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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7 02:10:46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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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hellin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b_pinacoteca_stieler_friedrich_wilhelm_joseph_von_schelling.jpg
본명 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폰 셸링
Friedrich Wilhelm Joseph von Schelling
출생 1775년 1월 27일
신성 로마 제국 뷔르템베르크 레온베르크
사망 1854년 8월 20일 (향년 79세)
스위스 바드 라가즈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학력 튀빙겐 대학교
(철학 / 석사) (1792년) | (철학 / 박사) (1795년)
경력 예나 대학 교수
뷔르츠부르크 대학 교수
에를랑겐 대학 교수
뮌헨 대학 교수
베를린 대학 교수
직업 철학자
서명
파일:프리드리히 빌헬름 요제프 셸링 서명.svg

1. 개요2. 생애3. 사상
3.1. 자연 철학3.2. 선험 철학3.3. 동일성 철학3.4. 자유의 철학3.5. 종교의 철학
4. 영향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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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관념론, 낭만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나누어 놓은 '순수 이성과 실천 이성', 피히테가 나누어 놓은 '자아와 자연'을 하나로 합치려는 철학적 작업을 통해 '동일성 철학' 체계를 완성시켰다. 그의 철학의 목적은, 우연적인 자아[1]와 필연적인 자연[2] 사이의 모순[3]을 통일하는 데에 있었다. 셸링은 이 모순을 통일하고자 노력했고, 그의 작업은 낭만주의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헤겔에게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헤겔은 셸링을 계승하면서도 셸링의 동일성 철학이 '관념'과 '실재'를 무차별적으로 동일하게 본다고 비판한다.[4] 이에 대해 셸링은 '자연의 근원적인 힘'에서 동일하다는 것이지 그 실재의 차별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해명하면서, '인격적 신의 실존'을 증명하는 후기 철학으로 넘어가게 된다. 셸링에게 있어서 '실존'이란, 애초부터 '무작위적인 의지가 난립하는 어두운 면'을 전제로 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이 의지를 통일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빛의 이성을 통해 인간은 도덕적 인격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인격이 점점 완성되어 나가더라도 어두운 부분은 언제나 남아 있어서, 실존하는 인간은 '어둠'과 '빛'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하는 자유에 놓여 있다.[5] 이렇게 '실존'함에 있어서 '어두운 면'이 필연적이라는 셸링의 주장은 쇠렌 키르케고르에게 영향을 주어 실존주의 탄생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셸링은 루터파 목사의 아들로 1775년 독일 남서부 뷔르템베르크 주 레온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였으므로 15세의 어린 나이에 튀빙겐 대학의 신학과에 입학했고 거기서 다섯 살 위인 헤겔, 횔덜린과 기숙사를 같이 쓰면서 셋은 친구가 되었다. 이 무렵 이웃나라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났고 보수적이었던 튀빙겐 대학의 정통신학에 맞써 그들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몰두했다. 그들은 기존 기독교가 신과 세계를 대립시키고는 타락한 세계가 신에 의해 구원되기를 기다린다고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학문적 목적은 신과 세계(피조물)를 화합시켜 하나의 결속된 전체를 존재하게 하는 사유의 탄생에 있었다. 이들에게는 죄를 통한 분리 대신에 사랑을 통한 통일이 중요했으며 대립하는 세계 대신에 결속된 세계가 관건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횔덜린의 제안에 의해 이른바 사유의 동맹을 결성했고 통일철학을 추구함으로써 자유와 이성과 사랑과 화해가 실현되는 통합의 나라를 꿈꾸게 된다.

17살 때, 창세기 제3장에 관한 학위논문을 쓰고 18살에는 《신화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썼다. 이어서 1년 뒤엔 《철학 일반의 형식의 가능성에 대하여》를 썼다. 이 시기에 셸링은 피히테의 제자라고 볼 수 있다.

1795년 20살 때 튀빙겐 신학부를 졸업한 셸링은 3년간 라이프치히에서 가정교사를 한다. 이때 자연과학에 몰두하면서 독자적인 철학을 구축한다. 그 결과 《자연철학 이념 (1797)》을 썼고, 이 생각을 더 발전시켜 1년 뒤 《세계영혼에 관하여 (1798)》을 출간했다. 바로 이 책을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매우 좋게 봤고, 이를 계기로 괴테는 셸링을 예나 대학 교수로 적극 추천하게 된다.

