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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와 관련된 여담을 정리한 문서.2. 가족
아버지 제임스 매카트니는 트럼펫과 피아노를 연주하였는데, 이는 어린시절 폴 매카트니에게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어머니 메리 매카트니[1]는 간호사였는데, 폴 매카트니가 15살이 되던 해에 유방암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이는 역시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읜 존 레논과 유대를 쌓게 되는 계기가 된다.형제 관계로는 동생 마이클 매카트니가 있다.[2]
영국의 하이틴 스타 제인 애셔와 함께 |
비틀즈 시절 폴은 영국의 하이틴 스타이자 여배우[3]인 제인 애셔와 동거 관계였다. 화이트 앨범 이전에 쓴 폴의 러브송은 본래 제인 애셔를 위해 쓴 곡들이었다.
1964년 둘은 제인 애셔의 집에서 동거생활을 시작했으나 이들의 사랑은 순탄하지 않았다. 1965년, 한창 비틀즈가 전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음에도 불구하고, 10대 시절부터 영국에서 인기가 높은 배우였던 제인이[4] 비틀즈와 폴의 인기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자신의 일에만 충실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폴이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피기도 했다.
참고로 제인은 폴이 다른 여자들과 바람을 핀다는 사실을 듣자 폴이 둘 사이의 관계를 오픈 릴레이션십으로 여긴다고 받아들여서 자신도 같은 연극에 출연 중이던 동료 남배우와 맞바람을 폈다고 한다.
그래도 1966년 비틀즈가 투어를 중단하자 폴과 제인은 시골에 별장을 구입해서 재결합하고, 1967년 크리스마스에는 결혼을 발표했다. 그러나 돈은 자신이 벌테니 결혼 후에는 배우일을 은퇴하고 가정에 충실해달라는 폴의 부탁을 자신의 일에 무척 자부심이 컸고, 폴의 상태도 대마초와 LSD에 중독되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한 제인이 거절하면서 둘의 관계는 최종적으로 끝이 났다.
이후 폴은 제인이 여행을 다녀온 틈을 타서 그녀와 같이 살고 있던 집에 다른 여자들을 데려오기 시작했고, 결국 폴 매카트니가 시나리오 작가인 프랜시스 슈와츠와 한 침대에 누워있는 장면을 제인이 목격한 것을 계기로 1968년 7월 20일에 제인 애셔가 공식적으로 폴과의 약혼을 파기한다.
제인 애셔는 훗날의 인터뷰에서 "나는 늘 존과 폴 두 사람의 정신적인 교감을 질투했었다. 게다가 당시 비틀즈의 멤버들이 LSD 트립 체험 등 최신 트랜드를 접할때 나는 늘 배제되어 있었다."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이에 폴 매카트니는 "제인 애셔는 늘 그녀의 일과 인기에만 신경썼을 뿐 자신이나 비틀즈에 큰 관심을 두고있지 않았다."라며 응수했다.
폴과 헤어진 후 제인 애셔는 1971년부터 영국의 만화가 겸 디자이너인 제럴드 스카프[5]와 사귀기 시작했고 연인이 된 지 10년만인 1981년에 그와 결혼했으며 2023년 현재까지 몇 십년간 이혼하지 않고 잉꼬부부로 잘 지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제인 애셔에게 폴 매카트니에 대한 질문을 묻는건 실례라고 한다. 실제 2004년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폴 매카트니에 대한 질문을 하자 제인 애셔는 "나에게는 이미 몇 십년을 해로한 남편이 있는데, 뭔 소리냐. 지금 날 모욕하는 거냐."라는 반응을 보였다.
파일:external/wp.clicrbs.com.br/paul-mccartney-wedding-linda-eastman-pic-mirrorpix-840037306.jpg
폴 매카트니는 1969년 3월 12일 사진작가 린다 이스트먼과 결혼한다. 린다는 유명 록밴드와 동행하며 그들의 모습을 담는 사진작가였는데, 런던에서 활동하던 록밴드들의 사진을 찍기 위해 1967년 영국에 왔고, 비틀즈와 알게되었다.
폴의 회고에 따르면 서로 첫눈에 반했다고 한다. 당시 린다는 6살된 딸을 한명을 둔 이혼녀였는데, 폴은 딸 '헤더 루이즈'를 정식으로 입양하였다. 헤더는 지질학자인 친아버지 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폴 역시도 자신의 아버지로 생각한다고 밝혔으며 도공으로 활동하고 있다.
린다는 폴의 뮤즈로써, 폴은 린다와 윙스활동까지 같이하며 어디든지 함께 하였다. 폴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뮤지션'으로써 린다의 평가는 매우 좋지 않았다.[6] 그러나 애초에 밴드에 그녀를 부른 이유는 그녀가 좋은 뮤지션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함께 하고 싶었던 이유였기 때문에 당사자들은 신경쓰지 않았던 듯 하다.
그러나 린다는 유방암으로 인해 투병생활을 지속하던 중 1998년 4월 17일 5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평생을 함께한 배우자의 사망으로 폴은 큰 슬픔에 빠졌으며, 후에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 조건으로 암 치료제 연구소를 설립하기도 하였다. 2014년 11월 6일부터 2015년 4월 26일까지 서울 대림 미술관에서 린다 매카트니의 사진전이 열렸다.
린다와의 사이에서는 2녀 1남을 두었다. 장녀 메리는 사진작가이자 사형제의 어머니로 살고 있으며, 차녀 스텔라 매카트니는 성공한 의류 디자이너다. 막내아들 제임스는 뮤지션으로 활동하고 있지만, 워낙 성공한 아버지를 둔 탓인지 크게 뜨지는 못하고 있다. 그럴만도 한게 아버지가 성공했다 정도가 아니라 세계 음악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전설의 그룹 비틀즈 출신이니... 본인도 유명세에 대한 욕심없이 현재에 만족하며 사는 듯.[7]
이후 2002년 헤더 밀즈[8]라는 환경운동가와 재혼하였다. 그 이듬해에 늦둥이 딸을 보게 되는 등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나 이와 같은 시간이 지속되지 못하고 2007년에 결국 이혼하게 된다. 둘 사이에서 난 딸의 양육권은 조건부로 헤더 밀즈가 가져가게 되었다. 이혼시 헤더 밀즈는 엄청난 위자료를 챙겨 결국 돈을 보고 결혼했던게 아니냐는 여론의 뭇매를 받기도 하였는데, 헤더 밀즈는 몇 해 뒤 이걸 다 탕진했다고.
