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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나다 순. 대표부는 가장 마지막에 기재. 명예영사관은 기재하지 아니함. | }}}}}}}}} |
주한국타이베이대표부 駐韓國台北代表部 | |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49 광화문빌딩 6층 |
업무 시간 | 월~금요일: 오전 9:00~오후 3:30 |
상급기관 | 대만 외교부 |
공관장 | 량광중 (梁光中) |
홈페이지 | 주한국타이베이대표부 홈페이지[1] 주한국타이베이대표부 부산판사처 홈페이지[2] |
Taipei Mission In Korea
駐韓國台北代表部
[clearfix]
1. 개요
주한국타이베이대표부(駐韓國台北代表部)는 대만이 한국에 설치한 대만 외교부 직속 외교공관이자, 사실상 대사관과 동등한 기능을 하는 외교공관이다.서울에 설치된 '주한국타이베이대표부(駐韓國台北代表部)'는 사실상 대만 측 대사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부산에 설치된 '주한국타이베이대표부(駐釜山台北代表部) 부산 판사처'는 총영사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 한국 및 세계 각국에 설치한 대만 외교공관 비교
일단 대만의 외교적 지위로 인해 대사관이라는 명칭을 달지 못 하고, 중화민국이나 대만 대신 타이베이라는 명칭을 달고, 대표부나 판사처라는 명칭을 단다.그렇지만 대표부가 대사관 역할을 하고 판사처가 총영사관 역할을 수행하며 대만 국적의 화교를 포함한 대만인들은 타이베이 대표부나 판사처에서 영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고 타이베이 대표부나 판사처에서 해당 국가의 정부 요인들과 접촉한다.
1992년 단교 이후 이듬해 대표부 교환을 했는데 단교 직전까지 사용하던 대만 대사관은 중국에게 이관되었기에 대사관으로 쓰던 곳으로 다시 입주하지는 못했다.
3. 언어별 명칭 표기 차이
주한국타이베이대표부(駐韓國台北代表部)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언어별로 표기의 차이가 발견된다. 한자 표기 및 중국어 표기 및 영어 표기는 '타이페이 대표부(台北代表部; Taipei Mission in Korea)'로 일원화되어 있지만, 한국어 표기는 '타이페이 대표부' 및 '대만 대표부'가 병행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4. 역사
자세한 내용은 주한청국공사관 문서 참고하십시오.주한국 대만대표부의 역사는 1882년에 조선과 청나라가 체결했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주한청국공사관의 자리는 무위대장(武衛大將) 이경하의 집터였는데, 무위영 소속 군졸들이 주축이 되어 임오군란을 일으켰기에 이에 대한 책임으로 전라도 강진현 고금도로 유배를 떠나게 된 이후 청나라는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그리고는 위안스카이가 이 이경하의 집에 머무르며 조선의 실권자로 군림하게 되면서 당시 대사관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1895년에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청나라의 영향력은 급속히 약화됨과 동시에 이 자리는 영사관으로 격하되었으며,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인해 조선과 청의 외교관계는 끊어졌다.
1912년에 중화민국이 들어서면서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의 외교관계로 경기도 경성부와 평안남도 평양부 등지에 영사관이 설치되었는데 경성부 영사관은 다시 명동에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에는 주일중화민국대사관의 영사였다. 중일전쟁이 한참이던 1940년에는 왕징웨이 정권의 영사관으로 쓰이기도 했다.
1945년 8.15 광복으로 주일중화민국대사관 경성 영사관은 기능이 정지되었고, 1947년에는 이 자리에 중화민국 임시 영사관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8월 13일[3]에 주 서울 중화민국 총영사 류위완(劉馭萬)이 방한해 친서를 전달했고, 중화민국은 한국이 처음으로 외교관계를 맺은 나라였다.
1948년 11월에 이승만 대통령은 특사를 파견하고 난징에 특사관을 설치했다. 그리고 국부천대 시기에 타이베이에 다시 대사관을 설치했다. 1949년 1월 4일 중화민국은 미국에 이어 한국을 국가로 인정하였다. 이로 인해 명동에 있던 중화민국 임시 영사관이 주 대한민국 중화민국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한국 전쟁 시기 피난하는 한국 정부를 따라 대사관도 부산으로 피난하여 구 백제병원 건물에 임시 사무실을 꾸렸다.
