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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4:07:57

폴 매카트니/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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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Cartney
1970
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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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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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Red Rose Speedway|Red Rose Speedway]]
Paul McCartney and Wings
1973
Band on the Run
Paul McCartney and Wings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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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us and Mars
Wings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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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gs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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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gs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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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gs
1979
McCartney II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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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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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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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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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Снова в СССР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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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wers in the Dirt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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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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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Run Devil Run
1999
Driving Rain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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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
2005
Memory Almost Full
2007
Kisses on the Bottom
2012
New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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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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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Cartney III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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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가족3. 왼손잡이4. 채식주의5. 외모6. 종교7. 사망 음모론8. 성격9. 콜라보레이션10. 내한11. 기타

1. 개요

폴 매카트니와 관련된 여담을 정리한 문서.

2. 가족

아버지 제임스 매카트니는 트럼펫피아노를 연주하였는데, 이는 어린시절 폴 매카트니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머니 메리 매카트니[1]간호사였는데, 폴 매카트니가 15살이 되던 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이는 역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존 레논과 유대를 쌓게 되는 계기가 된다.

형제 관계로는 동생 마이클 매카트니가 있다.[2]
파일:paul and jane.jpg
영국의 하이틴 스타 제인 애셔와 함께

비틀즈 시절 폴은 영국의 하이틴 스타이자 여배우[3]인 제인 애셔와 동거 관계였다. 화이트 앨범 이전에 쓴 폴의 러브송은 본래 제인 애셔를 위해 쓴 곡들이었다.

1964년 둘은 제인 애셔의 집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들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았다. 1965년, 한창 비틀즈가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10대 시절부터 영국에서 인기가 높은 배우였던 제인이[4] 비틀즈와 폴의 인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폴이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기도 했다.

참고로 제인은 폴이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핀다는 사실을 듣자 폴이 둘 사이의 관계를 오픈 릴레이션십으로 여긴다고 받아들여서 자신도 같은 연극에 출연 중이던 동료 남배우와 맞바람을 폈다고 한다.

그래도 1966년 비틀즈투어를 중단하자 폴과 제인은 시골에 별장을 구입해서 재결합하고, 1967년 크리스마스에는 결혼을 발표했다. 그러나 돈은 자신이 벌테니 결혼 후에는 배우일을 은퇴하고 가정에 충실해달라는 폴의 부탁을 자신의 일에 무척 자부심이 컸고, 폴의 상태도 대마초LSD에 중독되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제인이 거절하면서 둘의 관계는 최종적으로 끝이 났다.

이후 폴은 제인이 여행을 다녀온 틈을 타서 그녀와 같이 살고 있던 집에 다른 여자들을 데려오기 시작했고, 결국 폴 매카트니가 시나리오 작가인 프랜시스 슈와츠와 한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을 제인이 목격한 것을 계기로 1968년 7월 20일에 제인 애셔가 공식적으로 폴과의 약혼을 파기한다.

제인 애셔는 훗날의 인터뷰에서 "나는 늘 존과 폴 두 사람의 정신적인 교감을 질투했었다. 게다가 당시 비틀즈의 멤버들이 LSD 트립 체험 등 최신 트랜드를 접할때 나는 늘 배제되어 있었다."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이에 폴 매카트니는 "제인 애셔는 늘 그녀의 일과 인기에만 신경썼을 뿐 자신이나 비틀즈에 큰 관심을 두고있지 않았다."라며 응수했다.

폴과 헤어진 후 제인 애셔는 1971년부터 영국의 만화가디자이너인 제럴드 스카프[5]와 사귀기 시작했고 연인이 된 지 10년만인 1981년에 그와 결혼했으며 2023년 현재까지 몇 십년간 이혼하지 않고 잉꼬부부로 잘 지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제인 애셔에게 폴 매카트니에 대한 질문을 묻는건 실례라고 한다. 실제 2004년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폴 매카트니에 대한 질문을 하자 제인 애셔는 "나에게는 이미 몇 십년을 해로한 남편이 있는데, 뭔 소리냐. 지금 날 모욕하는 거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파일:external/wp.clicrbs.com.br/paul-mccartney-wedding-linda-eastman-pic-mirrorpix-840037306.jpg
폴 매카트니는 1969년 3월 12일 사진작가 린다 이스트먼과 결혼한다. 린다는 유명 록밴드와 동행하며 그들의 모습을 담는 사진작가였는데, 런던에서 활동하던 록밴드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1967년 영국에 왔고, 비틀즈와 알게되었다.

