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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독일어)
Human, All Too Human (영어)
파일: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cover1.jpg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작가 프리드리히 니체
장르 철학
언어 독일어
발매일 1878년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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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저술 배경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뜻4. 1권
4.1. 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4.2. 2장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4.3. 3장 종교적 삶4.4. 4장 예술가와 저술가의 영혼으로부터4.5. 5장 좀더 높은 문화와 좀더 낮은 문화의 징후4.6. 나머지 장들(6~9장)
5.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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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리드리히 니체의 중기 사상을 대표하는 책. 1879년에 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제1권으로 구성되어 있고, 1879년에 쓴 《여러 가지 의견과 잠언들》과 1880년에 쓴 《방랑자와 그 그림자》를 합쳐서 제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니체는 이 책에서 형이상학적 이상의 배후에 내재되어 있는 모든 '이상주의'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의 필요와 동경에 불과한 것임을 폭로한다.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이후 니체 저술에서 일반적인 전제가 되는 형이상학, 도덕, 종교, 예술, 문화, 학문, 국가 등 각론에 대한 니체의 기본적인 생각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도덕과 종교를 다루고 있는 2장과 3장은 『도덕의 계보』의 바탕이 되는 글이며, 무엇보다도 5장은 앞으로 계속해서 주요하게 등장하는 '자유정신'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니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한다. 특히 자유정신은 자주 오해되는 개념인 위버멘쉬의 초기 원형에 해당되고 여기에서 '자유정신의 자기 극복'은 영웅이나 괴물만이 할 수 있는 초인적인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니체를 오독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개념이 쓰여진 맥락과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필수적이다.[1]

2. 저술 배경

니체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이 글은 바그너의 첫 바이로이트 축제극이 있었던 1876년 여름에 처음 쓰여지기 시작했다.[2] 1876년 7월 24일 개막 축제극에 참석하기 위해 바이로이트에 갔던 니체는 바그너의 음악과 바이로이트의 분위기에 크게 실망한 채 8월 6일 클링스부룬으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니체는 이때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구토를 동반한 심한 두통을 겪고 있었는데다가 바그너와의 관계에서 오는 소원함, 정신적인 고독, 새로운 철학을 위한 진통 등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는데, 이때 제자이자 조수 하인리히 쾨젤리츠(일명 페터 가스트)의 도움을 받아 9월부터 '쟁기날(Pflugschar)'이라는 제목 아래 수첩에 한 문장씩 쓰기 시작했다. 한 달 뒤 10월 1일에는 파울 레와 함께 소렌토로 여행을 떠나 그곳에 머물고 있던 바그너를 만나기도 하면서 구상하고 있던 책을 거의 완성시켰으며, 니체는 이 책을 《반시대적 고찰》의 5부 「자유정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그해를 넘겨 1878년 이 원고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정신을 위한 책. 1778년 5월 30일 볼테르 서거 기념제에 즈음하여 볼테르를 기념하여 바침》이라는 제목으로 바꿔서 출간한다. 니체는 심한 두통과 시력저하로 인해 장문의 글을 쓸 수 없어서 볼테르처럼 촌철살인의 단편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볼테르의 자유롭고 해방된 정신을 통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압도적인 영향력에서 비로소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제목을 지었던 것이다. 재밌게도 니체는 이 책이 출간되던 5월 30일, 파리에 사는 익명의 인물로부터 볼테르의 흉상 하나를 선물받는다. 그 볼테르의 흉상에는 "볼테르의 영혼이 프리드리히 니체씨에게 축하드립니다"라고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니체는 이 사건에 매우 감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

뒤이어 니체는 1879년에 6개월 동안 쓴 408개의 잠언들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정신을 위한 책, 부록 : 여러 가지 의견과 잠언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고, 6월 14일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그해 여름을 스위스의 성 모리츠에서 고독하게 보낸다. 니체 스스로도 이 시기가 "나의 생애에서 가장 어두운 겨울이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그렇게 힘들게 쓰여진 글이 1880년 1월에 출간된 《방랑자와 그 그림자. 이미 출간된 사상집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자유정신을 위한 책의 두번째이자 마지막 보권》이다. 이후 1886년 니체가 그때까지 지었던 책들의 서문을 새로 다시 쓰는 작업을 할 때, 이 책의 본문에다가는 새로운 서문을 붙여 1권으로 구성하고, 따로 간행되었던 2개의 부록은 한 권의 책으로 합쳐서 2권으로 구성하여, 1886년 10월에 다시 책을 출간함으로써 이 책은 지금의 1, 2권의 구성이 되었다.

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뜻

심리학적 관찰의 장점들ㅡ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에 대하여 숙고하는 것ㅡ또는 좀더 학술적으로 표현 하자면 심리학적 관찰ㅡ은 그것의 덕택으로 삶의 짐을 덜 수 있는 수단에 속한다. 즉 심리학적 관찰의 기술을 훈련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에서는 곧 정신의 침착성을 주고 권태로운 환경 속에서는 위로를 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가장 험난하고 불쾌한 시절에는 금언을 찾아낼 수 있어 그것으로 조금은 더 편안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35절[3]
니체에 따르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가리키는 의미는 '심리학적 관찰'을 뜻한다.

