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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왕후(드라마)/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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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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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잘 반영된 부분3. 시대 재현 오류
3.1. 편집 시 주의사항3.2. 전체3.3. 1회3.4. 2회3.5. 3회3.6. 4회3.7. 5회3.8. 6회3.9. 7회3.10. 8회3.11. 9회3.12. 10회3.13. 11회3.14. 12회3.15. 13회3.16. 14회3.17. 15회3.18. 16회3.19. 17회3.20. 18회3.21. 19회3.22. 20회

1. 개요

tvN 토일 드라마 <철인왕후>의 고증을 다루는 문서.

2. 잘 반영된 부분

고증이 잘 된 부분은 아래와 같다.
기타 극중 설정에 대한 내용은 철인왕후(드라마)/설정 문서의 해당 문단 참조 바람.

3. 시대 재현 오류

3.1. 편집 시 주의사항

3.2. 전체

후궁인 조화진 역시도 중전인 김소용한테 너무 버릇이 없고, 대놓고 무시하기도 한다. 비록 으르렁대고 가문끼리도 사이가 좋지 않지만, 조화진은 엄연히 일개 후궁이고 김소용은 국모이자 내명부의 수장인 중전이다. 아무리 총애받는 후궁이라도 중전의 지위는 넘사벽이다. 심지어 김소용은 같은 안송 김씨이자 왕실의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순원왕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있다. 김소용이 이에 대해 문제삼지 않아서 그렇지, 알려지면 폐서인 직행이다.[10] 게다가 다른 후궁들이 보는 앞에서 머리에 활을[11] 쏘고 나중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연회에 참석했다.
김병인 또한 대놓고 철종을 감시하거나 왕의 면전에서 칼을 뽑는 듯 지나치게 선을 넘는 행동을 많이 한다. 하기 내용 참조.

3.3. 1회

3.4. 2회

3.5. 3회

3.6. 4회

3.7. 5회

3.8. 6회

3.9. 7회

사실성에 대한 판단}}} 김병인이 휘하 병력을 이끌고 대조전 안까지 들어가고, 왕 앞에서 칼까지 뽑았다. 극중의 긴장감을 높이고 철인왕후를 둘러싼 양자 간의 갈등을 높이려는 심산에서 연출한 장면이겠지만, 현실이었다면 김병인 자신과 휘하 병력은 죄다 능지형에 안동 김씨 가문은 풍비박산 났을 것이고 삼사에서는 일문 전체를 능지하고 그 죄상을 고묘할 것을 대조전 앞에서 엎드려 주청했을 것이다. 또한 대조전 안까지 역적들이 들어오고 왕이 직접 칼까지 뽑은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내금위와 겸사복을 비롯한 금군의 수장들과 그 날의 숙위를 맡은 이들은 최소 유배형에 처해졌을 것이며 오군문도 무사치 못했을 것이다. 비변사와 6조를 비롯한 내각은 전원 총사퇴하고 이런 참람한 일을 '막지 못한 죄'를 이유로 벌을 내려 달라고 대죄했을 것이다.[28]핍진성(극중 설정)에 대한 판단}}} 이 드라마 방영기간 내내 김병인 캐릭터에 대해서 불편하다는 시선과 함께 큰 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이는 작가가 스토리텔러로서 시청자에 대한 설득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얘기일 수 있으므로 고스란히 그 비판을 작가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다. 다만 후술할 문단을 포함하여 김병인이 '지나친 행동'을 하게 된 이유는 다음과 같다.

3.10. 8회

사실성에 대한 판단}}} 판의금부사 김병인철종에게 요즘 도성에 도둑들이 기성을 부리고 있어서 경비를 더 철저하게 해야 하는데 그걸 막으신다면 혹 주상이 용돈벌이를 하고 있는게 아니냐고 말한다. 조선이 사유재산을 인정하지만 원론적으로는 왕토사상을 기반으로 조선의 왕이란 조선 땅의 모든 것이 명목상 임금의 것이라 자기 것을 자기가 취하는 게 됨으로 성립이 불가능하다. 임금이 절도 혹은 뇌물을 받는 거 아니냐라는 말은 곧 모든 게 왕의 소유인데 이게 왕의 소유가 아니라고 말하는 꼴이니 역모에 해당한다.[30] 바로 앞 회차에서 대조전에서 칼을 들이댄 것만큼 큰 문제인것.핍진성(극중 설정)에 대한 판단}}} '7화' 문단의 맥락과 연결된다. 이 용돈벌이 발언은 김병인이 거듭된 수사 끝에 철종 무리가 김문근 집안 창고를 며칠 전에 털었던 사실[31]을 확인하고 슬쩍 던진 발언이다. 철종의 입장에서는 김병인이 수사망을 좁혀오고 있다는 걸 이미 눈치 챈 상태에서 그가 얼마나 많은 증거를 확보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용돈벌이 발언이 무례하다는 이유만으로 역모를 운운하며 큰 죄로 다스린다거나 할 상황이 아니다. 섣불리 문제 삼았다가는 안송 김씨 세력이 '그동안 철종이 벌인 위험한 행동들'을 빌미로 폐위시킬 수도 있다.

