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 부문으로는 1989 스케이트 아메리카 은메달, 1989 NHK 트로피 4위를 기록했다. 1990 전미선수권에서는 2연패를 달성하고 1990 세계선수권에서는 5위를 기록했다.
싱글 부문으로는 1989 스케이트 캐나다 금메달, 1989 NHK 트로피 은메달을 획득했다. 1990 전미선수권에서도 은메달을 획득했고 세계선수권에서는 4위에 올랐다. 시즌이 끝난 이후로는 싱글에만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 결정은 매우 탁월했는데, 싱글에만 집중하기 시작하자 수많은 대회에서 메달을 휩쓸었다.
올림픽에서는 이토 미도리와 맞대결을 펼쳐 금메달을 땄다. 당시 여자 싱글에서는 초고난도 기술인 트리플 악셀을 자랑하는 이토 미도리와 토냐 하딩이 있었지만, 우승한 건 야마구치였다. 안정적인 착지와 기술, 탁월한 예술성으로 쇼트와 프리에서 차례로 1위를 차지한 결과였다.[7] 이는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에서 주니어 세계선수권 우승자가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첫 사례이다.
당시 인터뷰를 보면 야마구치 본인도 트리플 악셀을 구사하는 경쟁자들에게 위협을 느끼긴 했다고 언급했다. 이토가 1989년 여자 선수 최초로 트리플 악셀을 성공시키면서 피겨 스케이팅의 판도를 바꿔놓는 수준의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야마구치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트리플 악셀을 연습했다.[8] 다만 트리플 악셀이 노력만으로 성공시키기에는 워낙 힘든 기술이기에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준까지는 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영상에서도 스텝 아웃이 되는 등 어려움을 겪는 모습이 보여졌다.
그럼에도 워낙 착지가 훌륭하고, 전체적으로 약점[9]이 없는 것이 강점이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였기에 자신의 대표 강점인 예술성과 함께 다른 고난도 기술들을 준비했고, 대표적인 것이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의 컴비네이션이었다.
쇼트 경기를 성공적으로 끝내면서 1위에 올랐다. 프리 경기에서는 초반의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 컴비네이션을 성공시키면서 이대로 클린에 성공하나 싶던 찰나에 후반의 트리플 룹 점프에서 손을 짚고, 트리플 살코를 더블로 수행하면서 뒤에 이어지는 선수들의 경기에 메달 색깔이 결정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이토[10]도 트리플 점프를 더블로 다운 그레이드시키고, 트리플 악셀 점프에서 넘어지는 등의 실수를 보였다. 다만 후반에 다시 시도하여 성공하기는 했다. 이로써 야마구치는 쇼트와 프리를 모두 1위로 마무리하면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그녀의 프리 프로그램이였던 <말라게냐>는 현재까지도 수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야마구치의 올림픽 우승은 김연아와 유사점이 있는데, 둘 다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우승을 하고 직후에 열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했다. 또한 쇼트와 프리 모두 1위, 프리 1위이기도 했다. 야마구치 이후로 올림픽 여자 싱글에서는 쇼트에서 1위를 하면 우승을 하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생겼는데[11] 이를 깬 것이 김연아이다. 또한 두 선수 모두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을 성공시키면서 트리플악셀을 이겼다.[12]1992 세계선수권에서도 우승했고, 이 대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당시 일본 언론에서는 자신과 일본의 관계를 강조하려고 애를 썼지만, 본인은 인터뷰에서 "나는 미국인일 뿐"이라고 답해서 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동시대 수리야 보날리, 이토 미도리, 천루, 토냐 하딩 등과 더불어 여자 싱글의 기술 상향화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토나 하딩과 같이 트리플 악셀을 뛰는 선수들에 가려져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트리플 러츠(6점)-트리플 토룹(4점)은 2010년 채점제도에서 기초점만 10점에 달하는 고난도 기술이다. 그녀를 비롯해 1990년대 초반의 스타 선수들이 은퇴한 뒤로 여자 피겨계는 기술 측면보다는 예술성과 컨시를 중요시하던 때여서, 굳이 고난도 3-3 콤비네이션을 시도하는 선수들이 많지는 않았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때는 타라 리핀스키가 트리플 룹+트리플 룹 점프(10점)와 트리플 토룹-트리플 살코를 성공시켜 3-3을 시도하지 않은 미셸 콴을 제치고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또한 (트리플 악셀이 제외된) 3-3 콤비네이션 점프 중 최고 난이도인 트리플 러츠-트리플 룹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싱글 우승자인 알리나 자기토바가 성공시켜 그녀를 1위에 올려놓았다. 올림픽에서의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룹 콤비네이션은 2010년 김연아까지 와서도 올림픽에서 성공시킨 선수는 사례가 드물다.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때는 아라카와 시즈카가 쇼트에서,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때는 키미 마이즈너가 쇼트에서 성공했다. 물론 올림픽 쇼트와 프리에서 모두 성공한 선수는 김연아가 최초다.
또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자신의 네메시스 점프를 잘 시도하지 않는 반면 그녀는 약점인 데에도 불구하고 트리플 살코를 프로그램에 넣는다거나, 트리플 악셀을 연마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는 등[13]의 도전정신을 보여 진정으로 여자 피겨 스케이팅의 선구자 중 하나로 꼽힐 만하다.[14]
올림픽에서 우승한 지 얼마 안 되어 프로로 전향했고, 2000년대 초에 은퇴했다. 프로 경기에서도 수많은 우승을 거두면서 성공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만약 그녀가 아마추어 선수 생활을 계속했다면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 우승하여 올림픽 2연패를 달성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의견이 있을 정도의[15] 실력이 오랜 기간 유지되었다. 은퇴한 이후인 2002년에도 무려 30대의 나이에 아이스 쇼에서 트리플 점프를 선보이는 등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것을 몸소 증명했다.