폴의 회고에 따르면 서로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당시 린다는 6살된 딸을 한명을 둔 이혼녀였는데, 폴은 딸 '헤더 루이즈'를 정식으로 입양하였다. 헤더는 지질학자인 친아버지 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폴 역시도 자신의 아버지로 생각한다고 밝혔으며 도공으로 활동하고 있다.

파일:external/www.billboard.com/1281299-paul-linda-mccartney-617.jpg
린다는 폴의 뮤즈로써, 폴은 린다와 윙스활동까지 같이하며 어디든지 함께 하였다. 폴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뮤지션'으로써 린다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았다.[6] 그러나 애초에 밴드에 그녀를 부른 이유는 그녀가 좋은 뮤지션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함께 하고 싶었던 이유였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신경쓰지 않았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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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린다는 유방암으로 인해 투병생활을 지속하던 중 1998년 4월 17일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평생을 함께한 배우자의 사망으로 폴은 큰 슬픔에 빠졌으며, 후에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암 치료제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2014년 11월 6일부터 2015년 4월 26일까지 서울 대림 미술관에서 린다 매카트니의 사진전이 열렸다.

파일:external/img.thesun.co.uk/Macca_wenn1_532_1424023a.jpg
린다와의 사이에서는 2녀 1남을 두었다. 장녀 메리는 사진작가이자 사형제의 어머니로 살고 있으며, 차녀 스텔라 매카트니는 성공한 의류 디자이너다. 막내아들 제임스는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워낙 성공한 아버지를 둔 탓인지 크게 뜨지는 못하고 있다. 그럴만도 한게 아버지가 성공했다 정도가 아니라 세계 음악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전설의 그룹 비틀즈 출신이니... 본인도 유명세에 대한 욕심없이 현재에 만족하며 사는 듯.[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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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2002년 헤더 밀즈[8]라는 환경운동가와 재혼하였다. 그 이듬해에 늦둥이 딸을 보게 되는 등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나 이와 같은 시간이 지속되지 못하고 2007년에 결국 이혼하게 된다. 둘 사이에서 난 딸의 양육권은 조건부로 헤더 밀즈가 가져가게 되었다. 이혼시 헤더 밀즈는 엄청난 위자료를 챙겨 결국 돈을 보고 결혼했던게 아니냐는 여론의 뭇매를 받기도 하였는데, 헤더 밀즈는 몇 해 뒤 이걸 다 탕진했다고.

파일:external/www2.pictures.zimbio.com/Sir+Paul+McCartney+soon+wife+Nancy+Shevell+ZhejPn38lk7l.jpg
그 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것 같던 폴 매카트니는 19세 연하의 낸시 쉬벨을 만나 2011년 세번째 결혼을 했다. 헤더 밀즈와 달리 낸시 쉬벨은 미국의 유명한 자산가의 상속녀로 재산과 관련한 의심에서 벗어난 상태.[9] 최근 폴 매카트니와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는 훈훈한 모습으로 팬들에게도 호의적인 응원을 받고 있다.

3. 왼손잡이

대표적인 왼손잡이 연예인인데, 당시 왼손잡이는 장애인에 준하는 차별 대우를 받았었다.[10] 게다가 당시에는 왼손잡이용 기타는 거의 없다시피 했을 정도라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개조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베이스 기타 또한 좌우 대칭형이라 개조를 해도 불편하지 않고 아주 가벼워 기타처럼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현찰로 구입했다고 한다. 물론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그냥 왼손으로도 칠 수는 있다. Yesterday 잘 보면 오른손잡이용 에피폰 텍산 어쿠스틱 기타를 거꾸로 들어서 픽가드가 위로 올라간 것이 보인다. 나중에는 # 왼손잡이용 리켄배커 4001 베이스 기타를 구입해서 사용했으나 지금은 폴 매카트니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호프너 500/1 베이스 기타를 다시 사용하고 있다. 다만 완전한 왼손잡이는 아니고 식사를 할 땐 오른손으로 나이프를 쥐는 등 다른손잡이인듯하다.