3.11. 9회

3.12. 10회

3.13. 11회

3.14. 12회

3.15. 13회

3.16. 14회

3.17. 15회

3.18. 16회

3.19. 17회

3.20. 18회

3.21. 19회

3.22. 20회



[1] 마님, 마마님 모두 가능.[2] 삼간택은 광해군 대에서부터 기록에 등장한다.[3] 예를 들어 12화에서 초청숙수 이생망으로 가장하여 수랏간에 등장한 김소용이 "공식적으로 마마께선 연회장에 계신 게 맞잖아?"라는 식으로 선을 그어서 소용인 줄 눈치 챈 만복이 예의없이 말을 툭툭 놓고 "같은 숙수끼리 놈놈 소리도 못 하냐?"라고 큰소리 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어의가 눈치 없이 "이놈"이라며 선 넘을 때 알아서 제지하기도 했고, 김소용은 실은 조리가 더 급한 터라 더는 그 일에 크게 문제 삼지도 않았다. 이게 해당 작품의 세계관에서 허용되는 개연성인 '핍진성'이다.[4] 또한 극중 김소용의 나이는 실제 역사에서의 10대 나이가 아니라 20대 초반 정도에 중전으로 간택되는데, 당시 수명이나 노산을 생각하면 현실에 맞지 않다. 이때 극의 전개에 크게 지장을 주는 경우가 아닌 한 '아~ 이 드라마는 그 나이대에 중전으로 간택되어도 문제없는 세계관이구나'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핍진성'의 일환이다.[5] 영혼은 장봉환이지만 주변 인물들에겐 일단 김소용이다.[6] 태국에서는 왕족의 몸에 손대면 사형감이었는데, 이 때문에 공주가 물에 빠졌을 때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결국 공주가 익사한 후에야 법을 바꿨다.[7] 참고로 윤씨가 성종의 얼굴을 할퀴어 손톱 자국을 냈다는 이야기가 유명하기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야사다.[8] 다만 아무리 세도정치 시기라도 선을 넘는 행위는 용납되지 못한다. 이는 헌종 시기 왕의 면전에서 안경을 쓰는 무례를 저지른 조병구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9] 사실 세도정치가라면 오히려 외형적으로는 왕의 권위를 살려야 한다. (물론 실질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선 허수아비지만) 세도정치의 원리 자체가 왕의 권위를 등에 업고 왕의 이름을 빌려서 자신의 마음대로 나라를 뒤흔드는 것이다. 즉, "왕의 권위" 자체가 없다면 세도정치가의 권력 자체가 힘을 잃는다. 만약 저런 식으로 왕을 대놓고 무시하는 상태라면 왕의 이름을 빌려봐야 쓸모가 없는 상태, 즉 사실상 왕조 자체가 무너지기 직전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어명으로 네놈을 처단하노라!"라고 하는데 왕의 권위가 없다면 무슨 의미겠는가? 즉, 허수아비 왕을 내세운 세도정치가라면 실질적으론 자기 마음대로 해도 최소한 겉보기에는 왕이 절대적인 존재처럼 보이게 해야한다. 그래야 그 절대적인 존재를 조종하는 자신의 힘이 지켜지니까.[10] 실제 역사에서도 왕의 총애를 믿고 기고만장하게 굴었다가 벌을 받는 후궁들이 수두룩했다. 대표적으로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가 있다.[11] 활촉이 없는 화살이다.[12]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되는 철종 2년(1851년)까지 순원왕후가 받은 존호는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선휘(明敬文仁光聖隆禧正烈)이다. 이중 '명경'은 왕비 시절 존호, '문인광성융희'는 헌종 임금이 올린 존호, '정렬'은 철종이 재위 2년까지 올린 존호이다. 따라서 철종 2년(1851년) 당시의 순원왕후의 정식 칭호는 '명경문인광성융희정렬 대왕대비 전하'였다.[13] 오주연문장전산고에 기록되어 있다.[14] 궁녀들은 개구리 첩지를 알맞게 하고 나온다.[15] 배씨댕기는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여아들이 댕기머리를 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카락 길이가 짧아서 하는 것이다. 첩지가 실제로 고증된 것과 지나치게 벗어나 배씨댕기인지 첩지인지도 구분이 안가는 물건으로 나온다.[16] 1861년, 철종의 나이 31세 때에 그려졌다.