그 후 다시는 결혼하지 않을 것 같던 폴 매카트니는 19세 연하의 낸시 쉬벨을 만나 2011년 세번째 결혼을 했다. 헤더 밀즈와 달리 낸시 쉬벨은 미국의 유명한 자산가의 상속녀로 재산과 관련한 의심에서 벗어난 상태.[9] 최근 폴 매카트니와 여러 매체에서 보여주는 훈훈한 모습으로 팬들에게도 호의적인 응원을 받고 있다.
3. 왼손잡이
대표적인 왼손잡이 연예인인데, 당시 왼손잡이는 장애인에 준하는 차별 대우를 받았었다.[10] 게다가 당시에는 왼손잡이용 기타는 거의 없다시피 했을 정도라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개조하여 사용했다고 한다. 베이스 기타 또한 좌우 대칭형이라 개조를 해도 불편하지 않고 아주 가벼워 기타처럼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서 현찰로 구입했다고 한다. 물론 오른손잡이용 기타를 그냥 왼손으로도 칠 수는 있다. Yesterday 잘 보면 오른손잡이용 에피폰 텍산 어쿠스틱 기타를 거꾸로 들어서 픽가드가 위로 올라간 것이 보인다. 나중에는 # 왼손잡이용 리켄배커 4001 베이스 기타를 구입해서 사용했으나 지금은 폴 매카트니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호프너 500/1 베이스 기타를 다시 사용하고 있다. 다만 완전한 왼손잡이는 아니고 식사를 할 땐 오른손으로 나이프를 쥐는 등 다른손잡이인듯하다.4. 채식주의
채식주의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하나로 꼽힐 정도로 열성 채식주의자다.[11] 그래서 폴 매카트니의 공연을 함께 다니는 스태프들도 공연 준비와 공연 기간 동안은 채식만 먹는다고 알려져 있다. 2013년부터는 비건으로 전환한 것으로 보였으나, 2018년의 인터뷰에서 치즈는 즐겨 먹는 편이고, 비건이 아닌 ‘락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원래 폴 매카트니는 여느 영국인과 같이 육식을 하던 사람이었다. 당대 사람들의 생각처럼 채식주의는 신체를 허약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 제인 애셔와 동거를 시작하면서 채식주의자인 제인 애셔에게 채식을 처음 접했고 1975년부터 아내 린다 매카트니와 함께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물론 식단을 갑자기 바꾸는 과정에서 꽤나 힘들었지만 끝내 성공했다고 한다.
1975년의 어느 날, 폴과 린다 매카트니 부부는 양고기를 파는 식당에 가게 되었는데 이때 두 사람은 사람들이 식당에서 열심히 양고기를 먹는 동안 밖에서 평화롭게 초원을 거니는 양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광경에 충격을 받아 본격적으로 채식주의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12] 후술할 심슨 가족의 리사 심슨이 채식주의자가 된 계기도 해당 일화를 차용해, 리사가 목장의 양들의 모습을 본 후 집에서 양고기를 먹으려다가 살아있는 양들과 양고기를 오버랩하고 충격을 받아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폴 매카트니가 심슨 가족에 본인 목소리로 출현한 데에도 이런 채식주의와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폴 매카트니는 출연 조건으로 "리사 심슨이 채식주의를 계속 유지할 것"을 조건[13]으로 내걸었고, 해당 에피소드 또한 리사 심슨이 채식주의자로서의 삶의 고충을 느끼는 내용으로 방영되었다. 이 설정은 절대 변하지 않아, 현재까지도 리사 심슨은 채식주의를 하고 있다.[14]
현재는 '도살장 문이 유리로 되어있다면 여러분은 고기를 먹지 않을 겁니다'라는 영상을 만들어 현대 축산업의 어두운 면을 고발한 바 있으며, 월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Meat Free Monday'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2006년에는 중국 모피 시장에서 개와 고양이가 잔인하게 도살되는 영상을 눈물을 흘리며 보고 중국 공연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을 선언했고[15], 2008년에는 달라이 라마에게 육식을 그만둘 것을 주장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린다 매카트니는 채식주의 식품 사업을 런칭했으며 그들의 딸이자 유명 디자이너인 스텔라 매카트니 또한 동물의 모피나 가죽으로 제품을 일절 만들지 않고 있다.
5. 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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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 활동 시절 |
A pretty face may last a year or two (네 예쁜 얼굴은 고작해야 1~2년짜리야)
존 레논의 폴 매카트니 디스곡 'How Do You Sleep?' 中[16]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선이 날렵한 곱상한 외모로 10대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17] 그리고 키도 비틀즈 4인방 중 제일 컸다.(180cm)[18]존 레논의 폴 매카트니 디스곡 'How Do You Sleep?' 中[16]
또한 링고만큼은 아니었지만 얼굴도 상당히 작았고 큰 키와 긴 다리 길이 덕분에 리즈 시절에는 모델 뺨치는 비율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페퍼상사부터 화이트 앨범 사이에 장발과 수염으로 인상이 크게 변한 나머지 멤버들과 달리 수염으로 인한 외모의 변화가 적은 편이다. Let It Be와 McCartney 작업 당시에는 턱수염을 수북하게 길렀지만 그마저도 특유의 쳐진 눈[19] 때문에 인상이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40대가 넘어서도 상당한 동안이었는데 노년에 들어선 현재까지도 젊은 시절의 외모 특징은 그대로 남아있다. 다만 80대에 진입한 나이로 인하여 백발에 얼굴에 잔주름도 많이 생겨서 동안 이미지는 많이 희미해졌다.[20]
6. 종교
비틀즈 멤버 중 누구도 종교를 믿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우리가 반종교주의자들처럼 보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거의 종교관이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불가지론자들입니다.
