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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0:00:13

퀴어문화축제/노출 부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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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통념과 불쾌감 문제
2.1. 불쾌감도 교묘하게 포장된 혐오다?2.2. 성 상품화 이중잣대 논란2.3. 호모포비아들 날뛰니까 얘기하지 말자?2.4. 처음부터 사회의 인정을 바라고 하는 축제가 아니다?2.5. 소수자에게만 세련된 전략을 요구한다?
3. 노출의 효과성
3.1. 역사적 맥락의 부재3.2. 뜬금없는 노출과 전후맥락의 부재로 인한 악영향3.3. 선의의 피해자들3.4. 잠재적 지원군을 걷어차다3.5. 반복하면 마침내 수용될 것이다?
4. 기타 논점들
4.1. 표현의 자유 논란4.2. 사회규범과 윤리는 가해자들의 억압일 뿐이다?
5. 법률적 해석6. 부스, 피켓 논란
6.1.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의 반대의견

1. 개요

2015년 5월경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등지에서 퀴어퍼레이드의 일부 참가자의 노출 정도가 일반인이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과도하다는 비판이 있었다. 행사 반대세력 외에 성소수자 단체 내에서도 "굳이 그런 옷을 입었어야 했느냐"며 일반인의 부정적 시각을 우려하는 반응이 있었음이 퀴어축제 준비위원 인터뷰를 통해 확인되었다.

퀴어문화축제의 노출 부정론은 크게 다음과 같다.

2. 통념과 불쾌감 문제

2.1. 불쾌감도 교묘하게 포장된 혐오다?

노출에 대해 불쾌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그것도 교묘하게 포장된 호모포비아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꼭 호모포비아적인 동기에서 노출을 불쾌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다. 2003년 2월 20일 오후 6시 북괴 김정일은 남침한다 사건, 2005년 생방송 음악캠프 알몸노출 사건과 2006년 월드컵 당시의 똥습녀 사건은 그들이 동성애자였기 때문에 그렇게 비난받았을까? 물론 어떤 사람들은 호모포비아적인 동기 때문에 노출을 불쾌해할 수도 있고, 이를 이용해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불쾌해하는 사람들이 호모포비아라는 것은 아니다.

짧게 말하자면, 그들이 "게이라서" 노출이 눈살 찌푸려진다는 게 아니고, 그들이 "노출했기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진다는 것이다. 남녀를 막론하고, 이성애/동성애를 막론하고, 다수/소수를 막론하고 노출은 대중의 지탄거리가 된다. 설령 배타적 이성애자 남성들끼리 모여서 동성애에 대한 혐오발언을 하는 시위를 하는데 그들이 퀴어문화축제처럼 옷을 벗고 다녔다면, 그들 역시 메시지와는 무관하게 욕을 먹었을 것이다. 예컨대 동성애자에 대해 부정적인 사람들이라도, "나도 게이를 싫어하는데 옷 벗는 건 문제가 있다." 라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마찬가지로, 퀴어문화축제의 경우는 "나도 성 소수자를 존중하지만 옷 벗는 건 문제가 있다." 라는 반응이 나왔을 뿐이다.

즉, 노출 퍼포먼스의 의도와 노출 퍼포먼스 그 자체는 완벽하게 분리되어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스탠스가 불가능하고, 노출을 꺼리니 동성애자에 대해서도 감정이 좋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동성애자에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큰 관심을 상시 가진 사람들이 극히 소수이고, 아무런 감정이 없는 사람들이 다수일 수밖에 없는데, 이런 사람들이 당장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다.동성애에 상당히 우호적이던 고대 그리스에서도, 광장에서 성적행위를 하던 디오게네스는 미친 놈 취급을 받았다

긍정론 문서에서는 사회통념이 자기 불쾌감, 혐오감정을 있어보이게 포장한 것 뿐이며, 노출이 불편하다는 사람들의 의도가 의심스럽다고 서술하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노출 긍정자들이 말하는 자기긍정, 저항이라는 키워드 역시 대중을 상대로 자기 성벽을 해소하기 위한 저열한 욕구를 있어보이는 말로 포장시킨 것뿐이라 의도를 의심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실제 그렇다는 주장이 아니라, 퀴어 퍼레이드의 노출의 의도를 직관적으로 믿어주길 바란다면, 그만큼 일반인들이 느끼는 불쾌감 역시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타인의 불만은 본인이 말하지도 않은 혐오나 속심이 숨겨져 있을 것이라 의심하면서, 본인들의 의도는 말한 그대로만 받아들여 달라 주장하는 것은 사회문제의 토론은 고사하고 대화의 기본조차 되어있지 않은 자세이다.

2.2. 성 상품화 이중잣대 논란

간혹 "길거리에 널린 19금 광고들과 대중가요 걸그룹들의 온갖 적나라한 퍼포먼스에는 불쾌해하지 않으면서, 왜 우리 노출에만 유독 이렇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가? 우리가 성 소수자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와 같은 반론이 나오기도 하는데, 공연히 성 상품화 이슈를 끌어들여서 어떻게든 호모포비아 프레임을 씌우려는 시도다. 퀴어퍼레이드 관련 논란에는 이러한 "호모포비아 독 풀기" 문제가 놀랍도록 만연해 있다. 물론 지나친 성 상품화의 물결은 분명히 올바르지 못하고, 이에 대해서는 이미 사회적으로 자성도 많이 이루어져 있는 상태이다.

흔히 "비판하지 않는다" 고 말하는데,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셈이다. 웹 페이지나 학술자료를 가지고 검색을 잠깐만 해 봐도 아이돌들의 성적인 무대, 노출이 심한 광고에 대해 우려하거나 분석하는 수많은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다. 심지어 성 상품화를 비판하는 자료들 중 상당수는 그들이 그렇게나 혐오하는 특정 종교 신자들이 생산한 자료다.

