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벌거벗은 세계사> (90분) '복수는 나의 것!'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졌던 정복왕 칭기스칸과 몽골제국의 탄생⚔ |
2. 가계
칭기즈 칸의 부족인 몽골은 튀르크계 위구르 제국의 해체 이후 바이칼호 방면에서 남하해 몽골 고원의 북동부에 퍼져 살았다. 칭기즈 칸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그린 몽골의 전설적인 역사서 《몽골비사》에 의하면, 그의 원조는 하늘의 명령을 받고, 바이칼 호수에 강림한 보르테 치노(푸른 늑대)[1]와 그의 아내가 될 코아이 마랄(흰 사슴)이었다고 한다. 보르테 치노의 11대손인 도분 메르겐('명궁')은 알란 코아('미인')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인 벨구누테이(벨구누드 씨족의 조상)와 부구누테이(부구누드 씨족의 조상)를 낳았지만 일찍 죽었고, 도분의 사후, 알란 코아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의 빛을 받아 남편없이 3명의 아들인 부쿠 카타기(카타긴 씨족의 조상), 부카투 살지(살지오드 씨족의 조상), 보돈차르 문카그(보르지긴 씨족의 조상)를 낳았다. 칭기즈 칸의 가계인 보르지긴 오복[2][3]의 선조가 되는 보돈차르 문카그는 알란 코아가 낳은 아들들 중 막내였다.보돈차르 문카그의 자손은 번창하여 다양한 씨족을 형성했다. 보돈차르 문카그의 7대손이었던 카불 칸(1120년~1149년 재위, 카이두의 증손)이 처음 몽골족의 지파를 통일하고, 카마그 몽골을 건설한 후, 대칸의 칭호를 획득했다. 카불 칸의 후계자는 그의 6촌인 암바가이 칸(1149년~1156년 재위)이었다. 뒤에 카불 칸의 후손들은 키야트 가문, 암바가이 칸의 자손은 타이치우드 가문으로 분화되었다. 칭기즈 칸의 아버지 예수게이 바아투르는 카불 칸의 4남으로 카마그 몽골의 제3대 군주였던 쿠툴라 칸(1156년~1161년 재위)의 조카였다.
3. 어린 시절
칭기즈 칸 보르지긴 테무진은 오늘날 몽골 동부 헨티 아이막(Хэнтий аймаг)[4] 지역에 흐르는 오논강 유역에서, 몽골족의 한 갈래인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씨족의 씨족장 예수게이 바아투르의 아들이자, 바르탄 바아투르의 손자이며, 카마그 몽골의 초대 군주였던 카불 칸의 증손자로 태어났다.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는 몽골의 시조인 보돈차르 문카그의 직계 후손으로 불리는 씨족이었다. 훗날 테무진에게 갈리는 타이치우드, 주르킨과 함께 몽골의 칸을 배출한 하얀 뼈 씨족으로 분류되었으며, 서열로 따지면 위의 두 씨족들보다는 낮았지만 모계가 명문가인 올쿠누드 씨족이었다.어머니 호엘룬은 옹기라트[5] 부족의 올쿠누드 씨족 출신이었다. 본래 올쿠누드 씨족은 몽골의 왕족들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부족이었다. 예수게이의 약탈혼은 자신들 몽골에게 시집와야 할 여자를 다른 부족이었던 메르키트에게 시집보내는 올쿠누드 씨족에 대한 분풀이의 일환이었다는 말이 있다. 어머니는 원래 메르키트 부족의 칠레두와 결혼했으나, 남편과 함께 올쿠누드에서 메르키트로 떠나던 도중에 예수게이에게 납치되어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호엘룬의 원래 신랑이었던 칠레두의 동생 칠게르가 훗날 테무진 일가를 공격해서 테무진의 아내 보르테를 납치했다. 이후 테무진이 칠게르를 개박살내고 보르테를 구하긴 했으나 그 직후에 태어난 장남 주치는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우선 칭기즈 칸 본인은 주치를 아들로 인정했지만, 이러한 불확실한 출생은 평생 주치를 옭아매는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하여 동생들과의 사이에 분란의 소지가 되었다(메르키트 콤플렉스).
칭기즈 칸이 태어난 날에 아버지 예수게이가 죽인 타타르 부족의 장수 테무진 우게의 이름을 따와서 이름을 테무진이라고 했다.(출처: 《몽골비사》 1권 59절).[6] 당시 타타르는 금나라가 행한 이이제이 정책의 파트너로서 몽골 고원의 제부족들을 억압하던 강자였고, 예수게이는 이에 대항하는 포지션에 있었다. 이후 금나라의 마름으로서의 타타르의 역할은 테무진이 토오릴 칸(옹 칸)과 함께 금나라의 명령으로 타타르를 제압하면서 토오릴에게 넘어갔다.
이후 테무진이 9살 되던 해(1171년)에 예수게이가 어린 테무진을 옹기라트부에 데릴사위로 보낸 뒤 홀로 돌아오는 길에 적대적인 타타르 부족장들에게 독살을 당하는 비극이 일어났다.[7] 원래 유목민은 손님을 잘 맞아주는 전통이 있고, 지금도 중동의 투아레그족부터 현대의 몽골족까지 거의 보편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접대의 관습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손님을 해치는 것은 불명예스러운 일로 간주되었는데, 타타르족이 예수게이를 손님으로 맞아들이고 독살한 것이었다. 그러자 예수게이의 카리스마로 뭉쳐져 있었던 키야트 씨족민들이 흩어지게 되었고, 테무진 일가에게는 엄청난 시련이 닥치게 되었다.
테무진은 아버지의 독살로 평생 타타르에 대해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물론 아버지를 독살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사유가 되었지만, 다른 측면도 작용했다. 몽골 초원에서는 '접대의 관습'처럼 '아무리 적대시하는 인물이라고 해도 일단 손님으로 방문한 사람은 해치지 않고 후하게 대접하는 관습'이 있었다. 예수게이도 이를 알고 있었기에 적대하던 타타르를 만났을 때도 '설마 손님 자격인 나를 해칠까'라고 생각하며 잠깐 방심했는데, 타타르족은 되레 이를 악용하여 손님으로 대접하는 척하고 그를 독살한 것이었다. 차라리 대놓고 칼싸움을 벌여서 죽였다면 모를까, 이런 식의 뒤통수치기는 당시 몽골의 풍습에서도 대단히 질이 낮은 행위였다. 그래서 테무진은 타타르족에 대한 원한이 유독 컸던 것이다.
테무진이 예수게이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게이 사후 키야트 씨족민들이 테무진 일가를 매정하게 버렸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럼 테무진의 형제는 왜 버렸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혈통 때문에 테무진의 가족을 버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리고 《몽골비사》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호엘룬은 예수게이에게 시집간 후 몇 년 동안 자식을 못 가졌다. 즉 훗날 주치의 사례와는 달리 테무진이 메르키트족의 아이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유전자 감식 같은 기법이 없었던 시대였더라도 양이나 말 등을 많이 키우는 유목민 사회에서는, 동물의 임신이나 출산에 해박했고 자연히 인간의 임신이나 출산에도 정통했다. 따라서 산달이나 다른 남자와의 접촉 등을 깐깐하게 따졌기 때문에, 임신 기간이나 출생에 조그마한 의심점이라도 생기면 계승권은 고사하고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었다. 일례로 칭기즈 칸의 맏아들인 주치 역시 칭기즈 칸이 일단 아들로 받아들였지만, 결국 모호한 출생 문제 때문에 후계자 다툼은커녕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먼 변방인 남러시아 초원으로 밀려나 씁쓸하게 병사했다.
예수게이 사후 키야트 씨족의 행방은 기록마다 다른데, 우선 《몽골비사》에 따르면 아버지 사후 친척들과 씨족 사람들 모두 떠나버렸다. 카불 칸의 장남 오킨 바르칵의 후손들인 키야트 주르킨 씨족, 암바가이 칸의 후손들인 타이치우드 씨족으로 가서 가문이 완전히 망해버려 남은 인원이라곤 테무진 자신과 어머니 호엘룬 및 형제들을 포함해서 성인 남성이 하나도 없이 고작 9명이 되어버렸다. 어찌나 차갑게 버림을 받았는지, 예수게이의 부하였던 콩고탄 씨족의 차카라 노인이 떠나가는 부족 사람들을 붙잡으며 가지 말라고 하자, 그대로 투두엔 기르테에게 죽임을 당하는 일도 있었다. 더불어 훗날 테무진이 자라서 부족을 버린 것을 보복할까봐 두려웠던 다른 부족장들은 테무진을 죽이기 위해 추격꾼까지 풀어버리는 짓을 벌였고, 때문에 테무진과 가족들은 초원을 떠나 숲 속과 산 속에서 숨어 살며 매우 가난하게 살아야 했다. 지금의 시베리아 남부에서 여자와 어린이가 포함된 9명이 추적자를 피해 늑대를 쫓아내고,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야 했으니 그 고생은 엄청났을 것이다.(출처: 《몽골비사》 67절 ~ 75절)
이러한 시기에 테무진의 서출 이복형제들이었던 벡테르와 벨구테이가[8] 적자인 테무진 형제의 사냥물을 빼앗아가 자주 갈등을 빚었다. 그리고 어느 날 낚시한 생선을 벡테르 형제가 빼앗아가자 분노가 폭발한 테무진은 동생 카사르와 함께 벡테르를 활로 쏘아 그를 죽여버렸다. 다만 벡테르가 자신의 가계를 잇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그의 동생 벨구테이는 살려주었다.[9] 이로 인하여 어머니 호엘룬에게
친구라고는 그림자밖에 없는 처지에 자기 형제마저 죽인 놈
이라는 심한 욕을 들었다.(《몽골비사》 2권 76~78장)테무진의 이복형제 살인을 두고, 벡테르가 나이를 앞세워 어머니 호엘룬과 결혼해 테무진으로부터 가장의 지위를 빼앗으려 해서 죽였다는 설도 있다. 유교 문화권과 달리 당시 몽골 지역의 풍습상,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친어머니를 제외한) 아버지의 남은 부인들을 자신의 부인으로 거둘 수 있었다. 한국에도 유교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에는 형사취수제라는 비슷한 풍습이 존재했다. 때문에 어머니 호엘룬과 벡테르가 결혼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10]
그렇게 고생하며 살다가 테무진은 중국 금나라의 노예로 잡히게 되었고, 포로가 되어 갖은 학대까지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붉은 만월의 날을 기리며 축제가 벌어지자 테무진은 방심한 틈을 노려 탈출을 시도했고, 이때 평소에도 포로인 자신을 잘 대해주었던 술두스 씨족의 소르칸 시라와 그 가족들의 도움으로 양털 수레 속에 숨어 탈출에 성공해 코르초코에서 흩어진 가족들과 재회했다. 이때 자신을 도와줬던 소르칸 시라의 아들이 훗날 사준사구의 일원이 되는 티라운이었다. (출처: 《몽골비사》 2권 76절 ~ 88절)
이때 테무진을 공격해 포로로 만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마다 다르다. 《몽골비사》에는 타이치우드 씨족의 부족장 타르고타이 키릴투크라고 되어 있다. '타르고타이'는 별명이며 키릴투크가 본명이다. '타르고타이'는 뚱뚱한 사람을 뜻하는 몽골어로 실제로 키릴투크는 《몽골비사》에 따르면 고도의 비만이라 말도 제대로 타질 못했다고 한다.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는 자다란(자지라트) 씨족의 족장 자무카 세첸이 자기 친척인 테구 타치르가 울레게이 불락에 방목하던 테무진의 가축을 훔치러 갔다가 테무진의 노예인 주치 타르말라의 손에 죽게 된 일로 앙심을 품어 테무진을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라시드 앗 딘의 기록에 의하면 테무진의 키야트 씨족은 예수게이 사후에도 그럭저럭 유지되는 상황이었다.