4. 1권

4.1. 1장 최초와 최후의 사물들에 대하여

개념과 감각의 화학 ㅡ 철학적 문제들은 오늘날 거의 모든 점에서 다시 2천 년 전과 동일한 질문 형식을 채택하고 있다. 즉 그 무엇이 어떻게 그것과는 정반대되는 것에서부터 생길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예컨대 어떻게 이성적인 것이 이성적이지 않은 것에서, 감각이 있는 것이 죽은 것에서, 논리가 비논리에서, 무관심한 직관이 열망에 찬 의지에서, 이타적인 삶이 이기주의에서, 진리가 오류에서 생길 수 있는 것일까? 형이상학적 철학은 지금까지 어떤 것이 다른 것에서 생겨남을 부정하며, 또한 더 높은 가치를 지닌 사물 그 자체의 핵심과 본질에서 직접적으로 생겨난다는 기적 같은 기원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런 문제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이미 자연과학과 분리해서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모든 철학적 방법 중에서 가장 최근에 나타난 역사적 철학은 통속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해석에서 흔히 있는 과장된 대립을 제외하고 어떤 대립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이성의 오류도 이러한 대립에 기인하고 있다는 것을 개별 경우들을 통해 밝혀냈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은 모든 경우에 이 철학의 결론이 될 것이다.) 역사적 철학의 해석에 따르면, 엄밀히 말해서 이타주의적인 행위도 없고 완전히 무관심한 관조도 없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1절[4]
책의 제일 처음에서 니체는 '절대적인 논리와 이성'으로 세계 전체를 파악하려는 '형이상학적 철학'을 비판하면서, 최근에 나타난 '역사적 철학'이라는 학문을 통해 우리는 '형이상적 철학'의 기원에 '비논리와 비이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제껏 '형이상학적 철학'은 인간에게 불변하는 특성과 목적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인간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생성되어왔으므로 그러한 생각[5]은 오류에 불과하다.

니체에 따르면 수천 년 동안 인류는 비논리적인 사고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도덕적, 미학적, 종교적 요청과 맹목적인 애착, 정열 또는 경외감을 가지고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훨씬 나중에서야 인간의 지성은 비논리에서 논리를 발견하고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추리를 거부했다. 즉, 현재 우리가 세계라 부르고 있는 것은 과거 전체의 인간 가치로부터 우리에게 상속된 한 덩어리의 오류와 상상력의 결과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계를 '전체적'으로 한 눈에 파악(형이상학적 철학)할 수 없으며, 단지 그 세계의 성립사를 '부분적'이고 단계적으로만 해명(학문: 역사적 철학)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는 논리적인 것의 배후의 비논리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파악해야 된다는 말이지, 그렇다고 해서 비논리적인 것을 아예 없애버려야 된다는 소리는 아니다. 비논리적인 것은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에 그리고 대체로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것ㅡ 관습과 전통ㅡ에 상당히 깊이 파고 들어가 있어서, 비논리적인 것을 없애려면 인류를 장려하는 최대의 힘[6] 역시 치유할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입게되리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또한 모든 인간의 판단이 비논리적인 것에서 발전해온 것이라면, 삶의 가치에 대해 평가하는 존재인 인간 모두는 처음부터 불공정한 존재라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제, '오류는 삶에 필요하지만 적어도 그것이 오류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명제를 받아들이게 된다면 우리의 철학은 비극이 되지는 않을까? '역사적 철학'이라는 학문은 삶을, 더 좋은 것을 적대시하는 것은 아닐까? 니체는 이러한 의문이 '개인의 기질'에 따라 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학문적 통찰을 통해 자신의 과거에 놓인 가장 깊은 심연으로부터 혐오감을 느끼고 현재의 자신의 동기를 무의미한 것으로 볼지도 모르지만, 다른 어떤 사람은 똑같은 학문적 통찰을 통해 현재의 삶보다 훨씬 단순한 애정으로 정화된 삶을 살 것이며 지금까지는 공포만 느껴야 했던 과거의 많은 것들에서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즐기면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후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활한 함정과 갑작스런 감정의 폭발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확고부동하고 온화하며 근본적으로 쾌활한 영혼의 기질이어야 한다. 그는 바람직한 상태로서 인간, 도덕, 법칙, 사물에 대한 관습적 평가를 넘어서서, 자유롭게 두려움 없이 떠도는 것에 만족할 것이다. 그는 이 상태의 기쁨을 기꺼이 미래에 전할 것이며, 아마도 이것 외에는 전해야 할 것이 없을 것이다.

