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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1:55:07

프리드리히 니체/사상 및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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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핵심 주제
2.1. 디오니소스적인 것2.2. 관점주의2.3. 힘에의 의지2.4. 귀족 도덕2.5. 영원회귀2.6. 네 운명을 사랑하라
3. 니체 사상에 대한 비판4. 영향력5. 관련 문서
5.1. 니체 철학 용어5.2. 사조

1. 개요

이러한 주장 역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할 뿐이라고 할 경우, 그대들은 그것에 대한 질시로 가득 차서 그것을 반박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더 좋다.
『선악의 저편』 中 [1]
똑같은 해석, 똑같은 설명, 누구나 똑같아져야 된다고 주장하는 종교, 도덕, 민주주의, 공산주의. 이런 것들은 결국 모든 것이 평범해져야 된다고 강제하며 문화를 따분하게 만들고 삶을 권태롭게 한다. 니체는 이런 사회가 되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며, '책임감 있는 개인'이 기존 사회의 가치관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그것을 허용해 주어야 된다고 주장한다. 사실 모든 인식은 누군가의 관점이며, 그런 점에서 기존 가치들도 누군가의 관점을 정당화한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다른 개인에게 강제한다는 것은 그에게 자신만의 생각을 멈추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각각의 개인은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가는 해석에서 삶의 의욕을 느낀다. 그런 창조적인 해석에서 위대한 작품이 탄생하며, 그 결과물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권태에서 벗어난다. 그러므로 개인의 해석을 가로막지 말고, 서로의 창조적인 해석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된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해석'이란 무엇인가? 모든 개인의 '살아있는' 해석은 누군가를 이기려고 하는 해석이며, 그것은 상대의 해석을 짓밟고자 하는 일종의 잔인하고도 교활한 지배욕이다. 그러나 짓밟기만 해서는 '창조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그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어 나가야만 한다. 그래야 삶의 의욕을 되찾고 현재를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그것이 일종의 놀이라고 주장한다.

2. 핵심 주제

2.1. 디오니소스적인 것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그리스 비극의 기원을 말한다.[2][3]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 축제에서 유래했다. 디오니소스 축제에 참가한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시며 광란과 흥분의 욕구를 표출했는데, 사람들은 도취된 상태에서 자신의 개별성에 대한 의식을 상실하고, 흥분 상태의 축제 군중으로 스며들어 그들과 하나가 되어버린다. 이 흥분 상태의 집합체 안에서 다양한 환상과 이미지가 떠돌며, 하나로 융해된 사람들은 이런 환상과 이미지를 서로에게 감염시킨다. 그래서 디오니소스 축제에 도취된 사람들은 모두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체험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런 후에는 언제나 이 도취 상태에서 깨어나는 순간이 오기 마련이며, 이 순간이 되면 모두가 각자의 개별성을 되찾는다. 각성 상태로 돌아가는 이 과정은 어렵고도 위험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들을 도와주는 제의 과정이 발달하게 되는데, 디오니소스 축제 말미를 장식한 비극 상연은 다름 아닌 이 집단적 도취 상태로부터 현실의 일상적 삶으로의 이행을 돕는 제의였던 것이다.[4]

따라서 그리스 비극은 '도취적 음악'과 '명료한 형식'이 혼합된 것이다. 니체는 이를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아폴론형식, 명료성, 확고한 윤곽, 밝은 꿈, 그리고 무엇보다도 타인과 구별되는 개별화를 주관하는 신이다. 조각, 건축, 호메로스적인 신들의 세계, 서사시에 나타나는 정신,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아폴론적이다. 반면에 디오니소스해체, 열광, 황홀, 광란을 주관하는 사나운 신이다. 음악, 그리고 다 함께 도취되어 하나가 되는 것이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다. 아폴론적인 예술의 매력은 구분하여 명료하게 하는 데 있지만, 디오니소스적 예술에서는 경계가 유동적이어서 음악이나 춤, 혹은 다른 예술에 매혹된 사람은 그 거리감을 잃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 그 두 가지가 조화롭게 합쳐진 예술이 '그리스 비극'이다.[5] 그리고 그 둘의 융합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그 비극 무대에서의 '합창(코러스)'이다. 합창에서 일부 개인은 한동안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집단적 합창에 대항해 자기 목소리를 가지려고 한다. 어찌 보면 그것은 일종의 '불협화음'이다. 불협화음이란 게 원래 그렇듯, 이로 인해 무대 위 팽팽한 긴장 상태가 조성된다. 그러나 주인공들이 제각기 목소리를 내면서 합창에 벗어나고자 해도, 종내는 합창의 조화로 다시 섞여 들어간다.[6] 이렇게 개인과 전체, 질서와 충동의 정서가 잘 조화된 것이 바로 그리스 비극이었다.

그런데 그리스 비극에 소크라테스가 영향을 끼치면서 그리스 비극은 점차 몰락한다. '선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의식되어야 한다'는 변증법적 소크라테스식 사유가 음악의 힘을 분쇄해 버린 것이 가장 치명적이었다. 이제 흥분과 열정의 감정들은 사라지고 논리적인 계산이 무대를 지배한다. 무대 위에서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고 토론이 벌어질 뿐이다. 무대 위의 사건은 그 비밀을 상실하며, 주인공들은 계산 착오로 인해 고통을 당한다. 비극적 근본 분위기는 어느새 다 사라지고 없다.[7] 그리하여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없어지고 아폴론적인 것만 남은 그리스 비극은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니체는 사라진 그리스 비극을 되살릴 적임자로 바그너를 지목한다.
사실 나는 괴테가 디오니소스적 예술의 모태가 되는 주신제와 같은 것을 그리스적 영혼의 가능성들로부터 원칙적으로 배제해 버렸으리라는 점을 의심치 않는다. 따라서 괴테는 그리스인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디오니소스적 비밀 제의에서야, 디오니소스적 상태의 심리학에서야 비로소 그리스적 본능의 근본적인 사실, 즉 '생에의 의지'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인은 이런 비밀 제의에 의해 무엇을 보장했는가? 영원한 삶, 삶의 영원 회귀였다. 과거 속에서 약속되고 신성시된 미래였다. 죽음과 변화를 넘어서 있는 삶에 대한 의기양양한 긍정이었다. 그리고 생식과 성의 신비를 통한 총제적 생명의 존속으로서의 진정한 삶이었다. 이 때문에 그리스인에게 성적 상징은 경외할 만한 상징 자체였고, 모든 고대적 경건성에 내재한 심오한 의미였다. 생식ㆍ수태ㆍ출산의 행위에 속하는 세부적인 하나하나의 일이 최고의 엄숙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비밀 제의의 가르침에서는 고통이 신성한 것으로 선포되고 있다. '산모의 통증'은 고통 일반을 신성한 것으로 만든다. ㅡ 모든 생성과 성장, 미래를 보증하는 모든 것이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다. 창조의 기쁨이 존재하려면, 삶에의 의지가 자신을 영원히 긍정할 수 있으려면, '산모의 고통'도 영원히 존재해야만 한다. 이 모든 것을 디오니소스라는 말이 의미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그리스적 상징, 디오니소스 축제의 상징보다 더 고귀한 상징을 알지 못한다. 그것에서는 삶의 가장 깊은 본능, 곧 삶의 미래와 삶의 영원성을 향하는 본능이 종교적으로 체험되고 있다. 삶으로 향하는 길 자체가, 곧 생식이 신성한 길로 체험되고 있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8]
니체의 초기 저술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개념은, 후기 니체로 가면서 '디오니소스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그 속에 '아폴론적인 것'마저도 포함하는 '영원 회귀'의 개념으로 바뀐다. 즉, 후기 니체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삶의 도취에 대한 비밀, 그것은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9] 이를 통해 상반된 가치의 의지들이 '태어남(창조)의 순간'을 매개로 서로 긴밀히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10]

2.2. 관점주의

오직 관점적인 봄만이, 오직 관점적인 '인식'만이 존재한다.
『도덕의 계보』 세 번째 논문 12절[11]
신, 이데아, 물자체 등 불변하는 가상에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형이상학자들은 모든 가치들이 진리와 비진리로 대립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니체는 대부분의 생각들이 본능에 의해 은밀하게 인도되고 움직이므로, 우리가 평소에 상반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치들이 사실은 대립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12] 어떤 명제, 착상, 영감 등은 대부분 그들의 마음속 소망이 추상적으로 변형된 선입견에 지나지 않는 것인데, 그것들은 나중에 찾은 근거들에 의해서 정당화되고 있을 뿐이다.[13] 그렇다! 모든 철학은 항상 자신의 모습에 따라 세계를 창조하려는 충동 그 자체이며, 각 철학을 창시한 자들의 일종의 자기 고백이자 의도하지도 않았고 자신도 모르게 쓴 일종의 회고록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어떤 도덕적 가치를 추구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서, 그의 내밀한 본능들이 어떠한 위계질서를 갖는지 확인할 수 있다.[14]

플라톤, 그리스도교, 스토아 철학자, 칸트, 셸링, 헤겔 등도 자신의 충동과 믿음에 따라, 자연을 단편적으로 이해해 왔다. 생각의 주체인 자아가 존재한다는 데카르트도, 자신의 확신을 일종의 직관적 인식에 호소하면서 ㅡ 생각하는 어떤 것이 나라는 것, 생각하는 어떤 것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 생각이란 그것의 원인으로 간주되는 어떤 존재의 활동이며 작용이라는 것, 하나의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라는 ㅡ 논증하기 불가능한 일련의 대담한 주장들을 펼쳤던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물리학은 보고 만질 수 있는 감각적 근거에 기초하므로 적어도 그것은 최소한의 확실성을 담보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물리학만으로는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전부 다 보여줄 수 없으므로, 그것 또한 자연에 대한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15] 심지어 앞선 철학들보다도 삶을 더 힘차고 즐겁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의미와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16] 그것은 (삶의 가치가 아니라) 도구나 다름없다.[17]

이렇게 철학자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달랐으므로, 인간의 기본 충동들 모두는 이미 한 번은 각자의 철학을 수행해 왔다고 볼 수 있다.[18] 그리고 이런 충동들은 세계를 각자의 방식으로 왜곡해 왔기 때문에 잘못된 판단이고 오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왜곡이라고 하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 우리는 상상도 못 할 자유, 무분별, 경솔함, 왕성함, 삶의 명랑함을 즐기기 위해서, 즉 삶을 즐기기 위해서 이렇게 단순화되고 철저하게 인위적이고 적당히 꾸며지고 적당히 왜곡된 세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19] 심지어 사상 자체에서나 통치, 웅변과 설득, 예술, 윤리 등의 어느 분야에서든지 이 지상에서 자유롭고 정교하며 대담하고 춤처럼 경쾌하며 대가다운 확신을 갖는 것으로서 존재하거나 존재해 온 모든 것도 그런 왜곡된 판단 덕분에 비로소 발전해 온 것이었다.[20] 즉, 그것은 삶의 조건이므로, 그것이 잘못된 판단이라고 애써 그것을 우리의 삶 밖으로 밀어내서는 안 된다.[21]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모든 충동은 지배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각각의 기본 충동들은 하나하나가 바로 자신을 기꺼이 존재의 궁극 목표이자 나머지 모든 충동 위에 군림하는 정당한 주인으로 내세우고 싶어 한다.[22] 그것은 "나 자신 이외의 아무것도 진리가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수많은 다른 가치들을 없애려고 한다. 그러나 어떤 한 사람에게 정당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반드시 정당할 것이라고 할 수 없듯이,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가치를 요구하는 것은 각자의 가치 추구를 방해함으로써 각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것임을 알아야 한다.[23]

가치를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해석만 강요하는 것도 부당하다면, 우리는 다양한 관점들과 정념들이 개입하는 해석들을 최대한 허용하는 가설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하나의 사태에 대해서 더 많은 정념으로 하여금 말하게 할수록, 우리가 동일한 사태에 대해서 더 많은 눈과 다양한 눈을 동원하면 할수록, 이러한 사태에 대한 우리의 '개념'은 보다 유연해지고 보다 넓어질 것이다.[24] 그렇다고 회의주의나 상대주의처럼 다양한 관점을 그저 수집하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된다. 다양한 가치 앞에서 단순히 중립을 지키려고 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게 됨으로써 허무주의로 귀결된다.[25] 우리는 결국 저 다양한 관점들을 자기만의 방식대로 연결하고 관점들의 위계를 재설정하여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야만 한다! 우리는 새로운 어떤 것으로 존재해야 하고, 새로운 어떤 것을 의미해야 하며, 새로운 가치를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26] 그래서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하는 자며 입법자다. 그들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선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떠한 목적을 가져야 할지를 규정하는 작업을 하면서, 과거를 정리해온 모든 사람들의 준비 작업을 자신의 뜻대로 사용한다. 그들은 창조적인 손으로 미래를 붙잡는다. 그들의 '인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하나의 입법이고, 그들의 진리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다.[27]

2.3. 힘에의 의지

이제 '자연 그대로의 인간'(homo natura)의 정념들과 그 정념들의 적나라한 위계를 모두 솔직하게 드러내는 해석을 하는 것이 니체의 목표가 된다.[28] 사유가 욕망과 열정의 충동들 상호 간의 연관에 불과하다면, 시험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가능하다. "이 '주어져 있는 것(충동)'만으로도 이른바 기계적(또는 '물리적인') 세계까지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는가?" 즉 그것은 유기체적인 과정 속에서 분화되고 전개되어 나가기 이전에 모든 것이 강력한 통일체 속에 통합되어 있는 보다 원초적인 형태의 정념 세계, 일종의 충동적 생을 의미한다. 기계적 세계를 이러한 생명의 초기 형태로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우리의 충동적인 생 전체를 의지의 유일한 근본 형태, 즉 힘에의 의지의 분화와 전개로서 설명할 수 있다면, 또한 모든 유기적 기능을 이러한 힘에의 의지로 환원할 수 있다면, 작용하는 모든 힘을 '힘에의 의지'로서 분명하게 규정하는 것은 정당성을 얻게 될 것이다. 내부로부터 관찰된 세계, 그것이 갖는 '예지적 성격'에 의해서 규정되고 정의된 세계는 '힘에의 의지', 이외의 것이 아니다.[29]

자연을 있는 그대로 생각해 보라. 그것은 한없이 낭비적이고 아무런 관심도 의도도 없으며, 정의감도 배려도 자비도 없고, 풍요로운가 하면 황량하고 동시에 불확실하다.[30] 그러한 자연 속의 놓여진 생명 자체는 본질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타자를 자기 것으로 하고 그것에게 위해를 가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것은 냉혹하며, 자신의 형식을 타자에게 강제하고 타자를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것이고, 가장 부드럽게 말한다고 해도 최소한 착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기체의 근본적인 기능으로서 살아 있는 것의 본질에 속하며, 생명의 의지 자체인 본래의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주장에 불편해질는지도 모르지만, 이는 모든 역사의 근본적인 사실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정도로 우리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한다! [31]