4. 고난의 세월
천신만고 끝에 사지에서 도망쳐 나온 테무진은 얼마 후, 가족의 말을 훔쳐 달아난 말도둑을 잡으러 갔다가 훗날 사준사구의 일원이 되는 보오르추를 만나서 인연을 맺고, 그의 도움으로 말을 되찾아오기도 했다. 또한 어릴 적에 약혼했던 보르테[11]와 재회하여 혼인했다.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테무진은 아버지 예수게이와 '안다의 서약' 을 맺은 적[12]이 있었던 케레이트의 토오릴 칸을 찾아갔다. 이는 토오릴이 케레이트의 후계자 전쟁에서 밀리던 시절, 예수게이가 토오릴를 지지하여 역전승을 이끌어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칸위를 차지한 토오릴은 형제들을 숙청하여 초원과 케레이트 내에서 평판을 잃었다. 이때는 '토오릴 칸'이라 불렸으나 후에 금나라로부터 왕작을 하사받은 후 옹 칸이라 불리게 되었다.('옹'은 '왕'이란 뜻이었다.)
토오릴 칸을 찾아간 테무진은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선물하고 아버지와 아들의 예를 맺음으로써 키야트 씨족을 보호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로써 다시 세력을 키울 기회가 생긴 것 같았으나 테무진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이 일어났다.(출처: 《몽골비사》 2권 96절)
토오릴 칸을 만나 세력을 회복한 듯 싶었으나 테무진의 세력은 여전히 약자에 불과했다. 어느 날 메르키트 부족이 테무진의 키야트 씨족을 습격하여 아내 보르테를 납치해가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테무진의 가족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말이 9마리 뿐이어서, 메르키트 족이 오는 걸 처음 발견한 노파와 벨구테이의 어머니 소치겔, 그리고 보르테를 버려야했을 만큼 세력이 미약했다. 당연히 테무진은 스스로 아내를 되찾아오는 일이 불가능했다. 메르키트는 본래 테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이 시집가려던 부족이었다. 예수게이가 메르키트 사람의 아내인 호엘룬를 납치했기에, 그 복수로 테무진의 아내를 빼앗아갔던 것으로 해석된다.
테무진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자다란 씨족의 수장 자무카와 토오릴 칸 등의 도움을 받았다. 자무카는 테무진이 속한 키야트 씨족과는 달리 칸은 될 수 없었지만 그래도 명문으로 분류되었던 검은 뼈 씨족이었다. 40,000명에 달하는 케레이트-자다란-키야트 연합군은 제1차 부쿠라 케헤르[13] 전투(1182년)에서 메르키트를 격파했고, 테무진은 간신히 아내를 되찾을 수 있었다.
이는 《몽골비사》의 기록이다. 라시드 앗 딘의 《집사》는 메르키트 족이 보르테를 케레이트의 토오릴 칸(옹 칸)에게 선물했고, 토오릴 칸이 자신의 며느리뻘인 그녀를 테무진에게 돌려주었다고 서술했다. 이 기록의 진위에 대해 학자들의 의견이 엇갈린다. 어떤 학자들은 일 칸국 황금씨족의 후원을 받아 쓰여진 《집사》가 칭기즈 왕조의 명예를 위해 사실을 왜곡하여 기록했고, 메르키트를 약탈할 정당한 명분이 있어 자무카와 토오릴 칸이 도와주었다고 보는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테무진의 미약한 세력을 고려하면 토오릴 칸이나 자무카 등이 그와 같이 움직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여 《집사》의 기록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봤다.
구출된 보르테는 메르키트 족에게 붙잡혀있는 동안 메르키트 족의 장수였던 칠게르에게 겁탈당한 상태였다.[14] 그리하여 테무진이 구하러 왔을 때는 이미 임신 중이었다. 그래서 이때 태어난 장남 주치는 두고두고 '남의 씨앗' 이란 의혹을 받아 은근히 천대를 받아야 했다. 다만 테무진 스스로는 주치를 자신의 장남으로 대우했으며, 후계자를 뽑으려 할 때도 신생 제국을 주치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치의 출신 문제는 칸위 계승 문제에 있어서 갈등을 빚는 요인으로 계속 작용했다(메르키트 콤플렉스).
아내를 되찾은 후, 부족 세력을 조금씩 불려나갔으나 여전히 테무진의 힘은 미약하기만 했다. 일단 그 시작부터가 자무카의 부장 정도에 불과했으며, 가문빨이 끝내주던 자무카와는 달리 테무진은 아버지가 독살되었던 시절에 부족민들이 배신하고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의지할 데라고는 자기 자신과 부하들뿐이었던 것이다.
다만 테무진과 자무카의 가문 비교는 다소 조심스럽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일단, 두 사람의 경력 시작 시점을 비교해보면 상당한 세력을 가졌던 자무카의 자다란 씨족에 비해 테무진의 키야트 씨족은 예수게이 사후 풍비박살이 난 상태라 세력 기반이 되어줄 자신의 씨족이 있었던 자무카에 비해 테무진은 맨손으로 시작해야 했던 입장이었다. 그러나 자무카의 자다란이 검은 뼈 씨족이었던 데 비해 테무진의 키야트는 하얀 뼈 씨족이었고, 테무진 자신은 카마그 몽골의 초대 칸이었던 카불 칸의 직계 증손자였다. 애초에 테무진보다 먼저 세력 기반을 갖춘 자무카가 테무진을 파격적으로 부장(2인자)에 임명한 것 자체가 테무진과의 우정 이상으로, 테무진이 가진 정치적 가치[15] 때문이었다는 분석이 있다.
5. 세력 확장
메르키트에 대한 습격은 테무진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사건으로 여겨지는데, 그 이유는 이때부터 그의 전사로서의 삶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타타르, 타이치우드, 메르키트 같은 강한 부족과 만나면 죽을 위기에 처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반복되었기에 테무진은 힘을 합쳐 메르키트를 무찌른 후, 잠시 동안 자무카의 자다란 씨족에 몸을 의탁했다. 자무카는 성공적인 메르키트 토벌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사적 재능이 뛰어났던 전사로, 의형제였던 테무진이 아내를 뺏기고 군사가 한 줌도 없었던 시절에 20,000명의 군사를 불러모을 수 있었다.그러나 주르킨 씨족[16]과 같은 왕족들도 있는 마당에 검은 뼈인 자무카 자신이 이들을 모두 다스리기엔 부담이 되었는지 테무진을 공동의 우두머리로 두는 과두정치를 행했다. 이 시절에 테무진은 부하라고는 혈통상 아무 관련이 없는 아를라트 보오르추와 노예 출신의 우량카이 젤메, 수부타이 형제 뿐이었던 만큼 부하들을 혈통이나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과 충성도에 따라 대했다. 이런 태도 때문에 테무진의 인기는 부족 내에서 날이 갈수록 올라갔고, 자무카는 이를 경계해 테무진과 결별을 선언했다. 《원조비사》에 따르면 자무카는 테무진에게 2인자의 자리를 제안했지만 보르테의 반대로 테무진이 떠났다고 묘사하고 있다.
결별할 때 자무카를 따르던 사람들이 테무진을 따라서 같이 갔는데 자무카를 떠나는 와중에 원수인 타이치우드 씨족을 만났다. 이때 타이치우드 씨족은 테무진이 자신들을 알아보고 해코지할까봐 황급히 떠났다. 자무카에서 갈라나온 테무진 세력이 (부족이 아닌) 씨족 중에 매우 강했던 타이치우드보다 강했다는 것은 자무카의 세력이 그만큼 강했으며[17] 테무진이 세력의 틀을 형성한 때가 자무카의 부장 시절이고, 여기에 옹 칸의 공은 적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자신을 지지하는 부족민들에 의해 카마그 몽골의 제4대 칸으로 추대되었다(1189년). 하지만 몽골 초원의 일부 종족의 칸이 되었을 뿐이었고 그래서 단순히 테무진 칸으로 불렸다. '칭기즈 칸'이란 호칭은 몽골 초원을 통일하고 나서 1206년 몽골 제국을 완전히 성립한 다음에 받은 칭호이다. 칸이 된 직후 테무진은 그 동안 자신을 따라준 장수들과 부하들 및 형제들에게 관직을 나누어 주는 등 논공 행상을 행했다.
그러던 어느 날 테무진 칸의 말을 지키던 말지기들이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는 말 도둑을 활로 쏘아 죽인 사건이 일어났다. 말을 중요시하는 유목민족에게는 말 도둑은 무조건 사살이라는 불문율이 존재한다. 문제는 그 말 도둑이 자무카의 사촌 아우 다이차르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무카와 테무진 칸의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테무진과 자무카는 각각의 세력을 13 쿠리엔으로 구성해 13익의 전투(또는 달란 발주트 전투)를 벌였다(1190년).
쿠리엔 방식은 몽골 초원의 전투 단위로 하나의 거대한 움직이는 유목민 진영을 말한다. 《집사》에 따르면 쿠리엔(혹은 '구리옌')이란 '고리'를 뜻한다. 한 종족이 어떤 지점에 진영을 칠 때 고리 같은 모양을 이루고 그들의 지도자는 그 원 안의 점처럼 위치했다. 블라디미르초프에 따르면, 이 쿠리엔은 유목 생활의 한 형태이기도 했는데, 쿠리엔 외에도 아일 유목 방식이란 것도 있었다. 쿠리엔이 대목군(大牧群)의 방식으로 유목을 하는 것이라면, 아일 유목 방식은 가축, 특히 말이 많은 부자가 단독 혹은 소집단으로 유목하던 것이었다. 따라서 아일 유목은 사회 질서가 안정된 조건에서 가능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테무진 칸은 참패를 당했고 살던 곳에서 밀려나 제레네 협곡으로 물러나야만 했다. 이 패배로 친족으로 이루어진 11개 익 중 테무진 본인 직계 가족으로 이루어진 1익과 본인과 친위병으로 이루어진 2익을 제외한 8개 익이 모두 떠나가 버렸다. 이후 기록에 4년의 공백이 있는데 일부 학자들은 금나라가 케레이트의 왕족인 자카 감부와 테무진에게 토오릴 칸을 도와 타타르 부족을 공격할 것을 명령한 것으로 보아 이 시기 칭기즈 칸이 금나라의 노예로 있었거나, 금나라에 정치적 망명을 떠난 것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한다
자카 캄부는 토오릴 칸(옹 칸)의 동생으로 1203년 제지르 운두르 산 전투 당시 자카 감부는 다른 곳에 있다가 형인 옹 칸의 패전 소식을 듣고 테무진에게 투항했다. 테무진은 자카 감부의 딸 이바카 베키가 자신의 아내였고, 베투트미시는 장남 주치의 아내였기에 자카 감부의 투항을 받아들이고, 그의 속민을 그대로 인정해 주었다. 그러나 1204년 동나이만과의 전쟁 때, 자카 감부는 다시 배신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테무진은 주르체데이를 보내 자카 감부를 살해했다. 테무진은 아내인 이바카 베키를 주르체데이에게 하사하여 아내로 삼게 했으며, 오로오드 씨족 4,000호를 다스리라고 명령했다. 자카 감부의 딸 케레이트 소르칵타니는 테무진의 막내아들 툴루이의 카툰이 되었으며, 헌종 몽케 칸, 세조 쿠빌라이 칸, 일 칸 훌라구, 대립 칸 아리크부카를 낳았다. 뭉케와 쿠빌라이는 훗날 대칸이 되었고, 훌라구는 일 칸이 되었으며, 뭉케 사후 아리크부카는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즉위했으나, 친형인 쿠빌라이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을 대칸이라 주장하여 양측은 '툴루이 내전'에 돌입했다. 즉 자카 감부는 킨을 칭했던 4명의 외조부였다.
한편《황금사》[18]와 《몽고원류》에는 테무진이 당시 고려(솔롱고)에 가 있었다고 기록했으며, 남송시대 조공의 《몽달비록》에는 테무진이 금나라에 가서 10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다고 기록했다. 칭기즈 칸 노예설의 가장 큰 문제는, 칭기즈 칸이 평생 동안 중국어나 여진어는커녕 튀르크어도 못하고, 몽골어만 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정치적 망명이라면 그래도 자기 세력은 데리고 들어와서 살았다는 이야기이니 부하들을 통역가로 부리고 다녀서 말을 익힐 기회가 없었다고 하면 말이 되지만, 아무리 언어 습득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도, 노예로 살았다면서 여진어나 중국어를 어눌하게라도 익히지 못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1194년 테무진 칸은 타이치우드 씨족의 족장 타르고타이 키릴투크와 쿠이텐 들판에서 싸워 타르고타이를 격파했다(제1차 쿠이텐 전투). 이에 타이치우드 휘하 베수드 씨족의 지르고가타이도 도망갔다. 후신 보로클이 지르고가타이를 추격했는데, 이때 보로클은 테무진 칸의 입술이 백색인 말을 타고 있었다. 도망치던 지르고가타이는 보로클이 탄 말의 경추골을 정확하게 쏘아 맞추고 달아날 수 있었다. 후에 지르고가타이는 숲에 숨어있다가 결국 투항했는데 테무진 칸은 자기 말의 경추골을 쏘아 맞춘 자라 하여 '제베'('화살촉')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그때 옛 은인이었던 술두스 소르칸 시라의 아들 티라운도 함께 투항했다.