4.2. 2장 도덕적 감각의 역사에 대하여

선과 악의 이중적 경위ㅡ선과 악의 개념은 이중적인 경위를 가지고 있다. 그 하나는 지배하는 종족과 계급의 영혼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선에는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보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고, 실제로 보복을 행하는 사람은, 즉 감사할 줄 알고 복수심이 강한 사람은 선하다고 불린다 ; 반면 무력하고 보복할 수 없는 사람은 나쁜 것으로 간주된다. 모든 개인이 보복의 감각으로 서로 얽혀 있기 때문에, 선한 사람[7]은 '선함[8]'에 공동체 감정을 가진 하나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 나쁜 사람은 '나쁨'에 아무런 공동체 감정이 없는 더 종속적이고 무력한 사람들의 무리에 속해 있다. 선한 사람은 하나의 계급이고, 나쁜 사람은 먼지 같은 대중이다. 선함과 나쁨은 한동안 고귀함과 비천함, 주인과 노예와 같다. (중략) ㅡ그다음에는 압박당하는 자, 무력한 자의 영혼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여기서는 고귀하든 비천하든 다른 모든 사람은 적의에 차 있고 몰인정하며, 착취하고 잔인하며 교활한 것으로 간주된다. 악은 인간, 뿐만 아니라 인간이 가정하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 예컨대 신을 가리키는 성격의 단어이다 ; 인간적, 신적이라는 것도 악마적, 악한 것과 같은 정도로 여겨진다. 호의, 자선, 동정의 표시는 간계, 무시무시한 결말의 서곡, 마취와 계략, 즉 세련된 악의로써 불안해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개별 인간이 이와 같은 성향을 가진 곳에서 공동체는 거의 성립될 수 없으며, 기껏해야 가장 야만적인 형태와 같을 것이다. 따라서 선과 악에 대해 이런 견해가 지배하는 모든 곳에서는 개인과 종족과 인종의 몰락이 가까이 있다. ㅡ우리들의 현재의 윤리는 지배적인 종족과 계급의 땅에서 자라나온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45절[9]
니체에 의하면, 도덕적 감각도 오류에 기원하고 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확립되어온 규범이나 관습을 쉽게 그리고 즐겨 행하는 사람을 '선하다'라고 불렀다. '선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와 그의 공동체에게 실제로 유익했으므로 잊혀지지 않고 전해졌다. '악하다'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이성적인 일이든 어리석은 일이든 간에 관습에 역행하는 것을 말했다. 이는 사람들의 개별 행위에 대한 동기는 전혀 고려되지 않고, 단지 그 행위가 공동체의 존속에 이롭거나 해로운 결과들에 의해 선 또는 악으로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곧 이런 유래를 잊고, 그것의 결과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행위 자체에 '선' 또는 '악'의 특징이 내재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한다. 즉 결과를 원인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동기에 대해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본질에 대해서 차례차례 책임을 묻는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본질에 선과 악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그것은 오류에 불과한 것이다.

도덕이 오류의 역사를 가진 관습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 사회가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 도덕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이렇게 다양하게 다른 도덕들을 크게 강자의 도덕과 약자의 도덕으로 구별한다. 강자는 '선에는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보복할(되갚아줄) 수 있는 힘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하고, 약자는 그런 힘과 의지가 없어서 되갚아주는데 과도하게 애를 쓰는 까닭에 차분하고 절도있는 '강자의 보복'을 질투와 악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선을 선으로 보복하는 것인 '감사'는 강자의 사회에서 첫번째 의무인데 비해, 약자는 감사의 의무를 지는 것에 대해 저항하거나 후에 그 감사의 표현을 하더라도 과장되게 자신의 고통을 호소함으로써 강자가 '함께 괴로워'[10]하길 요구한다.

강자는 거의 모든 인간의 행위를 둘러싸고 있는 미소, 눈웃음, 악수, 유쾌함과 같은 교제에서 보복(되갚아줌)을 통해 선량함, 친절함, 예의의 마음을 확인하고는 이러한 자신의 '호의'와 그 힘의 행사에서 쾌감을 느낀다. 반면에 보복할 힘과 의지가 없는(감사나 복수를 할 의지가 없는) 약자는 의식했든 의식하지 않았든 불행을 과시함으로써 함께 있는 사람을 괴롭히는데, 이렇게 '동정'[11]을 갈구함으로써 강자를 괴롭힐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는 한 그것은 약자에게 쾌감이 된다. 다시 말해, '비이기적인' 동기를 말하는 약자조차 자신의 고통을 호소함으로써 이기적인 쾌감을 얻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이기적인 것 또는 개인적인 것이란 국가, 학문,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위해 희생되어야만 하는 나쁜 것이기라도 한 듯 취급되었다. 그것은 잘못 교육되어온 것이다. 쾌감이 없는 곳에 삶도 없으며, 사실 도덕에는 '비이기적'인 것 보다 '이기적'인 것이 더 많다. 그렇다고 타인을 돕는 것 자체가 없어져야 한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도움이란 공동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개인적인 쾌감을 위해 자신의 '힘을 행사'함으로써 공동의 이익에 기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즉, 무리의 강요에 의한 '희생'이 아니라, 개인의 자아실현을 위한 방편으로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자신에게서 완전한 개인을 만들어내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최고의 행복을 주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동정적인 감동과 행위보다 그를 훨씬 더 나아가게 한다.