피히테가 1799년 무신론 논쟁에 휘말리면서 예나를 떠난 후, 셸링은 예나 대학의 중심점이 되며 1800년에는 전 독일 철학계를 대표하는 철학자가 된다. 가정교사 생활을 전전했던 헤겔을 예나 대학 교수로 추천하여 헤겔과 같이 철학비평지를 편집하기도 하고, 슐레겔 형제나 노발리스 같은 낭만주의자들과도 친교를 맺은 것도 이 시기다. 이 때 나온 책이 《자연철학 체계 기획1(1799)》와 그 유명한 《선험적 관념론의 체계 (1800)》인데, 여기서 마련된 객관적 관념론을 통해 셸링은 피히테의 철학과 완전히 결별하게 된다. 이후 '동일성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이 철학으로 셸링은 전성기를 누린다.

하지만 전성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이 무렵 A. W. 슐레겔의 아내 카롤리네(Caroline)와 사랑에 빠짐으로써 1803년 셸링은 남편과 이혼한 카롤리네와 결혼했으며, 그후 이들은 낭만주의 철학자들과 관계가 단절되었고 예나를 떠나 뷔르츠부르크로 옮겼다. 셸링은 거기에서 얼마 동안 강의를 했고, 1806년 31세 때는 뷔르츠부르크를 떠나 뮌헨으로 간다. 셸링이 떠난 예나 대학의 중심이 된 헤겔은 1807년 《정신현상학》을 발표하였다.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셸링의 객관적 관념론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발전시켜 절대적 관념론을 완성시켰는데, 그러면서 셸링의 동일성 철학을 사정없이 비판한다. 헤겔은 이후 셸링을 배신할 생각은 없었다는 말을 하긴 했지만, 셸링은 이 배신을 매우 슬퍼했다. 셸링은 헤겔의 절대 이성을 반박하기 위해 자신의 철학을 완전히 다른 체계로 바꾸었는데, 뮌헨에서 출판한 그의 후기 철학의 대표작 《인간적 자유의 본질 (1809)》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신의 선악에 대한 실존 문제를 다루고 있다.

1821년부터 5년간 에를랑겐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1827년에는 다시 뮌헨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쳤다. 1831년 헤겔이 죽고, 헤겔의 제자들의 세력이 너무 커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빌헬름 4세는 셸링을 1841년 베를린 대학의 철학 교수로 임명한다. 여기서 쇠렌 키르케고르, 프리드리히 엥겔스, 미하일 바쿠닌 등을 가르쳤으나 대부분의 제자들이 이미 헤겔의 철학을 숭상했기 때문에 강의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고, 다만 셸링의 실존 개념은 제자였던 키르케고르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 후 퇴직해 뮌헨으로 돌아갔고, 1854년 그는 거의 잊혀진 채로 스위스 라가츠에서 죽었다. 《계시의 철학》과 《신화의 철학》이 사후에 출판되었다.

3. 사상

3.1. 자연 철학

물체와 힘을 구별하는 뉴턴의 기계론적 자연관에 맞서서, 셸링은 물체는 자체 내에 힘을 지니고 있다는 유기체적 자연관을 주장한다. 유기체적 자연은 칸트가 이미 주장한 바이지만 셸링과는 다르다. 칸트는 자연 속 여러 생명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어떤 유기체적 '목적'이 있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셸링은 ('인간을 위한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역시도 자연의 일부이며 따라서 인간과 비생명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자연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유기체적 자연관에서 각 부분은 전체와 분리 불가능하며, 전체의 관념이 각 부분의 위치를 결정한다. 또한 그것은 자기 발생적이고 자기 조직적이어서, 모든 부분들은 상호적으로 서로의 원인과 결과가 되며, 외부의 원인을 갖지 않는다. 즉, 자연의 설계와 목적은 어떤 내적 원리에 따라 '안'으로부터 나오며, 자기 산출적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원칙을 바탕으로 셸링은 자연의 3가지 기본적 힘(Potenz)들을 규정한다.
  1. 첫째, 셸링은 자연의 가장 기본적인 힘을 '무제한적 활동'이라고 보았다. 그것은 그것을 '억제하는 힘'과 균형을 이루어 양적인 물질들을 산출한다. 여기서 무제한적 활동은 '척력'이고, 억제하는 힘은 '인력'이라고 정의한다.
  2. 둘째, '무제한적 활동'은 '억제되지 않은' 어떤 지점에서 다시 자신을 드러낸다. 물체의 '움직임'이 바로 그것이다. 물질의 운동역학적 법칙은 물론이고 '전기 현상', '자기 현상' 그리고 물체의 '화학적 성질'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3. 셋째, 이런 힘들은 마침내 유기체를 구성하여 그 유기체 내의 '감수성', '반응성', '재생성'을 드러낸다. 하지만 유기체적 영역 안에서도 여러 단계가 있다. 낮은 단계에서는 재생성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데 비해, 감수성은 비교적 덜 발달되어 있다.[6] 높은 차원의 단계에서는 감수성이 더욱 발달해 개체적 특수성들이 더 잘 드러난다.[7] 가장 위의 단계에 인간이 있으며, 이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자연의 관념성을 가장 명백하게 드러내는 유기체이다.
지금의 과학적 사고법으로 살펴보면 셸링의 생각이 지나치게 자의적인 것이 아니냐고 비판할 수 있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이를 분석해보면 여러가지 주요한 개념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자연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보는 그의 관점은, 지금의 지구 환경보호적 관점에서 살펴보더라도 훌륭한 철학적 지침이 될 수 있다. 또한 낮은 형태로부터 높은 차원의 형태가 창발된다는 그의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 진화론과 매우 유사한 것임을 알 수 있다.[8]

