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댐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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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ACFF><colcolor=#fff> 청평댐 淸平댐|Cheongpyeong Dam | |||
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착공 | 1939년 | ||
완공 | 1943년 | ||
관리기관 | 한국수력원자력 | ||
유형 | 홍수 조절 수력 발전 | ||
하천 | 북한강 | ||
주소 |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 청평리 · 설악면 회곡리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29ACFF><colcolor=#ffffff> 하천명 | 북한강 | |
공사기간 | 4년간 | ||
유입량 | 333.33m² | ||
저수량 | 1억 8,560만t | ||
생산공급량 | 241.5GWh | ||
발전시설 | 8만㎾ | ||
본댐 | |||
높이 | 31m | ||
길이 | 470m | ||
형식 | 콘크리트 중력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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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경기도 가평군에 위치한 댐이다. 1944년 가평군의 서남부 북한강에 건설되었으며 청평 수력발전소로 건설된 이 발전소는 설비용량 7만 9600kW와 평균 3만 5000kW 출력의 발전소로 전력 생산을 위주로 하는 수력발전소이며 한국수력원자력이 관리하고 있다.[1]콘크리트 중력댐으로 높이는 31m, 제방길이는 470m, 총 저수용량은 1억 8500만 톤, 총 수문은 24개, 최대 방류량은 22,240㎥/s 이다.[2] 유역면적은 9,921㎢, 만수위 때는 수면면적 12.5㎢이다.
댐은 1944년에 완공되었고, 1980년에 준공된 청평양수발전소는 1일 240만㎾의 전력을 생산하는 설비를 갖추었는데, 발전시설용량 8만㎾로 전력의 대부분을 서울에 공급한다.
여기서 생산되는 전력은 전국 발전소를 가동시키고 송전하는데 중요한 전력원이며 한강의 수위 조절에 있어서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2. 역사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청평댐은 1939년부터 1943년까지 건설된 한강 수계 최초의 댐이다. 수문만 24개이며, 높이가 31m, 길이가 470m인 대형 댐이다.북한강 수계에서 가장 먼저 건설된 댐이며. 1939년 건설에 착수하여 1943년 완공되었다. 당시 태평양 전쟁을 맞아 전시 총동원 체제에 들어간 조선총독부는 전력 공급원 확보를 위해 북한강 상류에 청평댐과 화천댐 건설을 서둘렀다. 화천댐은 청평댐보다 1년 뒤인 1944년 준공. 청평댐은 높이가 31m, 길이가 470m나 되는 콘크리트 중력식 댐으로 세워졌다. 청평댐이 완공되어 북한강에 면적 12.5㎢, 저수량 1억 8,000만t 규모인 청평호반이 생겨났다. 이 댐을 건설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역 주민들이 근로 보국대라는 미명 하에 강제 동원되었다. 근로 보국대는 1938년 일제가 공포한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전국적으로 조직된 노동력 수탈 기구였다.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징병과 징용 대상은 물론이고 학생·여성·농촌 노동력까지 원하는 대로 징발할 수 있도록 근로 보국대를 만든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보국할 국가가 없는 식민지 백성에게 ‘대일본제국’을 위해 헌신할 것을 명령했다.
1939년 경기도 가평군 청평면과 설악면을 잇는 대형 댐 건설 자재 반입을 위해 강을 가로질러 임시 다리를 만들면서 공사가 시작됐다. 청평댐 건설 공사는 카지마구미(鹿島組)[3]라는 일본의 건설회사가 진행했다. 그 당시 지역 주민들은 초기부터 공사 현장에 끌려 나와 엄청난 양의 모래와 자갈을 북한강 물에 씻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기초가 탄탄한 댐을 만들려면 골조부터 세척해야 한다는 방침 때문이다.
청평 수력발전소 정문 옆 언덕에는 공난자희생비라는 비석이 지금도 남아 있다. 당시 건설회사가 공사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세운 비석인데, 쇼와 18년(1943년) 8월 18일로 건립 일자가 적혀 있고 비석 뒷면에는 희생자 44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가평군에서 나오라기에 어쩔 수 없이 나왔거나, 먹을 것 부족한 시기에 점심밥과 저녁밥을 준다는 이유로 공사장에 왔다가 희생된 이들이 많았다.
