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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6 09:01:55

직접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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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의 직접민주주의3. 직접민주주의의 단점4. 현대의 직접민주주의 혹은 그러한 요소들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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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Direct Democracy

모든 참정권을 가진 시민이 직접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형태의 민주주의 정체를 이르는 말이다.

2. 고대의 직접민주주의

우리의 정치체제는 이웃나라의 관행과 전혀 다릅니다. 남의 것을 본뜬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남들이 우리의 체제를 본뜹니다. 몇몇 사람이 통치의 책임을 맡는 게 아니라 모두 골고루 나누어 맡으므로, 이를 데모크라티아(민주주의)라고 부릅니다. 개인끼리 다툼이 있으면 모두에게 평등한 법으로 해결하며, 출신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에 따라 공직자를 선출합니다. 이 나라에 뭔가 기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가난하다고 해서 인생을 헛되이 살고 끝나는 일이 없습니다. 실로 우리는 전 헬라스의 모범입니다.
기원전 431년 페리클레스전몰자 추도 연설 중에서
고대 그리스, 고대 로마의 민회 등 고대 사회에서 민주주의 정치는 대부분 직접 민주주의에 가까운 정치 행태였다. 그러나 시민권 자체가 제한되어 있기도 했고[1], 규모도 작았다. 결국 한계를 보여 그리스고 로마고 다른 정치 방식으로 전환되었다.[2] 그래서 사실 그리스나 로마나 완벽한 의미의 직접민주제를 실시한 것은 아니다.

고대 직접민주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3. 직접민주주의의 단점

직접민주주의는 시민 개개인의 참정의식이 갖춰져야 이루어질 수 있는 체제이기에 시민들이 정치에 대한 의식을 갖지 못하면 고대 그리스 민주정에서 그랬듯 중우정치정치적 무관심으로 인한 행정공백 혹은 정치혼란이 생기기 쉽다. 또한, 집단이 커질수록 전체 의견을 고루 반영하기 어려워진다는 단점이 있다.

가장 극단적으로 다수의 국민들이 민주주의적 절차로 반민주주의를 지지한다면 차후 정책 역시 반민주적인 정책이 국가에 반영된다는 문제점 역시 안고 있다.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가 선거를 통해 당선되어 나치 독일을 만들었다는 내용은 직접민주주의를 비판하는데 자주 인용되고 민주집중제가 이런 식으로 일당독재국가의 기틀을 닦기도 했으며, 종교 이슬람 자체나 성전 샤리아가 기본 질서처럼 신봉되는 중동의 국가들 중 드물게 세속민주주의 국가였던 튀르키예에르도안의 신오스만주의와 함께 직접민주주의를 등에 업고 독재에 가까운 개헌을 하는 사례도 있고, 나폴레옹 3세[3]무아마르 카다피는 직접민주주의를 독재의 도구로 사용했다. 이를 막기 위해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새 헌법은 국민투표에 부쳐져 국민의 찬성을 얻도록 되어있었다. 그는 국민에게 "헌법은 국민이 선출한 국가원수는 국민에게 책임을 진다고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가원수는 중대한 문제에 관하여 주권자인 국민의 판단에 호소할 권리가 있다. 국민은 국가원수에 대한 신임을 계속할 수도 있고 철회할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논리로 그는 국민투표라는 방식을 이용하여, 국민대표 기관인 의회를 누르고 내각이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게 하여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국민투표란 근대 민주주의의 중요한 특색인 간접민주주의를 짓밟는 제도로서, 이것은 보나파르티슴의 창작 중 최고의 걸작이었다.
1851년 12월 국민투표는 찬성이 748만 1,000표였고 반대가 64만 7,000표였다. 프랑스의 주권자인 국민은 압도적으로 샤를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를 승인하였다.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1789-1871>, 노명식
즉 직접민주주의는 국민주권이라는 민주정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기는 하지만,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의 관계를 "원래는 직접민주주의가 우월하지만 인구가 너무 많으니 어쩔 수 없이 간접민주주의를 한다"라는 식으로만 막연하게 이해해서는 안된다. 인터넷과 보안이 발달한 현대에는 직접민주주의를 하고자 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다. 정부에서 법안 투표 전용 보안 블랙베리를 제작하여 모든 유권자에게 1인당 1개씩 나눠주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큰 비용이 들지 않는다. 다른 목적으로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가정할 경우 약 3천만대의 대량생산이므로 대당 10만원이면 만들 수 있다고 하자. 총 3조원의 비용인데, 한국의 1년 예산이 500조가 약간 안되므로 1회성 비용이니까 충분히 감당할만 하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제대로 된 정치가 이뤄질까? 일단 토론을 통한 의견 제시는 불가능하다. 3천만명이 토론을 진행하는 것은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불가능하다. 그리고 관련 정보를 충분히 얻고 생각한 다음 투표를 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돈받으면서 전문적으로 입법만 하는 현직 의원들도 상당수의 법안을 거수기로 통과시키는데, 최소 하루 8시간씩 생업에 종사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 긴 법안을 읽을 시간과 의지가 있을리가 없다. 즉, 정부 행정의 정치화가 훨씬 심각해지고, 지지하는 정당 수뇌부의 결정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해질 것이다. 특히 점점 법안의 길이가 길어지는 현 추세를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분명히 민주정은 한자어로든 그리스어로든 국민의 주권을 전제하지만, 주권자가 국민이라는 것과 주권자가 어디까지 정치에 관여할 수 있는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전근대의 전제군주정의 군주가 주권자로 이해되었다고 한들, 실제 정치에서는 관료를 등용하고 왕권을 제한한 것처럼 말이다. 관료들의 실무 능력이 군주보다 좋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왕권의 한계를 정해놓는 것이 군주의 주권 자체를 부정하는게 아니듯, 여론의 오판 가능성을 지적하고 간접민주주의로 보완하는 것이 민주정의 지향점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즉 전근대로 비유하자면 직접민주주의와 간접민주주의는 절대군주정이냐 제한군주정이냐의 문제이지, 둘 다 군주(국민)의 주권을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4]