[17] 실제로 삼간택, 택일, 납채(納采)/비씨제 수납채(妃氏第受納采), 납징(納徵)/비씨제 수납징(妃氏第受納徵), 고기(告期)/비씨제 수고기(妃氏第受告期), 책비(冊妃)/비수책(妃受冊), 별궁친영(別宮親迎)[60], 동뢰(同牢), 왕비조왕대비(王妃朝王大妃), 왕비 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 전하 회백관(殿下會百官), 왕비 수외명부 조회(王妃受外命婦朝會)의 절차를 거친다.[18] 역사상 철종과 철인왕후의 실제 가례는 삼간택부터 왕대비의 조현례까지 35일이 걸렸다.[19] 또는 합근례(合巹禮)[20] 백관이 중전을 배알하는 것은 왕비 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절차에서 이뤄지며 "천천세수(千千歲壽)를 올립니다."라고 일제히 외치는 것은 전하 회백관(는下會百官)/왕비 수외명부 조회(王妃受外命婦朝會) 절차에서 이뤄진다.[21] 흉례 의식 중 사위(嗣位)[61] 절차에서는 문무백관이 산호(山呼) 구령에 천세(千歲), 재산호(再山呼) 구령에 천천세(千千歲)를 외친다.[22] 환산하면 1997리터이다.[23] 이중 60% 가량은 등잔에 쓸 기름이다.[후속회차] 6화에서 임명할 때 정확하게 "종1품 판의금부사"라고 칭한 것으로 보아 김병인은 판의금부사가 맞고 편의상 의금부장이라 불렀다고 보는 게 타당할 듯.[25] 현대 대한민국으로 따지면 판의금부사라는 자리는 5공 시절의 안기부장(!)과 동일한 자리이다. 안기부장 자리는 민주화 이후인 문민정부 시절까지도 대통령, 총리에 이은 행정부 내 권력 서열 3위로 꼽히던 요직이자 4대 권력 기관장들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권력을 자랑했다.[26]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비슷한 예시로 세조의 조카인 구성군은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1년만에 낙하산으로 병조판서가 된 후 다시 1년 후 영의정이 되었다. 하지만 구성군은 아직 질서가 잡히지 않은 조선초의 왕족이었고, 세도정치기에 접어들면 세도가 자제들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과거급제는 한 후에 단계별 고속승진을 거치는 식으로 했지 이런 낙하산은 안했다.[27] 다만 김소용의 침전인 대조전이나 대비가 아지트처럼 사용하는 선원전 등은 모두 창덕궁의 전각이므로 극중 배경은 창덕궁이 맞다.[28] 임금은 곧 부모라고 하였다. 제아무리 극중에서 철종이 허수아비 임금이라고는 하나 작중에서 김병인의 행위는 엄연히 부모에게 칼을 들이민 것이나 다름없을 패륜적인 행태이다.[29] 이 장면은 본편에서 방영되면 좋았을 장면이었지만, 결국 종영 뒤에서야 공개된 터라 방영 2개월동안 붕뜬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19화에서 김소용을 살수로부터 지키려고 하다가 사망한 이후에야 불평이 어느정도 사그라들었다.[30] 출처: 인문채널 휴 hue 뇌물의 역사편 임용한 박사님[31] 해당 장면은 2화 참조.[32] 삼간택에 최종 낙점되는 것[33] 책비(冊妃)[34] 비수책(妃受冊)[35] 심지어는 집주인 일가인 중전과 부원군조차 모르게.[36] 윗전의 허락을 받아야 겨우 나갈 수 있는데, 대왕대비가 허락했을 리가 만무하다.[37] 겸양하거나 자책할 때[38] 조선은 왕의 묘호와 XX왕후(后)라는 시호를 썼으며, 왕과 왕후의 무덤에 능(陵)이라는 명칭을 쓰고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가 하면 황제국에서나 쓰는 후궁등의 용어를 사용하다 청나라에 들켜 사신이 혼나는 등 제후국의 예를 다 지킨 것은 아니었다.[39] 영조 시기 짐(朕)이란 표현을 썼다고 한다. 영조가 직접 구술하여 지은 어제사도세자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에 "... 오호라 이는 누구의 허물인고 하니 이 교도를하지 못한 소치일진데 어찌 너에게 허물이 있겠는가? .... 이것은 신하가 대신 쓰는 것은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적게 하여 의 30년 의를 밝힌 것이니…"라고 적혀있다.[40] 실제로 정조/순조시기 일성록에는 여(予)를 사용했다.[41] 예를 들어 후궁은 내명부 정1품부터 종4품까지의 품계를 가지며, 왕비의 모친은 부부인으로서 외명부 정1품의 지위를 갖게 된다. 품계를 초월한 이들도 있었다. 왕비왕세자빈은 내명부 무계, 공주와 옹주는 외명부 무계로 급을 따질 수 없는 고귀한 신분이었다. 내명부가 외명부보다 높게 여겨지며 왕비가 내·외명부의 수장이 된다.