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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타이론 우즈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2. 미국에서의 무명 생활
1988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에 지명된 후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다가 1995년 볼티모어 오리올스 산하 마이너로 이적했다.1996년 보스턴 레드삭스로 다시 이적한 후 레드삭스 산하 더블A팀 트랜턴 선더에서 99경기 25홈런 OPS .982를 기록했고, 1997년에는 트리블A팀 포터킷 레드삭스에서 29경기 9홈런 OPS 1.064를 기록한다. 그러나 메이저에 나이 많은 지명타자를 위한 자리는 없었고 시즌 후반기는 멕시칸리그의 페트롤레로스 데 미나티틀란으로 이적했으나, 공식경기 출전은 없었다.
마이너리그 시절에도 장타력만큼은 인정을 받았으나, 문제는 수비와 주루 때문에 1루 외에는 볼 수 있는 포지션이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당시 보스턴의 1루에는 1995년 아메리칸리그 MVP 모 본이 있었고, 지명타자 자리에는 레지 제퍼슨이 1996년에 타율 .347를 때리는 등 쏠쏠한 활약을 하고 있었던 터라 우즈는 콜업을 받지 못한다. 3루수나 외야수도 볼 수 있었지만 그 수준은 매우 막장스러웠다.[1] 게다가 1루 수비마저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비슷한 케이스로는 한 때 보스턴에서 지명 받은 유망주 제프 배그웰이 우즈처럼 비슷한 포지션 중첩으로 피해를 본 사례다.
여담으로 미국시절 등록명은 타이 우즈ty woods. 이름 타이론tyrone의 약칭임과 동시에 타이 콥같은 강타자가 되라는 뜻으로 붙인 등록명이다.
선수 생활을 같이 했던 안경현 해설위원은 타격은 메이저리그급이지만 수비 때문에 일본이나 한국으로 오는 외국인 선수들이 꽤 있는데 타이론 우즈도 그런 유형의 선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프로야구에서 그의 최전성기가 시작된다.
3. 한국프로야구 시절
KBO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 (2000) |
제가 (1998) 시즌 후에 목표를 잡았는데 팀 1위가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홈런왕도 아니었습니다. 타점왕도 아니었습니다. 무조건 타이론 우즈를 이겨야 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승엽출처
이승엽출처
김인식 감독과 우즈 |
첫 외국인 선수 중 한명이 된 우즈[2] |
결국 20대 후반까지도 메이저에서 부름이 없자 야구를 그만 두고 소방관이 될 생각을 했으나 1998년 당시 처음으로 한국프로야구에서 외국인 선수 공개 트라이아웃을 실시하면서 한국 무대를 노크.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를 통해 OB 베어스에 입단했다. 여기서의 에피소드가 걸작인데, 우즈와 베어스 관계자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관계자는 우즈의 전화를 빌려 에이전트와 협상을 시작했다. 그런데 협상이 길어지자 옆에 있던 우즈가 전화요금 많이 나온다며 베어스가 제시한 조건을 맞춰주자고 했다고. 그렇게 우즈는 베어스의 일원이 되었다.
1998년 시즌 42호 홈런으로 장종훈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하는 모습.[3] |
1998년 정규리그 MVP에 선정된 우즈 |
1999년 당시 이승엽과 함께 홈런왕 경쟁을 펼치던 시절. |
MVP 선정 과정은 예상보다 치열했는데, 기자들이 18승으로 다승왕을 따낸 LG 김용수[5]를 밀어주면서 2차 투표까지 간 접전 끝에 MVP 수상에 성공한다.
1998년 MVP 수상이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60-80만 달러를 거절하고 OB와 협상테이블에 앉는다. 타이론 우즈 측은 30만 달러를 요구하였으나 OB는 IMF 시절인만큼 그룹사정 상 20만 달러 밖에 줄 수 없다고 고수해, 양측이 평행선을 걷는다. 이후 우즈 측이 25만 달러까지 요구 금액을 깎지만 OB가 22만 달러를 제시하며 결국 22만 달러에 협상을 마친다.