직접민주주의의 단점을 대표하는 사례 둘이 고대 아테네에서 나왔는데 아르기누사이 해전 장군들의 재판과 소크라테스 사형 재판이다. 물론 이런저런 반론도 제기되지만, 두 사례 모두 순간의 선동과 감정적인 여론으로 인해 조금만 더 생각해봤다면 정의롭지도 이롭지도 못하다는 것을 알았을 판결을 내린 경우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플라톤은 스승의 부당한 죽음을 겪고 스파르타 과두정을 찬양하며 자기 저작에서 왜 다른 전문 직업들과는 달리 정치만큼은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 모두가 참여하려 하냐고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이는 옳고 그름의 전문가인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철인정치로 이어졌지만 이런 엘리트주의가 현실적으로 참주 독재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은 당대부터 비판받았고 플라톤 본인도 말년에는 엘리트도 민중도 아닌 현명하게 만들어진 법을 통한 통치를 주장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플라톤의 철인정치 주장은 이미 반박당한지 오래지만 그의 문제의식은 현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어느정도 수용되어 직업 정치인을 통해 대중의 의견을 한단계 거쳐서 전달하는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게 되었고 사법재판의 경우 판사검사등을 두면서 엘리트주의적 요소를 강하게 채택했다. 법치주의의 경우, 큰 반박 없이 거의 그대로 수용되어 아테네처럼 배심원 표결로 모든 판결을 내리지 않고 정치 지도자와 민중 모두 성문법을 준수하는 시스템이 정착하였다.

현대에도 대중의 판단에 의존하는 국민투표의 허점이 드러난 사건이 하나 있었다. 바로 영국브렉시트 찬반투표인데, 영국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잉글랜드 일반 국민들 입장에선 불법 이민자나 난민 문제는 크게 다가왔으나 유럽연합을 통해 얻는 경제적 이득이나 벨파스트 협정, 스코틀랜드 독립운동 문제 등 복잡한 사안은 브렉시트가 실현되기 전까지 간과되어 직접민주주의의 단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여러 선동과 정치 운동들 때문에 올바른 정보가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영향도 있었다.