4.3. 3장 종교적 삶

몇몇 자연의 과정들은 적절한 시기에 발생하고, 또한 다른 자연의 과정들은 적절한 시기에 발생하지 않는다. 어떻게 인간은 이 무시무시한 미지의 것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인간은 자유의 왕국을 속박할 수 있을까? 이렇게 그는 자신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불안하게 탐구한다 : 너 자신이 규칙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 힘들을 관습과 법칙을 통해 규칙적으로 만들 수단은 도대체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ㅡ마술과 기적을 믿는 인간의 사유는 자연에 법칙을 부여하게 된다ㅡ그리고 간단하게 말해서 이 사유의 결과가 종교적 예배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스스로 제기하는 문제는 다음 사항과 극히 밀접한 관계가 있다 : 어떻게 더 약한 종족이 더 강한 종족에게 법칙을 명령하고, 그들을 규정하며 (더 약한 종족에 대한) 그들의 행위를 지휘할 수 있을까? 가장 무해한 종류의 강제를 사람들은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 강제는 누군가에게 애정을 받을 때 행하게 되는 그러한 강제이다. 간청과 기도로, 굴복으로, 규칙적인 세금과 선물을 바치는 의무감으로, 아첨하는 찬양으로 자연의 힘에 강제를 행사하는 것도, 사람들이 자연을 애정하는 것으로 만드는 한에서 가능한 일이다. 사랑은 구속하고 또한 구속당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111절[12]
종교적 삶이 가장 힘차게 꽃피었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하나의 근본 신념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자연의 행위에는 비합리적인 힘이 함께 한다는 신념이다. 배를 저어 갈 때 배를 움직이는 것은 노가 아니라, 정령(다이몬)의 마술적인 의식이 배를 움직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병으로 갑자기 쓰러진다면 그것은 신이 쏘는 화살 때문이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신념 하에서 종교적 예배의 의미는 자연을 인간의 이익이 되도록 규정하고 마법으로 사로잡는 것, 즉 자연에 그것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은 법칙성을 새겨넣는 것이다. 사랑으로, 간청과 기도로, 굴복으로, 규칙적인 세금과 선물을 바치는 의무감으로, 아첨하는 찬양으로 말이다. 이를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 계층의 가장 성공적인 모범으로 비친 이상을 '신'으로 보았다. 신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감사와 복수의 대상이었다. 사람들은 신을 자신의 본질과 대립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그리스도교는 신을 자신의 본질과 대립되는 것으로 본다.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신은 사심 없이 비이기적이라고 불리는 그 행위만을 할 수 있을 뿐인 완벽한 존재다. 만약 인간이 결점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또 다른 결점을 가지고 있는 다른 사람과 솔직하게 비교하게 된다면 그는 특별히 자신에게 불만을 느낄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완벽하게 선한 존재인 신과 자신을 비교하게 될 때, 그에게 자신의 본질은 지극히 어둡고 혐오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신의 표상을 인간이 추구해야 할 것으로 믿고 있는 한, 그것은 사람을 자기 경멸의 감정에 빠지게 한다. 그리고 자기 경멸은 점점 더 커져 자기 비하, 심지어 자기 학대의 행위로 이어진다.

이런 점은 종교적 금욕주의자의 영혼에서 쉽게 관찰된다. 금욕의 많은 형식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반항'의 가장 승화된 표현들에 속한다. 모든 금욕적인 도덕에서 자신의 한 부분은 자신의 다른 부분들을 지나친 요구들로 억압한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분할해서 한쪽을 다른 한쪽의 희생으로 몰고 간다. 특히 그리스도교는 인간의 한 부분인 '욕망'을 '죄'로 여김으로써 한편으로는 욕망이 끌어오를 때마다 자기 비하와 자기 경멸에 사로잡히게 하고, 동시에 금욕적인 생활로 자신의 욕망에 투쟁함으로써 인간의 다른 한 부분은 다시 자신을 사랑하고, 이 사랑의 자부심은 곧 신의 은총으로 해석된다. 즉, 그리스도교는 인간을 압박하고 완전히 파괴시켜 깊은 진창 속으로 빠뜨린 다음, 단 한 번에 이 진창 속으로 신의 자비의 영광을 비쳐들게 함으로써, 압도당한 자, 은총에 마비된 자는 황홀의 비명을 지르는 것이다.

이 투쟁이 어느 정도로 항상 즐겁게 유지되는지가 그리스도교인들의 관심사였다.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해 그들의 황폐한 삶을 잊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쟁이 금욕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지속적인 참여와 감탄을 자극할 만큼 충분히 중요하게 보이려면, 감성적 쾌감이 더 많이 이단시되고 나쁜 것으로 낙인찍혀야만 했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가능한 한 인간이 나쁘고 사악하게 보이기를 원했다. 스스로의 구원에 대하여 두려워하고 자신의 힘에 절망하는 인간을 칭송했다. 이조차 지겨워졌을 때 인간은 이 땅에서의 짧은 삶이 지닌 두려운 의미를 이용하여 '최후의 심판'이라는 전율적이고 황홀한 연극을 만들어냈다.