게다가 19금을 좋아하면서 퀴어노출을 싫어하는 것이 모순이라고는 할 수 없다. 포르노나 야한 퍼포먼스들은 이런 것을 원하는 관객들에게 보여주며 대상의 페티시를 자극한다. 게다가 이런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몸을 아름답게 가꾸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퀴어축제의 노출은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며 대중적인 미적감각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19금 좋아하면서 퀴어노출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성소수자인 것과 상관없이 모델도 아닌 이성애자 남성이 노출을 할 경우에도 충분히 불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에 깊게 파고든다면 모델이나 몸의 아름다움 자체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몸매가 좋은 사람의 노출은 상대적으로 호감을 살지 모르나, 누구나가 어느 상황에나 좋아하지는 않는다. 본인이 원해서 본 포르노와 타인이 강제로 노출한 나체를 같은 선상에 둔다면 인터넷에서 남성의 나체를 검색해 본 적이 있는 여성은 모두 바바리맨을 고소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가? 또는 몸을 아름답게 가꾼 남성이라면 법적으로 허가받은 바바리맨이 될 수 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1]

사람들이 모델이나 아이돌의 노출에 거부감을 안 갖는 것은 그들이 미적으로 가꿔진 몸을 하고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한 상품에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들은 그러한 역할을 직업적으로 맡기로 사회적인 합의가 이루어진 상태이며, 또한 소비자에게 친숙한 공인이기도 하다. 또한 공공에 드러나는 광고나 퍼포먼스가 아닌, 포르노같은 적나라한 성 상품의 소비는 개인의 공간에서 원하는 시간에 이루어지게 된다. 보통 어느 선을 넘은 노출의 선이 되면 광고를 비롯한 공공장소에서의 공개는 법적으로 금지되며, 이에 따라 개개인이 그것을 소비할지 말지 결정하고 준비할 자유가 생기기 때문이다.[2] 그러한 사실들이 어우러져 여타 성 상품화나 포르노에는 대중이 불쾌감을 가지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퀴어문화축제에서의 노출은 이 중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이들은 대중에게 친숙한 공인이 아니라 난생 처음 보는 개개인들이고, 그러한 상품화를 업으로 삼는 사람도 아니며, 어떠한 사회적 합의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길을 지나는 사람들은 어떠한 선택의 여지도 없이 그들의 노출을 보아야 한다. 설사 퀴어문화축제에 몸매를 가꾼 사람들을 엄선해서 노출을 시킨다 하더라도 여전히 문제가 사라지지 않을 이유이다.

2.3. 호모포비아들 날뛰니까 얘기하지 말자?

또한 이와 관련하여 "개인이 불쾌해할 수 있음은 인정하나, 호모포비아들이 이를 자기네 혐오의 근거로 쓸 수 있으니 불쾌감의 표현은 자제해 달라" 고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정말로 축제 측이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면, 이 축제는 쉽게 말해서 자폭이다. 호모포비아들은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면 종자를 말리려 들고, 동성애가 후천적이라면 치료시키려고 드는 양반들이다. 일반 대중이 불쾌감을 표출하지 않아도, 노출했다는 사실만으로 축제는 그들의 매의 눈에 걸려들어서 좋은 먹잇감이 되는 거다. 그렇게 자기들이 사회적으로 불리하다면, 그렇게 호모포비아들을 조심해야 한다면, 그냥 애초에 노출을 하지 않았으면 되는 일이 아닐까?[3]

또한 이는 넓게 보면 일종의 진영논리다. "우리의 적들이 악용할 수 있으니 이런 얘기는 다시는 꺼내지도 말라" 는 것은, 심지어는 정당 지도부 회의에서도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오가는 흔한 마법의 말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 정당을, 그 집단을, 그 정체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아끼는 사람은, 설령 적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고 욕을 먹더라도 용기를 내어 비판할 수 있다. 다수의 횡포가 아무리 심하다지만, 그걸 빌미로 소수의 비판점이 면책될 수도 없는 일이다.

2.4. 처음부터 사회의 인정을 바라고 하는 축제가 아니다?

퀴어문화축제가 사회적 논란이 되자 찬성론자들은 "퀴어(queer)란 본디 사회의 일상규범과 일반적 관점에 비추어 이상하고 기묘해 보이는 것을 의미하며, 우리의 문화축제는 그러한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일 뿐" 이라고 해명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다양성을 참아 넘길 수 없다면 그것이야말로 교묘하게 가식적으로 포장한 또 다른 포비아일 뿐이며, 대놓고 싫다고 말하는 것보다도 더욱 역겨운 반응이다" 고 분개하고, 누가 당신들에게 반듯함과 문란함을 구분할 권리를 주었느냐고도 되묻곤 한다.