참정의식은 있으나 직접민주주의에 필요한 교양이 없는 상태로 군중들이 폭주하게 된 문화대혁명의 사례도 존재한다.[5]

한편으론, 직접민주주의를 규모가 큰 국가에 적용하기 힘들다는 점을 보완하기 위해 민주집중제, 자마히리야와 같은 대안이 등장한 바 있으나 이들은 직접민주주의적 성질이 대의민주정보다 훨신 약화되어 권위주의 독재의 하부 기관으로 전락한 바 있다. 현실적으로 결정과 이를 강제할 권력이 필요하다는 점은 중앙의 상부 기관을 강화시켰고 상향식 의사결정보다는 중앙의 결정에 복종이 더욱 강조되었다. 체제의 직접민주주의적 이상은 '이미 시스템이 인민을 대변하고 있는데 독자적인 조직 결성은 분파주의 반동에 불과한다'는 식으로 자유노조를 비롯한 독자적인 중앙 견제 시도를 방해하는 핑계가 되었다. 그 결과, 이러한 제도들을 채택한 공산권 국가들이나 카다피 정권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과두정 혹은 1인독재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직접민주주의를 간접민주주의의 상위호환으로서 단순히 인구수 문제로 실현하지 못하는 이상향이라고 생각하는 일반대중의 상식은 굉장한 문제가 있다. 직접민주제의 시행 결과는 여러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왔으며, 직접민주제의 실행 결과 숫자가 많지만 사회적 영향력이 약했던 여성은 우대받는 경향이 있었지만, 숫자도 적고 사회적 영향력도 약한 동성애자의 권익은 오히려 저해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현행 법치와 대의민주정은 인구수 문제 뿐만이 아니라 직접민주정의 근본적인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엘리트주의의 장점과도 타협한 제도이다. 법치주의를 중시하는 사상을 지닌 논자들은 '다수의 횡포'를 불러올 가능성이 높은 직접민주주의나 숙의민주주의 등에 대해 시큰둥하거나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

4. 현대의 직접민주주의 혹은 그러한 요소들

대한민국헌법 제1조
제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제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현대의 직접민주주의는 소수의 저인구 국가[6], 최하 단계의 지방자치단체에서 주로 나타나며, 독일 좌파당등 전체적인 실행을 주장하는 경우도 많다.

그 외에도 간접민주주의 정치를 실시하되 이를 보완하는 성격으로 곁들여지는 경우도 많다. 대표적으로 국민투표, 국민발안, 국민소환의 개념을 들 수 있다.

한국에서 국민투표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으나, 국민발안이나 국민소환은 헌법에 근거가 없으므로 개헌 없이 이러한 제도를 도입할 수 있는지 논란이 있다. 다만 헌법기관이 아닌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지방자치단체 주민의 권리로 규정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지방자치법에는 주민투표권과 주민의 조례제정·개폐청구권(주민발안제), 그리고 지방자치단체장·지방의회의원에 대한 주민소환제를 두고 있다.

위와 같이 현대 민주국가에서는 대부분 간접 민주정치를 기본체계로 채택하면서도 이를 보완하기 위해 직접민주정치의 방법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를 혼합민주주의라고 하기도 한다.[8] 또 21세기 들어 인터넷이나 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국민의 의사를 대변하고 의견을 결집시켜 위정자들에게 전달 할 수 있는 통로가 이전보다 더 개방된 상태이므로 갈수록 직접민주주의의 영역이 확대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9] 한국의 경우 전자기술 하나는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끝내주다 보니, 한국의 정치학계나 행정학계에서는 이런 전자정부 시스템을 이용한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에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들도 많다.

일본은 일부 낙도 한정으로 실시하고 있다. 일본의 인구가 급속하게 감소하면서 고령층이 남게 되면서 지방자치제의 대안으로 직접민주주의가 떠오르고 있다.#

대만은 2017년에 국민투표법을 전면 개정하였는데, 서명 25만 명을 넘으면 국민투표를 치르는 권리를 가지된 셈이다. 그래서 완전한 직접민주주의는 아니지만 일종의 직접민주주의를 가지게 된 셈이다.

스위스는 연방의 국민투표를 1년에 4 ~ 5번까지 실시한다. 칸톤으로 들어가면 현재 2개의 칸톤(아펜첼이너로덴, 글라루스)을 제외하고 칸톤 의회에서 처리한다. 1년에 한 번 개최되어 투표권을 가진 주민들이 전부 모여서 다수결의 원칙을 거수로 결정한다. 이를 란츠게마인데(Landsgemeinde)라고 불린다. 란츠게마인데에서 나온 의견 중에는 연방 의회에서 법률로 가져와서 가결하기도 한다.