4.4. 4장 예술가와 저술가의 영혼으로부터

완전한 것은 생성된 것이어서는 안 된다ㅡ우리는 완전한 것에 대해서는 모두 그것의 생성에 의문을 갖기보다는 오히려 현존하는 것이 마치 마술에 의해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그것을 즐기는 데 익숙해 있다. 아마 우리는 이 점에서 아직도 아주 오랜 신화적 감각의 영향 아래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치(예를 들면 페스툼Pästum의 신전과 같은 그리스의 신전 속에 있으면) 어느 날 아침 신이 장난삼아 거대한 암석으로 그의 집을 지어놓은 것처럼 느끼는 것과 거의 같은 것이다 : 또한 그것은 다른 한편으로 영혼이 갑자기 마법에 걸려 바위 속으로 들어가, 마치 그 바위를 통해 말하려는 것처럼 느끼는 것과도 거의 같은 것이다.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이 즉흥적인 것이라는, 기적처럼 갑자기 생긴 것이라는 믿음을 불러일으킬 때 완전한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기꺼이 이런 망상을 지지하며, 창작을 시작할 때의 감동적인 불안, 맹목적으로 더듬는 듯한 무질서함, 혼란, 주목을 끄는 꿈과 같은 요소를 예술 속에 끌어들이는데, 이것은 보는 자와 듣는 자의 영혼으로 하여금 완전한 작품은 갑자기 생겨난다는 것을 믿도록 속이는 수단이다. ㅡ예술의 학문은 이런 착각을 가장 분명하게 거부해야 하고, 예술가의 그물에 걸리는 한, 지성의 그릇된 추론과 악습들을 적발해내야 한다. 그것은 자명한 일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145절[13]
예술가는 자신의 예술을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전제, 즉 환상적인 것, 신화적인 것, 불확실한 것, 극단적인 것, 상징적인 것에 대한 감각 그리고 개인의 과대평가와 천재에게 있는 기적적인 그 무엇에 대한 믿음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예술작품, 시의 이념, 철학의 근본 사상이 은총의 빛처럼 하늘에서 비쳐 내리는 듯이 오는 순간적인 영감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믿는다. 사실 그것은 잠시 막혀 있던 생산력이 갑작스럽게 유출되는 현상에 불과한 것이지 그 어느 것도 '기적'은 아니다. 뛰어난 예술가 또는 사상가의 상상력도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항상 좋은 것과 일반적인 것과 나쁜 것을 동시에 생산해낸다. 다만 극도로 세련되고 숙련된 그들의 판단력이 이것을 내버리기도 하고 가려내기도 하며 때로는 결합시켜서 위대한 예술작품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예술적 즉흥이라는 것은 낮은 자리에 위치할 뿐이다.

본질을 직접적으로 볼 수 있는 직관이 있다는 믿음, 또 그러한 천재가 있다는 믿음은 작품의 경우 우리가 이미 예술가의 완성된 표현예술만을 보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생성되었는가'를 본인 이외에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므로, 완성된 표현예술은 현재 완성된 것으로서 위력을 발휘하여 '생성 과정'에 관한 모든 사유를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도 사실 부단히 소재를 구하고 그것들을 자기의 수단으로 이리저리 짜 맞추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얼마나 오랫동안 수정과 정리를 거치면서 그의 머릿속에 머물러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면 이러한 천재적 직관에 대하여 우리는 조금 더 냉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전체도 역시 생성하고 변화하며 개별적인 인간도 결코 고정적인 것과 지속적인 것이 아니므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예술가와 그 시대의 양식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다만 그러한 양식의 변화는 청중과 관중들도 이 진행에 참여하여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느리게 진행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상당히 멀리 떨어진 높은 곳에서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와 더 이상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갈 수 없어 마침내 불만스럽게 다시 더 아래로 내려오는 대중 사이에 당장 커다란 틈이 생기게 된다. 예술가는 더 탁월해지기를 바래야 하지만, 동시에 그는 그의 추종자들과 보조를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불완전하게 표현하는 것은 때때로 철두철미하게 표현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다.

예술가가 예술을 표현할 때, 단순히 감관으로 받아들이는 감성적 자극만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상징들이 작품을 이해하는데 더 중요하다. 따라서 본의 아니게 예술가는 과거의 상징들을 부활시킨다. 그렇게 과거에서 비쳐오는 빛에 의해서 현재가 새로운 색깔을 띠게 되면, 적어도 잠시 동안은 옛날의 감각이 다시 한번 생생히 되살아나서, 거의 잊고 있던 박자에 따라 심장은 고동치게 된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술의 발전은 처음에 엄격한 상징적 구속으로 시작해서, 속박이 결국 완전히 풀어질 때까지 한 단계 한 단계 느슨해져가게끔 천천히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반면에 아무 구속도 없이 범람하는 불규칙적인 온갖 양식들은 이러한 성장을 씻어내버릴 것임이 틀림없다. 또한 표현력을 억제하고 여러 가지 예술 수단을 조직적으로 구사하는 가운데 본래의 예술적 행동을 발견하는 법을 잊어버린 대중들은 마침내 그것들을 전혀 즐길 수 없게 될 것임이 틀림없다. 예술이 이런 식으로 해체되지 않으려면, 새로운 소재와 성격이 아닌 오랫동안 익숙한 낡은 것에서 끊임없이 지속되는 새로운 영감과 재설계가 필요하다. 이것이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훗날 괴테가 이해했고 또 프랑스인이 실행했던 예술이다.

