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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혼 후의 생활
1990~1991년. 신혼이던 만 23~25세 때의 모습. |
키코 비는 결혼 후 금방 임신하여 1991년 첫째 마코 공주를, 1994년 둘째 카코 공주를 낳았다. 작은며느리인데도, 딸만 연이어 둘을 낳아서 좀 좋지 않은 소리를 들었다.[1]
1991년 10월 23일, 장녀 마코 공주를 낳고서 궁내청 병원에서 퇴원하는 모습(만 25세). |
1994년 12월 29일, 차녀 카코 공주를 낳고서 궁내청 병원에서 퇴원하는 모습(만 28세). |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는 카코 공주를 낳은 후 계속 아이를 더 낳고 싶었다. 아키시노노미야 일가 역시 아들이 없어서 단절될 수 있기 때문. 하지만 아직 나루히토 황태자 내외가 아이를 못 낳아, 더 이상 가질 수 없었다.
마코 공주가 태어날 때 나루히토 황태자는 아직 미혼, 카코 공주가 태어날 때 황태자 부부는 결혼한 지 고작 1년이었다. 그 때문에 다카마도노미야 히사코 비는 "큰며느리가 아직 아기를 낳지 않았는데 작은며느리가 계속 임신을 하다니, 황실 내 서열을 생각하고 행동하길 바랍니다."라며 한 소리를 하기도 했다.[2] 그래서 카코 공주는 태어난 이후 눈치를 보고 자라서인지, 지금과 달리 어릴 때는 아주 조용한 성격이어서, 그 때문에 가쿠슈인 초등과 2학년 때부터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게 했다는 소문도 있다.
이런 일도 있었지만 시집오자마자 금방 자식을 둘이나 낳았고, 종종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 부부를 방문하여 어린 두 손녀의 재롱을 보여주면서, 천황 부부와 차남 부부는 친밀해졌다.
황실 학교[3]인 가쿠슈인을 졸업한 덕분에 시집오기 전부터 남편 후미히토 친왕 및 시누이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와 친밀했으며, 황실 일가와도 친하게 지냈다. 특히 사야코 공주와는 종종 만나서 함께 케이크, 쿠키, 돈부리를 만들기도 했는데, 이때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도 함께 어울리곤 했다. 결혼 후에도 키코 비는 상냥하고, 순종적이며, 애교 있게 굴어서 시부모의 환심을 샀다. 반면 손윗동서 마사코 황태자비는, 키코 비처럼 시부모에게 사근사근 애교 부리는 것을 잘 하지 못했다.
또한 키코 비는 결혼 후 고민이나 문제거리를 친정 부모와 의논한 게 아니라,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와 시아버지 아키히토 덴노와 의논했다. 이 역시 친정 부모와 가까이 살며 뭐든 친정 부모와 의논하던 마사코 황태자비와는 대조적이었다.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로서는 키코 비의 모습을 보고, 자신이 처음 시집왔을 때의 모습을 떠올리며 키코 비의 의견도 들어주며 잘 챙겨주었다
아키히토 덴노의 숙모 지치부노미야 세츠코 비는 일찍이 1953년 남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 사별했고, 자녀도 낳지 못했다. 외로운 세츠코 비는 조카의 아들인 후미히토 친왕을 손자처럼 귀여워했는데, 훗날 후미히토 친왕의 아내가 된 키코 비 또한 귀여워했다. 세츠코 비는 자신이 오랫동안 맡고 있었던 결핵예방협회 총재의 자리를 키코 비에게 물려주기도 했는데, 자신과 마찬가지로 귀국자녀[4]이며 친왕의 아내인 키코 비에게 많은 동질감과 친근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츠코 비가 1995년 사망하자, 지치부노미야 부부가 살던 저택은 아키시노노미야 일가가 물려받아 거주하게 되었다.
그러나 황실 생활과 시집살이의 고충이 아주 없을 수는 없는지, 차남 일가의 시종들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들이 간간이 흘러나온다. 키코 비가 대외적으로는 항상 미소를 지으며 상냥하게 말하지만, 집안에서 시종들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것. 참고로 키코 비의 미소는 일명 키코 짱(ちゃん) 스마일이라 불리며 유명한데[5], 사진들을 보면 젊은 시절 해맑고 순수하던 미소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억지스럽고 이상하게 변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2. 아들을 낳다
히사히토 친왕의 출산을 앞두고서 찍은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가족사진.[6] |
2006년 9월 6일, 히사히토 친왕을 낳고 아이쿠(愛育) 병원[7]에서 퇴원하는 모습. |
황태자 부부의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를 염두에 둔 여성 천황 논의가 한창일 때 키코 비의 셋째 임신이 발표되었고, 2006년 9월 6일 오전 8시 27분, 아이쿠 병원에서 히사히토 친왕을 낳았다. 1965년 후미히토 친왕이 태어난 이래로 41년 만의 황자 탄생이었다. 후계자의 탄생에 일본은 열광했고, 여성 천황에 대한 논의는 잠잠해졌다.
이 출산은 일본 황실 사상 최고령 출산으로 기록되었다. 키코 비가 1966년 9월 11일생이니, 만 40세를 불과 5일 앞두고 출산한 것. 또한 전치태반[8] 때문에 일본 황실 최초로 제왕절개를 하기도 했다. 그만큼 키코 비에게는 여러 모로 매우 힘든 출산이었다.[9] 그래서인지 일본 최고의 산부인과, 소아과, 마취과 의료진들이 동원되어 출산했다고 한다.
나이도 많고 몸도 아픈 마사코 황태자비에게서 더 이상 아들을 기대할 수 없자, 일본 황실에서는 키코 비에게 아들 출산을 종용했다. 차남 부부에게도 야심이 있었던 듯하고.[10]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남으로써 차남 일가는 엄청난 각광을 받기 시작했고, 황태자 부부와 아이코 공주는 소외되었다.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는 고대하던 손자가 태어나자마자 아이쿠 병원으로 달려왔고, 이후로도 하나뿐인 손자하고만 휴가를 함께 보내고 식사를 하는 등 유독 각별한 애정을 보여 왔다. 또한 차남 부부는 2013년에 들어서는 히사히토 친왕을 데리고 이세 신궁과 일본의 역대 천황들의 무덤을 참배하였고, 오키나와 현의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하여 전몰자 묘역을 참배하기도 했다.
2010년 4월, 히사히토 친왕은 가쿠슈인 유치원이 아닌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에 입학했다. 예상을 뒤엎은 진학에 대하여, 차남 부부는 "다양한 또래 친구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설명했다.[11] 키코 비가 오차노미즈여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던 인연도 있고. 3년 후인 2013년 4월에는 역시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초등학교로 진학했다. 가쿠슈인 유치원 외의 다른 유치원을 다닌 황실 자녀들은 몇 있었지만[12], 가쿠슈인 초등과가 아닌 다른 초등학교에 입학한 황실 자녀는 히사히토 친왕이 최초이다.
3. 조카 아이코 공주와의 경쟁
아이코 공주는 가쿠슈인 초등과 2학년 말기이던 2010년 3월[13]부터,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여 한동안 등교를 거부한 적이 있다. 남자아이들의 난폭한 행동이 두렵다면서 복통과 불안감 등을 호소하며, 아이코 공주는 조퇴와 결석을 반복했다. 이에 마사코 황태자비는 적응장애와 우울증으로 칩거하고 있던 와중에도, 딸과 등하교를 함께하고 수업을 참관하는 등 각별하게 신경을 썼다. 궁내청과 가쿠슈인은 애써 별일 아닌 것처럼 표현했지만, 황태자 부부와 아이코 공주는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하다.일각에서는 아이코 공주 이지메 사건의 배후에 숙모인 키코 비가 연루되어 있다는 카더라도 있다. 키코 비는 가쿠슈인대학 경제학부 교수를 지낸 가와시마 타츠히코(川嶋辰彦)의 딸이기 때문에, 오랜 기간 가쿠슈인대학 교직원용 아파트에서 살면서 교수들 및 교수들의 가족들과 친분이 깊다. 그런데 아이코 공주를 괴롭힌 남자아이들 중 하나는 가쿠슈인대학 교수 출신자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키코 비가 아버지를 통한 지연을 이용해 자기 아들 히사히토의 승계를 확고히 하고자, 조카 아이코 공주의 이지메를 사주했다는 소문이 있다. 아이코 공주가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히사히토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듯하다. 게다가 가해자들은 퇴학당하지 않고 대놓고 "아이코 공주를 이지메시켰다"고 자랑하고 다니니, 이러한 소문이 사실이 아니냐는 의견이 상당히 강했다. 하지만 "히사히토는 수십년만에 태어난 왕자라서 일본 국민들의 많은 관심과 당시 천황 내외의 관심을 받는 존재였기에, 굳이 아이코 공주에 대한 이지메 사주를 하지 않아도 된다"면서 이를 부정하는 의견도 있다.
2013년 알려진 것에 따르면, 2013년 가쿠슈인 초등과 6학년이 된 아이코 공주는 학교에 잘 적응하여 매우 우수한 성적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이는 여러가지 면에서 키코 비에게 심적인 부담을 안겨 줄 가능성이 높다. 일단 히사히토 친왕이 사촌누나 아이코 공주보다 성적이 뒤쳐지면, 황실 내외로부터 "차차기 황위 계승권자의 어머니가 되어 아들 교육을 어떻게 했느냐?!"라는 비난이 쏟아질 수 있다.
그래서인지 기사에 따르면, 키코 비가 히사히토의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황태자 부부가 아이코 공주를 장래 도쿄대학에 진학시키려 하는 듯하기 때문에,[15] 키코 비도 히사히토 친왕을 도쿄대학에 보내려 하리라는 것. 그를 위해 히사히토의 학업을 지도할 가정교사를 백방으로 물색하고 있지만, 키코 비의 히스테릭함과 악명 때문에 그 누구 하나 히사히토의 가정교사가 되겠다고 나서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히사히토의 큰누나 마코 공주와 작은누나 카코 공주가 제 아비를 닮아 공부를 지지리도 못했다는 점이다. 세 부녀(父女) 모두 대학 입학에 관해 잡음이 있을 정도이다. 후미히토 친왕은 1984년 4월 가쿠슈인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하였는데, 그의 성적이 커트라인이 되어 그해 가쿠슈인대학의 입학생이 많았다는, 도시전설 같은 소문이 있다.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16]가 입학한 국제기독교대학은 명문대학이며 공부를 매우 많이 시키는 대학이다.[17] 그런데 공부를 잘 하지 못했던 두 공주가 센터시험 성적이 아닌 AO 전형(자기추천전형)[18]으로 이런 명문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부정입학 논란이 있는 것이다.[19]
또한 키코 비의 학력도 훌륭하지만, 손윗동서 마사코 황태자비에 비해서는 학력과 경력에서 부족하다. 학력 높은 부모의 자녀가 부모를 따라 학력이 높아질 가능성이 더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으니, 키코 비의 바람대로 이루어질 가능성은 반반이다. 키코 비는 히사히토 친왕이 장래 도쿄대학에 진학하길 원하는데, 문제는 키코 비가 직장생활 경험도 없고 고전적인 비(妃)라는 이미지가 강한 반면, 마사코 황태자비는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외교관으로 일한 희대의 수재이자 커리어우먼에 새로운 시대의 상징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게다가 황태자 부부도 아이코 공주를 도쿄대학에 진학시키려 한다는 소문 및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적을 찬양하는 주간지의 기사를 보고 들으며, 키코 비는 애태우고 있다고 한다.[20]
이러한 소문에 대한 키코 비의 공식적인 입장은 없지만, 일본 황족들 중 히사히토의 또래는 5살 위의 사촌누나 아이코 공주뿐이라, 세간에서도 일본 황족들 사이에서도 비교를 많이 당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래서 키코 비는 히사히토 친왕이 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키코 비는 히사히토에게 게임을 금지시키며, 텔레비전은 뉴스와 다큐멘터리만 보게 하고, 그 외에는 다 금지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 황실에 대해 다루는 주간지의 기사에 의하면, 히사히토 친왕을 너무 억압한다는 느낌이 강하다고 한다. "본인이 원하는 학과가 도쿄대학에 있다면 좋겠지만, 미래의 천황이라는 이유로 너무 억압하는 것이 아닐까?? 진로에 대해서는 히사히토 친왕이 좀 더 성장한 후에 논의해야 바람직하지 않을까??"라고 썼다. 주간지 기사가 이럴 정도면 키코 비의 억압이 엄청나긴 한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히사히토 친왕을 너무 오냐오냐 떠받들며 키운다고도 한다. 같은 잘못이라도 두 공주가 했을 때는 꾸짖지만 히사히토 친왕이 했을 때는 넘어가서 두 공주의 불만이 많은데, 특히 작은딸 카코 공주가 불만이 많다고 한다.