그 옆의 리히텐슈타인은 1 ~ 2년 안에 1번 국민투표를 하는 방식으로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하기도 한다.

무아마르 카다피 치하의 리비아 아랍 자마히리야자마히리야라는 고도로 발달된 직접 민주주의를 시행했으며, 자원과 재화의 분배도 잘 이루어졌다. 그러나, 당시 지배자인 무아마르 카다피는 아무런 직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을 장악하고 독재정치를 펴는 등의 모순이 일어났고, 카다피 자신의 권력이 불안정해지자, 국가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내전이 발생했다. 리비아는 이 혼란을 대략 수습하는데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남아메리카의 나라인 우루과이 역시도 스위스의 정치체제를 본떠서 1950년대에 대통령이 다스리는 대통령제를 없애고 9명의 집정협의회가 다스리는 정부 국가평의회 제도를 실시해 직접민주주의 정치와 가까운 합의 정치 체제로 개헌하여 이를 시행한 바 있었다. 그러나 정치권의 결속력 약화와 정부 국가평의회의 부패 등 여러가지 정치적 문제들이 발생하면서[10] 시행한지 약 13년도 못 되어 1967년에 이 정치 체제는 폐지되고, 다시 이전의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하고 말았다.

그 외에도 로자바아나키즘적 공동체를 추구했던 이들[11]은 이 직접민주주의를 원칙으로써 사회를 재구성하길 선호하였고 실제로도 지방마다 코뮌을 둔 지방자치적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였다.

문화대혁명이 단순히 거대한 반달리즘일 뿐이라는 편견 및 고정관념이 있지만, 실제로는 준비되지 않은 채로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했을 때 터질 수 있었던 최악의 혼란상이었다는 것에 가깝다. 문혁 초기의 조반파는 마오주의를 배반한 공산당과 마오쩌둥의 부패, 비리, 반민주주의적 관료독재 체제를 비판하며 그들이 독점한 권력을 대중에게 다시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력이었고, 마오쩌둥은 이 조반파를 군사적으로 밀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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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아테네를 현대 민주주의에 비기기에는 유권자의 비율이 낮은 편이었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인구는 10만 명 이상이었으나 시민 계층은 2만 명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하층 시민들은 먹고 사는 데 바쁘거나 정치에 무관심했다. 그리고 시민 이외의 계층은 절대 다수가 노예였고, 직접 민주주의 체제가 다수 노예의 생산으로 지탱되었다는 점을 보면 차라리 근대의 부르주아적인 간접 민주 정치와 흡사하다. 그렇지만 아테네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해군 노잡이로 병역의 의무를 수행한 무산자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이를 위한 정치 참여시 보수 제공 등의 제도 마련이었음을 고려한다면 마냥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보기에도 무리가 따른다.[2] 그리스에 비하면 로마는 상당히 대의제에 가깝다.[3] 나폴레옹 3세 식의 국민투표를 통한 장기집권 방식은 이후 여러 독재자들이 이용하며 플레비사이트(Plebiscite)라는 전용 지칭 표현까지 존재한다. 한국사에서는 박정희제4차 국민투표가 대표적인 플레비사이트 행위이다.[4] 직접민주주의와 완전히 동일한 개념은 아니지만, 한나 아렌트장 자크 루소의 '일반 의지' 개념을 절대군주정의 이론적 대체품이라고 해석했다.[5] 문화대혁명을 겪은 중국의 엘리트들은 이후 대중의 정치 참여에 큰 노이로제를 가지게 되며, 천안문 항쟁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현능주의 명목의 과두정 독재를 계속 이어나가게 된다.[6] 사실 스위스 정도말고는 완전한 직접민주주의 국가를 찾아보기 힘들다.[7] 독일아돌프 히틀러의 사례가 대표적인 국민투표의 악용 사례로 꼽힌다.[8] 혼합민주주의는 '참여민주주의' 내지는 '심의민주주의'라는 용어로도 널리 쓰인다.[9] 2011년 아랍의 봄이 이런 경향에 의해 발생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10] 오죽하면 대통령제를 하던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나라들조차도 이 당시 우루과이의 이 정부 국가평의회 제도를 폄하, 비난했을 정도였다.[11] CNT, 마흐노의 우크라이나 자유지구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