청평댐이 완공된 1943년 조선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의 발전회사 전체의 전력을 일괄 통제하기 위해서 조선전업 주식회사를 세웠다. 2년 후 일본을 비롯한 일제강점기가 패망하고 난 후 청평댐은 남쪽 지역에서 매우 중요한 전력 공급원이 되었다.[4] 이후 1948년 북한의 단전 조치로 인해 38선 이북에 있었던 화천댐으로 북한강 물을 막아버림에 따라 이 댐의 수력 발전은 큰 피해를 보았고, 남한은 심각한 가뭄과 전력 부족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 1950년 6.25 전쟁 중반 북한에 의해 파괴되었다. 휴전 이후 복구를 하였다.
1961년 조선 전업과 배전회사들인 경성전기와 남선전기가 통합되어 한국전력공사가 되었다. 이후 북한강 수계에 춘천댐, 의암댐 등이 차례로 들어섰고, 청평 수력발전소는 전국적 정전사태가 발생하면 작은 소수 차로 발전시설을 돌려 전국 발전소를 가동시킬 시 송전 발전소로 지정되어 있다.
청평댐의 건설로 생겨난 거대한 청평호반은 1970년대 수도권에서 손꼽는 유원지로 주목받았고, 이후 재벌들의 고급별장이 속속 들어서기도 했다. 근로 보국대원들의 땀과 희생이 없었다면 시설용량 40만kW를 자랑하는 청평 수력발전소와 만수 면적 19㎢인 청평호도 일제강점기에 조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1980년에는 청평댐 인근의 호명산 정상 부근에 인공저수지인 호명호수를 건설함으로써, 유휴전력을 이용해 청평호의 물을 호명호수로 양수하는 양수식 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호명호수와 청평호 사이의 낙차는 550m이다.
3. 관광
서울특별시와 교통이 편한 경인지방에서는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온 곳으로 청평댐에서 수상 스키장이 존재하며 인기가 많은 장소로 댐에 안쪽에서는 미국인 경영의 외국인 유원지가 유명한 곳이다.그러나, 2018년 즈음 여러 언론을 통해 보도된 사실로서, 이 지역은 수도권 식수원으로서 이런 유원지의 영업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지역이었고 현재 운행하는 대부분의 수상레저시설이 불법 무허가 시설이거나, 인허가를 받았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온갖 비리로 점철이 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개중에서는 관련 유명 업체 중 하나인 '캠프통'도 포한된 것으로 밝혀졌다. KTB 투자증권의 회장이기도 한 권성문 회장이 세운 해당 시설은 인허가를 받기 전부터 무작정 건설을 해버린채 불법 영업을 일삼았고, 인허가를 반대하는 공무원들에게 뇌물를 공여하거나 집에 화염병을 던지라는 등 협박을 직접적으로 지시했으며, 거기에 지방 토호, 기자 들을 구슬려 조직적으로 협박했다. 결국 규정을 무시한채 일부 공무원들에 의해 주먹구구식 허가가 내려졌고, 결국 이것이 드러나 검찰에 의해 업체 관계자 및 인허가를 담당한 공무원들이 무더기로 입건되었다.#
청평호는 서울 근교의 아름다운 호반을 이루고 가두리 양식을 행하고 있으며, 1일 관광지로서의 성격을 가지며 관광객은 대부분 서울에서 온다. 관광 시기는 7월∼8월에 64.5%를 차지하며, 수상스키·모터보트를 즐기는 관광객이 많다. [5]
4. 여담
- 2021년 방영된 SBS 인기 드라마 펜트하우스 III에서 김미숙이 2016년 5월 17일 밤 이 댐에서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 사건명은 '청평댐 시체없는 살인사건'. 범인은 유동필이었고 자수하고 혐의를 인정하며 반성한 점을 참작받아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진실은...[6]
4.1. 낚시
가평군 지역 주민들이 많이 낚시를 즐기는 장소이며 특히 견지 낚시를 체험할 수 있다. 낚시 도구도 무료로 대여가 가능하나 분실 시 변상해야 한다.[1] 한국수자원공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다.[2] 청평·보성강댐 방류량산정 개선을 위한 수리모형 실험연구[3] 1840년에 설립된 카자마건설(鹿島建設)로 현재 도쿄증권거래소 1부에 상장되어 있다.[4] 해방 당시 수력발전소는 대부분 북한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수력발전량은 북한의 4% 수준에 불과했다.[5] 출처 http://encykorea.aks.ac.kr/[6] 김미숙은 그 날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헤라팰리스에서 주단태에 의해 살해당했고 목격자였던 유동필은 주단태로부터 거액의 돈과 헤라팰리스 4503호를 제공받는 대가로 대신 징역살이를 해 2022년 08월 출소했다. 이로 인해 김미숙은 2022년 11월 유동필이 다시 헤라팰리스 분수대를 파괴하기 전까지 6년 동안 사망한 채 미라 상태로 유기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