1965년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 中
공공연히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밝혔던 존 레논만큼은 아니어도 무신론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비틀즈로 활동했던 시절 스스로 무신론자라기보다는 불가지론에 가깝다고 밝힌 만큼, 무신론적 불가지론자로 분류된다.1965년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 中
어렸을때에는 가톨릭인 어머니와 개신교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믿었지만, 성인이 되면서 종교를 믿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2012년 인디펜던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자신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인물이며, 스스로 선(善)에 대한 믿음은 있지만 그 이상의 종교적 신념은 없다고 밝히면서 다시 한번 무신론자임을 드러냈다.
다만 그와 레논이 작곡한 비틀즈 곡들중엔 가끔씩 기독교적 성향이 짙은 가사들이 은근 포함되어 있다.
7. 사망 음모론
자세한 내용은 폴 매카트니 사망설 문서 참고하십시오.8. 성격
오만한 성격 탓에 논란이 끊이지 않던 존 레논과 다르게 구설수가 거의 없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가 난봉꾼으로 유명하고, 데이비드 보위는 정치적으로 파시즘 옹호 논란이 있었으며 에릭 클랩튼처럼 여성 편력 문제가 심했던 것[21]을 보면 자기 처신을 상당히 잘한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밴드를 했던 존 레논이나 조지 해리슨[22], 심지어는 그 사람 좋은 링고 스타[23]도 논란이 조금 있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여러모로 대단한 일.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더라도 폴 매카트니에 대한 비난은 거의 없는 편이다. 같이 일하는 한국인 전속 사진사 김명중(MJKim)이 열정이 떨어져 사진을 대충 찍는 것을 폴이 알아차렸음에도 다시 잘해보자며 한 번 더 기회를 줬다는 미담이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탄 적도 있다. 존 레논의 아들인 줄리안 레논이 부모의 이혼으로 방황하던 시절 줄리안을 위로해주기 위해 대신 아버지 노릇을 해주고, 그만을 위한 곡인 Hey Jude를 써준 것은 비틀즈 팬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다소 우울하게 진행된 The Beatles 세션 때에도 폴 매카트니와 조지 마틴 둘이 있을 때만큼은 스튜디오 내부가 화기애애했다는 증언도 있을 정도다. 또 비 지스의 배리 깁이 평생을 같이 한 형제들이 모두 사망한 이후 실의에 빠졌을때 많은 도움을 줘 일상을 되찾게 도와줬다는 미담도 있다.
후대 밴드에게도 칭찬과 격려를 많이 해주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에드 시런이 무명일 시절 "나와 같은 길을 걷는다."며 그의 커리어를 응원해준 적이 있다. 2020년에는 방탄소년단을 비틀즈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다며 응원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 외에도 라디오헤드, 레드 제플린 등 후대 뮤지션들을 좋아하는 밴드로 꼽으면서 장르나 시대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후대 뮤지션들에게 격려를 해준다고 한다. 보통 선대 뮤지션들이 자신들의 인기를 빼앗은 후대 뮤지션들을 싫어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경우도 많은 것을 보면 이 역시 보통 일이 아닌 셈.[24] 오히려 까마득한 후배인 카니예 웨스트나 리아나, 테일러 스위프트 등과도 친밀하게 지낸다. 앞의 두 사람과는 'FourFiveSeconds'라는 곡을 통해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러다보니 비틀즈 팬들 중에서는 음악적이거나 정치적인 이유로 존 레논을 좋아하더라도 성격과 인간성 때문에 폴 매카트니를 더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도 꽤나 있다.
그러나 비틀즈 시절 주변인들은 냉정하고 까칠한 성격은 존이나 조지보다는 오히려 폴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이는 폴이 가진 완벽주의자 기질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그는 사적으로는 부드럽고 친밀한 성격으로 위에서도 언급했듯 많은 미담을 가지고 있지만 본업인 음악에 있어서는 매우 까탈스러워 존이나 조지는 저리가라 할 수준의 독설은 물론이요, 수십 테이크가 넘도록 한 곡을 반복해서 녹음하며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올 때까지 주변인들을 육체적, 정신적 양면으로 혹사시키는 등 각종 괴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대마초를 무진장 피워대서 일본 입국 금지를 당하기도 했다.[25] 하지만 이 역시 2012년에 손자 손녀들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끊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술한 제인 애셔와 교제하던 시절 보여준 꼴마초 태도와 이때문에 벌어진 구설수들도 좋은 소리는 못 듣는다. 그나마 대놓고 아내 신시아 레논에게 가정폭력을 일삼았던 존 레논과는 달리 폭력을 행사하지는 않았고, 이후 린다 매카트니와 결혼하여 가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줬기에 언급되는 일은 적은 편.
9. 콜라보레이션
마이클 잭슨의 앨범 Thriller에 수록된 'The Girl Is Mine'
폴 매카트니는 윙스 해산 후 1980년대에 완전히 솔로로 전향하면서 여러 뮤지션과 교류하여 다양한 콜라보 작업을 남겼다. 1982년 스티비 원더와 함께 Ebony and Ivory를 부르고 당시 최고의 스타 마이클 잭슨과 'The Girl Is Mine', 'Say Say Say'를 발표한 것은 매우 유명하다.[26] Flowers in the Dirt 앨범에서는 엘비스 코스텔로와 협연하였고, 'No More Lonely Nights'나 'We Got Married'에서는 핑크 플로이드의 기타리스트 데이비드 길모어와 함께하기도 하였다. 스티비 원더는 이후 폴 매카트니의 2012년작 앨범 Kisses on the Bottom의 '"Only Our Hearts'란 곡에 하모니카 연주를 해주기도 했다.