2001년 한국시리즈 MVP에 선정된 우즈 |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우동수(우즈-김동주-심정수) 트리오를 이루어 두산 베어스의 강타선은 물론 리그 최고의 클린업트리오를 구축했으며[6] 심정수가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된 2001년에는 심재학의 가세로 우동학(우즈-김동주-심재학)트리오를 형성, 그 해 한국시리즈에서 압도적인 화력으로 삼성 라이온즈를 무너뜨리고 두산의 세 번째 우승에 공헌하면서 한국시리즈 MVP로 선정되었다. 1998년의 페넌트레이스 MVP에 이어 2001년 올스타전 MVP[7]와 한국시리즈 MVP까지 차지하면서 KBO 리그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선수로는 유일하게 MVP 트리플크라운[8]을 기록한 선수다.
2001년 한국시리즈 최종전에서 때려낸 홈런은 김동주 이후 두 번째로 기록된 잠실구장 장외 홈런.
1998~2001년까지 42-34-39-34홈런을 기록하면서 꾸준한 활약을 했으나 2002년에는 25홈런 타율 .256으로 부진에 빠졌다. 당시 외국인 선수에 대한 텃세, 두산 프런트의 섭섭한 대우에 불만이 쌓여서 태업을 한 것 아니냐는 추측을 받는다. 당시 한국야구의 스트라이크존이 좌우로 지나치게 넓은 것(일명 태평양존)[9] 에도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2000년대 초까지의 한국프로야구 영상을 보면 2010년대보다 좌우로 공 두 개 정도는 넓게 존을 잡아주는 것을 알 수 있다.[10] 심판들이 우즈에게는 유독 스트라이크존이 더 넓었다는 주장도 있는데, 우즈존이라는 말이 이를 뒷받침한다.
결국 5년간의 두산 생활을 접고 2003년 일본 프로야구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한다. 당시, 요코하마 구단주는 우즈를 싼 맛에 데려가 모험을 즐기려고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즈가 떠난 이후 두산은 2014년 호르헤 칸투[11]가 성공하기 전까지 외국인 타자 잔혹사가 이어진다. 마이크 쿨바-이지 알칸트라-맷 왓슨[12]의 실패로 한동안 두산은 외국인 타자 영입을 꺼렸으며, 칸투 이후 2016년에 영입한 닉 에반스도 초반 부진하며 잔혹사가 이어지는듯 했으나 2년 연속 20홈런을 기록하고 영양사라는 별명을 얻어내는 등 쏠쏠한 활약을 해 주었다.[13] 그러나 2018년에는 지미 파레디스[14], 스캇 반 슬라이크가 연이어 실패하는 대굴욕을 맛봤으며, 이 문제는 압도적인 전력으로 정규리그 1위를 차지했음에도 지명타자 및 대체주자로 기용할 만한 선수가 부족하다는 문제점을 시즌 내내 꾸준히 제기해왔고, 결국 또 다른 문제점과 함께 한국시리즈에서 제대로 폭발하며 SK와이번스에게 우승을 헌납하는 굴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15]
결국 2019년 호세 미겔 페르난데스를 영입하고 최다안타를 기록하며 두산이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를 모두 우승하면서 두산 베어스의 외국인 타자 잔혹사를 끊어낼 수 있었으며, 페르난데스가 2022년까지 4년간 활약하며 우즈에 이어 또 다른 외국인 타자 용병의 성공사례로 남았다.
다만 용병들의 성적을 살펴봐도, 단일이나 누적이나 우즈를 넘었던 선수는 베어스 역사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단일시즌 용병들의 커리어 하이 기록만 놓고 봤을 때
1998년 우즈:타출장 0.305/0.394/0.619 42홈런 103타점 OPS 1.013 wOBA 0.454 wRC+ 181.2 sWAR* 6.08
2000년 우즈:타출장 0.315/0.414/0.605 39홈런 111타점 OPS 1.020 wOBA 0.437 wRC+ 166.6 sWAR* 5.56 [16]
2001년 우즈 타출장 0.291/0.402/0.571 34홈런 113타점 OPS 0.973 wOBA 0.423 wRC+ 150.2 sWAR* 4.26 [17]
2014년 칸투:타출장 0.309/0.375/0.524 18홈런 72타점 OPS 0.899 wOBA 0.395 wRC+ 134.8 sWAR* 3.10
2016년 에반스:타출장 0.308/0.410/0.565 24홈런 81타점 OPS 0.975 wOBA 0.425 wRC+ 150.6 sWAR* 3.76
2019년 호미페:타출장 0.344/0.409/0.483 15홈런 88타점 OPS 0.892 wOBA 0.408 wRC+ 154.7 sWAR* 5.10
우즈 다음으로 성적이 좋았던 2019년의 호세 미겔 페르난데스를 가져와야 우즈 커리어의 평균 정도에 불과한 2001년에 근소우위를 점하는 정도이며, 에반스나 칸투의 커리어하이는 이에도 미치지 못한다. 또한 두산에서 5년을 뛰는동안 자그마치 22.07의 누적 sWAR*을 쌓아올렸는데, KBO에서 이정도의 누적수치를 쌓아올린 용병 타자를 다 합쳐도 7시즌을 뛰며 sWAR* 36.64를 쌓아올린 제이 데이비스, 고작 3시즌 뛰고 sWAR* 23.00을 기록한 에릭 테임즈 [18], 6시즌 뛰고 sWAR* 24.49를 기록한 틸슨 브리또[19], 4시즌 뛰고 sWAR* 21.44를 기록한 멜 로하스 주니어 정도가 끝이다. 우즈가 얼마나 KBO 역사에 남을 타자용병이었는지 알려주는 대목.