2016년 9월 23일에 열린 도쿄국제북페어 행사에 참석한 키코 비가 핀란드 부스에서 책 1권을 들고 홍보를 했는데, 문제의 책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부모와 그 자녀와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주변의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부모에게 추천해 주겠다"까지 했다고. 과연 누구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겠는가.
4. 2016년 7월 ~ 2017년
아이코 공주의 여름방학이기 때문인지, 황태자 일가 세 가족이 2016년 7~8월에 자주 공무에 등장했다. 마사코 황태자비의 얼굴이 많이 밝아진데다,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3학년이 된 아이코 공주는 성적뿐만 아니라 외모도 점점 성숙해져 가고 있다. 이에 대해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반응은 없지만…다만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현재 키코 비의 히스테리가 심각한 수준이 되어가고 있고, 현재진행형이다. 게다가 키코 비의 결혼 전부터 신혼 초까지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건 완전 다른 사람 수준이다. 시집살이와 남편의 불륜 때문인 건지, 아니면 고전적인 며느리의 삶을 선택한 걸 후회하기 때문인지, 어쨌든 이제는 신혼 초처럼 여론이라던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에 신경 안 쓰는 듯.
2016년 9월부터 맏딸 마코 공주가 국제기독교대학 예술과학과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해서 박사학위를 따겠다고 밝혔다. 일본 여론은 표면적으로는 "공무가 줄어들어 아쉽지만, 직장과 공부에 충실하길 바란다"며 이해하는 반응이지만, 사실은 "직장뿐만 아니라 공무까지 해야 하며 국민의 세금으로 생활하는 황족이 박사과정을 거친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반응이 실제 일본의 여론이다. 덕분에(?) "키코 비가 '돈이 없다'느니 하는 소리도 거짓말이 아니냐"는 소문도 돌고 있다.
여전히 키코 비는 "돈이 없다"고 불평하지만, 그에 대한 소문도 많다고 한다.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직원들은 정말 장난 아니게 인격모독을 당하고 있고, 키코 비가 언론이나 학교에 돈을 주는데, 그게 입학할 수 있게 뒷돈을 준다든지의 의미라서 돈이 모자랄 수밖에 없다고 한다.
2016년 11월 20일, 히사히토와 키코 비가 타고 가던 차가 교통사고를 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다행히 두 모자는 다친 곳이 없다고 하는데, 사고 원인이랍시고 내놓은 설명이 교통신호 청색불 통과 같은 특혜가 없이, 천황 일가와는 다른 규제를 받기 때문이라고. 또한 가해자로서 피해자에 대한 사과나 배상 관련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은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는 황위 계승자인 남자가 둘이나 있는데 왜 특권이 없냐?!"는 키코 비의 시위와 자작극이 아니냐는 소문이 있다. 실제로 원래 "단풍철을 맞아 다른 일행과 등산을 가던 중"이라고 나갔던 기사는, 어느새 사적인 용무로 나갔다는 대목이 쏙 빠지고 "내정 황족이 갖는 특권이 방계 황족에게는 주어지지 않아 사고가 났다"는 보도내용만 남았다. 이런 언론 보도에 당연히 일본 여론은 싸늘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의전서열이 높은 공인에게 신호등 통과 특권이 주어지는 것은 그만큼 공무가 많기 때문에 이동의 편의를 봐주는 것이지, 신호 무시하고 막 다니라는 의미가 아니다.[21] 또 그렇게 갖고 싶어하는 황태자비의 지위도 어차피 나루히토 황태자가 즉위하면 후미히토 친왕이 황태자 자리에 앉으면서 저절로 굴러들어올 것인데, 몇 년도 안 남은 그 기간을 못 참고 자작극까지 하느냐는 것이다. 키코 비의 징징거림에 편승해서 애꿎은 마사코 황태자비 탓을 하는 건 이들의 편인 넷우익들뿐이다.
나루히토 황태자가 새 천황으로 즉위하면, 남동생 후미히토 친왕에게 황태자 대우를 해 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후미히토 친왕의 아내인 키코 비도 황태자비 대우를 받게 되는 셈. 그동안 자신과 남편을 황태자 부부로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난리치던 키코 비가, 황태자비 대우를 받으면 과연 어떻게 나올지 기대된다.
2018년도부터 오차노미즈여자대학의 자매결연 학교인 츠쿠바대학 부속중학교로의 무시험 입학 제도가 발표되었다.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초등학교 학생 몇 명[22]을 선발, 츠쿠바대학 부속중학교에 무시험으로 진학시키는 것이다. 츠쿠바대학 부속중학교를 졸업하면, 츠쿠바대학 부속고등학교로 진학할 수 있다.
히사히토가 다니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초등학교 및 부속중학교까지는 남녀공학이지만, 부속고등학교는 여고이다. 때문에 남학생들은 고등학교 입시를 준비해야 한다.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초등학교 남학생들은 대부분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중학교부터 이미 외부 중학교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오차노미즈여대 부속중학교에는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약 2.5배가 많다. 여학교에 가까운 분위기 상, 남학생들은 상냥하지만 어른스럽고 선이 가는 학생들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히사히토는 다른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중학교 입시 준비를 위해, 4학년인 작년부터 가정교사[23]를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어머니 키코 비의 악명(?) 때문에, 가정교사를 구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여고를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려 했으나, "'일본 최초의 여학교'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오차노미즈 동창회의 강한 반대에 막혔다. 오차노미즈여대 총장 무로후시 키미코(室伏きみ子)도 오차노미즈여대 부속학교들을 쭉 거쳐 오차노미즈여대 이학부를 졸업한 동문이라, 부속여고를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는 문제에 긍정적일 가능성이 없었다. 그래서 오차노미즈여대에 부속남고를 설립하려고도 했으나, 그 역시 무산되었다. 결국 자매대학 부속중학교 진학으로 노선이 바뀌었다.
편차치 75[24]라는 입시명문인 츠쿠바대학 부속중학교에 무시험 서류심사로 입학하는 전형이, 히사히토의 한 학년 위부터인 2018년도부터 시작되어 히사히토가 입학 후인 2019년도까지만 적용된다고 한다. 당연히 이 이야기가 보도되자, 일본에서는 여론이 좋지 않다.
5. 2018년 ~ 7월
2017년 12월 1일, 황실회의에서 아키히토 덴노 다음의 승계 구도를 나루히토 황태자-후미히토 친왕-히사히토 친왕으로 정하면서 키코 비의 임무가 더욱 막중해졌다. 그전까지 암묵적으로만 여겨지던 황태제의 아내이자 차세대 천황 후계자의 어머니라는 위치를 확고히 한 것. 하지만 지금 언론을 보면, 키코 비의 보도 비중은 형님인 마사코 황태자비에 비하면 한참 못 미친다.[25] '차기 황후'라는 위치와 '(차세대 천황이여도) 방계 왕자의 어머니'라는 위치의 서열을 따지면 당연한 현상이다. 어쨌든 황실은 황제와 황후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서열 사회이기 때문이다.이후 큰딸 마코 공주와 코무로 케이의 결혼 논란이 불거질 당시 가장 비판을 많이 당했는데, 사실 이 사안에 관해서는 황족답게 자라도록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했다는 것만 제외하면 피해자다. 본래 키코 비는 코무로 일가의 문제를 알고 나서, 당장 케이의 어머니인 코무로 카요(小室佳代)를 찾아가 안정된 직업과 채무관계 청산을 요구했다. 그러나 카요가 "문제 없다"는 말만 반복하면서 은근히 일본 황실에 경제적 요청을 바라는 듯하자, 키코 비는 "이런 집안에 딸을 시집보낼 수 없다"면서 노사이(納采) 의식[26]도 미루고 케이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작업을 하며 파혼을 요구했다. 그런데 후미히토가 마코 공주의 편을 들어버린 탓에 해결이 되지 않고 있다.
국민들이 마코 공주와 그녀의 약혼자 코무로 케이에 대해 비판이 심하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키코 비는 상식적인 선의 판단을 했다.
이 사건 때문에 아이코 공주의 즉위 여론이 더 강해지면서, 히사히토를 장래 천황으로 즉위시키려는 키코 비만 분통이 터질 지경이다. 지금 파혼해도 일가의 이미지가 나쁜데, 어영부영 혼인시키면 그때야말로 승계고 뭐고 없기 때문.
5.1. 상황 정리
그런데 이런 상황은 평소 후미히토+키코 비+궁내청의 행동을 보면 정말로 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후미히토 부부는, 아키히토 덴노가 "자신의 생전에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양위하겠다"고 발표한 뒤로 나루히토 황태자, 후미히토 친왕, 구로다 사야코 3남매와 아키히토 내외의 첫 식사 당일에 표정이 정말 안 좋았다. 후미히토는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대놓고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고, 평소 같았으면 손을 흔들었을 키코 비는 조용했다. 게다가 평소 후미히토 내외와 친했던 궁내청이 아키히토의 양위 의사에 대해 차관이 나서 직접 반대 의사를 발표한 것을 보면, 후미히토 부부나 궁내청이나, 나루히토 황태자가 차기 천황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일본 황실은 1990년 이후로 30년 가까이 현재진행형으로 혼란과 불안이 계속되고 있는 중인데, 시기별로 원인이 다르다. 1990년 후미히토의 결혼과 이듬해 마코 공주의 탄생 이후까지는 나루히토 황태자의 결혼 문제가 원인이었다면, 2001년 아이코 공주의 탄생 전까지는 황태자 부부에게 아이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고, 그 후는 여계 천황을 인정하는지 여부가 혼란의 불씨였다. 하지만 2006년 히사히토가 탄생한 후에는 나루히토 vs 후미히토+궁내청 사이의 황위 계승 문제가 혼란을 일으켰다. 여기에는 아이코 공주와 히사히토 중 누가 황위를 이어받느냐 뿐만 아니라, '직계 후계자이지만 아들이 없는 황태자'와 '방계지만 아들이 있고 일본/정치 성향과 잘 맞아 떨어지는 후미히토' 중 누가 황위를 잇느냐는 문제도 같이 있었다.[27]
이 현상은, 조선 시대에 당파들이 왕자들을 1명씩 찍고 황위 계승 다툼을 벌였던 것에 대입하면 이해하기 쉽다. 지금 일본 황실은 정치 성향이 아키히토와 나루히토가 진보고, 후미히토와 궁내청이 우익이다. 입헌군주제 특성상 황실을 관할하는 궁내청 인사들 역시 정부와 연결되어 있을 수 밖에 없는데, 지금 일본 정부는 우익 성향, 따라서 궁내청도 우익이다. 궁내청은 히사히토 탄생 이전부터 후미히토 내외를 더욱 우대했는데, 그 배경은 서로 둘의 성향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히사히토가 태어났으니 궁내청이나 우익이나 기회를 잡은 셈이었다. 더구나 후미히토 내외는 예전부터 야심이 대단했고[28], 여기에 아들로 인해 한동안 아키히토 덴노-미치코 황후의 총애를 업기까지 했으니, 당연히 키코 비와 그의 남편 후미히토가 기고만장했던 것은 당연지사였다.