한 인간의 정신에 있어서도 그런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정신'이라고 불리는 저 명령적 존재는 자신과 자신의 주위에 대해서 주인이 되고 싶어 하고 자신을 주인으로서 느끼고 싶어 한다. 그것은 살아 있고 성장하며 번식하는 모든 생명체가 지니는 동일한 욕구와 능력을 가지며, 낯선 것을 결합하고 구속하고 지배하려고 하고 실제로 지배하는 의지를 갖는다. 정신은 낯선 것이나 '외부 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의 특정한 윤곽이나 특징을 자의적으로 강조하고 자신에 맞게 왜곡한다. 이 경우 정신이 의도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자기 것으로 체화하고 새로운 사물들을 기존의 계열 속에 편입시키는 데, 즉 성장하는 데 있으며, 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성장한다는 느낌, 힘이 증대되었다는 느낌을 갖는 데 있다.[32]
주거를 제공하고, 오락을 제공하고, 음식과 영양을 제공하고, 건강을 주었음에도, 사람은 여전히 불행과 불만을 느낀다.
사람은 압도적인 힘을 원하는 것이다.
《아침놀》 中
이러한 의지란 많은 감정과 사유들의 복합체이며, 단어로서만 단일체로 표현될 뿐이다. 또한 '힘에의 의지'는 기존의 해석을 넘어서려는 자신만의 새로운 해석이며, 무엇보다도 그것은 명령의 정념이다. '의지의 자유'라고 불리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 갖는 우월감이다. 즉 "나는 자유롭다. '그'는 복종해야 한다"는 의식이 모든 의지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의지 속에는 저 주의집중, 오로지 하나의 목표에만 똑바로 고정된 시선, '지금 이것 이외의 다른 것은 전적으로 불필요하다'는 저 무조건적인 가치평가, 복종시킬 수 있다는 내적인 확신, 명령하는 자의 상태에 속하는 그 모든 것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한 인간, 의욕하는 인간은 복종하거나 복종하리라고 믿는 자기 내부의 어떤 것에 대해서 명령을 내린다. 동시에 그는 그 명령을 수행하는 자이므로, 인간은 '명령하는 자'면서 동시에 '복종하는 자'다. 그러면서 그는 내면의 또 다른 의지와 함께 이 명령에 저항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한 인간은 수많은 의지들이 저마다의 힘을 과시하는 장이자 그들의 위계를 두고 싸우는 전쟁터인 것이다.[33] [34]

그것은 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옛날부터 모험심, 대담함, 복수심, 교활함, 약탈욕, 지배욕과 같이 강력하고 위험한 충동들은 외부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제까지 집단에 유용하다는 의미에서 존중되었을 뿐 아니라 크게 육성되고 단련돼야만 했다. 하지만 사회가 안정된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충동들이 이웃들에게 위험하다고 여겨졌고 점차 부도덕한 것으로 낙인이 찍히고 비난을 받게 되었다.[35] 그래서 의지가 병들고 퇴화한다. 오늘날 보다 높은 인간, 보다 높은 영혼, 보다 높은 의무, 보다 높은 책임, 창조력과 지배력으로 넘치는 대부분의 것들은 배척된다. 그들은 독립적으로 결단을 내릴 줄 모르며 의지에 깃들인 용감한 쾌감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 의지박약자와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홀로 서고 고독을 즐기며 자신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고귀한 인간의 조건이 된다.[36]

고귀한 인간은 자신 속 강력하고 서로 화해하기 어려운 충동들을 능숙하고 교묘하게 조정하여, 그러한 본성 안의 대립과 싸움을, 삶을 자극하고 북돋는 것으로 만든다. 그리하여 기묘한 마력을 지닌 저 불가해하고 불가사의한 인간, 승리를 거두고 사람을 유혹하도록 미리 운명지어진 수수께끼 같은 인간이 출현하게 된다.[37] 또한 고귀한 인간은 자신을 가치를 규정하는 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존중하며, 충만한 느낌, 넘쳐흐르려고 하는 힘의 느낌, 고도의 긴장에서 오는 행복감, 베풀어주고 싶어 하는 풍요로움의 느낌을 가진다. 그도 불행한 자를 돕지만, 동정에서가 아니라 넘쳐나는 힘에서 비롯된 충동에서 돕는다. 고귀한 인간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강력한 자를 존중하는 바, 이 강력한 자란 자신을 제어할 힘을 가지고 있으며, 말하고 침묵하는 법을 알고 있고, 자기 자신을 엄격하고 혹독하게 다루는 데서 기쁨을 느끼며, 엄격하고 혹독한 모든 것을 존경하는 자다. 그렇기에 고귀한 인간들은 겁 많은 인간, 불안해하는 인간, 소심한 인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는 인간, 편협하고 의심 많은 인간, 비굴한 인간, 학대를 감수하는 개 같은 인간, 거지 같은 아첨꾼,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짓말쟁이를 경멸한다.[38]

소심하고 비굴한 인간들은 가능하다면 고통을 없애려고 한다. 하지만 고귀한 인간은 오히려 일찍이 없었던 정도로 고통을 증대시키고 더 악화시키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안락과 같은 것은 그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우습고 경멸받아야 할 것으로 만드는 상태이다! 고통을 견디는 훈련, 거대한 고통을 견디는 훈련, 이러한 훈련만이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고양을 가능하게 했다. 영혼의 힘을 강화시켜주는 불행 속에서 영혼이 느끼는 긴장, 위대한 파멸을 눈앞에 볼 때 영혼이 느끼는 전율, 불행을 짊어지고 견뎌내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영혼의 독창성과 용기, 그리고 또한 일찍이 비밀, 가면, 정신, 간지(奸智), 위대함에 의해 영혼에게 선사된 것, 이것들은 고통을 겪으면서 그리고 거대한 고통의 훈련을 겪으면서 영혼에게 선사된 것이 아닌가? [39]
존재를 최대한 풍요롭게 실천하고 최대한 만끽하기 위한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 화산의 비탈에 너의 도시를 세워라!
『즐거운 학문』

2.4. 귀족 도덕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좋음ㆍ선함(gut)'이라는 단어에 대한 어원학적 탐구를 통해 그것의 원래 의미를 찾아나간다. '좋음(gut)'은 원래 귀족을 가리키는 '고귀한', '기품 있는', '특권을 지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또한 '좋음'과 관련된 단어들과 어근에서는, 귀족들이 스스로를 '강력한 자', '지배하는 자', '명령하는 자'라는 뉘앙스로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대립하는 단어인 'schlecht'라는 독일어는 원래 평민을 가리키는 '소박한', '단순한'이라는 뜻에 불과했다. 거기에는 아무런 비난의 의미가 없었다. 즉, 귀족들은 스스로를 '좋은 것(gut)'으로 평가하고 나서, 이후에 그렇지 못한 평민들을 '나쁜 것(schlecht)'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반면 gut에 대립하는 또 다른 단어, '악함(böse)'은 귀족이 생각해낸 단어가 아니다. 넘쳐흐르는 자신감과 활력을 지니고 있는 귀족은 자신의 넘치는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 적을 필요로 하므로 경멸할 점이 전혀 없고 존경할 점이 매우 많은 자만을 자신의 적으로 삼기 때문에 '(상대가) 악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악함(böse)'이라는 단어는 어디서 유래된 것일까?

우리는 모든 귀족적인 종족의 근저에서 맹수, 즉 전리품과 승리를 탐욕스럽게 찾아 헤매는 야만인(Barbar)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미치광이 같고 비이성적이고 갑작스럽게 표출되는 '대담함',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그들이 행하는 모험의 예측 불가능함, 안전ㆍ육체ㆍ생명ㆍ안락에 대한 그들의 무관심과 경멸, 온갖 파괴를 자행하고 승리와 잔인함을 탐닉하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전율할 정도의 쾌활함과 깊은 쾌감 등을 말이다. 그들 기사적 귀족에게는 강한 육체, 젊고 왕성하며 넘쳐흐르기까지 하는 건강, 그러한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 즉 전쟁, 모험, 사냥, 춤, 투기와 강하고 자유로우며 쾌활한 행동을 포함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추구해야할 가치다.

반면 이러한 귀족들에게 억압당하고 짓밟히고 능욕당한 자들은 무력감에서 비롯된 복수심 서린 간계(奸計)로 자기들끼리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저 악한 자들과는 다른 존재, 선한 존재가 되자! 선한 인간이란 능욕하지 않는 자, 그 누구도 해치지 않는자, 공격하지 않는 자, 보복하지 않는 자, 우리처럼 인내하고 겸손하며 올바른 자이다." 즉, 약한 자들은 가장 깊은 증오와 원한을 가지고, 자신의 적과 정복자들의 가치(좋은=고귀한=강력한=아름다운=행복한=신의 사랑을 받는)를 철저하게 '악한 것(böse)'으로 전도시켰던 것이다. 이른바 노예도덕에서는,[40] 보복하지 못하는 무력함이 '선량함'으로 바뀌고, 겁에 가득찬 비굴함은 '겸손'으로 바뀌며, 자신이 증오하는 자들에 대한 복종은 '순종'으로 바뀌고, 약한 자의 비공격성, 그가 풍부하게 지닌 비겁함 자체, 문 앞에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인내'로 바뀐다. 여기에선 복수할 수 없음이 복수하고 싶어 하지 않음이라고 불리고 심지어는 용서라고까지 불린다.

니체는 이러한 가치의 전도가 '양심의 가책(죄책감)'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그리고 양심의 기원을 알아내기 위해서 '형벌'을 우선 살펴본다. 머나먼 과거에 형벌이라는 것은, 갚지 못한 빚에 대한 보상으로, 채무자에게 고통을 가함으로써 채권자가 그 쾌감을 맛보게 하고 피해에 대한 분노를 풀기 위한 것이었다. 잔인함이라는 것이 고대 인류의 거대한 축제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주는 것이었던가. 그것은 오늘날에도 정신화되고 신성화되어서 이어져오고 있다. 실로 냉혹한 명제이긴 하나, 타인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것은 유쾌한 일이다.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더욱더 유쾌한 일이다. 인간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긴 역사는 '잔인함이 없이는 축제도 없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형벌에도 축제적인 성격이 참으로 많이 존재한다! 이런 자들에게서 '양심의 가책'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처음부터 자명하다. 반대로 형벌을 당하는 입장에 있는 '죄 지은 자'에게서 형벌은, 대체로 인간을 비정하게 그리고 냉혹하게 만드는 것이다. 범죄자는 재판 절차나 집행 절차를 실제로 목격함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행위와 행위방식을 그 자체로서 비난받아야 할 것으로 보지 않게 된다. 행동만 놓고 보면, 자신의 범죄나 공동체의 형벌이나 그 폭력적 행위 자체는 똑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벌이 죄를 지은 자에게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킨다는 믿음은 틀린 것이다. 역사 시대가 시작되기 이전의 저 수천 년을 생각해본다면, 죄책감의 발달을 가장 강력하게 저지한 것은 도리어 형벌이었다고 주저 없이 단정할 수 있다.

그럼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지배자는 국가가 만들어지자 그 권력으로 약자들을 더 용이하게 관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점차 '잔인한 형벌'을 금지시켰고, 약자들은 그 잔인함에서 비롯되는 쾌감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렇다고 지배자의 권력에 자유를 억압당한 약자들이 딱히 할 수 있는 것은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외부로 향하던 그 자유의 본능을, 방향을 바꾸어 그 자신의 내면세계에 폭발시키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적의, 잔인함, 박해를 가하려고 하고 습격하려고 하며 변혁하고 파괴하려는 욕망, 이 모든 것이 바깥으로 발산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러한 본능의 소유자 자신을 향하는 것. 이러한 내면화가 바로 '양심의 가책'의 기원이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괴로워 하는 병에 걸린 인간은 성급하게 자기 자신을 찢고 박해하고 물어뜯고 괴롭히고 학대했다. 이 은밀한 자기 학대, 이러한 예술가적인 잔인성, 자기라는 둔중하고 반항적이며 고통스러워하는 소재에 하나의 형식을 부여하여, 그것에 의지, 비판, 모순, 경멸, 부정을 새겨 넣는 이 쾌감, 자신을 괴롭히면서 느끼는 쾌감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의도적으로 자신을 분열시키는 영혼의 이러한 능동적인 '양심의 가책' 전체야말로 이상적이고 공상적인 사건들의 진정한 모태로서 수많은 신기한 아름다움과 긍정을 출현하게 한 것이기도 하다.

한편, 종족 공동체에서 현재의 세대는 이전 세대의 희생과 업적의 덕택으로 존속한다는 확신에서 조상에게 그러한 빚을 되갚아야 한다는 일종의 법률적 의무를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 빚을 지불하기 위해, 제물, 축제, 예배당, 의례, 특히 조상이 만든 모든 관습에 대한 복종함으로서 그 의무를 행했다. 관습에 대한 복종 의무에서 비롯된 힘과 그 힘에서 느끼게 되는 '조상에 대한 공포'는, 종족 자체의 힘이 증대되는 것에 정확히 비례해서 필연적으로 점점 커진다. 가장 강력한 종족들의 선조는 증대되는 공포 자체의 상상에 의해서 종내에는 어마어마한 존재로 커지게 되고, 결국에는 필연적으로 하나의 신으로 변형되어 믿어진다. 아마도 여기에 신들의 기원 자체가, 즉 공포로부터의 기원이 존재한다! 역사가 가르쳐주듯이, 신성에 대해서 빚을 지고 있다는 이러한 의식은 혈연에 기초한 '공동체'의 조직 형태가 몰락한 후에도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저 널리 퍼져 있던 노예들과 예속된 주민들은 강제에 의해서든 굴종과 모방에 의해서든 그들을 지배하는 자들의 신들을 숭배하였고, 이와 함께 '신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의식' 역시도 수천 년에 걸쳐서 부단히 성장했다. 세계제국을 향해서 나아가는 투쟁과 통합의 역사는 또한 항상 보편적인 신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었으며, 독립적인 귀족계급을 제압하는 것으로 성립되는 전제 정치는 항상 어떤 일신교로 나아가는 길을 여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제까지 도달된 최대의 신인 그리스도교 신의 출현과 함께 또한 최대의 부채의식이 지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여기서 '양심의 가책'이 다시 등장한다. 이제 비관적인 일이지만, 빚을 완전히 변제할 가능성은 영원히 사라져버렸는데도, 인간은 신에게 진 그 빚마저도 '자신의 고통'으로 변제하려고 한다. 제물, 축제, 예배당, 의례 등 예전의 어떤 방식으로도 빚을 완전히 변제할 가능성이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인간에게 그 죄를 내면화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인간은 이윽고 신에 대한 그 빚에 괴로워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스스로에게 '잔인한' 고문을 가하기 시작한다. 원래부터 '양심의 가책'에는 귀족(지배자)으로 인해 동물적 본능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약자들의 기억이 새겨져 있었는데, 죄의 내면화는 이러한 인간 자신의 동물적 본능들 자체를 신에 대한 죄로 해석하게 만들었고, 그러한 동물적 본능이 일어날 때마다 인간은 '신'과 '악마' 사이의 대립이 일어나는 장이 되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빚을 상환할 수 없다는 것과 함께 어떠한 벌로도 자신이 지은 죄를 보상할 수 없다는 생각, 즉 속죄가 불가능하다는 '영원한 벌'의 사상이 싹튼다. 인간은 이러한 이상을 세움으로써 그와 같은 이상 앞에서 자신이 절대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것을 분명히 확인하려고 든다.[41] 물론 그런 잔인한 확인 속에는 은밀한 쾌감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금욕주의적인 삶을 살아감으로써 현실에서의 삶을 소외시키고 배제한다.