폴 매카트니는 가장 좋아하는 현대 밴드로 라디오헤드와 더 킬러스를 꼽았다. # 폴은 개인적으로 라디오헤드에게 콜라보를 제안하고 싶지만 라디오헤드가 너무 바빠 거절할까봐 제안을 못 하겠다고 했었다.#
2014년에 데스티니의 곡들을 공동작곡하였다. 특히 Hope for the Future라는 제목의 싱글도 발매했다. 게임팬들의 반응은 노래는 좋은데 황금기를 누리던 인류가 미지의 적에 의해 몰락해버린 배경인 게임하고 맞지 않는 가사가 문제라고 한다.
리한나의 싱글 'FourFiveSeconds'에도 기타 반주 피처링으로 참여하였다.
카니예 웨스트와의 콜라보 'Only One'이 공개되었다. 오토튠이 인상적이다.
2024년, 데스티니 가디언즈/최후의 형체 OST 제작에 폴 매카트니가 참여했다는 소식이 번지 소속 음악가로부터 전해졌다.
10. 내한
자세한 내용은 현대카드 슈퍼콘서트 20 폴 매카트니 문서 참고하십시오.11. 기타
- 키는 180cm으로 비틀즈 내 최장신이었다.[27]
- 현재의 '리이슈 (Reissue)'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다. 자신의 앨범의 음질 상태가 마음에 안 들었던 폴이 그걸 직접 리마스터해서 재발매한 게 그 시초라 한다.
- 또 자신의 파트인 베이스를 비롯하여[28] 기타, 피아노 등 많은 악기들을 잘 다룬다. 그의 첫 솔로 앨범 'McCartney' 는 전곡이 폴의 독주로 채워져있으며 해체 이후에도 그런 시도를 종종 보여줬다. 심지어 조지 마틴은 롤 주법 테크닉에 한해 드럼 연주가 링고 스타를 능가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드럼은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며 롤 주법은 그 중에서도 극히 일부이다. Back in the U.S.S.R.에서 폴의 드럼 트랙만 추출한 음원을 들은 팬들의 반응은 "그래도 드럼은 링고 스타다."로 요약된다.[29]
- 특이하게도 '폴'이 중간이름임에도 '제임스'가 아닌 '폴'로 불린다. 집안에서도 태어나서부터 폴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도 정확히 잘 모른다고 한다. 아버지 이름도 제임스였기 때문에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동생 피터 마이클도 중간이름 마이클로 부르는 걸 봤을 때 아일랜드계의 특징이 아닌가라고 폴 매카트니 본인이 추측하였다.[30]
- 젊은 시절의 폴 매카트니는 악보를 볼 줄 몰랐다고 한다[31]. 나이 들어서 교향시를 쓰고 클래식 음악가로 활동하면서 악보를 배웠다고 한다.[32] 그래서 젊은 시절 폴 매카트니가 메모지나 종이에 쓴 노래 원고들을 보면 가사를 쭉 적고 위에 코드를 표기하거나 가사 따로, 코드 따로 적어놓았다. 현재도 클래식 곡이 아닌 일반 팝곡을 쓸 때는 악보에는 잘 쓰지 않는다. 사실 프로 연주자들은 물론이고 유명한 싱어송라이터들도 악보를 볼 줄 모르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33] 특히 무단표절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악보를 자기만 알아보게 쓰기도 한다.예시
- 젊은 시절 엄청난 골초였다. 사실 비틀즈 멤버들 다 그랬으나 담배 뿐만 아니라 연기를 흡입하는 형태의 마약을 좋아했는지 비틀즈 멤버들 중에 가장 대마초를 많이 했다고 한다. 대마초는 비틀즈 해체 이후에도 했는지, 윙스 시절 일본 공연을 하기 위해 공항에서 수속을 받다가 아이들 옷가방 아래에서 대량의 대마초가 발견되어 일본에서 쫓겨난 적도 있었다. 이때 린다와 폴이 빡쳐서 칭키 아이즈를 시전했지만, 이 둘은 그저 추방당한 것에 순수히 빡쳤던 것이고 인종차별을 하려던 의도는 없었기 때문에, 나중에 이에 대해서 반성했다. 다만 비틀즈의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LSD는 별로 안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도 현재는 손자, 손녀, 그리고 늦둥이 막내딸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모조리 끊었다고 한다. 그러나 금연이 쉽지는 않았던 것인지 2022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그 영향 때문인지 나이가 든 현재는 목소리가 매우 중후해졌다.
- 어렸을 때 공부를 상당히 잘 했다고 한다. 90명의 수험생 중 3명만이 통과한 일레븐 플러스 시험[34]을 통과해 당시 리버풀에서 명문 그래머 스쿨로 통하던 리버풀 인스티튜트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입학 후에도 상위권 성적을 유지한 것은 물론 교우관계도 좋아서 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또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러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탈 정도로 글쓰기에도 재능이 있었다.
- 한국에는 '음악을 차별하는 것은 인종차별과 다름이 없다'고 말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김태원이 라디오 스타에 출연해서 음악 장르에 편견을 가져선 안 된다는 얘기를 하면서 폴 매카트니가 그런 말을 했다고 즉흥적으로 지어서 내뱉은 말이 마치 진짜인 것처럼 퍼져버린 것.
- 2012년 런던 올림픽을 이틀 앞두고 데이비드 베컴이 대표팀에 뽑히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를 토했다. 여담이지만, 리버풀 출신으로서 에버튼 FC의 팬이다. 최근 에버튼 FC가 재정위기로 고생하고 있어서 에버튼 FC의 팬들은 그가 구단을 인수해주길 바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고 말했다.