2017년 9월 카코 공주가 영국 리즈 대학교로 유학가기 전 후미히토가 주최한 파티에 천황 부부가 참석했을 때, 나루히토 황태자와 마사코 황태자비 부부가 참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그 기사에 '키코 비가 히사히토를 낳은 후 일본 황실의 균형이 흔들렸다.'는 요지의 문장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 '그 자리는 미치코 황후가 흔들린 황실내 균형을 바로잡기 위해 두 아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미의 이야기까지 있었다. 보도를 함부로 하지 않고 내용도 적절히 걸러내는 황실 관련 기사가 저럴 정도면,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결국 후미히토와 키코 비 내외는 아들 히사히토를 통해 권력이 높아지자, 미래에 천황과 황후 자리까지 오를 생각을 가졌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궁내청은, 후미히토가 천황에 오르면 서로 성향이 같으니 더욱 자기들이 원하는 새로운 시대가 개막하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진보적인 나루히토는 황태자 시절부터 계속 궁내청과 충돌했는데, 권력의 원리를 보면 궁내청이 장남과 차남 어느 쪽에 붙는 게 유리할지 자명하다.
작년(2017년 12월 1일)의 황실 회의는 공교롭게도 아이코 공주의 만 16세 생일에 열렸다. 지금까지 궁내청이 황태자 부부에게 엿먹인 전적을 생각하면, 이것도 그 일환일 수 있다. 궁내청은 아키히토 덴노의 뜻대로 나루히토 황태자가 천황직을 승계하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 다음 구도를 후미히토-히사히토로 정한 것과 그 발표를 아이코 공주의 생일로 잡아서 집에서 딸의 생일을 제대로 치르지 못하게 최대한 방해하는 것 정도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이었을 수 있다.
나루히토가 천황이 된 후에도 후미히토-키코 비와 궁내청의 반발은 어떤 식으로든 계속 될 수 있다. 아키히토 덴노 사후에는 나루히토에게 후미히토에게 양위하라는 압박을 넣을 수 있으며, 나루히토가 조금만 몸이 아파도 양위 운운하는 것도 쉽다. 심지어 마사코 황태자비가 무리해 조금만 쉬어도 '아내가 제대로 황후의 일을 수행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압박할 수 있고, 더 나아가 몇 십 년 후에 나루히토가 지금 아키히토의 나이가 되면 더 난리를 피울 가능성도 배제 못한다. 나루히토의 성격상 아무리 동생이라고 하더라도 제왕학을 받지 않았고 집안 자체의 문제도 제대로 해결하지도 못하고 있는 후미히토에게 천황 자리를 양위할 일은 없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 외의 이유로 갑작스런 사태가 발생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번 양위 결정으로 후미히토 내외와 궁내청의 기세가 한 풀 꺽인 것은 틀림없다. 후계자가 있더라도 차남은 어디까지나 차남일 뿐이라는 사실을 현 천황이자 아버지/시아버지인 아키히토가 못 박은 것이기 때문이다. 후미히토를 황태제로 하여 황태자 대우를 해주고 키코 비도 황태자비 대우를 받게 해주면서 히사히토의 계승을 황실 회의로 확실시 한 것이 이들이 할 수 있었던 최대의 조치였던 것이다.
사실 후미히토 내외를 황태자 대우하는 것은, 현재 일본 황실 상황을 보면 어쩔 수가 없기는 하다. 황족의 주요 임무는 공무인데, 황태자 부부가 해야 할 일과 방계 황족이 할 일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다. 나루히토가 천황이 되면 어차피 황태자가 할 일을 누군가가 대신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우나 관리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역할을 할 사람은 후미히토밖에 없는데, 그 집에는 히사히토까지 있으니 그만한 우대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루히토 승계 후 아키시노노미야 일가가 동궁으로 이사하는 일은 향후 몇 년 간은 없다.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가 양위 후 지낼 곳이 동궁으로 결정되었고, 나루히토 일가도 황궁 보수 문제로 또 몇 개월을 동궁에서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제가 하나 더 있다. 현재 일본 황실에는 천황까지 합해도 남성 황족이 5명밖에 없어서, 대부분의 공무는 여성 황족들이 하고 있다. 그 5명 중에서도 고령인 아키히토 덴노와 남동생 마사히토를 제외하면 남는 사람은 나루히토, 후미히토, 히사히토뿐으로, 결국 대부분의 공무는 여성 황족들의 담당이다. 문제는 일본 황실은 여성 미야케조차 인정하지 않아서, 공주는 결혼하면 평민이 된다.
무엇보다 황실에서 가장 많은 공무를 하고 있는 집안은 바로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다. 문제는 올해(2018년) 가을에 장녀인 마코 공주가 결혼을 해 평민이 될 것이기에,
정리하면 후미히토와 키코 비는 아들 탄생으로 원하던 권력을 손에 넣었지만 결정적으로 천황이 될 권력은 갖지 못했고, 역시 원하던 황태자 대우를 받게 되어 언론의 관심을 더 많이 받게 될 테지만 도리어 할 일이 많아지는 아이러니한 미래를 맞게 된 셈이다. 게다가 키코 비는 유일한 후계자를 잘 양육해야 하는 부담까지 안고 있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부른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대로 된 것이나 다름 없다. 만약 과욕을 부리지 않고 히사히토를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이유로 아이코 공주가 천황 후계자가 되는 동시에 자기 딸들도 미야케 당주가 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일본 황실 내의 혼선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키코 비는 토사구팽 또는 자업자득과 같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아들 낳으라고 압박하기에 노력해서 간신히 낳았더니 잘 키우라는 부담만 주면서[29] 정작 동궁 같은 대우는 안 해주고, 몸이 아픈 손윗동서인 마사코 황태자비를 대신해 열심히 공무했는데, 정작 황후 자리는 그동안 휴식하던 손윗동서에게 넘어 갔으니 말이다. 본인도 야심이 있어 과욕을 부렸겠지만, 열심히 한 대가에 비해 최종 성적은 제자리 걸음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최근 기사에 따르면,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가 터지자 미치코 황후-키코 비 사이에 분열이 발생했다고 한다. 키코 비의 황족관과 자녀 교육에 불신이 좀 있었던 차에 첫 손주의 결혼 소동으로 인하여 키코 비가 자녀의 결혼도 제대로 못 시켜서 황실 망신을 시킨 것에 대해서 아예 불신하게 되었다는 것. 실제로 키코 비는 요즘 종종 "양 폐하를 뵐 면목이 없다"고 말한다는 모양. 기사는 저번에 미치코 황후가 심야에 동궁으로 갔던 것에 대해, 대놓고 "마사코 황태자비를 지원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썼다. 한 마디로 미치코 황후는 키코 비가 황후감이 아니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사실 이는 후미히토 내외가 초래한 결과이다. 궁내청과 우익 주간지의 농간과 언론 플레이도 한 몫 했지만, 내외가 드러내놓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한 것도 영향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주간지 기사를 확인한다는 미치코 황후가 키코 비에 대한 나쁜 소문을 모를 리 없을 테고, 무엇보다 역사의식을 중요하게 여기는 아키히토가 후미히토와 궁내청의 성향을 아는 것은 더욱 당연하다.
그리고 얼마 전 정양 때는 2004년 인격부정 발언 이후로 한 번도 이뤄지지 않았던 아키시노 일가와의 정양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키코 비의 의사였다는 모양. 키코 비는 한때 시어머니와 갈등은 있었으나 이후 개선되어 마사코 황태자비와 가까이 지내는 것으로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의 신뢰를 되찾고 히사히토의 계승에 대한 협력을 얻고 싶어 하는 것 같다고 한다. 동시에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에 대한 협조도 얻고. 이것만 봐도, 이번 양위 발표로 차남 내외의 기가 얼마나 꺾였는지 잘 알 수 있다.[30]
언론의 관심도 황태자 일가와 후미히토 일가에게 쏟아지는 양상이 상당히 달라졌다. 마사코 황태자비 관련 기사는 댓글은 여전히 부정적이어도 내용만은 극히 걸러내고 조심하는 느낌이 드는데, 키코 비는 툭하면 자녀교육 관련으로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실제로 후미히토라면 또 모를까, 키코 비는 자녀교육 때문에 계속 입방아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다. 지금 마코 공주 결혼 문제로도 툭하면 기사화되고 있는데 앞으로 카코 공주, 더 나아가 히사히토까지 있으니 얼마나 더할지는(…) 게다가 자녀들이 모두 성적과 진학에 있어서 헛점을 많이 보였기 때문에 그마저도 좋은 소리는 안 나올 것이 당연하다. 반면 후미히토는 키코 비보다 이쪽 문제로는 덜 민감하다.