이후 오로오드 씨족과 망고드 씨족이 테무진 칸의 세력에 합류하게 되어 오난(오논)강 숲속에서 이를 축하하는 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오로오드 씨족과 망고드 씨족은 보르지긴 오복에 속한 씨족들로 이들은 13익 전투때, 자무카의 편에 서서 테무진에 대항했으나 자무카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테무진의 편에 서기로 하여 훗날 테무진의 듬직한 우군이 되었다. 이들이 자무카를 떠난 계기는 치노스(늑대) 씨족의 귀족 70명을 삶아 죽인 자무카의 잔혹성으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오로오드와 망고드는 원거리 기동전을 위주로 하는 몽골 전사들 중에서도 특이하게 근접 돌격전에 특화되었던 전사들로 훗날 케레이트와의 칼라 칼지드 사막 전투나, 동나이만과의 차키르마우트 전투 등의 대회전에서 카마그 몽골군의 전위대로 맹활약했다.
이 축하 자리에서 테무진 칸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씨족과 같은 혈통에 속하는 주르킨 씨족이 행패를 부렸다. 혈통면에서는 키야트보다 우위에 있는 말하자면 '하얀 뼈 씨족'이었다. 그들의 행패에 테무진 칸이 화가 나서 술을 마시다 말고 이들과 패싸움을 벌였다. 《원조비사》에 따르면 이때 주르킨 사람들이 테무진 칸의 집사장인 시키우르를 술 따르는 순서를 틀렸다고 해서 구타하는 등 무례를 범했으며, 주르킨 씨족의 족장 사차 베키의 씨름꾼이자 목장 관리인이었던 부리가 테무진 칸의 이복 아우이자 역시 목장 관리인이었던 벨구테이와 말다툼을 하다가 칼로 베어 부상을 입혔다고 한다. 특히 벨구테이가 씨름으로 말 다툼을 해결하려고 했는데, 이를 부리가 칼로 베었다는 것은 부리가 벨구테이를, 나아가 키야트 주르킨 씨족이 테무진과 키야트 씨족민들을 낮잡아 본 것이라 더욱 문제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결국 싸움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은 테무진 칸이 주르킨 씨족의 족장 사차 베키의 어머니(선대 칸의 부인들)를 인질로 잡고 협박한 끝에 끝이 났다. 이래저래 세력이 약해서 밀리는 형국에다가 같은 보르지긴 부족에 속하는 씨족들마저 말을 들어먹지를 않으니 단단히 짜증이 난 모양이었다. 나중에 술이 조금씩 깨자 어느 정도 적당한 선에서 화해를 하고 물러났지만 이후 앙금이 풀리지는 않았다.
이렇게 힘든 세월을 보내던 중, 금나라의 제6대 황제였던 장종[19]이 '왕경 승상', 즉 승상 완안량에게 명령하여 금나라를 배신한 타타르 족장 메구진 세울투를 토벌하도록 했다.[20] 완안량의 요청을 받은 테무진 칸은 케레이트의 토오릴 칸과 함께 금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타타르 부족을 정벌하게 되었다. 당시 테무진 칸은 금나라의 요청을 전해 듣고는 인근의 병력을 동원하여 오논강에 집결해 타타르를 토벌하고자 했고, 이에 주르킨 씨족에게 유지를 내려 지원하러 오도록 했다. 무려 6일을 기다렸으나 주르킨 씨족은 결국 오지 않았다. 1194년 겨울, 타타르 부족과의 코소토 시투엔 전투에서 승리한 테무진 칸은 오랜 숙적이었던 타타르를 무찌르고, 족장 메구진 세울투를 잡아 죽이는 등 크게 활약하여 명성을 떨쳤다.
이 공로를 인정받아 장종으로부터 '백부장'(자오드 코리)의 별 볼 일없는 직위를 하사받았지만 이로써 테무진 칸의 카마그 몽골 세력은 본격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또한 케레이트의 토오릴은 장종으로부터 거란 관직인 이리진(이리근) 즉 '왕'의 작위를 하사받았다. '왕'은 '옹'으로 발음되었으므로 이후 옹 칸으로 불리게 되었다.[21] 이때 말을 듣지 않아 술판에서 싸움이 났던 주르킨 씨족도 델리운 볼닥 전투에서 이겨 완전히 씨를 말려버렸고(1194년 겨울~1195년 봄), 주르킨 씨족장 사차 베키는 그후 추격하여 1196년 겨울, 텔레투 협곡 전투에서 섬멸시켰다.
또한 이복동생 벨구테이의 어깨를 칼로 베었던 원수인 부리를 잡아 벨구테이의 손에 죽도록 했다. 주르킨 씨족의 족장이었던 사차 베키는 타타르 정벌 당시 자신의 주군이었던 테무진 칸에게 협조도 안 하면서 오히려 빈집털이를 시도하는 등 온갖 못된 짓을 골라했기 때문에 테무진 칸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물론 이는 사차 베키만의 문제가 아니라 당대의 유목민들한테서 흔하게 일어났던 일이었다. 화룡점정으로, 테무진이 타타르 원정에서 승리한 후 화해의 표시로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을 상당수 실어 주르킨 씨족에게 보냈으나, 어이없게도 주르킨 씨족은 전리품을 빼앗고 호송병들을 죽였다. 전리품은 주르킨 씨족에게 원래 주려던 것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주르킨 씨족은 제 발로 무덤을 판 격이었다.
타타르 정벌전 이후 1195년 케레이트의 옹 칸은 나이만의 이난차 빌게 칸에게로 도망쳤던 동생 에르케 카라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서요(카라 키타이)로 달아났다. 하지만 서요에서도 쫓겨난 옹 칸은 낙타 피를 마시며 겨우 초원으로 돌아왔다. 이런 그를 테무진 칸은 맞아들이고, 다시 한번 의부로 삼으며 케레이트의 수복을 약속했다. 1196년 테무진 칸은 곧장 케레이트의 에르케 카라를 공격하여 카라 툰('검은 숲') 전투에서 승리한 후 옹 칸을 복위시켰다.
이후 테무진은 1197년 가을 메르키트 부족의 톡토아 베키를 공격하여 모나차 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뒤 노획물 전부를 케레이트의 옹 칸에게 보내며 그의 세력을 회복시키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원조비사》와 《집사》의 기록이 상충되어 있어서 여러모로 헷갈리는 부분이 많지만 적어도 이 시점에 옹 칸의 세력이 매우 약화된 상태였음은 분명하다. 세력이 회복된 옹 칸은 1198년 테무진 칸에게 알리지도 않고, 메르키트 부족을 급습해 제2차 부쿠라 케헤르[22]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 노획물을 혼자서 독차지했다. 이러한 옹 칸의 욕심과 그로 인한 전리품 분배 과정에서의 인색함은 두 사람 사이에 불화를 만들었다.
이후 양의 해(1199년) 테무진 칸은 옹 칸과 함께 나이만족을 정벌하여, 당시 내전 중이었던 동나이만의 타이 부카와 서나이만의 부이룩 형제를 동시에 공격했다. 타이 부카는 라시드 앗 딘의 기록에 따르면 별칭으로 타양 칸이라고 불렸다. 이난차 빌게 칸의 아들이었던 타이 부카는 '왕'이라는 호칭을 받아 '타이 왕'이라 불렸는데, 이게 잘못 알려져 '타이왕->타양'이라 불렸고, 여기에 '칸'의 호칭이 붙여져 '타양 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타양 칸과 부이룩 칸 형제의 아버지는 '이난차 빌게 부쿠 칸'이었다고 라시드 앗 딘은 기록했다.
먼저 테무진 연합군은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이 다스리던 키질 바시를 공격했다. 튀르크계 키르기스족이 살고 있었던 켐 켐치우트, 즉 지금의 러시아 투바 공화국 예니세이강의 상류 지역으로 피신한 부이룩 칸은 부하인 이디 투클룩[23]을 파견했지만 테무진의 전초 군대에게 패배하고 투클룩 본인도 낙마해 사로잡혔다. 《원조비사》에는 부이룩 칸에 대한 원정이 자무카의 구르 칸 선출 이후로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원정 당시 자무카가 옹 칸의 진영에 있었다는 사실 등과 모순된다. 자무카의 구르 칸 즉위 시기는 1201년이다.
그 뒤 같은 해(1199년) 겨울, 테무진 칸과 옹 칸의 연합군은 바이타락 벨치레에서 부이룩 칸의 부하였던 쿡세우 사브락[24]과 대치했는데 전투를 계획한 바로 전날 밤 갑자기 옹 칸이 주둔지의 불을 피워둬 '테무진'을 속인 뒤 밤중에 케레이트 군대를 철수시켰다. 웁치리타이 쿠린 바하두르 등이 옹 칸의 철수를 만류했지만 옹 칸은 결국 타탈 토쿨라로 도주했다. 《원조비사》에서는 자무카가 부추겼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 다음날 '옹 칸'의 도주를 안 테무진은
"옹 칸이 나를 재난과 화염 속에 던지고, 혼자 도망치려고 했다"
며 분노했고, 전황이 나빴기 때문에 테무진도 사리 케헤르로 철수했다. 테무진-옹 칸 연합군이 철수한 것을 안 서나이만의 쿡세우 사브락은 반격을 개시하여, 먼저 옹 칸을 뒤쫓아가던 일카 셍굼[25]과 자카 감부[26]의 군대를 이데루 알타이에서 급습하고, 그 뒤 옹 칸의 울루스가 있는 달라두 아마사라를 공격했다. '울루스'란 중신의 자격으로 세력회의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말했는데, 세력회의에 참가하느냐 마느냐의 여부가 중신과 부하의 구분이 되었다.
쿡세우 사브락은 옹 칸의 백성들과 재산 및 가축 등을 노획한 뒤 옹 칸의 본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과거 정벌을 당했던 메르키트가 쿠두와 칠라운을 중심으로 뭉쳐, 옹 칸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케레이트가 안팎으로 쑥대밭이 되고, 옹 칸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해지자 결국 얼마 전에 배신했던 테무진에게 사자를 보내 라는 내용의 구원 요청을 했다.
테무진은 이 요청에 응해 4명의 장수, 즉 아를라트 보오르추, 잘라이르 무칼리, 후신 보로클, 술두스 티라운을 보냈다. 옹 칸은 홀랄하 산 전투에서 부하인 티킨 쿠리와 이투르겐 얀다쿠를 잃고, 아들인 일카 셍굼마저도 부상당해 케레이트 전체가 몰살당할 위기에서, 테무진의 구원군이 도착해 승리하면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고, 이후 옹 칸이 테무진 칸에게 잘못을 빌면서 자신의 아들인 셍굼과 테무진 칸으로 하여금 서로 의형제를 맺게 함으로써 양측의 갈등을 간신히 무마시켰다. 그러나 이때부터 테무진 칸과 옹 칸의 사이는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옹 칸은 테무진 칸을 두려워하며 이를 제거할 마음을 품었던 것 같다.
원숭이해(1200년) 테무진은 옹 칸과 사리 케헤르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했다. 라시드 앗 딘의 기록에 따르면 이 회의에서 옹 칸은 테무진을 제거하려고 했지만 우수 노얀이 견제해서 실패했다고 한다. 그 뒤 테무진은 우수 노얀에게 바아린 씨족의 만호 직위를 주었다고 한다. 쿠릴타이 직후 테무진과 옹 칸은 타이치우드 씨족을 공격하여 오논(오난)강 전투에서 격파했다(1200년 초). 이로써 카마그 몽골 울루스 내에서 키야트 씨족과 칸위의 정통성을 놓고 경쟁했던 암바가이 칸의 후예, 타이치우드 씨족은 큰 타격을 받고 쇠락하게 되었다.