이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너희들 그렇게 해서 어디 사회적으로 공감이나 받겠니?" 라고 물었을 때 "됐거든, 우린 너희 같잖은 인정이나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너희들 기분 나쁘라고 축제하는 거야. 내년에는 더 기분 나빴으면 좋겠다!" 라고 대답하게 되면 건설적인 대화는 거기서 끝이다. 이를 통해 무엇이 변화될 수 있는가? 탈동성애 운동가들이 자기네들 운동의 문제점을 깨닫고 화합의 자리로 나올 수 있는가? 동성애에 대해 별 생각이 없던 사람들이 그들의 진정한 모습에 대해 개방적인 태도로 수용할 준비를 할 수 있는가? 호모포비아들이 그들이 괜한 세기말적 두려움(…)에 빠져 있었음을 뒤늦게나마 인정할 수 있겠는가? 동성애를 변태라고 생각하는 편견에 빠져있던 사람들이 '아, 저들도 나와 별 차이 없는 그저 조금 다를 뿐인 평범한 사람들이었구나'라고 깨달을 확률과 '쟤네들은 역시, 변태성욕자일 뿐만 아니라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걸 오히려 좋아하는 민폐쟁이에 사회악이었구나! 저런 재앙덩어리들은 역시 없애버려야 해!'라고 잘못된 편견을 고착화할 확률, 어느 쪽이 더 높겠는가. 기대되는 효과는 단 하나다. 성 소수자 운동가들로 구성된 소수집단이 극화(polarized)된 사회배척에 빠져서 소위 "주류" 사회계층과의 교류를 더욱 축소하는 것뿐이다. "다름" 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를 바로잡기는커녕, 그 사회와 소수집단 간의 상호 반감을 극대화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둘째, 소수자운동에 있어서 일반 대중(mass)의 역할을 지나치게 무시한 일부 선각자들의 도덕적 우월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다.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다름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다수 대중들은 배척시키고, 다름을 이해하는 소수의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그들만의 축제를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꼴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회운동이나 사회적 제도의 변화를 이끄는 데 있어서, 가장 쉬운 것은 이해관계자 및 정체성이 동일시된 집단[4]의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쉬운 것이 그 주제에 평소 많은 관심이 있던 사람들[5]의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그 주제에 관련하여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전문가 집단[6]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은 그 주제에 관심도 없고 열의도 없는 다수의 대중[7]의 지지를 (어떤 식으로든) 확보하는 것인데, 이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그 운동의 목표가 달성될 가능성이 비약적으로 상승한다.[8] 실제로 역사상의 많은 혁명이나 진보들을 보면 일반 대중들에게 먹힐 만한 호소를 함으로써 크게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하거나 작게는 그들의 암묵적 승인을 구해내는 데 성공했다. 역사 속에는 이들의 협조와 승인을 구하지 못해 "우매한 군중, 저열한 대중" 을 원망하며 스러져 간 선각자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물론 퀴어문화축제가 그렇게까지 거창한 것이라고 말하기는 살짝 어렵지만, 아무튼 요지는 모두에게 먹힐 수 있는 이야기를 하든지 아니면 상징(symbol) 싸움에서 승리하든지 해야 하는데, 이런 대중적 여론을 도외시하면[9] 안 된다는 것이다. 사회의 인정을 얻어내는 것이 최종목적은 아닐지라도,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중간단계 정도는 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성소수자자 인권 운동의 많은 부분이 "알고보면 성소수자도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만 다를 뿐[10] 모든 것이 이성애자와 같습니다" 와 같은 홍보를 통해 이루어져 왔는데 무분별하거나 과도한 노출은 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즉, 운동 자체가 일관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본질적으로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에 대한 담론과 퀴어학에 대한 담론이 서로 약간 맥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 무엇이 방정한 몸가짐이고 무엇이 퇴폐적이고 음란한 것인가에 대한 합의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물론 "동성애자들은 음란하다" 는 호모포비아들의 편견에 대처하기에는 좋지만, 성적 지향, 성별 정체성만 다를 뿐이지 역시나 평범한 사회인으로서 살고 싶어하는 성 소수자들에 대해 적절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분명히, 퀴어학은 기존에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평범함" 의 의미와 도덕적 정당성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했다는 데에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성 소수자 운동과 엄밀하게 구분되면서도 발맞추어 가며 진행해야 할 논점이다. 퀴어문화축제에 적잖은 성 소수자들이 불쾌해했던 이유는, (국내에 퀴어 개념이 제대로 홍보되지도 못한 시점에서) 평범하게 사회규범을 지키며 살고자 했던 성 소수자들이 축제의 "퀴어" 로서의 의의를 납득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다.

넷째, 이들은 퇴폐와 음란에 대한 기준을 개인이 정하고 요구하는 건 오만한 처사이며[11] 자신들은 얼마든지 그 "자의적인" 기준을 넘나들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조금 이상한 반론이다. 물론, 개인이 함부로 퇴폐와 음란에 대한 기준을 정할 수는 없으며, 그것이 특정 종교적 교리에 의해 뒷받침된다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대한민국은 신정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실 이 기준은 개인이 마음대로 정한 게 아니라 그 개인이 있기 이전의 사회가 정한 것이었다. 개인이 가진 퇴폐와 음란의 기준은 사회화를 통해 학교에서 학습된 것이다. 다시 말해, 개인이 오만한 게 아니라, 부모님유치원 선생님과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그렇게 배웠기 때문에 그들도 그러한 사회적 합의를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행여 바지를 벗어내리기라도 하면 "아이구 챙피해! 아이구 부끄러워!" 하고 부모가 호들갑을 떨면서 혼내는 것은 개인의 평생에 있어 생각보다 강력하다. 물론 그 부모 역시 그들의 부모로부터 그렇게 배워 온 것이다. 따라서 특정 개인에게 그러한 도덕적 판단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부당한 것이다. 더 나은 방법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적절한 절차를 통해 참여할 수 있는, 사회규범을 개선하기 위한 국민적 숙고와 고민을 제안하는 것이다.

2.5. 소수자에게만 세련된 전략을 요구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이번에는 "우리에게 그렇게나 세련되고 우아한 소통전략을 요구하는 것만큼, 당신들도 세련되고 우아하게 불쾌감을 '표시' 해 보시지?" 같은 퉁명스러운 반응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어느 쪽이든 간에 성숙한 태도는 필요하다. 그러나 발가벗은 몸을 보고 비명을 지르는 행인들[12]에게 함부로 가운데손가락을 치켜드는 축제 측에서 먼저 꺼낼 말은 아니다. "우리는 억압받아 왔어, 고통받아 왔어, 배척당해 왔어, 그러니까 이렇게 해도 돼" 라는 마인드셋을 놓지 않기 때문에 대중의 놀라는 반응에 도리어 적개심을 드러내는 것이고, 신중한 우려의 목소리까지도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사실 이 전략은 메갈리아워마드의 일베가 하는 짓을 모방한 미러링전략과 다를 바가 없다. 설사 성소수자들의 저 말이 사실이라도, 호모포비아처럼, 일베의 패악질을 따라해 사실상 여성단체와 트위터를 뺀 여론에서 일베충과 같은 취급을 받는 메갈리아, 워마드가 듣는 소리인 "그놈이 그놈."이라는 소리만 듣게될 것이다.

그리고 세련된 전략이 절실하게 필요한 쪽은 당연히 소수자이다. 다수자는 기존의 방식으로도 우세적인 상황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전쟁은 모든 조건이 같다면 더 많은 양의 전력을 가진 쪽이 승리한다. 적은 병력을 가진 쪽은 그래서 질적인 면을 개선하는 것 이외엔 방법이 없다. 알렉산더 대왕, 율리우스 카이사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순신 같은 명장들이 적은 병력으로 적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도구, 전략, 전술 등의 영역에서 적보다 탁월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이 이성애자와 동일한 수준의 전략 밖에 사용할 수 없다면 결과는 당연히 필패이다. 더 많은 세련됨을 요구받는건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불리한 상황을 냉정하게 인식하고 이를 분석하고 극복을 위한 답을 찾는 것을 거부하는 집단에게 미래는 없다.

