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회 Ordines Franciscani | |||||
<colbgcolor=#542014,#542014><colcolor=#ffffff,#ffffff> 이명 | 프란치스칸 가족(Franciscan Family) | ||||
표어 | <colbgcolor=#542014,#542014><colcolor=#ffffff,#ffffff> 라틴어 | {{{#542014,#ffffff 'Pax et bonum'}}} | |||
영어 | Peace and the good | ||||
한국어 | 평화와 선 | ||||
설립 시기 | 1209년 2월 24일 ([age(1209-02-24)]주년) | ||||
설립자 |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 ||||
규모 | 약 650,000명 | ||||
종교 | 가톨릭 | ||||
언어별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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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치스코회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수도규칙”을 따르는 가톨릭 수도회들의 집합체로 “프란치스칸 가족”이라고도 부른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정신을 본받아 겸손함과 청빈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며, 한센병 환자들을 비롯한 병에 걸린 사람들을 위한 봉사도 많이 한다.2. 특징
프란치스코회 혹은 프란치스칸 가족이라 불리는 수도 공동체는 크게 3갈래로 나뉜다. 먼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맨 처음에 직접 조직한 작은형제회는 1회, 아시시의 성녀 글라라와 함께 세운 글라라 수녀회는 2회, 프란치스코가 직접 세우지 않았지만 그의 뜻에 동참하고 있는 수도 3회와 율수 3회, 재속프란시스코회를 통틀어 3회로 지칭된다.프란치스칸 1회인 작은형제회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가 물러난 이후 회칙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열정파니 이완파니 온건파니 하는 3개 분파로 나뉘어 투닥투닥 싸웠다. 사실 마구 싸웠다기보단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수도회를 꾸려나가며 '내가 진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의지다!'를 서로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2인자라 불리는 성 보나벤투라는 그의 일대기를 담은 대전기를 편찬했는데, 그의 부모가 큰 병을 앓고 있는 아기였던 그를 안고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찾아가자 그가 기도를 해주었고, 이 기도로 병이 씻은 듯이 나은 그에게 성인은 "너는 참 운이 좋구나(Buona Ventura)!"란 말을 했다고 한다. 부모는 그 길로 본래 조반니였던 아이의 이름을 보나벤투라로 갈아버렸다고 한다.(…) 여하간 이 보나벤투라는 수장을 잃고 갈라졌던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다시 하나로 뭉친 제2의 프란치스코회 설립자이다.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와 쌍벽을 이루는 스콜라 철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추기경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보나벤투라가 선종한 후, 작은형제회는 다시금 수많은 갈등 끝에 각각 엄수파와 꼰벤뚜알파로 나뉘었는데, 꼰벤뚜알은 엄수파가 주장한 철저한 청빈과 은거 생활보다는 설교와 신학 연구, 사회 내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해내는데 더욱 주력했다. 교황은 꼰벤뚜알을 더 밀어주었기 때문에 당분간 꼰벤뚜알이 주축이 된 프란치스코회는 다시 개혁되어 회칙엄수파가 갈라져나와 엄격한 생활로 돌아갔다. 이 분파는 작은형제회로 다시 뭉쳤지만 오래지 않아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특유의 가난함을 내세운 카푸친회라는 분파가 또 갈라져나와 프란치스칸 내 세력을 키웠다.
그렇게 프란치스칸 1회는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작은형제회, 카푸친[1] 작은형제회로 완전히 나뉘었다. 현재 이 3개 분파는 서로 갈등한다기보다 상부상조하며 수도회의 큰 틀을 이끌어가고 있다고 한다.
수도복은 고깔 모양의 후드가 달린 검은색, 고동색(카푸치노 커피색)이다. 검은색은 “꼰벤뚜알 작은형제회”,[2] 고동색은 “작은형제회”와 “카푸친 프란치스코회”의 복장이다. 세 수도회 모두 허리에는 흰색 허리끈을 두른다.
언뜻 색깔만 다르지 복장은 비슷해 보이지만, 작은형제회와 꼰벤뚜알 작은형제회는 수도복에서 머리와 어깨를 덮는 후드(이탈리아어 cappuccio, cappuccin) 부분이 분리되어 있다. 우선 통옷인 수도복을 입고, 그 위에 따로 후드를 쓴다.
반면에, 카푸친 작은 형제회는 후드 부분이 분리되지 않고 통옷에 붙어 있다. 그리고 후드의 고깔 부분도 나머지 두 수도회보다 더 크다. 이탈리아어로 후드를 의미하는 “카푸친”이 더 두드러진다는 데서 수도회의 이름이 나온 셈이다. 그리고 수도복의 색이 에스프레소 커피에 우유 거품을 올린 색이랑 비슷하다고 해서 그 커피 이름이 카푸치노[3]가 된 것이다.
그래서 복장만 놓고 본다면 작은형제회와 꼰벤뚜알은 활동 성격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후드가 더 크다는 걸 감안하면, 좀 더 은둔자적인 생활을 지향하고 있는 셈이다.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의 이름도 바로 위에서 말하는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에서 따온 것이다. 2013년 콘클라베에서 자신의 선출을 앞두고 "가난한 이를 기억하라"는 어느 동료 추기경의 말을 듣고서 바로 떠오른 이름이었다.[4]
3. 구성
3.1. 작은형제회
자세한 내용은 작은형제회 문서 참고하십시오.3.2.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자세한 내용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문서 참고하십시오.3.3. 카푸친 작은형제회
라틴어: Ordo Fratrum Minorum Capuccinorum이탈리아어: Ordine dei frati minori cappuccini
프랑스어: Frères mineurs capucins
영어: Order of Friars Minor Capuchin
약칭 O.F.M. Cap.