4. 채식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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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열성 채식주의자다.[11] 그래서 폴 매카트니의 공연을 함께 다니는 스태프들도 공연 준비와 공연 기간 동안은 채식만 먹는다고 알려져 있다. 2013년부터는 비건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였으나, 2018년의 인터뷰에서 치즈는 즐겨 먹는 편이고, 비건이 아닌 ‘락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원래 폴 매카트니는 여느 영국인과 같이 육식을 하던 사람이었다. 당대 사람들의 생각처럼 채식주의는 신체를 허약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 제인 애셔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채식주의자인 제인 애셔에게 채식을 처음 접했고 1975년부터 아내 린다 매카트니와 함께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물론 식단을 갑자기 바꾸는 과정에서 꽤나 힘들었지만 끝내 성공했다고 한다.

1975년의 어느 날, 폴과 린다 매카트니 부부는 양고기를 파는 식당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 두 사람은 사람들이 식당에서 열심히 양고기를 먹는 동안 밖에서 평화롭게 초원을 거니는 양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광경에 충격을 받아 본격적으로 채식주의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12] 후술할 심슨 가족의 리사 심슨이 채식주의자가 된 계기도 해당 일화를 차용해, 리사가 목장의 양들의 모습을 본 후 집에서 양고기를 먹으려다가 살아있는 양들과 양고기를 오버랩하고 충격을 받아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폴 매카트니가 심슨 가족본인 목소리로 출현한 데에도 이런 채식주의와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폴 매카트니는 출연 조건으로 "리사 심슨이 채식주의를 계속 유지할 것"을 조건[13]으로 내걸었고, 해당 에피소드 또한 리사 심슨이 채식주의자로서의 삶의 고충을 느끼는 내용으로 방영되었다. 이 설정은 절대 변하지 않아, 현재까지도 리사 심슨은 채식주의를 하고 있다.[14]

현재는 '도살장 문이 유리로 되어있다면 여러분은 고기를 먹지 않을 겁니다'라는 영상을 만들어 현대 축산업의 어두운 면을 고발한 바 있으며, 월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Meat Free Monday'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2006년에는 중국 모피 시장에서 개와 고양이가 잔인하게 도살되는 영상을 눈물을 흘리며 보고 중국 공연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고[15], 2008년에는 달라이 라마에게 육식을 그만둘 것을 주장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린다 매카트니는 채식주의 식품 사업을 런칭했으며 그들의 딸이자 유명 디자이너인 스텔라 매카트니 또한 동물의 모피나 가죽으로 제품을 일절 만들지 않고 있다.

5.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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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폴맥 1966.jpg
파일:폴맥.jpg
비틀즈 활동 시절
A pretty face may last a year or two (네 예쁜 얼굴은 고작해야 1~2년짜리야)
존 레논의 폴 매카트니 디스곡 'How Do You Sleep?' 中[16]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선이 날렵한 곱상한 외모로 10대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17] 그리고 키도 비틀즈 4인방 중 제일 컸다.(180cm)[18]

또한 링고만큼은 아니었지만 얼굴도 상당히 작았고 큰 키와 긴 다리 길이 덕분에 리즈 시절에는 모델 뺨치는 비율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페퍼상사부터 화이트 앨범 사이에 장발과 수염으로 인상이 크게 변한 나머지 멤버들과 달리 수염으로 인한 외모의 변화가 적은 편이다. Let It BeMcCartney 작업 당시에는 턱수염을 수북하게 길렀지만 그마저도 특유의 쳐진 눈[19] 때문에 인상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40대가 넘어서도 상당한 동안이었는데 노년에 들어선 현재까지도 젊은 시절의 외모 특징은 그대로 남아있다. 다만 80대에 진입한 나이로 인하여 백발에 얼굴에 잔주름도 많이 생겨서 동안 이미지는 많이 희미해졌다.[20]

6. 종교

비틀즈 멤버 중 누구도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가 반종교주의자들처럼 보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거의 종교관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불가지론자들입니다.
1965년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 中
공공연히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밝혔던 존 레논만큼은 아니어도 무신론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비틀즈로 활동했던 시절 스스로 무신론자라기보다는 불가지론에 가깝다고 밝힌 만큼, 무신론적 불가지론자로 분류된다.