4.5. 5장 좀더 높은 문화와 좀더 낮은 문화의 징후

퇴화를 통해 고상해짐ㅡ우리는 역사를 통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일상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없는 근본 법칙들의 동일성에 따라, 즉 그들의 공동 믿음에 따라 살아 있는 공동심을 가지고 있을 때 한 민족의 혈통이 가장 잘 존속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한다. 여기서 훌륭하고 탄탄한 풍습이 강화되고, 개체의 종속성을 배우며 품성에는 이미 강인함이 생일선물로 주어져서, 그 후에는 그것이 습관화된다. 강하고 동질적이며 특징적인 개체들을 기반으로 하는 이런 공동체가 가지는 위험은 한번 정착되면 그림자같이 뒤따라 다니는 그것, 세습에 의해 점차 강화되는 우둔화이다. 이와 같은 공동체에서 정신적 진보는 속박받지 않고 더 불안정하며 도덕적으로 더 약한 개인들에게 달려있다 : 그들은 새로운 것과 대체로 다양한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무수히 많은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별 뚜렷한 영향도 보이지 않고 소멸해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들이 후손을 가지게 되면, 긴장이 완화되어 때로는 공동체의 안정된 요소에 상처를 초래하기도 한다. 바로 이 상처로 인해 약화된 자리에서부터 새로운 그 무엇이 전 공동체로 접종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의 전체적인 힘은 이 새로운 것을 그의 피 속으로 받아들여 동화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해야 한다. 퇴화해가는 본성들은 진보가 이루어지는 어디에서나 가장 높은 의미를 지닌다. 대개 모든 진보는 부분적인 약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가장 강한 본성은 유형을 계속 지켜나가고, 좀더 약한 본성은 유형을 계속 형성해나가는 것을 돕는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224절[14]
니체는 공동체의 관습과 전통을 지켜나가는 것을 '속박된 정신'이라 부르고, 이러한 관습과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것을 '자유정신'이라 부른다. 속박된 정신은 상례이고, 자유정신은 예외이다. 형이상학, 종교, 도덕, 예술 등은 속박된 정신이고, 학문은 자유정신이다.[15] 속박된 정신은 자신의 입장을 근거에서가 아니라 습관에 대한 믿음에서 받아들인다. 또한 속박된 정신은 개인을 확실히 새로운 존재이긴 하지만 하나의 반복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처럼 다룬다. 모든 국가와 신분, 결혼, 교육, 법률과 같은 사회질서, 이 모두는 그것들에 대한 속박된 정신의 믿음 속에서만 힘과 영속성을 가지게 된다. 익숙해짐으로써 본능이 되어버린 믿음을 따를 것인가 따르지 않을 것인가 이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기 때문에, 속박된 정신을 지닌 사람은 쉽고 빠르게 선택한다. 즉 강한 성격을 가진다.

반면에 그의 혈통과 환경, 신분과 지위 또는 지배적인 시대의 견해와 다르게 사유하는 사람을 자유정신이라고 한다. 이들은 새로운 것과 대체로 다양한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습관화된 믿음을 거부하고 학문적 '근거'를 요구한다. 다만 근거가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와는 상관 없이 그가 이를 통해 관습적인 것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자유정신의 본질에 속한다. 두 가지 가능성 밖에 없는 속박된 정신과는 다르게, 자유정신은 행위할 수 있는 50가지 가능성과 그 방향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쉽사리 의심에 사로잡히고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다. 즉 약한 성격을 가진다.

속박된 정신을 통해 훌륭하고 탄탄한 풍습이 강화되고 개체는 종속성을 배우며 품성에는 강인함이 선물로 주어진다. 문제는 우둔함도 같이 세습된다는 점, 또한 속박된 정신의 권위가 폭군적 요소[16]를 강화시킨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공동체에서 '정신적 진보'를 하기 위해서는, 속박받지 않고 더 불안정하며 도덕적으로 더 약한 개인들, 곧 자유정신이 필요하다. 그런데 자유정신은 너무나 많은 동기와 관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의심에 사로잡혀서 자신을 관철시킬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으므로, 무수히 많은 자유정신들이 자신의 나약함으로 인해 별 뚜렷한 영향도 보이지 않고 소멸해간다. 그러나 그들이 어쨌든 지적 후손을 가지게 되면, 긴장이 완화되어 때로는 공동체의 안정된 요소에 상처를 초래하기도 한다. 상처는 공동체를 부분적으로 약화시키지만, 바로 이 상처로 인해 약화된 자리에서부터 새로운 그 무엇이 전 공동체로 접종되는 것이다. 단,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전체적인 힘이 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동화시킬 수 있을 만큼 강해야 할 것이다. 어디에서인가 부패하고 약해져가는, 그러나 전체로서는 아직 강하고 건강한 공동체여야 새로운 것의 감염을 받아들여 그것을 장점으로 동화시킬 수가 있다.