마코 공주 결혼 관련 기사만 봐도, 자녀 교육으로 말이 나오는 것은 키코 비지, 후미히토가 아니다. 키코 비는 엄격하게 교육했다 하고 후미히토는 방관형이란 것이 일본인들의 보편적인 인식이고, 댓글에서도 "미치코 황후는 후미히토에게는 아무 말 하지 않는다"는 불평이 보이는데도, 자녀교육의 초점은 키코 비에게 맞춰져 있다. 일본 황실 특유의 남존여비 사상도 있고, 아무래도 방임형인 후미히토는 아무 것도 안 하니, 오히려 욕 들을 일이 적다. 반대로 이것저것 시키거나 통제하는 키코 비 쪽에 시선이 쏠리는 것도 있을 것이다. 후미히토의 자녀교육 기여도가 0% 수준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지금 두 공주의 교육 상태가 100% 키코 비의 작품이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장남은 장남이고 차남은 차남이며, 후계자를 낳아줬어도 여성은 자녀를 키우고 내조하며 필요한 경우 남편 대신 비난을 떠안아야 한다는, 일본 황실의 고질적인 구시대적 남존여비&가부장제 문화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키코 비 개인은 억울할지도 몰라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워낙 평판이 안 좋은데다 대놓고 천황 자리를 노리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보인 탓이 크니 뒤통수를 논하기 앞서 본인 처신이 어땠는지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 키코 비가 본인만의 잘못은 아닌 부분까지 다 떠맡아 억울하게 욕을 듣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키코 비가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
왕이 절대 권력을 가지는 전제군주제에서도 왕위계승자를 변경하는 일로 인해 나라가 한바탕 뒤집어졌던 판국에, 형식과 권위만 남아있는 현대 입헌군주제를 택하고 있는 현대의 군주국들에서 자기들이 나서서 이러저러하면 왕위를 빼앗아올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다. 정말로 황태자가 바뀌었다면 일본 전체가 뒤집힐 사태인 것은 물론, 남성 황족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 상황에서 수십년간 황태자였던 나루히토를 사실상 황실에서 내몰아내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이것은 현 천황인 아키히토가 역사관 문제가 없더라도 나중의 천황 계승에 대해 몇 분만이라도 고민해봤다면 당장에 답이 나오는 문제다.[31]
기사를 보면 키코 비는 마사코 황태자비가 요양에 들어간 후로 '만약 내가 황후가 된다면?'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공무에 임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후의 승리자는 사회 전반을 주름잡고 있던 우익 세력이 좋아하지 않는 나루히토 황태자와 천황의 후계자가 될 아들을 못 낳았다고 비판을 듣던 마사코 황태자비의 것이 되었다. 두 내외가 아들의 위세와 우익들, 궁내청 등을 믿어도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정작 아키히토와 미치코 황후의 깊은 의중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것 같다.
결국 아키히토는 후계자를 바꿀 의사가 없었으며, 미치코 황후는 사람을 보는 눈이 냉정했다.[32] 아들을 낳으라고 압박한 것에는 만세일계로 황통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을 뿐, 아들을 낳아주었다 해서 황위까지 주겠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특히 역사의식을 중요시하는 아키히토에게 동조하지 않았던 후미히토는 크게 자충수를 뒀다.
미치코 황후가 작은며느리 키코 비를 불신하게 된 것은 황족관 때문이다. 원래 전부터 좀 불신하다가,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로 완전히 불신하게 되었다고. 기사에서는 "미치코 황후의 신뢰를 잃은 것이 키코 비의 천추의 한"이라고 적혀있다. 키코 비가 자녀교육을 잘 하지는 않았다는 게 분명해진 것. 미치코 황후는 재벌이어도 평민 신분으로 황실에 시집을 와[33] 호된 시집살이를 경험하면서, 황실의 결혼은 단순히 집안과 집안의 결합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고 한다. 그런 시어머니에게 잘 보여야 할 키코 비는 조금만 조사해보면 결혼을 거부하는 게 당연한 코무로 케이와 큰딸 마코 공주의 결혼을 추진하여 여러가지 논란을 자초하면서 황실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키우고 있는데, 이는 결국 미치코 황후가 키코 비에 대해 '황족으로 부적절한 사람'이라는 낙인을 찍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에 더해 자칫 잘못하면 수 십년 후에는 유일한 황족 남성으로 천황 자리에 오를 히사히토가 키코 비의 손에서 자라는 것 자체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는 소리가 나오는 데 크게 기여했다.
6. 2018년 8월~ 12월
그런 와중에 2018년 8월 31일에 야후재팬 기사에 "키코 비가 히사히토에게 야리가다케 산의 정상을 혼자서 등반하도록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사진은 찍히지 않았고 목격자와 궁내청 관계자의 말만 나왔지만, 당시 경호원을 비롯해 키코 비까지 아래에서 지켜보고, 히사히토 혼자서만 올랐다고 한다. 문제는 그 산 정상이 사다리와 쇠사슬로 올라가야 하는, 초등학생에겐 힘들고 위험한 구간이었다는 점이다. 헬멧은 쓰고 있었다지만 궁내청 관계자는 "장차 천황 될 아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이라면서 굉장히 당황한 반응을 보였다.원래 후미히토 내외와 궁내청은, 평소 히사히토에게 학교 운동회에서조차 위험한 종목은 시키지 않을 정도로 과잉보호를 한다.[34] 그런데 키코 비가 갑자기 '스파르타'라는 표현이 나올 만큼 이런 수단을 낸 것은 마코 공주의 결혼 소동으로 아키시노노미야 家의 상황이 안 좋게 돌아가면서 히사히토의 교육에 조바심을 느꼈기 때문.[35] 훌륭하고 씩씩하게 자라게 하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내년에 입학하는 츠쿠바대학 부속중학교에 험준한 등반 프로그램이 있어서 그것을 대비한 것도 있는 것 같다.
이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운동회 종목을 들먹거리면서 "무리"라는 뉘앙스의 댓글을 단 사람도 있고,[36]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말과, "강제로 시키는 것은 좋지 않다"라거나, "누나가 고집있게 자란 것처럼 히사히토도 그렇게 자랄 것이 보인다"는 등의 온갖 혹평이 보인다. 일단 사다리와 쇠사슬로 등반하는 것은 전문 산악인도 조심해야 하고, 성인이어도 전문가가 아니면 위험하다고 간주된다. 그런 곳을 평소 또래 수준에 맞는 운동도 시키지 않으면서 천황될 유일한 후계자라고 느닷없이 오르게 한 것은 일반인 시선에서 안 좋게 보일 수 밖에 없다. 좌우간 이 사건을 통해 키코 비의 아들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부담감, 자율적이지 못하고 어머니의 품 안에서 억압당하고 있는 히사히토의 상황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다.
기사에 의하면 키코 비가 히사히토에게 오르라고 명령한 구간은 나루히토 황태자가 오른 적이 없다고 한다. 내용에는 "키코 비가 '황태자도 못 오르는 곳을 내 아들은 오른다'고 어필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식으로 서술해 놨다. 그런데 실상은 50대 후반인 나루히토 황태자도 충분히 오를 수 있다고 한다.(…) 다만 거기까지 가는 데에는 등산로가 좁아서, 자신이 갈 경우 입산 통제 때문에 일반인들이 불편을 겪을 것이기에 안 간다고 한다. 실제로 히사히토가 거기에 가는 바람에 입산 통제가 걸리는 바람에 해당 산을 방문한 수많은 일반인들이 상당히 큰 불편을 겪었다고 한다. 기사의 말미에는 "일반인의 불편을 고려하지 않는 이런 식의 교육이 과연 제왕학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고 써놨다. 키코 비가 조급했던 나머지 정말 크게 실수한 것이다.[37]
게다가 이 보여주기 식 교육은 키코 비가 나루히토 황태자를 무시하고 행동한 것이다. 일단 나루히토가 정말로 오르지 못해서 오른 게 아닌데 정말 그런 줄 알았던 것은, 황태자 일가와 아키시노 일가의 소통 부족을 의미하고 있다. 그렇다 해도 '내 아들은 할 수 있다'고 어필할 의도가 있었다는 것은, 히사히토 vs 아이코 공주를 넘어서서, 히사히토 vs 나루히토라는 말도 안 되는 적대 구도를 만든 것이다. 일반인의 눈에도 뻔히 보이는 이런 수작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 자체가, 황족관은 편협하기 그지없고 야심만 많다는 것을 제대로 드러내고 있다.
더구나 히사히토는 어쨌거나 현 체제에서는 분명 황위를 계승할 유일한 남자아이이다. 키코 비는 히사히토에게 올바른 황족관을 심어주어야 할 의무뿐만 아니라, 건강과 안전을 관리하여 아프거나 다치지 않도록 살필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또래들이 하는 운동만 시켜도 될 일인데, 그것도 안 시키면서 이런 위험한 등반을 하게 한 것은 키코 비가 자신의 야심만 잔뜩 내세운 결과다. 결국 현재 키코 비에게 히사히토는 하나의 인격체라기보다는 자신의 야심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투영되고 있다 할 수 있다.
좌우간 주변 상황이 여러모로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키코 비가 히사히토에게 무리하다 못해 상당히 위험한 등산까지 시키자, 결국 2018년 9월 9일과 9월 11일[38]에는 "히사히토를 황태자 부부에게 맡겨서 제왕학을 교육해야 한다"는 기사가 나오기에 이르렀다. 올 1월부터 슬슬 흘러나오다가, 지금은 정치인들 중에서도 논의하는 분위기인 모양이다.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는 후미히토 내외의 황족관과 자녀 교육 문제에서 기인한 것인만큼, 그동안 후미히토 내외에 대해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대우해주고 보호해주던 궁내청에서조차 히사히토를 차남 일가에 계속해서 맡기는 것을 몹시 우려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열심히 한 키코 비에게 대놓고 "후계자의 어머니여도 가정교육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피력한 것이다.
7. 2019년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의 논란으로 아키시노노미야 부부의 교육방침에 대해 구설수가 불거졌다. 국민들은 "황족으로서의 자신과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명확하게 나눠 교육한 아키시노노미야 부부가,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명목으로 공주들의 사생활에 신경을 쓰지 않아 이러한 사단이 났다"고 여기기 때문이다.[39] '사생활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부부의 인식은 '어떤 경우라도 입장과 의무를 우선시하는' 아키히토 덴노와 미치코 황후가 관철하고 있는 신념 정확하게는 일본 황족들의 기본 이념과는 상반된 것[40]이라는 게 궁내청 관계자의 설명이다.공무로 바쁜 황족들은 기본적으로 도우미들이 아이들을 돌보는데, 키코 비의 지나친 엄격함으로 인하여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직원들이 자주 바뀌는 탓에[41] 도우미들의 교육이 아이들에게 지속적인 효과를 보지 못했고, 그걸 보완해줘야 할 아키시노노미야 부부의 자칭 자주성 존중이 방치로 변질된 것도 공주들의 성격 형성에 상당한 악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2019년 4월 15일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를 데리고 도쿄국립박물관 특별전[42]에 참석했다. 이는 부모자식 간의 사이가 안 좋다고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나, 인터넷 등에서 아키시노노미야 가족에 대한 비판이 지속되고 있는 것을 우려한 키코 비가 '가족 간 사이가 좋다'를 어필하려는 의도이기 때문.
2019년 4월 20일 한 주간지 보도에 의하면 키코 비는 원래부터 국민들의 동향을 확인하기 위해서 인터넷을 자주 체크하는데[43]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가 터지고 수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문제가 수습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커지고 있는 상황에 상당히 우려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일본인들은 "쓸데없이 가족관계가 원만한 것처럼 꾸며서 보여주는 헛짓거리나 하지 말고, 남편을 설득하든 아니면 큰딸내미를 설득하든, 어떻게 해서든 코무로 집안과의 파혼에 총력을 가하라"며 비판하고 있다.
2019년 5월 23일 보도에 의하면, 5월 11일 키코 비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중학교에서 열린 학부모 설명회에 참석한 직후, 12일에 있는 교토 다이쇼지라는 사찰을 방문하여 그곳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하여 교토로 향했다. 그리고 5월 11일 도쿄 도내에서의 공무를 마친 마코 공주도 교토로 향해서 두 사람이 1박 2일간 비밀 여행을 갔다가 사찰 행사를 관람하는 등의 일정을 소화한 후 하룻밤을 같이 잔 다음 같이 도쿄로 돌아왔다.
