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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3> 프랑스의 알제리 원정 ,1830 ~ 19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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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알제리 원정 Conquête de l'Algérie par la France[1]/ الغزو الفرنسي للجزائر[2] | |
기간 | |
1830년 6월 14일 ~ 1904년 1월 19일 | |
장소 | |
알제리 | |
원인 | |
프랑스의 알제리 정복 야욕 | |
교전 국가 및 세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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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샤를 10세 루이 필리프 1세 | 후세인 데이 |
병력 | |
34,000명 | 30,000명 |
결과 | |
프랑스의 알제리 식민화 | |
피해 | |
100,000~200,000명 사망 및 부상 | 최소 1,000,000명 사망 및 부상 |
1. 개요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의 알제리를 침공해 식민지로 만든 원정으로 알제리는 프랑스의 통치를 받게 되었고, 이후 수십 년에 걸친 저항과 전쟁 끝에 1847년경 프랑스 식민지로 완전히 편입되었다.2. 배경
당시 알제리는 알제 섭정국이 차지하고 있었다. 알제 섭정국은 이론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지만 사실상 독립국이었다. 그러나 데이는 수도인 알제와 그 주변만 다스렸고 나머지 영토는 현지 토착 세력의 통치되었다. 이 같은 상황은 지중해 일대에 바르바리 해적들이 설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지중해에 활개치는 해적들을 토벌하기 위해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함대가 주기적으로 알제리를 침공하였다. 이로인해 해적질과 노예 무역이 감소하였다. 그 결과 알제 섭정국의 수입은 감소하였고, 이 손실을 메우기 위해 세금을 인상하였다. 이로인해 세금 인상에 반발한 농민들은 봉기를 일으키거나 내륙으로 가버렸다. 이렇게 내부가 혼란스럽자 프랑스의 국왕 샤를 10세는 인기를 높이기 위해 알제리 원정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내부도 왕당파와 자유주의자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어서 내부 문제에서 대중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미 알제 섭정국과 바르바리 해적은 기독교 노예 무역과 해적 행위를 포기해서 전쟁을 일으킬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 당국은 전쟁 명분을 만들기로 결정했다.18세기 말 나폴레옹 전쟁 시기, 알제리는 프랑스에 곡물을 대량으로 수출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에도 프랑스는 그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 미루고 있었다. 알제리의 통치자 후세인 데이는 여러 차례 빚을 갚으라고 요구했지만, 프랑스는 절반 정도만 갚고 이를 무시했다. 1827년 4월 29일, 이 날도 후세인 데이는 프랑스 대사 피에르 뒤발을 불러 대금을 갚으라고 독촉하였다. 그러자 피에르 뒤발은 갚기 싫다며 말하자 이에 분노한 후세인 데이는 파리채로 뒤발을 때렸다. 샤를 10세는 외교 대표에 대한 이러한 모욕을 이용하여 먼저 데이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후세인 데이가 최후 통첩을 거부하자 알제 항구에 대한 봉쇄를 시작했다. 이러한 봉쇄는 3년 간 지속되었다. 3년 동안 알제리 원정을 준비한 프랑스는 마침내 1830년 5월 16일, 103척의 전함과 464척의 수송선으로 구성된 함대가 37,612명의 병력을 태우고 툴롱을 출발했다.
3. 전개
3.1. 알제 침공
1830년 6월 14일 프랑스군은 알제리 수도인 알제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진 시디 프레디지 반도에 상륙하였다. 프랑스군은 해안 포대를 손쉽게 제압하였다. 시디 프레디지 반도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교두보에 멈춰 서서 공성 장비가 도착하기를 기다럈다. 그러자 6월 24일 아침 알제 섭정군은 프랑스 전조기지가 있던 스타우엘리 고원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알제 섭정국에서는 후세인 데이가 전투 병력을 모으기 위해 3일 동안 적극적으로 노력했고, 프랑스가 상륙 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자 알제 섭정군은 선제 공격하였다. 그러나 시디 칼레프 전투는 알제 섭정군의 패배로 끝이 났다. 6월 29일, 프랑스군이 보르즈 물레이 하산 요새 근처에 도착하였다.[3] 6월 30일, 프랑스군은 포위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참호를 파기 시작했고 7월 3일까지 모든 포병을 투입했다. 7월 4일 오전 4시경, 포병대를 지휘하는 라 히테 장군은 모든 포대에 한꺼번에 포격을 개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알제 섭정군은 맹렬히 저항하였지만 요새 내부가 포탄으로 황폐해져 더 이상 저항 할 수 없었다. 결국 알제 섭정군은 요새를 포기하고 화약고에 불을 질렀다. 이로인해 중앙에 있던 큰 탑이 파괴되었지만, 프랑스군은 보르즈 물레이 하산 요새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요새가 함락되자 알제는 더 이상 저항 할 수 없었다. 정오 조금 지나서 데이의 사절이 프랑스군 주둔지에 와서 프랑스에 공식 사죄하고 프랑스 전쟁 지출을 상환하는 조건으로 프랑스의 철수를 협상하려 했다. 이에 드 부르몽 장군은 프랑스는 주민들의 집이 약탈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겠다고 약속했고, 후세인 데이도 망명 중에 개인 재산을 가져올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내용을 들은 후세인 데이는 항복하였고, 프랑스군은 7월 5일 12시에 도시에 입성했다. 며칠 후, 후세인 데이와 그의 가족은 호위함에 탑승하여 나폴리로 출발하였다.
3.2. 알제리 나머지 지역 침공
알제가 함락 된 후 프랑스에서는 7월 혁명이 일어나 샤를 10세는 퇴위하였다. 샤를 10세가 퇴위하자 원정군 총사령관인 드 부르몽 장군은 샤를 10세와 함께 영국으로 떠나버렸다. 그의 후임으로 베르트랑 클루젤이 임명되었다. 클루젤은 메데아, 오랑, 콩스탕틴의 베이들에게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들어오라고 말했다. 세 명의 베이가 거절하자 클루젤은 튀니스 베이국의 베이인 후세인과 협상하였다. 클루젤은 피를 보지않고 오랑과 콩스탕틴에 프랑스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했다. 하지만 프랑스 외무부는 클로젤의 협상에 반대했고, 그를 해임하고 베르테젠 남작을 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현지 알제리인들에게 급속도로 민심을 잃어갔고, 지속적으로 게릴라에 시달리자 메데아 침공을 포기하고 후퇴하였다. 프랑스의 후퇴 소식이 알려지자 카빌인은 퇴각하는 프랑스군을 공격하였다. 이로인해 베르테젠이 통제하지 못한 공황 상태에 빠진 퇴각으로 내몰렸다. 이 퇴각 동안 프랑스의 사상자는 상당했고, 이 승리는 저항의 불길을 부채질하였다. 결국 장드디외 술트 원수는 베르테젠 남작을 해임하고 사바리 장군을 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였다.사바리 장군은 클루젤이 점령했다가 카빌인에게 잃었던 안나바와 베자이아를 탈환하였다. 사바리 장군은 토지 식민지화와 재산 몰수 정책을 지속했고, 현지인들의 저항을 잔인하게 진압하였다. 1833년 초 사바리 장군이 병을 앓자 그의 후임으로 테오필 부아롤 장군이 임명되었다. 그는 아르제우와 모스타가넴을 점령하였다. 1834년 6월 22일, 프랑스는 무슬림 인구가 약 200만 명으로 추산되는 알제리의 점령 지역을 군사 식민지로 공식 합병했다. 그 후 북아프리카 프랑스령 총독으로 장 밥티스트 드루에가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