한편 타이치우드의 패배 이후 이들과 친하고, 반대로 테무진을 적대시하던 카타긴 씨족과 살지오드 씨족은 다른 타타르, 두르벤, 옹기라트(쿵크라트)족을 모아 테무진 및 옹 칸과 전쟁을 벌이기로 알쿠이 볼락('샘')에서 서약하고 연합군을 결성했다. 이때 테무진은 옹기라트 사람 데이 세첸의 밀서로 이 연합을 파악하고 다시 군대를 모아 부이르 나우르[29] 전투(1200년)에서 패퇴시켰다.
1200년에는 달란 네무르게스 전투에서 카마그 몽골의 원수이자 5대 부족 중의 하나인 타타르족과 격전을 벌여 마침내 전멸시켰다. 한때 초원의 절대 강자였던 타타르는 이때 수레바퀴 크기보다 키가 큰 성인 남자가 모두 학살당하는 참혹한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테무진은 잔여 세력인 여자와 아이들을 모두 카마그 몽골의 집안에 편입시킴으로써 이후의 타타르 세대를 자기 세력 안에 넣었다. 이로써 테무진 칸은 초원 전역에 강력한 위용을 떨치게 되었다.
이후 1201년 옹기라트, 이키레스, 코룰라스, 두르벤, 타타르, 카타긴, 살지오드 등의 부족과 씨족들이 켐강에서 회합하고 자무카를 구르 칸으로 추대했다. 구르 칸 자무카는 자다란, 타타르, 타이치우드, 메르키트로 구성된 연합군으로 공격해왔으나 이 첩보를 들은 테무진은 다시 옹 칸과 연합하여 이디 코르칸[30] 전투에서 자무카의 연합군을 격파했다. 자무카는 도망갔고, 옹기라트는 테무진 칸에게 투항했다.
옹 칸과 함께 자무카를 꺾으며 초원의 강자로 거듭난 테무진 칸은 과거에 자신을 사로잡아 노예처럼 부리며 굴욕을 주었던 타이치우드 씨족을 섬멸하여 복수하고, 타타르의 잔여 세력을 추격하여 1202년 봄, 달란 네무르게스를 넘어 올코이강의 지류인 실루겔지트강 지역에 들어와 있었던 알치 타타르와 차강 타타르를 공격했다(실루겔지트 전투). 이미 달란 네무르게스 전투에서 대부분의 주력 병력을 잃고, 지리멸렬 상태에 있었던 타타르족은 이 전투를 끝으로 영원히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때 테무진은 승리를 거둔 후 자신이 직접 모든 전리품을 분배해주겠다고 공언했다. 그 외에도 적에 의해 퇴각하면 처음 공격한 곳으로 돌아오라는 명령도 내렸다. 이러한 명령은 규율이 잡힌 강군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것이기도 했다.
이전에는 장군들이 직접 약탈을 통해 전리품을 얻고, 그 일부를 주군인 칸에게 바쳤는데, 테무진은 자기가 모든 결정권을 가지겠다고 한 것이었다. 즉 모든 전리품은 테무진 자신의 것이며, 자신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붕어할 때까지 이어진 규율로써 슬하의 아들들이 이를 어겼을 때 엄청난 분노를 표시했다. 테무진의 정책이 유목민의 오랜 관습과 어긋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알탄[31]과 쿠차르[32] 및 테무진의 숙부였던 다리타이 옷치긴이 이후 자무카에게 귀순했다. 이들 세 명은 테무진 칸의 약조를 어기고 관습대로 약탈물을 챙기다가 칸의 분노를 사 바를라스 쿠빌라이와 베수드 제베에 의해 약탈물을 압수당했었다.
곧이어 1202년 가을, 테무진 칸에게 박살났던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을 위시한 타타르, 메르키트, 타이치우드, 살지오드, 오이라트, 두르벤, 카타긴 등이 다시 연합하여 테무진과 옹 칸을 섬멸하기 위해 집결했다. 테무진과 옹 칸은 연합하여 금나라가 세운 알란 요새에 들어갔다. 겨울에 알란 요새에서 출격한 테무진은 쿠이텐 들판으로 향했고, 옹 칸은 자무카를 견제하기 위해 출격했다. 부이룩 칸은 무당에게 바람을 부르라고 명령했는데, 갑자기 바람이 반대로 불어 반테무진 연합군은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테무진의 카마그 몽골군은 이틈을 타서 돌격했고 연합군을 대파했다. 한편 옹 칸의 케레이트군과 대치 중이었던 자무카는 퇴각하여 인근의 부족을 약탈했다.
테무진은 제2차 쿠이텐 전투(1202년)에서 대승했다. 《원조비사》에 이 전투가 서술되어 있는데, 자무카 연합군이 주술을 일으키는 '자다'라는 돌을 가지고 승리하려 했지만 오히려 비바람이 본인들에게 휘몰아쳐서 흩어져버렸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타이치우드의 족장 앙쿠 후쿠추를 추격하던 테무진이 적의 화살에 목을 맞아 피를 많이 흘려 사경을 헤메게 되었다. 타이치우드의 지도자였던 '뚱보 칸' 타르고타이는 예수게이가 죽자 테무진을 버린 후,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씨족들을 이끌고 갔으며, 테무진이 서형인 벡테르를 죽이자 버릇을 고쳐준다는 명목하에 그를 납치해 조리돌림한 바 있었다. 테무진 입장에서는 철천지 원수였다.
다행히 사준사구 중 한 명인 우량카이 젤메가 밤새도록 테무진의 피를 입으로 빨고 뱉으며 지혈했다. 그런데 현대 의학 관점으론 이 행동은 하등 좋을 게 없는 헛짓이었다. 오히려 그 가공할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죽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젤메는 또 적진으로 들어가 말 젖(아이락)을 훔쳐와 마시게 함으로써 테무진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타이치우드 씨족의 앙쿠 후쿠추는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원조비사》에서는 위에 언급한 제2차 쿠이텐 전투 이후에 술두스 소르칸 시라와 베수드 제베가 투항하는 기사가 실려 있다. 즉 《원조비사》는 제2차 쿠이텐 전투(1202년)에 제1차 쿠이텐 전투(1194년)의 제베를 끌어다 쓴 것이다. 우선 《원조비사》는 원태종 오고타이 칸 당시 집필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무친정록》과 이를 바탕으로 기록된 라시드 웃 딘의 《집사》에 비하면 기록의 신뢰성이 대부분 떨어진다. 즉, 년도나 인물 및 순서 등이 뒤죽박죽인 경우가 상당히 많다. 《성무친정록》 및 《신원사》에는 제2차 쿠이텐 전투 직전 벌어진 타타르 정벌전에 제베의 기록이 나오기 때문에 제2차 쿠이텐 전투 때의 제베는 당연히 테무진 칸 소속이었다.
6. 통일 전쟁
한편 테무진은 케레이트의 옹 칸과 결혼 동맹을 맺기 위해 맏아들 주치와 옹 칸의 딸 차오르 베키, 그리고 자신의 딸 코진 베키와 옹 칸의 손자이자 셍굼의 아들인 투스 부카(토사카)를 결혼시키려고 했으나 옹 칸의 아들이었던 셍굼이 이 혼인 제안을 거부하면서 옹 칸과 테무진의 사이는 더더욱 악화되었다. 이에 자무카, 알탄, 쿠차르 등이 셍굼과 연합을 했고 셍굼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결국 옹 칸과 테무진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때 옹 칸은 혼인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거짓말을 한 후 갑작스럽게 배신을 하여 테무진을 급습했다(1203년).당시 옹 칸 측에 아들 주치의 혼인 면담을 하러 수행원 몇 명만을 데리고 길을 떠났던 테무진은 케레이트 측의 두 평민이었던, 바다이와 키실릭이 위기를 알려주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는 테무진의 평판이 부족을 막론하고 초원의 피지배층 전반으로부터 호의적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때 테무진 측은 수행원 몇 명으로 시작하여 하룻밤 사이에 한반도 크기에 달하는 영지 전체의 유목민들에게 총동원령을 전달하여 군대를 소집시켰다. 참고로 《사조영웅전》에서 곽정이 테무진 칸과 처음 만나는 장면이 바로 이때이다. 즉, 테무진 칸에게 배신을 알린 두 평민이 바로 곽정과 이평(곽정의 어머니)으로 묘사된 셈이다.
옹 칸 연합은 칼라 칼지드 사막(칼라진 엘레트) 전투(1203년)에서 테무진의 카마그 몽골 군대를 급습했다.《원조비사》에 따르면 이때 자무카가 테무진에게 케레이트족 군대의 배치와 전열에 관해 알려주었다고 한다. 숫적으로 불리했던 테무진의 몽골군은 사기가 떨어져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테무진 칸의 '안다'(의형제)였던 망고드 쿠일다르가 선봉장이 되어 케레이트군의 중앙을 돌파하고, 후방에 있던 쿠이텐 산(또는 굽타 산)의 정상에 깃발을 꽂았다.
그런데 쿠일다르의 쿠이텐 산 정상 깃발꽂기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1994년 몽•일합동조사단의 조사결과 및 《집사》<부족지> 등의 위치 비정에 의하면 쿠이텐 산 정상 깃발꽂기와 마우 운두르 후방에 있는 칼랄진 엘레트(칼라 칼지드 사막)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집사》에서는 쿠일다르가 쿠이텐 산 정상 깃발꽂기 때문에 부상을 입어 발주나 호수 인근에서 사망했다고 기록했으나, 《몽골비사》에서는 칼라 칼지드 사막에서 아칙 시론에게 찔려 부상당했다가 발주나 호수 인근에서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테무진의 안다인 쿠일다르가 이 전투에서 사망한 것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쿠이텐 산 정상 깃발꽂기를 삽입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에 카마그 몽골군은 일제히 돌격을 감행했다. 물론 쿠일다르는 며칠 있다가 부상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쿠일다르와 오로오드 주르체데이의 분전 및 케레이트 일카 셍굼의 부상 덕에 카마그 몽골군은 완전한 궤멸은 면했지만 그 피해는 심각하여 이후 점검을 한 결과, 병사의 숫자가 2,6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후 테무진은 발주나 호수에서 19명의 지휘관들과 함께 서로의 충성과 신의가 계속될 것이라는 맹약을 하고,(발주나 맹약) 호수의 흙탕물을 술 대신 들이켰다.《원조비사》를 영역한 Urgunge Onon 교수에 따르면, 발주나 호수는 대략 위도 48, 경도 119에 위치했는데 이는 후룬베이얼시의 남서쪽이다. 또한 테무진과 맹약했던 19명의 지휘관은 훗날 발준투[33]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테무진은 발주나에서 세력을 회복하며 옹 칸, 셍굼, 알탄, 쿠차르, 자무카 등에게 서신을 보내 이들 사이를 이간질시키고 힘을 약화시키려고 했다. 효과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자무카와 알탄은 옹 칸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여 동나이만의 타양 칸에게로 도망치게 되었고, 자무카에게 속해 있었던 다리타이 옷치긴을 비롯한 일부 카마그 몽골 부족민, 그리고 이때 옹 칸의 처신에 실망한 케레이트 부족민들이 테무진과 연합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 와중에 테무진의 동생인 카사르가 발주나에 도착하자 테무진은 이를 이용하여 카사르의 이름으로 옹 칸에게 항복한다는 서신을 보냈다.
옹 칸은 이러한 기만책에 단단히 속게 되었고, 테무진은 무방비 상태로 제지르 운두르('고지') 산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었던 옹 칸을 밤중에 급습했다(1203년 가을). 이 제지르 운두르 산 전투에서 케레이트군은 3일 동안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결국 참패하고 카마그 몽골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 옹 칸과 그 아들인 셍굼은 그야말로 목숨만 건져서 달아났다.
후에 옹 칸은 동나이만으로 망명하려고 했으나 보초병들이 옹 칸의 꾀죄죄한 행색을 보고는 당신이 어떻게 옹 칸일 수 있냐면서 내쫓았다. 하지만 옹 칸이 자꾸 우기자 화가 난 나이만 보초병이 냅다 그를 죽여버렸다. 한편 셍굼은 황무지로 도망쳐 마적이 되었다가 자기 부하에게 배신당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이 부하도 테무진에게 처형당했다. 테무진은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을 좋아했다고 하며, 군신간의 관계도 약속으로 봤다.