퀴어축제는 이성애자 중심의 사회에서 동성애자들이 자신들의 메시지를 전하고 접점을 찾으려는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본질적으로 프로파간다브랜드 홍보 마케팅과 다르지 않다. 상대에게 자신에 대한 이미지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에 대한 전략은 당연히 세련된 관점에서 만들어져야 하고 다루는 가치와 이미지들의 정교한 조작을 통해 자신들의 이미지를 긍정적인 요소들에 가까이 놓고 자신들의 반대편에 무엇을 놓을지를 결정하여 그러한 집단이나 가치를 자신들보다 열등한 것으로 만드는 스토리텔링이 필요해진다.

이를테면 소수자 마케팅의 대표주자인 애플1984 광고를 통해 자신들의 대척점에 거대기업이 존재하는 것 처럼 가정하고 이를 배척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둘의 가치는 역전된다. Think Different 광고에서는 자신들의 이미지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틴 루터 킹, 존 레논과 같은 위대한 아웃사이더들의 옆으로 갖다놓는 가치 조작을 한다. 이 두 기조가 현재까지 (실제로는 기업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던 간에) 애플의 브랜딩을 정의하는 축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퀴어 축제 문제는 어떤 이미지를 동성애자의 옆으로 가져오고 있으며 무엇과 대척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동성애자의 메시지에 설득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전략은 적어도 지금보다는 세련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고 볼 수 있다.

3. 노출의 효과성

3.1. 역사적 맥락의 부재

퀴어축제의 원조인 미국의 퀴어퍼레이드는 스톤월 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동성애자 및 성 소수자를 법적, 물리적으로 억압하던 당시 서구 사회의 파생물이다. 성 소수자들에 대한 적극적인 탄압과 인권유린에 대항하여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서구에서는 크리스트교가 문화 깊숙히 스며들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영향은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감을 정당화할 명분으로 작용했으며, 여기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매카시즘까지 사회 안정을 기미로 성 소수자들, 특히 동성애자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이렇게 '교정당하느냐 탄압당하느냐'의 갈래길에 선 성 소수자들은 스톤월 항쟁을 기점으로 본인이 화려하고 노골적인 퍼포먼스를 공개적으로 벌여서 사회의 편견에 해당하는 모습을 재현함으로서 일종의 카운터 펀치를 날리고, 폭력적 공권력을 대놓고 조롱한다는 의미가 내재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와 드랙에 기반한 프라이드 퍼레이드에는 역사적이고 사회문화적인 맥락이 충분히 내포되어 있다.

반면에 한국 사회에는 서구에서 벌어진 것처럼 법적, 물리적으로 성 소수자가 탄압받았던 일 자체는 거의 없었다. 다른 나라의 사회가 그랬듯이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무지와 막연한 혐오감이 퍼져 있었지만, 기독교 세력이 지속적으로 성 소수자를 공격한 것을 제외하면 성 소수자 탄압에 공권력이 개입한 적은 없었기에 항쟁 또한 벌어지지 않았다.[13]

그러나 2000년대부터 인권이라는 주제가 사회적으로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홍석천하리수에 의해 성 소수자라는 개념이 알음알음 알려지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성 소수자', 특히 '동성애자'라는 개념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동성애자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것. 하필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시리즈에 등장하는 과장된 성 소수자 캐릭터들, 붕탁물, 홍콩행 게이바와 같은 문화 매체들이 인기를 끌기까지 했다.[14] 그렇다 보니 게이/오해, 레즈비언/오해 항목에 언급된 것과 같은 오해나 편견이 대중들 사이에 새롭게 자리잡았다. 물론 여기에도 공권력은 개입하지 않았으며, 스톤월 항쟁 당시의 상황과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다.

2000년대 이전의 상황 역시 여전히 고려해 볼 필요가 있는데, 우리나라 역시 개신교 계열의 종교나 보수단체 등에서 공격을 하기는 했지만, 러시아처럼 물리적인 테러나 폭력이 빈번히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국가 차원에서는 동성 결혼을 허용하지 않고는 있지만 스톤월 항쟁의 배경 과 같이 제도적, 물리적으로 성 소수자를 탄압한 바는 전혀 없다. 대한민국에서 동성애자를 국가가 나서서 정신병자 취급하여 가둬넣고, 법적으로 탄압하며 거세를 시키는 모습을 상상이나 할 수가 있는가? 이러한 역사의 결과 등장한 노출 항쟁을 사회적인 편견을 이유로 결과만을 똑같이 재현한 것이 퀴어문화축제의 퍼포먼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퀴어축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없는가 이전에, 퀴어축제만한 과격한 표현을 해야 할 정도의 대대적인 탄압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당연히 노출 퍼포먼스의 당위성에도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물론 언론들이 퀴어문화축제의 사진 중 자극적인 모습만 골라서 보도한다는 문제가 있지만, 일반인들에게는 퀴어문화축제의 노출이 정신나간 행위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사회적으로 동성애자를 색출하고 탄압하는 분위기도, 탄압에 맞서 자극적으로 자신을 전시한 드랙도 없었기에 퀴어문화축제의 노출을 이해할 여지가 존재할 수 없다. 결국 이 노출 자체가 터무니없는 행위가 되어버리는 것. 또한 이러한 노출에 대한 거부감을 퀴어포빅하다고 몰아붙일 근거 또한 빈약해진다.