여기에서 오랜만에 모녀간의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보도가 나왔다. 아무래도 내년 2월이 결혼 연기 선언 2년째이며, 내년 4월 후미히토가 입황사의 의식을 치르기 전에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결혼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서, 마코 공주나 키코 비 모두 서로 다른 목적[44]에서 부모자식간의 대화를 할 필요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2019년 5월 24일 보도에 의하면 후미히토 내외는 '코무로 케이가 정말로 마코 공주와 결혼할 생각이 있는가'라고 의심하고 있는 상황이다. 키코 비는 가능한 딸의 마음을 우선시하고 싶다는 후미히토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지만, 코무로 케이에 대한 불신과 황실에 대한 영향을 감안할 때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키코 비는 마코 공주의 마음이 변할 수 있도록 황족으로서의 긍지를 되찾아주기 위해 공무 몰아주기를 선택한 미치코 상황후의 의견에 동조했다.
황실 전담 기자에 의하면 키코 비는 히사히토를 차기 천황 후계자로서 잘 양육하는 것을 임무로 생각하고 있는 만큼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이 히사히토에게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코 공주 역시 이와 같은 이유로 어머니가 결혼을 반대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만, 마코 공주 본인은 언젠가 황실을 떠나서 자기가 생각한 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식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에[45] 결혼만은 부모님의 간섭없이 자유롭게 하고 싶다는 의사가 강하며 그러한 생각 때문에 자신의 아집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 지를 실시간으로 보면서 아무렇지 않은 듯 현상 유지를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후미히토 내외는 둘을 파혼시켜야 한다는 입장으로 레이와 시대가 되어 장기전을 각오하고 있는 상태로서 코무로 케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키코 비는 마코 공주와의 동반 공무를 늘려 공무에 대한 대화[46]를 통해 합의점을 찾을 생각을 갖고 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국민들의 반감이 그에 동반하여 늘어나서 결국 자기네들에게 심각한 타격으로 온다는 것이지만 현 상황에서 이러한 치명적인 단점에도 불구하고 장기간에 걸친 조치를 통한 사태 해결 이외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이라서 사실상 후미히토 내외는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장기전을 하는 중이다. 물론 이러한 것에 대해서 일본 국민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날카롭다.
2019년 6월 12일자 기사에서 아키시노노미야 부부의 지인은 "후미히토는 작년 가을 이후 코무로 케이가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증언했다.
이후 나온 보도에 의하면 키코 비는 2014년 노리코 공주가 결혼한 이후 '딸들의 신랑감은 신관 이상 정도는 되어야 한다'며 구 화족 집안을 고려하고 있었다.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가 황족으로서 히사히토를 지원하기 위해서 구 황족이나 구 화족 집안의 아들과 결혼하면 여성 미야케가 자연스럽게 허용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히사코 비가 2017년 국경없는 아이들 자선파티에서 만난 모리야 케이(守谷慧)를 3녀 아야코 공주에게 소개시켜 결혼을 주도한 것을 계기로, 마코 공주, 카코 공주와 동반공무를 다니며 사람들에게 소개시키고 있다는 듯하다.
2019년 6월 21일자 기사에서, 키코 비가 히사히토에게 외국어 교육을 열심히 시키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어린 시절부터 외국에서 자라 영어, 독일어, 중국어를 잘하는 키코 비는 NHK 영어방송을 들려주는 등 히사히토의 면학에 힘쓰고 있다고. 하지만 일본 국민들의 반응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국빈 방문 당시 바로 영어를 한 마디도 안 하고 후미히토처럼 시선 피하기 바쁘던 키코 비가, 무슨 수로 외국어를 잘하냐"면서 "'자녀교육에 노력한다'는 헛소리를 언론에 유포할 시간이 있으면, 히사히토에게 (늦긴 했지만 그래도) 황족관이나 제왕학이나 가르칠 수 있도록 하라"고 일갈하고 있다.
2019년 6월 30일 키코 비가 아키시노노미야 집안을 '이상적인 황족가문'으로 만들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적응장애로 고생하던 마사코 황태자비와 달리 가쿠슈인 출신이라 결혼 전부터 '황실에 익숙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사코 황태자비의 공무까지 대신하며 국민들의 호감을 샀다, 황족으로서의 자세를 아키히토 내외에게 인정을 받았다,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를 국제기독교대학에 입학시키며 느긋함과 자유로움을 보였다, 히사히토의 건강한 모습을 보여줬다 등 키코 비를 칭찬하는 궁내청 관계자의 말이 담겼다.
한편 동 기사에서 황실 담당 기자는 "후미히토가 황사가 된 후 실제로 아키시노노미야 궁저에 있는 직원들은 24명뿐이기 때문에 황실비용에서 사적으로 고용하고 있다",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에 지급되는 비용은 이전보다 비교적으로 늘어났지만, 공무가 늘어난 상황에서 히사히토를 제대로 양육하는 것은 힘들다", "후미히토가 지난 11월 본인의 생일 기자회견에서의 발언으로 인해 궁내청과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역시 "공무를 줄이고 마코 공주와 코무로 케이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등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2019년 7월 3일 보도에는 마코 공주의 결혼이 교착된 상태에서 부모자식 간의 대화단절이 이어지자 후미히토 내외는 문제 해결을 서둘러선 안 되는 시기로 생각하고 있다고 언급되었다.
결혼을 반대하는 키코 비와 달리 후미히토는 '가능하면 딸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하고 있으며, 마코 공주 역시 이를 이해하고 있다는 듯하다. 또한 지난 가을 후미히토가 "노사이 의식을 할 수 없다"고 발언한 것도 미치코 상황후가 "코무로의 빚 문제를 신속하게 해결하라"고 쓴소리를 연이어 하고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꺼낸 발언이라는 듯하다.
2019년 7월 6일 "키코 비가 유럽순방에서 꽃무늬 원피스를 선택한 것은, '화려한 인상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진행된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또한 후미히토 내외는 "전용기가 아니라 민간기를 사용해야 많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는 희망을 밝혔으며, 이에 대해 궁내청 관계자는 "민간기보다 전용기가 상대 국가에 민폐를 끼치지 않고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2019년 7월 7일 궁내청 관계자와 황실 출입 기자에 따르면, 후미히토 내외는 자녀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육아를 해왔기 때문에 마코 공주가 결혼하고 싶어하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특히 후미히토는 결혼 문제가 언급되지 않으면 화제가 되지 않아 대중의 관심이 없어진다는 생각이라 국민 감정을 소중히 여겨도,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목소리가 커도 '결혼을 시킬' 여러가지 방법을 고려하고 있다는 듯하다.
동일 다른 주간지는 후미히토가 마코 공주 스스로 납득하고, 결론을 내리길 기다리고 있다고 추측했다. 현재 아키시노노미야 궁저는 과거에 비해 '무엇을 해도 좋다'는 분위기이며 7월~9월까지 온 가족의 해외방문이 연달아 있기 때문에 코무로 케이에게 신경 쓸 수 없다는 게 본심이라는 듯하다.
2019년 7월 10일 ~ 11일 이시카와현에서 열리는 제 55회 헌혈운동 추진 전국대회에 참석했다. 원래 이 대회는 나루히토 덴노 내외가 황태자, 황태자비 시절 참석해온 지역행사 중 하나였으나, 공무 개편 이후 일본적십자사 명예 부총재를 맡게 된 키코 비의 관할로 인계되었다. 참고로 10일에는 전용기 편으로 지역 공항에 도착해서 11일 대회 참석 후 곧바로 도쿄로 철도편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2019년 7월 22일 기사에 결혼 연기가 결정되었을 때 키코 비는 어머니로서 마코 공주를 걱정하고 조언하는 등 참았지만, 최근 들어 키코 비가 코무로 케이에 대해 질타하는 일이 많아졌다.
마코 공주의 결혼이 연기된 원인 중 하나는 대중들의 '아이코 공주가 천황에 어울린다'는 반응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으로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의 명성이 떨어지고, 가문 자체의 어려움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래에 히사히토가 천황으로 즉위하게 되면 코무로 케이는 천황의 매형이 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키코 비의 신경이 예민해진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한다.
한편 궁내청에선 "마코 공주의 성격은 키코 비의 잘못된 교육의 결과"라는 목소리가 높고, "히사히토만 생각하거나 마코 공주의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부모로서 딸을 제대로 봐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동일 다른 기사에선 코무로 카요가 키코 비의 엄격한 태도에 어리둥절해 했으나, 부드러운 태도를 보여 천사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코무로 카요는 키코 비가 직원들에게 심하게 구는 모습을 보고 지쳐하는 등 짜증을 내거나 "마음이 무겁다"고 토로했다는 듯하다.
후미히토와 키코 비는 결혼 문제의 장기화에 따라 동정적인 여론이 흐르는 것을 무척 경계하고 있으며, '열심히 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인정 받으려는 분위기'를 만들려는 마코 공주와 코무로 케이의 관철을 피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다.
2019년 7월 28일 한 여성지에 '키코 비가 나루히토와 마사코 황후 부부의 즉위축하기념 무용공연을 2차례 연속으로 관람한 것은 화해하려는 태도를 취한 것'이라는 황실 전담 기자의 말이 실렸다.
또한 미치코 상황후의 스타일을 따라하는데 심혈을 기울인 키코 비가 최근들어 마사코 황후의 스타일을 답습하는 중이라며, 그 일환 중 하나로 올해 자신의 생일 때 기자회견 공개 대신 문서 공개를 할 예정이다. 이는 마사코 황후가 황태자비 시절 기자회견보다 문서 공개 횟수가 많았다는 기자의 추정이 있었다.
궁내청 관계자는 "마사코 황후와 키코 비는 작년 5월 정양 이후로 관계가 변화되어 왔으며, 키코 비는 여태까지 '라이벌'이었던 마사코 황후를 존중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편 히사히토의 살인미수의 가해자는 벌금형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2019년 8월에 들어와선 경제산업성 출신 공무원이나 현직직원을 비롯한 아베 신조 총리의 측근 등이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의 시종으로 파견되고 있는 것에 정부에서 황위 계승자 1위, 2위를 관리하려는 목적이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2019년 9월 10일 기사에 의하면 키코 비는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과 궁내청의 의문 섞인 눈초리를 두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이제 한계"라는 말을 해 관계자들이 놀랐다고 한다. 이러한 말을 꺼내게 된 이유는 차기 천황인 히사히토에게 꼬리표가 될 수 있다는 점, "상대방의 문제임에도 국민들의 비판은 아키시노노미야를 향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코 공주의 결혼을 허락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는데, 코무로 케이의 유학 기간동안 아키시노노미야의 명예를 회복하기 어렵고 비난받을 바에 차라리 결혼을 인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히사히토의 미래가 불투명하다, 마코 공주의 의견을 따라야 우리에게 바람직할지 모른다는 말을 꺼냈다고 한다.
2019년 9월 11일 만 53세 생일을 맞아 공개한 서면 인터뷰를 통해서 "마코 공주는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현재와 미래를 삼가겠다"는 반응을 보이며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에 대해 언급을 피한데다, 태풍 파사이의 영향으로 치바현 등에서 막대한 피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일 퇴원한 시어머니 미치코 상황후 등을 불러서 호화롭게 생일 파티를 하면서 일본 국민들의 감정을 긁고 있다.
추가보도에 따르면 키코 비가 서면 인터뷰는 아키히토 상황과 미치코 상황후, 마코 공주에게 코무로 케이와 파혼시키겠다는 결의를 보인 것이라고 한다.