이렇게 몽골 중앙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케레이트를 제압한 테무진 칸은 몽골 서부 고원의 최강 세력이었던 동나이만의 타양 칸 또한 공격하여 차키르마우트 전투(1204년 가을)[34]에서 격파하고, 케레이트에 이어 동나이만도 괴멸시켰다.
이제 카마그 몽골에 의한 통일 전쟁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테무진 칸은 자신의 아내를 납치한 원수이자 5대 부족 중에 마지막으로 남은 메르키트도 1204년 겨울, 재차 공격하여 다이칼 코르간[35] 전투에서 톡토아 베키의 군대를 격파한 다음, 도망가는 잔당을 쫓아 철저히 붕괴시켰다. 메르키트의 일부 씨족들은 테무진 칸에게 투항했고, 톡토아 베키와 그 아들은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에게 도망쳤다. 이때 테무진은 그 유명한 우량카이 수부타이에게 메르키트를 섬멸할 것을 명령했다. 수부타이는 그 명령대로 메르키트의 잔당을 제거했다.(1205년)
테무진 칸은 원한으로 얽혔던 메르키트를 초토화하는 것으로 복수를 실행함으로써 몽골 초원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동나이만에 가 타양 칸에게 붙어있었던 친구이자 숙적인 자무카의 세력을 완전히 꺾어서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이후 자무카는 6명 정도의 부하들만을 데리고 탄누 산맥으로 숨어 들어가 도적 생활을 하던 중에 부하들에게 배신당하여 테무진 칸 앞으로 끌려오게 되었다. 테무진 칸은 자무카를 끌고 온 그의 부하들을 비겁하다고 꾸짖은 후 모조리 처형시켰다. 그리고 자무카에게 자신과 함께할 것을 권유했으나 자무카가 명예로운 죽음을 원하자 피를 보지 않고 죽도록 해주었다(1206년). 몽골 초원의 전통 신앙에 따르면 몸에서 피가 나며 죽은 영혼은 하늘의 신 텡그리의 품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래서 피가 몸에서 안 나오며 죽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죽음이었다. 자무카가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는 이야기마다 전부 다르게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케레이트의 옹 칸, 동나이만의 타양 칸, 자다란의 자무카, 메르키트의 톡토아 베키 등을 비롯한 모든 숙적들과 싸워 승리를 거둔 테무진은 몽골 초원의 명실상부한 패자로 부상했다. 그리고 통일 전쟁을 거의 마친 1206년 봄, 오논강 하류에서 소집한 쿠릴타이에서 예케 몽골 울루스(몽골 제국)를 세우고, 칭기즈 칸의 자리에 올랐다. 라시드 앗 딘이 저술한 《집사》에 따르면 뭉릭의 아들 쿠쿠추가 이 칭호를 정했다고 한다. 칸이라도 이름 외에 다른 칭호를 쓰는 건 드문 일이었고, 세력이 강대해진 경우나 옹 칸의 경우처럼 금나라에 의해 왕으로 봉해진 경우에 제한적으로 쓰인 일종의 정치적, 군사적 의도가 내포된 것이었다.
같은 해(1206년), 칭기즈 칸은 베수드 제베를 보내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을 수자우강에서 사로잡아 처형시킴으로써(수자우강 전투) 마침내 몽골 초원의 기나긴 난세를 완전히 종식시켰다.
이듬해인 1207년부터 칭기즈 칸은 몽골 북쪽의 부족들을 복속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일은 장남 주치가 맡았는데 그는 먼저 바이칼호 근처에 살던 키르기스족을 복속시켰다. 1208년에는 오이라트족도 몽골 울루스 안으로 들어왔다. 바르군, 우르수드, 캉가스, 투바스, 부리야트 등 몽골 외곽의 숲에 살던 부족민들도 잇따라 주치를 만난 뒤 몽골에 귀순했다. 전투도 치르지 않은채 이들을 대거 귀순시킴으로써 주치는 칭기즈 칸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 1209년에는 중국 서부, 즉 오늘날의 신강에 살고 있었던 튀르크계 위구르(회홀)족이 사신을 보내 충성을 맹세했다. 위구르는 몽골 고원 외부의 세력들 중 칭기즈칸의 세력을 인정한 첫 번째 사례였다.
7. 통일 이후
몽골 고원을 완전히 통일한 이후, 칭기즈 칸은 울루스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법과 질서를 바로잡았으며, 무엇보다도 대칸의 권위와 권력을 강화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그동안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회복하고, 힘을 보강하는 데 주력했다.7.1. 텝 텡게리 처형
칭기즈 칸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대칸 못지 않은 권력을 지녔던 무당(샤먼)을 처형한 것이었다. 그 무당은 아버지 예수게이의 충실한 부하였던 콩고탄 씨족의 뭉릭 에치게의 아들 쿠쿠추 텝 텡게리(Kököču Teb-Tenggeri)였다.[36] 텝 텡게리는 테무진이 초원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하면서 몽골 초원의 여론을 테무진 측으로 이끌어온 개국공신이었다.칭기즈 칸은 몽골 고원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무당의 신탁을 선전용으로써 곧잘 써먹었다. 그런데 샤먼 텝 텡게리가 황족인 카사르를 구타해 카사르가 형인 칭기즈 칸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칭기즈 칸이 카사르에게
평소에 잘난 척 하더니 뭔 소리냐.
하는 식으로 냉대하자, 토라지고 말았다. 이에 텝 텡게리는 카사르가 위험하다며 제거를 종용했고, 칭기즈 칸은 카사르를 문책했다. 이 소식을 들은 모후 호엘룬이 같은 젖을 먹고 자란 놈이 쌈박질이냐?
라는 식으로 상반신 노출 시위를 하며 다그치자, 칭기즈 칸은 부끄러워하며 카사르에 대한 문책을 그만두었다. 그러나 호엘룬 몰래 카사르의 백성을 빼앗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제인 테무게 옷치긴 역시 텝 텡게리에게 모욕을 당한 후, 하소연했다. 그러자 부르테가
당신이 살아있는데도 횡포가 이러한데, 당신이 죽으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어요?
라고 말하니, 그제서야 동생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결국 칭기즈 칸은 무당을 체포한 후, 등뼈를 끊어버리는 형벌을 내려 죽여버렸다. 이때 무당을 죽이고 길을 나서던 칭기즈 칸을, 텝 텡게리의 형제 6명이 위협적으로 둘러쌌으나, 비켜라, 나가야겠다!
라고 말한 뒤 그들을 뿌리치고 나왔다. 이후 텝 텡게리의 자리에는 온순하고 나이 든 샤먼을 임명했고, 그 결과 몽골 제국에서 칭기즈 칸에게 대적하는 자는 없게 되었다.잭 웨더포트를 포함한 연구자들은 칭기즈 칸이 무당의 영적인 힘을 두려워해서 그랬다고 생각했지만, 칭기즈 칸은 자신을 배신하려는 무당의 허리를 꺾어 죽인 뒤, 시체를 치우고 그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했다. 즉 영적인 것을 두려워해서 벌인 행위로 보긴 어렵다. 여기서 설명되는 텝 텡게리의 일화는 《몽골비사》의 내용을 근거로 하는 것인데, 《집사》에서는 이와 다르다. 《집사》에서는 처음부터 카사르와 칭기즈 칸이 쿵짝이 맞아서 형제에 의한 텝 텡게리 살해가 이루어진 것으로 나온다. 이는 일 칸국 내에서 권력 투쟁이 심각했던 시기를 딛고 《집사》가 작성되었기 때문에, 황금씨족의 화합을 호소하는 목적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어 황금씨족의 분란을 최대한 숨기려는 의도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갈등을 정치적 지도자인 칭기즈 칸과 종교적 지도자인 무당 간의 권력 싸움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료를 살펴보면 애초에 당시 샤먼들은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거나 간섭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샤머니즘 신앙은 몽골 고원에 광범위하게 뿌리내려져 있었고, 샤먼은 이 환경에서 특수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담당한 직능, 즉 치병과 예언 등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 힐책당하거나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텝 텡게리가 통상적인 샤먼들 가운데서 왜 유독 튀는 존재였는지를 생각해보면 다른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그가 살해된 것 역시 정치적인 투쟁의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7.2. 몽골 문자 창제
몽골 통일 이후 글도 없었던 상태에서 칭기즈 칸은 동나이만의 재상이었던 타타통아에게 몽골 문자를 만들도록 지시함으로써 오늘날 몽골 문자의 기틀을 잡았다. 이 몽골 문자로 몽골 역사서를 기록하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원조비사》였다. 현재는 몽골 문자(위구르친 몽골문)로 기록된 것은 전해지지 않고, 한자로 음사한 것이 전해진다.7.3. 《예케 자삭》제정
또한 몽골 초원의 모든 부족들이 지켜야 할 하나의 공통된 법률을 제정했으니 이는 곧 《자삭》(야삭, 자사크)이라는 법전으로 성문화되었다. 현재 원본은 남아있지 않지만 고려를 포함해 다양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특징으로는 처벌이 강한 편으로, 금지 행위의 대부분이 사형으로 끝난다. 내용은 대개 몽골의 낡은 풍습이나 악습 등을 폐지하고, 개혁하며 오래 전부터 초원에서 생겨났던 크고 작은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들이 주를 이루었다. 이 《자삭》은 관습법적인 측면도 강했는데, 불에 칼을 대는 행위, 문지방을 밟는 행위, 물에 손을 담그는 행위, 동성애 등을 엄격히 금지하고, 어길 시에는 처형했다.또 초원 사람들이 더 이상 다른 사람의 신부나 신랑을 강탈해가지 못하도록 법률로 약탈혼을 금지한 반면, 지참금 제도를 구체적으로 서술했다. 이는 자신의 아내가 메르키트에게 납치당했었던 칭기즈 칸의 괴로운 경험에서 비롯된 것 같다. 애초에 메르키트가 보르테를 납치한 이유도 칭기즈 칸의 아버지인 예수게이가 메르키트족과 혼인하기로 되어 있었던 호엘룬을 납치해 결혼한 것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유목민으로서의 전통을 잃지 않기 위해 이슬람 방식과는 다른 방식의 도축 방법을 고수할 것을 명시했고, 유목민답게 수간을 금하거나, 말을 훔친 자는 9마리로 배상하고 배상할 수 없으면 자식을, 자식들도 없으면 자기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반대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선진적인 조항도 있었다. 칭기즈 칸 자신도 이 《자삭》을 어기지 않았으며, 공통 문자와 법률의 제정은 몽골 울루스 내부의 통치를 튼튼히 하고, 대칸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초석이 되었다.
7.4. 경제 개혁
또한 경제 체제도 개혁하여 유목과 수렵에 의존하는 대신 상업을 발달시키려고 했다. 그에 따라 무역로를 개발하고 주위에 존재한 나라들과 교역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탕구트족의 서하나 거란족의 서요, 튀르크계 오구즈족의 호라즘 왕국 등의 외국들과 접촉했지만 곧 여러 가지 이유로 충돌이 발생하여 무역로가 침략로로 변했다. 결국 원활한 무역로를 닦으려는 노력이 전쟁으로 나아간 것이다.8. 세계 정복
<토크멘터리 전쟁사> - 칭기즈 칸과 몽골 제국의 세계 정복전쟁 |
그중 하나는 칭기즈 칸이 본래 관심을 가졌던 쪽은 바로 세계 정복이 아니라 교역이었다는 것이다. 원래는 북중국과 서요 정도로 만족하려 했다는 것. 당시 서요는 몽골 통일 이후 칭기즈 칸에게 패배하여 도주했던 동나이만의 왕자 쿠츨루크가 장악한 상황이었다. 서쪽과의 교역은 호라즘 왕국과 교류하는 정도로 그치려고 했는데, 호라즘 왕국이 거부하는 바람에 "그럼 직접 길을 트겠다" 라는 식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쪽으로 계속 진출하다보니 일이 더 커졌다는 결론이다.