3.2. 뜬금없는 노출과 전후맥락의 부재로 인한 악영향

파일:퀴어축제노출만화.png

퀴어문화축제는 축제로서 즐기는 것 외에도 성소수자들의 인권을 신장하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표현하는 것 역시 중요한 활동목표로 보고 있다. 그러나 슬럿워크처럼 여성의 노출에 관한 비하발언에 대한 반발로 촉발되었기 때문에 노출의 의미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케이스와 달리, 퀴어퍼레이드는 노출과 직간접적 연관이 거의 없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노출을 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럴 경우 노출도 본래의 의도가 아닌 자극적인 이미지와 불쾌감만이 전달될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일부 참가자들의 복장과 행위는 대개 비하적으로 묘사되는 인터넷 만화에서의 성소수자 모습과 흡사하며 이는 성소수자들의 바람과 달리 일반인에게 그릇된 인식과 불필요한 거부감을 유발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즉 목적이 있는 노출이라고 하더라도 이게 정말 적합한 수단인지, 다시 말해 "표현의 수단으로서 부작용이 큰 신체 노출의 효용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존중받고 싶다면, 불법 행위를 해서는 아니 된다. 공연음란죄를 어기고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행위는 역시 모순적이다. 이미지 악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주장은 이중잣대인 것이다.

노출의 주된 의의 중 하나로 "'존재'에 대한 표현, 억압에 대한 저항, 자기긍정의 의미로 노출은 필요하고 퀴어퍼레이드에서의 노출을 경범죄에 해당되는 무의미하거나 상업적인, 아니면 단순히 '음란성'을 띄는 노출과 동일시하기는 어렵다" 라는 논지가 있으나 그 범위가 애매하다는 것도 논란의 요인이다. 예를 들어 겨우 성기 부위만을 가리는 옷을 입은 사람이 거리에 활보하면, 퀴어퍼레이드 참여자들은 저 사람은 '저항의식이 강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지만, 퀴어퍼레이드가 있는지도 모르고 근처를 지나던 사람, 혹은 아이와 동반한 부모들까지 그렇게 생각할 리는 만무하다. 이런 일반 대중들이 과연 그들의 노출을 보고 억압에 대한 저항이니, 자기긍정이니, 존재감의 어필이니 하는 이상을 떠올릴 수 있을까? 굳이 노출을 하지 않아도 무지개색이나 핑크색 정장을 입거나 남녀가 반대 성별의 정장을 입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훨씬 더 축제를 보는 시선이 나아질 것이다.

또한 노출을 "굳이"해야 한다면, 특정 건물을 임대해서, 미성년자 제한을 걸고 하는 방법도 있다. 현행법상, 공연음란죄는 스트립클럽같은 데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런 좋은 방법도 거부하고. 계속 공공장소에서 노출행위를 한다는 건 언젠간 법에 걸릴 수도 있고,호모포비아들에게 좋은 먹이감이 될 소지가 크다.

요약하자면, 노출이라는 리스크 큰 방법을 선택하면서, 그 축제의 지향점에 대해 굳이 구구절절 설명해야만 한다면, 이 축제는 지향점에 도달하기는 커녕 노출로 인한 역효과만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의도는 좋다고 해도 사회의 인식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노출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존재한다면 성소수자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나 그들에게 갈 수 있는 피해를 막기 위해 사회적 인식에 대한 부분을 감안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노출 문제를 중심으로 퀴어축제에 반대하는 청원이 답변 기준인 20만 명을 돌파하면서 이들의 노출은 결국 원래 의미는커녕 오히려 더 부정적인 인식만을 가지게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3.3. 선의의 피해자들

성소수자들 또한 원래 의도와 달리 다양한 성소수자의 이미지가 곡해되거나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것을 우려한다.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거나 자신의 성적인 정체성 때문에 주위에 알리지 못하고 고통받는 성소수자들은 주변인들이 이런 부분에 기반한 편견을 가졌을 경우, 더더욱 커밍아웃을 하는 게 힘들 수밖에 없다. 가장 피곤해지는 사람들 중 하나가 바로 용기를 내어 겨우 주위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한 사람들로, 이들은 축제로 인해 유발된 주변인들이나 다른 사람들의 편견을 바로잡으려는 소모적인 노력에 지치곤 한다. 게다가, 사람들은 자신과 관계없는 다른 집단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는 다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15][16] 이들은 "설마 너도 그런 식으로 노냐?" 와 같은 질문 세례에 직면하게 된다. 사람들의 인식은 강한 임팩트에서 그 집단의 스테레오 타입을 정하게 된다. 부정적일수록 더더욱...

이렇게 한쪽에서는 일군의 소수자들이 축제랍시고 움츠린 어깨를 펴고 (자신들만의) 터질 듯한 자유와 해방감을 만끽하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또 다른 소수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커밍아웃을 반쯤 포기하거나 당분간 유예하기로 마음먹게 되고 다시 골방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이미 커밍아웃을 한 소수자들은 축제에서 벌어진 그 모든 일들에 대해서 "일반 대중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으로" 구구절절 해명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축제의 의도를 굳이 대신 해명해 주어야 할 하등의 의무가 그들에게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게다가 모순적이게도, 노출 긍정론에서는 모든 퀴어를 있는 그대로 봐 달라고 주장하지만, 퀴어문화축제는 PL 성소수자들의 퍼포먼스가 가장 이목을 끌고 화제의 중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PL 성소수자라는 이름을 대대적으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으며, 이러한 행위는 결국 PL 성소수자의 존재를 숨기고 사람들이 PL 성소수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기회를 뺏음과 동시에, 성소수자 중에서는 다수에 속하는 유성애자 양/동성애자들에게 그릇된 이미지를 주게 된다. PL 성소수자 자체가 그릇되었다는 소리가 아니라, 실제 대상과 이미지의 대상이 엇갈린 시점에서 오류가 생겼다는 의미이다. 게다가 SNS 등에서는 이에 대한 실질적 피해자인 비운동권 동성애자 개인들의 항의에 대해서 오히려 조롱과 억압으로 대응을 한다. 소수를 존중해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기들보다 더 소수인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대중이 보기에 당위성이 설 리가 없다.