한편 장기화되는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에 대해서 "코무로 카요의 전 약혼자에게 400만엔을 주면 마코 공주와 코무로 케이를 결혼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친 후미히토 추종자들이 나오자, 상황이 악화되는 걸 막기 위하여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의 요청에 궁내청 직원들이 그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만류시키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요청을 한 사람을 키코 비로 추정하고 있다.
2019년 10월 10일 키코 비가 히사히토의 고등학교 진학처로 가쿠슈인 고등과(남고) 대신 도쿄농업대학부속 제1농업고등학교를 고려하고 있다는 보도가 올라왔다. 황실 관계자는 "후미히토가 2008년부터 도쿄농대 객원교수로 역임하고 있으며, 키코 비의 남동생인 가와시마 슈가 도쿄농대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기 때문에 아키시노노미야 가문과 인연이 깊어 히사히토의 진학처로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황실 전담 기자들은 가쿠슈인 졸업생과 재학생을 가리지 않고 흐르는 "후미히토 때문에 낙제생이 없다"는 소문,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가 가쿠슈인에 재학할 당시 가쿠슈인에서 아이코 공주의 초등과 입학에 맞춰 여자고등과에 이르기까지 교내 시설을 재보수했기 때문에 푸대접을 받았다고 느꼈던 점, 가쿠슈인대학 측이 자신과 상담없이 카코 공주를 퇴학시키려고 했었다는 점 등이 합쳐져 키코 비가 가쿠슈인을 나쁘게 보고 있다는 게 실제 이유라고 한다.[47]
한편 10월 기사에 따르면 여전히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때문에 부부싸움을 자주 하는데 아직 어린 히사히토의 앞에도 자주하고 있으며, 카코 공주는 부모의 싸움으로 집안이 시끄러워지면 집 근처인 큰아버지 댁으로 자주 피신해서 마사코 황후와 아이코 공주의 위로를 받는다고 한다.
8. 2020년
2020년 1월 중순 코무로 케이의 금전 문제와 집안 문제에 키코 비가 경악했고, 코무로 카요와 지속적인 충돌이 있었다고 보도되었다. 결혼 비용 등 금전적인 협의가 이뤄지면서 코무로 카요는 비용 전체를 아키시노노미야에게 일임하거나 궁내청을 통해서 "빚을 황실에서 지원해주면 되지 않겠냐"고 요구하면서 후미히토와 키코 비가 당황했다고 한다. 또한 납채 의식에서의 사자에 대해서도 코무로 케이와 코무로 카요는 애매한 대답으로 일관했다고 전해졌다.2020년 1월 말 보도에 따르면 미치코 상황후가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에 대해 키코 비에게 자주 조언을 했다고 한다.
2020년 2월 12일 후미히토 부부는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가 히사히토의 미래를 크게 좌우하는 사안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논의에 진척이 없으면 차기 천황인 히사히토가 홀로 황실의 모든 것을 짊어져야 하기 때문. 또한 키코 비는 최근 들어 카코 공주에게 "황실에 남아서 히사히토를 지지해달라"는 당부를 계속하고 있고, 후미히토 부부는 코무로 케이가 미야케 당주의 남편이 될 가능성을 배제하고 있다고 한다.
9. 2021년
2021년 11월 4일에 부친상을 당했다.부친 부고 소식10. 2023년
5월 6일 열리는 영국 찰스 3세 국왕 대관식에 나루히토 덴노 부부가 불참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남편 후미히토와 함께 일본 황실 대표로 영국을 방문한다.11. 2024년
나루히토와 마사코 비가 천황과 황후로 즉위한 후 후미히토와 키코 비에 대한 기사는 예전과 같이 않아졌고 지금도 그렇다. 헤이세이 시대처럼 추켜세워주는 기사는 거의 없다. 특히 레이와 시대에 들어서는 이 집안에 내세울 것은 히사히토 밖에 없는지라 아들에 대한 기사가 아키시노노미야 家 관련해 가장 많이 오르내리고 있다. 그렇지만 후미히토와 키코 비는 더 이상 중심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오히려 히사히토의 대학 진학 문제, 성적 문제, 성년 이후의 행보 등이 중심이 되고 있다. 아들이 커가면서 점차 집안의 권력 구도가 옮겨가는 것이 보인다. 적어도 기사상으로는 헤이세이 때처럼 후미히토와 키코 비 내외가 나루히토와 마사코 내외를 적대하는 구도나 앞서가려는 모습은 완전히 없어졌다.[48]다만 주간지를 보면 키코 비 - 미치코 상황후를 가해자로 묶고 마사코 황후와 아이코 공주를 피해자로 묶어 대립각을 세우는 기사가 간간히 보인다. 예를 들어 키코 비가 아이코 공주에게 "여론이 좋아졌다고 잘난 척하지 마라."라던가, 미치코 상황후가 아침부터 아이코 공주에게 전화를 걸어 "네 어머니는 왜 날 보러 오지 않는 거냐."라고 한다던가 하는 식의 기사가 눈에 띈다. 거기에 더해 히사히토가 덴노 내외에게 인사를 하러 가지 못하게 키코 비가 막은 정황이 보이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는 등 예전에는 나루히토 일가를 '덜 떨어졌다.'며 말도 안 되는 누명을 씌워 두들겨 패던 언론이 이제는, 나루히토 일가를 피해자로 하여 황실 내의 새로운 집단 괴롭힘을 이야기하는 모양새다.[49] 그러나 일본 황실을 다루는 언론이란 게 사소한 건덕지나 말만 나와도 부풀려서 기사를 쓰는지라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그리고 황실 내의 위상이 예전보다 굉장히 줄어든 것이 보인다. 우선 히사히토가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 키코 비가 아들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면도 보인다. 주간지에 따르면 히사히토가 담배(!)를 피운다거나, 키코 비가 뭐라고 하면 소리를 지른다고 한다. 또 카코 공주가 별거를 선택한 이야기도 나왔는데, 다름 아닌 키코 비가 '카코 공주가 히사히토가 아닌 아이코 공주를 지지한다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공주의 뺨을 때려서(!) 카코 공주가 집을 나왔다.'는 기사가 뜬 적도 있다. 더욱이 올 여름에는 궁내청에서 키코 비가 아키시노노미야 家의 행보나 여론전에 대해 키코 비가 개입하려는 것을 막기 위해 인사 배치를 새롭게 하려고 한다는 기사가 난 적도 있는 등[50] 기사의 내용을 보나 가족과의 관계를 보나 키코 비의 위세가 예전만 못하다.
일본 국민들도 알 것 다 아는 상황이고, 히사히토는 유일한 젊은 남성 황족에 실질적 황태손이기에 앞으로 아버지 후미히토를 제치고 황실의 주역으로 떠오를 터라 여자인 키코 비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다. 물론 히사히토가 결혼을 하고 며느리가 들어오면 암암리에 영향력을 행사하겠지만, 그녀가 바랬던 영향력만큼은 절대 아닐 것이다.[51]
더구나 히사히토는 은근히 나루히토 일가와 잘 지내고 있다. 주간지를 보면 키코 비에게 '마사코 황후가 친어머니였으면 좋겠다.'고 말해 키코 비가 '널 나만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말했다던가, 나루히토 덴노에게 심적 고충을 상담하는 등 역시 인품 좋은 집에 마음을 두는 내용이 나온다. 이것은 여태 나루히토 일가에 척을 쳤던 키코 비와 후미히토 입장에서는 그리 좋을 것이 아니다. 게다가 아이코 공주를 황실에 남기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정치권의 논의가 계속 진행 중이고[52] 아이코 공주의 인기도 여전히 좋은 지라 키코 비의 심중이 편해질 날이 언제 올지 까마득하다.
12. 결론
남편 후미히토와 더불어 평이 상당히 나쁘다 보니 잘 부각이 안 되지만, 종합적으로 냉정하게 평가해볼 때 키코 비는 보통 여인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남존여비가 극심할 정도로 보수적인 일본 황실에 자진해 시집오고, 아들을 낳으라는 압박과 남편의 바람 등 온갖 고통을 정신병 한 번 안 걸리고 버티면서 상당히 늦은 나이에 수상한 방식으로 남자아이인 히사히토를 낳은 걸 보면, 정신력이 엄청나게 강하지 않으면 버티기가 어렵다.둘째 왕자의 아내라 황실 등의 자녀 압박이 맏며느리이자 손윗동서인 마사코 황태자비에 비해 덜했고, 궁내청과 친한 남편 덕에 주간지에서도 우대를 받고 일찍 아이들을 낳아 천황 내외와 친했던 것이 잘 버티는 요건이었던 것 같지만, 정신력이 강한 건 부정하기 힘들다. 가정에 충실하고 아내와 딸에게 힘이 되어 준 나루히토와 달리, 후미히토가 평소 일가족에게 민폐만 많이 끼치고 권력 싸움에 일절 도움이 되지 않아서 자기가 부단히 노력해야만 했다는 것 등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황실에서 동궁과 수십 년 동안 권력투쟁을 벌이는 동안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는 후미히토는 그냥 형에 대한 자격지심때문에[53] 형에 대해서 온갖 난동만 부릴 뿐 실제로 제대로 한 게 없었다. 그저 무능하면서 권력욕만 많을 뿐. 반면에 좋은 의미는 절대 아니지만, 키코 비는 자신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남편 후미히토보다 몇 십 배 이상 뛰어난 정치 암투 실력을 보여주어서 수십 년 가량 황태자 일가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계속 두들겨패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황실 서열은 너무나도 높은 벽이었고, 황태자 일가에서도 크게 책잡힐 논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심하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견뎌냈다.[54] 결국 시아버지 아키히토 덴노의 생전퇴위라는 일본 헌법 창설 이래의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고, 그와 비슷한 시기에 자식들의 문제 등이 발생해 아키히토 덴노 부부의 신뢰를 잃으면서 결국 키코 비의 야망은 무너져버렸다.
이후 남편인 후미히토가 천황은 못되더라도 하다못해 아들의 즉위만이라도 성사시키기 위해서 혼자 열심히 뛰어다니며 노력하고 있다.
주변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아들의 계승에 협조를 구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은 인상적이지만 사실 해당 문제의 근본 원인들은 후미히토와 키코 비 본인의 문제로부터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갈 수록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이[55][56] 그저 상황이 악화될 뿐인 상황에 직면해 있다.
현재로선 단기간에 해결될 문제들이 절대 아닌지라, 상당 기간 동안 여러 문제들로 골치를 앓아야만 하는 키코 비는 이에 대한 불만을 일단 시종들에게 화풀이하는 것으로 해결하고 있다. 시어머니 미치코 상황후와 시아버지 아키히토 상황 부부의 사람보는 눈은 매우 정확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그 어느 왕조나 왕실에서도 명확한 근거없이 흠없는 적장자 세자/황태자를 폐위하고 일개 종친일 뿐인 차남 왕자를 그 자리에 세우는 일은 없다. 폐위당한 적장자 세자•황태자들의 행실은 후미히토와 유사했거나 그 이상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역사적 큰 줄기는 보지 못하거나 무시하면서 정치암투의 목적으로 정신과 환우들에 대한 비하성 발언(마사코 황후와 아이코 공주를 정신병자라 비꼬던 발언들)도 서슴지 않던 인물이 과연 한 국가를 대표하고 국민통합의 상징이 되는 황후의 자격이 있을까?