다른 가설로 몽골족은 원래 싸움이 끊이지 않다가 겨우 통일국가를 이룩한 상태라서 얼마든지 내부 분쟁의 씨앗이 존재했고, 이러한 내부의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밖으로의 원정을 감행했다는 주장도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론, 테무진이 "칭기즈 칸"의 호칭을 얻으면서부터 세계를 지배한다는 사상에 심취하게 되었고, 그것이 타국과의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는 시각도 있다.
칭기즈 칸의 정복 활동을 살펴보면 금나라의 연경(베이징), 즉 중도 대흥부를 포위한 후에도 정치적 복속과 조공품의 상납만 약속받고, 초원으로 돌아가는 등 정말로 '지배'하는 것에 큰 욕심을 가졌다고는 보이지 않는 점이 많다. 그의 원정은 지배가 아니라 대부분 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목적이 짙었으며, 이 과정에서 응징과 복수를 명분으로 내걸었을 뿐이었다. 몽골이 그나마 정복전에 가까운 전쟁 양상을 띄게 된 것은 제2대 태종 오고타이 칸 시절부터였으며, 아무리 빨리 잡아도 칭기즈 칸 말년부터였다.
칭기즈 칸이 정복한 대외 영토가 워낙 넓은지라 평생을 대외 정복에 힘써온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칭기즈 칸의 생애 대부분은 몽골 통일 전쟁을 하면서 보냈다. 가문이 망하고 부족들이 흩어진 후 적대 부족에게 노예로 붙잡히는 등, 완전히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겨우 세력을 일으킨 초창기에는 강한 부족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으며, 특히나 전략에 능한 자다란부의 자무카가 칭기즈 칸의 라이벌이었다. 자무카는 끈질기게 테무진을 붙잡고 늘어졌으며, 마침내 자무카를 꺾은 다음부터는 몽골 통일 과정이 순식간에 진행되었다. 몽골 통일이 1206년이고, 칭기즈 칸의 붕어 년도가 1227년이니, 대외 정복에 힘을 기울인 시기는 21년밖에 채 되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의 짧은 기간에 세계 제국의 건설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이루어낸 것이었다.
8.1. 서하(탕구트족) 원정
몽골 통일을 마치고 제도를 정비하며 힘을 키운 칭기즈 칸은 가장 먼저 탕구트족[37]이 세운 서하를 침략하면서 본격적인 대외 정복의 신호탄을 쏘았다(1207년). 서역과의 교역로를 마련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칭기즈 칸과 싸워서 패배한 나이만족의 잔당들이 여전히 서하에 붙어있었기 때문이었다.3차[38]에 걸친 전쟁 기간 동안 서하군은 우수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산개 전술을 펼치는 몽골군에게 맞서 참패를 면하지 못했다. 1205년 제1차 서하 원정은 몽골 제국이 세워지기 전 자무카를 추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종의 약탈전 성격을 띠었다. 서하군이 몽골군보다 약해서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몽골군은 서하의 '흑장군'이라 불리는 장수가 지키는 카라호토라는 성을 공격하다가 크게 혼쭐이 나기도 했다.
서하는 대대로 중개 무역으로 국가의 부를 쌓아오던 나라였는데, 전쟁 상황에서는 성에 들어가 농성을 해야되기 때문에[39] 제대로 된 무역이 어려웠다. 결국 계속된 몽골 침략은 국가 경제를 붕괴시켰고, 설상가상으로 그때 서하에는 지진이 잦았다. 당시 동아시아의 주요 강대국들이 몽골군과의 회전에서 맥을 못추는 이유를 군대의 편제 차이로 보는 시각도 있다. 동아시아 강국들의 군대의 주축이 되는 병종은 중갑을 입은 중기병이었는데 이러한 중기병은 보병을 상대로는 매우 유리했지만 기병끼리의 전투에서는 매우 불리했다. 당시 몽골군은 경기병 위주로 편제되어 있었고, 이는 적과의 대규모 회전에서 몽골군을 최강으로 만들어주어 어떤 적도 몽골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이 가설은, 중기병은 기병간 전투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나타난 병종이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많이 부정되는 가설이다. 칭기즈 칸의 군대에서도 중기병을 많이 사용했고, 애초에 제대로 된 중기병을 처음 운용한 것이 유목민족이었다. 단지 전투에서 기병을 제압하는 데는 최고인 중기병이었지만 영토 내를 돌아다니며 약탈해 국가 경제를 마비시키는 전략엔 대응할 수 없었다.
결국 몽골 군대는 쳐들어올 때마다 수많은 서하인들의 목숨을 빼앗았고, 약탈까지 일삼으면서 서하인들에게 죽음의 사자와도 같은 존재로 여겨지게 되었다.
마침내 몽골군은 서하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수도인 영하(현 인촨)를 포위하는 데 성공했으나 공성전 경험이 부족해서 이래저래 난항을 겪었다. 둑을 건설해 황하의 물줄기를 돌려 영하를 물에 잠기게 하려는 작전도 펼쳤지만 몽골인들이 물줄기를 다루는 법에 무지해서 되려 수해를 겪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수도가 포위당한 상황에서 급한 쪽은 서하였고, 제7대 황제였던 양종은 금나라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결국 오랜 대치 상황을 버티지 못한채 1209년, 칭기즈 칸에게 막대한 공물과 황녀를 바치고 항복을 청했다.
8.2. 금나라(여진족) 원정
몇 년 후인 1211년, 칭기즈 칸은 숙적인 금나라에 대한 원정을 전격적으로 단행했다.북중국을 지배하며 한족의 남송과 대치하고 있었던 금나라는 폭군인 해릉양왕의 치세때, 칭기즈 칸의 선조들 중 한 명인 카마그 몽골의 제2대 군주 암바가이 칸을 사로잡아 목마에 못박은 후 목숨을 빼앗은 일이 있었다. 따라서 칭기즈 칸에게 금나라는 조상의 복수를 위해 반드시 제압해야 할 원수였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금나라가 대대로 북방의 유목 민족들 사이에 서로 싸움을 붙여 견제해왔기 때문에 격멸해야 할 대상이었다.
금나라의 대북방 정책은 반간계라는 기미정책의 한 전략으로서 분할하여 지배하는 것이었다. 즉 주변의 작은 나라들이 힘을 못 키우도록 큰 나라가 견제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원정을 통해 조져버릴 수도 있었으나 예나 지금이나 원정은 돈이 엄청 많이 들었다. 이럴 때 싸고 효과도 좋은 것이 바로 반간계였다. 그러나 반간계를 이겨내고 힘을 키워 오히려 자신들에게 반간계를 사용한 커다란 나라를 작은 나라가 역관광하는 경우도 역사에 비일비재했다. 금나라도 마찬가지여서 거란족의 요나라가 생여진 부족들에게 행한 반간계를 극복하고, 요나라를 정복했으며, 자신들이 반간계를 행한 몽골에게 정복당했고, 그 후예인 만주족 역시 한족 왕조인 명나라의 반간계를 극복하고 청나라를 건국했다.
금나라로서는 칭기즈 칸이 몽골 고원을 통일하자 불가피하게 이들과 싸워야 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여하튼 몽골군이 금나라를 전격적으로 침공하자 거란족들이 이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금나라를 세운 생여진족 완안부가 과거에 거란족에게 쌓인 원한이 있어 이들을 박해했기 때문이었다. 1211년 겨울, 오사보에서 금나라군과 겨뤄서 이긴 후(오사보 전투), 몽골 족과 거란족 연합군은 거용관 부근의 야호령에서 금나라군 총사령관 완안승유[40] 휘하의 대군 400,000명과 맞붙어 이들을 크게 격파하고(야호령 전투), 뒤이어 회하보(澮河堡)에서 남은 금나라군을 수습한 완안승유와 다시 맞붙어 3일 동안의 포위전 끝에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회하보 전투). 이때 칭기즈 칸도 자신이 직접 기병 3,000기를 이끌고 돌격하여 금나라군과 격렬하게 싸웠다고 전해진다.
이 두 번의 대전투로 금나라의 야전군 주력 절반이 궤멸되었다. 이후 만리장성 부근의 장애물을 모두 밀어버리고 길이 활짝 열리자 몽골군은 장성으로 밀고 나갔으나 역시 공성전에는 익숙하지 못하여 관문을 돌파하고 화북 평원으로 진입하는 데 꽤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사실 거용관은 대대로 난공불락의 요새로 심지어 20세기 중반의 중일전쟁 때도 교전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복원이 잘 되어 있으니 사진을 검색해보기를 추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기즈 칸은 후주(도시 이름)를 점령한 후, 거용관의 완강한 저항을 뚫었다. 이때 만리장성 부근에 거주하던 튀르크계 옹구트족의 도움을 크게 받았는데, 이후 옹구트족은 칭기즈 칸의 신임을 받으며 몽골 제국에 대대로 중용되었다. 거용관을 뚫고 들어간 칭기즈 칸은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오늘날의 북경)까지 공격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때 금나라의 동경유수(요양 태수)였던 포선만노가 반란을 일으키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동진을 건국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그 결과 금나라는 본거지인 만주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또한 칭기즈 칸을 도와주었던 거란족의 수장 야율유가도 이때 동요를 건국하면서 만주에는 이때부터 여러 세력이 난립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자 금나라의 제7대 황제였던 위소왕은 승상인 호사호에게 목숨을 잃었고, 위소왕의 조카였던 완안오도보가 제8대 선종으로 즉위했다. 금선종은 칭기즈 칸에게 암바가이 칸의 유물을 돌려주면서 화의를 요청했고, 마침 물자 부족에 시달리던 칭기즈 칸이 이를 받아들여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챙기고 철수했다.
그러나 선종이 1214년 5월, 수도를 중도에서 하남의 개봉(오늘날의 카이펑)으로 천도하자(정우의 남천) 칭기즈 칸은 금나라의 황제가 변심을 했다고 여겨 다시 한 번 중도를 포위 공격했다. 그동안 중국의 단단한 성벽들을 공격하면서 단련된 몽골군은 능숙하게 공성전을 수행해나갔다. 금나라군은 오랜 포위전에 지친 상태였는데 이때 포위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중도성 내부에 식량이 다 떨어져 사람들이 인육을 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중도는 방어군 사령관 완안복흥[41]이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끝내 무너지게 되었다. 성을 함락한 몽골군은 중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엄청난 약탈을 실행한 후 북방으로 돌아갔다.
이 무렵에 칭기즈 칸은 요나라 야율씨 황족 출신의 금나라 관리였던 야율초재를 등용했다. 실무와 정치에 능했던 야율초재는 이후 몽골 제국의 내정을 다듬는 데 일조했다. 본래 칭기즈 칸은 금나라 땅을 점령한 후에 그곳에 살던 농민들을 모두 죽이고, 모든 땅을 가축을 키우기 위한 방목지로 개간할 생각이었으나 야율초재의 조언에 따라 점령지의 농민들을 죽이지 않는 대신, 조세를 거둬들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그런데 야율초재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해당 일화가 사실인가엔 의문의 여지가 있다. 또한 방목지로 개간을 한다고 기후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으므로 금나라 정복전 중에도 기후 때문에 중간중간 몽골 초원으로 돌아갔던 칭기즈 칸이 과연 이 땅에서 그런 말을 했을지도 의문이다. 야율초재가 학식과 점술로 칭기즈 칸의 신임을 얻은 것은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정치적 영향력이 그렇게 크다고 볼 수는 없는 인물이었다.
8.3. 서요(거란족) 원정
이후 칭기즈 칸은 서요(카라 키타이)로 도망간 동나이만의 왕자 쿠츨루크[42]를 사로잡기 위해 명장 제베를 사령관으로 삼아 서요로 군대를 급파했다. 당시 서요의 상황은 매우 어지러웠다. 서요는 요나라의 황족 야율대석이 중앙아시아의 모든 이민족을 누르고, 나라를 세운 후 대대로 그곳에서 강대국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서요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제국이 분열하려는 조짐을 보이자 휘하에 거느리고 있었던 여러 속국들이 떨어져 나갔다.당시 서요의 황제는 후에 '말제'로 불리게 되는 야율직로고였다. 말제는 비참하게 죽어 시호도 못받은 망국의 군주를 부르는 호칭으로 동시대 비슷한 처지의 인물로는 서하의 말제 이현과 금나라의 말제 완안승린이 있었다. 서요의 말제는 쿠츨루크를 크게 신뢰해서 자신의 부마로 삼는 등 환대했다.