- 세계에서 가장 라이브 공연이 경험이 많은 음악가로, 공연 한 번 할 때마다 엄청나게 많은 곡들을 부른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20곡 내외를 부르는 데 반해 폴 매카트니는 공연 한 번에 앵콜 두 번을 포함해 쉬지 않고[35] 35곡 정도를 부른다. 거기다가 내한 때는 곡들 사이 텀에 악기를 교체할 때, 기타 끝 쪽을 잡고 한 손으로 올리는 묘기를 하는 등 건장함을 자랑한다.
- 인터뷰를 할 때 'you know'를 자주 쓰는 말버릇이 있다.#
- 줄리안 레논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다. 존 레논이 오노 요코와 재혼을 하며 아내인 신시아와 이혼하며, 신시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줄리안을 홀대했기 때문. 이에 폴은 줄리안과 휴가를 보내거나 악기를 가르쳐주는 등 아버지 존 레논의 빈자리를 채워주었다. 앞서 언급했듯 줄리안을 위해 Hey Jude를 작곡하기도 했다.
- 시트콤 프렌즈 시즌4 마지막 편의 결혼식 장면에서 로스 겔러의 시아버지 역할로 특별출연 제의를 받았었으나 바빠서 성사되지 못했다고 한다. 후에 폴은 시트콤 30 Rock에 특별출연하게 된다.
-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에 잭 스패로우의 삼촌 역할로 카메오 출연했다. 비틀즈 때도 커버한 적 있는 리버풀 민요 'Maggie Mae'를 부르면서 등장한다.
- 2012 런던 올림픽에 개막식에서 피아노를 치며 경기장의 모든 참가국 선수들 관중, tv를 통해 시청하고 있는 전세계 사람들과 함께 비틀즈의 명곡 Hey Jude를 열창하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 2016년 2월 15일 래퍼 타이가가 개최한 그래미 어워드 뒷풀이 파티장에 참석하려다가 경비원이 그를 알아보지 못해서 쫓겨나는 엄청난 굴욕을 당했다. 주최측에서 '우리는 더 유명한 사람을 원한다'면서 쫓았다고. 이에 폴 매카트니는 '어떻게 하면 VIP가 될 수 있느냐, 히트곡을 더 내야겠다'는 말을 남겼다. 영상 황당해하는 Beck과 푸파이터스의 표정이 백미. 폴 입장에서는 정말 어이가 없는 경험이었을 듯하다. 타이가 본인도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하고 '내가 그를 막을 이유가 어디 있나. 그가 온 줄을 몰랐었다.'라고 트위터로 해명했다. 사실 폴 매카트니도 약간의 실수를 하기는 했다. 본래 다른 행사에 참석하려다가 장소를 착각해서 그래미 어워드 뒷풀이 장소에 오게 된 것.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담당자의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당신이 폴 매카트니라 해도 초대장이 없으면 들어 오실 수 없습니다.'라며 원칙대로 대응했다면 모를까, 저건 분명한 모욕이기 때문.
- 현재 함께하고 있는 밴드 멤버들이 있다. 2000년대부터의 공연 영상에 꼭 얼굴을 비추는 멤버들로 오른쪽부터 기타를 맡고 있는 러스티 앤더슨(Rusty Anderson, 흑발)과 브라이언 레이(Brian Ray, 금발), 드럼을 담당하는 에이브 라보리엘 주니어(Abe Laboriel Jr., 스킨 헤드+수염)[36], 키보드를 담당하는 폴 '윅스' 위친스(Paul 'Wix' Wichens, 가장 왼쪽의 반 대머리). 곡마다 어우러지는 화음들이 도드라지는 폴 매카트니 작곡의 노래 특성상 각각의 멤버들이 백보컬을 담당하고 있다. Brian Ray는 폴이 피아노를 연주할땐 베이스를, 폴이 베이스를 잡으면 일렉기타를 연주한다. Hey Jude 인트로때는 템버린을 치기도 한다. 여담이지만 드러머 Abe는 위 사진도 그렇고 영상을 보면 엄청난 고도비만이다. 뒷목의 살이 접힌 게 보일 정도. 때문에 드럼을 치는 게 매우 힘겨워 보이기도 한다.
- 80대 초반이지만 여전히 공연을 뛸 정도로 노익장이다. 2018년 즈음까지는 70대 중후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활발함과 외모를 보여주고 있다. 2018년 새 앨범 발매로 카풀 카라오케 등 tv쇼에 자주 나왔는데, 이 즈음 76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활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20년 들어 2년만에 머리도 많이 하얗게 세고 상당히 나이가 든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그 나이에도 다이빙을 하는 등 건강에는 문제가 없는 듯하다.
- 상당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과 다를 바 없이 특유의 재치와 장난기는 여전하다. 또한 meme이나 기타 챌린지에도 종종 참여하는 등 20대 청년들의 SNS 문화를 상당히 잘 이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존 레논과 다르게 정치 성향을 스스로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다. 이 때문에 존 레논은 매카트니와 사이가 안좋았던 시절 매카트니를 '보수주의자'로 부르며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피의 일요일 사건을 두고 <Give Ireland Back to the Irish>#를 발표했다는 것을 보면 보수라고 볼만한 행보를 보인 것은 아니며, 오히려 정치적으로는 진보 성향에 가깝다고 분류된다.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조지 W. 부시를 비판하고 버락 오바마를 지지했다. 더군다나 신보 앨범에서 '정신나간 대장'(Mad Captain) 도널드 트럼프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관련 인터뷰에서 폴은 트럼프를 '미국의 추악한 면을 그대로 보여줬다' '트럼프는 때때로 사람들 사이에서 숨어있는 증오심을 부추겼다'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 전속 사진작가가 한국인이다. 2008년부터 전속 사진가로 일한 김명중 작가[37]로, 본래 스파이스 걸스의 투어 포토그래피였다가 폴 매카트니를 소개받아 리버풀 사이드 콘서트에서 첫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처음에는 한 두번의 촬영이 전부일 줄 알았는데 한 두 번이 수십 회로, 수십 회가 수백 회로 결국 2021년 아직까지 12년 동안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고.
- AC/DC도 아주 좋아하는듯하다.
