려 이형근 본인의 책임도 일부 존재한다. 이형근이 지휘하는 제2보병사단 병력은 당시 포천시 - 의정부시 축선에서 서울로 통하는 주요 방어선인 축석고개를 확보하려 했는데 채병덕 총참모장이 2사단 병력의 축차 투입 명령을 내린 것과는 별도로 이형근도 예하 연대의 일부 병력을 대대별로 임시 배속해서 축차 투입해 버린 것. 이러한 점에 대해서 이형근은 다른 서적 등에선 "다급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축차 투입으로 연결되는 명령을 하였다"며 자신의 실수를 일부 인정했다. 축성령 방어전 당시 이형근채병덕 중 어느 쪽이 축차투입에 더 큰 책임이 있는지는 섣불리 단언하기 어려우나, 확실한 것은 이형근 본인도 어느 정도의 책임은 있다는 것.
8. 라디오 등을 통한 허위 방송
이는 이승만 대통령 등 정치권에서 저지른 실책이다. 허위 방송을 한 이유를 굳이 옹호하자면 유언비어로 인해 서울 시내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고 국민들을 안심시키려 한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6] 개전 직후의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미 25일 개전 당일에 포천 축선이 뚫려 의정부시가 함락당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행정부는 최대한 사실 그대로를 전파하고 최악의 시나리오인 서울의 포기 또한 미리 고려해야 했다. 그럼에도 신성모 등은 서울을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제대로 된 후퇴 방어 계획이 아닌 무모한 반격만을 주장해 서울을 포기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낭비되었다. 게다가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을 빠져나간 것 자체는 급박한 전황 때문에 용납할 수 있지만, 대통령이 도주한다는 책임을 잠깐이라도 면피하기 위해 말 그대로 몰래 서울에서 도망치면서 정작 서울 시민의 동요를 막기 위한 명목으로 허위 방송을 계속 내보낸 것이다.
9. 한강교의 조기 폭파
한강교의 폭파 계획은 당시 채병덕 총참모장이 세운 것이지만 폭파 시기를 사전에 정해 놓지는 않았다. 따라서 전황의 판도를 고려해 본 뒤 아군 및 서울의 민간인들이 적절히 대피한 뒤에 그 때 폭파를 하였다면 한강교의 폭파 자체는 채병덕의 매우 적절한 조치로 평가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채병덕 등 육군 수뇌부가 지나치게 당황했다는 점이다. 한강교를 폭파하기 전 미아리 고개 방어선을 뚫은 북한군 전차 몇 대가 서울 시내로 진입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육군 본부는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졌다. 이때 미아리 방어선을 지키던 병력들은 아직 부대 건제를 유지했었고, 비록 전차가 한국군에게 버거운 상대였다지만 후속 부대 없이 소수의 전차만 뚫고 들어온 상태였다. 따라서 지뢰와 장애물 등으로 최대한 시간을 번 뒤 병력을 서울 시내로 후퇴시켜 시가전을 준비하게 하거나 아예 서울 시가지를 포기하고 한강교 북단으로 후퇴해 퇴로를 확보하는 등의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물론 이 또한 당시 전황이나 한국군의 능력을 고려할 때 전술적으로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예 이런 계획조차 없던 것과는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이미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육군 본부는 '전차 출현'을 '서울 함락'으로 여기고 병력 이동이나 민간인 대피는 고려하지 않은 채 다급한 마음에 한강교를 폭파시키도록 명령을 내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흔히 알고 있는 채병덕 총참모장의 한강 철교 폭파 명령도 사실이 아니다. 한강 철교 폭파 당시 채병덕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상태로 후송된 상황이었다. 따라서 육군 본부가 패닉 상태에서 누가 명령을 내린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정황상 신성모 국방장관의 지시였다는 증거들이 나오기 때문에 이쪽이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또다시 신성모가 간첩.

10. 공병감, 최창식 대령의 조기 사형 집행
이는 이형근이 추측한 것처럼 정치적인 요소가 존재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형근이 주장한 것처럼 '제5열'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 특히 신성모가 배후일 가능성이 거론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강교 폭파 이후 '시민들을 속이고 몰래 한강을 건너서 혼자 도망친 뒤 다리를 폭파시켰다'는 비난을 받았고 이는 큰 정치적인 압박이었다. 인천 상륙 작전이 시작되고 서울 탈환이 가시화된 시점에서 이승만 등은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울 방도를 찾아야 했고, 그 희생양으로 채병덕과 최창식을 선택한 것. 채병덕은 이미 하동 지구 전투에서 전사했으므로 자연히 최창식을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게다가 신성모가 당시 '서울 시민이나 잔여 병력이 어떻게 되든 간에' 빨리 한강교를 폭파시키라고 압박하였다는 증거들이 있다. 물론 언제 폭파시키라고 구체적인 일정을 정해놓은 것은 아니었던 데다 이 말 외에 다른 자료가 전혀 없기에 현재도 확실한 진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편 이형근이 본문에서 간접적으로 비판한 애치슨 라인도 실상은 좀 다른 편이다. 이에 대해서는 해당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1] 이형근 본인도 이 때 8사단에서 제2보병사단의 사단장으로 보직이 변경되었다.[2] 일제시대 총독부에서 특급열차 아카츠키호를 투입하면서 이 열차를 타면 아침은 부산에서 점심은 경성에서 저녁은 만주에서 먹을수있다고 선전했는데 그 문장을 변형한 것이다. 다시말해 진짜로 믿었던것은 아니다.[3] 어느 기록에 따르면 민간인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전선을 끊어 버리면서 주공이였던 의정부 축선에서의 결과만 보고 되었고, 다른 전선에서의 상황은 파악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는 당시 무선연락선을 구축하지 않았다라는 이야기와 연계해 보면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4] 김홍일, 김석원 등 대부대 지휘 경험이 있는 군 원로들은 서울 포기와 한강방어선 구축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지만, 정부 입장에서 서울을 포기하는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기에는 이 당시 '수도 서울'이 가지는 상징성이 너무나 컸다. 당장 태평양 너머의 코쟁이들조차 서울 중요한 걸 알아서 38도선을 그었고, 북괴는 헌법에 대놓고 수도는 서울시라고 박아버리는 마당에 서울을 그냥 넘겨준다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공포 그 자체였다. 실제로 북한은 서울을 점령한 직후 대통령 선출권한이 있는 국회를 소집해 이승만을 대통령에서 날려버리고 한국 정부를 붕괴시키려 시도하기도 했다.[5] 북한군은 서울 진입을 위한 주공으로 의정부를, 조공으로 개성과 춘천방향으로 정해서 공격해 왔는데, 주공을 모르게 하기 위하여 전력을 거의 균일하게 배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성과 춘천에서의 분전과는 다르게 의정부방면의 7사단이 너무 쉽게 붕괴되면서 북한군의 전략과 거의 동일하게 진행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남한에서도 기본적으로 북한의 공격방향에서 의정부가 주공일 것을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이러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기에 사실 할말이 없다.[6] 이 3일간 서울시내의 혼란은 도저히 통제가 안되어서 당장 전방으로의 병력이동부터가 심각한 차질을 빚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