그러나 쿠츨루크는 장인인 야율직로고가 호라즘 제국을 응징하기 위해 병력을 모아 원정을 나간 사이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호라즘 왕조는 서요에게 틈만 나면 압박을 받는 일종의 속국의 처지에 있었는데, 무함마드 2세[43]에 의해 서요에게서 자립하고 전성기를 막 열려는 상태였다. 호라즘 왕조 항목에도 있듯이 호라즘은 서요에게서 완전 자립한 이후, 전성기를 맞으려던 와중에 칭기즈 칸의 대대적인 침략을 받아 번영을 제대로 맛보지도 못한 채 멸망하고 말았다.
쿠츨루크는 이때 서요 본국을 장악한 후, 장인이었던 야율직로고를 폐위시켰다. 폐위된 이후 야율직로고가 바로 살해당한 듯이 알려져 있는데 야율직로고는 그 이후에도 명목상으로는 상황의 대접을 받으며 2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쿠츨루크 자신이 제위에 오르는 은혜도 모르는 행동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런데 쿠츨루크는 제위에 오른 뒤 선정을 베풀기는커녕 오히려 이슬람교를 탄압하는 등의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서요 백성들의 원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쿠츨루크는 본디 기독교인이었고, 서요의 부마가 된 후에는 불교도로 개종했다. 그런데 당시 서요의 피지배층이 대부분 이슬람교를 믿는 이민족이었기 때문에 불만은 더 심했을 것이다. 서요는 소수의 거란족이 다수의 이민족을 지배하는 전형적이고, 불안정한 정복왕조로 나라가 혼란에 휩싸이자마자 쉽게 붕괴했다.
한편, 칭기즈 칸은 쿠츨루크를 처리하기 위해 서요로 들어갈 방법을 고심하고 있었는데 이 혼란은 침략의 좋은 구실이 되었다. 제베 지휘하의 몽골군이 서요를 침공하자 쿠츨루크의 학정에 지친 서요 백성들은 오히려 침략자인 칭기즈 칸의 군대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떠한 종교를 신봉해도 된다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 칭기즈 칸의 칙령이 있었기에 종교적으로도 몽골군을 해방군으로 인식했다.
결국 쿠츨루크는 전투에서 대패하고 도망치다가 붙잡혀 죽임을 당했다. 쿠츨루크는 칭기즈 칸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서요의 '결제'라고 불린다. 거란족의 마지막 제국이었던 서요는 끝내 멸망(1218년)하고 말았는데 몽골 제국의 침공으로 멸망한 첫 번째 국가라는 기록을 남겼다.
8.4. 호라즘(오구즈족) 원정
한편 칭기즈 칸은 수니파의 종주국인 아바스 칼리파조를 누르고, 중동의 새로운 강자로 군림하던 호라즘 제국과의 교역을 시도했다. 호라즘은 서요에 대한 칭신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셀주크 튀르크 제국과도 대등하게 붙게 된 당대에 바로 몽골군의 침공을 받았다. 불과 10년도 되지 않는 짧은 전성기가 몽골군에 의해 날아간 셈이었다.처음으로 호라즘 제국에서 상인이 왔을 때 상인들 중 한 명이 몽골인들을 상대로 자신들이 가진 보물 같은 건 못 본 촌놈들이라고 우습게 보며 바가지를 씌우려 하자 몽골인들은 되려 금나라에서 약탈해온 금은보화를 보여주며 "이것을 봐라!" 라며 그의 물건을 빼앗고 체포했다. 그 후 다른 상인들이 더이상 바가지를 씌우지 않게 되자 몽골인들은 처음에 물건을 뺏은 상인을 포함해 모든 상인들에게 물건 원값 이상의 돈을 주면서 화해를 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칭기즈 칸이 호라즘에 보낸 대규모 사절단이 오트라르 성의 성주인 이날축에게 물건을 모두 빼앗기고 학살당하는 참사가 일어나면서(1218년) 호라즘과의 관계는 험악해졌다. 이후 칭기즈 칸이 사과를 요구하는 전령을 보냈으나 사절단을 해친 이날축은 호라즘 술탄 무함마드 2세의 친척이었기 때문에 처형되지 않았다. 오히려 사과를 받으러 갔던 몽골의 전령들은 되려 수염이 깎인 채로 돌아오는 수모를 겪었다. 당시에 수염은 남자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를 깎아버린 것은 곧 거세와 비슷한 굴욕이었다.
이에 격노한 칭기즈 칸은 금나라에 대한 전쟁을 사준의 한 명인 무칼리에게 맡기고, 친히 20만(일설에는 11~15만으로 본다. 이 중 몽골 정규병이 8만 정도에, 각 점령지에서 징발한 부족 분견대가 추가된다. 서하는 이 원정에 불참한 댓가로 단단히 찍히게 된다.)에 달하는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 원정을 떠났다.(1220년) 당시 쇠퇴한 아바스 칼리파조를 무너뜨리고 짧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던 호라즘 제국은 40만 명에 달하는 대군을 거느린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호라즘 술탄 무함마드 2세는 아들인 루큰 앗 딘에게 본토 수비를 맡긴채, 본인은 군대를 이끌고 호라산, 사마르칸트, 잔드를 거쳐 투르키스탄의 국경지대까지 향한 뒤 킬리강과 카임치강 사이에서 몽골 군대와 대치했다. 당시 무함마드 2세가 대치하고 있었던 몽골군은 수부타이와 토가차르의 군대였는데 원래 이 부대는 쿠두를 치기 위한 군대였다. 무함마드 2세의 공격에 몽골군은 물러나면서, 칭기즈 칸의 명령이 없기에 호라즘군과 싸울 의향이 없다고 밝혔지만 무함마드 2세는 이를 무시하고 계속 공격했다. 그러나 호라즘 군대는 역으로 포위되어 무함마드 2세까지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무함마드 2세는 아들 잘랄 웃 딘 밍부르누의 활약으로 간신히 탈출해 사마르칸트로 귀환했다.[출처1-2-2-2-5]
외형적으로는 호라즘 제국이 몽골 제국에 크게 뒤쳐지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위의 영토 확장 부분에서도 설명했다시피 대부분의 영토는 6~70년에 이르는 혼란기를 거친 끝에 군사적으로 막 제압된 상황이었으므로 아직 국가의 통치력이 확고히 자리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위에 서술한 대로 호라즘에 이를 갈던 여러 부족들은 칭기즈 칸을 환영하고 협력했다. 그들이 지리적 정보라든지 여러 정보를 제공해 몽골에겐 큰 도움이, 반대로 호라즘에게 재앙으로 다가온 셈이 되었다.
칭기즈 칸은 이렇게 협력한 부족들에게 무역이라든지 여러 권리를 보장하여 보답했다. 이렇게 하여 한층 유리해진 칭기즈 칸은 네 갈래로 군대를 조직, 사방에서 파상 공세를 펼쳤고, 엄청난 속도로 군대를 몰아쳐 새 수도인 사마르칸트 등[45] 트란스옥시아나의 핵심 도시들을 격파하자 호라즘 세력은 바로 지리멸렬해졌다.
이전 수부타이 군대와의 전초전에서 몽골군의 야전 능력을 본 무함마드 2세는 전면전에서는 승산이 없다고 판단, 각 도시에 야전을 피하고 농성전으로 임하기를 지시, 시간을 끌면 몽골군이 지쳐 돌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사전에 상인들로부터 얻은 호라즘 정보를 토대로 금과의 전쟁에서 노획한 공성 무기와 기술자들을 데리고 왔고, 이 위력 앞에 도시 방어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몽골군에 저항한 도시들은 외부 지원 없이 자력으로 방어전을 펼치다가 점령된 뒤 잔혹하게 학살당했다. 한편 이란 서부 지역으로 돌면서 병력을 모아 보려던 무함마드 2세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카스피해의 한 섬에서 병에 걸려 사망했다.(1220년) 무함마드 2세를 끈질기게 뒤쫓던 베수드 제베와 우량카이 수부타이 휘하의 몽골군 3만 호는 추격 도중 키예프 루시의 땅까지 도달했는데, 이것이 이후 깊은 악연을 맺게 된 러시아와 몽골의 첫 번째 대면이었다.(1223년, 칼가강 전투)
전쟁의 원인을 제공했다고 알려진 오트라르의 영주 이날축은 오트라르 성이 함락된 후 몽골군에 붙잡혀 두 눈에 금을 녹인 물을 들이붓는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물'에 대해서는 녹인 은, 녹인 금, 끓는 수은 등 언급하는 사서마다 말이 다 다르다. 2005년에 지상파에서 방영되었던 드라마 <칭기즈 칸>에서는 '녹인 금' 설을 채택했다. 확실한 것은 이날축의 탐욕을 조롱할 겸 이런 방식으로 죽였다는 것이다. 2006년에 한국 지상파를 탔던 드라마 <칭기즈 칸>에선 끓는 수은을 부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소설 《천년영웅 징기스칸》에서는 금을 녹여서 눈과 귀에 부은 다음, 마지막에는 입 안에 금을 부어서 죽인 것으로 묘사했다.
도주 중에 호라즘 술탄의 자리를 계승한 무함마드 2세의 아들 잘랄 웃 딘 밍부르누(1199년 ~ 1231년)는 옛 수도인 구르간즈와 왕조의 거점인 호라즘 지역을 포기하고 가즈니 방향으로 갔다. 아프간 지역에서 병력을 충원한 잘랄 웃 딘은 카불 근교의 파르완에서 몽골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으나(1221년 여름, 파르완 전투),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몰아 추격해 오자 인도 방면으로 도주했다. 결국 인더스 강변에서 따라잡힌 잘랄 웃 딘의 호라즘 군대는 몽골군에게 궤멸당했으나(1221년 11월, 인더스강 전투) 잘랄 웃 딘 본인은 간신히 탈출해 인도 노예 왕조의 수도인 델리로 갔다.
잘랄 웃 딘은 맘루크 술탄 샴스 알 딘 일투트미쉬에게 몽골과 싸우자고 제안했으나 일투트미쉬는 거부했고, 잘랄 웃 딘이 토착 세력과 손을 잡고 라호르를 점령하자 일투트미쉬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를 몰아내러 나섰다.
구자라트와 신드 등을 약탈하다가 인도에서 쫓겨난 잘랄 웃 딘은 1224년 기회를 보아 이란으로 갔고, 몽골군이 일시 철수한 틈을 타 분열되어 있었던 이란 일대의 군소 영주들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몽골군에게 또다시 패배하여 이란에서의 패권이 무너지자 이번엔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여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잘랄 웃 딘은 세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조지아 왕국을 공격하여, 수도 트빌리시를 약탈한 뒤 서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이곳에서 서방의 무슬림 국가인 룸 셀주크 왕조 및 아이유브 왕조와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1230년 잘랄 웃 딘의 군대는 룸 술탄 케이쿠바드 1세가 이끄는 아이유브-룸 셀주크 연합군에게 에르진잔 부근의 야스체멘 전투에서 패배했고, 몽골군이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여 거점까지 잃게 되었다. 그래도 살아남아 도주하던 잘랄 웃 딘이 쿠르드계 아이유브 가지에게 살해당하면서 호라즘 왕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1231년)
몽골은 호라즘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동쪽과 서쪽에 이르는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을 모두 확보하게 되었다. 또한 호라즘을 기점으로 해서 동유럽을 공략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도 큰 성과 중 하나였다. 몽골 제국이 장악한 실크로드를 오가는 캐러밴들은 실크로드의 안전을 몽골군이 수호해주는 대가로, 몽골에게 막대한 부를 선사했을 뿐만 아니라 타국에 관한 정보를 알려 주는 스파이 역할도 수행했다. 훗날 바투와 수부타이 휘하의 서방 원정군이 파죽지세로 동유럽과 러시아 제공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캐러밴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광활한 호라즘 영토를 제패한 이후, 칭기즈 칸은 지도를 만들고 인구조사를 실시했으며, 특히 상인들을 우대했다. 칭기즈 칸은 3%의 세금만 내면 상인들이 몽골 제국 어디에서든지 자유롭게 무역을 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렇듯 예전까지 세금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던 몽골인들의 사정을 생각하면 칭기즈 칸은 전쟁 뿐만 아니라 정치와 행정에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9. 최후
1224년, 칼가강 전투(1223년)에서 러시아 제공국 연합군을 대파한 제베와 수부타이가 회군을 시작했으나 제베는 중도에 병사했다. 칭기즈 칸은 1223년에 죽은 잘라이르 무칼리의 후임으로 그의 아들인 보로를 국왕에 임명하고, 서하와 금나라 정벌을 계속하도록 했다. 수년 동안의 호라즘 정벌을 마치고 카라코룸으로 돌아온 칭기즈 칸은 1225년, 4명의 아들들에게 제국을 분봉했다. 이것이 4대 칸국의 시작이었다. 1226년 칭기즈 칸은 서하를 완전히 정벌하기 위해 직접 출정을 감행했다.[46]몽골군이 서방 원정을 위해 오랜 기간 몽골 본토를 떠나 있는 동안, 서하의 제8대 황제였던 신종이 칭기즈 칸의 물자 지원 요청을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몽골 영토를 침입해왔기 때문이었다. 당시 서하는 지속적인 몽골의 침공과 자연재해(지진)로 인해 나라가 크게 어려운 상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금나라를 공격하는[47] 실책을 범했다. 그렇게 쥐어짜서 간 금나라 공격은 대실패였고 많은 군사만 잃었다. 한편 금나라도 남송에게 비슷한 실수를 했다. 몽골군의 끊임없는 습격으로 제국이 황폐화되어가는 와중에도 집요하게 금나라는 남송을 공격했다. 공격은 당연히 모두 막혔고, 서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많은 군사만 잃었다.