- 사적으로는 친절하고 사교적이지만 음악에 관련해서는 결코 양보를 못하는 완벽주의적인 성격이라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는 '녹음실의 독재자'라는 별명도 얻었다.[39] 비틀즈 초창기 때부터 폴 매카트니는 리더였는데, 이게 후반기로 갈수록 점점 강해져 독재 수준[40]이 되면서 나중에는 조지 마틴조차 폴에게 대들 수 없는 환경이 되었다고 한다. Penny Lane의 녹음 과정에서 조지 마틴의 관악기 연주가 마음에 안들었던 폴이 자꾸 리테이크를 요청하자, 조지 마틴이 지쳐 이만하면 되지 않았냐고 했더니 폴이 소리를 지르면서 다시 연주하라고 했다고 한 일화가 있다. 또 The Beatles 세션 때에는 Ob-La-Di, Ob-La-Da를 다른 멤버들이 전부 싫어하는 곡이었음에도 독재적으로 밀어붙여 수십 테이프를 바꿔가며 연주하게 했고, 보다 못해 빡친 존 레논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 몇 시간 뒤에 마리화나를 잔뜩 피운 채 들어와 아무렇게나 피아노를 두들기며 "이게 니 잘난 곡의 첫 멜로디다"라고 했다고 하며[41], 녹음이 거의 다 끝나가던 차에 폴 매카트니가 가사 실수를 하여[42] 녹음을 다시 하자고 하자 지칠대로 지친 멤버들이 폴을 뜯어 말려 결국 가사를 틀리게 부른 버전 그대로 앨범에 수록되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비틀즈 후반기에는 멤버들의 악기 연주에도 훈수를 많이 둬서 이에 불만을 가진 링고 스타와 조지 해리슨이 불만을 갖고 밴드를 일시 탈퇴하는 일들도 벌어진다. Yesterday 녹음 때에도 현악 연주자들의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자 온갖 독설을 퍼붓고[43], 녹음실에서뿐만 아니라 영화 Help! 촬영장에서도 편곡 작업을 하겠답시고 시도때도 없이 피아노에 앉아 Yesterday를 연주해대자 보다 못한 리차드 레스터 감독이 "그 X같은 노래 한 번만 더 연주하면 피아노를 치워버리겠다"고 엄포한 것 등도 꽤 유명한 일화.
- 존 레논과 안면을 트기 전에도 리버풀의 이층 버스에서 존 레논을 자주 보곤 했다고 한다. 폴은 그때마다 존의 큰 덩치가 두려워서 가까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44] 폴 매카트니가 말하길 "근처에서 유명한 양아치에 나이도 나보다 많아서 수틀리면 날 때릴 것 같아서 멀리했다"라고.[45]
- 함부르크 시절, 돈이 부족해서 존 레논과 함께 범죄를 저지르곤 했다고 한다. 보통 폴이 지나가던 행인을 꼬드겨서 뒷골목으로 데리고 오면, 존 레논이 냅다 행인을 패서 돈을 빼앗는 식이었다고.
- 1967년 3월 21일, 애비 로드 스튜디오의 2번 녹음실에서 Lovely Rita를 녹음하던 도중 한 무명 사이키델릭 록밴드가 자신들을 보러왔다고 하자, 기분이 별로 안좋았음에도 그들의 사이키델릭한 시도가 독특하고 창의적이라면서 격려를 많이 해줬다고 한다.
-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 작가로도 활동한다. 위에서 설명했듯 2005년 아동 소설인 하이 인 더 클라우드(High in the Clouds)#를 지었으며 애니메이션 제작이 결정되었다. 다만 국내에 번역되지는 않은 상태. 이후 2018년 그림책인 헤이 그랜쥬드!(Hey Grandude!)를 캐나다의 일러스트레이터 캐서린 더스트와 함께 제작했으며 국내에도 번역되었다. 그랜쥬드(Grandude)는 할아버지를 친근하게 부르는 단어로 그의 대표곡 헤이 쥬드(Hey Jude)와 발음이 비슷하기도 하다. 내용은 흐린 날씨 때문에 지루해하는 손주들과 함께 그랜쥬드가 마법의 나침반을 이용해 사진엽서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는 내용. 인터뷰에 따르면 폴 매카트니의 손자가 자신을 그랜쥬드라고 부른 것에서 유래했다.# 후속작 그랜쥬드와 초록 잠수함(Grandude's Green Submarine)도 나왔다. 역시 노란 잠수함(Yellow Submarine)이 떠오르는 제목. 사라진 그랜쥬드의 아내인 낸쥬드를 찾아나서는 내용이다. 또 거대한 문어의 등장은 링고 스타의 노래 문어의 정원(Octopus's Garden)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 폴 매카트니를 상징하는 베이스 기타로는 단연 호프너의 500/1 바이올린 베이스가 꼽히는데, 비틀즈 시절 폴은 총 두 대의 500/1을 소유하고 있었으나 이후 그 중 한 대를 도난당했다. 도난당한 500/1은 1961년형으로, 1961년 독일 함부르크의 나이트클럽에서 연주할 당시 30파운드(약 5만 3천원)를 주고 구입하여 Love Me Do, She Loves You 등 비틀즈 초기의 명곡을 녹음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러나 1972년 10월 런던 레드브로크 그로브에서 승합차의 뒷자리에 놓아뒀다가 도난당했고##, 도난 이후 50여년 가까이 행방이 묘연했으나 폴 측에서 이 잃어버린 베이스를 찾는다는 캠페인까지 벌인 끝에 2024년, 마침내 주인의 품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현재 이 베이스의 가치는 한화 약 10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 소유하고 있는 일렉 기타 중에서 Epiphone Casino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그때 당시 지미 헨드릭스에 빠져있었는데 보디가 비어 있어서 피드백하기 쉽다는 직원 추천으로 구입했다고 한다. 1964년에 비틀즈 멤버들 중에서는 1962년식 카지노를 가장 처음으로 구매하여 사용했으며 이걸로 Ticket to Ride, Drive My Car, Taxman의 기타 솔로를 녹음하였다. 비틀즈 탈퇴 후 윙스 시절을 거쳐 현재까지도 라이브 공연에서 이 1962년식 카지노를 사용하는 중이다.