니체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부정함으로써 그 고통에서 오는 쾌락으로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자'를 병든 사람으로 보았다. 그들은 삶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키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결국 '활력있는 삶의 생생한 가치들'을 부정함으로써 병든 자들을 더욱 병들게 만들고 상황을 악화시킨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타인에게 강제하려고 하고 거기서 기쁨을 느낀다. 이를 통해 혐오와 동정이 전염되면서 건강한 자들마저도 병들게 만든다. 그래서 거리의 파토스가 양자의 임무를 영원토록 분리시켜야만 한다고 니체는 주장한다. 즉,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질 정도로 강하고 솔직하며 강한 활력을 지닌 고귀한 자가 동등한 힘과 활력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힘과 창의성을 발휘하도록 놔둬야 한다는 것이다.[42] 자신의 말에 책임도 못지면서 허황된 말만 하고 남의 의지를 깍아내리려는 저열한 자가 고귀한 자를 달콤한 말로 속이게 놔둬서는 안 된다. 고귀한 자들의 생존권, 불쾌한 소리만 내는 깨져버린 종에 대해서 완벽한 소리를 내는 종이 갖는 특권은 실로 천배나 더 큰 것이다. 니체는 그렇기에 고귀한 자를 우리 사회가 '양육'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2.5. 영원회귀

니체가 스위스의 실스마리아 근처 실바플라나 호숫가에서 영원 회귀 사상을 생각해냈을 당시, 니체는 에너지 보존 법칙을 공부하고 있었다. 니체가 파악한 에너지 보존 법칙이란, 한정된 공간 안에 있는 어떤 에너지는 다른 에너지로 변하는 것이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니체는 에너지(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무한의 시간 속에서 우연으로 가능한 모든 경우의 조합이 빠짐없이 한 번 씩은 나타나게 될 것이고, 미래의 언젠가는 과거의 동일한 조건과 동일한 순서를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즉, 한정된 공간에서 '우연'한 존재는 무한한 시간이 흘렀을 때 그 결과가 '필연'으로 귀결된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유한한 자'는 아무리 자유롭게 생각하고 활동해도 '무한한 시간'의 관점에서 봤을 때, 그의 유한한 활동범위와 역량 내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모두 이루어질 것이고, 그래서 했던 것을 다시 반복하게 될 것이라는게 니체의 통찰이었다.

철학도 마찬가지다. 개개의 철학적 개념들은 제멋대로 생기지도 독자적으로 성장하지도 않으며 상호 간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성장한다. 그것들은 겉보기에는 사유의 역사에서 갑자기 제멋대로 출현한 것처럼 보이거나, 각자가 비판적이거나 체계적인 의지를 갖고서 서로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 내부의 어떤 것, 즉 개념들의 저 타고난 체계와 친족성이 그들을 일정한 순서로 차례로 몰아댄다. 이러한 사실은 전적으로 입장을 달리하는 철학자들도 나타날 수 있는 철학들의 일정한 근본도식을 항상 거듭해서 확실하게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마력에 사로잡혀 항상 또다시 동일한 궤도를 달린다. 그들의 사고는 사실 새로운 발견이라기보다는 재인식이자 재기억이며, 그 개념들이 원래 유래했던 영혼의 아득한 태곳적 공유재산으로의 회귀이며 귀향이다. 이런 점에서, 철학한다는 것은 일종의 최고급의 격세유전이다.[43]

그렇다면 영원회귀란 '자신만의 가치'가 사실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또 다른 허무주의요,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이 아닌가? 과거의 모든 조건들이 똑같이 재구성되고 미래의 가치들도 누군가 이미 지나온 길이라면 우리는 권태라는 고통에서 어떻게 벗어나며 여기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되는가?

다시금 힘에의 의지를 생각해본다면, 모든 철학은 충동에 근거하고 있고, 충동은 몸의 건강에 따라 좌우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은 건강할 때 활기찬 충동에서 긍정적인 생각을, 건강하지 않을 때 무기력한 충동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하므로, 철학이란 사실 "몸의 건강을 해석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살아가는 동안 언젠가 건강을 잃어버리게 되므로, 인간이라는 존재가 고통에 직면하면서 무기력에 사로잡히고 허무주의에 빠지는 것은 어느 정도 필연적이다. 모든 인간은 몰락을 통해서 자신만의 비극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니체는 이러한 비극 속에서 하나의 사실을 발견한다. 허무주의가 우리를 끝끝내 좌절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깊이있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을 말이다.[44] 우리는 허무라는 심연을 통과하면서, 삶이 고통스러운 문제이긴 하나, 그렇기에 우리에게 의미를 가진 문제로 다가올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삶의 문제를 풀어가는 우리의 탐구, 호기심, 모험, 이로 인해 매번 색다른 시도로 달라지는 문제 풀이는, 그 자체로 우리에게 삶을 살아가게끔 해주는 하나의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기 위해선 문제 앞에서의 무거운 사색, 우울한 진지함이 아니라 조롱과 경멸, 그리고 문제를 가볍게 받아들이는 일시적이고 피상적인 쾌활함, "예술가로서의 쾌활함"이 필요한 게 아닌가? 어쩌면 삶이란 이러한 문제 풀이를 즐기는 것, 즉 '즐거운 학문'일 것이다! [45]

니체는 이런 질문들에서 과거의 조건과 미래의 결론보다 지금 이 순간의 자신의 '결심'을 소중히해야 함을 깨닫는다. 삶의 의미는 '어떤 좋은 조건과 좋은 결론을 가지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인 그 삶이라는 문제 앞에서 자신이 내놓은 결론(방향)을 향해, 당신은 직접 참여하고 체험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주어진 조건이 동일하고 추구하는 결론들도 종국에는 똑같아질지라도, '그가 선택하고 만들어온 ㅡ 그리고 만들어갈 가치'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에게만큼은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할 충분한 원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주어진 것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반복해서 '현재의 가치'를 만들어 나가는 일종의 놀이이며 구경거리다. 현재에 몰입해서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놀이 말이다.

따라서 세상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영원회귀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속에서조차 우리 자신을 살아있게끔 만드는 순간의 가치를 찾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 한 순간을 긍정할 수 있다면, 그 순간을 위해 이제까지 희생됐던 시간과 앞으로 희생될 시간 모두를 구원받을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46] 아니, 오히려 그러한 희생됐고 희생할 시간들로 인해 그 한 순간이 비로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삶에서 부정당한 측면을 단지 필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바랄 만한 것으로, 아니, 바랄 만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더 강력하고, 더 풍부하고, 더 진실된 삶의 측면이라고 여겨야 한다.[47]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은 없다는 긍정이 필요하다! [48] (단, 주어진 모든 것들을 긍정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 자신의 삶과 선택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니체는 모든 필연적인 것들을 긍정한다고 해서, '나 자신의 선택'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리고 니체는 그런 '선택의 자유'마저 마치 '필연'인 것처럼 느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필연'의 개념을 일종의 예술가적 '몰입'과 비슷한 것으로 본다.[49] [50])
나처럼 어떤 수수께끼 같은 갈망을 가지고 염세주의를 그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사유하면서, 염세주의를 마침내 금세기에 쇼펜하우어 철학의 형태로 나타났던, 반쯤은 그리스도교적이고 반쯤은 독일적인 편협함과 순진함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오랜 동안 노력해왔던 사람, 아시아적이거나 초아시아적인 눈으로 온갖 사고방식들 중에서도 가장 세계 부정적인 사고방식의 정체를 ㅡ 부처나 쇼펜하우어처럼 도덕적인 속박이나 망상에 사로잡혀서가 아니라 선악의 저편에서 ㅡ 꿰뚫어보고 그 밑바닥에 이르기까지 내려다본 사람은 아마도 바로 이로 말미암아 전혀 의도치 않게 정반대의 이상에 눈을 뜨게 되었을 것이다.[51] 그러한 이상이란 가장 대담하고 생명력이 넘치며 극한에 이르기까지 세계를 긍정하는 인간의 이상이다. 그러한 인간은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만족하고 그것과 화해하는 법을 배웠을 뿐 아니라 그 모든 것을 과거에 존재했고 지금도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그대로 다시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러한 인간은 자기 자신과 인생의 연극과 구경거리 전체 뿐 아니라 바로 이러한 구경거리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고 또한 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 그야말로 영원에 걸쳐서 물릴 줄 모르고 '처음부터 다시(da capo)'라고 부르짖는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거듭해서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고 필요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52] 뭐라고? 이것이야말로 악순환의 신(circulus vitiosus deus[53])이 아닌가?
『선악의 저편』 56절.[54]
니체는 '영원회귀'야말로 자신의 가장 중요한 생각이라고 말했고 여러 군데에서 언급하지만 이를 더 이해하기 쉽게 풀어서 설명해 놓지는 않았기 때문에, 영원회귀는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하고 다양하게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 형이상학적 사상을 펼치는 니체의 전략만큼은 비교적 분명하다. (니체가 형이상학을 반대하는 사상가라는 걸 안다면 이게 얼마나 역설적인 상황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삶에 영원의 형상을 새기는 것이다.[55] 마치 플라톤과 그리스도교가 예측할 수 없는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적인 가상 세계를 만들어 세계에 대한 이해를 뒤집었듯이, 니체 역시도 우리의 삶, 그 현실 자체에 영원의 권위를 부여하여 이전 가치에 대한 이해를 다시 한번 뒤집은 것이다. 변화하는 현실에 영원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 이 역설적인 가치전도가 오류지 않냐고? 그렇다. 하나의 오류를 다른 오류로 대체하는 것, 그것이 삶의 긍정에 도움을 준다면 무슨 상관이겠는가! [56]

2.6. 네 운명을 사랑하라

니체에 따르면 '행복'이란 자신의 삶이 가리키는 하나의 목표, 즉 자기 내부의 의지가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 내리는 명령이 있으며, 바로 그 명령 ㅡ 그 자신의 강한 의지가 원하는 과제ㆍ사명을 찾음으로서 흘러 넘치도록 풍요로운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57] 그 의지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가 원하는 과제를 수행함으로서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고자 한다.[58] 심지어 과거에서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자기 자신으로 살아왔고 살아갈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의지가 원하는 것이라는 필연성을 느끼고자 하며, 그리하여 일체의 '그러했다'를 '나는 그러길 원했다!'로 변형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결의를 다지는 모든 것[59]이 니체에게 있어서 '운명'을 가리킨다.[60] [61] [62]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과제와 사명을 발견하는가? 그것은 어느 한 순간의 자신의 의도나, 종교, 도덕이 지시하는 목적의 결과가 아니다.[63]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가치를 설정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다.[64] 단지 우리가 모든 위대한 말과 모든 위대한 태도에 현혹되지만 않는다면,[65] 조직하고 지배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본능(이념[66])'이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서 점점 자라나서 명령하기 시작하며, 우리가 옆길과 잘못된 길에서 되돌아오도록 서서히 인도한다. 그 본능은 어떤 지배적인 과제, 즉 '목표', '목적', '의미'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도 전에, 미리 그것에 봉사하는 모든 능력들이 차례로 형성되도록 준비한다. 그래서 모든 능력이 성숙되고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그 순간에, 그 자신의 삶 자체에서 비롯되는 사명이 갑작스레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인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써본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67] [68]

이러한 사명은 그 자신이 살아온 삶의 궤적과 취향에 따라 그에게만 맞는 과제와 그에게만 맞는 방식으로 주어지며, 그것은 그 자신의 삶을 더 강하고 더 대담하고 더 쾌활하게 만들어준다.[69]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 급해질 필요는 없다. 본능이 너무 일찍 자신을 자각하여 자신의 미성숙한 능력에 비해 감당하지 못할 과제와 사명을 갖게 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심지어 인생의 실책들, 즉 때때로 옆길로 샌다든지, 길을 잘못 든다든지, 주저한다든지, 소극적으로 군다든지, 자신의 과제가 아닌 과제들에 진지한 관심을 낭비한다든지 등과 같은 실책들조차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오히려 이러한 실패의 경험들은 자신의 능력이 성숙해질 때까지 자신을 진정으로 시험할 고통을 탐색하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70]

인간은 일생동안 병든 상태와 건강한 상태를 넘나든다. 이 모든 것에서 명령을 내리는 것은 자기보존 본능이며, 병들어 있다는 것은 자기보존 본능, 즉 방어 본능과 공격 본능이 쇠퇴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71] 정신이 병들고 약해졌을 때 그는 무기력에 빠져 허무 속에서 살아가면서,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알 필요도 못 느낀다. 이로 인해 그는 약해진 상태에서 더 약해진다. 반면에 정신이 건강하고 강해졌을 때 인간은 충만함으로 가득찬 채 넘치는 의욕으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자기 자신이 진정 무엇이 되기를 원하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그러한 자는 사명을 수행함으로써 더욱 강해지고 굳건해진다.[72] 그러므로 인간은, 아니 인간의 삶은 무엇보다도 우선 병에서 회복하여 건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러한 병에서 회복하여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가? 니체의 처방에 따르면, 회복하려는 자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부정적인 목적에 힘을 낭비해선 안 된다. 그는 강행군 끝에 눈 속에 쓰러지고 마는 러시아 군인이 보여주는 무저항의 숙명론처럼 '다른 것'에 가능한 한 드물게 반응해야 한다.[73] 자기 자신을 하나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 '다른' 자신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그것은 그러한 경우에 위대함 그 자체며, 이로서 건강하고 강한 의지를 회복할 수 있다.[74]

건강하고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은 그 어떤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극복할 과제와 사명을 발견할 수 있고 발견할 것이다. 사실, 사명은 저항과 고통 속에서만 더욱 뚜렷해지고 점차 확신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그러한 자, 의욕에 넘치는 자는 일부러 저항과 고통을 찾아 모험을 나선다. 그러한 자가 얼마나 성장할 것인가는 그가 보다 강력한 적수 또는 보다 강력한 문제를 찾아 나서는가 아닌가에서 드러난다. 상대가 나보다 약할 경우 굳이 결투할 필요가 없다. 그의 과제는 단순히 일반적인 저항을 제압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모든 힘과 유연함 그리고 싸움 기술을 쏟아부을 만한 저항을, 즉 자신과 대등한 적수를 제압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75] 그는 자신만큼 강한 적에게만 희열을 느낀다. 그에게 고통은 기쁨이 된다. 그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76]

아모르 파티(Amor Fati) ㅡ 운명을 사랑하라. 그것은 이러한 자신의 과제와 사명, 이에 대한 스스로의 대답과 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과 앞으로 올 모든 것을 필연으로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다. 그 과제와 사명은 그 자신에게만큼은 의욕이며, 삶이며, 놀이이며, 구경거리이기 때문이다. 이 의욕에서 나오는 기쁨은 너무나 강력해서 심지어 그의 본능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솟아나오는 힘들의 압도적인 압력으로 인해 그 자신을 신중하게 보호하는 것마저 잊어버린다. 그는 그 자신의 과제를 위해 자신을 탕진하고 자신을 아끼지 않다가 기어코 자기 자신을 파멸로 이끌어낸다. 그는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며, 강물이 강둑을 넘어서 흐르듯이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한다.[77] 이는 상승함으로서 하강하는 것이다. 기쁨을 누리고자 고통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78] 그것은 일종의 디오니소스적 도취이자 삶과 창조에의 몰입이다.[79]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데에 있다. 인간에게서 사랑받을 만한 점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자 내려가는 존재라는 데에 있다. 사랑하노라! 하강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80] 그러한 유형의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모든 필연적인 것들을 사랑하고자 하며 현실의 무시무시하고 의심스러운 모든 것을 자신 안에도 가지고 있다.[81] 그것은 가장 낯설고 가혹한 삶의 문제들과 직면해 있으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 자신의 무궁무진성에 기쁨을 느끼면서 삶의 최고의 전형을 희생하는 것도 불사하는 생에의 의지,[82] ㅡ 그는 이런 고통스런 운명에 스스로 기쁨의 축복을 내린다. 그는 스스로의 몰락마저 사랑할 줄 안다.[83] [84] 사랑, 그것은 진지하고 철저하고 깊고 장엄한 것 앞에서, 어리숙하더라도 노래부르고 춤추고 웃을 줄 아는 것.[85] 삶이란 사랑하는 것이다. 너 자신의 의지가 운명이 되는 그런 너의 운명을 사랑하라! 모든 것이 처음으로 되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할지라도.[86]
"나는 나의 말을 했고, 나의 그 말 때문에 부서진다. 그러므로 나의 영원한 운명은 다음과 같이 되기를 원한다.
예고자로서 나는 파멸하고자 한다! 이제 몰락하는 자가 자신에게 축복을 내릴 때가 왔다."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 니체 사상에 대한 비판