라틴어 원문 그대로라면 '카푸친 더욱 작은(Minoritas) 형제들의 수도회'로 번역돼야 할 이 수도회는 기도와 형제애, 복음화, 가난, 더욱 작음의 영성으로 프란치스코가 살아간 삶을 닮으려 하는 '형제적 공동체(Fraternitas)'다. 그래서인지 여기서는 수도사제와 평수사 구분 없이 서로 '형제'로 호칭하고 있다.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1223년에 인준 받은 회칙(수도규칙)을 문자 그대로 준수하려는 이상에서 비롯됐다. 성 프란치스코의 실제 모범과 이미 알려진 의도, 특히 성인의 유언에서 표현된 대로 회칙을 해석해 성 프란치스코와 그의 첫 번째 동료들을 엄격하게 닮고자 하는 개혁운동으로 시작된 것.
카푸친 영성은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대로 가난하고 겸손하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고자 형제애와 관상, 복음화, 가난 및 더욱 작음, 정의평화 및 창조보전 증진을 핵심적 가치로 삼고 있다.
카푸친 개혁의 시초를 장식한 인물은 당시 작은형제회의 2가지 중 하나였던 준수회(Observantes) 이탈리아 마르케 관구 바시오의 마태오로, 1525년 교황 클레멘스 7세에게 회칙을 문자 그대로 준수해도 된다는 구두 허락을 받는다.이어 클레멘스 7세는 1528년 칙서를 통해 카푸친 개혁을 '은둔 생활의 작은 형제'라는 이름으로 교회법적으로 인준했고, 이들은 성 프란치스코가 입었던 수도복이라고 생각한 길고 뾰족한 모자(Cappucio)가 달린 수도복을 선택했다. 카푸친이라는 이름은 후드 같은 모자, 카푸치오에서 기원한 것으로, 이탈리아어로 카푸치노(Cappuccino)는 '작은 카푸치오'라는 뜻이다.
1535년에 카푸친 작은형제회 총대리가 된 아스티의 베르나르디노는 수도회를 안팎으로 정비, 이후 카푸친들은 그를 진정한 카푸친 작은형제회 설립자로 여기게 됐다. 1619년 교황 바오로 5세는 프란치스코회 세 가지 중 하나로 인가했다.
국내에는 1986년 7월 아일랜드 성 프란치스코와 성 파트리치오 관구 소속 수도자 4명이 입국, 서울대교구에 진출함으로써 시작됐다. 한국 카푸친은 모두 16명이며, 이 가운데 6명은 선교사로 종신서약을 한 사제와 평형제가 각각 3명이다. 한국인 종신서약자는 총 7명으로, 사제는 3명이고 평형제는 4명이다. 나머지 3명은 수련자다.
서울 지역 형제회 경당을 개방, 고해성사를 상설화하고 성체조배 경당으로 발전시켰으며, 수련소가 있는 가평 지역 형제회에선 소규모 피정을 지도한다.
오스트리아 빈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묘가 있는 카푸친 교회의 관리도 이 카푸친 수도회가 담당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인사의 장례식 때는 특별한 의식을 치른다. 처음에는 황제 또는 황태자 등 공식 작위들을 열거하며 '황족'임을 나타내고 입장하려 하나 카푸친 수사들은 "우리는 그런 사람을 모른다."며 거절한다. 2번째에는 직업과 각종 학위 및 수여받은 훈장을 통해 '공인'임을 나타내며 입장하려 하나 또다시 "우리는 그런 사람을 모른다."고 거절한다. 마지막으로 성도 빼고 이름 단 한 단어만을 대며 "한 죄인이 입장한다."고 알리면 비로소 교회 문이 열리는 의식이다. 아무리 황족이라 해도 죽음과 하느님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일개 죄인일 뿐이라는 의미가 있다.
아래 영상은 합스부르크의 마지막 황태자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의 장례식 당시의 모습이다. 교회 안에서 촛불을 들고 기다리는 수사들이 카푸친 수사들이다.
4. 한국의 프란치스코회
다음은 한국 가톨릭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홈페이지.다음은 한국 성공회에 있는 프란시스 수도회의 홈페이지.
심지어 개신교 수도회까지도 존재한다.
- 기독교 동광원 수도회 - 이 공동체의 경우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창립자 이현필은 프란치스코 성인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그의 발자취를 따르려 했다.
5. 관련 문서
[1] 카푸치노의 유래가 되는 그 카푸친이 맞다.[2] 단, 옅은 회색이나 짙은 검회색에 가까운 색도 있다.[3] 이탈리아어로 카푸친 형제회의 사람들이라는 뜻[4] 다만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수도회 출신이 아니라 예수회 출신이다.[5] 외국 대사관, 외국인 아파트와 가까운 서울 한남동(순천향대학교 부속 서울병원 근처)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서울 거주 외국인 신자들을 위한 영어 주일미사를 드리는 소성당도 마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