그렇다면 약한 성격을 가진 자유정신이 자신을 관철시키고도 파멸하지는 않기 위해서, 그가 '비교적 강하게' 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이 있는 것일까? 한 개인이 관습에 맞서 완전히 개인적인 세계 인식을 지향하는 활력, 그 불굴의 힘, 그 인내력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니체에 따르면 자연이 그런 정신을 산출한다. 자연은 그를 학대하고 괴롭혀서 상처를 입히고는 이를 통해 자신을 해방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극도로 자극해서, 그런 '강한 자유정신'을 기어코 만들어낸다. 예컨대 숲속에서 완전히 길을 잃어버린 사람이 어떤 방향을 향해 넓은 곳으로 나가려고 노력하다가, 아무도 모르는 새로운 길을 종종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용감해지는 수밖에 없다. 이제 어떻게든 결론날 것이다. 다만 우리는 걷자. 이 자리에서 빠져나가자! 그는 운명이 그에게 입힌 상처를 통해, 가장 작은 이익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가장 냉정하고 끈질기게 이용할 줄 알게 된다. 그는 끝내 상처를 극복하고는 그것으로 자신을 해방할 수단을 찾는다. 속박된 정신에게는 생각의 한계가 없는 이러한 자유정신이 마치 '악'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로 인해 인류가 결코 다시 갈 수 없고 가서는 안 되는 곳까지 그는 가장 확실하게 알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모든 것, 모든 시도, 오류, 실수, 착각, 정열, 그의 사랑과 희망이 자신의 목표 속에서 남김없이 꽃을 피우도록 성취하는 것은 자신의 손에 달려 있음을 안다.

이렇게 더욱 높은 문화 영역에서는, 가장 강한 본성은 유형을 계속 지켜나가고, 좀더 약한 본성[17]은 유형을 계속 형성해나간다. 상이한 이 두 본성들 사이에서 하나의 과감한 춤과 같은 힘과 유연성을 보이며 포용을 이루어내는 것은 위대한 문화의 결정적인 표지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방해하는 것은 바로 여론이다.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신문기자와 잡지기자의 판단들과 여론이 유리한 평가를 퍼뜨리거나 불리한 평가를 퍼뜨려서 '고유한 유형의 유지와 형성'을 방해한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과거에는 분리되고 적대시하기만 했던 '강한 자유정신'을 가진 개인들이 오늘날에는 결합하여 서로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하나의 공동사회를 이루어야 한다. 만약 개별 인간들이 절반의 정신과 절반의 교양을 지닌 우민정치적 성격에 맞서 투쟁하게 될 경우뿐만 아니라 대중 효과의 도움으로 독재를 확립하려는 시도에 맞서 투쟁하게 될 경우, 그들과 같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같은 조건 아래 투쟁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도 그들의 손을 잡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개별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주장할 수 있으며 모든 조류를 거슬러 자신의 궤도에서 삶을 끝까지 헤엄쳐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에게서 최고의 기쁨을 느낀다. 그들은 자기들의 표지를 알고 있다.ㅡ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각자는 자유로우며 자신의 위치에서 싸우고 승리한다. 그리고 굴복하기보다는 차라리 몰락한다.[18]

4.6. 나머지 장들(6~9장)

6장 '교제하는 인간'에서 니체는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심리학적 우월감과 허영심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가장 가까이 알고 지내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감정들이 얼마나 다르며 또 의견들은 얼마나 분분한가. 똑같은 생각들조차도 친구의 머리 속에서는 얼마나 완전히 다른 입장과 강도를 가지고 있는지, 오해하고 적대적으로 와해되는 동기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구'는 있다. 다만 상대에 대한 오류와 착각들이 그들을 친구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서로가 친구로 계속 남기 위해서 그들은 그 오류와 착각들에 대해 침묵하는 것을 배워두어야만 할 것이다. 그 일을 들추기 시작하면 우정은 여지없이 산산조각 나고 만다.

7장 '여성과 어린아이'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심리적 차이, 사랑과 결혼 등를 논하고 있다.

8장 '국가에 대한 조망'에서 니체는 물질적 행복을 요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받고 있는 것처럼, 정신적 행복을 더 중요시해서 물질적 행복은 경시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인정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니체는 사회의 권력이 자유정신의 확대로 인해 미래의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정치적 세력의 양보가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즉, 사회의 권력과 분배는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권리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얼마나 '할 수 있는가'를 따지는 힘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기존 권위는 그러한 힘의 변화가 이루어지기 전까지 인정하는 것이 좋다. 물론 니체는 진보가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 그것은 혁명적 전복이 아닌, 한 세기가 더 걸리는 조심스럽고 느린 발전이어야 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강제적인 변화가 아닌 '점진적인 의식의 개조'(452절)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때에 이르면 민족과 국가는 약화될 것이고, 끊임없는 교차의 결과로 '유럽인'이라는 혼합 종족이 생겨날 것이다.[19]

9장 '혼자 있는 사람'에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심리학적 관찰을 하고 있다. 그 밖에 여러 가지 통찰을 보여주지만, 마지막 부분의 '신념과 정의에 대해'(629~637절)는 『안티크리스트』에서도 주요하게 다루는 주제[20]인 만큼 집중해서 읽어볼 필요가 있다.