니체 사상에 대한 철학적인 비판은 꾸준히 있어 왔다. 그 중에서도 철학계에서 널리 공유되고 있는 비판은 매킨타이어에 의한 비판이다. 매킨타이어는 《덕의 상실 (After virtue)》에서 니체를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사회와 정치에 대한 담론을 다룰 때는 도덕을 논하지 않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인데, 결국 니체의 예술가적 귀족주의는 정치철학적으로 볼 때 '엘리트주의적 개인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개인마다 다른 가치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개인에게 자신만의 가치판단을 하게 놔둬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지만, 가치 판단을 개개인에게 맡김으로써 사회가 도덕판단의 영역을 애써 피하려다 보면, 사회 구속력으로서의 도덕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이로 인해 근본주의와 극단주의의 득세를 돕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니체를 비판하는 학자들이 자주 언급하는 예를 들자면, '극단주의자들이 살인이나 방화를 하는 경우, 우리는 가치평가가 개인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고 그래서 저런 극단적인 주장에도 사회는 중립을 지켜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87]

물론, 니체는 소수의 '책임감 있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귀족 도덕을 허용했으며, 다수가 따르는 노예 도덕을 격렬하게 공격하긴 했지만 그것이 아예 없어져야 한다고는 하지 않았다. 또한 천개의 나라에 천개의 도덕이 있으며 도덕은 시대에 따라 변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은 이어져 오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논리를 따라서 소수의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 자신만의 가치를 만들기 위해 도덕을 해체한다고 하더라도, 기존 도덕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88][89] 하지만 그런 '소수의 사람들'의 행복만을 따지더라도, 그 행복이 오로지 '그 자신의 창조적 가치'와 고독에만 달려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 매킨타이어의 지적이다.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그러한 소수의 사람들에게조차 행복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연대'에 우선적으로 기초하고 있다.

단 이 문제는 소수의 의견을 니체의 사상으로 보고, 다수의 의견을 공동체주의 철학자의 사상으로 봐서, 소수와 다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는지를 묻는 문제가 아니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의무'는 그 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문제이므로, 이들도 역시 '우선 순위'에 대해 싸우는 것이지 하나를 완전히 배제해 버리겠다고 싸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90] 따라서 이 문제는 '개인의 자유를 최대로 보장하면서도 어떻게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가', '자유에 제한을 가해야 한다면 어떤 근거와 한계가 있어야 하는가',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의무 중, 상황에 따른 우선 순위를 어떻게 두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이지, 단순히 소수가 맞다거나 아니면 다수가 맞다는 식으로 환원되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애초에 소수나 다수 중 한쪽이 무조건 맞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개인주의나 공동체주의가 아니라 그냥 이기주의나 전체주의이다. 공동체가 있음으로해서 자유가 작동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자유의 기능이 없으면 공동체가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4. 영향력

니체는 20세기 지성사에 거대한 영향을 미친 사상가이며, 그의 사상은 현대에도 그 적시성으로 인해 여전히 철학 담론의 중심에 서 있다. 경직된 학문들은 니체의 영향으로 감각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로 넘치게 되었다. 이성에서 감성과 그 표현으로, 주류에서 그간 외면받아왔던 비주류로, 집단에서 개인으로 옮겨갔으며, 이들은 수많은 이론과 사조를 터놓았다. 이는 철학에만 그치지 않고 정신사와 문화사 전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처음에 니체는 예술가로 이해되었다. 니체 사후에 학계는 그에 대해 침묵했으나 1940년 전후 하이데거에 의해 니체는 서양 형이상학 전통으로 등재된다. 이후 1960년대 프랑스에서 니체는 화려하게 부활했으며 19세기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간주되었다. 이때, 니체의 사상은 철학 이외에도 사회학, 신학, 심리학, 문학, 음악 그리고 조형 예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수용되면서 20세기의 주요 철학자로 우뚝 떠올랐다.

1960년대 이후 구조주의의 그림자를 밟은 일군의 프랑스 철학자들은 '니체만 아는 니체'에서 한 걸음 나아가 '니체가 모르는 니체'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니체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헤겔 이후에 새로운 철학은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근거였다. 그 답변들이 1980년대 이후 국내 학자들에게도 적극 수용되었다. 하이데거와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은 니체와 함께 프로이트마르크스를 호출했다. 자크 라캉은 프로이트를, 루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그리고 질 들뢰즈는 니체를 불러냈다. 이 탈근대 사상가들은 저마다 다른 무기를 통해 유럽 모더니즘의 척추인 기원과 중심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푸코는 니체의 계보학을 적극 수용하여, 선형적이고 연속적인 역사 인식을 비판한다. 대신 우연, 단절, 투쟁을 통해 역사를 독해하며 권력과 지식의 관계, 그리고 주체화에 대해 탐구했다. 데리다는 니체를 해체적 해석학의 선구자로 니체를 평가하며, 현전의 형이상학과 로고스 중심주의를 공격한다. 그는 해체(또는 탈구축)를 통해 전통 형이상학이 상정하는 실체, 본질에 의문을 제기하고, 음성언어에 우월성을 부여하는 암묵적인 전제를 텍스트 내부로부터 폭로하였다. 들뢰즈는 기존의 서양철학사를 새롭게 읽어내며 차이와 생성의 존재론을 구상한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등의 개념을 헤라클레이토스 전통의 생성철학으로 재구성했다.

니체는 지금도 다양한 모습으로 세계 정신사에 등장하고 있다. 현대 정신사의 최전선이나 역사적 사회적 현장에 니체가 나타나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가 해석되어 나타나는 모습은 매우 다양해서 언뜻 보기에 그의 사상이라 단언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면 이성적 권위를 해체하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그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모습 가운데는 서양 근대 문명의 병리 현상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사회주의, 아나키즘[91], 자본주의, 인간 왜소화 현상 등 서양 근대 이념과 제도, 근대 문명을 비판하는 모습도 있고, 권력화되고 세속화된 기독교에 대한 통렬한 비판도 있다.

니체를 읽는 시각은 다양하다. 점차 속물화되고 천민화되는 현대 인간에게서 정신적 깊이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새로운 휴머니즘의 주창자로 니체를 읽기도 하고, 인간 영혼의 내부를 최초로 심도 있게 해부한 현대 심층심리학의 선구자로 보는 시각도 있다. 어떤 이들은 니체를 인간 사유의 한계를 깨뜨리며 사유 기호의 자유로운 놀이 세계를 열어 놓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선구자로 보기도 하며, 이전에 몰랐던 인간의 강인한 면모를 부각시키고 개별자로서의 인생을 스스로 결정하라고 주장한 점에세는 현대 철학의 아버지이자, 키르케고르와 함께 실존주의의 시조라고 불리기도 한다. 또는 우주적 무아(無我)를 주창함으로써 자기 자각을 추구하는 서구적 불교사상으로 읽기도 한다.[92]

대부분의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은 니체를 자신들의 지적 선구자로 제시한다. 여기서 니체가 비체계적 관점주의와 전통적 가치에 대한 재평가를 주장하였음을 상기하자. 니체가 제시하는 주제들 중 몇몇은, 그들의 관심사와 일견 유사성을 갖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넓고 다양한 시각으로 읽을 수 있는 니체의 특성상 포스트모던 철학만이 그에 후계자라고 자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쨌거나 니체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깨쳤다. 질 들뢰즈자크 데리다는 니체의 반이성주의적 성향을 계승하면서 전통적 진리에 대해 비판하는 니체를 원하였고, 미셸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관계를 강조하는 니체를 원하였다. 그들은 니체 철학의 주제인 영원회귀, 힘에의 의지, 허무주의, 위버멘쉬 등에 초점을 맞춰 니체의 텍스트들을 해석의 전거(典據) 또는 대상으로 삼았고, 니체를 각자의 철학적 입장을 옹호하는 데 이용했다.
니체의 가장 일반적인 기획은 철학에 의미와 가치의 개념을 도입하는 데 있다. 분명, 현대 철학은 대부분 니체의 덕으로 살아왔고 여전히 니체의 덕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니체가 원했던 모습은 아니었을 것이다.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제1장 中