3.4. 잠재적 지원군을 걷어차다

이미 누차 언급했지만, 일반 대중들은 성 소수자에 대해 나쁜 인식이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회정책 입안의 측면에서 본다면 그 주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다. 또는 사회에 의해 암묵적으로 소수집단에 대한 고정관념은 갖고 있을지언정,[17] 개인 수준에서 면대면으로 소통할 경우 의외로 개방적이고 존중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올바른 홍보와 적절한 교육을 펼쳐서, 탈동성애 운동가들의 주장을 사전에 차단하면서도 집단적 고정관념을 변화시켜 지지자를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데 퀴어문화축제는 그런 잠재적 아군 집단에 대해서 고려할 생각이 없거나, 내지는 적극적으로 적으로 돌리고 있다. 사회에 의해 주입된 암묵적인 성 소수자의 이미지가 깨지기는커녕, 자신의 퀴어퍼레이드 목격 경험을 통해 더욱 지지되고 고착되게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이는 탈동성애 운동가들에 대한 전략적 이점을 제 손으로 내어주는 오판이다. 비록 축제가 대외적으로는 "많은 시민들의 자연스러운 참여" 를 표방할지는 모르지만, 과연 얼마나 많은 일반 대중들이 그 축제에 참여하여 발칙한(?) 스트리퍼들의 사이에 끼게 될지는 미지수다. 실제 인터넷 커뮤니티등을 보면 성소수자에 중립적이거나 동성 결혼 등 성소수자에 지지적인 입장의 사람도 그놈의 퀴어축제 노출만은 용인이 안된다는 사람이 상당수이다.

그리고 이 문단은 인터넷 신문인 ize에 올라왔다(..)

3.5. 반복하면 마침내 수용될 것이다?

이런 의견은 종종 강성 사회운동가들이들이 제기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즉, 처음에는 낯설게 여겨지고 일견 폭력적으로 보이는 방법이지만, 반복하다 보면 점차 유화적인 방향으로 인식이 개선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들은 이에 덧붙여서 서구 사회에서 수십 년 동안 그 효과(?)가 증명되었다고도 강조한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풍토와 문화, 사회적 맥락에서도 효과를 나타낼 것이 분명하다는 얘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급진파 동성애자나 사회운동가들이 흔히 가지는 선민사상우리는 무조건 옳으므로 대중들은 우리에게 동의해야 한다는 맹신적인 태도는, 그들을 억압하던 기성 주류 종교[18]와 극우 보수들이 지겹도록 저지르던 행패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반인반신에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무조건 수령동무의 열렬한 숭배자가 아닌 것 처럼 일반 대중들은 퀴어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단지 일상 생활과는 관련이 없는 주제이기 때문에 별다른 생각이 없을 뿐이며, 만약 주제에 올려놓고 토론을 하게 된다면 퀴어들이 그리도 반대하는 도덕규범에 의해 퀴어를 옹호할 것이다. 하지만 퀴어들의 무차별 폭력은 잠재적 우군이라고 할 수 있는 일반 대중들을 쫓아내는 자폭행위에 불과하다. 또한, 사람은 억지로 강요를 하면 그 반대 방향으로 가는 성질이있다. 당장,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던 시절을 생각해보자.

바로 위의 주장과 이 주장은 전체적으로 프라이드 퍼레이드의 모태가 된 스톤월 항쟁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9] 문제는, 1969년 당시의 시대정신의 흐름이 무엇이었는지를 간과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 미국은 각종 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고, 사회적으로 편견과 차별 어린 인식들이 확 깨어지는 것이 반복되던 시절이었다. 그야말로 터질 듯한 자유와 인권의 개화기였던 것이다. 게다가 성 소수자 운동이 비단 그 항쟁 하나만 있었던 것도 아니고, 동일한 규모의 강성 항쟁들이 숱하게 반복되어 여기까지 온 것도 아니다. 한때 슬로건으로 쓰였던 "It's getting better!"(더 나아질 거야!)는 (때로 스톤월 항쟁 같은 큼직한 전환점도 있었지만) 알게 모르게 조금씩 많은 노력과 기여가 있어 왔음을 암시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과격한 사회운동을 강행하는 것이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온건한 방법이 이루어낸 것이 도대체 뭐가 있느냐고도 묻지만, 과격한 방법에는 그만큼 강한 되튕김이 돌아온다는 것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생각이 옳다면 대규모의 혁명과 파격이 반복되는 사회일수록 더욱 인류의 이상에 가까워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수년간 퀴어축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노출 문제를 중심으로 퀴어축제에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답변 기준인 20만명을 돌파한 것을 보면 '반복하면 마침내 수용될 것이다'라는 의견은 그저 망상일뿐임이 증명되었다.

아니, 수용은커녕 두고두고 퀴어문화축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는 2021년 비영리법인 설립 허가를 신청했으나 결과는 불허가 처분 통보였다. 불허가 사유로는 △퍼레이드 등 퀴어축제 행사 시 (참가자의) 과도한 노출로 인해 검찰로부터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바 있는 점 △퍼레이드 행사 중 운영부스에서 성기를 묘사한 제품을 판매하는 등 실정법 위반소지가 있는 행위를 한 사실이 확인된 점. △매 행사 시 반대단체 집회가 개최되는 등 물리적 충돌을 예방하기 위해 대규모 행정력이 동원되고 있는 점 등이 꼽혔던 것이다.

4. 기타 논점들

4.1. 표현의 자유 논란

퀴어 페스티벌의 참가자들의 과도한 노출이 불법인가에 대해서도 이론의 여지가 있다. TV에서 여성의 유방이 서슴없이 보여주는 네덜란드나 타인의 자유보다는 한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더 존중하는 프랑스의 경우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이지 대한민국은 엄연히 이들 국가와 다른 노출/폭력의 표현수위를 규정하고 있음을 보자. 다만, 당해 사안을 규정한 경범죄처벌법 조항의 경우, 모호성의 측면 때문에 법학자들이 위헌성 논란을 제기하고 있다. 그 점 때문에 실제로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처음으로 한 것이 관련 조항의 처벌을 완화한 것이다.

4.2. 사회규범과 윤리는 가해자들의 억압일 뿐이다?