5. 2권

너무나 아름다운 것과 인간적인 것ㅡ"너 가련한 필멸자에게 자연은 너무나 아름답다." ㅡ그렇게 느끼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 그러나 몇 번이고 모든 인간적인 것과 그것의 충만함, 힘, 섬세함, 얽힘 등을 진지하게 관찰해볼 때, 나는 겸허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으면 안되는 기분이 들었다. "관찰하는 인간에게 역시 '인간'은 너무나 아름답다!" ㅡ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단지 도덕적인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Ⅱ』 1장 342절[21]
1장 '혼합된 의견과 잠언들'은 말 그대로 본문(1권의 1~9장)에 대한 기타 단편적인 의견과 잠언들을 한데 모아 놓은 장이다. 2장 '방랑자와 그의 그림자'도 마찬가지로 그 밖의 의견과 잠언들을 모아놨지만 비교적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여기서 방랑자는 자유정신[22]을 말하고, 그림자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비주류 의견[23]을 말한다.
[1] 자유정신은 전통과 관습에서 벗어나 예외적으로 생각해보는 것을 말한다. (니체는 심리학적 방법을 애용한다) 이를 통해 자유정신은 새로운 것과 다양한 것을 시도하고 자신의 생각의 한계를 알아봄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넓히는데 앞장선다. 그리고 이 많은 생각들 중에서 받아들여진 소수의 생각만이 정신의 진보를 매우 천천히 나아가게 한다. (즉, 니체에게 있어서 생각하는 것과 받아들여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러한 작용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정신을 가진 모든 인간들에게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심리학적으로 관찰한 자유정신의 극단적인 한 부분만을 보고, 그렇기 때문에 자유정신이 영웅이나 괴물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독이다. 우리가 '학문의 탐구와 시도'를 극단적이라고 거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유정신의 탐구와 시도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 니체가 말했듯이, 자유정신은 그것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문제이지, 그것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된다는 문제는 아니다.[2] 그러나 몬티나리 M. Montinari의 연구에 따르면, 몇몇 단편들(제1권의 32, 33, 108, 114, 125, 148, 154, 158, 163, 224, 233, 234, 261, 262, 360, 474, 607의 17개의 단편)은 바이로이트 축제극이 열리기 1년 전인 1875년 여름에 이미 씌어졌던 글들이다.[3]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7(KGW Ⅳ₂)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p.63[4]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7(KGW Ⅳ₂)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p.23~24[5] 인간에게 불변하는 특성과 목적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6] 정열, 언어, 예술, 종교 등의 관습과 전통을 말한다.[7] 여기서 '선한 사람'은 강자를 지칭한다. 44절 참조.[8] 선에는 선으로, 악에는 악으로 보복할 수 있는 힘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을 '선함'이라고 한다.[9]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7(KGW Ⅳ₂)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p.74~75 (해당 번역에 문제가 있으므로 원문#을 참조해서 번역을 고침)[10] '함께 괴로워하다'는 말이 독일어로 '동정(Mitleid)'이다.[11] '동정(Mitleid)'은 독일어로 '함께 괴로워함'을 뜻한다.[12]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7(KGW Ⅳ₂)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p.133 (해당 번역에 문제가 있으므로 원문#을 참조해서 번역을 고침. Neigung의 번역에서 '호의'→'애정'.)[13]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7(KGW Ⅳ₂)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p.167[14]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7(KGW Ⅳ₂)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p.225~226 (원문#을 참조하여 해당 번역을 고침)[15] 다만 니체는 예술을 속박된 정신과 자유정신 사이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아마도 이러한 점 때문에 후기 니체에서는 학문보다 예술에 더 집중해서 논의를 진행해나가는 것으로 보인다.[16] 속박된 정신의 권위는 자유정신을 억압한다.[17] 정확하게 말하면 약한 본성(자유정신) 중에서 자연이 준 자신의 결점을 이겨내고 '비교적 강하게' 될 수밖에 없는 사람을 말한다. (=강한 자유정신)[18] 1권 261절에서 니체는 '대중'이 문화를 장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한 명이 문화를 장악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니체가 생각하는 문화의 건강한 상태는, 여러 명의 '강한 자유정신'이 문화를 나누어 지배하면서 평소에는 서로를 견제하지만, 대중이나 1인 독재의 억압에는 서로 힘을 모아 이에 저항하는 것을 말한다.(=정신(문화)의 과두정치) 이는 한 명의 위대한 천재가 아닌 여러 명의 위대한 천재가 있어야 된다는 158절에서도 동일하게 주장되고 있는 내용이다. 158절은 다음과 같다. "위대한 천부적 소질들은 수많은 허약한 힘과 싹을 짓누르고 그 주위에서 본성을 황폐하게 하는 운명적 성질을 가지고 있다. 예술의 발전에서 가장 행복한 경우란, 여러 명의 천재가 서로 견제할 때이다. 이렇게 투쟁하는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약하고 섬세한 본성을 가진 사람에게도 공기와 빛의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다."[19] 니체는 632절에서 권위의 단점이 분명하긴 하지만, 지나치게 자유롭고 활기 없는 문화 속에서는 유익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나약한 새로운 자유정신이 그 귄위에 대항하여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20] '확신(신념)'에 대한 문제를 최후기 작품의 제일 중요한 부분(자기 경멸의 해답을 여기서 찾고 있다)에서까지 다룬다는 점은 그만큼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이다.[21]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8(KGW Ⅳ₃)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Ⅱ』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2, p.194 (원문#을 참조하여 해당 번역을 고침)[22]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7(KGW Ⅳ₂)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1, p.449~450에서 자유정신이 방랑자임을 밝힌다.(1권 638절)[23]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8(KGW Ⅳ₃)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Ⅱ』 김미기 옮김, 책세상, 2002, p.217에서 방랑자가 그림자를 보고 "나 자신이 말하는 것과 거의 같은데, 다만 내 목소리보다는 더 작은 목소리 같군."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