- 영화평론가 로저 이버트와 생년월일이 똑같다.
- 그의 유튜브 채널의 설명창에 그의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또한 전화번호의 왼쪽에는 Text me (문자 보내!)라고 써져있다.
[1] 폴이 밝힌 바로는 'Let It Be(노래)'에 등장하는 'mother mary'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어머니를 뜻한거였다고.[2] 마이클이 어린시절 뒤뜰에서 기타를 치던 폴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폴 매카트니의 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 앨범의 표지가 되기도 하였다.[3] 11살에 아역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했으며 대표작으로는 알피, 딥 엔드가 있다.[4] 심지어 비틀즈의 무명시절에는 제인 애셔가 오히려 비틀즈보다 인기가 높았다. 폴과 제인이 첫 만남을 가진 계기도 1963년 4월 18일, 방영된 영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리포터로 출연한 17살의 제인이 비틀즈와 인터뷰를 한 것이었다.[5] 핑크 플로이드의 The Wall 커버 작업으로 유명하다.[6] 다만 이는 어쩔 수 없었던 게, 린다는 본래 사진작가였고, 세계 최고의 싱어송라이터가 옆에 있으니...[7] 아버지의 앨범인 Driving Rain에 공동작곡한 곡이 있다. 문서 참고.[8] 지뢰사고를 당해서 지뢰 해체 운동에 앞장서기도 했다는 루머가 있지만 틀린 사실로 경찰 오토바이와 부딪혀서 왼쪽 발목 아래가 날아갔다. 현재 의족 착용 중. 하지만 지뢰를 반대하는 것은 사실이다.[9] 어차피 본인도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 있는지라 굳이 돈 보고 남자와 결혼할 이유가 없다.[10] 실제로 존 레논이 폴 매카트니를 본 첫인상이 '기타도 똑바로 못 드는 놈이 무슨 연주를 한다고'였다고 한다.[11] 사실 록 음악가중에서는 의외로 채식주의자가 상당히 많다. 대표적으로 전설적인 메탈 밴드인 블랙 사바스의 오지 오스본과 기저 버틀러가 있는데, 아무래도 폴 매카트니가 열성적으로 동물 애호 운동을 벌이고 가장 유명한 록 뮤지션이기도 한만큼 채식주의의 대표적인 인사로 여겨지게 된듯하다.[12] 비단 해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농가의 소고기집 가보면 소 울음소리를 들으며 소고기를 먹거나, 닭요리집 가면 창밖에 닭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13] 심슨 가족이 가족물, 일상물이고, 리사 심슨은 심슨 가족의 주역인 걸 생각해본다면 엄청나게 까다로운 조건이다. 심슨 가족이 현재 30년 넘게 방영중인데 가족이 식사하는 장면이 나올 때 마다 리사 심슨을 고려하고 제작해야하기 때문이다.[14] 여담으로 심슨 가족의 해당 에피소드에서 폴 매카트니는 채식주의를 타인에게 강요하다가 갈등을 일으키고 방황하던 리사에게 본인의 채식주의를 남에게 강요까지 하는 것은 잘못됐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역할로 나온다.[15] 하지만 후에 폴은 한 인터뷰에서 중국 공연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16] 둘의 사이가 굉장히 안 좋았던 시기에 주고 받았던 디스곡에서 아예 폴의 외모는 예쁜 얼굴이라고 못을 박았다. 물론 존의 성격 상 폴의 외모를 비꼬는 것 일 수도 있고 이 구절을 폴 특유의 '듣기 좋은 멜로디'에 대한 은유라는 해석도 있다만, 이외에도 존이 폴의 외모에 대해 언급한 일화가 꽤 많다. 대표적으로 비틀즈 영화 촬영 중 해당 영화의 출연한 한 배우에 따르면, 하루는 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자신들이 탄 차량이 앞으로 나아가질 못하자 존 레논이 '폴이 제일 이쁘니까 팬들한테 밀어(버리고 우린 가자).' 라고 말했다고 한다.[17] 비틀즈 멤버들 모두 외모가 출중한 인물들이지만 각자의 이미지는 달랐고 이러한 요소 또한 비틀즈의 인기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영화 에잇 데이즈 어 위크에 나온 어록을 빌리자면, "존은 놀랄 만큼 당돌했고, 폴은 놀랄 만큼 귀여웠고, 링고는 개구쟁이에 매력적이었고, 조지는 우리 누나가 사랑하는 남자였다."[18] 존 레논 179cm, 조지 해리슨 178cm, 링고 스타 170cm.[19] 실베스터 스탤론이 본인의 인스타에 닮았다고 밝히고 있다[20] 링고 스타는 80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나이대로 보이지 않는 엄청난 동안인 것을 보면 대조되기도 한다. 허나 어디까지나 폴 매카트니가 늙어보인다기 보다는 링고 스타가 신기한 케이스다.[21] 에릭 클랩튼은 여성 편력 및 마약 중독 문제 외에도 1970년대 백인우월주의 성향이 강해 극우 정치인 에녹 파웰을 지지하고 콘서트에서 유색인종을 내쫓자는 발언을 하였으며, 2020년 들어서는 록다운을 파시즘이라고 비난하며 방역 정책에 반대하는 곡을 쓰면서 꽤나 논란거리가 많은 편이다.[22] 삼중 불륜 문제야 너무나 유명하니 그렇다 치더라도, 존 못지 않게 독설가 기질이 있었기에 논란이 될 발언을 꽤 했다. 가장 쓸모없는 상을 1965년에 받은 왕실 훈장이라고 대답한다거나, 후배 밴드인 오아시스의 보컬 리암 갤러거에게 모자라고 쓸모없다며 독설을 퍼부었다가 리암 갤러거에게 젖꼭지같은 인간이라며 욕을 먹기도 했다. 오아시스가 비틀즈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생각해보면 리암이 어지간히 빡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나마 후자는 리암에게 사과하긴 했다. 