어렸을때에는 가톨릭인 어머니와 개신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믿었지만, 성인이 되면서 종교를 믿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2012년 인디펜던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인물이며, 스스로 선(善)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그 이상의 종교적 신념은 없다고 밝히면서 다시 한번 무신론자임을 드러냈다.

다만 그와 레논이 작곡한 비틀즈 곡들중엔 가끔씩 기독교적 성향이 짙은 가사들이 은근 포함되어 있다.

7. 사망 음모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폴 매카트니 사망설 문서
번 문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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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8. 성격

오만한 성격 탓에 논란이 끊이지 않던 존 레논과 다르게 구설수가 거의 없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믹 재거키스 리처즈가 난봉꾼으로 유명하고, 데이비드 보위는 정치적으로 파시즘 옹호 논란이 있었으며 에릭 클랩튼처럼 여성 편력 문제가 심했던 것[21]을 보면 자기 처신을 상당히 잘한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밴드를 했던 존 레논이나 조지 해리슨[22], 심지어는 그 사람 좋은 링고 스타[23]도 논란이 조금 있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여러모로 대단한 일.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더라도 폴 매카트니에 대한 비난은 거의 없는 편이다. 같이 일하는 한국인 전속 사진사 김명중(MJKim)이 열정이 떨어져 사진을 대충 찍는 것을 폴이 알아차렸음에도 다시 잘해보자며 한 번 더 기회를 줬다는 미담이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탄 적도 있다. 존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이 부모의 이혼으로 방황하던 시절 줄리안을 위로해주기 위해 대신 아버지 노릇을 해주고, 그만을 위한 곡인 Hey Jude를 써준 것은 비틀즈 팬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다소 우울하게 진행된 The Beatles 세션 때에도 폴 매카트니와 조지 마틴 둘이 있을 때만큼은 스튜디오 내부가 화기애애했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다. 또 비 지스배리 깁이 평생을 같이 한 형제들이 모두 사망한 이후 실의에 빠졌을때 많은 도움을 줘 일상을 되찾게 도와줬다는 미담도 있다.

후대 밴드에게도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주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에드 시런이 무명일 시절 "나와 같은 길을 걷는다."며 그의 커리어를 응원해준 적이 있다. 2020년에는 방탄소년단을 비틀즈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외에도 라디오헤드, 레드 제플린 등 후대 뮤지션들을 좋아하는 밴드로 꼽으면서 장르나 시대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후대 뮤지션들에게 격려를 해준다고 한다. 보통 선대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인기를 빼앗은 후대 뮤지션들을 싫어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경우도 많은 것을 보면 이 역시 보통 일이 아닌 셈.[24] 오히려 까마득한 후배인 카니예 웨스트리아나, 테일러 스위프트 등과도 친밀하게 지낸다. 앞의 두 사람과는 'FourFiveSeconds'라는 곡을 통해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비틀즈 팬들 중에서는 음악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존 레논을 좋아하더라도 성격과 인간성 때문에 폴 매카트니를 더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도 꽤나 있다.

그러나 비틀즈 시절 주변인들은 냉정하고 까칠한 성격은 존이나 조지보다는 오히려 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는 폴이 가진 완벽주의자 기질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는 사적으로는 부드럽고 친밀한 성격으로 위에서도 언급했듯 많은 미담을 가지고 있지만 본업인 음악에 있어서는 매우 까탈스러워 존이나 조지는 저리가라 할 수준의 독설은 물론이요, 수십 테이크가 넘도록 한 곡을 반복해서 녹음하며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주변인들을 육체적, 정신적 양면으로 혹사시키는 등 각종 괴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대마초를 무진장 피워대서 일본 입국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25] 하지만 이 역시 2012년에 손자 손녀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끊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술한 제인 애셔와 교제하던 시절 보여준 꼴마초 태도와 이때문에 벌어진 구설수들도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그나마 대놓고 아내 신시아 레논에게 가정폭력을 일삼았던 존 레논과는 달리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고, 이후 린다 매카트니와 결혼하여 가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줬기에 언급되는 일은 적은 편.