3.2. 선험 철학

자연철학이 객관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주관적 인간의 정신으로까지 나아갔다면, 반대로 선험철학은 주관적인 인간의 정신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연 실재에까지 나아가고자 한다. 즉 주관(나)의 입장에서 자연을 대하는 여러가지 관점들을 선험철학에서 서술한다. 이는 피히테가 이미 말했던, '인간의 지식이란 무엇인가'를 뜻하는 '관념론'을 의미하며, 셸링은 그 답이 자기의식의 연속적 역사라고 주장한다.[9] 셸링은 칸트의 분류에 따라, 이론적인 면과 실천적인 면과 예술적인 면을 나눠서 총 3부로 이를 설명한다.

1부는 자아의 '이론 철학'이다. 여기서는 자아가 어떻게 지식을 만들어 내느냐를 말하고 있다. 인간의 지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것이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객관'을 내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지식학에 대한 출발은, '주관'과 '객관'을 동시에 의미할 수 있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것이 바로 '자기의식'이다. '나'는 '나'를 생각할 수 있다. 즉, '주체로서의 나'(주관)는 '대상으로서의 나'(객관)를 생각할 수 있으며, '나'라는 '자기의식'이 주관과 객관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는 시작점이 된다. 셸링은 이러한 자기의식을 '자아'(ego)라고 한다. 다만 여기서 자아라는 말은 개인적인 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식 일반의 작용'을 의미한다. 그리고 셸링은 피히테와 마찬가지로 이를 '지적 직관'의 변증법적 운동으로 설명하고 있다. 자아의식의 활동이 '즉자' '대자' '즉자대자'로 관념을 형성할 때, 자아는 비아(자연)를 추상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과정을 거치면서 지식을 산출한다. 그리고 이러한 변증법적 운동은 '의식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의식의 역사는 3개의 주요한 시기로 나누어진다. 제1기는 원초적인 감각으로부터 산출된 직관을 말한다. 즉, 즉자적인 대상의 인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2기는 직관으로부터 반성까지의 자기의식을 말한다. 여기선 자아는 스스로를 의식하게 된다. 제3기는 절대적인 추상작용을 말한다. 이 추상에 의하여 자아는 스스로를 '예지'[10](이데아)로서 자각한다. 비로소 자아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객관이 된 것이다.

이어서 2부는 '실천 철학'이다. '이론 철학'의 '자기의식의 역사'에서 '이상(예지)'적인 지식이 산출되었으므로, '실천 철학'에서는 그 '이상적인 관념'을 바탕으로 객관적인 세계에서 '자신의 자유'를 현실화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 된다. 이는 자아가 현실 세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실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자유란 이미 칸트와 피히테도 말했듯이 바로 '도덕적인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로 귀결된다. 그리고 자아의 도덕적 행위를 조건으로 하여 법과 국가의 체계를 얘기하고, 더 나아가 이것은 국가 간의 분쟁을 없앨 수 있는 '국가의 국가', 즉 세계 기구의 성립으로 이어진다. 세계 기구에 이르러서야 정치사회의 보편적 도덕 질서는 완전히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모든 도덕적 실천 과정은 한없이 진보를 수행하는 '역사' 속에서 실현된다. 셸링에 따르면 그 역사는 도덕적 실천의 근본인 '절대자'가 그 자신을 서서히 드러내는 끊임없는 계시의 과정이기도 하다.