[1] 작은며느리라서, 큰며느리인 마사코 황태자비보다는 압력이 덜했다. 그런데도 키코 비부터가 출산 후 둘째도 딸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산부인과 의사에게 던진 첫 마디가 "아들을 낳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였다. 어머니가 신생아의 상태를 확인하는 대신 아들 낳는 법을 물어볼 정도였으니, 이때의 일본 황실의 구박이 얼마나 심했는지, 작은며느리가 이 정도라면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는 얼마나 부담을 느꼈을지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2] 후미히토&키코 비 부부는 엄청난 야심가였고 키코 비부터 자신이 원해서 황실에 시집 온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 후 황자를 낳아 궁내청과 여론, 그리고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후계를 확고히 하려 들었다. 후미히토 부부가 먼저 아들을 낳아 버리면 가뜩이나 엉망인 황태자 부부의 평판과 영향력이 더 망가질 것이 뻔하다. 때문에 친 황태자파였던 노리히토 친왕과 히사코 비는, 후미히토 부부가 황실 내 영향력을 키우지 못하도록 제동을 건 것이다.[3] 가쿠슈인은 본래 황족과 화족을 위해 세워진 관립학교였고, 2차대전 패전 이전에는 "황족과 화족이 다니는 학교는 가쿠슈인"이라고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패전 후로 이 법은 없어졌지만, 그래도 황족들은 모두 가쿠슈인에서 공부하는 것이 암묵의 룰이었다(해외유학 제외). 그러나 쓰구코 공주가 가쿠슈인여대와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를 중퇴하고 2008년 9월 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에 입학한 것을 시작으로, 황족들이 가쿠슈인 대신 다른 학교에 입학하는 사례들이 줄줄이 생겨났다.[4] 세츠코 비의 아버지 마츠다이라 츠네오(松平恒雄)는 외교관이었는데, 영국 런던에 있을 때 세츠코 비를 낳았다. 이후로도 세츠코 비는 중국, 미국 등 여러 외국에서 성장기를 보냈다.[5] 1993년부터 2001년까지 코단샤에서 연재한 동명의 만화에서 따왔다. 국내에서는 미소의 세상으로 더 유명한 그 만화다.[6] 당시 큰딸 마코 공주는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3학년, 작은딸 카코 공주는 가쿠슈인 초등과 6학년이었다.[7] 도쿄에 있는 산부인과ㆍ소아과 전문 병원. 아키히토 덴노의 막내 숙모 미카사노미야 유리코 비가 총재를 맡았던 사회복지법인 소속의 병원이다. 히사히토 친왕 외에도, 유리코 비의 막내 아들이자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 남동생인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세 딸 쓰구코 공주,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도 이 병원에서 태어났다. 히사히토 친왕이 아이쿠 병원에서 태어난 후, 아이쿠 병원에서 출산하려는 일본 부모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8] 태반이 산도를 막는 증상. 자세한 것은 전치태반 항목 참조. 제왕절개를 한 표면적인 이유는 전치태반 때문이지만, 사실은 사주팔자를 맞추기 위함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난 그 날이 '여자를 많이 거느리는 날'이라나 뭐라나(…) "짜 맞춘 느낌이 강하게 풍긴다"는 의견도 있다.[9] 키코 비가 부인과 질환이 심한 상태였고, 일본에서 그녀를 거쳐가지 않은 산부인과 의사가 없다는 소문도 있다. 때문에 차남 부부의 낙태설이나 후미히토 친왕의 문란한 여성관계 이야기가 더욱 신빙성있게 비추어지는 듯.[10] 카코 공주 출산 직후, 키코 비가 의사에게 "어떻게 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냐"고 물었다는 것만 봐도, 후미히토 부부는 애초에 야심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던듯 하다.[11] 항간에는, 조총련계 스파이가 가쿠슈인의 교직원이어서 차남 내외가 가쿠슈인을 피했다는 카더라도 있고, 히사히토 친왕은 도저히 가쿠슈인 유치원에 입학할 수 없을 정도로 성적이 낮아(…) 가쿠슈인에서 입학을 거부했다는 카더라도 있다.[12] 구로다 사야코,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는 가쿠슈인 유치원에 입학하기 전에 다른 유치원에도 다닌 적이 있다. 또한 쓰구코 공주, 센게 노리코, 모리야 아야코는 가쿠슈인 유치원에 다니지 않았다. 그러나 이 공주들 모두 초등학교는 가쿠슈인 초등과를 다녔다.[13] 일본에서는 4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므로.[14] 일본에서는 친인척 간에 성적을 비교하는 것이 심하다고 한다. 더구나 키코 비의 두 딸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는 성적이 좋지 않았고 이미 대학에 입학했기 때문에, 자녀들 중 아이코 공주와 성적 대결을 할 아이는 아들 히사히토밖에 없다.[15] 아이코 공주는 가쿠슈인 초등과 시절부터 상위권의 우수한 성적을 보였고, 이지메에 시달릴 때와 식이장애를 앓을 때도 열심히 공부하여 도쿄대학도 노릴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16] 카코 공주는 본래 에스컬레이터 식 진학으로 2013년 4월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교육학과에 입학했다. 교육학과는 2013년도에 신설된 학과로, 초등교사를 양성하는 학과이다. 그러나 1년 반쯤 다니다 자퇴하고, 2015년 4월 언니 마코 공주의 모교인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에 입학했다.[17] 수업 난이도(특히 영어)가 매우 높아, 신입생들도 캠퍼스의 낭만은커녕 죽어라고 공부만 하는 대학으로 유명하다. 도쿄대학보다는 훨씬 쳐지지만, 국제기독교대학은 편차치나 학교 평가 면에서도 가쿠슈인대학보다 항상 높게 랭크되는 명문대이다.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별로 높지 않은 듯 보이나, 일본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악명 높은 입학시험으로 유명하다.[18] 서류와 면접으로 합격 여부가 정해지는 전형이라고 한다. 최근 일본에서는 이 전형 때문에 수준 미달의 학생들이 명문대에 진학한다고 불만이 많다고 한다.[19]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가 정말 학업에 최소한의 뜻과 열정이 있었더라면, 가쿠슈인대학이나 가쿠슈인여자대학에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진학하여 열심히 다니든지, 아니면 자력(센터시험)으로 국제기독교대학에 입학했어야 했다. 두 공주는 황족이기 때문에 태어나면서부터 언론을 통해 일본 전역에 신상이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인인데, 이런 사람들이 서류와 면접으로 진학하는 전형을 선택해 명문대에 진학한다면 황족 특혜로 진학했다는 의혹과 비난을 피할 수 없다. 물론 그 성적으로 가쿠슈인대학이나 가쿠슈인여대에 진학하는 것도 황족 특혜이긴 한데, 그래도 원래 그쪽은 황족/화족 전용이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두 공주의 성적과 학업성취 정도가 원래 국제기독교대학 수준이었던 것도 아니고(…) 의혹과 비난을 받을 걸 알면서도 수준에 맞지 않는 대학에 입학했다는 것 자체가, 학업에 열정이 있는 모습과는 몹시 거리가 멀다. 학업에 뜻이 있는 사람이라면 토모히토 친왕의 큰딸 아키코 공주처럼 자력으로 진학하는 모습을 명예롭게 여기기 때문. 근데 이 집안은 조용히 가쿠슈인을 다녔으면 될 일을 의혹으로 만들었으니…[20] 키코 비와 마사코 황태자비를 비교하지 않더라도, 나루히토와 후미히토의 차이도 엄청나다. 후미히토의 경우, 대학입학 커트라인을 후미히토의 성적에 맞춰서 조정했다는 의혹이 있다. 반면 나루히토는 우수한 성적을 유지했으며,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 머튼 칼리지에 유학했고, 가쿠슈인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에사 석사학위도 받은 바 있다. 영국 유학 경험 덕분에 나루히토는 영어에도 능통한 편이며, 실제로도 아이코 공주는 부모의 영향 덕분에 영어가 꽤 유창하다고 한다. 반면 히사히토의 경우, 부모의 학력이나 경험이 많지 않아 더 정확히 말하면 아빠는 공부를 못하다 못해 거의 도시전설 수준이었다 학업성적이 그리 좋지 못하다는 소문이 돌고 있으며, 키코 비의 전력투구에도 불구하고 좋은 평판은 기대하기 힘들다.[21] 대통령 형이 놀러다니다 교통사고 내놓고 '동생은 신호등 통과시켜 주면서 나는 안 해주니까 사고 난 거'라고 징징대는 꼴을 상상해보자.[22] 히사히토 및 히사히토와 친한 아이들 몇 명을 선발, 함께 진학시키려는 듯하다.[23] 경호 등의 문제로 일반 아이들처럼 학원에 다니기에는 어려움이 많기 때문에, 개인 과외 선생님을 구해야 한다.[24] 커트라인이 전국 상위 0.62%라는 뜻이다.[25]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로 자주 언급되고 있지만, 예전처럼 기사의 주인공인 경우는 별로 없어졌다. 마사코 황태자비가 '장래의 황후'라는 주제로 이야기되는 것과 달리, 키코 비는 '차세대 천황을 기르는 어머니의 고충' 정도로만 묘사된다.[26] 일본 황실에서 정식으로 약혼 관계를 맺는 의식.[27] 아키히토 덴노의 양위 표명이나 2018년 2월 9일자 미치코 황후 관련 기사를 보면, 이 문제는 천황 부부가 아니라 궁내청과 이에 동조하는 우익 주간지가 부추겼다고 봐야 한다.[28] 키코 비는 결혼 전부터도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가쿠슈인 대학 신입생 시절 만난 후미히토가 왕자라는 것을 알게 되자, 그때부터 황실로 시집가기 위해 노력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키코 비/결혼 전 참조.[29] 키코 비의 입버릇이 '히사히토는 양 폐하의 목숨과 같다.'와 '직원 수가 적다', '돈이 없다'라고 한다. 첫 번째만 봐도 어떤 부담인지 알 수 있을 정도. 그리고 얼마 전 기사에, 히사히토가 어릴 때 정원에서 놀다가 돌에 턱을 부딪혀 꿰맨 적이 있었을 때도, 키코 비가 패닉에 빠져 난리가 났다는 이야기가 유명하다는 말이 쓰여 있었다.[30] 당시 기사에서 황실 관계자가 어쨌거나 "마사코 황태자비의 협조가 없으면 안 된다"라고 설명했다. 히사히토의 승계도 황실 회의로 못 박아 두긴 했지만, 아키히토의 양위 발표에 대한 일본 총리의 태도와 영향력을 고려하면 나루히토가 천황인 이상 승계가 어렵게 이루어 질 수 있다. 나루히토가 천황의 위치를 이용해 무남독녀를 황위에 오르도록 시도하는 것도 가능한데다, 지금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로 후미히토 일가가 황위를 잇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31] 지금만 해도 계승자가 나루히토, 후미히토, 히사히토 셋뿐인데, 나루히토 대신 후미히토를 황태자로 세웠다면 사실상 나루히토는 황실에서 쫓겨나는 것이나 다름없고, 계승자가 둘로 줄어드는 일이다. 처음 정해진대로 나루히토로 계속 간다고 해도, 계승자가 부족하긴 하지만, 어쨌든 숫자라도 하나 더 많고, 무엇보다 만약의 경우에 여계 천황이라는 생각해볼 방법이라도 있다. 이게 실현되면 아이코 공주를 더해서 1명 더 늘어날 수도 있고, 여러가지 논란이 있긴 하지만 마코 공주와 카코 공주도 보태볼 수 있다. 