9. 콜라보레이션


마이클 잭슨의 앨범 Thriller에 수록된 'The Girl Is Mine'

폴 매카트니는 윙스 해산 후 1980년대에 완전히 솔로로 전향하면서 여러 뮤지션과 교류하여 다양한 콜라보 작업을 남겼다. 1982년 스티비 원더와 함께 Ebony and Ivory를 부르고 당시 최고의 스타 마이클 잭슨과 'The Girl Is Mine', 'Say Say Say'를 발표한 것은 매우 유명하다.[26] Flowers in the Dirt 앨범에서는 엘비스 코스텔로와 협연하였고, 'No More Lonely Nights'나 'We Got Married'에서는 핑크 플로이드의 기타리스트 데이비드 길모어와 함께하기도 하였다. 스티비 원더는 이후 폴 매카트니의 2012년작 앨범 Kisses on the Bottom의 '"Only Our Hearts'란 곡에 하모니카 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는 가장 좋아하는 현대 밴드로 라디오헤드더 킬러스를 꼽았다. # 폴은 개인적으로 라디오헤드에게 콜라보를 제안하고 싶지만 라디오헤드가 너무 바빠 거절할까봐 제안을 못 하겠다고 했었다.#


2014년에 데스티니의 곡들을 공동작곡하였다. 특히 Hope for the Future라는 제목의 싱글도 발매했다. 게임팬들의 반응은 노래는 좋은데 황금기를 누리던 인류가 미지의 적에 의해 몰락해버린 배경인 게임하고 맞지 않는 가사가 문제라고 한다.


리한나의 싱글 'FourFiveSeconds'에도 기타 반주 피처링으로 참여하였다.


카니예 웨스트와의 콜라보 'Only One'이 공개되었다. 오토튠이 인상적이다.

2024년, 데스티니 가디언즈/최후의 형체 OST 제작에 폴 매카트니가 참여했다는 소식이 번지 소속 음악가로부터 전해졌다.

10. 내한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20 폴 매카트니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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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11. 기타