3.1. 1998년 골든 글러브 수상자 논란
골든글러브를 MVP인 우즈를 제치고 이승엽이 차지하면서 논란이 있었다. 수비부분 지표로 수상하는 골드글러브와 다르게 각 포지션 최고의 선수에게 시상하는 골드글러브에서 전체 최고 선수로 MVP가 된 우즈가 정작 골든글러브에서 수상에 실패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이는 KBO 역사상 수비율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82,83년을 제외하고는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우즈에 대한 차별여론이 일어났다.우즈가 이후 이승엽에 대해 눈에 띄게 라이벌의식을 드러낸 것도 이때 생긴 피해의식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물론 후술하겠지만 야구 관련 통계가 발달된 2020년대 기준으로 보면 1998년에는 이승엽이 가장 높은 sWAR을 기록했다. 다만 당시에는 투승타타와 단순한 홈런 수만으로 선수의 가치를 평가했던 때니 오히려 이승엽이 홈런 수가 적다는 이유로 평가절하 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20]
다만 스탯티즈에서 제공되는 1998년 선수들의 WAR을 보면 1998년 이승엽은 7.30, 타이론 우즈는 6.08, 김용수는 3.65로 꽤나 차이가 나며 유독 성적이 떨어지는 김용수를 제외하고 보면 우즈가 클래식지표에서 이승엽보다 앞선 건 사실상 홈런과 타점 밖에 없다.[21] 세이버메트릭스가 발달한 현재로서는 우즈가 골든 글러브를 타지 못한 건 논의해볼 여지는 있게 되었다.
다만 공격지표에 있어 1998년 우즈는 WRC+가 181.0으로 WRC+에서 176.4인 이승엽에 5 가까이 앞선다. 수비 신뢰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과거 세이버매트릭스 기록은 공격지표를 우선시해서 보는 것이 훨씬 정확하며 이에 따라 세이버 매트릭스 기록에 있어서 우위를 가리기에는 애매하다.
그리고 스탯티즈의 WAR이 현재 수비와 관련하여 엄청나게 심각한 비판을 받고 있는 점. 기록만 보는 것으로 명확하게 따질 수 없는 명백하게 있었던 용병 초기의 외국인 타자 견제와 스트라이크존 확대의 영향을 더욱 강하게 받았다는 것이고 이는 우즈에게 있어서 공정한 경쟁이었는가를 생각해보게 만든다는 점이다.
4. 일본프로야구 시절
4.1.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시절
4.2.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2007년에는 무라타 슈이치에게 1개 차로 뒤진 35개로 홈런 공동 2위였지만, 위압감은 대단해서 121개의 볼넷과 19개의 고의사구를 얻어낸다.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8년에도 홈런 35개를 쳤으나, OPS .904로 일본에서의 최저성적을 기록했고, 그해 말 연봉협상에 난항을 겪어서 재계약에 실패. 사실 연봉을 높게 부르고 깎지 않았던 우즈의 태도도 있었지만, 지명타자 제도가 없는 센트럴 리그에서 나이 많고 수비가 불안한[25] 우즈를 그렇게까지 비싼 돈에 가지고 있을 만한 이유가 없었던 주니치는 그냥 깔끔하게 우즈를 포기하게 된다. 거기에 대신해서 데려온 용병인 토니 블랑코가 생각보다 우즈의 공백을 잘 메꾸어주어서[26] 그냥 미련 없이 포기했다.