[42] 작중 인물을 기준으로 보면 대왕대비 김씨, 왕대비 조씨, 왕비 김씨가 내명부 무계, 의빈 조씨가 내명부 정1품이다. 등장하지는 않았으나 김좌근이 정2품 훈련대장이니 김좌근 부인은 외명부 정2품 정부인이 된다.[43] 사실 사약은 왕족이나 사대부 등이 정치적인 이유로 피치 못해 사형을 당할 경우 죽는 이의 명예를 존중한다는 뜻에서 왕이 하사하는 것으로 사약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극히 제한적이였다. 이는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에서 부모가 물려준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을 최악의 불효로 여겼기 때문에 몸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인 사약은 그만큼 죽는 이의 명예를 존중하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약이라는 이름도 단순히 죽이는 약(死藥)이 아니라 임금이 하사하는 약(賜藥)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44] 다만 실권 자체는 병조판서가 훨씬 막강했다. 무관들의 인사권과 병권을 쥐고 있기 때문. 이는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해서 국방장관이 장관들 중에서 유독 입김이 센 편이다.[45] 물론 이러한 형벌 자체는 궁형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긴 했으나 조선에서는 너무 잔인하다는 이유로 행해지지 않았고 주로 명나라, 청나라 때에 준가르, 할하 몽골 등의 반란이 일어났을 경우 해당 민족을 말살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46] 시대상 신분을 통해서 법을 무시하는 건 흔한 일이니 내시로는 못 만들어도 죽이는 건 별로 어렵지 않다.[47] 이는 궁형이 빈번하게 행해졌던 명나라나 청나라 역시 어전회의나 재판절차 정도는 밟고 진행했다.물론 너무 옛날이라 그렇지 안 그런 사례도 있긴 하다.[48] 대표적으로 국왕이 군부의 인사를 좌지우지하고 쿠데타를 조장해서 내각을 뒤엎어버린 태국이라는 사례가 있다.[49] 이를 곡좌의 예법이라고 하는데, 영조와 귀인 조씨의 친딸 화유옹주혜경궁 홍씨와 나란히 앉자 인원왕후가 엄히 혼낸 적이 있었다. 혜경궁은 왕세자빈으로 내명부 무품이고, 옹주외명부 무품이니 세자빈이 상석에 앉아야 한다.[50] 헌종의 사망 역사기록[51] 이원범을 후계로 정한다는 역사기록[52] 3일만에 즉위한 역사기록[53] 대왕대비 또는 중전[54] 흉례 의식(凶禮儀式)은 고명(顧命), 초종(初終), 부(復), 역복불식(易服不食), 계령(戒令), 목욕(沐浴), 습(襲), 전(奠), 위위곡(爲位哭), 거림(擧臨), 함(含), 설빙(設冰), 영좌(靈座), 명정(銘旌), 고사묘(告社廟), 소렴(小斂), 전(奠), 치비(治椑), 대렴(大斂), 전(奠), 성빈(成殯), 전(奠), 여차(廬次), 성복(成服), 복제(服制), 사위(嗣位), 반교서(頒敎書) 등의 절차를 거쳤다. 5일동안 시신을 목욕하고 염습을 마치고 시신을 얼음으로 보존하는 등의 절차를 거친 후에 즉위식을 하고 즉위 교서를 반포한다.##[55] 현재의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일대[56] 다만 임의적으로 지역을 구분하기 위해 동도와 서도로 구분하기는 했으나 행정구역이 정확히 나뉜 것은 아니었다.[57] M1 개런드에서 발사된 .30-06 Springfield 7.62×63mm 탄은 무려 저격총분대지원화기에 쓰인다! 총구에너지는 150그레인(10g) 탄두 기준 3820J에 달하는 엄청난 고위력탄이다. 아무리 장봉환이 신지식을 이용해 만들었다고 해도 조선시대 기술의 방탄복으로 막을 위력이 아니다. NIJ 인증 기준으로 최고등급인 레벨 4 방탄복이 필요하다.[58] 대행왕의 승하로 귈위된 왕위에 오르는 것[59] 그라 소총이나 게베어 1871 둘다 대한제국군에서 운용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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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조선전기 명사봉영(命使奉迎)이었으나 조선후기 들어 별궁친영(別宮親迎)으로 바뀐다.[61] 즉위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