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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20:57:53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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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92년

앙코르
អង្
2008년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ប្រាសាទព្រះវិហារ​របស់​
2017년

삼보르 프레이 쿡 사원,
고대 이샤나푸라의 고고 유적
សំបូរព្រៃគុ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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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TempleofPreahVihear.jpg
{{{#!wiki style="margin:-5px -10px -5px"<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0000>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유네스코 세계유산
UNESCO World Heritage
<colbgcolor=#000><colcolor=#FFF> 이름 한국어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크메르어
영어 Temple of Preah Vihear
프랑스어 Temple de Preah Vihear
국가·위치
[[캄보디아|]][[틀:국기|]][[틀:국기|]]
등재유형 문화유산
지정번호 1224
등재연도 2008년
등재기준 (ⅰ)[1] }}}

1. 개요2. 상세3. 영토 분쟁4. 관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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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크메르어: ប្រាសាទព្រះវិហារ (prasaat preah vihear)[2]
IPA 표기: [praː˥ saːt˧˥ preː˥ viː˥ haɪ̯˧˩][3]
캄보디아 프레아 비헤아르 지역에 있는 크메르 제국 시대에 세워진 힌두교 사원이다. 2008년 캄보디아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후술할 지역 분쟁 때문에 태국과 마찰을 빚고 있다.

사원의 명칭인 프레아 비헤아르(Preah Vihear)는 산스크리트어로 성지(聖地)라는 뜻이다. 캄보디아어로 읽으면 쁘레아 위히어라고 읽을 수 있는데 국제법 판결에선 프레아 비헤아르로 통용된다.

2. 상세

캄보디아와 태국의 국경을 가로지르는 당그레크 산의 페이 타디 절벽 꼭대기에 있다. 대부분이 평지인 캄보디아에서 유독 높은 고원에 있다.

크메르 제국 9세기 초에 건축되었지만 현재 남아있는 유적은 10세기 초에 건축된 부분이다. 9세기 초 크메르 제국의 왕인 자야바르만 2세의 아들 인드라유다 왕자가 힌두교의 시바신을 모시기 위해 성소를 건축했다. 처음에는 목조 건축물로 지어졌지만 다른 왕들이 통치하면서 조금씩 개조했고 11세기 초 사암을 이용해서 재건되었다. 이후 크메르 제국이 불교 국가로 바뀌며 사원도 불교 사원으로 바뀌었다.

1975년에 크메르 공화국을 타도한 크메르 루주민주 캄푸치아가 집권하자, 크메르 공화국의 마지막 정부군이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근처를 방어하면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전멸하는 비극을 맞이했다.[4] 1990년대에 이르러 캄보디아가 안정을 되찾은 이후부터는 사원의 관리와 보호를 재개했고 200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캄보디아의 주요 유적지인 앙코르 유적과 비교하면 작지만, 남북으로 800미터나 이어져 있고, 길이 잘 포장되어 있어서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는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앙코르 유적의 사원과는 구조가 전혀 다르지만, 메루 산을 묘사하려는 목적은 같다. 총 163개의 가파른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사원이 나오며하이 흐로스가? 사원 위로 올라오면 페이 파디 절벽 아래로 캄보디아 평원이 다 보인다.

3. 영토 분쟁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은 사원의 유적 그 자체보다 사원에 얽힌 영토 분쟁이 더 유명하다.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분쟁은 식민지 시대 때 유럽 열강의 무책임한 영토 분할의 폐해와 영토의 취득을 위한 주장의 시효를 제때 해야 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로 자리를 잡았다.

영토 분쟁의 시작은 1904년 프랑스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화할 때 태국과 캄보디아의 영토를 잘못 측정하는 바람에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이 캄보디아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이를 태국 시암 왕조가 제때 발견하고 수정을 요구했으면 사원은 태국의 소유가 될 수 있었으나 실수를 발견하지 못한 시암은 그대로 프랑스의 측량을 승인해버리고 말았다. 이후 1934년 시암은 오류를 발견했으나 프랑스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1950년이나 되어서야 사원 지역에 국경수비대를 배치하였다. 1954년 캄보디아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하자 캄보디아는 태국의 국경수비대 철수를 요구했고, 이를 태국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자 1959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였다.

당시 태국은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 지역이 역사적으로 태국의 관할 하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국제사법재판소는 태국이 '착오를 인지하고도 오랜 기간동안 문제 제기를 하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영토의 이전을 묵인했다고 판단하여 1962년 캄보디아의 소유권을 인정하였다. 판결문에서 ICJ는 50년 가까이 태국은 해당 영토에 대하여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고, 이는 권리의 포기이자 캄보디아의 영토로서 묵인했다고 보고 태국의 권원 주장은 금반언(禁反言)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시하였다.

그러나 태국은 국경수비대를 철수하고도 이 판결에 대해 불만이 있었는데, 캄보디아가 사원을 단독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하려고 하자 태국은 사원을 캄보디아-태국 공동의 세계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며 항의했다. 결과는 이 문서에서 보다시피 캄보디아 단독 세계유산 지정.

2008년에는 판결에 불만을 가진 태국의 시위대 3명이 캄보디아로 침입하였고, 캄보디아군이 이들을 억류하자 태국군이 캄보디아 영역에 진입하여 대치가 벌어졌다. 2009년 4월에는 태국군의 총격으로 66개의 돌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2011년 4월에도 교전이 발생하여 12명이 숨지고 4만 명 가까운 주민들이 피난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2011년 7월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을 비무장지대로 지정하고 양군의 철수를 결정했지만 2012년 4월까지 군병력은 계속 주둔했다. 2013년 국제사법재판소는 1962년의 판결을 재확인하였고 태국군의 철수를 요구했다. 지금은 양군이 모두 철수했지만, 아직도 국경에서의 교전은 지속되고 있다.

4. 관광

현재는 태국과의 교전이 중단되었기에 관광을 목적으로 방문은 가능하나 씨엠립에서도 차로 3~4시간을 가야 있으므로 접근성은 매우 떨어진다. 그나마 버스가 있긴 하지만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차하고 택시 호객질도 많아서 혼자서 가고자 마음을 먹었을 땐 고생을 할 수 있다.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ប្រាសាទ"(prasaat)은 "사원"을 의미한다.[3] 현재 공식 크메르어 표기법은 없지만, 실제 발음에 가장 비슷하게 전사해 보면 "쁘라쌋 쁘레비하이" 정도가 된다.[4] 1975년 4월의 시점에서 크메르 공화국의 정규군은 프놈펜의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미군 국방무관CIA 공작원들의 도움에 힘입어 수도권과 북서부 지역들(씨엠립오다르 메안제이와 프레아 비헤아르 사원)과 바닷가 지역들(시아누크빌캄포트) 및 콤퐁톰콤퐁치낭에서 여전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1월 1일부터 프놈펜 교외로 진격한 크메르 루즈의 공세에 맞서 111일간 전투가 연속으로 진행되었고, 병력과 물자가 매우 빨리 고갈되어 더 이상 반격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끝까지 살아남은 자국민들이 우방국(육운→태국, 해운→말레이시아, 공운→싱가포르)으로 탈출하는 최대한의 기회를 확보하기 위해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것이다. 남베트남으로 탈출하는 선택은 북베트남군사이공 총공격에 집중하면서 크메르 루즈와 합작하는 방식으로 메콩강 항로를 봉쇄한 덕택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라오스 왕국라오스 내전의 패배와 함께 북베트남속국으로 전락했기 때문에 아무도 대안으로 고려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