한국과 일본에서 모두 홈런왕에 오른 선수는 우즈가 유일하며 이는 이대호, 이승엽, 김태균 모두 달성하지 못했다.[27] 옆 리그의 호세 페르난데스나 우즈의 성공을 계기로 일본프로야구 팀들은 KBO의 특급 용병 스카우트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였고, 이후 세스 그레이싱어, 다니엘 리오스, 릭 밴덴헐크, 멜 로하스 주니어 등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에서도 엄청 잘 나갔는데, 차명석은 LG 코치 시절 오키나와에서 전지훈련 도중에 우즈를 만났는데 우즈가 아예 귀족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격은 아예 망나니가 되었다. 대표적 예시로 2005년 5월 5일 나고야 돔에서 열린 야쿠르트와의 경기 중 5회말 타석 때 후지이 슈고의 몸쪽 위협구에 분노, 그의 오른쪽 뺨을 구타하여 10경기 출장 정지와 벌금 50만 엔의 중징계를 받았을 정도다.
주니치 시절 우즈의 참교육 움짤. |
다만 이것에는 우즈도 할 말이 있는데, 후지이 슈고는 등판 중에 혀를 낼름하는 버릇이 있었다. 하필이면 우즈에게 몸쪽 공을 던지고 난 뒤 자신을 노려보는 우즈를 향해 버릇대로 혀를 내밀었고 이걸 자신을 조롱하는 걸로 받아들인 우즈가 참지 못하고 달려든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지만, 일본에서도 후지이 슈고는 멘탈이나 행동이 썩 좋지 않은 투수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우즈를 옹호하는 팬들도 꽤 있었다. 한국에서는 외국인 선수 치고는 무난한 인성으로 인기가 좋아서 이미지가 좋았지만, 일본에서는 상당히 공격적인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일본에서의 별명은 "우데스"였다.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에는 이승엽과 강한 충돌이 일어나기도 했다. 2007년 10월 20일 센트럴리그 클라이맥스 시리즈 2차전에서 주니치 투수였던 나카타 겐이치가 이승엽에게 의도적인 몸쪽 공을 던지면서 이승엽이 조심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는데, 1루 수비를 보던 우즈가 뜬금없이 이승엽에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이승엽이 맞서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많은 일본팬들은 우즈의 행동에 대해 이해가 안된다[28]고 말하였는데, 우즈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충분히 일어날만한 충돌이기도 했다.
우즈는 한국에서 뛰면서 많은 설움을 겪었다.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볼 패널티를 받기도 했고, 뛰어난 성적을 올렸음에도 개인수상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면서 매년 홈런왕 경쟁을 했기 때문에 우즈에게는 큰 자부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스포트라이트는 항상 이승엽에게 돌아갔다. 이승엽이 NPB에 진출하면서 동등한 외국인 조건이 되었지만 이승엽은 일본 최고 명문팀 요미우리의 4번타자였고, 우즈의 성적이 압도적으로 좋았는데도 여전히 일본에서 한국과 맞먹는 인기를 누렸다. 우즈는 결국 여러 사건들로 이승엽에게 피해의식이 생겼고, 두산에서 뛸 때도 종종 이승엽을 돌려까기도 하였다. 2006년 이승엽이 센트럴리그 최고 홈런타자라고 연일 매스컴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되자 "이승엽은 도쿄돔 빨이다" 라고 대놓고 디스하기도 했다. 우즈의 계속된 견제에 이승엽도 슬슬 심기가 불편해졌고, 어쩌면 두사람의 충돌은 결국 일어날 일이 일어났다 라고도 볼 수 있다.[29]
그래도 일본에서 뛸 당시 소속팀들의 팬들, 특히 주니치 팬들은 우즈를 상당히 좋게 평가하고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주니치의 역대 타자용병들 중에서도 최고의 성적을 찍어줬던 것도 있고 특히 숙명의 라이벌인 요미우리를 상대로 상당히 강해서 인상적인 활약을 많이 펼쳤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주니치 드래곤스의 53년만의 일본시리즈 우승이자 팀 역사상 2번째 일본시리즈 우승인 2007년 일본시리즈 제패에 공헌한 타자용병이니만큼 당연하다.[30] 이는 요미우리 팬들도 마찬가지여서, 지금도 일본 웹에서는 간간히 우즈가 너무 무서웠다고 추억하는 글들을 올리는 요미우리 팬들을 종종 볼 수 있다.[31]
은퇴 후 고향인 플로리다 주에서 부동산업과 목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두산에서 뛰던 시절 한국에서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벌어 은퇴 후 햄버거 가게를 차리고 싶다는 순박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결과적으로 일본까지 진출해서 수백억 원[32]에 달하는 연봉을 받을 만큼 성공해 햄버거 가게는 커녕 부동산 회사를 차릴 만큼 갑부가 되었다.