남성 후계자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루히토를 후미히토로 대체하는 것은 이런 모든 방책을 불가하게 만드는 것으로, 히사히토의 결혼과 출산 여부에 따라서 사실상 일본 황실의 혈통 단절을 부르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도박이며 이러한 논리는 여성 미야케 찬성론자들의 주요한 논리. 물론 우익들의 주장을 일정 부분 존중해서 구 황족이나 구 화족과 결혼하는 조건 등을 걸어두는 경우도 있다.[32] 바꿀 의사도 없었겠거니와, 일본 황족 구성을 볼 때 바꿀 수도 없다.[33] 미치코 황후가 시집 올 당시(1959년)에는 이미 화족 폐지(1947년 5월 3일)와 구황족의 황적이탈(1947년 10월 14일)이 벌어진 뒤였다. 다만, 구황족과 전 화족의 황실 내 영향력이 아직 꽤 막강할 시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황태자비는 황족 가문의 딸들 또는 화족 중에서도 고셋케라고 불리는 가문의 딸들 중에서 뽑는 것이 당연한 관행이었다. 때문에 아무리 재벌 딸이라 한들, 평민 출신인 쇼다 미치코가 황태자비가 되는 건 파격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미치코를 그냥 평민이라고 하기엔 상당히 뭐한데(…) 미치코는 대재벌 가문의 딸에, 어머니인 쇼다 후미코(正田富美子)는 옛 화족(백작)인 소에지마(副島) 가문의 딸이었다. 그런데도 평민이라고 지옥 같은 시집살이를 겪었다![34] 그래서 덕분에 히사히토에게 인공수정 및 성감별로 인한 장애가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었다. 미성년의 어린 황족들은 공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대신 매년 학교 운동회와 같은 행사 사진을 대중에게 공개하는데, 히사히토는 내내 운동회 사진을 공개하지 않다가 초등과 고학년 시절에 공 굴리기를 하는 사진을 공개했다. 문제는 이 종목은 사촌 누나 아이코 공주를 비롯한 다른 황족들이 가쿠슈인 유치원~초등과 저학년 시절에 했을 정도로 단순하고 난이도가 낮은, 초등과 고학년에게는 맞지 않는 종목이라는 것. 히사히토에 대한 사진이나 성적, 각종 정보들을 비공개 처리하고 학교 운동회 종목에까지 간섭을 하는 후미히토 부부의 유난이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35] 이 해 히사히토는 여름방학 동안 히로시마의 추모공원이라던가 여러 군데를 키코 비와 단 둘이서 다녔다. 키코 비가 제왕학을 공부시킨다고 데리고 다니는 것. 차라리 제왕학 공부할 시간에 국영수 위주로 공부를 더 시키는 게…[36] 지금까지 공개된 히사히토의 운동회 사진은 죄다 초등학교 저학년 혹은 유치원생들이 할 법한 종목들 뿐이라서 논란이 많다.[37] 왜냐하면 아키히토 덴노의 제왕학 원칙 중 하나가 바로 "일반 국민들에게 피해를 최소한으로 할 것"인데, 이걸 대놓고 어긴 것이다. 그러니 미치코 황후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작은며느리인 키코 비가 못 미덥게 보이는 건 당연지사.[38] 키코 비의 52세 생일[39] 키코 비는 두 공주들을 아주 철저하게 억압하기로 원체부터 악명이 높았다. 아이돌 팬클럽 활동 금지, 수영복 파티 금지, 마코 공주의 스키 동아리 사건 이후로는 동아리도 무기한 금지, 카코 공주가 하고 싶어하는 댄스 교습도 금지. 이런 억압 때문에 공주들과 갈등이 생긴다는 보도가 늘 흘러나왔었지만 두 공주(특히 마코 공주)들이 키코 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따랐기 때문에, 일본 국민들은 더더욱 이러한 일이 생길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 대외 활동을 적극적으로 통제하고 황족다운 모습을 강조해왔기 때문. 하지만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으로 인해 아키시노노미야 부부가 대외적으로 보이는 모습 혹은 언론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모습만 통제하고 사생활 부분에는 무관심해 황족으로 태어난 공주들을 황족답게 키운 것이 아니라 황족처럼 보이게 키워왔다는게 드러났다.[40] 일본 황실에서 상당한 구설수가 많아 별명이 망나니였던 토모히토 친왕조차도 이러한 원칙을 최대한 지키려고 했다. 유학을 가는 딸에게 "국민의 세금으로 공부하는 것이니 더더욱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그 결과 토모히토의 장녀 아키코 공주는 '여성 황족 최초의 박사'라는 타이틀을 자력으로 취득할 수 있었다.[41] 업계 최고 인력을 웃돈을 주고 데려와도, 키코 비의 히스테리를 견뎌내지 못하고 썰려나가는 덕분에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지출 중 직원 고용 및 유지에 드는 비용이 상당하다고 한다. 반면 나루히토 내외는 오래전부터 그 궁내청 직원들 사이에서도 '모시기는 참 좋은 분' '황족의 기품과 교양을 갖춘 분'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아키시노노미야와는 상반되는 분위기를 아주 꾸준히 보여주었다. 심지어는 마사코 황태자비가 언론과 궁내청에게 집단 린치를 당해 앓아눕고, 나루히토 황태자가 아내를 지키기 위해 '황실 내에 마사코의 경력과 인격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있다' 라고 폭탄 발언을 던졌을 때도, 아이코 공주가 학교에서의 폭력적인 이지메에 시달리며 등교 거부를 하던 시기에도 직원들 사이에서의 이 평판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루히토 내외에 대한 이런 긍정적인 평판은 내외의 무남독녀 외동딸 아이코 공주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부전여전, 모전여전.[42] 아키히토 덴노의 즉위 관련 특별전.[43] 과거 시종들 중 하나가 "키코 비가 주간지들을 항상 체크한다"고 말하면서 도망친 적이 있었다. 그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인터넷을 체크하는 것으로 보인다.[44] 마코 공주는 부모 중에서 가장 반발하는 키코 비를 설득해서 결혼을 승낙시키려는 속셈이 있을 것이다. 키코 비는 문제가 남편이 정식으로 황사가 되는 4월 이후에도 계속될 경우 2020년부터 다소 여유가 생기게 되는 나루히토 덴노에 의하여 자기네들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기에, 최대한 마코 공주 스스로 혼약을 파기하는 형식으로 이러한 여지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마코 공주를 설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45] 사실 이러한 것은 먼 방계 공주라면 그나마 가능하나, 직계 내지는 직계에 가까운 공주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가장 최근에 결혼한 직계 공주였던 고모 구로다 사야코만 하더라도 결혼 후에도 절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다는 걸 지근거리에서 보면서 자랐기에 잘 알면서도 이러한 생각을 품는 걸 봐서 어렸을 때부터 온갖 공무에 시달리고 부모님으로부터 엄청난 규제, 제약 등을 받아야 했다는 점의 연장선상인 것으로 보인다.[46] 애시당초 마코 공주는 결혼 지연 이후부터 부모님과 대화하는 건 오로지 공무 관련된 것뿐이며, 그 이외의 대화 요구에는 항의 차원에서 침묵을 지킨 채로 자리를 피해버린다.[47] 남편인 후미히토도 가쿠슈인이라면 진저리를 칠 정도로 싫어해 동창회에도 전혀 참석하지 않을 정도라는데, 이쪽은 아이코 공주에 비해 딸들이 푸대접 받았다고 생각하는 게 원인이 아니라 대학 입학 시기에 더 좋은 대학으로 부정입학(...) 하고 싶어했으나 감히 나루히토 황태자보다 더 좋은 대학에 갈 수는 없다는 제지를 받아 강제로 가쿠슈인대학을 다녀야 했다는 게 원인이라는 듯. 그러나 강제로 간 가쿠슈인도 성적 미달로 부정 입학을 했기 때문에 그 해에는 후미히토의 성적이 합격 커트라인이라 입학생이 많았다는 도시전설같은 소문까지 전해진다.[48] 일반 참하나 원유회 등에서 후미히토가 상식 밖의 행동을 해 찬물을 끼얹거나 언론이 슬쩍 농간을 부리는 일이 있기는 하나 예전처럼 위협적이지도 않다.[49] 그러나 확실히 걸러서 볼 필요는 있다. 미치코 상황후가 아이코 공주에게 어떤 식으로든 위해를 가한다는 것은 그녀의 인품상 잘 납득이 안 가며, 키코 비도 히사히토의 즉위를 원한다면 나루히토 덴노와 마사코 황후에게 잘 보여야 함에도 저렇게 행동하는 것은 평소 인성이 아무리 나빠도 지나치기 때문이다.[50] 요지는 아키시노노미야 家의 여론이 나쁜 이유가 키코 비가 개입하는 행보 때문이라는 것이다.[51]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는 히사히토의 의사가 중요하며, 그가 어머니에게 당한 것을 생각하면 순순히 말을 들을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히사히토가 덴노가 되더라도 예상되는 행보다.[52] 구황족의 남성을 양자로 입적하자는 논의가 한동안 뜨거웠던 적이 있었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아이코 공주에게 유리하다 못해 히사히토의 입지까지 위태롭게 만들 수 있는 안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53] 키코 비도 형님 마사코 황후에 대한 자격지심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마사코는 동궁 일가에 대한 인신공격과 근거없는 비난이 매일같이 쏟아지던 시절에도 황실 관계자에게서 '정말 행복한 사람은 마사코 황태자비'라는 평이 나왔을 정도로 믿음직한 남편에게서 전폭적인 지지와 존중, 애정, 보호를 받으며 생활했다. 키코 비도 손색없는 스펙을 지니고 있으나 마사코 황후는 결혼 전 손에 꼽히는 학벌과 배경, 능력을 갖춘 주목받던 재원이었다. 자기와 모든 면에서 다른 손위 동서에 대한 열등감이나 질투심이 동궁가 모녀에 대한 폄훼와 모욕 수준의 정치적 공격(마사코 황태자비와 아이코 공주를 정신병자라 비꼬았던 것 등)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박사학위 논란과 관련해 형님을 의식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기도 하니.[54] 나루히토 부부가 인고의 세월을 보낸 후 사람들에게 다시 재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수많은 논란 속에 사실상 근거없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계속해서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살아와서 책잡힐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컸던 마사코 황태자비의 공무 불참과 장기간 은둔조차도 마사코 황태자비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심신이 크게 쇠약해져서 불가피했던 것이였다.[55] 특히 가장 중요한 큰딸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자체가 사실상 해결되지 않고 계속해서 시간만 끌면서 코무로 케이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추가 보도 등이 나옴에 따라서 국민들의 반감만 키우고 있다.[56]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가족들 중 이를 어느정도 중재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작은딸 카코 공주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어머니 키코 비와 상당히 대립 중이다. 키코 비로서 이래저래 안좋은 상황이 겹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