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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colcolor=#fff> 중화민국 CC단 총수 천궈푸 陳果夫 | |
출생 | 1892년 10월 27일 |
청나라 절강성 호주부 (現 저장성 후저우시 우싱구) | |
사망 | 1951년 8월 25일 (향년 58세) |
중화민국 타이베이 | |
본명 | 천쭈다오(陳祖燾, 진조도) |
정체 | 陳果夫 |
간체 | 陈果夫 |
한국식 독음 | 진과부 |
영문 | Chen Guofu |
자 | 과부(果夫)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중화민국(대만) |
학력 | 육군강무학교 및 황푸군관학교 |
직업 | 군인, 정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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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인, 정치가로 본명은 천쭈다오.2. 생애
1892년 저장성 후저우시에서 태어았다. 신해혁명 당시 삼촌 천치메이와 함께 봉기에 참가했으나 이 과정에서 폐결핵을 앓아 평생을 요양하면서 지내야했다.이후 계축전쟁에서 천치메이와 함께 상하이 제조창 공격에 참가했으며, 천치메이의 사망 이후에는 그의 측근이었던 장제스의 도움을 받았다. 이후 육군강무학교와 황푸군관학교를 마친 후, 중국국민당의 군대인 국민혁명군에 복무하며 국공내전, 중일전쟁에 참전했다. 주요 경력으로는 중화민국 중앙평의회 중앙위원 등이 있다.
1947년 저우포하이의 감형을 요구하는 편지를 장제스에게 보냈으며 국부천대 이후 1951년 병사했다.
한편, 생전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는데, 1912년 상하이에서 신규식이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인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에 쑹자오런·천치메이·후한민 등과 함께 참여하여 활동하였으며 1919년 이후 중국 국민당의 지도급 인사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하고, 임정 요인들의 신변 보호에 힘쓰는 등 한국독립운동에 꾸준히 협조하였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 직후 장제스와 김구의 면담을 주선하여, 한국 독립군 간부 양성을 위한 남경중앙군관학교 한인반을 특설하여 이후 한인을 입학시키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또 1940년 충칭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할 수 있도록 주선하였고, 1942년 충칭에서 열린 중한문화협회 창립대회에서 이승만 등과 함께 명예이사로 추대되었다. 이후 1945년 8.15 광복 때까지 지속적으로 임시정부의 활동자금을 지원하였다.천궈푸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