본인 입으로 말한 바 주니치와 재계약에 실패한 뒤 퍼시픽 리그 구단들에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영입 요청이 들어왔지만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성사는 안됐다. 현재는 두산 베어스 프런트가 시구나 행사 등에 초청하기 위해 찾아봤지만 행적을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2020년 12월 19일, 에펨코리아에서 유튜브 댓글을 통해 우즈와 연락이 닿은 한 유저가 나타났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 참고.
2021년 2월 4일, 베이스볼코리아에서 롯데의 레전드 용병이였던 펠릭스 호세의 말에 따르면 아직도 간간이 서로 연락하고 있다고 한다.
5. 수상 경력
5.1. K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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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론 우즈의 KBO 수상 경력 | |
1998 | KBO MVP / 홈런 1위 / 타점 1위 |
2000 |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 드림 올스타 /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우승 |
2001 | 한국시리즈 우승 / 한국시리즈 MVP / 타점 1위 / 동군 올스타 / 미스터 올스타 |
2002 | 동군 올스타 |
5.2. NPB
타이론 우즈의 NPB 수상 경력 | |
2003 | 센트럴리그 홈런 1위 / 센트럴리그 올스타 |
2004 | 센트럴리그 베스트나인 (1루수 부문) / 센트럴리그 홈런 1위 |
2006 | 센트럴리그 베스트나인 (1루수 부문) / 센트럴리그 홈런 1위 / 센트럴리그 타점 1위 |
2007 | 일본시리즈 우승 / 센트럴리그 베스트나인 (1루수 부문) / 센트럴리그 올스타 |
2008 | 센트럴리그 올스타 |
6. 연도별 성적
6.1. KBO
- 푸른 글씨는 KBO 최다,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타이론 우즈의 역대 KBO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WAR* |
1998 | OB | 126 | 521 | 138 | 14 | 1 | 42 (1위) | 77 | 103 (1위) | 1 | 65 | 115 | .305 | .393 | .619 (2위) | 1.013 (4위) | 181.0 (3위) | 7.50 (4위) |
1999 | 두산 | 124 | 544 | 135 | 20 | 0 | 34 | 90 | 101 | 5 | 83 (3위) | 126 | .297 | .406 | .566 | .972 | 148.4 | 5.63 |
2000 | 127 | 565 | 151 | 22 | 0 | 39 (2위) | 91 | 111 (2위) | 4 | 77 (5위) | 132 | .315 | .414 | .605 (3위) | 1.020 (3위) | 166.8 (2위) | 7.13 (1위) | |
2001 | 118 | 525 | 127 | 16 | 2 | 34 (3위) | 101 (2위) | 113 (1위) | 12 | 83 | 114 | .291 | .402 | .571 (4위) | .973 (4위) | 151.8 | 5.56 | |
2002 | 119 | 469 | 105 | 18 | 3 | 25 | 53 | 82 | 5 | 50 | 123 | .256 | .339 | .499 | .838 | 119.8 | 3.27 | |
KBO 통산 (5시즌) | 614 | 2624 | 655 | 90 | 6 | 174 | 412 | 510 | 27 | 358 | 610 | .294 | .393 | .574 | .967 | 154.4 | 29.09 |
6.2. NPB
타이론 우즈의 역대 NPB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WAR | |