[1] 폴이 밝힌 바로는 'Let It Be(노래)'에 등장하는 'mother mary'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어머니를 뜻한거였다고.[2] 마이클이 어린시절 뒤뜰에서 기타를 치던 폴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폴 매카트니의 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 앨범의 표지가 되기도 하였다.[3] 11살에 아역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대표작으로는 알피, 딥 엔드가 있다.[4] 심지어 비틀즈의 무명시절에는 제인 애셔가 오히려 비틀즈보다 인기가 높았다. 폴과 제인이 첫 만남을 가진 계기도 1963년 4월 18일, 방영된 영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리포터로 출연한 17살의 제인이 비틀즈와 인터뷰를 한 것이었다.[5] 핑크 플로이드The Wall 커버 작업으로 유명하다.[6] 다만 이는 어쩔 수 없었던 게, 린다는 본래 사진작가였고, 세계 최고의 싱어송라이터가 옆에 있으니...[7] 아버지의 앨범인 Driving Rain에 공동작곡한 곡이 있다. 문서 참고.[8] 지뢰사고를 당해서 지뢰 해체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는 루머가 있지만 틀린 사실로 경찰 오토바이와 부딪혀서 왼쪽 발목 아래가 날아갔다. 현재 의족 착용 중. 하지만 지뢰를 반대하는 것은 사실이다.[9] 어차피 본인도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라 굳이 돈 보고 남자와 결혼할 이유가 없다.[10] 실제로 존 레논이 폴 매카트니를 본 첫인상이 '기타도 똑바로 못 드는 놈이 무슨 연주를 한다고'였다고 한다.[11] 사실 록 음악가중에서는 의외로 채식주의자가 상당히 많다. 대표적으로 전설적인 메탈 밴드인 블랙 사바스오지 오스본기저 버틀러가 있는데, 아무래도 폴 매카트니가 열성적으로 동물 애호 운동을 벌이고 가장 유명한 록 뮤지션이기도 한만큼 채식주의의 대표적인 인사로 여겨지게 된듯하다.[12] 비단 해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농가의 소고기집 가보면 소 울음소리를 들으며 소고기를 먹거나, 닭요리집 가면 창밖에 닭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13] 심슨 가족이 가족물, 일상물이고, 리사 심슨은 심슨 가족의 주역인 걸 생각해본다면 엄청나게 까다로운 조건이다. 심슨 가족이 현재 30년 넘게 방영중인데 가족이 식사하는 장면이 나올 때 마다 리사 심슨을 고려하고 제작해야하기 때문이다.[14] 여담으로 심슨 가족의 해당 에피소드에서 폴 매카트니는 채식주의를 타인에게 강요하다가 갈등을 일으키고 방황하던 리사에게 본인의 채식주의를 남에게 강요까지 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역할로 나온다.[15] 하지만 후에 폴은 한 인터뷰에서 중국 공연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16] 둘의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던 시기에 주고 받았던 디스곡에서 아예 폴의 외모는 예쁜 얼굴이라고 못을 박았다. 물론 존의 성격 상 폴의 외모를 비꼬는 것 일 수도 있고 이 구절을 폴 특유의 '듣기 좋은 멜로디'에 대한 은유라는 해석도 있다만, 이외에도 존이 폴의 외모에 대해 언급한 일화가 꽤 많다. 대표적으로 비틀즈 영화 촬영 중 해당 영화의 출연한 한 배우에 따르면, 하루는 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자신들이 탄 차량이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자 존 레논이 '폴이 제일 이쁘니까 팬들한테 밀어(버리고 우린 가자).' 라고 말했다고 한다.[17] 비틀즈 멤버들 모두 외모가 출중한 인물들이지만 각자의 이미지는 달랐고 이러한 요소 또한 비틀즈의 인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에 나온 어록을 빌리자면, "은 놀랄 만큼 당돌했고, 폴은 놀랄 만큼 귀여웠고, 링고는 개구쟁이에 매력적이었고, 조지는 우리 누나가 사랑하는 남자였다."[18] 존 레논 179cm, 조지 해리슨 178cm, 링고 스타 170cm.[19] 실베스터 스탤론이 본인의 인스타에 닮았다고 밝히고 있다[20] 링고 스타는 80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나이대로 보이지 않는 엄청난 동안인 것을 보면 대조되기도 한다. 허나 어디까지나 폴 매카트니가 늙어보인다기 보다는 링고 스타가 신기한 케이스다.[21] 에릭 클랩튼은 여성 편력 및 마약 중독 문제 외에도 1970년대 백인우월주의 성향이 강해 극우 정치인 에녹 파웰을 지지하고 콘서트에서 유색인종을 내쫓자는 발언을 하였으며, 2020년 들어서는 록다운을 파시즘이라고 비난하며 방역 정책에 반대하는 곡을 쓰면서 꽤나 논란거리가 많은 편이다.[22] 삼중 불륜 문제야 너무나 유명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존 못지 않게 독설가 기질이 있었기에 논란이 될 발언을 꽤 했다. 가장 쓸모없는 상을 1965년에 받은 왕실 훈장이라고 대답한다거나, 후배 밴드인 오아시스의 보컬 리암 갤러거에게 모자라고 쓸모없다며 독설을 퍼부었다가 리암 갤러거에게 젖꼭지같은 인간이라며 욕을 먹기도 했다. 오아시스가 비틀즈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생각해보면 리암이 어지간히 빡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나마 후자는 리암에게 사과하긴 했다. 그밖에도 Anthology 3에 수록 예정이었던 존의 유작 'Now And Then'에 대해서도 폴에게 작업 도중에 "쓰레기(rubbish)."라며 녹음을 관두자고 얘기하는 등 생각보다 독설이 차고 넘친다.[23] 팬 레터에 답장해주기 귀찮다면서 팬 레터는 오는 족족 쓰레기통에 버릴거라고 막말을 해 좀 욕을 먹은 적이 있다.[24] 엘비스 프레슬리는 비틀즈를 비롯한 후대 뮤지션들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해서 언급을 꺼렸다. 