1부 '이론 철학'과 2부 '실천 철학'을 종합하는 것이 3부 '예술 철학'이다. 1,2부에서 중요한 것은 '자아'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지식을 만들며,(1부) 그것을 현실에서 어떻게 실천하는가(2부)에 대한 문제였다. 여기서 '자아의 지식'은 끊임없이 '산출'되기(변하기) 때문에, 현실과는 항상 차이가 난다. 따라서 지식(관념)과 현실(실재)의 일치가 중요해지고, 이러한 일치를 수행하는 것이 '미적 직관'인 것이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볼 때, '이론 철학'의 반성적 앎이나 '실천 철학'의 도덕적 실천을 통하여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미적 직관'을 통하여 무의식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 실재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의 일치를 이루게 되었을 때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곧, 그 작품에 아무것도 덧붙이거나 감해서는 안된다는 감정을, 그리고 또한 비록 문제가 해결되는 일은 있지 않아도, 어쨌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는 감정을 향수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셸링의 생각으로는 완성된 예술작품을 관조하는 것이야말로 자아(주관)가 스스로에 대해 할 수 있는 최고의 객관화이기 때문이다.[11]

3.3. 동일성 철학

셸링은 자신의 자연철학과 선험철학 모두를 포함하는 통일된 철학을 완성시키고자 하였다. 자연철학은 '자연 실재에 의해서 사람의 의식이 정해진다'는 결정론(숙명론)이라는 문제점을, 선험철학은 '자연 실재는 없고 사람의 의식만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독단론이라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12] 이제 문제는 결정론과 독단론, 실재와 관념을 어떻게 통일시키느냐에 달려 있다.

이미 셸링은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말한 적이 있다. 예술작품의 미적 직관을 통해 '주관과 객관의 일치'를 관조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셸링은 미적 직관을 통한 관조만으로는 부족한 면이 있다고 보았다. 그 일치는 전적으로 '주관의 입장에서의' 주관과 객관의 일치인 것이다. 따라서 셸링은 이 종합을 매우 근원적인 차원에서 고찰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은 철학의 '체계 자체'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된다. 그는 바뤼흐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체계가 이 문제의 해답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절대자인 '신이 곧 자연'이며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그 자연의 다른 속성들에 불과하다는 스피노자의 일원론적 체계를 받아들인다면,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더 이상 구별되는 실체들이 아니라, 단지 절대자의 다른 속성들이 된다.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은 더 이상 이질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무차별적으로 동일한 것이다. 다만 세상 만물에 차이가 있는 것은, 그 조직화의 발전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정신'이며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이라는 셸링의 주장은, 실재와 관념의 완벽한 통일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선 실재와 관념이 '어떻게' 완벽히 일치하는지를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세상은 두차원으로 구별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애초에 한차원의 세계였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다만 스피노자의 양태[13]라는 개념은 기계론적 설명이기 때문에, 이를 유기체적 설명과 융합시켜야 된다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3.4. 자유의 철학

그 유명한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은, "무차별적으로 동일"하다는 셸링의 동일성 철학을 "모든 황소가 검은 소로 변하는 캄캄한 밤"이라고 비판한다. 밤에는 모든 소가 검은 소로 보이기 때문에 구분이 되지 않듯이, 셸링의 말대로 모든 것이 절대자로 동일하다면 어떻게 자연 세계가 서로 다른 형태와 정신을 지니고 있는지를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셸링은 이렇게 반박한다. 셸링이 '동일하다'고 말했던 것은 '생산하는 자연'(능산적 자연[14])을 가르킨 것이지, '생산되어진 자연'(소산적 자연)을 가르킨 것은 아니었다고 말이다. 여기서 '생산하는 자연'이란 자연의 근원적인 힘과 활력, 지금으로 치면 '생명력'[15]을 의미하고, '생산되어진 자연'은 그 생명력의 결과물로 산출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셸링의 주장은 '약동하는 자연의 근원적인 생명력이라는 차원에서 동일하다'는 것이며, (만들어진) 자연 만물의 형태와 생태가 동일하다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하나의 거대한 생명력에서 만물이 다양하게 차이날 수 있는 것은, 그 생명력의 유기체적 조직 정도에 따라서 각각의 다른 기능을 하는 부분들 사이에서 보이는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각각의 부분들에 차이가 있어 보여도, 그것들의 합은 하나의 유기체적 전체로서 스스로를 끊임없이 산출해나가는 하나의 자연 목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의 자연 목적(생명력) 자체가 바로 셸링이 말하는 절대자가 된다.