2003 | 요코하마 | 136 | 551 | 131 | 17 | 0 | 40 (1위) | 73 | 87 (5위) | 2 | 66 (4위) | 132 | .273 | .361 | .559 (5위) | .921 (4위) | 131 | 3.1 | |
2004 | 130 | 551 | 142 | 15 | 0 | 45 (1위) | 84 | 103 (3위) | 2 | 74 (3위) | 142 | .298 | .394 (4위) | .613 (5위) | 1.007 (4위) | 145 (5위) | 3.9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석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득점 | 타점 | 도루 | 볼넷 | 삼진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wRC+ | WAR | |
2005 | 주니치 | 135 | 584 | 155 | 20 | 0 | 38 (3위) | 92 | 103 (4위) | 3 | 67 | 139 | .306 | .392 (4위) | .571 (5위) | .963 (3위) | 157 (3위) | 4.7 | |
2006 | 144 | 614 | 162 | 29 | 0 | 47 (1위) | 85 | 144 (1위) | 1 | 84 (1위) | 151 | .310 | .402 (2위) | .635 (2위) | 1.037 (2위) | 186 (2위) | 6.9 (2위) | ||
2007 | 139 | 593 | 126 | 16 | 0 | 35 (2위) | 85 (5위) | 102 (2위) | 3 | 121 (1위) | 153 | .270 | .418 (2위) | .530 (5위) | .948 (2위) | 155 (2위) | 4.6 | ||
2008 | 140 | 573 | 135 | 18 | 0 | 35 (4위) | 77 | 77 | 0 | 78 (1위) | 138 | .276 | .377 | .527 | .904 | 151 | 4.0 | ||
NPB 통산 (6시즌) | 824 | 3466 | 851 | 115 | 0 | 240 | 496 | 616 | 11 | 490 | 855 | .289 | .391 | .573 (5위) | .964 | 155 | 27.2 |
홈런왕 3회, 타점왕 1회, 베스트나인 3회 수상. 6년 중 4년을 홈구장으로 나고야 돔을 쓰면서도 연평균 홈런 40개를 쳐냈으며, 통산 OPS 0.964는 3000타석을 기준으로 일본프로야구 역대 6위다.
[1] 한국에서도 3루수나 외야수 알바를 가끔 뛴 적이 있었다.[2] 앞쪽부터 조 스트롱-마이크 부시-빅터 콜-마이클 앤더슨-윌리엄 저비-타이론 우즈.[3] 이 기록은 1년 후인 1999년 이승엽에 의해 경신된다.[4] 이때는 외국인 선수들에 대한 견제가 정말 심해서 스트라이크존을 공하나 정도 더 넓게 잡아주곤 했다.[5] 당시 김용수도 38세의 최고령 다승왕으로서 나름 인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다. LG가 이상훈의 일본 진출, 임선동의 태업으로 마운드가 크게 약화된 상황에서 LG 마운드를 홀로 지탱하다시피 했다. LG가 당해년도 한국시리즈 준우승팀이었다는 이점도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당시 MVP 투표는 KBO 포스트시즌 이전인 10월 초에 했으므로 해당사항 없는 얘기다.[6] 2000년 우동수 트리오는 무려 99홈런 308타점을 합작했다.[7] 2000년 9개로 올스타전 홈런레이스 최다 홈런기록을 가지고 있는 선수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2010년 홈런레이스에서 먼 훗날의 후배인 김현수가 10개를 기록하며 이 기록은 깨졌다.[8] 국내선수 중에는 이종범이 유일하게 보유하고 있는 기록이며, 우즈보다 2년 늦은 2003년에 올스타전 MVP를 수상하여 달성했다.[9] 80년대~ 90년대 말까지의 프로야구 기록 영상을 보면 상하폭은 좁고 좌우폭은 극도로 넓은 당시의 스트라이크존을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kbo 스트라이크존의 경향은 2000년대 이전까지 종적 변화보다는 횡적 변화가 큰 변화구(대표적으로는 슬라이더 )위주의 피칭을 하는 투수들에게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10] 당시 1999~2001시즌까지 타고투저가 지속되어 KBO에서는 2002시즌 스트라이크존을 넓히기로 결심했다. 