냉전 시기 대만과 한국은 외교상 중요한 관계였다. 1971년 UN에서 탈퇴한 후 대만은 사실상 국제 사회에서 고립되었으며, 대만의 가장 큰 우방국 중 하나였던 미국조차 1979년 1월 국교를 단절하고 중국과 수교하였기에 대한민국은 대만의 가장 중요한 수교국이 되었다.
그래서 대만을 방문하는 대한민국 외교 사절들은 대만 현지에서 국빈급 대우를 받았다. 또한 대만 대사가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서방 강대국들과 대사 자격으로 만나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 바로 서울이었기에 대만은 더욱 한국과의 외교관계에 신경을 썼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을 천명하면서 한국-대만 관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국 한국은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수교하면서 대만과는 단교하게 된다. 당시 중국 정부는 하나의 중국 정책의 일환으로 대만과 국교를 끊고 중국과 수교한 나라들은 대만 대사관과 자국 내 대만 재산을 전부 중국 정부에 넘겨줄 것을 요구했었다.
내려가는 청천백일만지홍기. [4]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가 정식으로 맺어지기 일주일 전인 1992년 8월 15일에 한국은 대만 대사를 소환해 비공식적으로 중국과의 수교 사실, 중화민국과의 단교 계획을 밝힌다. 그리고 21일 공식적으로 단교 문서를 전달했다.
당시 한국-대만 관계와는 별개로 재한 화교들은 한국과 중화민국 간 단교에 대해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대사관 철수 당일 단교 반대 시위가 열렸고, 그 후에도, 일부 화교들이 한국을 떠나 중화민국으로 귀국하였다.
국교 단절 후 1년 동안 교류가 없었던 양국은 1993년 7월 서울과 타이베이에 대표부[5]를 설치하며 다시 교류를 시작하였고, 2005년에는 총영사관 급인 사무처를 부산에 설치하였다.
국교 단절 이후 중단되었던 직항 항공편 역시 2004년 재개되었다. 대한민국 외교부는 대표부를 외교부 직할로 두었고, 대만 역시 주한 대만대표부를 민간단체에서 관리하지 않고 외교부 직속으로 두고 있다. 그리고 양국 모두 대표부장에 대사와 동급인 외교관을 배치한다.
5. 공관장
5.1. 청제국 출사 한국흠차대신
- 서수붕(徐壽朋) 1898~1901
- 허태신(許台身) 1901~1904
- 증광전(曾廣銓) 1904~1905[6]
5.2. 주한 중화민국 대사 및 주한대표부 대표
1993년 대표부가 개설된 이래 주한대표부 대표에는 1급 공무원이 파견되었다. 그러다가 2014년부터 대만이 한국에 파견하는 대만 대표의 급이 1급 공무원에서 차관급 정무직 공무원으로 높아졌다.2014년에 파견된 스딩 주한대표부 대표는 이전에 외교부 정무차장을 역임했는데, 이 직위는 한국의 외교부차관에 해당한다. 2018년 교체한 탕뎬원 현 대표 역시 차관급 인사이다.#
대만은 정식 외교관계가 있는 국가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장관급 대사를 보내고, 외교관계가 없는 국가에 대해서 보내는 대표의 최고 등급이 차관급이다. 주미 대만 대표 등도 차관급 인사이다. 한국에도 차관급 대표를 파견함으로써 한국-대만 관계를 강화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이다.
2006년부터는 4년마다 교체되는 것으로 보아 4년 임기로 추정된다.