5. 관련 문서

5.1. 니체 철학 용어

5.2. 사조


[1] 니체는 '선악의 저편' 22절에서 '힘에의 의지'를 주장하면서 위의 말을 한다. 니체는 여기서 자신의 해석(힘에의 의지)을 반박하라고 종용한다. 바로 '반박하려는 의지',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통해 상대를 증오해선 안 된다. 상대는 나의 성장을 도와주는 훌륭한 파트너이기 때문이다. 반박하는 자는 반박당하는 자와 일종의 '놀이'를 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나간다. 그리고 그 가치는 그의 삶에 의미와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그의 삶을 더욱 활력 넘치게 해줄 것이다.[2] 훗날 덧붙인 서문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예술론을 보충했다시피 한 처음 관점(아폴론 대 디오니소스)과 달리, 후기 니체 자신의 철학적 관점 즉 '그리스도교 대 디오니소스'의 구도를 말한다. (기껏해야 서문에서 잠깐 언급하는 정도이지만) 그의 처음 관점과 보다 원숙한 관점이 대비된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텍스트이다.[3] 원래 서양 철학에서는 디오니소스와 아폴론의 비교를 많이 해왔다. 단순히 예술 담론에 그치지 않고, 철학적, 미학적, 종교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이 두 신의 속성이 가장 큰 대비 관념이었다.[4] 뤼디거 자프란스키 『니체 그의 사상의 전기』 오윤희ㆍ육혜원 옮김, 꿈결, 2017, p.77[5]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대비되기 때문에 이분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이러한 이분법적 설명은 '이분법 자체'를 해체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는 점을 명심하자. 즉, 니체는 개별성을 말하는 아폴론적인 것보다 그것들이 하나로 도취되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더 방점을 두고 있다. 아폴론적인 것='이분법',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분법의 해체'이며,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설명상' 이분법적 형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그 의도나 내용이 이분법적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니체는 그래서 그 '설명'을 할 때조차 '애매'하게 말하는데, 그 '애매함'은 바로 이분법적인 설명 형식을 깨부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6] 뤼디거 자프란스키 『니체 그의 사상의 전기』 오윤희ㆍ육혜원 옮김, 꿈결, 2017, p.78~79[7] 뤼디거 자프란스키 『니체 그의 사상의 전기』 오윤희ㆍ육혜원 옮김, 꿈결, 2017, p.80 참조.[8]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74~175[9]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이 바로 '영원 회귀'다. 여기서 과거의 자신을 죽인다는 것은 '망각'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든 것이 초기화되기 때문에 내가 좋아했던 것, 내가 싫어했던 것들도 모두 다시 되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영원 회귀는 한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의지를 연결시키는 데 있어서도 적용된다. 인간은 생식을 통해 새로운 인간을 창조한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의지는 그다음 사람의 의지로 새롭게 태어난다. 역사와 문화는 그렇게 수천 년을 이어져 온 의지의 총화이다. 이 수천 년을 이어져 온 의지의 총화를 망치로 부수고 그 자리에 자신의 가치를 새기고자 하는 모든 노력(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그것이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슈다.[10] 그대들은 일찍이 하나의 기쁨에 대해 '그렇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오, 내 벗들이여, 그랬다면 그대들은 또한 모든 비애에 대해서도 '그렇다'라고 말한 셈이다.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실로 묶여 있으며, 사랑에 빠져 있으니. 그대들이 일찍이 '한 번, 또 한 번'을 원한 적이 있는가? 그대들이 일찍이 "네가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 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그대들은 그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원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모든 것이 영원하며,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실로 묶여 있고, 모든 것이 사랑에 빠져 있다. 오, 그대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632)[11]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1, p.222 (강조는 해당 책에서의 강조)[12] 분만이라는 일이 유전이 진행되고 계속되는 것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의식'은 본능적인 것과 어떠한 결정적인 의미에서도 대립되지 않는다. 철학자의 의식적 사고의 대부분은 그의 본능에 의해 은밀하게 인도되고 특정한 궤도를 따라서 움직이게 된다. ㅡ 《선악의 저편》 3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27) (강조는 해당 책에서의 강조)[13] 《선악의 저편》 5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30)[14] 《선악의 저편》 6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34)[15] 물리학도 단지 하나의 세계를 해석하고 짜맞추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세계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이제 대여섯 명의 두뇌 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르고 있다. ㅡ 《선악의 저편》 14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52)[16] 물리학에서는 무엇이 명료한 것이고 무엇이 '설명되는' 것인가? 그것은 보고 만질 수 있는 범위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문제를 이 정도까지만 탐구해야 한다. 이와는 반대로, 고귀한 사유 방식이었던 플라톤적인 사유 방식이 갖는 매력은 바로 명백한 감각적 증거에 저항하는 데에 있었다. (중략) 이와 같은 플라톤식의 세계 극복과 세계 해석에는 오늘날의 물리학자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 존재하며, 또한 '최소한의 노력'과 '최대한의 어리석음'이라는 원리를 내세우는 생리학자들 가운데 다윈주의자이자 반목적론자들이 제공하는 것과도 다른 종류의 즐거움이 존재한다. '인간이 보고 붙잡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는 탐구할 것도 없다'는 명제가 플라톤의 명제와 다르다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명제는 오로지 거친 노동만을 해야 하는 미래의 기계 노동자와 토목 노동자와 같은 조야하고 근면한 종족에게는 가장 타당한 명제일 것이다. ㅡ 《선악의 저편》 14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53)[17] 니체는 인과론에 대해서도 비판하는데, 주의해야 할 점은 《선악의 저편》 21절에서 물질의 인과 관계만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니체는 같은 책 36절에서는 의지의 인과 관계를 긍정하고 있다. 따라서 니체는 인과론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인정하고 믿는다면 ㅡ 우리가 의지의 인과 관계를 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과 관계 자체를 믿는다는 것과 다름없다 ㅡ 우리는 의지의 인과 관계를 유일무이한 인과 관계로서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98)[18] 인간의 기본 충동들이 철학에서 그야말로 영감을 불어넣는 수호신으로서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를 고찰해 볼 경우, 우리는 이러한 기본 충동들 모두가 이미 한 번은 철학을 수행해 왔으며, 그 기본 충동들 하나하나가 바로 자신을 기꺼이 존재의 궁극 목표이자 나머지 모든 충동 위에 군림하는 정당한 주인으로 내세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ㅡ 《선악의 저편》 6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32)[19] 우리가 처음부터 우리의 무지 상태를 존속하게 하려고 애썼던 것은 상상도 못할 자유, 무분별, 경솔함, 왕성함, 삶의 명랑함을 즐기기 위해서, 즉 삶을 즐기기 위해서였다! 이제까지 무지라는 이 견고한 지반 위에서 비로소 학문이 자라날 수 있었고, 앎에의 의지는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한 무지, 몽매함, 허위에의 의지를 기반으로 해서 자라날 수 있었다. 앎은 무지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무지가 세련된 것이었다!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우에도 언어는 조야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단지 정도 차이나 여러 미묘한 단계가 존재할 뿐인데도 계속해서 앎과 무지의 대립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는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살과 피'가 되어버린 도덕적 위선이 우리들 깨어 있는 자들의 말까지도 왜곡할 수 있다. 여기저기서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있으며, 최상의 학문이야말로 이렇게 단순화되고 철저하게 인위적이고 적당히 꾸며지고 적당히 왜곡된 세계에 우리를 붙잡아 두려고 한다는 사실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최상의 학문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오류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학문도 하나의 살아 있는 것으로서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ㅡ 《선악의 저편》 24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74)[20] 놀라운 사실은 사상 자체에서나 통치, 웅변과 설득, 예술, 윤리 등의 어느 분야에서든지 이 지상에서 자유롭고 정교하며 대담하고 춤처럼 경쾌하며 대가다운 확신을 갖는 것으로서 존재하거나 존재해 온 모든 것은 '그러한 전횡적인 법칙들의 폭정' 덕분에 비로소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지하게 말해서 '자유방임'보다는 바로 이러한 폭정이야말로 '자연'이며 '자연스러운' 것이다.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가장 자연스런' 상태, 즉 '영감에 사로잡힌 순간에 영감을 자유롭게 정리하고 배치하며 처리하고 그것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방임의 감정과 극히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ㅡ 《선악의 저편》 188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195)[21] 어떤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그것을 반드시 거부할 필요는 없다. 이런 주장을 내세우는 우리의 새로운 언어는 아주 이상하게 들리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판단이 얼마나 생명을 촉진하고 보존하며, 얼마나 종을 보존할 뿐 아니라 육성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즉 가장 잘못된 판단들이 우리에게 결코 없어서는 안 되는 판단들이며, 논리적 허구를 용인하고 절대자ㆍ자기 동일자라는 전적으로 고안된 세계를 기준으로 하여 현실을 평가하면서 수에 의해서 세계를 지속적으로 왜곡하지 않고서는 인간은 살아갈 수 없을 것이라고. 또한 잘못된 판단을 포기하는 것은 생을 포기하고 생을 부정하는 것이 될 것이라고. 거짓을 삶의 한 조건으로 인정하는 것은 물론 통상적인 가치 감정에 위험한 방식으로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저항을 감행하는 철학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선악의 저편에 있다.ㅡ 《선악의 저편》 4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28~29)[22] 인간의 기본 충동들이 철학에서 그야말로 영감을 불어넣는 수호신으로서 얼마나 크게 작용했는지를 고찰해 볼 경우, 우리는 이러한 기본 충동들 모두가 이미 한 번은 철학을 수행해 왔으며, 그 기본 충동들 하나하나가 바로 자신을 기꺼이 존재의 궁극 목표이자 나머지 모든 충동 위에 군림하는 정당한 주인으로 내세우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충동은 지배욕으로 가득 차 있고 지배자로서 철학적 사고를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ㅡ 《선악의 저편》 6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32)[23] 어떤 한 사람에게 정당한 것이 다른 인간에게도 반드시 정당할 수는 없다는 것, 모든 사람에게 하나의 도덕을 요구하는 것은 보다 높은 인간에게는 해가 된다는 것, 요컨대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위계질서가 존재하며, 따라서 도덕과 도덕 사이에도 위계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고도 감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ㅡ 《선악의 저편》 228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290)[24] 친애하는 나의 철학자들이여, 이제부터 우리는 '순수하고 의지를 결여하고 있고 고통도 갖지 않는 무시간적인 인식 주관'을 상정한 저 위험하고 낡은 개념적 허구를 경계하자. 우리는 '순수 이성'이나 '절대정신'이나 '인식 자체'와 같은 모순적인 개념들의 촉수를 경계하자. 이러한 개념들은 항상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눈을, 즉 전혀 어떠한 방향으로 치우쳐서는 안 되는 눈을 가질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눈에서는 능동적으로 해석하는 힘은 억압되어야 하고 결여되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본다는 것이 어떤 것을 보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힘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그러한 개념들은 항상 불합리하고 어처구니없는 눈을 요구하는 것이다. 오직 관점적인 봄만이, 오직 관점적인 '인식'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하나의 사태에 대해서 더 많은 정념으로 하여금 말하게 할수록, 우리가 동일한 사태에 대해서 더 많은 눈과 다양한 눈을 동원할수록, 이러한 사태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나 '객관성'은 그만큼 더 완벽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의지를 모두 제거하고 정념들을 남김없이 배제한다는 것을 우리가 설령 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지성을 거세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ㅡ 《도덕의 계보》 세 번째 논문 12절.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1, p.221~222)[25] 현대의 역사 기술의 가장 고귀한 이상은 거울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목적론을 거부한다. 그것은 이제는 어떤 것도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재판관 역할을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이 점에 자신의 좋은 취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단지 확정하고 '기술할' 뿐이다. 이 모든 것은 대단히 금욕주의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층 더 허무주의적이다. 이 점에 대해서 자신을 기만해서는 안 된다! ㅡ 『도덕의 계보』 세 번째 논문 26절.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1, p.290)[26] 결국 그들은 단지 인식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만 한다. 즉 그들은 새로운 어떤 것으로 존재해야 하고, 새로운 어떤 것을 의미해야 하며, 새로운 가치를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ㅡ 《선악의 저편》 253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342)[27] 그러나 진정한 철학자는 명령하는 자며 입법자다. 그들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선 인간이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떠한 목적을 가져야 할지를 규정하는 작업을 하면서, 과거를 정리해 온 모든 사람과 모든 철학적 노동자의 준비 작업을 자신의 뜻대로 사용한다. 그들은 창조적인 손으로 미래를 붙잡는다. 그리고 이제까지 존재해 왔던 것과 또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들을 위한 수단, 도구, 망치가 된다. 그들의 '인식'은 창조이며, 그들의 창조는 하나의 입법이고, 그들의 진리에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다. 오늘날 그러한 철학자들이 존재하는가? 일찍이 이러한 철학자들이 존재했던가? 이러한 철학자들이 존재해야만 하지 않을까? ㅡ 《선악의 저편》 211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256~257[28] 그러나 은자이자 마멋인 우리는 오랜 동안 은자의 양심 깊숙한 곳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스스로 다음과 같이 다짐해 왔다. 이 귀중해 보이는 화려한 말들도 인간의 무의식적인 허영심에서 비롯된 해묵은 거짓 장식과 허섭스레기, 가짜 금가루에 지나지 않으며, 이렇게 아첨하는 빛깔과 장식 밑에서 자연 그대로의 인간(homo natura)이라는 끔찍한 본바탕이 다시 분명하게 인식되어야만 한다고. 즉 인간을 자연 속으로 되돌려 옮겨놓는 것, 이제까지 자연 그대로의 인간이라는 저 영원한 본바탕 위에 서툴게 써넣어지고 그려진 공허하고 몽상적인 많은 해석과 함축을 극복하는 것, 오늘날 이미 인간이 학문의 훈련을 통해 엄격하게 단련되어 다른 자연 앞에 서 있듯이 앞으로 이 인간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모드르는 오이디푸스의 눈과 봉해진 오디세우스의 귀를 가지고 너무나 오랫동안 "그대는 자연 이상의 존재이며, 자연보다 더 높고 자연과는 다른 기원을 갖는다!"라고 인간을 피리로 유혹해 온 해묵은 형이상학적 새잡이들의 귀를 막고 인간 앞에 서게 하는 것, 이것은 실로 기묘하고 광기에 찬 과제인 것 같지만 그것이야말로 실로 진정한 과제인 것이다. ㅡ 《선악의 저편》 230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298)[29] 우리의 욕망과 열정의 세계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실재로서 '주어져 있지' 않고 우리가 우리의 충동이라는 실재 외에 다른 어떤 '실재'로 올라가거나 내려갈 수도 없다면 ㅡ 왜냐하면 사유란 이런 충동들 상호 간의 연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ㅡ 시험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 허용되지 않을까? 즉 이 '주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이른바 기계적(또는 '물리적인') 세계까지도 이해하기에 충분하지 않는가? 이 경우 기계적 세계는 (버클리나 쇼펜하우어적인 의미에서의) 착각이나 '가상', '표상'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정념 자체가 갖고 있는 것과 동일한 정도의 실재성을 갖는 것으로서 이해된다. 즉 그것은 유기체적인 과정 속에서 분화되고 전개되어 나가기(당연한 일이지만 약하게 되기) 이전에 모든 것이 강력한 통일체 속에 통합되어 있는 정념 세계의 보다 원초적인 형태를 의미한다. 그것은 일종의 충동적 생이며, 그것에서는 모든 유기적 기능이 자기 제어와 동화, 영양 섭취, 배석, 신진대사와 종합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기계적 세계를 이러한 생명의 초기 형태로서 이해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궁극적으로 이러한 실험을 하는 것이 허용될 뿐 아니라 방법상의 양심으로부터도 요구된다. 