그 결과 많은 타자들이 볼넷-삼진 비율에서 손해를 봤으며 타고투저 시즌에 비해 득점력도 현저히 줄어들게 된다.[11] 근데 이 호르헤 칸투 역시 후반기에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결국 두산을 떠났다.[12] 왓슨은 심지어 '왜왔슨'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받았다.[13] 닉 에반스는 대신 잔부상 등으로 지명타자만 주로 담당했었다.[14] 2018 시즌 최악의 WAR를 기록할 정도로 두산에게는 실패한 선택이었다.[15] 거짓말 하나 안보태고 최주환, 양의지, 정수빈, 김재환을 제외하면 한국 시리즈에서의 두산 타선은 식물 그 자체였으며, 김재환마저 부상으로 도중에 이탈하자 세명이서 멱살을 잡고 이끌어가려해도 박건우, 김재호, 오재원, 오재일 등이 중간에서 계속 끊어먹는 탓에 점수로 연결이 되지 않았다.[16] 우즈의 5년 중에서 두번째로 잘한 시즌의 기록[17] 우즈의 5년 중에서 세번째로 잘한 시즌의 기록[18] 이쪽은 메이저리그로 리턴해서도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며 메이저리그에서도 통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19] 다만 브리또는 포지션이 유격수라, 타격성적만 본 sWAR* 보다 실제 WAR은 더 높게 나올 것이다.[20] 한편으로는 이승엽도 1998시즌 직후 우즈가 꿈속에 나오는 악몽을 자주 꿨다고 회고할 정도로, 당시 홈런왕 경쟁에 밀렸던 아쉬움이 컸다. 이래저래 이승엽에게 당시 우즈는 최종 보스와도 같은 존재였던 셈이었다.[21] 이는 파크팩터를 고려하지 않은 주장인데 우즈의 홈구장은 잠실구장이어서 당시 파크팩터에서 900을 기록하며 압도적 최하위 구장이었고, 이승엽의 홈구장인 대구시민 구장은 1116으로 압도적 최상위 구장이었다.[22] 오히려 요코하마가 계약금 100만 달러, 연봉 275만 달러(약 3억엔), 3년 계약이라는 파격적인 대우로 들여온 좌타자 스티브 콕스는 스프링캠프부터 드러누워버린 데다가 15경기만에 또 부상을 당해 1년만에 방출되었다. 참고로 그 해 콕스의 먹튀짓을 만회한 우즈의 연봉은 5,000만엔에 불과했다.[23] 참고로 소토 역시 엄청난 가성비 용병이었다. 입단 당시 소토의 연봉은 우즈보다도 적었다.[24] 그것도 이승엽이 보는 눈앞에서 친 홈런이였다.[25] 오치아이 히로미츠 당시 감독은 수비력과 기동력을 중시하는, 투수 친화적인 나고야 돔에 특화된 지키는 야구를 중시했다.[26] 우즈의 22분의 1 가량 연봉(6억엔 vs 2,700만엔)으로 홈런-타점 2관왕 달성.[27] 다만 이대호는 일본 시절 타이틀을 따보지도 못한 이승엽, 김태균과는 달리 2012년 퍼시픽리그 타점왕에 오른 바 있다. 2015년에는 일본시리즈 MVP도 수상했다.[28] 링크된 영상 제목도 '이상한 난투'이다.[29] 결정적으로 이승엽의 연봉이 우즈보다 더 많은게 우즈의 심기를 거슬렸다. 우즈 본인의 성적이 분명히 꾸준히 훨씬 좋았는데 당시 요미우리의 절박한 상황과 이승엽의 한 해 반짝 대활약, 그리고 이승엽에 대한 MLB 측의 입질등 종합적인 이유로 요미우리에서 거액을 쏟아부어 이승엽과 4년계약을 한 상황, 요미우리는 한국과 중계권계약으로 연봉 일부를 보전할 수 있었기에 추정 연간 7억엔에 이르는 거액의 계약을 했던것이 우즈의 심기를 거슬렸다고 한다.[30] 다만 이해 일본시리즈 4병살타를 기록한 부끄러운 기록이 있다. 그것도 88년 일본시리즈때 똑같이 4병살타로 팀을 말아쳐먹었던 우노 마사루 타격코치 앞에서 말이다.[31] 2007년도에는 우즈의 시즌 홈런 35개중 12홈런을 요미우리전에서만 작렬시켰다. 요코하마 시절에도, 주니치 시절에도 요미우리전에 유독 강한 우즈였기에 요미우리 팬들에게도 그 공포는 충분히 각인되어왔다.[32] 연간 5억~6억 엔의 연봉을 주니치 시절에는 계속 받았다. 당시 환율은 15배에 이르던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