로버트 플랜트와의 만남을 단 10분만 잡아두고 별 얘기할 생각도 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플랜트의 사교력에 홀려 무려 2시간이나 수다를 떨었다고.[25] 이때 하술할 인종차별 논란이 있어 욕을 좀 먹기도 한다. 폴 본인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하긴 했지만.[26] 아이러니하게도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 판권을 사게 되고, 이로 인해 폴 매카트니와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다.[27] 물론 현재 기준으로도 크지만, 1942년생에 180cm면 요즘으로 치면 191cm 정도로 엄청 큰 키이다.[28] 폴은 베이스 연주에 있어서 피크 피킹을 핑거 피킹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한 연주자다.[29] 화이트 앨범 녹음 당시에 일어난 일로 이 시기는 비틀즈 멤버들이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과 오노 요코의 출현, 음악적 견해 차이 등으로 불화가 극에 달한 시기로 링고가 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탈퇴했다. 그래서 'Back in the U.S.S.R.' 과 'Dear Prudence' 는 링고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폴이 직접 드럼을 담당했다.[30] 아일랜드 출신인 로리 갤러거나, 밴 모리슨도 미들네임을 이름으로 사용한다.[31] 이는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가 모두 해당하는 얘기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난한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전문적인 음악 교육은커녕, 존 레논을 빼면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기 때문. 심지어 링고 스타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선원 일을 해서 최종 학력이 초졸일 정도다.[32] 다만 지금도 악보 보는 게 익숙하지는 않아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대신 사용한다고 밝힌 적 있다.[33] 또 다른 대표적인 경우가 프레디 머큐리. 악보를 볼 줄 몰라서 특수한 기호로 써 놓으면 나머지 멤버들이 그걸로 악보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 에디 밴 헤일런, 지미 헨드릭스, 피트 타운젠드, 에릭 클랩튼도 악보를 볼 줄 몰랐던 것으로 유명하다.[34] 영국에서 만 11세 아동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중등학교 입학시험. 여담으로 록 밴드 더 후의 보컬리스트 로저 달트리 또한 이 시험에서 1등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35] 곡들 사이 텀이 5분을 넘어가지 않는다.[36] 베이시스트 에이브러햄 라보리엘의 아들이다.[37] 폴이 김 작가를 부르는 애칭은 M.J.[38] 다만 방탄소년단에 대한 평가는 조금 유보적인 면이 있다. 방탄소년단을 가리켜 자신들의 행보와 비교하여 그들이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해 지켜보는 것이 좋다라는 내용인데, 과거 비틀즈의 행보를 보면 이 말의 뜻은 인기를 얻을만큼 얻었으니 이제 음악적으로 성과를 보이라는 이야기에 가깝다. 즉, 음악적 선배로서 부드러운 지적에 가까운 뉘앙스이다.[39] 과장이 아니라 페퍼 상사 당시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의 참여 비중을 보면 The Wall 시절의 핑크 플로이드가 자연스럽게 연상될 정도다.[40] 물론 여기에는 점차 밴드 활동에 싫증을 느낀 존과 조지의 행동도 한 몫 했다. 폴의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밴드의 와해를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더 강하게 권한을 행사했던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멤버들의 사이를 더 갈라놓는 꼴이 되고 말았다.[41]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게 해당 곡의 첫 유명한 피아노 음이 되었다는 것. 다만 최근 폴이 위 설명과 다소 상반된 증언을 했는데, 곡을 녹음할 때 지각한 존을 빼고 나머지 멤버가 스튜디오에 모여서 곡의 도입부 코드 진행에 대해 논의 하고 있을 때 존이 '다들 뭐하고 있어?' 하며 들어왔고, 폴이 '오블라디..' 라고 하자 존은 '아 그거' 라고 하더니 피아노에 앉아서 도입부를 연주하자 멤버들은 '바로 그거야' 라며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아마 위 설명은 존이 싫어했다던 Ob-La-Di, Ob-La-Da의 초기 버전 녹음 당시의 에피소드인 듯 하다.[42] 'Molly stays at home and does her pretty face'라고 불러야 할 것을 'Desmond stays at home and does his pretty face'라고 불렀다.[43] 비브라토 음이 이상하다며 "그만, 그만! 물개가 꼬리에 살이 쪘다고 징징거리는 소리 같잖아!"라며 소리를 질렀다고.[44] 비틀즈 초기 시절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젊은 시절의 존 레논은 상당히 탄탄한 체격이었다.[45] 물론 존 레논은 비폭력주의자로 유명하지만 비폭력주의자가 되기 전에는 폭력적인 성향이 다분했다고 한다. 물론 비폭력으로 전향하고 나서 폭력적이던 과거를 크게 반성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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