단 하나의 인과 관계로 해결하려는 시도가 그것의 극한에 이르기까지는(굳이 말하자면 불합리한 상태에 이르기까지는)ㅡ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무시해서는 안 되는 방법상의 도덕이다 ㅡ 여러 종류의 인과 관계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수학자들이 말하듯이 '정의로부터' 귀결되는 것이다. 문제는 결국 우리가 의지를 작용하는 것으로서 정말로 인정하는가, 다시 말해 우리가 의지의 인과 관계를 믿는가이다. 우리가 그렇게 인정하고 믿는다면 ㅡ 우리가 의지의 인과 관계를 믿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인과 관계 자체를 믿는다는 것과 다름없다 ㅡ 우리는 의지의 인과 관계를 유일무이한 인과 관계로서 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지'는 물론 오직 '의지'에만 작용할 수 있고 '물질'(예를 들면 '신경')에는 작용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작용이 인정되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의지가 의지에 작용을 가한다는 가설과, 따라서 모든 기계적인 사건은 그 속에서 어떤 힘이 작용하는 한 의지의 힘이며 의지의 작용이라는 가설을 실험해 보아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우리의 충동적인 생 전체를 의지의 유일한 근본 형태 ㅡ 나의 명제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 ㅡ 의 분화와 전개로서 설명할 수 있다면, 또한 모든 유기적 기능을 이러한 힘에의 의지로 환원할 수 있고 이러한 힘에의 의지에 의해서 생식과 영양 섭취 문제 ㅡ 이것은 하나의 문제이다 ㅡ 를 해결할 수 있다면, 작용하는 모든 힘을 '힘에의 의지'로서 분명하게 규정하는 것은 정당성을 얻게 될 것이다. 내부로부터 관찰된 세계, 그것이 갖는 '예지적 성격'에 의해서 규정되고 정의된 세계는 '힘에의 의지' 이외의 것이 아니다. ㅡ 《선악의 저편》 36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98~99)[30] 자연을 있는 그대로 생각해 보라. 그것은 한없이 낭비적이고 아무런 관심도 의도도 없으며, 정의감도 배려도 자비도 없고, 풍요로운가 하면 황량하고 동시에 불확실하다. 자연의 무관심 자체가 동시에 힘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ㅡ 《선악의 저편》 9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36~37)[31] 생명 자체는 본질적으로 자신보다 약한 타자를 자기 것으로 하고 그것에게 위해를 가하고 그것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것은 냉혹하며, 자신의 형식을 타자에게 강제하고 타자를 자신에게 동화시키는 것이고, 가장 부드럽게 말한다고 해도 최소한 착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옛날부터 비방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는 그런 말을 사용해야만 하는가. 앞에서 가정한 것처럼 설령 한 조직체의 내부에서 개인들이 서로를 동등하게 대한다 하더라도 ㅡ 이것은 건강한 모든 귀족 체제에서 행해지고 있지만 ㅡ 그 조직체가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구성원들이 서로에 대해서는 삼가는 모든 행동을 다른 조직체에게 행해야만 할 것이다. 그 조직체는 힘에의 의지의 화신이 되어야만 하며, 성장하면서 주변에 있는 것을 움켜잡고 자신에게로 끌어당겨서 압도하려고 해야만 할 것이다. 이는 도덕적인 이유 또는 비도덕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단지 그 조직체가 살아 있기 때문에 그리고 생은 바로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을 유럽인들의 일반적인 의식은 몹시 꺼리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도처에서, 심지어는 과학의 가면을 쓰고 '착취적인 성격'이 사라지게 될 미래의 사회 상태에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내 귀에는 마치 일체의 유기적 기능이 정지된 하나의 생명을 창조하겠다는 약속과 다름없는 것으로 들린다. 착취란 부패하고 불완전하고 원시적인 사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유기체의 근본적인 기능으로서 살아 있는 것의 본질에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의지 자체인 본래의 힘에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론으로서는 혁신적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실제로는 모든 역사의 근본적인 사실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정도로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솔직해져야 한다! ㅡ 《선악의 저편》 259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360~362)[32] 아마 내가 바로 위에서 '정신의 근본 의지'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바로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해 주기 바란다. 대중이 '정신'이라고 부르는 저 명령적 존재는 자신과 자신의 주위에 대해서 주인이 되고 싶어 하고 자신을 주인으로서 느끼고 싶어 한다. 그것은 다양성으로부터 단일성에 이르려는 의지, 즉 결합하고 구속하고 지배하려고 하며 실제로 지배하는 의지를 갖는다. 그것의 욕구와 능력은 생리학자들이 살아 있고 성장하며 번식하는 모든 것이 가지고 있다고 인정하는 욕구와 능력과 동일한 것이다. 낯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정신의 힘은 새로운 것을 오래된 것에 동화시키거나 다양한 것을 단일화하고 완전히 모순되는 것을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강력한 경향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신은 낯선 것이나 '외부 세계'에 속하는 모든 것의 특정한 윤곽이나 특징을 자의적으로 강조하고 자신에 맞게 왜곡한다. 이 경우 정신이 의도하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자기 것으로 체화하고 새로운 사물들을 기존의 계열 속에 편입시키는 데, 즉 성장하는 데 있으며, 보다 분명하게 말하자면, 성장한다는 느낌, 힘이 증대되었다는 느낌을 갖는 데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것과 상반되는 충동도 이러한 동일한 의지에 봉사하고 있다. 그러한 충동이란 무지와 고의적인 자기 폐쇄를 향한 갑작스런 결단, 자신의 창문을 닫아버리는 것, 이런저런 사물들을 내적으로 부정하고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것, 인식될 수 있는 많은 것에 대해서 일종의 방어 태세에 들어가는 것, 어둠과 폐쇄된 지평에 만족하는 것, 무지를 긍정하고 시인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것들 모두의 필요성은 정신의 동화력,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정신의 '소화력'의 정도에 비례한다. 실로 '정신'은 위장과 가장 많이 유사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때때로 자신을 기만하려는 정신의 의지도 정신의 근본 의지에 속한다. 이러저러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단지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일 뿐이라고 멋대로 추측하는 것,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을 좋아하는 것, 일부러 은밀하고 좁은 구석에 머무르면서 근시안적이고 피상적인 태도로 모든 것을 자기 멋대로 확대하기도 하고 축소하기도 하며 재배치하고 미화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면서 자기만족에 빠지는 것, 이렇게 자신의 힘을 모든 방식으로 자의적으로 표출함으로써 자기만족에 빠지는 것도 정신의 근본 의지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다른 정신들을 속이고 다른 정신들 앞에서 자신을 위장하는 일도 서슴지 않으려는 정신의 자세와 창조하고 형성하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의 지속적인 압력과 충동도 정신의 근본 의지에 속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정신은 자신의 가면을 다양하게 바꾸는 능력과 교활함을 즐기며 자신의 안전이 확보되었다는 느낌을 즐긴다. ㅡ 《선악의 저편》 230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294~296)[33] 의지란 나에게는 무엇보다도 복합적인 것이며, 단어로서만 단일체일 뿐이다. 바로 이 한 단어에 대중의 선입견이 둥지를 틀고 있으며, 이러한 선입견이 항상 철학자들로 하여금 주의를 소홀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좀 더 주의하여 '철학적이 되지 않도록' 하자.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즉 모든 의지에는 첫째로 다수의 감정이 있다고. 다시 말해서 어떤 상태로부터 벗어나려는 감정, 어떤 상태로 향하려는 감정, 또한 이렇게 '벗어나려고 하고' '향하려는' 감정에 대한 감정이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팔다리를 움직이지 않고서도 우리가 '의욕'하자마자 일종의 습관에 의해서 움직이기 시작하는 부수적인 근육감정이 있다. 따라서 감정뿐 아니라 다양한 감정이 의지의 구성요소로서 인정되어야 하는 것처럼, 두 번째로 사유도 의지의 구성요소로 인정되어야 한다. 모든 의지 작용에는 명령하는 하나의 사상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상을 '의지'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의지로부터 제거한 후에도 의지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처럼 믿어서는 안 된다! 셋째로 의지는 감정과 사유의 복합체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의 정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명령의 정념이다. '의지의 자유'라고 불리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 갖는 우월감이다. 즉 "나는 자유롭다. '그'는 복종해야 한다"는 의식이 모든 의지 속에 도사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의지 속에는 저 주의집중, 오로지 하나의 목표에만 똑바로 고정된 시선, '지금 이것 이외의 다른 것은 전적으로 불필요하다'는 저 무조건적인 가치평가, 복종시킬 수 있다는 내적인 확신, 그리고 명령하는 자의 상태에 속하는 그 모든 것이 도사리고 있다. 의욕하는 인간은 복종하거나 복종하리라고 믿는 자기 내부의 어떤 것에 대해서 명령을 내린다. ㅡ 《선악의 저편》 19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60)[34] 유기적인 세계에서 모든 사건은 하나의 제압이자 지배이고, 모든 제압과 지배는 다시 새로운 해석이자 조정인데, 이러한 새로운 해석과 조정을 통해서 이제까지의 '의미'와 '목적'은 필연적으로 불분명하게 되거나 완전히 말소되어야만 한다. (중략) 그러나 모든 목적, 모든 유용성은 하나의 힘에의 의지가 힘이 더 약한 자를 지배하여 그 약한 것에 어떤 기능의 성질을 각인시켰다는 사실의 징표일 뿐이다. 그리고 어떤 '사물'의 역사 전체도 이와 같이 항상 새로운 해석과 조정의 계속되는 기호의 연쇄일 수 있다. (중략) 그것은 오히려 다소간 심화되어가고 다소간 서로 독립적인 채로 그 자체에서 일어나는 제압 과정들의 연속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제압에 반해서 행해지는 저항들이고 방어와 반작용을 목적으로 하는 형식 변화의 시도들이며 성공적인 반대활동의 성과들이기도 하다. ㅡ 《도덕의 계보》 두 번째 논문 12절.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1, p.132~133)[35] 사회 전체의 구조가 확립되고 외부로부터의 위험에 대해서 안전해진 후에, 도덕적 가치 판단에 새로운 전망을 제공해주는 것은 다시 이웃에 대한 공포심이다. 모험심, 대담함, 복수심, 교활함, 약탈욕, 지배욕과 같이 강력하고 위험한 충동들은 이제까지 집단에 유용하다는 의미에서 존중되었을 뿐 아니라 크게 육성되고 단련돼야 했지만(왜냐하면 사회 전체가 위험에 처한 상태에서는 전체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서 그러한 충동들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제 그것들은 배로 위험한 것으로 느껴지게 된다. 왜냐하면 사회가 안정된 지금에 와서는 그러한 충동들의 돌파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충동들은 점차 부도덕한 것으로 낙인이 찍히고 비난을 받게 된다. ㅡ 《선악의 저편》 201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219~220)[36] 반면에 오늘날 유럽은 무리동물만이 영예를 얻고 영예를 분배해주는 시대가 되었고, '권리의 평등'이 너무 쉽게 '권리 없는 평등'으로, 다시 말해 모든 희귀하고 이질적이며 특권적인 모든 것, 보다 높은 인간, 보다 높은 영혼, 보다 높은 의무, 보다 높은 책임, 창조력과 지배력으로 넘치는 모든 것에 대한 공통적인 투쟁으로 전환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오늘날에는 고귀하게 존재한다는 것, 독립적으로 존재하려고 한다는 것, 다르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홀로 서고 자신의 힘으로 살아야만 한다는 것은 '위대함'이라는 개념에 속한다. 철학자가 다음과 같이 주장할 때 그는 자신의 이성의 일면을 드러내게 된다. "가장 고독하고 가장 은폐되어 있고 무리로부터 가장 이탈해 있는 인간, 선악의 저편에 있는 인간, 자신의 덕들의 주인으로 존재하는 인간, 의지로 넘치는 인간, 이러한 인간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이면서 다양하고 폭이 넓으면서도 충만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위대함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다시 한 번 물어보자. 오늘날 위대함이라는 것이 가능한가? ㅡ 《선악의 저편》 212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260)[37] 여러 종족들이 서로 뒤섞이는 해체의 시대에 살고 있는 인간은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자로서 자신의 몸 안에 다양한 유래를 갖는 유산을 지니고 있다. 즉 상반되는 충동들과 가치기준들, 때로는 상반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 싸우면서 서로를 좀처럼 그냥 내버려 두지 않는 충동들과 가치기준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말기 문화의 인간, 흐릿한 빛의 시기의 인간은 대체로 보다 허약한 인간일 것이다. 그가 가장 간절하게 갈망하는 것은 자신이 겪고 있는 전쟁이 언젠가 끝나는 것이다. 행복은 그에게 일종의 진정시키는 치료법이나 사고방식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로 휴식, 평온, 충족, 종국적인 통일, 즉 그 자신 그러한 인간이었던 거룩한 수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려서 말한다면 '안식일 중의 안식일'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그러한 본성 안의 대립과 싸움이 삶을 자극하고 북돋는 역할을 한다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하고 서로 화해하기 어려운 충동들에 덧붙여 자신과의 싸움을 조정해 나갈 수 있는 능숙함과 교묘함, 즉 자기 지배와 자기기만이 유전되고 육성된다면, 마력을 지닌 저 불가해하고 불가사의한 인간, 승리를 거두고 사람을 유혹하도록 미리 운명지어진 수수께끼 같은 인간이 출현하게 된다. 그러한 인간이 가장 아름답게 구현된 대표적인 예는 알키비아데스와 카이사르이며, 예술가 중에서는 아마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일 것이다. 그들은 휴식을 갈망하는 저 허약한 유형의 인간들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출현한다. 이 두 유형의 인간들은 서로 긴밀히 연관되어 있으며 동일한 원인에서 발생한다. ㅡ 《선악의 저편》 200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217~218)[38] 고귀한 인간들은 겁 많은 인간, 불안해하는 인간, 소심한 인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는 인간, 편협하고 의심 많은 인간, 비굴한 인간, 학대를 감수하는 개 같은 인간, 거지 같은 아첨꾼, 그리고 무엇보다도 거짓말쟁이를 경멸한다. 평민들은 거짓말쟁이라는 것이 모든 귀족의 근본신조다. 고대 그리스에서 귀족들은 자신들을 '우리 진실된 자들'이라고 불렀다. (중략) 고귀한 종류의 인간은 자신을 가치를 규정하는 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나에게 해로운 것은 그 자체로 해롭다"고 판단하면서 자신을 사물들에게 처음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로서 인식한다.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인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속하는 것을 존중한다. 그러한 도덕은 자기에 대한 찬미다. 충만한 느낌, 넘쳐흐르려고 하는 힘의 느낌, 고도의 긴장에서 오는 행복감, 베풀어주고 싶어 한느 풍요로움의 느낌이 그런 도덕의 전경에 드러나 있다. 고귀한 인간도 불행한 자를 돕지만, 동정에서가 아니라 넘쳐나는 힘에서 비롯된 충동에서 돕는다. 고귀한 인간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강력한 자를 존중하는바, 이 강력한 자란 자신을 제어할 힘을 가지고 있으며, 말하고 침묵하는 법을 알고 있고, 자기 자신을 엄격하고 혹독하게 다루는 데서 기쁨을 느끼며, 엄격하고 혹독한 모든 것을 존경하는 자다. ㅡ 《선악의 저편》 260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363~364)[39] 그대들은 가능하다면 고통을 없애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는 오히려 일찍이 없었던 정도로 고통을 증대시키고 더 악화시키려고 하는 것 같다! 그대들이 생각하는 안락과 같은 것은 우리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종말로 보인다! 그것은 인간을 우습고 경멸받아야 할 것으로 만드는 상태이며, 자신의 몰락을 원하게 만드는 것이다! 고통을 견디는 훈련, 거대한 고통을 견디는 훈련, 그대들은 이러한 훈련만이 지금까지 인류의 모든 고양을 가능하게 했다는 사실을 아는가? 영혼의 힘을 강화시켜주는 불행 속에서 영혼이 느끼는 긴장, 위대한 파멸을 눈앞에 볼 때 영혼이 느끼는 전율, 불행을 짊어지고 견뎌내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영혼의 독창성과 용기, 그리고 또한 일찍이 비밀, 가면, 정신, 간지, 위대함에 의해 영혼에게 선사된 것, 이것들은 고통을 겪으면서 그리고 거대한 고통의 훈련을 겪으면서 영혼에게 선사된 것이 아닌가? 인간 안에는 피조물과 창조자가 통일되어 있다. 인간 속에는 재료, 파편, 잉여, 점토, 오물, 무의미함과 혼돈이 존재한다. 그러나 또한 인간 속에는 창조자, 형성자, 해머의 냉혹함, 관조자인 신을 닮은 신성, 제7일이 존재한다. 그대들은 이러한 대립을 이해하는가? ㅡ 《선악의 저편》 225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283)[40] 여기서 '귀족도덕'과 '노예도덕'이라는 이분법적 설명이 보이지만, 이런 귀족-노예의 구분은 '설명상' 이분법적인 것으로, 기존의 이분법을 해체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 즉, '기존의 고정된 이분법적 가치'를 전도(顚倒)시키기 위해서이다. 이는 니체가 한 말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니체는 한 사람의 의지에도 '귀족'과 '노예'가 섞여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귀족도덕이 가리키는 바가 '명확한 것'이 아니라 어떤 애매한 '유형', '취향', '뉘앙스'로 설명한다. 사실은 귀족과 노예를 이분법적으로 딱 나누어 구분하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우리는 니체의 설명에서 '기존의 고정된 가치'인 줄 알았던 것이 끊임없이 전도(顚倒)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니체 자신도 그 '가치의 전도'를 시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통해 '기존의 고정된 이분법적 가치'의 경계는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쉽게 말하자면, 기존에 우리는 도덕은 따라야만 하는 것이고 비도덕은 배척해야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지만, 니체는 '귀족-노예'의 '이분법적 설명'을 제시하고 그 가치를 전도시킴으로써, 기존 도덕 가치와 비도덕 가치의 이분법적 구분에 의문을 품게 하고 그 이분법적 구분이 무의미함을 유도한다.