일부 과격한 소수자들은 실제로 "그간 참고 참아 왔던 것들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우리의 분노에 대해서 규범과 도덕을 들어 재단하려고 하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폭력적이고, 강자의 치졸한 자기방어에 불과하다" 면서 그들의 분노를 숨김 없이 드러낸다. 즉 규범과 윤리의 "프레임" 에 가능한 한 엮이지 않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거, 가만 생각하면 앞뒤가 안 맞는다. 규범과 도덕, 윤리는 도리어 약자가 강자를 공격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다. 규범과 도덕, 윤리로 뒷받침되는 사회운동은 어마어마한 정당성이 부여되기에 강력한 파괴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건 가해자의 논리일 뿐이라고? 단순히 선점효과일 뿐이다. 사실 사회 주류가 동원하는 가장 대표적인 무기는 도덕 같은 게 아니라 다름아닌 다수결의 논리였다.[20] 괜히 19세기 중엽의 미국 사회운동가들 사이에서 이에 대항하기 위한 한 사람으로서의 다수(majority of one)라는 슬로건이 인기를 끌었겠는가?[21] 다수의 횡포에 도덕이 꺾여서는 안 되고, 도덕적 정당성만 있다면 소수의 대의는 다수결조차도 압도할 수 있다는 얘기다.

더 나아가면 엄밀히 말해 호모포비아가 아닌 일반대중 다수가 도덕관을 들어 공격하는 대상은 '성소수자' 가 아닌 '퀴어축제의 노출' 이다. 즉, 옹호론자들이 도덕과 윤리를 부정해가면서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성소수자의 인권 자체가 아니라 다수자들 시키는 대로 하기는 싫다는 얄팍한 자존심과 노출 퍼포먼스라는 관습일 뿐이다. 정작 지켜야 하는 동성애자들의 인권이 딛고 있는 기반을 부정해가면서까지 지켜야 할 가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노출 퍼포먼스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괜한 우려가 아니라, 성소수자들의 인권으로 직결되지도 않는 노출 퍼포먼스를 지킨 대가로 일반 대중 수십만명이 퀴어문화축제의 적으로 돌아 축제를 폐지하라는 청원에 참가하기에 이르렀다. 이 쯤 가면 진보가 아니라 한 바퀴 돌아 꼰대나 다름이 없다.

5. 법률적 해석

경범죄처벌법상 과다노출에 해당한다는 검찰의 판단이 있었는데#, 그 판단이 있은 후 해당 법조가 명확성 원칙을 위반하여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결정[22]으로 '여러 사람의 눈에 뜨이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알몸을 지나치게 내놓거나 가려야 할 곳을 내놓아...'였던 조문을 '공개된 장소에서 공공연하게 성기·엉덩이 등 신체의 주요한 부위를 노출하여...'로 개정했다. 따라서 팬티조차 입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서야, 어지간한 신체 노출은 처벌 대상이 되지 않는다.

6. 부스, 피켓 논란

퀴어 축제의 각종 부스들이 큰 논란이 되었으며, 대표적으로 남성의 알몸과 항문성교를 노골적으로 표현한 부채와 여성기를 묘사한 풀빵 등의 선정적인 부스들이 존재했다. http://blog.naver.com/aeonblast88/220735055832 참고

성소수자에 대해 관대한 성향을 보이는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퀴어축제나 동성애를 반대하진 않지만 저런 부스는 없어야 한다'라는 반응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심지어는 동성애자를 가장한 지능적 호모포비아가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올정도.

해당 부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정작 성소수자와 큰 관련이 없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가령 항문 성교나 생식기 그 자체는 동성애 이성애 따질 것 없이 일반적인 성교를 상징하는 요소들이고, 노출 역시 큰 관련이 없다. 성소수자 축제에서 저런 성적 어필을 하는 부스나 노출등을 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 '동성애 = 성교와 노출이 필수인 변태적 행위'라고 홍보하는 꼴에 가깝다. 이 때문에 오히려 성소수자 옹호측에서도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풀려고 노력해야 할 퀴어 축제에서 오히려 동성애자들을 성행위에 집착하는 변태로 일반화하는 호모포비아 짓거리나 하고 있다"라는 비판의견도 많다.

검찰은 “누구든지 여러 사람의 눈에 뜨이는 곳에서 공공연하게 알몸을 지나치게 내놓거나 가려야 할 곳을 내놓아 다른 사람에 부끄러운 느낌이나 불쾌감을 주어서는 아니된다”라는 이유로 경범죄처벌법을 적용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검거하는 대로 기소하기로 하였다. 이 문제는 비단 노출 문제만이 아닌, 행사의 존속까지 연관될 수 있으므로 노출 긍정 측이든 부정 측이든 간에 생각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

6.1. 성소수자 커뮤니티에서의 반대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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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성소수자들 중에서도 선정적인 부스나 노출을 자제하라는 목소리도 많다.

위 '햇빛서점' 아이디 사용자 그리고 그와 생각의 궤를 같이하는 이들은, 저런 부족한 생각에서 비롯된 수준 낮은 행동이 우리나라 전체 동성애자들이 변태성욕자 이미지를 뒤집어쓰는 결과를 낳고 게이 인권운동의 설득력을 모조리 깎아먹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게이들은 한 사람의 동등한 인격체로 대우받길 원할 뿐이지 굳이 본인들이 어떤 섹스를 하는지 알리고 싶은 것이 아니다. 알리고 싶다면 그건 최근 논란이 된 여자화장실 가서 자위하는 일부 성도착증 이성애자 환자들과 비슷한 의식수준의 소유자일 것이다. 이성애자들이 그들의 성기로 어떤 섹스를 하는지 우리가 굳이 궁금해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듯. 우리도 사회통념적, 윤리적 관점("인간이라면 이래야 한다"는)에서 봤을 때 인정받을 수 있는 수준의 사고와 행동을 해야 한다. 혹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는지 스스로를 통찰하길 바란다. 인권운동의 목표가 무인도에 동성애자국가를 차려서 독립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또한 상술했다시피 퀴어 축제에서 항문성교를 묘사하는 부스나 팻말등을 들고다니는 사람이 있는데 항문성교 항목이나 동성애/논쟁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여러 연구결과 모든 동성애자들이 항문성교를 하는 것은 아니고 이성애관계에서도 충분히 항문성교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즉 '모든 동성애자 = 모든 항문 성교자'가 아니다. 항문성교를 안하는 동성애자도 있고 반대로 항문성교를 하는 이성애자도 있으니 당연하다.