하지만 인간은 인간의 자아가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행위하고 실존하는 신을 요구한다. 타락한 현실에 대적할 수 있는 선한 신을 구한다. 이는 인격적인 신을 요구하는 것이며, 이와 같은 신 안에서만 자아는 실재적인 지고의 선을 본다. 셸링은, 칸트가 주장했듯이 '이성적인 계산을 통해 행복을 덕에 배당하는 도구로서 신의 필요성'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필요성에 의해서 인격적인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라고 주장한다.[16] 그러나 앞서 자연 전체의 생명력이 신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것은 범신론이며 인격적인 신과 상반되는 것은 아닌가? 셸링은 이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인격적인 신이 실존한다고 믿었던) 성 바울로 자신도 '우리는 신 안에서 살며 활동하고 존재한다'고 언명하고 있지 않은가?"[17]

인격적인 신의 실존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인격적인 신은 인격을 지녔기 때문에 인간처럼 악을 저지를 수 있지 않은가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이 문제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선 '인격'이 무엇인지 밝혀야 한다. 셸링에 따르면 인격은 처음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획득되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어두운 바탕이 있다. 곧, '무의식적이고 맹목적인 의지, 삶 또는 충동' 등의 어두운 바탕 위에서 만들어져 나가는 것이 '인격'이다. 인간은 이러한 어두운 바탕으로부터 점차 벗어나 자신의 '이성적인 인간성, 도덕성'을 발전시켜 나간다. 하지만 인격이 점점 완성되어 나가더라도 어두운 부분은 언제나 남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선악을 구분해서 보는 우리 인간은, 언제나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자유가 생긴다. 반대로, 관념과 실재가 하나로 통일된 신의 세계에서는 (실존의 근거로서의) '어둠의 의지ㆍ충동' 과, (실존으로서의) '빛의 이성ㆍ인격성' 역시도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즉, 신에게 있어서 선악은 구분되지 않기 때문에, 악의 문제는 애초부터 신과는 상관없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이 자연에 의해 결정된다'는 숙명론(필연성)과 '모든 것은 자아의 의식에 불과하다'는 독단론(자유)은, '생산하는 자연'(능산적 자연)의 맹목적인 활동력에서 '인격을 가지고 실존하는 신'을 마음 깊이 요구하는 것으로 종합된다. 즉 자유로운 인간이 요청하는 '실존하는 인격 신'에 의해서 모든 모순이 해결되며 비로소 관념과 실재는 하나가 된다.[18]

3.5. 종교의 철학

인격적인 신의 실존을 인정함에 따라, 곧 종교철학이 그의 사상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말년의 셸링은 인간의 신앙을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고 종교적 의식(religious consciousness)의 역사가 인간에 대한 신적 계시이기도 한 것을 밝히고자 한다. 여기선 종교적 철학이 아니라 철학적 종교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리스도교적 색채가 짙다. 그럼에도 셸링은 신학자, 설교자의 입장이 아니라 철학자의 입장으로서, 종교적 의식[19]의 발전을 더 높은 차원의 '지식'의 발전으로 설명한다.

셸링은 동양과 서양의 고대 신화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교의 삼위일체론의 교의에 이르기까지의 종교적 신앙의 발전 속에서 하나의 인격적인 신의 자기 계시를 발견한다. 또한 타락과 신에의 귀환이라는 사상도 찾는다. 이 모든 개념 발견에서 신화는 맹목적이고 자유롭지 못한 비정신적인 종교이며, 이는 역사가 진보함에 따라 자유로운 의지의 결과로서 실존하는 신의 계시 종교로 귀결되는 것이다.

4. 영향

셸링의 실존 개념은 쇠렌 키르케고르의 실존으로 이어졌고, 키르케고르의 실존 개념은 20세기 실존주의를 탄생시켰으니, 이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헤겔의 전체주의적 면모를 가장 격렬하게 비판하는 것도 이런 역사적 맥락 안에 있는 것이다. 사실 셸링의 초기 철학에 영향을 받아 헤겔의 철학이 탄생했고, 셸링의 후기 철학은 다시 헤겔의 철학을 비판하는 큰 흐름을 만들었으니, 현대철학을 관통했던 두 철학인 헤겔-마르크스주의와 실존주의는 그의 영향력 아래 있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럼에도 1950년대까지 셸링은 잊혀진 존재였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로 헤겔의 전체주의적인 면모를 비판하기 위해 셸링과 낭만주의를 연구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났고, 2000년대 들어서는 반대로 헤겔을 온전하게 구성하기 위해 셸링의 철학을 이용한 지젝의 연구가 유명하다.