그런데 서하 원정이 한참이었던 1226년에 칭기즈 칸의 절친한 친구이자 어린 시절부터 따랐던 보오르추가 병으로 사망했고, 곧바로 다음해인 1227년에는 장남 주치가 원정 도중 역시 병사했다. 아끼던 두 사람이 잇따라 사망함으로써 당시 고령이었던 칭기즈 칸의 충격이 컸으리라고 추측된다.
1226년 7월, 서하 원정을 떠나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을 때, 칭기즈 칸은 11월 아르보카에서 낙마 사고를 당했으며, 이후 중병에 걸려 앓아누웠다. 사고를 당했을 당시의 칭기즈 칸은 이미 60세가 넘은 고령이었기 때문에 낙마는 굉장히 치명적이었을 수밖에 없었다.《원조비사》에 따르면 이때 이후로 건강이 크게 악화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칭기즈 칸은 낙마 이후 투병 중에 악몽을 꾸고는 건강이 악화되고 있어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그래서 3남 오고타이와 막내 툴루이를 소환하여 오고타이를 차기 대칸으로 지목하고, 또한 차남 차가타이에게도 유명을 전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차가타이는 원정을 떠나 아직 돌아오지 못한 상황이었다. 칭기즈칸은 죽기 전에 서하 정벌을 마무리짓기 위해 서둘렀다.
한편 멸망의 위기에 처한 서하는 1226년 7월, 제9대 헌종이 붕어하고, 제10대 황제인 이현(말제)이 즉위했다. 투병 중이던 칭기즈 칸은 중원 공략을 무칼리의 아들인 보로에게 맡기고 북중국, 즉 중원을 공신들에게 분봉했다.
1227년 봄 칭기즈 칸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이끌며 친정에 나서 서하의 수도였던 중흥부를 포위하고 지방을 모조리 공격했다. 당시 서하의 황제는 말제 이현이었고, 재상은 야사감푸였다. 서하군은 나름 강력하게 저항했으나 식량이 떨어지고, 피해가 커지자 6월, 말제 이현이 항복을 청했고, 1개월 간의 유예를 달라고 말했다. 이때 야사감푸는 칭기즈 칸의 앞에 끌려오자 목숨을 구걸했으나 칭기즈 칸에 대해 모욕을 한 적이 있어 용서받지 못했다. 결국 야사감푸는 처형되었다. 이때 야사감푸는 죽는 순간까지 칭기즈 칸에게 소인배라고 욕했으나 칭기즈 칸은 웃으면서 무시했다. 죽음이 임박했던 칭기즈 칸은 계략을 부려 서하의 투항을 받아들인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서하 황제가 출성하면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칭기즈 칸은 1227년에 3남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지명하고는, 몽골로 귀환하던 중 쓰러졌고 7월 12일, 서하 부근의 영주 육반산의 군영에서 66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몽골군은 칭기즈 칸의 관을 들고 회군을 개시하여 초원으로 돌아와 대칸이 생전에 자신의 매장지로 선택한 부르칸 칼둔에 안장했다. 당시 몽골군은 운구 행렬 도중 조우하는 모든 생물을 죽여 칭기즈 칸의 매장지를 극비에 부쳤다.
그리고 얼마 뒤 서하도 완전히 멸망했다. 서하의 마지막 황제 이현은 마침내 출성하여 칭기즈 칸의 게르 앞에서 알현 예식을 했고, 이후 대칸의 유언대로 전부 학살당했다. 칭기즈 칸이 죽어가면서도 서하인들을 남김없이 죽이라고 명령을 내린 탓에 현재까지도 그 후손이 거의 없다고 한다.
몽골군이 서하인들을 엄청나게 죽여서 순혈 서하인의 후손이 별로 없는 것도 하나의 이유지만, 그것보다 더 정확한 이유는 서하가 멸망한 후 서하 유민들이 몽골 제국의 일부가 되어 완전히 융화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나라 건국 이후 적지 않은 서하인이 조정에 등용되었다. 요나라의 유민인 거란족도 몽골 제국의 지배를 거부한 이들은 서하인들과 다를 바 없이 몽골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몽골 제국의 지배에 순응한 이들은 훗날 원나라 조정에 등용되었음을 감안하면 거란족과 비슷한 최후였다고 할 수 있다.
칭기즈 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금나라의 성들이 단단하니 남송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해서 남쪽에서 공략하라"
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 칭기즈 칸이 붕어한 후에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충실히 받들어 황하 이남의 개봉(현재 카이펑)에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금나라를 남송과 함께 양면에서 공격했다. 그리고 몽골군이 금나라를 공격하는 길을 빌리기 위해 흥원(한중) 일대에 다다랐을 때 그 곳을 지키던 통제 장선에 의해 수부칸이 죽자 이에 분노했고 몽골군의 공격에 남송은 수십만 명이 죽고 말았다.당시 금나라는 남송에게 구원을 요청하면서
'우리가 망하고 나면 다음은 너희들이다!'
라고 주장했지만 남송 정권에게 있어 금나라는 옛 원한 때문에 몽골보다 더 증오하는 나라였고, 결국 금나라 사신은 쫓겨나고 말았다. 사실 금나라 입장에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금나라는 하루 빨리 남송을 정복하여 그 자원을 바탕으로 몽골에 저항할 생각을 가졌으니 남송의 입장에서는 몽골이나 금나라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그리고 남송도 북송 시절, 거란의 요나라가 휘청일 때 금나라에게 길을 빌려주어 요나라를 멸망시키고(해상의 맹) 이후 금나라에게 다시 밀려난 형국을 그대로 다시 재현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결국 금나라는 마지막 황제인 말제 완안승린이 애종으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은 지 한 나절 만에 몽골군에 잡혀 목숨을 잃음으로써 1234년에 멸망했다.
칭기즈 칸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원조비사》에 기록된 낙마 후유증설이 유력하다.
[1] 孛兒帖赤那, 《몽골비사》에서는 脫卜赤顏.[2] 어웍, 부족, 성(姓)[3] 보르지긴이라는 부족명은 보돈차르 문카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고, 보돈차르의 족보상 증조부였던 보르지기다이 메르겐(Borjigidai Mergen)으로부터 유래했다.[4] 아이막(аймаг)은 한국으로 치면 도(道)에 해당하는 몽골의 행정 단위로 '애맥' 에 가까운 발음이다.[5] 온기라트, 콩기라트, 쿵크라트[6] 별 관계는 없지만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숙손득신이 노나라를 침략한 이민족의 수장인 교여(僑如)를 죽인 후,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숙손교여라고 지은 비슷한 사례가 있다.[7] 시라 케헤르[48]의 변[8] 예수게이와 다른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로 어머니의 이름은 소치겔이었다.[9] 벨구테이는 훗날 이복 형인 테무진에게 충성을 다 바쳐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몽골 제국 건국의 주역들 중 한 명이 되었다.[10] 다만 일 칸국의 재상이었던 라시드 앗 딘의 기록인 《집사》에서는 조금 다른데, 예수게이가 죽고 부족민들이 뿔뿔이 흩어진 것까지는 같지만 그 직후 테무진의 어머니 호엘룬이 직접 말을 타고, 깃발을 들며 부족민들을 추격했고, 호엘룬을 따르는 사람들과 따르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투가 벌어졌다고 한다. 전투 끝에 부족민들은 많이 축소되었지만 어느 정도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11] 옹기라트(콩기라트) 부족의 올쿠누드 씨족 출신으로, 데이 세첸의 딸이었다.[12] 카라 툰('검은 숲')의 맹약[13] 보오라 초원[14] 아내로 삼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게 그거 같긴 하지만.[15] 혈통빨이 뒤떨어지던 자무카에게 강력한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 귀중한 혈통.[16] 또는 유르킨. 카불 칸의 장남 오킨 바르칵의 후예들이었다.[17] 타이치우드를 제외한 몽골 부족을 거의 통일했을 가능성이 높다.[18] 《알탄 톱치》[19] 1189년~1208년 재위[20] 왕경 승상은 '왕경(연경, 오늘날 북경)의 승상'이라는 금나라의 직책명을 말한다. 조선으로 치면 좌의정이었으며, 몽골 발음으로는 '옹깅 칭상'이었다.[21] 지금 우리들의 생각으로는 어처구니없이 보이지만 강대국으로부터 받은 관직은 당시 부족 단위의 유목민들에게는 강력한 권위의 상징이었다. 당장 청나라를 건국한 누르하치도 이런 식으로 명나라에서 관직을 받아 권위와 부를 쌓은 인물이고 금나라 초대 황제인 완안아골타 역시 요나라의 관직을 받았다.[22] 보오라 초원[23] '7개의 깃발을 가진 자'[24] '사브락 지역의 목 쉰 사람', 천식 환자였던 것으로 추정된다.[25] 옹 칸의 아들[26] 옹 칸의 동생[27] 양아들로 삼은 테무진[28] 훗날 4준으로 불리게 되는 4명의 몽골군 명장[29] '나우르'는 '노르'라고도 하며, '호수'라는 뜻이다.[30] 카일라르강 지류의 테니 코르칸[31] 카마그 몽골의 제3대 군주였던 쿠툴라 칸의 아들이었다.[32] 테무진 칸의 사촌형제로 네쿤 타이시의 아들이었다.[33] 즉 '발주나에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34] 시라 케헤르 전투 또는 카키드마우드 전투[35] 타이칼 코르가[36] '쿠쿠추'가 이름이었고, '텝 텡게리'는 칭호였다. 이 칭호의 의미는 간략히 말하면 '天巫', '드높은 천신' 정도가 된다.[37] 《삼국지연의》에 자주 나오는 티베트계 강족의 후손이었다.[38] 1205년 1차, 1207년 2차, 1209년 3차[39] 특히 몽골군이 위에서 언급했듯이 기동력을 이용한 산개 전술을 펼칠 때였다.[40] 또 다른 이름은 완안구근[41] 또 다른 이름은 완안승휘[42] 동나이만의 마자막 군주인 타양 칸의 아들[43] 밑에도 언급되겠지만 훗날 칭기즈 칸의 침공을 받고 쫓겨다녔던 호라즘의 술탄(왕)이었다.[출처1-2-2-2-5] 라시드 앗 딘, 《집사》, 2권 <칭기즈칸 기>, 2편 2장 5절[45] 몽골군이 수도 사마르칸트를 공격할 당시 이들에게 내려진 지령은 "두 발로 걷는 것은 모두 죽여라."였다.[46] 제6차 몽골의 서하 침공. 몽골과 서하의 마지막 전쟁이었다.[47] 금나라에게 몽골을 함께 막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48] 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