그런데 퀴어축제에 저런 부스나 팻말, 피켓은 '동성애자 = 항문성교자, 노출과 성교의 아이콘' 이라고 일반화 하는 행위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성애자가 다른 모든 동성애자들을 일반화하고 있다.

저런 물건을 들고다니는 사람은 '우리들은 항문성교를 하는 것을 숨기기 싫고 자랑스럽다'고 주장하지만 반대로 생각해서 항문성교를 하는 이성애자들도 저런 피켓이나 부스를 만들고 다니진 않는다. 애시당초 저 행위자체가 법적으로는 풍기문란이고 이건 꼭 퀴어 퍼레이드가 아닌 다른 어디서든 이성애자든 누가했어도 똑같이 욕먹을 일이다.

[1] 또한 어린이들이 근처에서 우연히보게 되었다면?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2] 예를 들어 야동을 보는 걸 꺼리지 않는 사람이라도 누군가가 길이나 공원 등의 공개적인 장소에서 다짜고짜 성관계를 시작하거나, 야외 전광판, 뉴스 방송 등의 공개적인 매체 등에서 야동이 송출된다면 절대적 대다수는 크게 불쾌해하지 그걸 보며 좋아하진 않는다. 사회적으로 몰지각한 일이 일어났으며 포르노를 볼 의도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강제적으로 보게됐기 때문이다.[3] 심지어 이렇게까지 하더라도 그들의 반발이 아예 없을 거라고 장담을 못 할 정도로 열악한 상황이다.[4] 동일시 집단(identification group)이라고 한다. 실제 성 소수자들이나 소수자 운동가들이 대표적 사례.[5] 주의 집단(attention group)이라고 한다. 오피니언 리더, 인본주의자, 무신론자, 유사 사회운동 참여자들이 대표적 사례.[6] 주의 공중(attentive public)이라고 한다. 대학교수, 연구원 등을 비롯한 고학력자 집단이 대표적 사례.[7] 일반 대중(general public)이라고 한다. 위에 해당하는 소수를 제외한 수많은 사람들로, 그 구성 특징이 다양하지만 그들 전부 다 이 주제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8] 류지성, p.195; Cobb & Elder, 1972.[9] 소위 말하는 "이성애자들이/사회가 '허용' 한 동성애 문화는 거부하겠다!" 처럼 막나가겠다고 선언하는 것들. 비슷한 맥락에서 "피억압자들에게 억압에 어떻게 대처할지 알려주려 하지 말라"(Do not tell the oppressed how to react to their oppression) 같은 슬로건도 있는데 이것도 유사하다. 이런 류의 운동은 종종 아나키즘 쪽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10] 운동권에서는 여기에 젠더 표현, 성징이란 요소까지 추가하여 이를 Sexual Orientation, Gender Identity, Gender Expression, Sexual Characteristic을 합한 SOGIESC라고 한다.[11] 이런 류의 글들을 자주 보다보면 "역겹다, 토 나온다" 같은 표현들이 굉장히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무척 흥미롭게도, 2010년 이후의 수많은 정치심리학적 연구결과들에 따르면, 이와 같은 표현들은 정치극단주의의 연장선으로서 상대방에 대한 극심한 도덕적 혐오의 표출이며, 기존에는 권위주의 우파의 특징으로 분류되던 것들이었다. 짧게 말해서, 정치적 과격파들이 상대방에 대한 도덕적 폄하와 자신에 대한 도덕적 고양을 과시하고 싶을 때마다 역겹다느니 토 나온다느니 하는 표현을 즐겨 구사한다는 것.[12] 심지어 이런 행인들 중에는 동성애에 크게 관심은 없었지만, 적절한 안내와 설명만 제공된다면 호응해 주었을 잠재적인 성 소수자 지지층도 포함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이 노출을 목격하고 동성애 등에 편견이나 거부감을 갖게 될 가능성은 축제측의 실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13] 물론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을 뿐, 사회문화적으로 동성애 그 자체가 죄악시 되거나 비정상적으로 취급하여 제도적으로 철저히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등 염연한 사회적 강압이 존재하긴 했다. 다만 이는 사회문화적으로만 이루어졌을 뿐이지, 정권 자체가 탄압을 직접적으로 자행한 적은 없다. 엄연히 말하면 존재 자체에 대해 무시로 일관하였다는 게 좀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14] 아이러니하게도 퀴어문화축제는 이러한 편견을 강화를 시키면 시켰지 해소시켜주지는 않는다.[15] 이는 "외집단 동질성 편향"(outgroup homogeneity bias)이라고 불리는 현상이다.[16] 대표적으로 한국에서는, 한국의 개신교 신자중 과격한 행동을 보여 비종교, 타종교인들에게 눈쌀을 찌뿌리게 해 "개신교 다니는 애들은 다 저런 위선자다."라고 여기는 것 등이 있다.[17] 이런 건 실제 소수자들 몇 명만 만나게 해도 금세 깨진다. 아직까지는 막연한 이미지 수준에서 머물러 있기 때문에, 상이한 이미지를 만나면 쉽게 교정된다.[18] 특히 성소수자들도 지겹게 겪었을 법한 성소수자를 적극적으로 혐오하던 개신교 강경보수파등.[19] 또는, 한때 유명했던 여성 참정권 운동인 서프러제트(Suffragette)와도 관계가 있을 수도 있다.[20] 다수결의 논리는, 인류역사에서 가장 간단하면서 가장 강력한 무기였다. 선거가 무엇으로 결과를 판가름하는지 생각해보라.[21] 미국의 사상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H.D.Thoreau)가 시민의 불복종을 외쳤을 때, 그는 "다수 대중의 도덕 같은 건 족구하라 그래!" 의 메시지를 설파한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찬반투표를 해서 어느 쪽 머릿수가 더 많은가를 비교하지 말고,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메시지였다. 도덕의 힘을 빌려서 정의로운 소수가 불의한 다수를 이겨야 한다고 본 것이다.[22] 2016헌가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