아시아계 최초[16]의 올림픽 피겨 스케이팅 여자 싱글 챔피언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수상하자 아시아계 미국인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시아계 외의 미국인에게 존경받는 선수이며, 올림픽에서의 성공뿐만 아니라 이후의 공개 활동과 사생활에서 모두 모범적인 모습으로 좋은 평판을 받았다. 또한 백인들이 판을 치던[17] 피겨 스케이팅에서 이토 미도리와 함께 아시아계 선수의 활약을 이끌었고, 이후 미셸 콴, 천루와 김연아 등 세계 정상급의 스케이터 중 아시아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는 선구자 역할을 해낸 셈이다.
선수 생활을 끝낸 이후 댄싱 위드 더 스타 프로그램에 출연해 우승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TV 프로그램 출연 & 동계올림픽 해설 등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는 자국 내 아시아계 미국인 피겨 스케이팅 선수들의 멘토 역할을 해주고 있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여자 싱글 경기가 끝나고 알리사 리우와 카렌 첸의 인스타그램에도 격려의 말이 담긴 댓글을 달아주기도 했다.
일본계 미국인 2세[18]인 치과의사 아버지 짐 야마구치와 의료 비서 어머니 캐롤 도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증조부 조지 A.도이는 사가현 출신 일본계 미국인 1세대이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육군의 일원으로서 독일과 프랑스에서 싸웠다. 조부 타츠시 야마구치는 와카야마현 출신이며 1899년 하와이로 이주한 일본계 미국인 1세대다. 외증조부와 마찬가지로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으며 본인도 이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조부모는 미국이 진주만 공습 직후에 실시한 일본인 격리 정책으로 수용소 생활을 했었다.
[1] 유년 시절 캘리포니아 주 프리몬트에서 성장했다.[2] 프리몬트에 위치한 고등학교이며 시에서 세번째로 큰 규모의 학교이다. 1학년과 2학년은 훈련으로 인해 홈스쿨링을 했다.[3] 당시 코치 크리스티 네스가 거주하는 곳과 가까운 곳에 있는 학교를 선택해서 다녔다.[4]1996 세계선수권 남자 싱글 동메달리스트이다.[5]미국의 前 아이스하키 선수이다.[6] 2000년 7월 8일 결혼-현재[7] 이토 미도리의 트리플 악셀 때문에 둘의 구도가 기술 vs 예술이었지만 크리스티 야마구치가 프리에서 선보인 트리플 러츠-트리플 토 역시 상당히 고난도 컴비네이션 점프이며, 당시 기준으로 깔끔하게 수행했다.[8] 이를 담은 연습 영상도 남아 있다.[9] 다만 트리플 살코가 그녀의 네메시스 점프였고, 실전에서도 성공률이 비교적 낮았다. 올림픽에서도 트리플이었던 점프를 더블로 수행했다. 트리플 살코를 성공시킨 대표적인 경기가 1992 전미선수권이다.[10] 다만 미도리는 쇼트가 4위였기 때문에 크리스티가 3위로 떨어지지 않는 한 프리에서 1위해도 금메달을 차지할 수 없었다. 야마구치의 입장에서는 케리건이 변수였다.[11]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쇼트 1위 낸시 케리건, 2위 옥사나 바이울 / 프리 1위 옥사나 바이울(금), 2위 낸시 케리건(은)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쇼트 1위 미셸 콴, 2위 타라 리핀스키 / 프리 1위 타라 리핀스키(금), 2위 미셸 콴(은)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쇼트 1위 미셸 콴, 2위 이리나 슬루츠카야 / 프리 1위 사라 휴즈(금), 2위 이리나 슬루츠카야(은). 미셸 콴은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 쇼트 1위 사샤 코헨, 2위 이리나 슬루츠카야 / 프리 1위 아라카와 시즈카(금), 2위 사샤 코헨(은)[12] 다만 야마구치의 러츠는 구채점제 선수 중에서는 엣지가 불분명한 편에 속한다. 동시대 천루, 옥사나 바이울, 토냐 하딩은 정확하다.[13]김연아도 트리플 악셀을 열심히 연습한 바가 있다. 굳이 필요성을 없어서 3-3 등 다양한 고난도 기술을 정말 안정성과 정확성을 수행하는 데 주력했다.[14] 물론 안정적인 프로그램을 선보여 득점을 해야하는 피겨 스케이팅 경기의 특성 상 약점인 점프를 빼는 것은 문제점이 되지 않는다. 아사다 마오, 안도 미키 등 여러 선수가 엣지 문제로 나중에는 실전에서는 잘 시도하지 않았다. 야마구치가 이 부분에서 높게 평가받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점프를 구사하려는 그녀의 노력과 도전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15] 그런데 이건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라이벌인 이토 미도리에 대해서도 나오는 평가다.[16] 아시아 '국적'으로 피겨 스케이팅 올림픽 금메달을 수상한 남녀 첫 사례는 일본의 아라카와 시즈카와 하뉴 유즈루이다.[17] 출신 국가나 인종에 기대어 과분하게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은 현재도 피겨 스케이팅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된다.[18] 일본 태생 이민자 혹은 타국에서 태어난 이들의 자녀 및 후손들을 뜻하는 Nisei(二世)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