5. 여담


[1] 그래서 인간에게 '자유'가 있는 것이다.[2] 자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은 법칙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자유가 없다는 시각이다.[3]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데, 자연은 자유가 없는 필연성을 띄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된다.[4] '관념과 실재'에 관한 헤겔의 입장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증법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즉, 한번은 관념이 우세했다가, 다른 한번은 실재가 우세했다가 하면서, 관념과 실재는 하나의 절대정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서 실재가 우세하다는 말은, 관념이 현실과 만나면서 한계에 부딪치고 뒤집히는 것(反)을 말한다. 그리고 이들의 종합(合)을 통해 관념이 다루는 한계가 점차 넓어지는 것.)[5] 반면 신의 경우에는 '어둠'과 '빛'이 하나로 통일되어 있어 구분되지 않는다. 자세한 것은 '자유의 철학' 문단 참조.[6] 재생성은 말그대로 자기 번식이 활발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곤충은 인간보다 재생성이 두드러진다.[7] 감각을 민감하게 받아들여 이성과 감정이 발달되어 있음을 말한다.[8] 셸링은 심지어 "어떤 하나의 종이 다른 종으로 변양하는 사례는 인간의 경험에는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경험적 증거가 없다고 해서 이와 같은 변양이 불가능하다는 증명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변화는 인간의 경험이 미치지 않는 아주 긴 시간에 걸쳐 비로소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셸링은 이에 덧붙여 "그러나 이 가능성들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하자"고 말하고 있다. 곧 셸링은 창발적 진화의 가능성을 인정은 하지만, 그의 관심은 자연의 발생사에는 없고 자연의 관념적 또는 이론적 구성에 있는 것이다. ㅡ 《18, 19세기 독일 철학》 프레드릭 코플스턴 지음. p.194[9] 다만 피히테는 관념론을 펼치면서도 외부의 자연 실재를 인정했다. 하지만 셸링의 선험 철학은 외부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고 단지 관념론의 세계만 인정한다. 셸링에게는 이미 그 자신의 자연철학(실재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10]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와 의미가 같다고 보면 된다. 이상적인 관념들의 세계를 의미한다.[11] 주관과 객관의 종합은 예술작품을 관조하는 미적 활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한다.[12] 셸링의 선험철학은 피히테의 자아철학에 큰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는데, 피히테는 자신의 자아 철학을 독단론이라 보지 않았다. 자아를 중심으로 지식론을 말했지만 외부의 실재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셸링은 자신의 선험철학을 '자아의 의식만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독단론이라고 주장했다. 셸링에게는 이미 그의 자연철학이 있었기 때문에, 굳이 선험철학에서 자연의 실재를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13] 정신과 물질의 실체는 하나(신=자연)이며, 그것들의 차이는 단지 '양적으로 보여지는 형태'(양태)가 다를 뿐이라는 스피노자의 주장을 말한다.[14] 바뤼흐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을 말하는 것이다. 셸링은 스피노자의 철학을 자신의 철학에 접목시켜 동일성 철학을 만들었다.[15] 다만 여기서 생명력은 생명만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돌과 물 같은 비생명 물질들도 가지고 있는 자연의 근원적인 힘을 말한다.[16] 이런 점은 슐라이어마허와 동일한 견해다. 단지 슐라이어마허는 그것이 '절대자에 대한 절대 의존적 감정'이어야 된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사실 슐라이어마허는 셸링과 낭만주의 철학을 같이 하면서 셸링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17] 《18,19세기 독일철학》 p.224[18] '아이러니 (모순)의 통일'이라는 주제는, 같은 철학을 공유했던 동시대의 낭만주의자 횔덜린, 슐레겔 등의 시와 철학에서도 자주 보인다.[19] 여기서 의식은, 인식하고 생각한다는 '의식(意識)'이지, 행사에서의 일정한 법식을 가르키는 '의식(儀式)'이 아니다.[20] 이에 반해 피히테에게 있어서 자연은 도구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