이런 '계보학적 방법'은 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미셸 푸코가 니체의 이러한 계보학적 방법론을 많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41] 정확히는 '동물적 본능을 지닌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것.[42] 니체는 주권자로서의 개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권자로서의 개인은 오직 자신에게만 충실하고, 관습의 도덕에서 다시금 벗어난 개인이며, 자율적이고 초윤리적인 개인(왜냐하면 '자율적'과 '윤리적'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자신만의 독립적이고 끈질긴 의지를 지닌 인간,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인간이다. 이러한 인간에게는 그 자신이 마침내 성취하여 체화한 것에 대해서 긍지를 갖는 의식이, 자신의 힘과 자유에 대한 의식이, 완성에 도달했다는 감정이 존재한다. 진정으로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이 해방된 인간, 자유로운 의지의 소유자, 이 주권자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서 자신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는 모든 자보다 자신이 얼마나 탁월한 자인지를 어찌 모르겠는가? 이러한 자는 또한 자신의 가치 척도를 갖고 있다. 그는 자신을 척도로 하여 타인을 보면서 존경하기도 하고 경멸하기도 한다. 그는 필연적으로 자신과 동등한 자들, 강한 자들,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을(약속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을) 존경한다. 즉 주권자처럼 진중하고 드물게 그리고 오랜 숙고 끝에 약속하는 자, 쉽사리 타인을 신뢰하지 않으며 자신이 어떤 사람을 신뢰할 때 그러한 신뢰에 의해 신뢰받는 자에게 영예를 부여하는 자, 자신의 약속을 고초를 겪으면서도 심지어는 '운명에 저항하면서'까지도 지킬 정도로 자신이 충분히 강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약속을 하는 자, 이러한 모든 자를 존경한다. ㅡ 《도덕의 계보》 두 번째 논문 2절.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1, p.100~101 참조)[43] 『선악의 저편』 20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64~65[44] 이것은 고통을 억지로 견뎌내라는 얘기가 아니다. '고통 그 자체'에 의미가 있으므로, 삶의 즐거움을 얻고 싶은 사람에게 고통은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45] 《즐거운 학문》 제2판 서문 참조.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 전집 12 즐거운 학문, 메시나에서의 전원시, 유고(1881년 봄~1882년 여름)》 안성찬 홍사현 옮김, 책세상, 2005, 서문의 내용을 요약)[46] 근원적인 문제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만족하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전반적으로 우리가 어떤 것에 만족하느냐 아니냐다. 우리가 어느 한 순간을 긍정했다면 그로써 우리 자신을 긍정했을 뿐 아니라 삶 전체를 긍정한 것이다. 그 이유는 어떤 것도, 우리 자신에게서든 사물에 있어서든 자기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 영혼이 팽팽한 현처럼 단 한 번 행복에 전율하고 울린다면, 그 유일무이한 사건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영원처럼 긴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그 유일한 긍정의 순간에 영원이 받아들여지고, 구원받고, 이유를 얻고, 용인받는다. (니체 『유고 (1886~1887)』, 7(38) NRF, t.XII, p.298)[47] 철학자가 다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상태. 디오니소스적 태도로 삶을 대하기. 이것에 대한 나의 표현이 운명애다... 그러자면 삶에서 부정당한 측면을 단지 필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바랄 만한 것으로도 여겨야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용인되었던 측면과의 관계를 따져서 바랄 만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더 강력하고, 더 풍부하고, 더 진실된 삶의 측면이라고 보아야 한다. 생의 의지는 그 측면을 통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다. (니체 『유고 (1886~1887)』, 16(32) NRF, t.XIV, p.244)[48] 물론 니체도 부정을 하지만,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에만 부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에게서 부정은 적극적인 부정이 아니라 '달리 원하지 않는 것'이나 '눈길을 돌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인간에게서 말할 수 있는 위대함에 대한 나의 표현은 amor fati다. 이것은 달리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히."(현재를 사랑하기에 과거와 미래를 달리 원하지 않는다는 것)라고 말했고, 『즐거운 학문』에서는 "네 운명을 사랑하라 Amor fati :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를 비난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비난하는 것에는 눈길을 다른 곳으로 돌리겠다는 것)라고 말했다. 즉, '있는 그대로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만 부정하겠다는 것이다.[49] 여기서 니체가 말하는 '필연'은 세계가 필연적인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마치 그것을 필연처럼 여기는 나의 확신과 결의에 가깝다. 니체는 세계 자체는 '우연'으로 보았다. 그 우연이 나의 선택을 받아 나의 가치가 되었을 때 그 가치는 마치 나에게만큼은 필연으로 여겨진다는 얘기다.[50] 영원회귀에 따르면 세계는 '필연'으로 귀결되는 것이라고 니체는 주장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품을 수 있는데, 정확히는 부분적으로는 '우연'인데 전체적으로는 '필연'으로 귀결된다는 것이 영원회귀가 가리키는 바이다. 즉, 우연과 필연의 개념마저도 이분법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니체가 필연과 자유(우연)를 이분법으로 구분하지 않았다는 것은 《선악의 저편》 213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고 필연에 따라서 행하는 바로 그때 자유와 섬세함, 충만한 힘의 감정과 자신이 창조적으로 정립하고 제어하고 형성하고 있다는 느낌이 정점에 달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요컨대 그러한 순간에 필연과 '의지의 자유'는 예술가들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51] 헤겔은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무(無)는 같다"고 말했는데, 니체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은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쉬운 예를 들자면, 그릇은 그 본질이 비어있는 것이기 때문에 허무하다거나 외롭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거꾸로 비어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담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즉, 따라야할 가치가 사라졌다는 것은, 모든 가치에 대해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을 말한다.[52] 자기 자신의 삶이라는 구경거리는 허무에 벗어나기 위해서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자기 자신은 필요할만한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필요한만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삶이 필요하다. 즉, '삶에 필요하기 때문에 필요하다'는 말은 순환논증이라는 것이 니체의 지적이다. 그런데 필요에 의한 이 순환논증은, 사실 철학의 제1원리인 '실체(신)'를 증명하는 방식과 동일하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악순환의 신)[53] 여기서 악순환이란, 스콜라철학의 자기원인(Causa Sui)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것의 첫번째 원인이 될 수 있으려면 자기가 자기의 원인이 되어야 함'을 말한다. (스피노자 참조) 그리고 스콜라철학에서는 모든 것의 첫번째 원인인 이 '실체'를 '신(deus)'이라 부른다. 니체는 영원회귀 하는 '인생 그 자체'가 철학의 제1원리인 '실체', 곧 '신'의 설명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니체의 철학에서 '신'은, '매순간 반복되는 인생'으로 대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일찍이 『즐거운 학문』에서 신이 죽었으므로 그동안 신의 역할이었던 가치의 창조를 이제 우리가 해야만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우리 자신이 가치의 창조자가 될 수 있는 전제 조건은 바로 이것이었던 것이다. 영원에 걸쳐서 물릴 줄 모르고 '처음부터 다시(da capo)'라고 외치는 것. 이것이 우리 자신이 가치의 창조자가 될 수 있는 필요조건이고, 신 없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고 어떻게 살아가야 되냐?에 대한 니체의 대답이다.[54]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8, p.134 (본문에서 강조한 내용은 니체의 강조)[55] "우리의 삶에 영원의 형상을 새기자! 이 사상에는 우리의 삶을 무상하다고 경멸하며, 다른 어떤 불확실한 삶으로 눈길을 돌리도록 가르치는 그 모든 종교보다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니체, 그의 사상의 전기》 오윤희, 육혜원 옮김, 꿈결, 2017, p.300~301)[56] 일부 학자들은 니체의 이런 점을 두고 프래그머티즘의 선구자로 여기기도 한다. 실제로 군나르 시르베크의 『서양철학사』에서는 니체와 실용주의를 묶어서 한 챕터로 둔다.[57] '나는 출구도 모르고 입구도 모른다. 나는 이렇게 출구도 입구도 모르는 채 서성이는 자일 뿐이다.' ㅡ 현대인은 이렇게 탄식한다. 이런 현대성으로 인해 우리는 병이 들었다. 미심쩍은 평화, 비겁한 타협, 현대적인 긍정과 부정의 그 모든 도덕적인 불결함으로 인해 병들어 있는 것이다. (중략) 우리의 행복의 공식은 하나의 '예', 하나의 '아니요', 하나의 직선, 하나의 목표다. (프리드리히 니체 『안티크리스트』 박찬국 옮김, 아카넷, 1절 마지막)[58] 인간의 위대함을 위한 나의 공식은 amor fati다. 그가 다른 것을 가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 앞으로도, 뒤로도, 전부 영원히. 필연적인 것은 그저 견뎌내는 것이 아니며, 감추는 것은 더욱더 아니라, ㅡ 모든 이상주의는 필연적인 것 앞에서 허위다. ㅡ 오히려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람을 보라』)[59] 니체는 이를 '자기애의 결의론(Casuistik)'이라고 칭한다.[60] 차라투스트라는 일찍이 자신의 사명을 ㅡ 그것은 또한 나의 사명이기도 하다 ㅡ 엄격하게 규정했기에 이제는 그 누구도 그것의 의미를 오해할 수 없다. 그는 과거의 모든 것을 시인하고 구원하기에 이르기까지 긍정한다. "나는 사람들 사이를 거닐지만, 이 경우 사람들은 미래의 파편들이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저 미래의. 그리고 파편이요 수수께끼요 끔찍한 우연인 것을 하나로 모으고 응축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시작(詩作)과 노력의 모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시인도 아니고 수수께끼를 푸는 자도 아니며 우연의 구원자도 아니라면,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과거의 것들을 구원하고 일체의 '그러했다'를 '나는 그러길 원했다!'로 변형시키는 것 ㅡ 이것만이 내가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203~204)[61] 누군가 질문을 던질 것이다. 즉 도대체 왜 나는 일반적인 통념으로는 전혀 관심거리도 되지 못하는 이런 사소한 것들을 이야기하는가라고. 더군다나 내가 위대한 과제를 수행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면, 그렇게 사소한 것들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나 자신을 해치는 것은 아닌가라고. 나는 이렇게 답한다. 사소한 것들 ㅡ 영양, 장소, 기후, 휴식, 자기애의 결의론(Casuistik) 전체 ㅡ 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중요하다고 여겨왔던 그 어떤 것보다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하다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배우는 것을 시작해야 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101)[62] 오늘날에는 누구나 자신의 소망과 가장 소중한 생각을 감히 말한다. 그래서 나도 지금 내가 나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것, 이해를 함에 있어 처음으로 내 마음을 스쳐가는 생각,—앞으로의 삶에서 내게 근거와 보증, 달콤함이 될 생각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는 사물에 있어 필연적인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보는 법을 더 배우고자 한다.—그렇게 하여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람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 Amor fati : 이것이 지금부터 나의 사랑이 될 것이다! 나는 추한 것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련다. 나는 비난하지 않으련다. 나를 비난하는 자도 비난하지 않으련다. 눈길을 돌리는 것이 나의 유일한 부정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언젠가 긍정하는 자가 될 것이다! (『즐거운 학문』)[63] 하나의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 그가 이러저러한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 그가 바로 이러한 상황과 이러한 환경에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 각 개인의 숙명적인 본성은 이미 존재했었고 또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의 숙명에서 분리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의도나 어떤 의지 혹은 어떤 목적의 결과가 아니다. 그는 '인간의 이상' 또는 '행복의 이상' 또는 '도덕성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ㅡ 자신의 존재를 어떤 목적에 맞추려 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이다. '목적'이라는 개념을 고안해낸 것은 우리 자신이다. 목적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각 개인은 필연적인 존재이며 하나의 숙명이다. 그는 전체에 속해 있으며 전체 안에 존재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76~77)[64] 가치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영감 아래서, 즉 삶의 광학 아래서 말한다. 즉 우리에게 가치를 설정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삶 자체이며, 우리가 가치를 설정할 때 우리를 통해 삶 자체가 가치평가를 하는 것이다. (중략) 각 개인은 미래와 과거로부터의 운명이며, 다가올 것과 존재할 모든 것에 대한 하나의 법칙, 하나의 필연성이다. 그러한 개인에게 '달라져라'라고 말하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해, 심지어는 과거의 모든 것에 대해서조차도 달라지라고 하는 셈이다. 그리고 실제로 일관된 도덕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인간이 달라지기를 바랐다. 다시 말해 유덕해지기를 바랐다. 그들은 인간이 자신을 닮기를, 다시 말해 위선자가 되기를 바랐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60~61)[65] 모든 위대한 말과 모든 위대한 태도는 남의 과제와 남의 사명이다. 그것은 나 자신의 과제와 사명은 아닌 것이다. 오히려 나 자신의 과제와 사명을 찾는 것을 심각하게 방해한다.[66] 여기서 '이념'은 자기보존의 본능을 가리킨다.[67] 의식의 전 표면 ㅡ 의식은 표면이다 ㅡ 은 모든 위대한 명령에 의해 오염되지 않도록 순수하게 유지되어야만 한다. 모든 위대한 말과 모든 위대한 태도를 조심하라! 본능이 너무 일찍 '자신을 자각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그 사이에, 조직하고 지배하도록 예정되어 있는 '이념'이 의식의 깊은 곳에서 점점 자라나서 명령하기 시작하며, 우리가 옆길과 잘못된 길에서 되돌아오도록 서서히 인도한다. 또한 그 이념은 언젠가 전체를 위한 수단으로서 필수불가결한 것으로 입증될 개별적인 성질과 자질들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지배적인 과제, 즉 '목표', '목적', '의미'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전에, 그것에 봉사하는 모든 능력을 차례로 형성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98)[68] 내 본능이 높은 곳에서 행했던 보호는, 내가 자신 속에서 무엇이 성장하고 있는가에 대해 아무런 감지조차도 하지 못했을 정도로 강력했다. 따라서 나의 모든 능력은 갑자기 성숙되고 최종적으로 완성되어, 어느 날 개화했던 것이다. 나는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써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즉 투쟁의 어떤 흔적도 내 삶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영웅적인 본성과는 반대된다. 무언가를 '의욕한다는 것', 무언가를 위해 '노력한다는 것', 어떤 '목적', 어떤 '소망'을 염두에 둔다는 것, 이 모든 것을 나는 경험한 적이 없다. 나는 바로 이 순간에도 나의 미래를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듯이 바라본다. 이 잔잔한 바다에는 어떤 욕망의 잔물결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어떤 것도 현재의 상태와 다르게 되는 것을 조금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내가 다른 인간처럼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99)[69] 나는 다양한 길과 다양한 방법으로 내 진리에 도달했다. 내 눈이 나의 먼 곳을 내다보는 이 높이에 내가 하나의 사다리만을 타고 오른 것은 아니었다. 나는 길에 대해 물어보기도 했는데 늘 마지못해 그렇게 했다. 그렇게 길을 물어보는 것은 언제나 내 취향에 거슬렸으니! 나 자신에게 길을 묻고 길을 직접 시도해보는 것을 나는 더 좋아했다. 시도와 물음, 이것이 내 모든 행로였다. 그리고 진정, 이런 물음에 대답하는 법도 사람들은 배워야 한다! 이것이 내 취향이다.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숨겨야 할 것도 아닌 내 취향이다. "이것이 이제 내 길인데, 그대들의 길은 어디에 있는 거지?" 나는 내게 "길에 대해" 물었던 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말하자면 '정해진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400)[70] 이 대목에서 인간은 어떻게 자기 자신이 되는가라는 물음에 제대로 된 답을 제시하는 것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아래와 같이 답을 제시함으로써 나는 자기보존, 즉 자기애의 기술에서 걸작에 해당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과제, 사명, 과제의 운명이 평균을 훨씬 넘어서 있는 경우, 그러한 과제를 갖는 자기 자신에 직면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된다는 것에는 자기 자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희미하게라도 예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제가 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심지어 인생의 실책들, 즉 때대로 옆길로 샌다든지, 길을 잘못 든다든지, 주저한다든지, '소극적으로 군다든지', 자신의 과제가 아닌 과제들에 진지한 관심을 낭비한다든지 등과 같은 실책들조차도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96~97)[71] 이 모든 것에서 ㅡ 즉 영양, 장소와 기후, 휴식의 선택에 있어서 ㅡ 명령을 내리는 것은 자기보존 본능이다. 자기보존 본능은 자기 방어 본능으로서 가장 분명하게 자신을 드러낸다. 많은 것을 보지 않고, 많은 것을 듣지 않으며, 많은 것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것, 그것이 첫째가는 현명함이자 인간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의 필연이라는 사실에 대한 첫째가는 증거다. 이러한 자기방어 본능을 가리키는 통상적인 표현은 취향(Geschmack)이란 말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92~93)[72] 나는 진정으로 서로 대립되는 두 가지를 처음으로 발견했다. 그 하나는 지하의 은밀한 복수욕과 함께 삶에 대해 저항하는 퇴화하는 본능이다. 