그밖에도 Anthology 3에 수록 예정이었던 존의 유작 'Now And Then'에 대해서도 폴에게 작업 도중에 "쓰레기(rubbish)."라며 녹음을 관두자고 얘기하는 등 생각보다 독설이 차고 넘친다.[23] 팬 레터에 답장해주기 귀찮다면서 팬 레터는 오는 족족 쓰레기통에 버릴거라고 막말을 해 좀 욕을 먹은 적이 있다.[24] 엘비스 프레슬리는 비틀즈를 비롯한 후대 뮤지션들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해서 언급을 꺼렸다. 로버트 플랜트와의 만남을 단 10분만 잡아두고 별 얘기할 생각도 안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러나 플랜트의 사교력에 홀려 무려 2시간이나 수다를 떨었다고.[25] 이때 하술할 인종차별 논란이 있어 욕을 좀 먹기도 한다. 폴 본인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해명하긴 했지만.[26] 아이러니하게도 마이클 잭슨은 비틀즈 판권을 사게 되고, 이로 인해 폴 매카트니와 사이가 나빠지기도 했다.[27] 물론 현재 기준으로도 크지만, 1942년생에 180cm면 요즘으로 치면 191cm 정도로 엄청 큰 키이다.[28] 폴은 베이스 연주에 있어서 피크 피킹을 핑거 피킹과 동등한 위치에 오르게 한 연주자다.[29] 화이트 앨범 녹음 당시에 일어난 일로 이 시기는 비틀즈 멤버들이 브라이언 엡스타인의 죽음과 오노 요코의 출현, 음악적 견해 차이 등으로 불화가 극에 달한 시기로 링고가 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탈퇴했다. 그래서 'Back in the U.S.S.R.' 과 'Dear Prudence' 는 링고의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폴이 직접 드럼을 담당했다.[30] 아일랜드 출신인 로리 갤러거나, 밴 모리슨도 미들네임을 이름으로 사용한다.[31] 이는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가 모두 해당하는 얘기다. 왜냐하면 이들은 가난한 노동자 계급 가정에서 태어나 전문적인 음악 교육은커녕, 존 레논을 빼면 대학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기 때문. 심지어 링고 스타는 중학교를 중퇴하고 선원 일을 해서 최종 학력이 초졸일 정도다.[32] 다만 지금도 악보 보는 게 익숙하지는 않아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대신 사용한다고 밝힌 적 있다.[33] 또 다른 대표적인 경우가 퀸의 프레디 머큐리. 악보를 볼 줄 몰라서 특수한 기호로 써 놓으면 나머지 멤버들이 그걸로 악보를 만들었다고 한다. 또 에디 밴 헤일런, 지미 헨드릭스, 피트 타운젠드, 에릭 클랩튼도 악보를 볼 줄 몰랐던 것으로 유명하다.[34] 영국에서 만 11세 아동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중등학교 입학시험. 여담으로 록 밴드 더 후의 보컬리스트 로저 달트리 또한 이 시험에서 1등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35] 곡들 사이 텀이 5분을 넘어가지 않는다.[36] 베이시스트 에이브러햄 라보리엘의 아들이다.[37] 폴이 김 작가를 부르는 애칭은 M.J.[38] 다만 방탄소년단에 대한 평가는 조금 유보적인 면이 있다. 방탄소년단을 가리켜 자신들의 행보와 비교하여 그들이 어떻게 나아갈지에 대해 지켜보는 것이 좋다라는 내용인데, 과거 비틀즈의 행보를 보면 이 말의 뜻은 인기를 얻을만큼 얻었으니 이제 음악적으로 성과를 보이라는 이야기에 가깝다. 즉, 음악적 선배로서 부드러운 지적에 가까운 뉘앙스이다.[39] 과장이 아니라 페퍼 상사 당시 존 레논과 조지 해리슨의 참여 비중을 보면 The Wall 시절의 핑크 플로이드가 자연스럽게 연상될 정도다.[40] 물론 여기에는 점차 밴드 활동에 싫증을 느낀 존과 조지의 행동도 한 몫 했다. 폴의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밴드의 와해를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더 강하게 권한을 행사했던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멤버들의 사이를 더 갈라놓는 꼴이 되고 말았다.[41]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이게 해당 곡의 첫 유명한 피아노 음이 되었다는 것. 다만 최근 폴이 위 설명과 다소 상반된 증언을 했는데, 곡을 녹음할 때 지각한 존을 빼고 나머지 멤버가 스튜디오에 모여서 곡의 도입부 코드 진행에 대해 논의 하고 있을 때 존이 '다들 뭐하고 있어?' 하며 들어왔고, 폴이 '오블라디..' 라고 하자 존은 '아 그거' 라고 하더니 피아노에 앉아서 도입부를 연주하자 멤버들은 '바로 그거야' 라며 좋아했다고 회상했다. 아마 위 설명은 존이 싫어했다던 Ob-La-Di, Ob-La-Da의 초기 버전 녹음 당시의 에피소드인 듯 하다.[42] 'Molly stays at home and does her pretty face'라고 불러야 할 것을 'Desmond stays at home and does his pretty face'라고 불렀다.[43] 비브라토 음이 이상하다며 "그만, 그만! 물개가 꼬리에 살이 쪘다고 징징거리는 소리 같잖아!"라며 소리를 질렀다고.[44] 비틀즈 초기 시절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젊은 시절의 존 레논은 상당히 탄탄한 체격이었다.[45] 물론 존 레논은 비폭력주의자로 유명하지만 비폭력주의자가 되기 전에는 폭력적인 성향이 다분했다고 한다. 물론 비폭력으로 전향하고 나서 폭력적이던 과거를 크게 반성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