주한중화민국 대사 | |||
정부 | 대수 | 이름 | 임기 |
장제스 정부 | 초대 | 사오위린(邵毓麟 소육린)[7] | 1949년 1월 4일 ~ 1951년 |
2대 | 왕동위안(王東原 왕동원) | 1951년 ~ 1961년 | |
3대 | 류위완(劉馭萬 유어만) | 1961년 ~ 1964년 | |
4대 | 량쉬자오(梁序昭 양서소) | 1964년 ~ 1967년 | |
5대 | 탕중(唐縱 당종) | 1967년 ~ 1970년 | |
6대 | 뤄잉더(羅英德 나영덕) | 1970년 ~ 1975년 | |
장징궈 정부 | 7대 | 주우쑹(朱撫松 주무송) | 1975년 ~ 1979년 |
8대 | 딩마오스(丁懋時 정무시) | 1979년 ~ 1982년 | |
9대 | 쉐위치(薛毓麒 설육기) | 1981년 ~ 1987년 | |
리덩후이 정부 | 10대 | 저우진(鄒堅 추견) | 1987년 ~ 1990년 |
11대 | 진수지(金樹基 김수기) | 1990년 ~ 1992년 | |
주한대만대표부 대표 | |||
정부 | 대수 | 이름 | 임기 |
리덩후이 정부 | 초대 | 린쭌셴(林尊賢, 임존현)[8] | 1993년 ~ 2001년 |
천수이볜 정부 | 2대 | 리쭝루(李宗儒, 이종유)[9] | 2001년 ~ 2003년 |
3대 | 리짜이팡(李在方, 이재방) | 2003년 ~ 2006년 | |
마잉주 정부 | 4대 | 천융춰(陳永綽, 진영작) | 2006년 ~ 2010년 |
5대 | 량잉빈(梁英斌, 양영빈) | 2010년 ~ 2014년 | |
차이잉원 정부 | 6대 | 스딩(石定, 석정) | 2014년 ~ 2018년 9월 |
7대 | 탕뎬원(唐殿文, 당전문) | 2018년 9월 ~ 2022년 7월 | |
8대 | 량광중(梁光中, 양광중) | 2022년 7월 ~ 현재 |
6. 업무
여타 다른 대만 대표부들처럼 영사 업무 및 교류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다른 국가 대사관들처럼 비자 발급 및 여권 발급, 갱신은 사전예약이 필수이다.[10]6.1. 대만여행증 발급
여타 다른 대만 대표부처럼 이 곳에서도 대만여행증을 발급하고 있다. 대만여행증은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자들이 대만을 관광, 비즈니스 등 방문 하기 위해 필요한 서류이다.대만 정부는 양안관계의 특수성에 근거한 하나의 중국 원칙에 의거해 중국 여권, 홍콩 여권과 마카오 여권을 합법적인 문서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행증을 발급받도륵 하고 있다.
직접 대표부나 판사처를 방문해 신청할 수도 있고 내정부 이민서 사이트에서 온라인 신청을 할 수 있다. 대신 한국에서 신청하는 경우 한국 체류 비자나 한국 영주권을 제출해야 한다.
보통 홍콩 여권, 마카오 여권 소지자들이나 한국에 합법적으로 거주하고 있는 한국 영주권 소지자들의 경우 발급이 쉬우며 관광 비자를 소지하고 있는 중국 여권 소지자인 중국 대륙인의 경우는 더 까다롭게 심사한다.
단수사증은 NT$600(한화 약 24,000원), 복수사증은 NT$1,000(한화 약 40,000원)이다.
7. 부속기관
- 부산 판사처 홈페이지 - 다른 국가들의 총영사관에 해당한다. 관할 지역은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광주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남도, 제주특별자치도이다. 언급되지 않은 나머지 지역은 서울의 대표부가 관할한다.
- 대만관광청 - 서울과 부산에 각각 위치해 있다. 관광, 투자 부문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사무처 역할을 한다.
- 서울사무소: 서울특별시 중구 남대문로10길 9, 경기빌딩 9층(삼각동, 115)
- 부산사무소: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대로 72, 유창빌딩 907호(중앙동4가, 25-2)
8. 관련항목
[1] 위치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대로 149, 광화문빌딩 6층, 관할지역은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경기도, 강원도,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 전라북도, 충청남도, 충청북도이다.[2] 위치는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대로 70, 9층 (중앙동4가, 동원산업빌딩), 관할지역은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남도, 제주특별자치도,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광주광역시, 울산광역시이다.[3] 당시 중화민국이 대륙에 있던 시절이다.[4] 여담으로 가운데 있는동상은 77년에 건립된 장개석 총통의 동상이다[5] 대사관 격[6] 제2차한일협약으로 인한 외교업무 중단[7] 국가승인과 동시에 대사임무 개시[8] 역대 최장 기간 재임[9] 역대 최단 기간 재임[10] 예약 없이도 방문은 가능한데 대기를 오래해야 한다.