다른 하나는 충만과 충일에서 탄생한 최고의 긍정 형식, 즉 고통과 죄 자체에 대한 그리고 삶 자체의 모든 의문스럽고도 낯선 것에 대한 아무런 유보 없는 긍정이다. 삶에 대한 이렇게 궁극적이면서도 가장 기쁨에 차 있고 가장 충일하면서도 가장 의기양양한 긍정은 최고의 통찰일 뿐 아니라 진리와 학문에 의해서 가장 엄격하게 입증되고 보존되는 가장 심오한 진리다. 존재하는 것에서 빼버릴 것은 하나도 없으며, 없어도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교인들과 그 외의 허무주의자들에 의해서 거부된 삶의 측면들이야말로 데카당한 본능이 시인하고 시인해도 되었던 측면들보다도 가치들의 위게질서에서 무한히 높은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파악하려면 용기가 필요하고 그러한 용기를 갖기 위한 조건으로서 넘치는 힘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용기가 과감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바로 그만큼, 즉 바로 그 힘의 정도만큼 사람들은 진리에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강한 자들에게 그러한 인식이, 즉 현실에 대한 긍정이 필연적이듯이, 약한 자들에게는 약함으로 인한 현실에 대한 비겁과 현실로부터의 도피, 즉 '이상'이라는 것이 필연적이다. 약한 자들은 현실을 아무리 제대로 인식하고 싶어도 인식할 수 없다. 데카당들은 거짓을 필요로 한다. 거짓이 그들을 유지하는 조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135~136)[73] 병들어 있다는 것, 허약하다는 것에 대해 무언가 지적해야 할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상태에서는 진정한 치유 본능, 즉 방어 본능과 공격 본능이 쇠퇴해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어떤 것에서도 벗어날 줄 모르고 아무것도 제대로 처리할 줄 모르며 어떤 것도 퇴치할 줄 모르게 된다. 모든 것이 그에게 상처를 줄 뿐이다. 인간과 사물이 집요하게 그에게 달라붙고, 체험은 깊은 충격을 주며, 기억은 곪아버린 상처가 된다. 병들어 있다는 것은 일종의 원한 자체다. 이 모든 것에 대해 병자는 오로지 하나의 위대한 치료법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것을 러시아적 숙명론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강행군 끝에 눈 속에 쓰러지고 마는 러시아 군인이 보여주는 무저항의 숙명론이다. 그것은 아무것도 더 이상 수용하지 않고 자기 것으로 하지도 않으며 자기 속으로 흡수하지 않는 것이다. 즉 더 이상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51~52)[74] 나에게 우연히 주어졌던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의 상황, 장소, 거처, 모임들을 몇 년 동안 끈질기게 견디고 있을 때, 내가 앞에서 말했던 '러시아적 숙명론'이 나를 찾아왔다. 이 러시아적 숙명론이 그런 우연한 것들을 바꾸거나 그것들을 바꿀 수도 있다고 느끼는 것보다, 또한 그것들에 반항하는 것보다 더 나았다. 이런 숙명론 속에서 견디고 있는 나를 방해하거나 강제로 깨우려고 하는 일을 그 당시의 나는 치명적일 정도로 나쁜 것으로 받아들였다. 실제로 그것은 매번 치명적일 정도로 위험했다. 자기 자신을 하나의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것, '다른' 자신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그것은 그러한 경우에 위대한 이성 그 자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52)[75] 공격하는 자의 강함이 어느 정도인가는 그가 필요로 하는 적이 어떤 사람인지를 척도로 하여 측정할 수 있다. 그가 얼마나 성장하였는가는 그가 보다 강력한 적수 또는 보다 강력한 문제를 찾아 나서는가 아닌가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호전적인 철학자는 문제들에게조차 결투를 신청하기 때문이다. 그의 과제는 단순히 일반적인 저항을 제압하는 데 있지 않고, 자신의 모든 힘과 유연함 그리고 싸움 기술을 쏟아부을 만한 저항을, 즉 자신과 대등한 적수를 제압하는 데 있다. 적과 대등하다는 것 ㅡ 이것이 정의로운 결투를 위한 첫 번째 전제다. 상대가 내가 얕봐도 되는 상대일 경우, 전쟁은 할 수 없다. 상대에게 명령을 내리는 것 같은 경우, 즉 상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경우에는 전쟁을 할 것까지도 없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53~54)[76] 어떤 사람이 훌륭하게 성숙한 사람인지 아닌지를 우리는 근본적으로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인식하는가! (중략) 그는 자신에게 해로운 것에 대한 치유책을 생각해낼 수 있다. 그는 불리한 우연(Zufall)을 자신에게 유리한 것으로 전환할 수 있다. 그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30~31)[77] 천재란 필연적으로 낭비하는 자다. 자신을 다 내준다는 것에 그의 위대성이 있다. (그에게서) 자기보존의 본능은 이를테면 그 활동이 중지되어 있다. 내부로부터 솟아나는 힘들의 압도적인 압력이 그에게 자신을 신중하게 보호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희생적 행위'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이 점에서 그의 '영웅성'과 자신의 안위에 대한 무관심, 어떤 이념이나 어떤 대의 혹은 조국을 위한 그의 헌신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다 오해다. 그는 다만 내부로부터 솟아나고 넘쳐흐르며 자신을 탕진하고 자신을 아끼지 않을 뿐이다. 그는 필연적으로, 숙명적으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으며, 강물이 강둑을 넘어서 흐르듯이 아무런 생각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55)[78] 불멸을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불멸을 위해서는 평생 동안 몇 번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위대한 것의 '한(rancune)'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작품이든 행위든 모든 위대한 것은 일단 성취되면, 그것을 성취한 자에게 즉시 보복을 가한다. 그는 그것을 성취하게 되는 것과 함께 이제 약해지는 것이다. (중략) 모든 창조적인 행위, 즉 가장 고유하고 가장 내적이고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비롯되는 행위는 방어 능력의 소모를 전제로 한다. 이 때문에 우리의 작은 방어 능력들은 빠져나가버리고, 그것들에는 어떠한 힘도 더 이상 흘러들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191~192)[79] 이러한 창조의 몰입은 가장 깊은 곳에서 뒤흔드는 무언가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고 정교하며 갑작스레 보이고 들리게 된다는 의미에서 계시와 같다. 하나의 사상이 흡사 번갯불처럼 번쩍인다. 이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압도적인 힘들의 단순한 화신이자 단순한 입 그리고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선택의 여지 없이 필연적으로 하나의 황홀경을 맞이한다. 자유의 느낌, 무조건적인 존재, 힘 그리고 신성의 폭풍 속에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최고도로 비자발적으로 일어난다. 가장 고통스럽고 가장 암담한 것이 넘쳐흐르는 빛 안에서 필연적인 하나의 빛깔로서, 드넓은 공간들을 차지하는 형태들을 포괄하면서 리드미컬한 관계들을 감지하는 본능으로서, 모든 것이 가장 가깝고 가장 적합하고 가장 단순한 표현으로 자신을 보여준다. 실제로 사물들 자체가 다가와 스스로 비유가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창조물을 탄생시킨 사람은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 법이다. 그는 그것을 성취하는 것과 함께 이제 약해지게 된다. 모든 창조적인 행위, 즉 가장 고유하고 가장 내적이고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비롯되는 행위는 방어 능력의 소모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의 작은 방어 능력들은 빠져나가버리고, 그것들에는 어떠한 힘도 더 이상 흘러들지 않게 된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편 3절, 5절 요약)[80]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데에 있다. 인간에게서 사랑받을 만한 점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자 내려가는 존재라는 데에 있다. 나는 사랑하노라. 하강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그들은 저쪽으로 건너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사랑하노라. 한 방울의 정신도 자신을 위해 남겨두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의 덕의 정신이기를 원하는 자를. 그렇게 그는 정신으로서 다리를 건너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자신의 덕으로부터 자신의 성향과 숙명을 만들어내는 자를. 그렇게 그는 자신의 덕을 위해 살려고 하고, 또 죽으려고 한다. 나는 사랑하노라. 감사를 바라지도 않고 되갚기도 바라지 않으면서 영혼을 아낌없이 줘버리는 자를. 그는 늘 선물을 하며 자신을 지키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주사위가 가져오는 행운을 수치스러워하면서 '내가 사기 도박사가 아닌가?'하고 반문하는 자를. 그는 몰락을 원하기 때문이다. (중략) 나는 사랑하노라. 자유로운 정신과 자유로운 심장을 지닌 자를. 그의 머리는 심장의 내장일 뿐이고, 그의 심장은 그를 하강으로 내몰아대니. 나는 사랑하노라. 인간들 위에 걸쳐 있는 먹구름에서 하나하나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 같은 자 모두를. 그들은 번개가 칠 것을 예고하고 예고자로서 파멸한다. 보라, 나는 번개의 예고자이자 구름에서 떨어지는 무거운 빗방울이다. 그 번개는 위버멘쉬라고 불린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25)[81]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이것을 차라투스트라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파악하기 위한 실마리로 삼아야 한다. 차라투스트라가 구상하고 있는 유형의 인간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생각한다. 이 인간은 그럴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그는 현실에서 소외되어 있지 않으며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다. 그는 현실 자체이며 현실의 무시무시하고 의심스러운 모든 것을 자신 안에도 가지고 있다. 이럴 경우에만 인간은 위대해질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22, p.244)[82] 가장 낯설고 가혹한 삶의 문제들과 직면해 있으면서도 삶을 긍정하는 것, 자신의 무궁무진성에 기쁨을 느끼면서 삶의 최고의 전형을 희생하는 것도 불사하는 생에의 의지, ㅡ 이것이야말로 내가 디오니소스적이라고 불렀던 것이며, 비극 시인의 심리학에 이르는 교량으로서 인식한 것이다. 공포와 연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해석하는 것처럼 공포와 연민을 격렬하게 방출함으로써 그 위험한 정념으로부터 정화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포와 연민을 초월하여 생성의 영원한 기쁨 자체로 존재하기 위해서 ㅡ 파괴에 대한 기쁨까지도 포함하는 기쁨으로 존재하기 위해서. 이와 함께 나는 일찍이 내가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온다. ㅡ 『비극의 탄생』은 모든 가치에 대해 내가 최초로 시도한 재평가였다. 이와 함께 나는 나의 의지와 능력이 자라나오는 토양 안에 다시 뿌리를 박는다. 철학자 디오니소스의 최후의 제자인 나 ㅡ 영원회귀의 스승인 나는⋯⋯. (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박찬국 옮김, 아카넷, 2015, p.176)[83] '건강'한 자만이 '창조하는 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몰락마저 감수하고 그 몰락 앞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 '건강'해져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니체가 말하는 '건강'이란,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긍정할 줄 아는 것, 자기 자신에 대해 긍지를 지니는 것,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되는 것을 말한다. 니체는 이를 '위대한 건강'이라고 부른다.[84] 건강한 자는 이렇게 자신의 몰락마저 감수하기 때문에 다시 병들고 지치게 되는데, 이로서 병과 건강은 원환의 고리처럼 연결된다. 그는 다시 휴식을 취하며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할 뿐만 아니라 그런 과정을 통해 만들어낸 자신의 창조물을 통해서 인류 전체에도 기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건강한 이기심'은 자연스럽게 이타적인 행동을 유발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반면에 '병든 이기심'은 자기 자신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을 가리킨다.[85] 그대들은 내게 "삶은 견뎌내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런데 아침에는 자부심을 지녔을 텐데도 저녁에는 체념을 해버리는 것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삶은 견뎌내기 어렵다. 하지만 그처럼 연약한 체 하지 말라! 우리 모두는 무거운 짐을 잘도 짊어지는 귀여운 수나귀들이고 암나귀들이니. (중략) 사랑에는 늘 얼마간의 광기가 깃들기 마련이다. 광기에는 늘 얼마간의 이성이 있기 마련이고. 그리고 삶을 좋아하는 내게도 나비와 작은 비눗방울이, 그리고 인간들 가운데 그런 종류의 인간이 행복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볍고 어리숙하지만 사랑스럽고 활발한 그 작은 영혼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노라면 차라투스트라는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부르게 된다. 나는 춤을 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그런데 내 악마를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진지하고 철저하고 깊고 장엄하다는 것을 알았다. 중력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중력의 정신으로 인해 모든 것이 아래로 떨어져 버린다. 사람은 분노가 아니라 웃음으로 죽인다. 자, 저 중력의 정신을 우리가 죽여버리자.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76~77)[86] 고통 또한 기쁨이고, 저주 또한 축복이며, 밤 또한 태양이니. 그대들은 꺼져버리든지 아니면 배우든지 하라. 현자 또한 바보이니. 그대들은 일찍이 하나의 기쁨에 대해 '그렇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가? 오, 내 벗들이여, 그랬다면 그대들은 또한 모든 비애에 대해서도 '그렇다'라고 말한 셈이다.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실로 묶여 있으며, 사랑에 빠져 있으니. 그대들이 일찍이 '한 번, 또 한 번'을 원한 적이 있는가? 그대들이 일찍이 "네가 마음에 든다, 행복이여! 찰나여! 순간이여!"라고 말한 적이 있다면, 그대들은 그 모든 것이 되돌아오기를 원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고, 모든 것이 영원하며, 모든 것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실로 묶여 있고, 모든 것이 사랑에 빠져 있다. 오, 그대들은 이런 세계를 사랑한 것이다. 그대 영원한 자들이여, 이러한 세계를 영원히 그리고 항상 사랑하라. 그리고 비애에 대고 "사라져라. 하지만 때가 되면 돌아오라!"라고 말하라. 모든 기쁨은 영원을 원하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백승영 옮김, 사색의숲, 2022, p.632~633)[87] 물론 니체 본인은 그런 근본주의나 극단주의를 매우 싫어하고, 오히려 그에 대항해 항상 대중과는 한 발짝 떨어진 채로 보라는 '거리의 파토스'를 두어 광기에 휩쓸리지 말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로 보고 있다. 또한 니체는 어떤 도덕가치가 극단주의에 해당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사실 니체 사상에 따르면 '무엇이 극단주의인지 극단주의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그 극단이 무엇인지를 정하는 것 조차도 개인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극단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는데 그 극단에 거리를 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모순이기 때문에 비판받는 것이다.[88]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니체가 말하는 저 소수의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 되라는 의미로 주인 도덕을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언젠가는 그러한 주인 도덕을 가지고 성공하는 소수의 책임감 있는 사람들이 세상의 모든 비참함과 문제를 대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영웅이 되어서 세상에 나타날 수 있으니 아무리 절망적이고 부당하고 덧없는 세상일지언정 절대로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되는 것과 같다. 당장 니체 본인도, 그리고 이야기의 화자인 차라투스트라도 스스로를 초인, 즉 위버멘쉬라고 생각은 하지 않았으며, 고로 자신의 책을 읽은 이들 중에 위버멘쉬가 나오기를 기대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89] 그리고 이러한 영웅서사시적인 면이 나치즘에 악용되기에 딱 좋았기 때문에 언젠가 이 절망적이고 부당하며 덧없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영웅의 탄생을 고대한다는 내용에서 그 영웅을 아돌프 히틀러에 대입시키기만 하면 이상하게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니체는 어디까지나 끝없이 자기 자신을 모든 면에서 더더욱 강화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며, 그러지 못한 이들은 도태될 뿐이라고만 말했지, 나치처럼 우생학을 들먹거리면서 지배나 운명, 우수함, 선택받음으로 귀결해 영구 지배하는 그런 발전 없는 삶을 살라고 한 적은 없다.[90] 매킨타이어를 포함한 정치철학자들이 니체를 비판하는 지점은 니체의 논리는 결국 전체주의적 폭력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우선시하기 때문에 도리어 사회의 연대를 파편화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상기 철학자들이 그에 정반대 입장에서 '다수의 규칙에 무조건 복종하라'고 말하지 않으며, 그들은 도리어 이 '다수의 폭력'을 조심하라고 강조한다. 즉, 개인'만' 고려해선 안 되고 공동체'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지, 다수가 무조건 옳다는 식으로 다수를 옹호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니체도 '개인의 자유'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삶의 가치에 있어서 우선 순위가 공동체 보다는 개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니체가 말하는 이상적인 강자들은 모든 종류의 싸움을 다 좋아하는 호전적인 존재로써, 기분 좋은 승리가 아닌 승부를 원하기 때문에 절대로 자기보다 약한 자를 일방적으로 괴롭히지 않고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 모든 종류의 싸움을 하는 것을 즐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러한 강자들인 자신들에게 맞설 수 있는 이들이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을 것이기에 비단 알아서 강해지게 내버려둘 수도 있지만, 더 빨리 강해지라고 힘을 북돋아줄수도 있고, 이때 사용되어야하는 것이 바로 공동체라는 것이다.[91] 특히 니체는 아나키즘중 에고이스트적 아나키스트였던 막스 슈티르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유일자와 니체의 이상적 인간상은 정말 많은 면에서 매치가 많이 된다. 물론 이에 대해서 막스 바진시키등의 아나코 코뮌니스트들은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와 막스 슈티르너가 말한 유일자는 그 개념부터가 다르다며 둘의 연관성을 부정한 적이 있다.[92] 니체의 사상 전반적인 색채를 잘 들여다보면 불교와 유사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 서양철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실재와 이원론을 부정했고, 욕망과 고통을 극복한 자유로운 상태를 지향했다.[93] 독립 유공자 박달성과 동명이인이다.[94] 그렇다고 니체가 실용주의의 시조가 되는 것은 아니고, 철학사에서 이런 종류의 사고방식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고 니체의 철학도 굳이 현재의 관점에서 따져본다면 상대주의보다는 실용주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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